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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Feb 03. 2023

샬롯 웰즈, <애프터썬>

태양의 모범

샬롯 웰즈(Charlotte Wells), <애프터썬>(Aftersun) - 태양의 모범    

“서쪽에서 져가는 태양은 세계의 끝으로 시시각각 미끄러져 내려가는 한 방울의 불타는 황금이었다. 그들은 저녁나절이 햇빛과 온기의 마지막을 의미한다는 것을 홀연 깨달았다.” -윌리엄 골딩-

태양은 인류가 탄생한 이래로 결코 멈추지 않고 제 몸을 불사르며, 우리에게 빛과 열을 전해준다. 그리고 태양은 인류가 멸종한 이후에도 계속 제 몸을 불사르고 분유하며 에너지를 태양계에 전해주리라. 하지만 태양도 유한한 끝이 예정되어 있다. 다만 인류는 유한한 태양의 결말을 볼 수 없으리. 그래서 인간에겐 상대적으로 무한하고 절대적인 태양, 이러한 태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에선 절대자의 지위, 일상에서는 가장의 권위 등을 상징하였다. 태양이 없으면 인간은 멸종하듯 한 지도자가 다스리는 국민, 가장이 지배하는 식구들 또한 그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권위를 드높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 지배자의 쇠퇴와 몰락, 굽어가는 가장의 등과 허리를 어느 순간 목격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비추는 빛은 태양처럼 절대적인 확신은 아니지만, 한때 등대 수준은 되었던 확신은 의심으로 뒤바뀌고, 쇠퇴를 거스를 수 없는 그들은 더 이상 불태우고 짜낼 게 없다. 이에 태양의 오후는 밤이 되어가지만, 단 하나인 태양과 달리 인간-태양의 자리는 다른 이가 채워간다. 태양 이후, 거기에는 가장의 자식이 놓여서 빛을 분유하리니. 바로 그 <애프터썬>을 샬롯 웰즈가 연출한다. 1987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태생의 샬롯 웰즈는 영국-스코틀랜드의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적지 않은 단편을 연출해왔으며 <애프터썬>은 그녀의 장편 데뷔작이다. 일단 단편에서 가늠해볼 수 있는 그녀의 색채로, 주인공들은 언제나 여성이다. <화요일>과 <랩스>에선 감독 본인과 용모가 비슷한, 숏컷을 한 톰보이들이 주연이다. 그녀들은 작품 속에서 항상 달아나고 있다. <화요일>에서 주인공은 급박하게 바느질을 마치고 가족들이 모인 부엌을 피해 집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려 시도한다. 이윽고 붙잡히지만 말이다. 또 <랩스>에서는 지상에서 수중으로 잠수 및 수영하고, 이후 다시 지상으로 나와 지하철을 탄다. 그렇게 웰즈의 작품에서는 '기존 공간의 떠낢'이 특징인데, 이는 자유를 위한 도주다.      


<화요일>의 중점은 '발화'다. 가족들도, 그리고 학교의 교사도 무수한 말로 주인공을 닦달한다. 주인공은 자신을 구속하는 말에서 달아나고, 발화하는 주체로부터 등을 돌리며, 즉 <화요일>에서 달아나는 것은 자신을 지배하려는 타인의 족쇄다. <랩스>에서 수영장은 나아가고 싶은 곳이라면, 지하철은 가기 싫지만 집에 돌아가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곳이다. 수영장에서 그녀는 홀로 자유로이 수영한다면, 지하철에서 그녀는 이름 모를 한 불쾌한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그녀는 여성들이 겪는 공포를 겪는 공간에서, 자유롭고 해방된 공간으로 달아나고 싶다. 하지만 이상적인 공간에 오래 머무를 순 없다. <화요일>에서 여성이 오롯이 자유로운 시간 및 공간은 텅 빈 집과 밤이다. 거기서 음악을 연주하고 마음대로 먹던 그녀는 어느 순간 두려움 내지는 외로움을 느낀 것인지 친구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고독은 필연적으로 관계를 요구하지만, 다만 친구는 그녀를 말로 구속하지 않는다. 느슨하게 보듬는다. <랩스>에서는 성희롱과 성추행이 발생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이를 방관하는 현장에서 그녀는 뛰쳐나오지만,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다시 지하철에 탑승해야 한다. 웰즈는 범죄를 방관하는 공범들의 시선도 고발하며, 어쩔 수 없이 사람이 부대끼는 곳으로 향해야 하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건전한 삶을 위한 반성을 자극한다. 이렇게 고독으로 떠나면서도 공동체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인간을 고찰하고, 필연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의 개선을 촉구하는 웰즈의 단편들, 이러한 단편의 유랑이 장편 데뷔작 <애프터썬>에서도 이어진다. 본 작품에서도 떠난다. 소피는 부모님이 이혼한 이후 평소에는 엄마와 지낸다. 그런 와중 여름 방학을 맞아 아빠 캘럼과 튀르키예로 여행을 왔다. 스코틀랜드에서 엄마와 일상을 보내던 소피는 튀르키예로 아빠와 여행을 떠나는 비일상으로 일탈한다. 그 기억을 현재 성년이 된 소피가 ‘플래시 포워드’로 회고한다. 그래서 현재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는 성년의 소피가, 아버지가 존재했던 유년기로 또다시 일탈한다.    

  

본 작품의 도입부처럼 평소에 기억은 어둠 속에 덮여 있다. 그 어둠에 발생한 미약한 균열 가운데서 작은 청각만 새어 나오는 기억은 그리움만 자극한다. 그래서 소피는 일상을 뛰어넘고 어둠을 걷어낸다. 결말에서 카메라를 쥐고 있는 소피는 현재의 일상을 넘어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과거를 픽션으로 만든다. 어둠을 걷어 젖혀 과거를 적나라하게 목도하는 일탈이란 곧 기억을 재구성하는 영화로 귀결된다. 그 영화로 ‘불가능’한 것들을 본다. 그 불가능한 것들은 현재엔 편린만 남아있다. 당시의 필름 사진기로 포착한 스냅 사진들과 홈비디오로 촬영한 푸티지들, 그리고 감독의 기억만 어렴풋이. 웰즈는 사진에 움직임을 부여하고 푸티지에 전후맥락을 덧붙인다. 그래서 영화의 이미지들은 서사를 위해서 기능하진 않는다. 이에 본 작품의 서사는 그다지 극적이지 않다. 이미지의 목적은 기억이다. 그것도 행위 그 자체에만 몰입하던 유년기의 순수하게 시지각적이던 시선, 그리고 작금에 사라져버려 희소해진 파편적인 기억을 복원할 뿐이다. 숏의 시작은 사진들처럼 구도가 정교하다. 거기서 스멀스멀 움직이며 영화가 된다. 구도가 정교한 숏의 시작이 객관적인 스냅 사진라면, 움직이면서 상상이 덧붙여진 주관이 된다. 즉 소피의 기억에 의존하여 사진이나 푸티지 전후에 움직임을 부여할 수 있지만, 그 기억이 온전하게 정확할 수 없다. 당대의 총체를 객관적으로 소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 저번 학기에 이집트 역사를 배운 소피가 역사의 불확실성을 언급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기억을 소환하는 본 작품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픽션이다. 당대를 기록한 35mm 필름을 오롯이 이어오기 위해서, 본 작품 또한 35mm 필름을 사용한다. 그러나 당대도 그렇고 35mm 필름으로 촬영된 픽션도 그렇고, 현실에선 불가능한 몽환적인 색감이다. 현실만큼 또렷하고도 적확하게 대상을 비추는 디지털과 달리, 필름은 흐릿하고 불투명하며 보존 상태에 따라 그레인이나 노이즈가 가득하고, 선명하지 않은 대신 색채와 뉘앙스를 부각한다.      


그래서 필름에 담긴 수영장과 하늘의 파란색은 더 쨍하고, 인물들의 혈색이나 입술색 또한 앵두빛이 감돌아 더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은은하고 화사한 태양의 빛살은 황홀하고도 사치스럽다. 그만큼 35mm 필름은 더 감정적이고 주관적이다. 그리고 소피가 소환하고 싶은 과거도 내가 ‘사랑하는’ 대상, 내가 ‘그리운’ 대상, 내가 ‘동경하는’ 풍경이다, 냉철하고 지적인 객관이 아니다. 더욱이 현실에서 35mm 필름으로 출발하는 게 아니라, 35mm 필름이나 이보다 더 조악한 홈비디오 푸티지에서 35mm 필름으로 이어지기에, 가상에서 가상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그래서 회고는 제 주관이 흠뻑 묻어나는 황홀하고 이상적인 미장센의 픽션일 수밖에 없다. 또 내 감정 때문이 아니더라도 과거는 픽션일 수밖에, 상상을 곁들일 수밖에 없다. 영화 중반부에 이르러 도입부의 소피가 캘럼을 촬영하던 홈비디오의 경위가 밝혀진다. 소피는 홈비디오를 TV에 연결하여 촬영한다. 웰즈의 카메라는 소피의 카메라가 연결된 TV에 집중한다. TV 외의 것은 잘 보이지 않는 구도다. 이윽고 캘럼이 소피의 인터뷰를 거부하자 그의 얼굴은 TV에 담기지 않고, 이에 웰즈의 카메라에도 담기지 않으며, 그나마 TV의 바깥에 작게나마 놓여있는 거울을 통해 흔적만 어렴풋이 노출될 뿐이다. 본 장면이 일탈하여 보고 싶게 만드는, 희소하고 불가능한 ‘과거’의 속성을 보여준다. 과거는 카메라, 거울, TV 등으로 매개된다. 그런데 카메라 앞에 서서 인터뷰하는 소피는 평소보다 부자연스럽다. 또 카메라 앞에서 캘럼은 "11살로 되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카메라가 꺼져야 답한다. 즉 카메라의 on/off에 의해서 대상의 상태가 뒤바뀌고, 카메라가 켜진 당시의 대상은 소피가 기록하고 싶은 자연스러운 대상이 아니다. 카메라나 대상이 있으면 그들에 따라 나를 검열한다. 화장실에서 소녀들이 첫 경험에 대해 얘기하는데, 소피의 존재를 눈치 채자 “혹시 쟤가 들었을까?”라며 조심하는 것처럼, 소피에 따라서 자신의 발화를 결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카메라에, 곧 기억에 온전한 대상은 잡히지 않는다. 또 카메라에 상응하는 거울은 뒤집히거나, 캘럼이 뱉은 양치물에 의해서 더러워진다. 즉 거울, 곧 렌즈의 상태에 의해서 기억 속 대상이 변질된다. 마찬가지로 카메라에 상응하는, 수면 위에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창공을 비추는 '수영장' 또한 은은하게 일렁이며 변형한다. 즉 소피가 회고하고 싶은 캘럼은 매개물로도 정확하게 접할 순 없다. 매개물에는 소피가 원하는, '존재 그 자체'로의 캘럼이 없거나, 또 매개체의 상태에 의해서 담기는 형상이 계속 변형되기 때문이다. 이에 캘럼에 대한 소피의 기억 일부는 상상이다. 소피는 아빠가 먼저 잠든 순간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던 경험을 투영한다. 소피가 잠들어서 접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순간을 상상한다. 그 또한 자신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베란다로 나가서 춤을 추며 담배를 피우겠지, 나처럼. 또 자신이 엄마가 된 경험을 그에게 투영하여 몰랐던 아버지의 속내를 헤아린다. 소피는 책을 읽고, 캘럼은 화장실에서 깁스를 풀며 대화하는 시퀀스, 소피의 기억 속에는 '청각'만 남아있을 것이다. 물리적으로 벽이 거실과 화장실을 분단하여 차단하는데, 거실의 소피는 화장실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캘럼을 볼 수 없다. 캘럼의 청각은 천연덕스레 괜찮은척한다. 그러나 유추한다. 아기 앞에서는 씩씩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지쳐있는 자신을 아버지에게 투영하여, 몰랐던 그의 모습을 채워낸다. 소피는 아버지의 시야에서 벗어나 청소년들과 논다. 이에 아버지에 의해 제한됐던 시야가 탁 트인다. 새로운 것들이 보이고 키스도 한다. 그것을 캘럼에게도 적용한다. 소피가 없는 순간 춤을 추고 요가를 하며 바다에 첨벙 빠지는 아버지의 탁 트인 면모를, 사회적인 예법 때문에 헤어졌어도 "사랑해"라고 말을 덧붙이는 아버지 대신, 예법을 따르기 이전 순수하고도 솔직하게 춤추는 아버지를 상상한다. 영화 후반, 소피가 아는 것은 자신과 여행객들에게 생일 축하를 받은 아버지의 얼굴이다. 이후 소피가 바라본 얼굴과 방안에서 우는 얼굴이 디졸브로 겹쳐진다. 과거에 봤던 얼굴이 사실이라면, 방안에서 우는 얼굴은 그녀가 있을 때는 보여주지 못할 모습으로, 즉 소피의 상상이다.      


이 또한 소피가 자신을 투영했을 것이다. 온전히 자신만의 생일을 축하받을 수 없는, 아기를 돌봐야 하는 책임의 무게와 남겨질 나약한 존재에 대한 안쓰러움과 연민을 이젠 그녀도 경험했다. 사실과 상상은 디졸브로 포개진다. 사실은 상상으로, 상상도 사실로 이어진다. 캘럼은 소피에게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 튀르키예 전통 카펫의 문양은 매우 다층적으로 열려있고, 그 위로 캘럼은 눕는다. 그는 아버지라는 일면으로만 국한되고 싶지 않다. 카펫에 누운 당일, 캘럼은 감정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소피 앞에선 아버지여야 함에, 아버지가 아닌 충동적인 그는 간헐적으로만 드러날 뿐이다. 즉 내 앞에서 모든 면모를 드러내지 않는 대상의 총체를 보기 위해서는 깊게 상상해야 한다. 나는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대상의 총체를 긍정하고 싶다. 소피를 사랑하며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던 캘럼처럼. 그렇다면 왜 상상력을 동원해서라도 부재한 아버지는 소피 앞에 소환되어야 하는가. 캘럼은 극의 후반부에 소피가 말하고 싶은 것, 고민 등이 있다면 자신에게 부담 없이 전부 다 털어놓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성장하여 스스로 태양이 되어도 감당하기 어려운 비밀이나 고민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소피는 자신의 고민을 들어줄 아버지가 있는 기억으로 돌아가지만, 파편만 남은 기억에 오래 머무를 수 없고 그녀는 완고하게 구성된 현재로 되돌아온다. 현재와 과거가 짧게 교차되는 초반은 플래시백이 사용된다. 하지만 일반적인 플래시백과 느낌이 다르다. 현재의 성인 소피는 클럽에 있다. 영화 후반부에는 침실, 거실 등에 놓여있지만, 회고가 시작된 당시에는 클럽에 있다. 그녀는 클럽의 정신 사납고 불완전하게 깜빡거리는 조명 때문에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다. 깜빡임에 의한 어둠에 의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이윽고 현재의 그녀가 사라진 숏 사이사이에 ‘캘럼과 함께한 과거의 소피’가 침투한다. 하지만 현재의 틈에 과거가 오롯이 흡착하고 달라붙는 것은 아니다.      


일단 디지털카메라로 포착된 듯 매우 선명하고 투명한 현재의 클럽씬이 깜빡이는 조명에 의해 불완전하게 변하는데, 그것은 어른이기가 버거운 소피의 심리 상태를 암시하는 것이랴. 힘겨운 소피는 어른, 곧 태양이기를 내려놓고 자신을 감춰 영화는 어두운 공백으로 변하는데, 성인 소피가 사라진 그 틈에 기억이 파고든다. 그렇게 파고든 기억은 깜빡이지는 않을지언정 조악한 홈비디오로 촬영되어 화질이 매우 흐릿하여 기억 속의 11살의 소피도 영속할 만큼 완전하지 않다. 또 현재와 과거는 픽셀로 변환되어 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상태로 마구 뒤섞인다. 그리고 클럽의 소피는 향후 클럽의 캘럼과 매치컷으로 겹쳐지는데, 어쩌면 캘럼은 실제로 클럽에 간 것이 아니라, 클럽에 간 소피가 자신의 상황을 반추하여 상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즉 사실과 상상, 과거와 현재는 연거푸 뒤섞이는데, 그것이 곧 본 작품의 특징이다. 클럽의 소피, 그리고 기억 속의 캘럼과 소피, 양자 모두가 픽셀화되고 혼재되며 과거와 현재는 뭉쳐지고, 소피는 그 어느 곳에도 명확히 머물지 않는다. 현재를 떠나지만 그렇다고 과거로 오롯이 향할 수도 없는 ‘유년 시절을 품은 어른’, 기억으로 도피하지만 그 기억은 유실되고 변형되어 더는 그 당시와 같지 않은 미로와도 같은 시간을 영영 떠도는 영화가 바로 <애프터썬>이다. 혼란한 시간을 맨 처음 떠돌던 도입부에선 홈비디오로 촬영된 푸티지와 클럽에 놓인 소피를 디졸브한다. 소피는 현재를 포기하고 과거로 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전하게 과거에 속하지도 않는다. 아마 그녀가 과거를 회고하는 이유, 현재 그녀는 어머니가 되었다. 영화 끝자락에 현재의 소피는 레즈비언 연인에게 생일을 축하받는다. 하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탄생을 축하받고 눈을 비비며 깨어나니 아기 울음소리가 귓가를 날카롭게 찌른다. 한때 캘럼이라는 태양의 후광 아래서 보호받던 소피는 이제 그녀 스스로 태양이 되어 핏덩이를 돌봐야 한다. 그러나 태양이기가 벅찬 소피는 태양 밑에서 안락했던 기억을 회고하는데, 부정하는 세계는 탄탄한 물질로 구성되어 매우 견고한 반면, 향하고 싶은 기억은 미약한 관념에 의존하기에 쉽게 흩어지거나 몹시 불완전하다.      


그렇게 디졸브는 어디에도 속하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태양이지만 태양이길 부정하는 성인의 가냘픈 심리를 보여준다. 소피가 휴양지에서 만난 청년들과 당구를 하기 이전, 발을 시원하게 간질이는 수영장과 결코 닿을 수 없는 하늘이 디졸브된다. 태양은 닿는 곳에 살면서도 닿지 않는 곳에 동시에 머문다. 또 디졸브는 아니지만 영화 중반부, 캘럼이 양치하는 장면에서 그의 얼굴은 거울에 비춰졌다가, 이윽고 거울에 물을 뱉어 형상은 사라진다. 소피는 현재 부재한 캘럼을, 기억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대신 마주하는 셈인데, 현재의 소피에게 캘럼은 보이면서도, 거울의 상태가 혼탁해져서 볼 수 없는 존재다. 즉 과거를 회상하면 볼 수 있지만 현재에는 볼 수 없기에, 이에 오직 제한적으로만 볼 수 있기에 그리운 캘럼이란 태양, 성인이 된 우리를 그립게 만드는 태양의 성질을 살펴보자. 10살 소피는 캘럼이 130살은 되었을 것이라며 그를 놀려대고 장난친다. 하지만 장난에 진담이 섞여 있다. 키가 작았던 어린 시절에 부모님들은 정말로 100살 넘게 살 것만 같았고, 그렇게 영원할 줄만 알았다. 태양이자 곧 신이었다. 그들은 거대함과 동시에 무한했고,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었다. 영화 초반부의 몽환적이고 환각적인 숏이 끝나고, 비교적 견고한 회고가 시작된다. 부녀는 버스에 올라탄다. 이윽고 여행 가이드가 간략한 소개를 하는데, 캘럼이 이를 따라 한다. 소피의 눈에 캘럼은 아버지임과 동시에 여행 가이드도 될 수 있다. 실제로도 그렇다, 여행 내내 소피가 어딜 가야 할지 알려주고, 그의 곁에 있으면 항상 보호받는다. 아버지가 곁에 있으니 소피와 함께 당구를 치는 청소년들은 '욕설'을 조심하고, 또 여행사 내지는 호텔의 착오로 침대가 잘못 배달된 것을 캘럼이 능수능란하게 해결한다. 그렇게 침대가 잘못 도착한 첫날 밤, 소피는 눈을 붙이고 잠을 청하지만, 캘럼은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우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아이가 잠든 동안 담배를 점화하고 제 자신을 불태우며, 차가운 어둠 속에서 보초를 서서 연약한 아이를 안락하고도 따스하게 보호해주는 존재, 아이가 잠든 동안에도 깨어있는 무한한 존재가 바로 부모라는 태양이다.      


이러한 태양은 유년 시절엔 당연하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영화 초반에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소피가 가깝다못해 아주 밀착해서 쳐다보는 것이 당연한 캘럼의 피부를 확대하다시피 세밀하게 포착하고, 또 부녀를 함께 포착한다. 당연함은 곧 익스트림 클로즈업한 태양과의 친밀함, 확고한 관계다. 그 태양 곁에 놓여 있는 인류, 자녀는 따스해진다. 태양이 곁에 없는 순간의 소피는 주로 어둠 속에 있다. 당구를 치며 만난 청년들과의 동행도 저녁, 그리고 마이클과 수영장에서 첫 키스를 하던 순간도 밤, 잠들지 않던 캘럼이 먼저 잠이 들어 소피가 거리를 떠돌던 순간도 바로 태양이 저물어 차가워진 일몰 이후였다. 태양이 부재하면 싸늘해진다, 그리고 캘럼의 곁에서 맨 처음 멀어져 마이클과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고 들어온 이후, 아예 퍼져버려서 피곤해하던 소피처럼 스스로 불타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한편 그 태양은 마냥 보호하지만은 않는다. 캘럼은 어느 한 보호자가 아들을 날카롭게 잡아끄는 것을 목격한다. 어떤 태양은 따스하기보단 화상을 입히리만큼 뜨겁다. 이후 호텔에 돌아와서 소피에게 호신술을 가르쳐준다. 유한한 인간이란 태양은 언젠가 자신이 꺼져버릴 것을 알기에, 남겨진 자녀가 홀로 빛나고 불탈 수 있게끔 가르친다. 그렇게 소피가 태양이 된다면 캘럼이라는 태양은 자연히 멀어지는 것, 더 이상 태양이 아니게 된다. 태양은 하나인 법이므로. 그래서 35mm 필름은 단순히 이상적인 성질만 지니진 않는다. 오늘날에 대중적인, 그만큼 값싼 디지털에 비한다면 필름은 이제 값비싸졌고 희소하다. 필름의 이 같은 신비로움과 값비쌈이 자신이 태양이 되어가며 식어간 아버지란 태양의 값어치이랴. '신비롭다'는 것, 그것은 현실, 현재에 일반적이지 않은 초월적 성질이다.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아스라하게 떨어져 있어서 손을 뻗고 싶은 유형이다. 현실에 머물더라도 소피가 아직 어려서 할 수 없는,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되는 저 하늘의 패러글라이딩은 닿지 않기에 신비롭다. 즉 신비는 멀어짐이나 그리움으로, 캘럼이 소피의 곁에서 멀어져가며 서서히 신비로워진다.      


여행 중에 지쳐하거나 어깨에 상처가 난 캘럼 등 강인한 줄만 알았던 태양에게서 지금껏 보지 못한 모습을 본다. 그렇게 당연했던 아버지가 점차 당연하지 않은 모습으로 멀어져가며 낯설어진다. 언제나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것만 같던 캘럼이 소피에게서 멀어진다. 그래서 영화는 간절해진다. 영화의 카메라워킹은 느리다. 그 형식은 소피가 신발과 양말을 안 벗고 잠들어서, 캘럼이 딸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고자 이를 조심스럽게 벗겨주는 세밀한 부성에 상응하면서도, 흡사 10살의 기억에서 현재로 되돌아가기 싫은 듯한 '느림'으로도 느껴진다. 느린데다가 휴양지에서의 행위는 별 의미와 목적이 없는 무용한 늘어짐의 연속이다. 이는 감상자에겐 무용하지만 소피와 웰즈에게는 유의미하며 희소한, 그래서 길게 늘어져야만 하는 이미지다. 이에 시각만 느린 것이 아니라 배경음악 또한 때로 느린 배속으로 재생된다. 당연한 줄 알았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니, 한때 당연한 것을 간절하게 집착한다. 부녀는 배를 타고 다이빙하러 떠났다. 거기서 만난 다이빙 전문가는 자신의 인생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 것을 두고 놀라워한다. 캘럼 또한 마찬가지라고 한다. 결혼 및 소피에 대한 경험, 지금의 고민과 불안, 새벽에 잠 못 드는 시간의 소중함은 과거에 예상치 못한 현재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경험은 이윽고 당연했던 것을 사라지게 만들기에, 영화는 희미하고 지지직거리며 불완전하다. 예상치 못한 경험이 닥쳐오며 기존의 것들은 불완전하게 잔상만 남았는데도, 이것이나마 붙잡고 싶다. 캘럼과의 멀어짐은 추측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캘럼의 자살 내지는 병마 때문만은 아니다. 소피 또한 성장하고 있기에, 이로써 태양에게서 차츰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화장실에 간 소피는 용변을 보는 와중 열쇠 구멍으로, 자신보다 나이를 좀 더 먹은 소녀들의 섹슈얼한 얘기를 엿듣는다. 항상 아버지의 곁에 놓였던 소녀는 그 품을 떠나 당구를 같이 치던 청년, 마이클 등과 동행한다. 그들과 함께 잠수하며 아버지가 보여주지 않은, 그와 함께 있었다면 보지 못했을 키스를 일반적인 지상이 아닌 비일반적인 ‘수중’에서 목격한다.      


그간 아버지가 소피의 등에 선크림을 발라줬지만 이젠 소피가 캘럼의 등에 유황을 발라준다. 아버지 없이도 노래자랑 참여를 신청하여 무대에 나가 노래를 부른다. 먼저 잠든 캘럼을 위해서 그에게 이불을 덮어준다. 이제는 캘럼의 눈이 덮여 있고, 소피의 눈이 초롱초롱 깨어난다. 그렇게 어제의 태양은 저물고, 서서히 오늘의 태양이 뜬다. 그 태양은 하나가 아니라 각각의 둘이다. 아버지의 식어가는 태양에 더는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불태워가는 소피라는 태양, 그래서 부녀가 각기 놓이는 장소도 다르다. 소피가 청년들과 수영장에 들어간 동안, 캘럼은 어두컴컴한 카펫 가게에서 나오지 않는다. 전자가 호크니의 회화를 연상케 하리만큼 쨍하게 밝다면, 그렇게 스스로를 위풍당당 발산하고 있다면, 후자는 어둡게 자신을 내부로 감추고 있다. 후반부에 부녀가 대화와는 와중에 카메라가 비춘 해변에선, 저물어가는 늙은 태양인 노인은 지쳐서 주저앉아 더는 움직이지 못하는 반면, 젊은 태양은 팔굽혀펴기를 하며 정력적인 모습이다. 설령 소피와 캘럼이 똑같은 밤 시간대에 놓인다 하더라도, 캘럼은 미약한 빛에서 멀어져 바닷속으로 자취를 감춘다면, 소피는 마이클과 키스하며 제 감각을 밝히고 깨운다. 태양이 된다는 것은 나의 주권을 되찾거나 깨우치는 일이다. 그런 주체성이 캘럼에게서는 꺼져가고, 소피는 피워간다. 그간 서로에게 당연했던 태양의 양육, 보살핌을 받는 딸의 역할이 뒤집힌다. 이런 관점에서 본 작품은 부녀의 드라마에만 그치지 않고, 소피의 성장극이기도 하다. 소피는 자신에게 주스를 건네주는 아버지에게 의존한다. 또래 소년 마이클은 캘럼을 대체할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피가 캘럼과 멀어져 홀로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마이클이 대신 게임기에 동전을 넣어준다. 마이클은 소피의 곁에서 멀어진 캘럼을 서서히 대체하는가? 이후 마이클은 홀로 밤거리를 떠도는 소피를 잡아채어 놀라게 하고, 데이트를 신청하며 수영장에서 그녀에게 키스한다. 하지만 현재의 소피는 레즈비언이다. 소피는 마이클과 키스하고 돌아오는 와중에 두 명의 게이가 키스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소피의 성장은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겪는 이성애자 딸이 마냥 아버지의 자리를 대체할만한, 동전이 있고 주도하는 연인을 만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을 사랑하는 태양인 아버지를 닮아가고, 진정 자신이 관심이 있는 대상에 눈뜨는 과정이랴. 그렇게 태양이 되어가는 과정은 스스로를 뜨겁게 발산하며 소모하기에 매우 힘겹다. 캘럼은 소피에게는 따스하지만, 한편 그의 부모님은 생일을 잊은 적이 있고, 또 그에게 스코틀랜드는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아니다. 태양으로 거듭난 사람은 마냥 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의존할만한 또 다른 태양이 곁에 없다. 스스로 모든 것을 짊어져야 하는 원리를 창조·정립해가는 힘겨운 투쟁이다. 현재의 소피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생일을 축하받는다. 하지만 소피의 탄생,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축하받는 이유는 울부짖는 아이를 키우기 위함, 그렇게 제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닌 태양의 기분은 울적하다. 불안정한데 기댈 곳은 없고, 자신의 온기로 살아가는 식솔은 딸렸다. 캘럼 또한 소피에 의해서 다수의 관광객에게 생일을 축하받는다. 하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이후 방으로 돌아가 오열한다. 과거의 소피는 카메라로 캘럼을 포착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그녀 자신을 담기 시작한다. 하지만 카메라를 든 캘럼은 자신이 아니라 항상 소피를 촬영한다, 공항에서의 마지막 시선까지도. 태양은 자신에게 소홀하며 남을 위해 연소한다. 물론 카메라를 든 소피는 춤추는 캘럼을 포착한 적이 있다. 춤은 일상에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몸의 색다른 움직임, 지니지 못한 것을 모방하는 행위,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욕망을 반영한다. 그 욕망은 타자가 지시하는 것이 아닌, 솔직한 내 몸이 가리킨다. 캘럼은 부모로서 비일상적인 것으로 전락한 자신을 되찾고 싶어 했다. 소피의 눈에 이상한 체조도 서슴지 않았고, 휴가 마지막 날까지 소피와 춤추고자 했다. 그러나 소피를 사랑한 캘럼은 딸 앞에선 대체로 자신을 중단하고 카메라를 들어 가장 솔직할 수 있는 유년기를 보존했다. 태양은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의 순수함과 천진함을 보존한다.     


이제 자신이 태양이 되어 카메라를 든 소피는 춤추는, 존재 그 자체로의 캘럼을 수놓는다. 다만 기록하기엔 너무 늦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랑하기에 간헐적인 기억과 어머니인 자신을 투영한 상상으로 그를 보존한다. 카메라를 든 소피는 카메라를 들었던 캘럼의 마음을 헤아리고 상상한다. 그런 태양인 인간은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에 살고, 나로 살면서도 타인을 위해 산다. 어느 곳에서도 살면서도 어느 곳에서도 살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사실과 상상 양자 모두에 머물면서도 머물지 않으며 이탈하는 작품, 웰즈는 단편에서 보여준 탐구를 다층적으로 확장함과 동시에, 형식 또한 괄시하지 않는 빼어난 자전적인 장편 데뷔작을 선보인다. 그 형식성은 웰즈의 단편에서는 크게 도드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대 이상의 성취다. 이를 통해서 유년기엔 당연하지만 실제론 당연하지 않은 태양과의 소중한 기억을 환기하고, 유한하고 불완전한 태양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심리를 깊게 탐구한다. 그런 인간은 홀로 불태우면서도 어딘가에 기대는, 양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존재다. 불태우는 차원과 기대는 차원은 근본적으론 분리된다. 현재 소피가 의존하고자 응시하는 클럽의 캘럼은 그녀를 신경쓰지 않고 홀로 무아지경에 빠져 춤을 춘다. 죽으면 태양의 의무는 다하고 비로소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진다. 현재의 소피를 파편적으로 중단하며 과거를 침투시키던 조명은, 이윽고 산자 소피와 망자 캘럼 사이에 벽을 만드는 장치로 변용한다. 이윽고 캘럼을 부르는 소피가 그와 만나서 잠시 포옹하며 태양에게 기대는 딸로 되돌아가지만, 다시금 소피는 밀쳐져 태양으로 되돌아간다. 캘럼을 향한 소피의 발화, 외침은 들을 수 없다. 딸의 발화는 닿지 않는다. 그러나 간헐적인 기억 속 망자와의 포옹으로 다시 온기를 얻었으리. 하나의 태양이 저물고 여행을 마치면, 다른 태양이 빛나고 떠오르는 법이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태양은 과거에 들려, 현재에 기댈 곳 없는 자신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고 현재로 되돌아와 자신을 불사른다. 그래서 태양인 우리는 과거에 깊이 침잠하여 무언가를 얻기 위해 집착하는 것인지 모른다, 심지어 상상까지 동원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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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203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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