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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Feb 09. 2023

알리 압바시, <성스러운 거미>

여성이여, 폭로하고 도발하라

알리 압바시(Ali Abbasi), <성스러운 거미>(Holy Spider) 

- 여성이여, 폭로하고 도발하라    

“만일 여성이 정치에 참여해서 남성처럼 된다면, 그래서 남성이 더 이상 전쟁을 벌일 수 없게 된다면, 남성은 여성처럼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모든 여성이 강간이 가져오는 ‘불명예’라는 ‘죽음보다 더한 운명’에 대한 공포에 젖어 있듯이, 모든 남성은 어린 시절부터 여성처럼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려워하도록 교육받는다.” -베티 리어든-

모로코의 영화감독 나빌 아우크는 <머치 러브드>라는 작품에서 이슬람 사회에서 살아가는 매춘부들을 추적하였다. 그녀들은 분명 남성들의 경제력에 의존한다. 하지만 남성들에 의해 소유되어 마냥 집에만 비치되는 어머니나 아내의 위치보다는 훨씬 능동적이다. 남성 고객들을 내내 기다려도 약속이 유예되는 상황에서 매춘부들은 남성에 의한 난관을 극복하고자 거리로 뛰쳐나온다. 물론 거리로 뛰쳐나와도 남성들에게 선택받아야 하고, 그들의 요구를 몸에 체현해야 하지만, 그녀들에게는 최후의 선택이나 저항이 가능하다. 집에서 어떠한 미동도, 몸부림도 불가능한 어머니, 아내와는 다르다. 무엇보다 그녀들에게 쾌락은 어머니나 아내보다 가까이 있다. 그녀들의 성은 경제와 결부됨과 동시에, 아내·어머니와 달리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서 이를 즐긴다. 무엇보다 그렇게 축적한 부를 자신을 위해 쓴다. 안주인으로서 집과 남편과 자녀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가정 바깥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남근을 숭배하는 이슬람 국가에서 매춘부는 더더욱 눈엣가시일지 모른다. 매춘부들은 남성들이 자신들에게 타자화한 불경함과 무슬림의 모순을 폭로하는 존재, 남성들의 손아귀에 잡히면서도 벗어나며 가부장제를 능욕하는 존재다. 그래서 남자들은 그녀들을 붙잡아, 심지어 죽음까지도 지배하려는지 모른다. 알리 압바시는 이러한 이슬람 사회 내 매춘부들의 위험천만한 삶을 추적하는 <성스러운 거미>라는 신작으로 복귀한다. 1981년 테헤란 태생의 알리 압바시는 덴마크-이란 이중 국적의 영화감독이다. 테헤란에서 나고 자란 그는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덴마크에서 영화학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다가 2018년까지는 북유럽에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본 신작 <성스러운 거미>는 테헤란으로 돌아가서 연출한 작품이다. 일단 그의 작품에서는 초자연적인 설정이 매번 등장한다. 폴란스키의 <로즈마리의 아기>를 연상케 하는 장편 데뷔작 <셜리>에서는 ‘악마의 아기’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을 전 세계적으로 알린 <경계선>에서는 북유럽 신화의 ‘트롤’이 등장한다.      


처음에 그들은 일반 인간처럼 보인다. <셜리>는 임신에 대한 알레고리, <경계선> 또한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상징처럼 보였다. 하지만 압바시는 인간 중심적 해석이나 틀에 박힌 도식 대신, 인간이 아닌 그들의 본 존재를 되찾아주는 데 집중한다. <셜리>에서 대리모, 아버지, 영매 모든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간 아기를 엄마 루이스는 보듬는다. 셜리가 자신조차 박탈하려 함에도 대상을 존중한다. 그것이 진실이기에. <경계선>에서 티나와 보레는 트롤로서 정체성을 되찾는다. 보레는 트롤 공동체에 합류하고, 티나는 더 이상 인간 공동체와 뒤섞이지 않으며, 인간과의 아기가 아니라 둘의 아기를 가진다. 이러한 그의 작품에서는 두 민족성이 교차하거나 충돌한다. <셜리>에서는 루마니아 국적의 노동자와 덴마크의 내지인이 등장하고, <경계선>에서는 인간과 트롤로서 말이다. 여기서 동유럽인과 트롤은 타자요 약자다. <셜리>의 루마니아인 엘레나는 돈을 벌기 위해 외부와 고립 및 단절된 북유럽의 숲으로 향한다. 거기서 아이를 유산한 루이스를 간병하고, 가사를 돕기로 한다. 이후 루이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리모가 된다. 여기서는 선택권이 없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덴마크인들의 제안을 루마니아인은 거스를 수 없다. 이후 루이스의 냉동 난자로 아이를 갖게 된 엘레나는 제 몸과 정신을 모두 부부에게 내어준다. 루이스의 눈치에 살을 더 찌우고, 담배를 피울 수도 없다. 북유럽인을 보필하는 존재이자 북유럽인에 의해 육체가 부풀어 오르는 존재로 전락한다. <경계선> 또한 마찬가지다. 트롤은 인간에 의해서 정신병원에 갇힌다. 티나와 보레는 자신을 낳아준 근원을 찾을 수 없다. 그들은 땅속에 묻힌 지 오래고, 트롤 부모의 자리에는 인간 부모가 대체하였다. 이후 인간 세계에서 오감이 발달한 트롤의 능력은 티나처럼 인간의 법을 위해 동원되거나, 보레처럼 인간의 돈벌이로 악용된다. 이러한 압바시의 작품에서는 항시 임신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셜리>를 임신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할 경우, 압바시는 임신을 아이에 맞춰 몸이 변환되는 여성의 경험에 주목한다.      


어머니는 아기를 위해서 제 몸을 희생한다. 하지만 대리모인 엘레나는 루이스의 아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고 싶지 않고, 이후 루이스는 셜리가 태어난 이후 그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한다. 한편 남성은 다르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다는 한 남성의 회고처럼 캐스퍼는 셜리에게 어떤 느낌도 받지 못한다.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그를 자신의 배 안에 품는 여성이다. <경계선>에서 트롤은 남과 여의 생물학적인 역할은 반대로 뒤바뀐다. 그런데 이를 모르는 트롤들, 서로를 만날 수 없는 트롤들은 임신할 수 없다. 트롤들끼리 결합할 수 없는 인류 공동체에서 수정되지 못한 배아는 항시 사산된다. 이에 보레는 아무렇지 않게 영유아를 착취하는 범죄에 가담할 수 있었으랴. 하지만 서로가 트롤임을 확인하고, 인간이 덧씌운 자아를 벗어던짐에 배아는 사산되지 않고 수정되어 아기로 탄생한다. 즉 익히 아는 자신이 아닌 잘 모르는 자신과 상대방을 이해하면서 진정 새로운 존재와 앎이 탄생한다. 이를 위해서 기존 자신도 포기한다, 다만 강요가 아니라 주체적이어야 하고, 책임이라면 마땅히 짊어져야 한다. 이렇게 압바시의 작품에서는 영민하고 민감한 감각으로 악마의 아기든 트롤이든 서로 이해하고 느낄 것을, 그리고 주체성과 타자의 해방을 촉구하는데, 압바시가 이란으로 향해서 촬영한 신작에서는 과연 어떤 경향이 이어지고 있을까? 또 압바시의 작품은 항시 초자연적 존재들이 등장함에도 리얼리틱한 연출에 그들을 담아내며, 천연덕스럽게 초자연적인 요인을 일반적인 영역으로 편입하였는데, 과연 본 작품의 연출은 어떠할까? 영화의 도입부,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소마예라는 매춘부가 길거리로 나갈 채비를 한다. 그녀는 ‘거울’로 정면을 본다. 눈가에 검은 아이라인을 거칠게 그려서 다소 공격적이고 날카롭게 보인다. 그것이 곧 일반적인 매춘부의 ‘정면’이다. 히잡으로 억센 머리카락을 가리더라도, 붕 떠 있는 얼굴에 드러나 있는 날카로운 이미지는 가부장제 내에서 언제나 흉흉하고 재수 없게 여겨졌다. 이는 가부장제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왜 우리가 이미지를 보는지 고찰한다. 과연 순수하게 대상을 지각하고 싶어서 이미지를 만들고 바라볼까? 아니다, 이미지는 경제적 이해관계, 이데올로기적 믿음, 심리적 욕구에 따라서, 이로써 판에 박힌 기대를 지각하고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한다. 즉 이미지는 단지 믿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타당할 뿐, 진실 그 자체는 아닐지 모른다. 그 이미지가 특별하려면, 또 판에 박히지 않고 진실을 비추려면, 이데올로기나 욕망으로 식별되지 않게끔 시선을 의식한 많은 것들을 내려놔야 한다. 그래서 압바시는 정면을 보고 싶은 욕망에 따라 이미지를 생성하는 거울이 매개해주지 못하는 뒤편을 본다. 바로 등이다. 그녀의 등에는 흉터가 그어져 있다. 다소 거칠고 날카로워 보이는 그녀의 정면은 가부장제 내에서 악한 통념이 새겨져 있는 '가해자' 매춘부의 전형이다. 그러나 차도르가 내려가서 노출된 그녀의 등에는 매춘부가 '피해자'임을 명시하는 흔적이 희미하게 긁혀있다. 영화에선 이란의 남성 운전자들이나 산책자들이 밤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춘부의 얼굴을 촬영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와 그녀들이 노출하지 않는 만남과 그 이후를 팔로우 숏으로 추적한다. 그렇게 통념과 편견에 의해 보이지 않는 피해자 매춘부를 들춰내는데, 팔로우 숏에 의한 추적은 항상 안정적이지만은 않다. 그녀는 남성들에게 자신을 전시한다. 남성의 간택으로 여성은 매음이 결정된다. 매음이 결정되더라도 일은 순탄치 않다. 주도권은 언제나 남성에게 있다. 멀끔한 차를 모는 남성과 소마예는 관계를 맺는다. 차가 부를 가리키는 것처럼 집에 ‘사프란 수출상’이 걸려 있는 만큼 제법 부유해 보인다. 그 집을 가진 남자는 소마예를 아주 폭력적으로 다룬다. 사실상 ‘페이 강간’이다. 화장실에서 그녀가 몸을 정리하는 순간에도 빨리 나오라고 닦달한다. 이후 차 안에서 펠라치오를 요구하는 성 매수자 남성 또한 경찰이 지나가자 그녀의 얼굴을 황급히 감춘다. 소마예는 계속해서 빨리 끝내고 싶은 눈치지만, 그는 자신의 부도덕함이 폭로되기 싫은 것인지 그녀를 숨긴다.   


그래서 영화는 '컷'이 잦다. 그녀들의 그림자가 된 달리 인, 달리 아웃 등의 팔로우 숏 구도는 <사울의 아들>과 같은 체험 영화를 연상케 할 정도로 개인의 시점을 정교하게 구현하여 몰입을 자아내나, 차이는 원테이크나 롱테이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의 현실적인 시점이나 의식은 타율에 의해서 연속되지 못하고 숏이 잘리며 단절된다. 남성에 의해 연속되지 못하고, 그녀들의 현실은 남성에 의해 왜곡된 가상이 된다. 남성의 지시로 섹스 전과 후의 얼굴이 다르다. 섹스 후의 얼굴은 남성의 손찌검에 의한 것인지 붉게 상기되어 있다. 화장실에도 길게 머무를 수 없으며, 남성의 만족도에 따라서 급여가 결정된다. 부당한 처우, 그러나 항의할 수 없다. 노동에 있어서도, 강간에 있어서도 법은 그녀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빈곤하고 절망스러워 도무지 현실을 견딜 수 없는 여성은 아편을 흡입하며 환각으로 겨우 버티고, 그마저도 흥정하거나 외상을 하며, 즉 타인에 의해 마약조차 가능/불가능이 결정되기에 ‘나’로서 연속되지 못하고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울퉁불퉁한 요철과도 같은 삶을 이어간다. 그녀들은 현실을 버티기가 어렵다. 도입부의 매춘부는 아이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피해자 소그라는 임산부였다. 또 후반부 법정에서 피해자의 남편은 수감 중이었다. 즉 그녀들은 혼자서 아이를 돌본다. 그런데 남성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는, 오직 남성의 경제 활동만 합법적으로 보장하는 가부장제 내에서 불법을 선택해야 한다. 소마예는 돈을 벌기 위해서 불법을 택하고, 그 선택을 위해 회개의 의미인지 기도를 올린다. 여성의 경제활동은 반종교적, 그것에 따른 법에서 반헌법적이다. 그녀들은 불법에 가담하지만 그것은 하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테헤란에서 기자였던 라히미, 마슈하드에 온 직후에 그녀는 머리카락만 간단하게 가리는 붉은 히잡을 착용한다. 그러나 마슈하드에서 길게 머물기 위해선 검게 온몸을 차단하고 오직 얼굴만 둥둥 떠다니는 차도르를 입어야 한다. 호텔 안에서 자유분방하게 몸을 치장하는 그녀는 굳이 차도르를 입고 싶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입어야 한다.      


여성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숨겨져야만 한다. 테헤란에서 그녀는 기자이긴 했지만, 편집장이 요구한 부적절한 관계를 거부함에 언론사에서 해고되었다. 그리고 마슈하드의 선배 기자 샤리피의 귀에도 그녀가 부적절한 관계를 일삼았다는 소문이 들어갔다. 또 경찰 로스타미는 분명 자신이 먼저 라히미가 머무는 호텔에 방문하여 그녀를 성추행하며 유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을 유혹했다며 자신의 범죄를 타자화한다. 즉 그녀의 진실은 차도르에 숨겨지고, 반면 그녀와 무관한 거짓이 덧씌워진다. 기자인 그녀, 그러나 남성들이 협조하지 않고 되레 방해하거나 성적 대상화함에, 남성이 요구하는 차도르로 온몸을 숨긴 수동적인 여성은 이후 남성에게 의존하는 매춘부가 된다. 여성은 이런 현실을 버티기 어렵다. 이렇게 여성의 삶은 남성이 구술하는 기표와 실제 여성이 처한 기의가 불일치한다. 남성이 가해자 여성, 살해당할만한 죄인 여성을 가리킨다면, 실제로 처한 여성이란 기의는 피해자다. 기표로 기의를 위장하고 숨기는 남성들, 이에 압바시는 본 작품을 기의의 '증거'로 채택한다. 도입부의 소마예 살해, 이후 소그라, 지나브 살인 모두 카메라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녀들 얼굴에 달려들어 참혹한 피해를 밀착 취재한다. 단순히 관조하는 수준이 아니라, 숨이 조여 오는 그녀들 최후의 몸부림까지 카메라의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촉각적으로 구현한다. 피해자의 이미지 외에 집중을 분산할만한 서사, 카메라 워킹을 순간적으로 모두 제거한다. 이에 감상자는 전후에 종속되지 않는 숏 그 자체의 이미지에 골똘히 몰입한다. 감상자는 가부장제에 의해 순수하게 핍박받는 피해자 그 자체만 지각한다. 흡사 피해자 여성처럼 숨이 조여 오는듯한 기분, 온몸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온다. 이렇게 압바시는 <성스러운 거미>에서 남성에 의해 타자화되고 왜곡된 여성의 진실만을 보존하기 위한 연출을 강구한다. 그리고 남성들이 무마시킨 여성의 본래 역할, 폭로하는 기자와 도발하는 다부진 여성, 그리고 미래의 원동력으로서 여성을 보존하길 바란다. 그렇다면 남성은 어떠한 방식으로 주체적인 여성들을 좌초시키는가?      


총 16명의 여성을 살해했고, 라히미 또한 살인 미수한 사이드, 그는 도입부에서 포착된 매춘부를 살해하고 유유자적 집으로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아이 레벨 숏으로 길거리의 여성들이나 오토바이를 탄 사이드를 포착하던 카메라가 이윽고 드론으로 저 하늘 멀리 날아가 하이앵글로 변화한다. 그리고 대상에게 가깝던 카메라는 멀어져 익스트림 롱숏으로 확장한다. 매춘부로 위장하기 전, 라히미는 제 몸에 만족스러웠다. 물론 남성들은 기자인 줄 몰랐던 그녀가 혼자 투숙하는 것에 간섭했으나, 혼자 방을 쓰며 비로소 방해받지 않게 된 그녀는 입에 담배를 물고 매니큐어를 칠하며 제 몸이 제안하는 욕구에 솔직하다. 이러한 그녀의 육체 곳곳은 클로즈업으로 포착된다. 제 육체에 가깝다. 그러나 사이드는 지상에서 멀어지거나, 또 안정적인 카메라 워킹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흡사 그의 정신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하나의 허위라는 듯 어지럽게 떨리는 카메라 워킹이 그의 의식을 가시화한다. 남성들로 이뤄진 마슈하드 또한 지상에는 관심이 없다. 여성들의 생존보다는 저 하늘의 종교가 우선이다. 즉 남성은 지상에서 멀어진다.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로 인해서 지상에서는 만족하였거나, 반대로 만족하지 못하였기에 멀어지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혼자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거주하며 아이를 양육하고 잉태하던 여성들을 인질삼아 함께 멀어지게 만든다. 사이드는 딸과 놀아주는 것보다 기도를 드리는 것이, 또 종교적 임무를 위해 증거인 사과를 창밖에다 버리는 것이, 아이의 도덕 교육보다 중요하다. 마약을 하는 매춘부는 철장을 넘어서지 못하는 상태다. 남성에 의해 점점 더 마약, 죽음 등 비현실로 추방되는 그녀들은 현실의 울타리를 넘을 수 없다. 반면 모스크에서 사이드는 기도를 드리며 영화 내내 강조되는 형광 녹색 빗장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그녀들이 나아가고 싶은 곳이 현실이라면, 사이드를 위시한 남성들은 종교적 이상을 완수하여 녹색 빗장 너머로 나아가고 싶다. 일반적인 녹색은 분명 생명, 조화를 상징한다. 그러나 영화 속 쨍한 형광 녹색은 죽음이나 해로움을 상징하곤 한다. 맹독성 양서류나 파충류의 색채이기 때문이다.      


즉 사이드가 넘어서고자 하는 이상이 매우 해롭다는 것을 압바시는 색채로 보여준다. 이상이 규정한 악덕을 물리치다가, 스스로 더한 악덕을 실현한다. 그 해로운 것이 ‘이어진다.’ 영화는 편집이 중요하다, 현실로 이어지지 못하는 여성을 숏의 이어짐으로 가시화한다. 항상 잘려 나가는 여성은 자신이 본래 머물던 집이나 거리로 돌아올 수 없다. 여성의 삶은 기자에서 창녀로 격하되거나, 언제나 멈춘다. 가부장제에 의해 여성의 삶이 중단되고 퇴보하는 부조리가 규칙이 되어 일반화된다. 반면 남성은 범죄를 저지르고 파렴치하게 범죄 현장에 얼씬거리거나 집에 안락하게 머문다. 영화 속 희생자인 소마예와 소그라는 아는 사이다. 소마예는 아편을 파는 노파에게 "소그라는 어디에?"라고 묻는다. 그러나 여성들은 이어지지 않는다. 이어질 수 없고 뭉치지 못함으로써, 모여서 형성되는 권력이 여성들에겐 없다. 그러나 범죄자 남성은 사회의 고위공직자와 연결되어 권력을 유지하고, 사형이나 처벌조차도 삶과 웃음으로 이어진다. 남성들이 담긴 숏도 잘리지만 비교적 연속적이다. 여성은 남성이 보여주기 싫은 성행위 장면이나 매춘부로서의 삶이 보이지 않게 되고, 남성들이 보고 싶은 피해자로서의 모습만 노출된다. 그러나 남성은 항상 자신이 원하는 상태로 보인다. 사이드가 교도소에 갇혀도 특혜를 받아 몰래 면담한다. 또 남성에 의해 육체가 훼손된 여성이 사회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면, 사이드에겐 책형에 의한 비명이, 실제 책형을 당한 시각으로 이어지지 않고, 파렴치하게 멀쩡한 육체와 연결되면서 항상 보인다. 이렇게 항상 보일 수 있는 남성의 특권을 가부장제가 제공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경찰이 본인의 성범죄에 너그럽고, 죄목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타자화를 일삼을 정도로 제도는 편향되어 있다. 어느 한 공무원은 사이드의 범죄를 목격했다지만 경찰은 미적지근하고, 판사 또한 현재 치안이나 여론을 유지하는 것이 더 우선이라 말한다. 그 여론을 구성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이슬람 세계에서 오직 사회에 나올 수 있는 남성의 목소리요, 남성인 판사 스스로의 안위를 위할 것이다.      


영화는 사이드가 범인임을 초장부터 보여준다. 안다, 그러나 모르는 척한다, 왜 몰라야 하는가? 여성 학자이자 평화학자인 베티 리어든이 밝히길, 가부장제는 강자가 힘으로 약자를 지배하는 것을 변호한다.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보호 대상으로 간주하고, 강자들은 치안이나 안보를 대가로 약자들의 권리를 제한하며, 이러한 가부장제가 사회 전반으로 확장된 것이 군사주의적 사회다.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여성은 취약한 피해자이길 항상 요구받았다. 그녀들의 나약함을 핑계 삼아 남성은 폭력적인 지배를 합리화하고, 군인과 가장의 힘을 숭상한다. 사이드는 건물을 철거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런데 동작이나 일 처리가 영 허술하여 손에 피가 난다. 능력은 없지만 권위는 인정받고 싶다. 그는 예전에 군인이었다. 실체 없는 무용담, 업적을 부풀린다. 이는 경찰 또한 마찬가지다. 목격자도 있고, 허술한 사이드의 집 자체가 거대한 증거 보관소에 다름 아니다. 이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경찰은 태만하고 무능력함에도 불구하고, 여성 라히미에게 질타당하거나 무시당하기는 싫다. 다시 사이드로 되돌아가서, 가족끼리 소풍을 왔다. 아들 알리가 실수로 그의 뒤통수에 공을 찼다. 너그럽게 관용해줄 수 있을 법한 아이의 실수, 그러나 사이드는 아들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분개하여 잡아서 혼꾸녕을 내려 한다. 알리가 사이드의 권위를 위협하거나 조롱한 것으로 느껴졌는지, 유약한 아들에게 포악하게 굴면서 자존심을 되찾으려는지 말이다. 이후 파티마의 아버지 즉 장인어른과 식사해야 하는 사이드, 그러나 권위적이고 싶은 그는 자신보다 권력자인 그의 집에 방문하고 싶지 않다. 열등감을 느낀다. 이런 그가 권위를 확인하는 대상이 바로 매춘부다. 가부장적인 경제구조 내에서 여성은 남성 사이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또 사이드가 살해한 소마예는 '비리비리한 마약 중독자', 두 번째로 살해당한 여성은 육체적으로 더 나약한 '노파', 소그라는 마약사범임과 동시에 임산부다, 즉 육체적으로 위협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녀들은 나약하긴 하지만 동시에 꿋꿋하다. 어떤 상황에서든 억센 머리칼을 질끈 묶고, 억척스러운 담배를 입에 물며 길거리에 나오는 여성, 남성에게 선택되지만 그들에게 길게 머물거나 의존하는 아내가 아닌 여성, 가부장제에서 불법적인 여성은 항구적으로 남성에게 머무르지 않아도 '잡초'처럼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법원은 매춘부 살해 사건을 들쑤시면 오히려 공포심이 조장된다고 주장한다. 무엇에 대한 공포심인가? 남성 없이도 생존할 수 있는 여성들의 편을 드는 공포심, 그것은 제 권위가 지상으로 추락할까 벌벌 떠는 남성들의 공포심이 아닌가? 사이드는 그런 여성의 가능성을 ‘교살’로써 제거한다. 주검으로 전락한 소그라의 발을 보고, 고통스러워하는 파티마의 비명을 들으며, 그녀들을 장악한 스스로의 힘에 오르가즘을 느낀다. 오토바이를 타던 그가 차를 '빌리고', 비리비리한 여성이 아닌 지나브를 위협함으로써, 여성 살해에 따라 상황이 나아진다. 가부장제는 여성 살해를 부추기고 보상을 준다. 또 쿠란을 빌려와 도덕적 쾌감을 느낀다.(실상 그 감각은 말초적이다. 철학자 바타이유는 종교에서 주장하는 신성한 황홀경이 저속한 오르가즘과 동일한 메커니즘임을 밝혔다. 사이드는 추잡한 말초적 감각을 우주적인 감흥이라고 포장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사회 정화 청소' 내지는 ‘악에 맞선 지하드’라 표현한다. 그런데 과연 깨끗해지는 것이 가능할까? 가부장제를 위해 취약한 여성을 요구하여, 엘리트 여성을 아내이자 어머니, 매춘부로 전락시키는 퇴보와 부조리를 사회가 나서서 부추기는데 말이다. 살해가 끊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매춘부는 거리로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파티마는 이웃에게 사이드가 여성과 집에 방문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도 분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이드에게 사랑받고자 섹스를 어필한다. 여성은 남성에게 배신과 죽임을 당하더라도 그들에게 의존해야 할 것이, 그렇게 취약할 것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강제되고 있다. 그런데 취약한 여성은 가부장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영화에서는 가부장제에 얽매이지 않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한 명은 기자 라히미, 다른 한 명은 다부진 체형과 저돌적인 성격을 가진 지나브다. 지나브부터 살펴보자면, 지금까지 수동성과 의존성이 체화된 여성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사이드가 좋은 것을 제공하는 덫에 걸려들어 희생양이 되었다. 그런데 지나브는 다르다. 첫 만날 때부터 사이드를 도발했고, 그의 집에 들어온 이후에도 마음 내키는 대로 화장실을 사용한다. 사이드가 “대체 언제 나오냐”며 보채자,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 음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나브는 남성이 보고 싶은 육체가 아니라,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육체를 선택하는 여성, 남성에 의해 좌우된 시간과 공간을 자신이 재구성하는 여성이다. 지나브는 사이드가 밤일을 잘 하는지 평가하겠다고 말한다. 남성이 여성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남성을 지배한다. 그리고 육체가 다부지다. 사이드는 그녀를 제압하는 데 애를 먹고, 무거운 주검을 옮기기 위해서 끙끙대다가 굴러떨어져 상처를 입는다. 그 부위가 바로 ‘손’이다. 일터에서의 무능함을 폭로하는 손의 흉터, 그 취약함을 약자 여성을 교살하며 회복했던 손, 그러나 지나브는 최후까지 사이드의 손에 상처를 입히며 그의 모자람을 들춰낸다. 지금까지 남성의 눈에 만족스럽기 위해, 더욱이 남성이 무력으로 손쉽게 제압할 수 있게끔 비리비리하던 여성, 그러나 남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성 자신을 위해서 다부진 여성은 쉽게 남성의 손아귀에 통제되지 않는다. 사이드는 그녀가 죽어서도, 지나브가 비웃는 환청에 시달린다. 사이드는 강하고 주체적인 여성이 남성을 전복할 것이란 피해의식에 시달린다. 남성들이 허위로 선전하는 가부장제를 그녀들이 폭로하고 위협할 것이란 공포다. 이로써 유약하고 보잘 것 없는 남성을 까발릴 것이란 불안이다. 그리고 주체적인 라히미는 그간 단절된 여성을 연결한다. 앞서 “소그라는 어디에?”라고 묻는 소마예가 다른 여성들과 연결되지 않음을, 그녀들은 항상 고립되고 흩어져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라히미는 소그라를 생전에 마주하고, 이후 그녀의 주검과 이어지며, 소그라 및 소마예 유족들과도 연결된다.      


이로써 분산된 목소리, 정보를 이어내 범인 사이드에게 접근한다. 이후 라히미는 사이드의 진실을 폭로하기 위해 녹음기를 켠다. 그간 사이드는 샤리피에게 연락을 취해서 자신이 원하는 데로 기사의 표현을 수정하게 했다. 남성의 펜대로 여성은 탕녀로 전락한다. 그러나 라히미는 왜곡되지 않은 언어를 녹음하고, 또 고래고래 비명을 지른다. 사이드가 매춘부들이 집에 온 사실을 은닉하고 무마한다면, 그렇게 여성들의 흔적은 남성에 의해 현실에 남지 않고 오직 죽음만 허용된다면, 라히미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조작 불가능한 절규를 날카롭게 내지른다. 그것도 남성의 조력 없이 말이다. 그리고 칼을 소지하여 그가 쉽게 그녀를 제압하지 못하게 하고, 지나브처럼 ‘손등’의 상처를 긁고 자극하여 남성이 숨기는 약점을 폭로한다. 가부장제 내에서 남성은 강하다. 사이드를 돕는 이웃들, 지지하는 후원자들에 의해 그는 유족들과 돈으로 합의를 본다. 가부장제에서 남성들의 힘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은 모두 남성에게로 향한다. 그 사회적 비용이 닿지 않아, 오직 매춘이라는 불법으로만 경제에 접근하는 매춘부와 유족들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 가장’에게 의존하며 합의를 본다. 그러나 압바시는 지금까지 가부장제에 의해 부당하게 끊겨왔던 여성의 삶 대신 남성의 부조리가 중단되어야 함을, 지금까지 여성에게 부도덕함을 타자화하여 면피하던 남성들이 청소 대상이 되어야 함을 천명한다. 앞서 가부장제에 의한 부조리한 편집 내지는 연결을 언급했고, 영화의 결말도 그럴 것만 같았다. 사형 직전까지 남성으로 구성된 사법제도는 그를 배려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압바시는 부조리한 연속을 중단한다. 남성은 무조건 살아남는 가부장제의 연결을 중단하고, 대신 그의 처벌을 이어낸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은 수직적이고 섹슈얼한 관계가 아닌 ‘동등한 동료’로 연결되고, 이후 라히미는 떠난다, 어두운 곳에서 버스를 탄다. 항상 으슥한 곳에 홀로 놓인 여성들은 범죄의 표적이 되었고, 이후 사라지는 것이 일반이었다. 불길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젠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압바시는 최소한 라히미가 남성에 의해 사라지는 숏으로 연결하진 않는다. 버스를 탄 숏 이후를 열린 결말로 남겨두며 마무리한다. 여전히 이란의 일반적인 여성혐오로 연결될 수도 있지만, 사이드가 비일반적으로 연결된 여파가, 마찬가지로 여성 또한 비일반적인 연결, 곧 주체적인 삶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그렇게 매춘부가 전락해버린 여성은 다시 기자로 되돌아가고, 반면 평온한 일상을 누리던 가해자 남성은 응당 처벌을 받아야 할지다. 영화의 배경은 2000년~2001년 사이다. 압바시는 당시 마슈하드에 발생한 실화를 각색하여 스크린에 옮겨온다. 2020년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에 왜 2000년대 초반의 사건이 재현되어야 할까? 사이드는 가부장제의 특혜에도 불구하고 처형되었으나 사이드의 청소가 미래로, 곧 오늘날로 이어질 여지도 다분하다. 사이드를 지지하는 남성들, 그의 편을 들며 가부장제에 힘을 싣는 여성 파티마, 그리고 라히미의 카메라에는 범죄를 재현하는 알리와 피해자가 되는 여동생이 담겨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사와 행동을 따라하며 교육받는 아이들은 미래에도 이를 연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버지와 오토바이를 타고 아들로서 가야할 길을 인지하며, 또 사이드 수감 이후 이웃들에게 응원을 받은 알리는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라며 미래에 불길한 씨앗을 남기지 않던가. 그렇게 이어질 수 있는 미래는 날것의 현실을 조작 없이 담은 홈비디오로서, 곧장 영화 바깥으로 뛰쳐나올 듯 생생하다. 여성들의 피해와 남성의 가해를 담은 본 작품의 현실적인 핸드 헬드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여론이 하늘로 올라서고자 연단에 서는 사이드를 지하로 툭 떨어트렸듯, 결국 영화를 추동한 현실의 여론에 따라서 2001년에 마무리된 영화 이후가 달라질 지다. 

2001년의 남성들은 하늘에 닿고자 하였다. 사이드가 수감되어도 깨끗한 비를 뿌리며 흡사 그를 정화하며 면죄부를 수여하는 하늘, 그러나 가부장제가 한갓 우천이란 우연을 사실로, 기적으로 둔갑시켰을 뿐이다. 가부장제가 지향하는 하늘로 향하면 여성의 타자성은 남성의 편견과 동일시되고, 아이들이 놓인 가정은 붕괴되며 미래는 저문다. 그래서 로우 앵글로 포착되어 웅대하게 우러러봐야할 듯한 천상의 남성을 지상으로 되돌려놓는다. 이에 압바시는 본 작품에서만큼은 초자연성을 이해하지 않는다. 그간의 작품 속 초자연성은 배척받던 타자의 성질에 상응하였기에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본 작품 속 이기적인 욕망으로 만들어져 타자를 해하는 가부장적인 초자연성은 되레 배격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비현실적이고 미화된 천상의 남성 대신 그간 무슬림 세계에서 베일에 싸여 있던 여성이란 타자를 바라보고 이해한다. 그 여성이 당하는 수모를 아주 적나라하게 밀착 취재하는 작품, 다만 피해자의 고통을 피학적으로 강조하는 연출은 찬반양론이 갈릴 듯하며, 또 사이드 체포 이후의 전개와 연출은 너무나도 평범해진 점이 아쉽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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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209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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