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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Feb 10. 2023

정주리, <다음 소희>

노동은 누구를, 무엇을 위하여

정주리(July Jung), <다음 소희>(Next Sohee) - 노동은 누구를, 무엇을 위하여     

“현대에 발생하는 전쟁은 자본주의의 평화에서 비롯되며, 이러한 평화는 끔찍하고도 일그러진 면모를 지니고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

대한민국에서는 "손님은 왕이다"라는 의식이 팽배해있다. 그래서 물리적으로 피로감과 압박감을 느끼는 육체노동자 못지않은, 때론 그보다 심한 업무 강도를 서비스직들이 머리에 이고 있다. 2017년 1월 23일 발생한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 자살 사건은 손님이 왕이라는 풍조 아래서, 서비스직을 착취하는 대한민국의 배금주의와 민낯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콜센터로 현장 실습 발령이 난 홍모 양은 업무 스트레스와 과도한 노동 강도에 시달려 끝끝내 자살로 생을 마친다. 콜센터 노동자들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상담 내용은 녹음되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많은 콜센터 노동자는 소비자와 고용주의 갑질, 업무와 무관한 비난, 성희롱에 시달린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어두운 면모를 정주리 감독이 <다음 소희>에서 들춰본다. 1980년 여수 태생의 정주리는 대한민국의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자신이 나고 자란 여수를 배경으로 한 <도희야>로 장편 데뷔하였으며, 신작 <다음 소희>와 마찬가지로 배두나가 ‘형사’를 맡고 법을 고찰하였다. 일단 <도희야>에서 정주리는 대한민국 내 ‘시골’이라는 장소성을 고찰한다. 영화의 주인공 영남은 도시에서 외딴 바닷가 마을의 파출소장으로 좌천된다. 도시에서 시골로 향하는 영남, 그것은 스테디캠에서 거칠고 야만적이며 원시적인 핸드헬드로의 이행이다. 영남이 차를 몰고 가다가 도희에게 물벼락을 뿌렸다. 상해를 입힌 것은 영남이고, 피해자는 도희다. 그러나 피해자에게 다가서는 쪽이 영남이고, 도망치는 쪽은 피해자다. 용하와 점순의 가정폭력, 학교에선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도희는 밤낮으로 도망치지만, 영남 외의 시선은 소녀의 피해를 모르쇠하며 방관한다. 가족과 시골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시골에서는 도희 외에도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진실이 다수의 이익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즉 '개인'의 진실이 실종된다. 영남은 참석하기 싫어도 자신을 환영해주는 마을 잔치에 억지로 불려 간다. 시골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정주리, 그것은 마을의 사리사욕과 이기심, 탐욕이 법을 압도하는 무정부적인 상황에서 발생한다.      


극의 초입부터 교통법규를 어기고 운전하는 점순이 등장한다. 그러나 경찰의 지적은 무기력하다. 이후 용하는 사람들이 다 모인 장소, 모든 것이 탁 트인 벌건 대낮에 외국인 노동자를 하대하고 폭행한다. 이를 목격한 영남은 용하를 체포하나, 마을 주민들은 일손이 모자란대 용하를 잡아갔다며, 가해자 브로커인 용하가 아니라 법을 집행한 경찰 영남을 타박한다. 오히려 불법이 아닌 영남의 레즈비언이라는 성 지향성을 타자화, 악마화하여 이성애자인 자신들의 우월감과 타당성을 꾸며낸다. 피해자들 또한 다수의 이익에 반한다면 그들은 역으로 가해자가 되고, 법과 경찰은 이기심 앞에서 무기력하다. 정주리는 이로 인한 딜레마를 고찰한다. 도희는 모방하는 기술이 탁월하다. 도희 뿐만 아니라 학교의 청소년들도 마을에서 도희를 폭행하는 풍조를 재현한다. 가해자는 곧 선량한 피해자로 전락하고, 피해자나 조력자, 신고자는 가해자가 된다. 그래서 도희는 몸소 ‘피해자처럼 보이는 가해자’가 되어 점순과 용하를 무고한 피해자로 만들어서 죄를 응징한다. 가해자들은 처벌받아야 하지만 그들이 자행한 죄목은 면피되기에, 무고한 피해자로 전락하여 거짓 죄목으로만 처벌받는다. 영남은 그 악순환을 중단하고 선으로, 정의로 나아가는데, <도희야>의 이러한 고찰이 과연 시골에만 국한된 문제일까? 영남은 레즈비언임이 탄로 나자 학교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도시에서 문책성 좌천되었다. 즉 대한민국의 좁고 폐쇄적인 시골이라는 장소성을 고찰함과 동시에, 해당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는 문제를 <다음 소희>에서 시골을 넘어 도시로, 국가로 확대된다. 카메라를 시골 어촌에서 도시로 옮긴 정주리는 도입부에서 춤 연습실을 포착한다. 거기에는 영화의 주인공 소희가 정열적으로 춤을 추고 있다. 영화 후반, 유진은 “왜 소희가 춤을 배웠느냐”고 함께 활동한 댄서들에게 질문한다. 그러나 그녀들은 왜 소희가 춤췄는지 이유를 몰랐고, 이젠 영영 알 수 없다. 우리는 왜 소희가 춤을 췄는지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없게 됐지만, 사실 애초에 목적이랄 게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인간은 소위 사회화 과정을 거쳐 가며, 자신은 '무엇'이라고 사회에 의해 즉자로 규정된다. 그 무엇이 곧 목적이 돼서 행동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그런 목적 없이 자유로운 존재, 춤은 그 무엇과 목적을 망각하고 자유로운 몸으로 회귀하는 행위다. 항상 특정한 목적이나 이유 없이 천진난만한 춤, 이는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알랭 바디우의 주장이다. 사회에 속한 인간은 내가 아닌, 사회의 외재적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내 발과 다리가 아니라, 기기에 의해서 움직이고 거대한 레일, 톱니바퀴에 의해서 작동된다. 노동자로서, 자본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그러나 춤은 그렇지 않다. 외재적 원리가 아니라 내 몸의 요구와 자유분방한 기분을 따른다. 어째서 몸을 흔들라고 요구하는지 모르지만, 또 기분 외엔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이득도 없지만, 그렇게 이유도 모르고 무용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솔직하다. 왜냐하면 그 춤은 외부 기계나 이데올로기에 의존하지 않고, 순전히 내 발과 다리와 팔이 분방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몸에 솔직하고 충실하다. 그래서 정주리 감독은 소희의 춤을 핸드헬드로 포착한다. 핸드헬드는 카메라를 쥔 촬영자의 손과 팔과 다리와 발의 불완전한 떨림을 반영한다. 분명 불안정하지만, 그렇기에 불완전한 인간의 흔적,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인간의 신체를 머금는다. 그것에 의해 움직임도, 이동도 좌우된다. 더욱이 소희는 춤을 출 때 에어팟을 낀다. 연습실엔 적막으로 가득하다. 또 향후 콜센터에 실습을 간 이후엔 소희가 원치 않는,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언사가 그녀의 귀를 날카롭게 후벼 판다. 그러나 소희는 연습실에서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이로써 내재적 요구에 솔직하여, 외재적 원리를 차단한다. 이렇게 귀와 사지에 솔직한 그녀는 자신을 스마트폰으로 녹화한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제 눈으로 본다. 타인의 눈을 빌리지 않고 말이다. 이는 소희가 친구 준희와 만나는 다음 시퀀스와 대비를 이룬다. 준희는 BJ로서 시청자들의 요구에 따라 컨텐츠를 준비한다. 순수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시선은 힘을 지닌다. 사르트르와 푸코는 시선을 중점적으로 탐구한 철학자다. 그들 모두 다 주장은 유사하다. 타인의 언짢고 인색한 시선 앞에 선 우리는 괜히 불편함과 수치심을 느낀다. 그 사람의 판단, 곧 일반성과 정상성에서 어딘지 엇나갔기 때문에 그렇게 날카로운 눈초리로 쏘아보는 것이 아닐까, 자신을 검열한다. 그래서 시선은 힘을 가진다. 나 자신으로서 자유로워야 할 인간을, 타인이 원하는 데로 통제하는 힘이 바로 시선이다. 준희는 전형적인 타인의 시선에 의해 좌우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소희는 다르다. 자신의 몸을 자신이 촬영하여 자신이 보고, 자신의 시선에 따라 자신의 몸을 교정한다. 그러나 연습실에 항구적으로 머물 수 없다. 동료들의 말처럼 "아이돌이 되려고 하나?"와 같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있다면 길게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만을 허용한다. 그러나 소희에겐 그런 목적이 없다. 무목적 혹은 이득 없는 무위의 행위로서 춤을 춘다. 연습실은 지하에 아득히 감춰져 있다. 보호받을 수 있는 동굴 같다. 그렇게 보호받는 것은 자유로운 몸이다. 그러나 위로 올라와야 한다. 위로 올라오니 눈이 내리고 공기는 차다. 아늑한 보호는 끝났다. 산업고등학교에 다니는 소희는 이후 담임이 연결한 하청 업체에 실습을 나간다. 이 과정에서 핸드헬드는 트래블링 숏으로 뒤바뀐다. 핸드헬드와 달리 스테디캠을 동원, 즉 손 너머의 기기를 동원하거나, 아니면 차량 등에 올라탄 트래블링 숏은 매우 안정적이고 보기 좋다. 그러나 기계에 의한 발과 다리는 내 의지가 아니다. 안정과 보기 좋은 움직임에 따른 대가는 자유의 축소다. 연습실에서 소희의 복장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업체에서는 복장에서부터 화장까지 전부 다 기업과 소비자의 눈에 보기 좋게끔 통제한다. 소희는 면접을 위해서 구두를 신었다. 그렇게 남을 위해서 몸을 뒤바꾸면, 자신이 원하는 춤을 추다가 자빠진다. 외재적 원리에 의한 움직임과 내재적 원리에 따른 운동이 충돌한다. <도희야>에서 도희가 춘 춤이 해방적인 몸짓이었듯, 정주리의 세계에서 춤은 타인이 부여한 운명에서 달아나는 숭고한 몸부림이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전락하는 춤, 그 이유를 정주리는 본격적으로 탐구한다. 소희는 이제 콜센터에 출근한다. 그녀가 선택하여 착용한 에어팟 대신, 팀장이 선물해준 헤드셋과 전화기가 그녀 귀에 걸린다. 그리고 에어팟에서 흘러나왔을 그녀가 선별하여 듣기 좋은 청각이 아니라, 그녀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목소리가 엄습한다. 기계에 의해서 발과 다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 소희, 이제는 귀로 침투하여 내면을 찌르는 청각에 의해 감정과 기분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비자들의 발화, 거기에는 정당한 불평, 불만 이상의 인신공격과 성희롱이 내포되어 있다. 소비자들은 돈을 지불하였다. 그 서비스를 소유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유한 사물을 마음대로 다루듯, 콜센터 직원들에게 자신의 목적과 쓰임새를 투사한다. 노동자는 인격 없는 사물이 아닌 자유로운 인간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내에선 사물처럼 의지와 주체성을 내려놓고 소비자들의 이익과 동일시된다. 즉 자본주의가 운행하는 트래블링 숏에 올라탄 노동자들은 발과 다리뿐만 아니라 기분과 감정, 인격까지도 소비자와 동일시된다. 소희는 친구들과 있을 땐 욕설도 하고, 또 제 기분에 따른 발화를 솔직하게 내뱉다가 친구와 틀어져서 떠나기도 한다. 그렇게 타인에게 잠식되지 않는 자신을 보호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소비자들과 그들을 관리하는 부르주아에 의해서 좌우된다. 취업 이전 소희는 자신의 시선 하에 자신을 두었다. 식당에서 준희가 라이브 방송을 촬영하는 것을 쳐다보던 뒤편의 남성들이 왈가왈부하며 그녀들을 폄하한다. 준희는 남성의 시선 하에 놓인다. 그러나 소희는 남성들이 모멸하고 무시하는 시선에 의해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항의하고 들이박는다. 그럼으로써 타인의 시선이 자신을 좌우하지 못하도록 방어한다. 그러나 콜센터에서는 다르다. 부장급인 관리자는 사무실에 직접 나타나지도 않고 줌으로 회의한다. 모니터에 매개되는 단 한명의 부장 앞에 다수의 직원들이 모였다. 부장은 직원들을 바라보며 훈계한다.      


직원들은 현장에서 동떨어진, 줌에 의해 한 꺼풀 가상이 된 시선의 지시를 묵묵히 수용한다. 부장을 바라보거나 쏘아보기는커녕 고개를 푹 떨어트린다. 노동자는 직접 현장에서 일하지 않는, 무위하며 관리하는 부르주아의 시선에 놓이고, 그 시선이 반영하는 소수의 이익에 동일시된다. 이에 따라 자유롭게 욕설도 하던 소희의 입은 메뉴얼이 정해놓은 '대사'를 읊는 스피커로 전락한다. 특정 상황에서 매뉴얼과 다른 대사, 즉흥적인 발화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소비자들 또한 기업의 이익 바깥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다. 노동자는 기업의 이익에 저해되는 소비자의 선택을 결단코 허용하지 않는다. 준호의 자살 이후 각서에 서명한 소희는 개인임을 완전히 포기하고, 기업의 이익만을 반영하는 노동자가 돼서, 아이를 잃은 한 남성 고객을 상담한다. 매뉴얼을 따라 해지 대신 계약을 권유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해야 한다. 즉 노동자들은 소비자의 이익, 그 소비자들에게서 이익을 챙기는 부르주아에 의해서 특유성을 잃는다. 소비자들 또한 그들을 관리하는 기업에 의해서 모두 다 비슷비슷한 선택을 내린다. 소비자는 기업에 의해 어떻게 해도 해약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이러한 가운데서 너와 나의 감정이 사라진다. 해지해달라고 애원하는 고객의 애달픔이, 그것을 헤아려야 할 소희의 감정이, 오직 기업의 삭막한 이성적 계산, 이득으로 짓밟힌다. 영화에서는, 학교에서도 기업에서도 경찰서에서도 교육청에서도, 모두 다 "너(소희, 유진) 때문에 전체가 힘들다"라고 말한다. 모두를 거부하는 '너'는 개인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소희는 준호의 자살에 대한 비밀 유지 각서를 남들과 달리 쓰지 않으려고 했고, 끝끝내 각서를 쓰고 돈을 받은 이후에는 남들보다 목표를 높게 세워서 미친 듯이 일했으며, 인센티브를 받지 못하니 매뉴얼을 거부하고 고객의 약정을 해지한다. 유진은 경찰서에서 종결하라는 소희 자살 사건을 깊이 건드렸다. 그러나 사람을 무한 착취하며 유지되는 체제 하에서, 노동자가 개인임을 지향하면 그것으로 이득을 누리는 '저 꼭대기의 사람'들이 위협을 받는다.      


그래서 이들은 협박한다. 개인의 일탈 행동으로 인해 그 개인이 속한 공동체, 사회 전체가 피해를 입도록 만든다. 그래서 모두, 곧 전체를 위해서 단독 행동하지 말라는 전체주의적 분위기를 형성한다. 전체는 항상 선한 것으로 선동된다. 개인임을 포기하면 이익을 준다. 전체가 다 똑같이 행동하는 분위기 속에서 특정 개인이 목표를 높게 잡아, 업무 강도를 높이는 것 또한 악하다. 개인은 언제나 악하여 준호와 소희, 양자 모두 전체에 의해 죽을만한 사람으로 여론이 매도된다. 이로써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는 언제나 희생된다. 악한 전체의 책임이 피해자 개인에게 타자화된다. 그래서 개인은 거짓된 전체의 일부, 익명으로 둔갑해야만 한다. 이렇게 전체에서 착취당하는 다수는 입에 겨우 풀칠만 할만한, 적은 몫만 누릴 뿐이다. 정당한 인센티브는 환영으로서 영영 유예된다. 영화에선 학교에서 교육청으로, 이후 교육부로의 확장, 또 하청 업체에서 대기업, 노동청 등으로 이어질 조짐이 보이듯, 결국 전체로 이득을 누리는 것은 그 전체를 양성하는 관리자, 그 관리자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최정상의 소수다. 이익을 독식하는 부르주아들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존중하기보단, 숫자나 서류를 들먹거리며 이에 맞출 것을 요구하고 협박함에,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쥐어짜며 자신의 이익, 실제론 극소수의 거대한 숫자를 위해서 부역한다. 법을 관장하는 기관들도 전체에 이익과 얽혀서 방관한다. 이에 따라 영화에서 개인임을 회복하는 일은 언제나 ‘불법’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애초에 사회가 합법으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편법을 이용하고, 또 법을 관장하는 기관에서 권력자들과 내통하는 이익을 위해 불법을 묵인한다. 합법의 야만 속에서 소희와 유진은 폭력으로 저항하며 개인을 회복한다. 또 영화에선 소희가 미성년자임에도 천연덕스럽게 음주하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음주에 더해 담배도 피운다. 법을 지키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에선 결코 그녀를, 또 그녀만을 타박할 순 없다. 기업도 이중계약서를 쓰는 등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학교나 교육청 또한 본래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정주리가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도희야>에서처럼 개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법은 허례허식으로 전락하고, 정의와 인권은 붕괴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희가 미성년자 음주를 했다고 타박할 수 있을까, 청소년인 그녀는 다만 성인을 모방한 것뿐이다. 누구나 다 천연덕스럽게 불법을 저지르는 어른의 세계를. 또 유진이 학교의 교감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을 누가 지적할 수 있을까. <도희야>에서 도희가 합법적으로는 도움을 받지 못하고 불법적으로 제 상황을 타개한 것처럼, <다음 소희>에서도 전체 속에서의 개인, 거짓 속에서의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선 야만적인 합법에 균열을 일으키는 불법이 필요하다. 불법을 동원해서라도 정주리는 진실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음 소희>는 ‘소희의 이야기’와 소희 자살 사건을 추적하는 ‘유진의 이야기’, 총 두 장으로 나눌 수 있다. 1장에서는 전체를 위해서 개인의 진실이 거짓으로 둔갑되고 있었고, 돈에 의해서 법과 정의가 날마다 좌절되고 있었다면, 2장에서 유진은 1장에서 짓밟힌 소희의 진실을 추적한다. 2장, 경찰도 법을 집행하는 제 본분을 망각한다. 경찰 전체 다수의 이익에 좋게끔 자살 사건이 일어나면 비공식 매뉴얼대로, 대충 설렁설렁 조사하고 적당히 보고서를 작성하여 사건을 종결시키면 그만, 딱 보기 좋다. 그러나 유진은 보고서를 쓰기 직전 일반적인 궤도에서 이탈하여 소희의 궤적으로 진입한다. 표면적, 평면적으로 사건에 접근하던 시선을 수직적으로 깊이 들이민다. 소비자에 의한 노동자, 그 꼭대기에 있는 부르주아를 위한 소비자와 노동자로서 착취되며 은폐된 소희의 발자취를 밟아간다. 학교의 선생님과 후배를 위해서, 콜센터 내 동료들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개인은 개인임을 숨긴다. 소희의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딸의 진실을 몰랐다. 딸은 가족이 걱정하지 않게끔 개인적 상황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인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가짜 존재가 아닌, 이를 위해서 은닉한 자신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유진은 단순히 아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소희가 향했던 장소를 다녀보며 소희가 ‘되어본다.’ 자신 안에 소희를 품어보니 쉽게 사건을 뿌리칠 수 없다.     

 

물론 얽히고설킨 매듭은 영화 내에서 풀리지 않는다. 유진의 발걸음은 학교, 하청 받은 콜센터에서 멈추지 못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더 위로 올라가며 거대한 정부 기관과 대기업으로 이뤄진 대한민국 그 자체가 그녀 앞에 뻔뻔스럽고도 오만하게 서 있다. 그것을 한 개인, 혼자서 맞서기엔 버겁다. 그러나 영화는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다. 소희는 죽기 직전 핸드폰에서 모든 자료를 다 지워버렸다. 그러나 포렌식 복구가 가능하다고 한다. 소희 자살 사건에 판결도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경찰이 유진을 어디까지 지원해 줄진 모른다. 당장 지원을 끊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사라진 진실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진행형,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듯 정주리는 자본에 의한 전체주의적 사회의 비극을 꼬집는다. 겉으로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적인 법들이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함께 작동하는 자본주의, 그것도 극단화된 배금주의 앞에서 돈에 의한 전체주의적인 법이 이중으로 공존한다. 그리고 공존함을 넘어서 이윽고 민주적인 법을 유린하고 교란한다. 돈에 의해서 획일화되는 익명적 전체가 탄생한다. 그런 사회에선 살아서는 자유를 추구하기 어렵다. 죽어야만 타인과 돈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나를 지우고, 오직 춤추는 나의 영상을 보존할 수 있다. 죽어야만 자유로운 것이 곧 전체주의적 사회의 민낯이다. 그런 사회에선 전체를 위해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그러나 정주리는 <도희야>에서도 그랬듯, 나의 이익, 전체의 야욕을 잠시나마 내려놓고 개인으로서 타인을 이해하는 시선을 촉구한다. 영화에서 콜센터의 다수가 소비자와 기업을 '돌봐야' 하는 여성으로 구성된 점, 또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 내에서 팀장급으로 올라선 여성 '보람'이 여느 남성들보다 더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것에 주목해볼 법하다. 여성은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오직 돌보는 존재로 전락하거나, 남성들로 이뤄진 더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해선 전통적인 남성성을 체화하여 비인간적이 되기로. 그러나 여성 경찰 유진이 남성 경찰들로 가득한 기존 경찰 제도에 파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또 자살한 팀장 준호가 남성임에도 여성 직원들의 고충을 헤아리던 것처럼, 이성과 합리적인 것만 숭상하는 자본주의에서 다른 것, 다른 성별로 뛰어넘어 이해할 때, 비로소 싸늘한 그늘에 지긋이 다가오는 햇볕이 항구적일 것이다. 시의적으로 유의미한 이야기를 하는 정주리, 다만 연출에서의 매력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다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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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210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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