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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Feb 17. 2023

에밀리 아테프, <안녕, 소중한 사람>

변화와 배려

에밀리 아테프(Emily Atef), <안녕, 소중한 사람>(More Than Ever) 

- 변화와 배려     

“기쁨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온갖 형태의 친밀함이 그렇듯, 기쁨에는 적어도 최소한의 자유가 필요하다.” -재클린 로즈-

지난 2022년 1월 19일 안타까운 뉴스가 보도되었다. 프랑스의 배우 가스파르 울리엘이 향년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는 소식, 사인은 휴가 중 발생한 스키 사고다. 것도 아들과 함께한 안전 구역에서 발생했기에 매우 불행한 사고였다. <단지 세상의 끝>으로 2017년 세자르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무게감 있는 어엿한 중견 배우로 들어서던 울리엘이기에 아쉬움은 배가 되었다. 그의 연기는 일반적인 남성성에 들어맞지 않는 유일무이한 부드러움이 강점이었다. 근작 <시빌>에서는 지성보다 본능, 머리보다 몸에 좌우되는, 우락부락하고 거친 남성을 잘 소화했지만, 이런 일반적 남성상보다는 오히려 여성적이라 할법한 섬세하고 심리적인 연기를 잘 구사하는 배우였기에, 그가 다 꽃피우지 못한 재능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이러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살아생전 울리엘은 다양한 배역을 소화했다. 그가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계기는 할리우드 진출작, <한니발 라이징>을 통해서다. 대배우 안소니 홉킨스의 존재감과 무게가 잔뜩 얹혀 있는 '한니발 렉터'의 유년기를 연기한 가스파르 울리엘, "젊은 배우가 홉킨스의 그늘을 잘 짊어질 수 있을까?" 하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는 야만적이면서도 교묘한 직감, 기민한 지성을 갖춘 한니발 렉터를 섬세한 표정과 영악한 몸짓으로 섬세하게 표현했다. 익히 피상적인 것도 잘 소화하지만, 보이지 않는 내면을 섬세하고도 느리게 끄집어내는 데 탁월한 울리엘의 연기, 이는 베르트랑 보넬로의 <생로랑>에서 실존 인물의 행동 양식을 고스란히 체화한 연기로도 빛을 발했고(당해 세자르 영화제에서는 마찬가지로 이브 생로랑을 연기한 피에르 니네이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나, 이브 생로랑의 행동 양식이나 심리를 보여주는 면에서는 단연 울리엘이 압도했다고 생각한다), <단지 세상의 끝>에서 내면을 드러낼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 한 시한부 게이의 고뇌를 표현할 때도 반짝였다. 그렇게 자신만의 독보적인 연기 스타일을 구축하고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가스파르 울리엘의 마지막 얼굴이 에밀리 아테프의 신작 <안녕, 소중한 사람>을 통해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1973년 베를린 태생의 에밀리 아테프는 독일-프랑스-이란의 영화감독이다. 프랑스계 이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그녀는 자신의 자전적인 출생성분을 반영하듯, 여러 언어가 뒤섞이는 영화를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대표작 <퀴브롱에서의 3일>에서 독일인들이 프랑스로 여행을 와서, 독어-불어-영어가 교차되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언어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국적을 동시에 가진, 인생 그 자체가 여행인 그녀의 작품에서 인물들은 항상 '유랑'한다. 그것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통념, 규범, 욕망에서 해방되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여정이다. 아테프의 대표작인 <퀴브롱에서의 3일>은 독일의 전설적인 배우, 로미 슈나이더가 퀴브롱에서 언론사 stern과 인터뷰하는 3일을 담아낸다. 대중들이 그녀의 말과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마지막 인터뷰였는데, 그 대중들이 보고 싶고 기대하는 ‘로미의 이미지’가 있다. 대중들이 요구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잘 아는 기자, 그것으로 밥벌이하는 옐로 저널리스트는 로미에게 시시 배역을 맡은 이후 벌었던 돈을 어디에 다 탕진했고, 알랭 들롱과의 관계는 어땠는지, 즉 대중들이 굳이 알 필요도 없고 그녀도 밝히기 싫지만, 단지 사사롭고 저열한 욕망이 추동하는 유도신문을 물고 늘어진다. 그녀에게 술을 사주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며, 즉 그녀가 기자에 의한 이미지에 잡아먹힐 수 있는 환경에서 말이다. 세상 모든 것을 깔보는 기자는 로미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친구 힐데의 우정을 폄하한다. 실재는 이미지로 둔갑되고, 우정은 격하되는 로미는 영화 도입부에서 우두커니 멈춰서 앉아 있었다. 자유롭게 비행하는 저 하늘의 ‘연’과 달리, 대중의 기대라는 중력에 붙잡힌 듯 말이다. 또 끝끝내 '사진'의 형태로, 프리즈 프레임으로 멈춘다. 문화산업이 요구하는 이미지에 갇혀서 말이다. 그래서 아테프는 부동과 달리 움직이는 여행을 말하고, 거기서의 사랑을 논한다. 로미는 맨 처음 잠들어있었다. 이후 힐데가 방문하는데, 시시라는 배역으로서 그녀가 아니라, 인간 로미를 긍정해주는 친구의 방문에 그녀는 깨어난다. 

     

이후 힐데는 인간 로미의 입장에서 걱정해주고, 힐데와 함께 그녀는 배역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인생을 즐긴다. 물론 대중이 바라지 않는, 흥청망청 방탕해 보이는 로미는 광인에 가까워진다. 그 로미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상을 내가 보고 싶은 데로 규정하는 저열하고 폭력적인 욕망은 접어두고, 엉망이 된 대상이 내 오감을 불쾌하게 하더라도 그것이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그 추함이 대상의 자유라면 긍정해야 한다. 또 아테프의 사랑은 대상을 진정 아끼고 헤아린다면 떠날 수 없는 책임이 동반된다. 이러한 사랑 아래서 로미는 진정 자유롭다. 아테프는 대중이 아는 로미, 대중이 모르는 로미를 우아하고 감미로운 달리 숏, 흑백으로 비추었는데, 과연 신작에선 어떤 사랑과 여행, 그리고 연출을 보여줄까? 도입부, 아테프는 옷을 고르는 엘렌을 포착한다. 옷은 육체를 가두고 숨긴다. 그러나 아테프는 그 직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엘렌의 얼굴과 신체를 담는다. 옷을 선택하는 그녀는 비교적 안정됐다. 옷은 파르르 떨리는 육체를 숨긴다. 그러나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그녀의 살갗에 밀착, 곧 그녀가 제 육체에 가까워지니, 더는 카메라가 안정적이지 않고 거세게 흔들린다, 육체가 자아내는 우발적인 정념을 되찾았다는 듯. 이후 마티유가 퇴근하여 ‘그에 의해서’ 안정을 되찾아 모임에 간다. 집에서 엘렌은 그녀 자신과 마티유에 의해서 다음 숏으로 연결됐다. 그러나 파티에서는 더 많은 타인들의 시선과 발화가 교차하고, 이에 따라 다음 숏이 규정된다. 즉 많은 타인에 의한 수동적 연결이 더 심해진다. 엘렌은 폐섬유화증에 걸려서, 사실상 시한부다. 그러나 친구들은 가정을 꾸리고 임신도 한다. 다수의 행복하고 기쁜 시선, 삶을 이어가는 발화에 일조하며 그들이 보고 싶은 이미지를 제시해야 엘렌은 연결된다. 그러나 이는 자신에게의 거짓말, 모르는 척, 외면이다. 그래서 엘렌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더는 위하는 척 말라며 폭발한다.      


즉 아테프는 도입부에서 '엘렌 홀로 놓인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타인들과 함께 머물며 교차하는 시퀀스'를 대비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타인에 의한 이미지’의 각기 다른 속성을 부각한다. 전자가 엘렌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면, 후자는 친구들이 유지하고 싶어 하는 평화와 기쁜 삶, 그녀를 파티에 대동하는 마티유에게 선한 것이다, 엘렌이 희생함으로써. 이후 엘렌은 파티에서 뛰쳐나오고, 파티를 화사하게 밝히는 조명이 아닌, 밤 골목의 그늘과 어둠에 자리한다.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파티에서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은 엘렌의 진실, 산소 생성기가 포착된다. 엘렌은 보이지 않아야 진실할 수 있다. 그 어둠 속에서 카메라는 세차게 흔들린다. 그 전에,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엘렌의 신체, 거기서 자아내는 신경질 또한 핸드 헬드였다. 시한부인 그녀는 현재 마음이 뒤숭숭 흔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타인이 바라는 보기 좋은 이미지를 위해서 진실을 애써 숨기고, 불안한 움직임을 멈춘다. 안정적이지 않음, 곧 불쾌나 위험을 다들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후 마티유와 함께 밤길을 걸으며 귀가한다. 둘은 대화를 나누고, 엘렌이 마티유를 위하는 발화를 할 땐 ‘정면’이 포착된다. 마티유가 보고 싶은 엘렌의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마티유가 엘렌을 위할 때는 뒷모습이 포착된다. 엘렌 자신을 위하는 것은 타인이 보고 싶어 하는 시선에 봉사하지 않는 것, 그대의 바람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둘은 다시 정면으로 뒤바뀐다. 부부는 서로를 위해, 사랑이라는 이유로 상대가 원하는 '정면'을 보여준다. 즉 <안녕, 소중한 사람>에서는 죽음을 선택한 엘렌과 그 사실을 부정하고 '이미지'로서 그녀를 바라는 마티유의 입장 차이를 '연출'로써 보여주는데, 본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화상 통화’도 마찬가지다. 엘렌은 엄마와 영상 통화한다. 우리가 실제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이미지가 아니다. 물론 현실에서도 수직적이거나 목적에 따른 관계에 의해 실재는 이미지로 둔갑된다.      


그런데 화상 통화는 대놓고 이미지다. 오감은 오직 시각과 청각으로 제한되고, 특히 시각은 픽셀과 디지털로 환원되어 흐려지거나 변형된다. 본 화상통화의 가상적 특성은 서로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감정을 허위로 숨기는 모녀 관계와 맞물린다. 그전까지 세차게 흔들리던 카메라가 금세 고정되어 안정을 찾는다. 엘렌의 위태로움, 딸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엄마의 애달픔, 이에 따른 흔들림이 서로의 진실이지만, 아무렇지 않은 딸, 걱정하지 않는 엄마를 보고 싶은 서로의 기대와 시선에 의해 안정적인 이미지로 변화한다. 딸은 복잡한 심경을 엄마 앞에서 숨기고, 엄마는 딸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이후 엘렌이 노르웨이에 갔을 때 마티유와 화상통화 한다. 그리고 벤트와 있을 땐 솔직하게 많은 것을 터놓던 그녀는 마티유가 걱정하지 않게끔 ‘거짓말’로 현 상황과 벤트와의 만남을 꾸민다. 타인을 위해서 나의 진실을 숨기고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내게 부정직하다. 그런데 엘렌이 벤트와 영상통화 할 때는 달랐다. 엘렌은 벤트의 블로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마티유, 그리고 그의 친구들을 위해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과 무조건적으로 동일시되는 것이 답답했다. 죽어야 하는 그녀, 죽기로 선택한 그녀가 동일시한 대상이 바로 벤트다. 그의 블로그는 투병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아주 솔직하게 표현했고, 이메일을 주고받다가 이후 화상통화까지 하였다. 엘렌은 '미스터'라고 알려진 벤트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벤트는 카메라가 고장 난 관계로 엘렌이 보고 싶어 하는 그의 얼굴, 곧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후 엘렌이 노르웨이로 여행을 갔을 때, 이미지로 변환되지 않은 실제 그의 얼굴을 보여준다. 또 벤트 블로그의 특징은 타인의 눈에 보기 좋게끔 '꾸민 이미지'가 아니라, 자신이 '솔직하게 본 이미지'만을 게재해놓고, 거기에 언어로 된 설명을 최대한 덜어낸다. 이미지는 그것 자체로 순수하고, 다른 것에 기대거나 지배되지 않는다. 이는 병원·의사의 언어와 숫자에 의해서 좌우되는, 그 언어에 잠식되고 싶지 않지만, 남들의 언어로 설명되며 몸이 식민지화되는 엘렌의 상황과 정반대다.      


그래서 타인의 언어와 시선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엘렌은 벤트에게 마음이 간다, 제 마음을 헤아려 주리라 생각하며. 즉 이미지가 다른 외부 요인에 지배받지 않고 순수하거나, 또 남들이 보고 싶어 하는 상황에서 '어둠'에 가려야 솔직하고 진실하다. 조명 아래서, 시선 아래서 우리는 이미지를 꾸민다. 보기 좋은 것, 드러날 수 있는 것만 검열해서 보여준다. 그러나 어둠 속에선 술에 떡이 된 마티유가 있다. 또 마티유가 바라지 않는, 노르웨이 행 기차를 탄 엘렌이 있다. 그렇게 보여줄 의무가 없기에 검열되지 않은 어둠 속의 그들이 진실이요, 서로는 이를 배려해야 한다. 엘렌은 술에 취한 마티유라도 좋고, 마티유는 결국 엘렌의 여행을 승인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마티유의 시선에 부응하지 않고 벤트의 집에 머무는 엘렌은 자유롭다. 그의 눈앞에서는 어떻게든 살아야 하고, 죽음이 아니라 삶을 선전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관심 없는, 어떠한 배려도 없이 그저 자신의 내재적 원리를 따라 자유로운 자연 속에서, 그녀는 비로소 이미지화된 삶 대신 자신이 바라는 죽음을 선택한다. 우리는 타인의 선택이 그의 자유를 위한 것이라면 긍정해야 한다. 이로써 리버스 숏을 회복해야 한다. 리버스 숏은 우리의 눈앞에 있는 상대방과 시선을 교환하고 소통하며 성립된다. 그러나 영화에서 동등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리버스 숏은 쉽게 성립되지 않는다. 파티에서 엘렌은 시선 둘 곳이 없었다. 삶을 원하는 사람들은 죽어가는 엘렌이 자신들과 다르기에 언짢은지 힐끗힐끗 쳐다봤고, 엘렌도 그들을 쳐다보기 불편했다. 엘렌이 마티유와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엘렌은 폐 이식을 받고 싶지 않다. 의료인들의 의무를 위해서 자기 몸이 좌우되는 것이, 수술 후유증에 의해 선택할 겨를도 없어지는 것이 싫다. 그러나 마티유는 엘렌이 수술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리버스 숏은 서로를 바라보는 숏이 아니라, 둘이 하나로 결합한 부부가 다시 각자의 숏으로 분열되고 갈라서는 분리로 전락한다.  

    

이후 엘렌이 노르웨이 여행을 떠나겠다고 말을 꺼내는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엘렌은 마티유를 바라본다. 그러나 마티유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한다. 오버 숄더 숏에는 그들이 바라보는 상대방이 담긴다. 그러나 상대방은 발화자를 쳐다보지 않는다. 서로의 시선을 튕겨낸다. 이후 엘렌은 노르웨이로 떠난다. 엘렌에게 리버스 숏은 벤트에 의해 성립한다. 서로의 처지를 이해한다. 그러나 이후 찾아온 마티유는 벤트와 엘렌의 관계가 언짢다. 그들의 관계가 이해되지 않는다. 마티유는 분에 못 이겨 벤트를 폭행한다. 즉 리버스 숏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는 마티유다. 그렇다면 그의 무엇에 의해 리버스 숏은 불발되는가? 마티유는 크게 고압적이지 않다. 부드럽고 꽤 섬세한 남자다. 그러나 매끄러운 표면 너머로는 가부장제의 잔재가 남아있다. 가부장제는 어떻게 성립되는가? 여성 학자이자 평화학자, 베티 리어든이 연구하길, 가부장제는 치안이나 안보를 인질로 삼아서 남성들의 힘, 남성 중심적인 구조를 감싼다. 남성들은 힘으로 취약하고 나약한 존재를 지킨다고 논증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보호받아야 하는 나약하고 취약한 존재가 있어야만 했고, 이를 위해서 유약함을 강요받은 것이 다름 아닌 여성이었다. 남성은 지켜준다는 명목아래 유약한 그녀들을 지배, 착취하였고, 여성은 자신들의 생존과 그들의 궤변을 위해서 희생되었다. 여성 삶의 결정은 그녀들을 지배하는 그들에 의해서 좌우되었다. 폐섬유화증에 걸린 엘렌은 일반적인 여성보다 더 취약하다. 그녀는 파티에 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마티유에 의해 옷이 결정되고 입혀져 파티에 간다. 취약한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가장을 더더욱 거스를 수 없다. 그녀가 가고 싶은 곳은 노르웨이다. 마티유는 엘렌의 허락 없이도 그녀를 파티에 대동했지만, 그녀는 노르웨이에 가기 위해서 그의 승인이 필요하다. 마티유는 그녀가 여행을 가기 적합한 상태가 아니기에, 자신의 보호가 필요하다며 여행을 가지 말라고 종용한다. 그러나 마티유는 10년 전, 엘렌의 승인과 무관하게 칠레 여행을 다녀온 모양이다. 그 당시에도 엘렌은 우물쭈물하다가 여행을 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즉 마티유는 분명 친절하고 섬세한 남자지만, 그 부드러움으로 엘렌에게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마티유가 원하는 방향으로 엘렌을 유연하게 회유한다. 엘렌은 그의 지배하에 놓여있고, 그녀 자신은 분열된다. 벤트에게 온 편지를 확인하는 엘렌, 시각은 마티유의 퇴근을 반기는 그녀가 담기지만, 엘렌이 만나고 싶은 벤트의 편지를 낭독하는 청각이 시각과 부응하지 않은 채로 침투한다. 그녀가 원치 않는 것은 불가항력적으로 제시되고 펼쳐진 시각이자 현재, 반면 원하는 것은 그 현재 바깥에서 다가와서 보이지 않고, 다만 추상적으로 들리기에 현실에 접합되지 않는다. 원하는 것과 원치 않는 것이 서로 다른 부부는 관점이 어떻게 다른가? 엘렌은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더 대마초를 피우고 삶을 누리고 싶다. 그녀는 건강을 낭비하고 사치한다. 그렇게 죽음에 한 발짝 더 다가갈지언정, 현재 자신의 감각과 욕구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녀는 마티유와 섹스를 나누고자 한다. 그러나 마티유는 그녀가 대마초를 피우지 않았으면 좋겠고, 섹스를 바라되 그녀에게 부담이 간다고 생각하는지 밀어낸다. 마티유는 현재 그녀가 바라는 쾌락보다는, 그녀 없이 혼자 남겨질 자신의 미래를 염려한다. 그래서 그녀를 비축하고 보존하고자 한다. 엘렌의 욕망은 ‘그녀 자신’을 추구한다면, 마티유의 욕망은 ‘그녀를 필요로 하는 자신’을 바란다. 그러나 서로를, 특히 그녀에게 집착하는 마티유가 엘렌을 이해해야 한다. 엘렌과 미래를 꿈꾸는 마티유가 동경과 이상의 색채인 파랑이라면, 지금 여기에서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쾌감을 좇는 엘렌은 빨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의 섹스가 불발된 이후, 엘렌의 꿈으로 추정되는 시퀀스에서 보랏빛 조명 아래 엘렌과 마티유가 서로의 얼굴을 맞대며 음악을 감상하고 몸을 은은하게 흔들고 있다. 마티유는 자신의 파랑을 엘렌에게 강요했다. 엘렌은 파랑을 위해서 빨강의 순간을 희생, 배를 갈라야 하고 수술 실패로 인해 고통 받으며, 이로써 현재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싫다.      


그래서 엘렌은 마티유와 자신의 색채가 녹아들길 바라는 것이라, 빨강과 파랑이 뒤섞인, 그렇게 뒤섞이면서도 파랑과 빨강 각각을 보존하는, '얼어붙은 빨강'으로 일컬어지는 보라로써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듣는 노래 가사는 확고하고 구체적이기보단, 흐물거리고 추상적이다. 흡사 언어로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는 영혼, 내면, 존재 그 자체에 상응하듯, 그 하나의 추상을 둘이 함께 듣는다. 오직 상대를 위한 구체적이고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각자의 불확정적이고 자유로운 상태를 존중하는 연합을 지향하듯. 그러나 엘렌만 남겨지고 조명은 변화하며, 그녀는 꿈에서 깨어난다. 불가능한 가상이었나, 그러나 현실에 보라의 순간을 실현해야 한다. 이를 실현할 수 없는 영화 초반에는 수중 시퀀스가 인서트된다. 파티에 가기 싫은 엘렌의 감정이 담긴 시퀀스, 마티유에 의해 파티에 가는 엘렌을 포착한 시퀀스 사이에 푸르른 바다 위에 부유하고 잠수하며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푸티지를 외부에서 인서트한다. 또 수술을 두고 엘렌과 마티유가 다퉜을 때, 이후 엘렌이 혼자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 이후에, 또다시 엘렌이 수영하는 푸티지가 삽입된다. 인서트는 매끄러운 현재에 과거나 미래, 존재하지 않은 시간이 침투하는 것, 매끄러운 흐름이나 일반적으로 이어지는 서사에 균질하지 않은 무언가를 삽입한 것이다. 그렇게 삽입된 것은 현재나 일반적인 흐름, 맥락에 잘 접속되진 않는다, 어색하다. 그런데 일반적인 것이 마티유에 의해 자신을 박탈당한 엘렌이요, 외부에서 인서트되어야 하는 것이 마티유에 의해 불발된 엘렌의 자유다. 아테프는 바다와 호수가 담긴 푸티지에서 액체의 자유로운 변형 가능성을, 곧 이를 열망하는 엘렌의 자유를 긍정한다. 인간은 불명확한 것, 불확실한 것을 싫어한다. 그것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확고하게 규정된 것을 보며 안정감을 느낀다. 그러나 액체 시퀀스는 시시각각 움직이며 변한다. 그래서 이를 바라보는 타인에게는 불안할지 모른다, 어떤 형태로 내게 엄습할지 모르므로, 마티유가 붙잡아 둔 계획을 파기할 가능성과 힘을 지녔으므로.      


그런데 마티유의 생각이 어떠하든, 엘렌은 그에 의해서 옷에 가둬지는 것, 이로써 타인에게 봉사하는 자신의 신체를 원치 않는다. 대신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순수한 신체'를 나체로서 노출하여, 마찬가지로 변화무쌍한 강과 물아일체 되고 싶다. 수영뿐만 아니라 비행하며 어디로든 향하는 갈매기를 갈망한다. 이후 두 번째 인서트에는 엘렌의 신체 기관 각각을 클로즈업으로 부각하여 담는다. 평소에는 주목받지 못한 기관, 감춰진 기관들이 나체로 해방되며 드러나고 가까워져 주목받는다. 엘렌은 바로 그 몸의 해방을, 또 그 몸이 죽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긍정한다. 엘렌은 노르웨이로 향해 제 몸의 변화가능성을 지지하고, 그간 비일반적이던 물의 풍경, 엘렌의 자유를 일반화한다. 노르웨이로 떠나는 기차에서 엘렌은 풍경을 본다. 발전소가 포착된다, 거대하다. 그러나 마티유가 엘렌에게 에너지를 낭비하기보다는, 건강을 비축하길 원하는 것처럼, 거대한 발전소에서의 목적과 가능성은 제한된다. 오직 생산과 노동, 하나의 목적으로 거대하다. 또 도시의 사람들은 예의를 차린다. 그러나 그 예의를 위해선 나도 예의를 차려야 한다, 지금 당장 죽음을 맞닥뜨린 마음이 심란하고 뒤숭숭한데도 불구하고. 그러나 자연은 배려하지 않는다. 엘렌은 백야에 의한 눈부심, 지나친 적막과 새들의 지저귐으로 인해 잠을 설친다. 마찬가지로 그런 대상을 엘렌 또한 배려하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위안을 받는다. 외재적 원리가 아니라, 내재적 원리에 따라 이리 저리 흐르는 자연물들의 생명력, 바람과 강물의 유연함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다. 완고하게 살거나 건강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제 감정을, 죽음으로 변화할 수도 있는 제 삶을 환기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 초반에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주로 사용되었다. 프레임에 얼굴만이 꽉 찼다. 엘렌과 마티유의 얼굴, 그 외의 것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이 속한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정확히 그려보기 어렵다. 오직 배우자로서 그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노르웨이에선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점차 클로즈업, 미디엄숏, 풀숏, 롱숏으로 완화된다. 그들의 얼굴 외에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 서로의 배우자로서 확실하던 얼굴에, 불확정적인 자연의 불가해함과 숭고가 배경을 이룬다. 그 배경에 속하며 불확정적으로 변한 엘렌은 산책하다가 쓰러진다. 죽음에 더 가까워지고 고통과 불쾌가 닥쳐온다. 그러나 그것이 이젠 '당연'하다. 확실함이 아니라 변화와 미지와 불확실성이, 그것에 의한 삶이. 이 불확실성과 타협하지 못한 마티유가 노르웨이에 도착한 이후, 부부는 한 차례 말다툼한다. 그간 부부는 서로의 귀에 듣기 좋게끔 회유했다. 그간의 사랑은 ‘연합적 사랑’이었다. 철학자 헤르만 슈미츠는 연합적 사랑과 변증법적 사랑을 구분한다. 연합적 사랑을 추구하는 두 연인은 양자가 공동으로 속하는 환경, 분위기를 위해서 헌신한다. 환경이나 분위기에 속한 양자 모두 최선이기 위해 자신을 일련 희생한다. 반면 변증법적 사랑은 공동으로 처하는 분위기나 상대방을 위해서 헌신하지 않는다. 오직 각자의 감정이나 자유를 중시한다. 그래서 서로를 위한다는 규칙을 따르는 연합적 사랑의 반응은 예측 가능하다면, 변증법적 사랑의 반응은 서로의 기대에 들어맞지 않는 우발성이 특징이다. 그간 엘렌은 가부장제라는 타의에 의해서, 또 자의로 마티유와 연합적 사랑을 맺으며 자신을 일련 희생했으랴. 그러나 희생할 삶의 여유분이 더는 없다. 마티유 또한 엘렌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인내하기보단 조급해진다. 이젠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제 견해를 거칠게 토해낸다. 엘렌은 마티유에게 떠나 달라고 부탁하고, 마티유는 엘렌에게 함께 있어 달라고 간청한다. 이후 마티유는 엘렌의 산책을 따라간다. 그간 엘렌의 거친 핸드 헬드는 마티유가 접할 수 없었다. 사랑을 연합한 그의 눈을 안심시키고자 핸드 헬드를 단정하게 가다듬었다. 그러나 엘렌의 거칠고 급박한 호흡에 따른 핸드 헬드를 마티유도 직접 겪는다. 마티유는 자신의 아집을 위해서 엘렌과 강제 연합하는 것이 폭력이라는 것을 깨달았을까? 섹스를 거부하던 마티유는 이제 엘렌과 섹스하며, 자신의 소망이 아닌 그녀의 소원으로 연합한다.      


지금까지의 클로즈업에는 각자의 신체만 담겼었다. 그러나 마티유의 엉덩이에 엘렌의 손이 얹히고 서로의 입술과 시선이 밀착하며, 비로소 고립된 숏은 뒤섞여 '보라색'이 되고, 단절된 오버 숄더 숏은 시선을 응시하는 리버스 숏을 성립한다. 이후 마티유는 진정 사랑하는 그녀의 연합할 수 없는 상태를 배려하고자 곁에서 떠난다. 엘렌이 생의 최후에 택한 변증법적 사랑은 그녀 혼자 감당하는 것이라면, 마티유의 연합적 사랑은 엘렌이 최후까지 자신을 희생해야만 했다. 그렇게 연합적 사랑이 폭력과 지배로 변질된다면, 상호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서 변증법적 사랑을 선택한다. 즉 아테프는 나를 위해서 상대를 소유하고 동일시하는 가부장적 태도로부터, 집착하지 않고 유연하게 변형하는 물의 정신을 일깨운다. 아내, 이웃과 생각이 다르다면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 비켜주고 떠나던 벤트처럼, 그렇게 엘렌과 마티유도 제 갈 길을 가며, 여자는 죽음을, 남자는 삶을 긍정한다. 가부장제 내에서 남성이 시선을 굽힐 때 비로소 여성은 동등해지며 자유롭고, 남성 또한 바라는 관념이나 이상이 아닌, 받아들여야 할 진실을 긍정할 수 있는 법이다. 가스파르 울리엘의 사망으로 참 기묘해진 작품이다. 작품에선 남겨진 울리엘, 그러나 이젠 그가 떠나갔으니 말이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본 유작은 그를 잘 떠나보낼 기회를 제공한다. 존재는 남겨질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는 만큼, 자신의 슬픔을 위해서 상대를, 그리움을 집착해선 안 되는 법이다. 선택이 아니라 사고이긴 하지만, 그의 운명이 그래야만 했다면 슬퍼하되, 아집하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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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217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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