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3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Feb 19. 2023

지아니 아멜리오, <개미 대왕>

전체의 눈, 개인의 눈

지아니 아멜리오(Gianni Amelio), <개미 대왕>(The Lord of the Ants) 

- 전체의 눈, 개인의 눈    

“여하간 우리의 문명 안에서는 개인화의 모든 메커니즘이 어린아이, 광인, 환자, 범죄자 등을 중심으로 가동되고 있다.” -미셸 푸코-

1922년 카스텔아쿠아토 태생의 알도 브라이언트는 이탈리아의 작가이자 개미 연구가다. 그의 나이 20살이 채 되기도 전에 이탈리아에선 파시즘의 광기가 불어 닥쳤고, 이후 자국이 속한 전 유럽은 불바다, 생지옥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알도는 자신을 좌절케 하는 광기의 물결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는 성년이 채 되기도 전에 반파시스트 운동이 몸담다가 체포될 정도로 자유를 억압하는 이념 및 전쟁에 과감하게 맞섰고, 개미의 끈끈한 연대를 연구하며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지향해야 할 인간성을 엿보고 실천했다. 파시즘에 굴복하지 않았던 알도는 전쟁이 끝나고 파시즘 정권이 몰락하고서야 겨우 풀려난다. 이후 그는 고향을 떠나 로마에서 활동을 이어갔는데, 고향을 등진 이유 중 하나는 동성애자였고 진보적이었던 알도는 보수적인 아버지의 간섭을 피해 자유롭게 삶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동거하던 지오반니 산프라텔로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였는데, 한편 그것을 인지한 산프라텔로의 아버지가 알도를 고발한다. 산프라텔로의 아버지는 파시스트였고 가톨릭 신자였기에, 공산주의자이자 동성애자였던 알도가 제 아들과 엮이는 것을 혐오하였다. 그렇게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공동체의 연대와 우애, 사랑을 가로막는 야만적인 이념은 이름을 바꾼 채 살아남아, 개미의 공동체성을 지향하는 알도를 탄압한다. 이러한 알도의 우여곡절 많은 삶을 이탈리아의 노장 지아니 아멜리오가 <개미 대왕>으로 영화화한다. 1945년 칼라브리아 태생의 지아니 아멜리오는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이다. 메시나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그는 학업을 병행하며 영화에도 관심을 두고 잡지에 평론을 기고하였으며, 이후 로마로 이주하여 영화계에 뛰어든다. 로마에서 TV 시리즈를 연출하던 그는 1982년 <블로우 투 더 하트>가 베니스 영화제에 프리미어 되며 정식으로 데뷔하였고, 항상 그는 자신의 영화에 유년기(그가 태어난 직후 아버지가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가장 및 아버지적 존재가 부재하였다)를 반영하였다.      


데뷔작 <블로우 투 더 하트>에서 부자는 계속 멀어지는, 잡히지 않는 존재다. 영화의 도입부, 아버지 다리오는 아들 에밀리오에게 감상한 오케스트라에 대해서 떠들지만, 자신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아내 및 딸과 달리 아들은 심드렁하다. 부자는 카메라를 향해서 다가오지만, 카메라도 마찬가지로 달리 아웃하며 부자와 거리를 두고, 이윽고 숏의 말미에서 아버지, 아들, 카메라는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라메리카>에서도 아버지 미켈레는 전쟁으로 아내와 아들을 잃어버렸고, 그 아버지는 치매를 앓으며 현재에서 더더욱 멀어져 부자는 서로를 찾을 길이 없다. 아멜리오 작품에서 반복되는 아버지와의 멀어짐, 그 원인을 감독은 탐구한다. <블로우 투 더 하트>에서 가족은 화목하다. 화목한 이유는 서로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에밀리오의 여동생은 온종일 전화 통화를 하느라 바쁘고, 어머니 또한 이어폰을 귀에 끼고 문서 작업을 해서 에밀리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않는다. 서로 잘 모름에 막연하게 낙관적일 수 있고, 그래서 화목하다. 이 정경은 평화로운 정원으로 상징되지만, 이윽고 서로 간의 무지에 에밀리오가 사라져도 어머니는 아들을 찾을 수 없다. 반대로 <어린이 도둑>에서 가족은 이미 붕괴된 상태다. 로제타와 루치아노의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남매의 어머니는 로제타를 아동 성매매에 동원하는 포주이며, 아버지가 되어줄 법한 중년 남성은 성 매수자다. 그것이 가족의 실체다. 물질적으로는 가까이 붙어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서로 아득히 소외되거나, 누군가의 욕망에 잠식당하는… 아멜리오는 황량하고 빈곤한 장소, 공간 등의 물질성, 이에 반해 미묘하고도 복잡하게 표현하는 배우들의 감정적인 디렉팅을 대비한다. 그 연기가 가족의 피상을 넘어야 접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아멜리오는 연출에 있어서 네오리얼리즘을 계승하는데, 이를 더욱 과감하게 밀고 간 <라메리카>에선 거대한 아버지-국가가 등장한다. 2차 대전 당시 알바니아를 침략한 이탈리아, 영화의 배경인 1990년대의 이탈리아, 언제나 알바니아에게 이탈리아는 아버지 내지는 주인이다.      


전쟁 당시에는 침략 및 점령을, 공산정권이 붕괴한 1990년대 알바니아를 상대로는 경제적, 문화적 식민화를 시도한다. 알바니아의 아들들인 어린이, 청년들은 구걸하는 존재, 도둑으로 전락한다. 즉 아멜리오는 평화롭고 행복하다고 선전하는 가족의 실체를 무지, 착취, 주종관계, 식민화 등으로 진단한다. 그의 영화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세대 차이를 느낀다. <블로우 투 더 하트>에서 에밀리오는 청소년기 학생이다. 다리오는 시대의 식자들, 권력자들을 먹물처럼 표현하지만, 에밀리오는 그들에 대한 나름의 선망이 있다. 또 다리오는 2차 대전 당시 정치적 입장을 정확히 알 순 않지만 전쟁에 참여했고, 또 현재는 붉은 여단의 테러에 은밀하게 공조한다. (아멜리오는 <순응자>의 주연인 장-루이 트린티냥을 캐스팅하여 시대에 순응하는 인물을 다시 한번 재현한다) 다리오는 숨기는 자, 그리고 테러까지도 감행하며 억지로 뒤바꾸는 자, 아들에게 폭력을 가하진 않지만 자신의 바람을 은밀하게 가스라이팅하는 자다. 교수인 아버지가 숨기고 꾸미는 것을 설교하고 강의한다면, 반면 에밀리오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고 달아나거나 반박하는 '기자'로 그려진다. 다리오가 구 이념이라면, 에밀리오는 신 이념이다. <어린이 도둑>에서는 새로운 이념을 이끌고 만들어가야 할 '젊은 아버지상'으로 ‘카라비니에르’인 안토니오를 제시한다. 로제타, 루치아노, 안토니오 모두는 항상 달아난다. 이들이 달아나는 것을 기존 보호자들은 방치했다. 남매의 어머니는 로제타에게 성매매를 요구하는 동안 루치아노를 내쫓았고, 미성년자 성매매의 피해자인 로제타를 안토니오의 고향이 내쫓는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도망쳐야할 때마다 그들을 붙잡고 위로하며,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채로 내쫓기는 그들에게 하나의 롤모델이 되어준다. 사기꾼을 닮아가던 루치아노는 이제 안토니오를 동경한다. 기성을 대체하는 새로운 아버지상은 유동적인 바다라는 장소성, 폐쇄적인 공동체의 답습을 깨트리는 외지인의 개입 등으로 발생한다.      


<라메리카>에서는 두 아버지 내지는 아들들이 등장한다. 치매 및 노환으로 인해 1990년대에 육신이 머물러있음에도, 정신은 2차 대전 당시를 향하는 미켈레에게 이탈리아의 모습은 알바니아와 별 다를 바가 없다. 19~20세기 이탈리아-아메리카 대 이주처럼 떠나야 할 땅으로, 현재의 알바니아를 이탈리아라고 여긴다. 한편 1990년대를 살아가는 청년, 나이는 젊지만 알바니아를 우롱하고 군림하고자 하는 지노는 돌아가야 할 땅으로 간주한다. 한편 지노의 사기 행각이 적발되어 알바니아 당국에 여권이 몰수되자, 그는 이탈리아인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잃어버린다. 그의 정신은 주인인 이탈리아인인데 몸은 알바니아인들과 구별할 길이 없어지고, 돌아갈 땅에선 착취와 지배가 기다리고 있으니, 아버지/아들 내지는 주/종 사이에서 그는 절망한다. 반면 미국으로 향하는 것이라 착각하는 미켈레는 희망찬 얼굴로 그려지며, 20세기 몇 세대에 거친 이탈리아인의 초상, 그리고 알바니아인의 모습을 단 하나의 시퀀스에 입체적으로 담아낸다. 아멜리오 작품에서 연속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오이디푸스적 갈등, 부친살해 신화가 지속되며 패배하는 쪽은 주로 아버지지만, 마찬가지로 아들에게도 남는 것은 없다. 반대가 승리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블로우 투 더 하트>에서 에밀리오는 단순히 정치적 신념 때문에 다리오를 추적하지 않았다. 줄리아라는 여인을 이성적으로 흠모하였기 때문인데, 그녀의 남편 산드로가 사망하여 그녀를 찾는 도중 아버지의 비밀을 목격한다. 그렇게 구시대와 새로운 시대는 충돌하고, 후자가 전자를 무너뜨리지만,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 함께 줄리아는 체포되기에 에밀리오에겐 남는 것이 없다. 아멜리오의 자전적인 환경처럼 아들 혼자 남을 뿐이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부추긴 욕망은 허망하다. <어린이 도둑>에서도 갈등의 골은 깊다. 로제타와 루치아노의 아버지 자리를 놓고 구 이념과 신 이념이 충돌한다. 구 이념이 안토니오의 무책임한 상관, 고아원에의 방치라면, 안토니오는 아이들의 삶을 헤아리고 가장 적합한 시칠리아에 데려다주려 한다.   

   

하지만 이제 갓 사회에 진입한 청년 안토니오의 바람은 좌절되고, 결국 쓸쓸하게 방치될 아이들의 미래만 제시된다. 이렇게 20세기 이탈리아의 정치적 격동을 부자관계-아버지에 빗대어진 국가와 정치, 구조, 제도, 그리고 아들에 빗대어진 약소국들과 국민-, 오이디푸스적 신화를 전유하며 풀어내는 아멜리오는 2014년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했다. 그런 점에서 <개미 대왕>은 그간 아멜리오가 지속해온 구시대를 무너뜨리는 아들의 상이 알도 브라이언트에게 반영됨과 동시에, 자신의 성 지향성에 의한 삶을 알도를 통해 간접 엿보는 작품이 될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연출, 그간 아멜리오의 형식은 피상적으로 보이는 것 너머의 복잡한 심리를 가시화하거나, <라메리카>에서 실제 알바니아 비전문 배우들의 얼굴을 생생히 클로즈업하며 네오리얼리즘을 계승하였다. 또 <라메리카>에선 실제 역사의 방대함에 따라 거친 네오리얼리즘에 블록버스터를 결합하기도 하였는데, 과연 <개미 대왕>에선 어떤 기조가 이어질까? 아멜리오는 본 작품에서 롱테이크와 리버스 숏을 대비하며 사용하여, 개개인의 자유가 무력화되던 야만의 시대를 고발한다. 본 작품의 시작은 롱테이크다. 엔니오와 그의 사촌 그라지엘라가 담겨있다. 아마도 이탈리아 공산당 전당대회가 열린 직후로 추정된다. 사회주의 깃발이 펄럭이고, 또 야외 스크린에는 혁명적인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여기서 특이한 점, 엔니오와 그라지엘라가 스크린을 바라보지 않고, 스크린이 엔니오와 그라지엘라를 응시하고 있다. 뒤편의 시선이 그들을 바라보며 좌우한다는 듯이, 실제로 그들은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이 믿는 이념을 거쳐서 세상을 바라본다. 이윽고 그들의 눈에 알도와 에토레가 비친다. 엔니오와 그라지엘라는 하나의 테이크 안에 공존했다. 사회주의라는 하나의 이념에 묶인다는 듯이. 그러나 알도와 에토레는 다르다. 다수가 하나의 숏에 함께 머무르는 앞선 롱테이크와 달리, 알도와 에토레는 각자의 숏을 점유한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는데, 각자의 동공을 지배하는 뒤편의 알력은 없다. 그들의 시선은 독립적으로 자유롭고, 눈망울은 반짝인다. 검열에 따른 사랑이 아니라, 제 몸과 정신이 가리키는 상대방을 바라봄에 생기가 돈다.      


이윽고 그들은 시를 낭송한다. 시는 시인 개개인의 고유한 문법을 따른다. 본래 문법에 따른 단어의 뜻이나 문장의 배열을 전환하여, 자신 바깥에선 일반적인 것들을 뒤틀어 비일반적인 나만의 관점과 정서를 얘기한다. 에토레와 알도는 롱테이크에 잠식되지 않은 채로, 각자의 시를 논하며 사랑에 솔직하다. 이러한 롱테이크, 리버스 숏의 역할은 이후 시퀀스에서 더 강화된다. 에토레의 어머니와 그녀가 붙여놓은 밀고자에 의해서 에토레는 알도와의 동거가 탄로 나고, 가족의 손길에 의해 마취되어 다리와 발이 질질 끌리며 붙잡힌다. 본 장면 또한 엔니오와 그라지엘라가 포착되던 숏처럼 롱테이크다. 에토레의 눈이 감긴다. 그의 시선을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이 대체하여, 그녀의 시선이 바라보는 곳으로 아들의 몸이 옮겨진다. 이동과 이어짐은 수동적이다, 이후 에토레는 정신병원에 갇힌다. 당대의 파시스트들이나 보수주의자들은 동성애를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간주했고, 이를 거부하면 자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라지엘라가 사귀었던 실비오의 주장이다. 본 관점은 동성애자들의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한다. 그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솔직한 시선을, 이성애자인 자신들의 관점을 덧씌워서, 가짜 삶을 강요한다. 동성애자가 갇힌 정신병원에서 한 광인이 에토레의 어머니를 바라본다. 동성애자와 더불어 보편적인 시선을 강요받거나 사회에서 격리된 광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영화의 시점 숏에 진실한 제 시선을 투영한다. 그러나 정신병원 내/외부를 가로막는 철창이 시야를 방해한다. 멀어지는 것과 가까워질 수 없다. 서로를 응시하며 밝히는 리버스 숏과 달리, 광인은 혼자 애처롭게 바라보고, 그가 바라보는 대상은 서서히 사라져감에 광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지워진다. 진실은 수감되고, 거짓은 바깥에서 번창한다. 이후 에토레는 정신병원에서 고문에 가까운 전기 충격 치료를 당한다. 치료 직전까지 에토레는 의사와 병원을 믿었다. 제 말을 믿어줄 거라 생각했고, 또 자신의 간청에 따라서 알도와 연락을 취해줄 것을, 제 눈앞에 알도를 현현해줄 것을 굳게 믿었다.      


그러나 전기충격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에토레는 자연스럽게 눈이 감기고, 의사의 동공이 그의 육체를 좌지우지한다. 이후 다시 눈을 뜬 에토레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그의 동공이 바라고 열망했던 알도가 아니라, 그가 원치 않아 달아났던 어머니다. 어머니는 에토레를 바라본다. 그러나 에토레는 어머니를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틀고 숙인다. 에토레가 쳐다보지 않기 때문에 리버스 숏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계속 에토레에게 시선을 가하고, 끝끝내 그와 포옹하며 리버스 숏을 억지로 조성한다. 아멜리오는 본 작품에서 '시선'으로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는 ‘자유’를 말하고, 리버스 숏에선 솔직하게 바라보는 존재의 시선이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최후의 자유가 담긴 리버스 숏까지 개개인의 자유를 말소하는 전체주의자, 자유를 착취하는 부르주아지들이 앗아간다. 그러나 아멜리오는 어떻게든 본다. 법정에서는 에토레가 왜 끔찍한 몰골로 나오게 되었는지 상세하게 설명해주지 않거니와, 알도를 악마화하며 에토레의 누추한 몰골의 탓이 동성애의 결과인양 선동한다. 실상 알도를 악마화하는 검사와 가족 측에서 에토레를 그렇게 훼손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아멜리오는 법정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본다. 그는 에토레가 전기충격을 당하는 장면을 오롯이 집중한다. 카메라 워킹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하고, 전기 충격 과정을 롱테이크로 날 것에 가깝게 기록하며, 촬영이나 편집이 아닌 프레임 내의 순수한 행위와 대상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 이후 이성애자의 폭압에 의해 동성애자의 몸이 파르르 떨리며 기절하는 참혹함을 있는 그대로 보존한다. 감상자는 알게 된다, 당대의 구조가 왜곡하고 은닉하는 거짓의 시선이 아니라, 그들의 힘으로 깔아뭉개진 약자와 소수자들의 진실한 시선을 말이다. 이후 영화는 플래시포워드 구성을 취한다. 현재가 자유롭다면 과거로 갈 이유가 없다. 과거는 이미 끝난 것, 종결된 것들이 자리하고 있으니 불가능이다. 그러나 현재가 불가능이라면, 과거는 이젠 불가능하지만 한때 가능했던 것으로서, 회고는 자유의 숨통을 트인다. 그래서 사랑이 찢긴 동성애자와 진실을 파헤치는 기자 엔니오는 과거로 간다.    

  

플래시 포워드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앞서 서술한 롱테이크와 리버스 숏의 역할이 뒤바뀌어 있다는 점이다. 롱테이크 내에서 알도와 에토레는 공존한다. 제자 에토레는 스승 알도에 의해서 본다. 그러나 알도에 의해서 보는 것을 에토레가 선택한다. 막무가내로 들이닥쳐서 마취시키거나, 전기 충격을 가해 만들어낸 시선이 아닌, 주체적인 시선이다. 반면 리버스 숏은 고립에 상응한다. 탈리아페리 가족의 저녁 식사는 롱테이크가 아니라, 각각의 얼굴을 포착한 숏들을 이어 붙인 시퀀스에 담긴다. 해당 시퀀스에선 에토레의 어머니 마들렌이 들은 소문과 편견으로 알도를 평가한다, 실제로 알도를 경험하고 느끼는 에토레의 입 대신에. 에토레는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어머니와 단절되거니와, 특정 대화는 표준 이탈리아어가 아닌 '에밀리아로마냐어'로 진행되기에, 번역되지 않는 언어와 외면하고 싶은 발화로 서로는 고립된다. 즉 영화에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와 자유를 유지하려는 개인 사이의 상이한 연출 차이가 있고, 서로는 그 형식을 향해서 영향을 뻗치며, 더 낫거나 더 나쁘게 뒤바꾸려 한다. 나누지 않고 교류하지 않는 전형적인 부르주아지인 탈리아페리 가족의 고립된 리버스 숏을 에토레는 알도와 만나며 서로의 눈을 응시하는 리버스 숏으로 바꾸었으나, 정작 상호 능동적으로 초원에서 개미를 바라보고 서재에선 연구를 함께하던 롱테이크를 부르주아지는 일방적인 타율로 뒤바꾸었다. 이는 영화의 제목에도 언급되고, 실제 개미연구가이기도 한 알도 브라이언트의 '개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전체주의자들의 약육강식과 다른 것을 용인하지 않는 태도, 기독교의 자연법은 자연의 본성에 기반을 두고, 그것을 추론하기 위해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동물인 개미의 생태를 빌려온다. 영화에선 개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개미는 혼자서는 길을 잃는다. 함께 있어야 길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을 곧 전체주의적 관점에서는 무리를 이루는 하나의 보편적, 일반적인 관점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해석하리.      


에토레의 형 리카르도는 마들렌처럼 에토레가 가족이라면, 그리고 그의 동생이라면 무조건 말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리카르도 자신이 더는 알도를 보지 않을 테니, 에토레도 보지 말라고 강요한다. 또 엔니오는 알도에게 그가 동성애자로서 소년이 아닌, 이성애자로서 여성을 사랑했으면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즉 전체주의적 관점은 전체의 공통된 길을 위해서 혼자 길을 가는 것을 금기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개미와 자연이라며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에토레는 알도에게 날개를 잃은 공주개미를 보여주며 혹시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나 알도는 무리에서 멀리 떨어져서 제 길을 찾아 가는 공주개미가, 이제 날개를 떼고 본인만의 군집을 이룰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다. 즉 일개미 전체가 아니라 공주개미에게 국한되어 있긴 하지만, 개미는 독립한다. 더욱이 일개미라 할지라도 전체를 위해서 무조건 착취되거나 희생하지 않는다. 알도가 밝혀낸 일개미들의 특징 중 하나는 선과 이익을 나눈다는 것이다. 개미의 정신은 오히려 알도와 엔니오가 믿는 사회주의에 가깝다. 리카르도가 알도와 토라진 이후, 파티에서 나와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목에서 본래 리카르도만 포착되었다. 그러나 리카르도가 에토레에게 자신처럼 알도와 만나지 말라고 강제 지시하자, 리카르도가 있는 숏에 에토레가 억지로 편입된다. 그러나 형의 지시를 원치 않는 에토레는 그와 다툰 이후 리카르도는 집으로, 동생은 알도의 집으로 향한다. 각자는 혼자서 제 길을 찾을 수 있다, 다만 혼자서 하기 버거울 때 함께하여 공동의 길을 찾는다. 혼자서 갈 수 있는 타인을 나와 동일시하는 것은 폭력이다. 알도는 어머니 수잔나와 멀어져 로마로 이주한다. 그는 혼자 갈 수 있다. 그러나 에토레에겐 무리다. 그래서 알도에 의해 에토레는 스승의 숙소로, 게이들의 파티로 인도된다. 또한 알도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이 주체적인 예술을 창작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산파’ 역할을 맡는다.      


제자들은 단어를 잘게 쪼개고, 관객을 의식하지 않으며 미의식을 창출하는 아방가르드 연극을 연습한다.(본 연극 장면은 롱테이크로 포착되고, 컷은 무대와 현실을 분리한다. 그래서 에토레를 '납치'하는 롱테이크가 개인의 현실을 중단하고 연극으로 왜곡하는 관점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이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청중을 의식하자 질타한다. 다 함께 옳은 길을 가도록. 즉 개미처럼 다수가 함께 가야 할 길을 토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은 내가 가야 할 길의 광명을 밝히는 일이지, 타인이나 전체가 가야 할 길에 막무가내로 탑승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개미의 생태를 이념의 정당성을 위해 피상만 바라보고 악용할 것이 아니라, 진정 깊게 이해해야 한다. 개미의 심도에 다가선 모습은, 내 일이 아니지만 자신의 선을 알도와 에토레를 위해서 나누는, 법원 앞에 집결한 민중들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개미를 이용하는 쪽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상을 만들고 왜곡하는, 이로써 자신과 동일시를 바라는 '어머니' 마들렌이다. 그 어머니들이 믿는 하나의 원리가 곧 하나의 거대한 전체를 이룬다. 본 작품에서 아멜리오가 그간 탐색하던 아버지는 어머니로 바뀌었다. 실화에서는 오히려 에토레의 모델이 된 지오반니의 아버지가 나섰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영상화에 의한 변주다. 왜일까? 서구 사회에서 자식의 실패 원인은 주로 어머니에게 전가된다고 여성학자 재클린 로즈가 『혐오와 숭배』에서 밝힌다. 국가는 자신들이 아이 복지에 무책임한 탓을 개인인 어머니의 책임으로 떠넘기며, 어머니의 괴로움과 숭고한 희생으로 사회가 지탱된다. 어머니의 실패가 곧 자식의 실패요, 더 나아가선 사회의 실패다. 그래서 언론에선 사회에서 비극이 발생할 때, 항상 어머니의 비탄을 대서특필하고, 그것이 내면화된 어머니들은 실패하지 않고자 완벽한 어머니상을 의식하며, 자식이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성장해야 한다고 닦달한다. 자식의 성공이 곧 어머니의 성공이다. 그래서 아멜리오는 아버지를 어머니로 뒤바꾼 것 같다. 사회가 원하는 자식을 양성하기 위한 어머니들의 역사를 환기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머니 마들렌이 기대하지 않은 에토레의 성 지향성이 탄로 나고, 어머니가 원하는 진학마저 아들이 거부하니, 이에 분개한 마들렌은 자식을 자신과 동일시하려 압박을 쏟는다. 마들렌은 에토레가 도망치면 추적하여 붙잡고, 실내에 가둬둔다. 그러나 알도의 어머니 수잔나는 핍박받는 아들의 고통이 제 일과 같은 듯 가슴을 부여잡으면서도, 로마로 떠난 알도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어머니 수잔나와 아들 알도는 영화 결말에서 죽음과 삶이 나뉘어 더더욱 분리된다. 그것이 진실이다, 모자가 서로에게 타자라는 사실을 부정하면, 어느 한쪽은 상대방과 동일시되며 가상으로 전락한다. 영화는 내내 컬러로 포착된다. 그러나 알도가 교도소에 수감되는 과정에서 '흑백'으로의 간헐적인 전환이 있다. 그 흑백은 신문에 인쇄된 '머그샷'에서 비롯되는데, 범죄자로 전락한 알도의 흑백 사진이 현실을 대체한다. 그러나 그의 범죄 사실 자체가 거짓, 즉 범죄자 알도는 허구다. 그런데 알도의 혐의는 다른 누군가에겐 진실이다. 알도의 혐의를 진술하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들의 죄와 책임을 알도에게 타자화하기 때문, 즉 진술자들의 진실이다. 리카르도와 알도는 영화에서 성적인 접촉이 없다. 오히려 감상자는 영화 내내 리카르도가 멍청한데다가 열등감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선생으로서 알도는 단지 이것만 지적했을 뿐이다. 그리고 리카르도는 이성적이기는커녕, 매우 충동적이고 우발적이다. 그런데 리카르도는 알도가 섹슈얼한 기분에 따라서 제자들을 지배하는 비이성적인 폭군이라고 매도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이성적인 자신이 감정적인 알도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것인데, 이는 알도 및 리카르도 양자 모두에게 거짓이다. 리카르도는 자신의 흠을 알도에게 전가하여, 스스로를 거짓말로 드높인다. 검찰이나 마들렌의 진술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알도에 의해서 에토레가 집을 나왔고, 또 알도가 구슬려서 에토레가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정작 에토레를 ‘스토킹’, ‘감시’하고, 심지어 ‘겁박’으로 진술을 받아내어 자유를 방해한 쪽은 이성애자들로 구성된 전체주의적 집단인데 말이다.      


즉 이성애자 집단은 자신들의 죗값을 시치미 뚝 떼고 동성애자 알도의 탓이라 전가한다. 전체주의는 전체의 일반성, 보편성에 들어맞지 않는 타자들을 악마화한다. 자신들의 결속을 와해할 수 있는, 이로써 모여야지만 획득할 수 있는 '권력'에 방해가 되는 요인을 전부 타자에게 전가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체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보편성과 일반성에 따른 이익을 선동한다. 재판장에서 검사는 알도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라며, 즉 힘이 없는 사람이라고 강조함과 동시에, 본인들의 진술은 전문가들의 수준 높은 의견이라며 권위에 호소한다. 그렇게 컬러는 흑백으로, 진실은 거짓으로 둔갑한다. 그러나 아멜리오는 전체를 위한 개인의 왜곡, 전체에 의해 악용된 개미 해석에 쪼그리지 않는다. 그는 보편적인 전체의 시선을 피해 파티에서나 끼를 부릴 수 있는 게이들의 진실, 오히려 이성애자 사회에서 자살을 고민하는 바니를 포착한다. 즉 게이의 진실을 보존한다. 이는 보편적인 전체의 입장에서 불쾌하고, 또 쉽게 이해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개인들과 타자들의 자유로운 진실은 본래 낯설고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엔니오의 상사인 편집장은 러시아인들과 식사를 갖는다. 엔니오도 러시아어가 가능하니 동참하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동지라는 이유로 쉽게 연대했다가, 자신들과 다른 동성애자를 변호한다는 이유로 인상을 찌푸리는 집단에 엔니오는 봉사하지 않는다. 나와 같은, 이로써 보기 편하고 익숙한 것들로 가득한 전체에서 가시 같이 따가운 진실은 추방된다. 알도의 진실을 밝히는 엔니오가 언론사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멜리오는 검사의 주장을 반박하는, 오히려 그들의 폭력과 압제를 드러내는 에토레의 진술을 롱테이크로 생생하게 보존한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좌우되던 롱테이크, 현실이 아니라 극본에 의한 연극으로 전락한 롱테이크는 다시 진실로 되돌아오고 생생한 현실의 시간을 보존해야 한다. 진실한 것은 야밤에도 빛난다. 알도와 에토레가 솔직한 감정을 투영한 초롱초롱한 눈망울, 육체가 감춘 내면을 밝히는 시적 언어들을 보라.      


그러나 겨우 밝힌 진실을 칙칙한 회백색 정신병원, 땅거미 드리운 교도소가 어둡게 가리운다. 밝음과 어둠, 따뜻함과 차가움, 그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회색이나 갈색은 움직임이 없는, 이로써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죽음의 끔찍한 부동에 상응한다. 전체주의가 자유로운 개인을 감금한 장소의 색채가 그렇다.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음, 이로써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없음. 교도소에 갇힌 알도는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늦게 도착하여, 그가 꼭 봐야만 했던 살아생전 어머니의 최후를 놓쳤다. 그래서 다양한 것들이 밝음과 어두움, 차가움과 따뜻함을 오가며 번성하는, 자유로운 내적 충동으로 솟아나는 ‘자연’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알도와 에토레의 첫 만남이 자연, 그러나 에토레가 잡혀간 이후 알도는 자연에서 어느 한 창남과 성매매를 시도한다. 감정을 자유롭게 따르는 자연의 관계가, 인위적인 돈에 의한 삭막한 거짓 관계로 뒤바뀐다. 하지만 알도는 거짓을 뿌리친다. 이후 결말에서 인위에 의한 오명을 '비'로 씻고 정화한다. 비가 쏟아지지만, 하늘은 결코 어둡지 않다. 태양은 중천에서 알도와 에토레가 재회하는 초원을 비춘다. 그렇게 가렸던 존재는 탁 트인 공간에서 진실을 밝히고, 시선은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며, 각자는 갈 길을 간다. 이렇게 노장 아멜리오는 2020년대에도 부모에게 착취당하는 자식의 운명을 환기하고, 이런 부모들이 응집함에 확장되는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자유로워야 마땅할 시민을 존중한다. 또한 이성애 중심적 법의 직간접적 피해자인 아멜리오 자신이 느낀 절절한 감정을 표현한다. 여전히 아멜리오의 청년과 시인, 기자는 전근대적인 부모의 이데올로기를 배격한다. 시로 나아가고, 저널리즘은 진실을 파헤치며, 진정한 개미의 정신을 환기한다. 물론 아멜리오의 작품답게 결말은 달지 않다. 그러나 허망하지만은 않다. 이전 작품들보다 세상은 좀 더 구체적으로 개선되었으니 말이다.(물론 투쟁할 시간이 더는 넉넉지 않기에, 이젠 투쟁의 결실을 보고 싶은 노장의 바람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다만 결실이 후퇴하지 않게끔 반성은 계속하고, 야만의 역사는 곱씹어야 한다.  

-----

감상일: 230219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에밀리 아테프, <안녕, 소중한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