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3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Feb 22. 2023

토드 필드, <타르>

누구나 다 동의할만한 음악의 객관성을 찾아서…

토드 필드(Todd Field), <타르>(Tar) 

- 누구나 다 동의할만한 음악의 객관성을 찾아서…     

“독립적이 된 예술이 눈부신 색채로 자신의 세계를 표상함에도 삶의 시간들은 노쇠하고 만다.” -기 드보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강제로 국가와 계약을 맺으며 법전에 붙잡힌다. 하지만 인간은 성장하며 법의 강제성에 굴하지 않는 여러 미래를 꿈꾼다. 원치 않았던 계약으로부터, 이제 내가 원하는 계약을 상호 맺으며 꿈에 조금씩 다가서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다. 바로 내가 되고 싶고 속하고 싶은 직업군에도 고유한 법과 원칙이 작동하고 있다. 그것이 음악에서는 악보 아닐까. 추상적인 음악, 그래서 다양한 예술 장르 중 가장 자유로운 것으로 평가받는 음악, 그러나 연주자들과 지휘자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라고 강제하는 악보에서 감히 자유롭기가 어렵다. 더욱이 사회의 영향에서 일견 자유로운 상징 공간(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개념으로 사회의 지배적인 경제, 정치적 영향력에 동화되지 않고 고유한 가치 체계를 구성하며, 사회의 영향력을 수용하되 이를 변형하거나 반발하는 영역·집단을 가리킨다)인 예술계라 할지라도, 여전히 우람한 사회는 열렬한 영향력을 예술계에 뻗치고 있으니, 과연 빽빽한 다수의 법에 둘러싸인 개인의 발걸음은 경쾌할 수 있을까? 토드 필드는 리디아 타르라는 가상의 여성 레즈비언 지휘자를 상정하여, 사회와 음악계에서 그녀가 어떤 삶을 살지 상상해본다. 1964년 캘리포니아 태생의 토드 필드는 미국의 배우이자 영화감독이다. <타르>는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이며, 무려 16년 만의 복귀작이다. 지금까지 그는 미국 내 중산층 백인 가정이 등장하는 드라마를 연출하였다. 그러나 필드는 전형적인 가족을 탐구하는 드라마가 아니라, 그 드라마에 '법'이 미치는 영향을 항상 탐구하였다. 법을 만드는 상류층, 법을 위반하는 비율이 높은 하류층과 달리, 중산층이야말로 빽빽한 법망에 좌우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법의 여파를 파악하기 좋은 표본이다. 그의 데뷔작 <침실에서>는 바닷가재 통발을 인용한다. 들어올 수는 있지만 바닷가재가 나갈 수 없는 통발, 거기에 두 마리 이상이 잡히면 싸움이 일고 어느 한쪽의 다리가 잘린다. 통발, 곧 법에 의해서 두 마리가 협소한 장소에 갇혔지만, 바닷가재들은 그 원흉인 통발을 바라보지 못하고, 똑같은 피해자인 서로를 위해한다.     


국가, 법, 제도 안으로 들어온 이후 나갈 수 없는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나탈리는 폭력적인 남편 리차드와 이혼하고 싶다. 나름의 꿈이 있었으나 리차드에 의해 가정주부로 눌러앉았다. 그러나 메인주의 법은 이혼을 유예시킨다. 인간은 위험한 것과 거리를 두는 것이 본성이다. 그런데 법이 위험한 리차드를 나탈리 곁에 머물게 한다. 이후 법은 프랭크를 살해한 리차드, 즉 매우 위험한 살인범을 보석하여 밖을 싸돌아다니게 만든다. 인간은 나를 위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아들이 둘이나 있는 나탈리는 자기보다 연하지만, 매우 헌신적인 대학생 프랭크와 사귄다. 그러나 법이 위험한 대상과 강제로 동거를, 위험하지 않은 대상과 멀어지게 만든다. <리틀 칠드런>도 마찬가지다. 법은 멀리 떨어트리고 싶은 대상을 가까이 있게 만들고, 가까워야 할 대상을 멀게 한다. 법은 아이들과 부모들이 역겨워하는 소아성범죄자 로니를 곁에 머물게 만드는 반면, 또 다른 법은 새라와 브래드를 자기 소외, 즉 제게서 멀게 만든다. 영문학 석사인 새라는 가정주부로 눌러앉는 것, 사회의 일반성을 따라 '어머니들 무리'에 껴야 하는 것이 갑갑하다. 주부가 된 남성 브래드는 읽고 싶은 잡지 구매, 핸드폰 개통 등을 가장 아내에게 허락을 맡아야 하는 것이 불편하다. 새라는 그럼에도 법을 지키는 편이다. 로니를 감시하는 자경단, 즉 법 이상의 월권을 부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법을 지키면 돌아오는 것은 자아 상실, 그리고 남편의 배신이다. 필드는 법에 의해 구속당하는 개인성을 더 깊게 추적한다. <침실에서>의 전반부는 가부장제의 폭정과 법의 무책임이었다면, 후반부는 유족들의 허망한 심리를 잔잔하게 조명한다. 유가족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한다. 부조리한 법에 분개하지만, 사건을 아무렇지 않게 만드는 법을 결국 따라야 한다. 그러나 거리를 활보하는 리차드를 직접 마주하자 맷과 루스의 분노, 공포가 폭발한다. 참고 있었던 서로의 원망을 쏟아낸다. 법이나 사회의 일반률을 위반하며 자신을 회복한다. 이로써 서로 몰랐던 진실을 마주하고 이해하며 화해한다.      


그러나 진실에 관심이 없는 유전무죄 속물 변호사들이 거짓을 수호하는 법은, 제 이익만 살필 뿐 타인의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다. 사회를 수호하는 법이 제 역할을 망각함에, 개인 매트는 제 감정을 따라 제 손으로 리차드를 징벌한다. 그리고 서로를 잘 아는, 매트의 행위가 합당함을 이해하는 루스는 그를 배려한다. (혹은 부조리한 법을 대체하고 위반하여 필요악을 선택했지만, 이러한 개인의 선택이 사회적으로 용인 받을 수 없음에 다시 '연기', 즉 가짜 삶을 재개한다) <리틀 칠드런>에선 개인이 법을 대체하거나, 개인을 되찾기 위해 법을 위반한다. 래리는 자경단을 꾸려 로니를 감시한다. 새라는 이웃 진과의 저녁 산책, 브래드는 저녁에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젊은이들 구경, 풋볼 팀 가입 등에 취미가 그쳤는데, 이제 서로는 불륜하며 자신의 살아 숨 쉬는 육체를 되찾는다. 그러나 양자 모두 개인을 되찾는 수준을 넘어서 이기적인 욕망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필드는 <침실에서>와 달리 개인이 무법지대로 향하는 것을 <리틀 칠드런>에서는 저지한다. 법에 의해 이웃으로 편입된 로니, 가족에 속했던 브래드, 새라는 법망을 벗어나며 모두 개인이 된다. 그러나 개인이 되자 이들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고, 생명이 위태롭다. 결국 갑갑하지만 안전한 '카시트', '가정', '구급차'로 되돌아간다. 법의 부조리함과 불완전함, 그리고 제약, 그것을 개인은 '화해'로 수정해야지 아예 부정해선 안 된다. 즉 법아래서 개인은 개인성을 보호받아야 하지만, 부조리한 법은 개인성을 침해한다. 이에 개인 스스로 법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용인 받을 수 없는 개인은 은폐된다. 또 법을 무효화하면서 개인은 위태로워진다. 그렇기에 개인은 전면 법을 부정해선 안 된다. 사랑과 배려, 존중으로 법을 다시 쌓아야 한다. 법과 개인에 대한 조화와 절충적인 입장을 제시하는 필드, 과연 그의 신작에서 리디아 타르는 법과 어떤 관계를 맺을까?     


일단 본 작품의 인상적인 도입부부터 살펴보자. 리디아 타르는 음악계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지휘자’다. 반면 사적 영역에서는 ‘연인’이다. 샤론과 결혼을 했지만, 매니저이자 차기 부지휘자로 점찍어놓은 프란체스카가 그녀를 흠모한다. 향후 타르도 마찬가지였음이 암시된다. 그녀는 지휘자임과 동시에 연인이다. 프란체스카는 타르와 일하는 도중에 그녀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며 사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타르는 일터에서 자신이 지휘할 악보, 베를린 필하모닉 관현악단, 공연장만 신경 쓰면 되고, 사적인 흠모에 부응해선 안 된다. 그러나 공적인 곳에서 함께 일하는 프란체스카는 그녀에게 사적인 관계의 대가로 공적인 것을 요구하는 눈치다. 프란체스카가 타르를 촬영하는 숏이 막을 내린 이후, 타르가 영감을 받았다는 아마존 민족의 음악이 오프닝 크레딧에 삽입되어, 검은 화면 속 순수 음향으로 제시된다. 그렇게 도입부는 막을 내리고, 타르는 마스터 클래스에 설 준비를 한다. 타르가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사적인 작업실의 카펫을 걷어 일터로 뒤바꾸고, 부티크에 들러서 프란체스카와 함께 스타일링이나 체중 문제를 토의하는 숏들이 무수하게 조합되어 하나의 시퀀스를 이룬다.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무수한 연주자들을 질서정연하게 통제하는 지휘자이니만큼, 단정하고 절도 있는 모습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타르는 지나치게 '보이는 것'에 열중한다. 그녀는 들리는 것을 통제하는 사람이지 보이는 것까지 통제하는 사람은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아마존 음악은 타르가 지휘하거나 연주하지 않는다. 그녀의 신화를 위해서 다만 빌려올 뿐이다. 즉 순수하게 청각적인, 곧 음악계의 가치라 말할 만한 오프닝 크레딧에는 타르가 부재한다. 그녀는 마스터 클래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성을 배격하고, 하나를 깊게 파고드는 '전문성'을 찬동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녀의 위상을 느껴볼만한 순수한 음악성을 살펴보리란 어렵다. 오히려 그녀가 좋지 않게 평가하는 '다양성', 곧 빈곤한 청각이 시각에 의존하고 있다. 시각에 몰두하는 타르를 포착하는 시퀀스, 이와 상반된 순수한 음향이 어둔 화면을 풍성하게 채우는 오프닝 크레딧은 향후 <타르>의 여정을 요약한다.     


이후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타르는 샤론의 ‘경제력’, 스승 안드리스와의 ‘학연’, 가부장적인 음악계에서 ‘남성성’을 인정받아 그 자리에 올랐다. 그렇게 음악계의 거물이 된 그녀는 가부장적인 태도로 자신에게 주어진 전권을 약자에게 휘두르는, 즉 음악을 도구화하는 인물이기도 하며, 타르의 유명세나 시각이 도드라지는 것처럼, 그녀는 비음악적인 요소로 명성을 얻거나 음악을 비음악적인 것을 위해 동원한다. 그래서 영화의 연출 중 하나는 다양한 장소·사람이 담긴 짧은 숏들이 무수하게 뭉쳐 시퀀스를 이루는데, 그 모든 숏들은 타르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앞서 마스터클래스에 오르기 이전, 준비단계를 비춘 시퀀스도 그렇고, 이후에도 타르는 안드리스나 교수회, 이사회 등 무수한 사람들과 접촉한다. 비음악적인 연결로 이어지는 음악계의 거물 리디아 타르, 그러나 음악은 순수해야 한다. 비음악적이고 불순한 시각으로부터, 눈으로 보여주지 않고도 귀로만 지휘자임을 증명하고 드러내어야 하는 여정, 과연 타르는 그럴 수 있을까? 앞서 타르가 가부장적이고 전권을 휘두른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이 반영된 연출을 살펴보자. 타르는 권위나 나이가 비슷한 남성들과 대화하거나, 또 성적으로 흥미가 있는 휘트니라는 여성과 대화할 때는 리버스 숏에 담긴다. 남성들과는 비교적 대등하다는 듯이 시선을 똑같은 높이에서 교환하고, 사랑에 빠진 대상에겐 약속을 잊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어 동등해진다. 각자는 각각의 숏을 점유한다. 그러나 학교나 집에서 그녀를 포착하는 방식은 롱숏으로 이뤄진 롱테이크로, 언뜻 보기엔 무수한 구성원들이 뒤섞여서 포착되지만 주인공은 언제나 타르다. 타르는 줄리어드에 강연을 나간다. 대충 보면 각양각색의 악기를 연주하고, 또 인종이나 민족이 천차만별인 학생들이 잘리지 않은 하나의 테이크 안에 공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카메라는 학생들에게 관심이 없다. 초점은 항상 타르에게 둔다. 그녀가 말하듯 다양성보다는 전문적인 그녀 하나에게만 몰입한다는 듯 말이다. 이에 타르가 위치하는 곳에 학생들이 있다면 카메라에 담기지만, 타르가 없는 곳에 학생이 자리한다면 그들은 포착될 수 없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샤론이나 페트라에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타르의 동선을 뒤따라가며, 그녀의 위치에 따라서 나머지 식구들은 프레임 바깥으로 잘려 나가거나 멀어지거나 다시 들어오기도 한다. 즉 학생, 식구들은 타르에 의해서 프레임 내에 머물거나 존재할 수 있다. 오직 타르의 의견만을 따라야 하는 학교와 집, 만약 막스처럼 그녀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면 학교를 나가야 한다. 그리고 영영 카메라에 포착될 수 없다. 또 타르는 샤론의 심장약을 집에 놔두지 않고 제 품에 지니고 다니기에, 타르에 의해서 샤론의 생사가 결정된다. 즉 타르를 중심으로 이뤄진 롱테이크는 스승-제자, 식구-가장의 수직적 관계를 가시화한다. 제자들은 앞선 권위적 가장들과 달리 자신들만의 숏을 가질 수 없다. 타르는 철두철미하게 자신을 통제하는 사람이다. 타르 옆에서 긴장한 듯 계속 다리를 떠는 막스와 달리, 그녀는 무대에 오르기 전 아주 단정하게 매무새를 정돈하고, 얼굴과 몸의 긴장을 적절한 수준으로 푼다. 그녀에게 흐트러짐은 없다. 이러한 그녀에게 카메라, 곧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할 지다. 불완전한 음악가들은 완벽한 지휘자 없이는 하나의 악보를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어수룩한 학생들은 우월한 스승 없이 지식을 확보하기 어려우므로, 그들에겐 객관성이 필요하다. 철학자 헤르만 슈미츠에 의하면 오직 한 사람만이 사태를 진술할 수 있는 것은 주관성이다. 반면 조건을 충족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술할 수 있는 것이 객관성이다. 주관성을 남들도 동의할 수 있다면 객관성이 된다. 관현악단의 구성원들에겐 객관성이 필요하다. 나만의 연주를 할 수 있지만 음악계, 그것도 세계적인 명성을 갖춘 베를린 필하모닉 관현악단에 요구되는 것은 완전무결하게 한 곡을 해석하는 자명한 객관성이다. 하나의 악보에 가장 타당한 방법론, 누구나 동의할만한 연주, 그 방법을 타르가 알고 있다. 타르의 곡 해석은 주관적일지 모른다. 그녀는 지휘자란 시간을 통제하는 사람이라 말한다. 메트로놈이 기계적인 박자에 맞춰 움직인다면, 지휘자는 나름의 주관성으로 시간을 멈췄다가 다시 흘러가게 만들고, 조이고 수축했다가 이완하길 반복한다.      


그러나 지휘자의 의도와 맥락에 다가감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바나'를 인용하듯, 시간을 건너서 이동함을 의미하는 탈무드의 '테슈바'를 인용하듯, 하나의 곡이 가진 객관적인 맥락의 조건을 충족한다. 이로써 ‘하나의 곡’과 그 곡을 만든 ‘작곡가’와 그 작곡가가 살았던 ‘시간’이란 객관적 조건을 갖춰 자의적인 주관성이 아니라 하나의 신뢰할만한 객관을 도출한다. 그래서 주관적으로 해석하되, 객관에 근접하기에 누구나 그녀의 전문성에 동의한다. 즉 그녀를 존경하는 이유, 또 카메라가 그녀를 따라다니며 신봉한 이유는 집, 학교, 필하모닉의 주관적인 문제들을 외부로 확장하고 이해하여 객관적으로 해결하는 전문성 때문이지, 유명세 내지는 아우라, 이성애 백인 남성 중심적인 법을 찬동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 또 아주 철두철미한 이성적인 태도로 감정적인 대중, 음악가, 학생들을 휘어잡아 질서를 수립했기 때문이지, 감정적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주관적인 감정에 휘둘리긴 쉽지만, 이성적으로 엄격하게 통제할 수 있는 존재는 소수다. 그 소수는 존경받는다. 존경받는 타르의 객관성은 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타르가 마스터클래스를 하는 장면에서 프란체스카는 대사를 줄줄 외우고 있다. 청각은 마스터클래스 진행자의 목소리, 그것을 복화술로 따라하는 프란체스카가 시각에 담긴다. 진행자, 프란체스카는 타르가 다가서는 객관성을 위해서 주관성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영화 초반 엘리엇에게 "남의 것을 빌리지 말고 자신만의 것을 만들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의 객관성을 위해서 그녀 또한 빌린다. 타르의 결정이 의아하더라도 수긍하는 연주자들의 동의와 헌신을, 그렇게 권력을 빌려준 이유는 그녀의 객관성이 곧 타르의 주관성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수긍할만한 객관성으로 이어지길 기대했기 때문, 이로써 객관성의 긍정적인 여파가 자신에게 미치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르의 객관성을 위해 헌신한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오직 타르 본인만의 주관성을 위해 악용한다. 그간 오디션은 블라인드 테스트로 진행되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공정했다. 그러나 올가에게 홀딱 반한 타르는 화장실에서 그녀가 신은 신발을 확인하고, 이후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올가의 신발이 노출되니 편향적으로 채점한다. 그녀만의 이익을 다른 구성원들은 동의하지 못한다. 타르의 주관성은 주관성으로 남을 뿐이다.      


본래 제 주장을 타인에게 주입하던 위치였고 또 여성혐오적인 타르, 그러나 이젠 올가가 존경하는 클라라 체트킨이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를 긍정하고, 또 올가의 연주 영상을 보고 추가 공연을 결정한다. 올가에게 특혜를 주기 위해, 고시아와 샤론이 납득하지 못하는 독주 오디션을 개최한다. 올가를 따라 어둑한 곳에 들어가다가 난폭한 개를 만나고 넘어져서 얼굴을 다쳤다. 그간 철두철미하게 자신을 통제하며 간결하고도 깔끔한 품위를 유지하던 타르, 그러나 타인을 지배할 수 없는 학생에게 반하여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살피지도 못한 채 엉망으로 이끌린다. 단원들은 유약함을 드러내는 흉터가 낯설고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타르는 프란체스카의 배신에 분에 못 이겨 도로에서 과속운전을 한다. ‘동승’하던 샤론은 타르에게 실망하여 ‘하차’한다. 이젠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타르에게 교수회나 이사회에서는 그녀가 와야 할 시간을 ‘지시’한다. 지배는 역전됐다. 타인의 주관성은 내가 동의·참여할만한 것일 때 객관적인 것이 된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내게 이득이라도 준다면 양심을 속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객관적이라 인정한다. 타르는 세바스찬을 다른 곳으로 이직시키고, 부지휘자 자리를 프란체스카에게 내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안드리스에게 저지당해 프란체스카에게 좋은 직책을 주지 못한다. 애초에 프란체스카를 낙하산으로 꽂으려 한 시도도 감정에 휘둘린 것이지만, 이와 동시에 프란체스카가 더는 타르의 주관성을 비호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인지시켜준다. 이후 프란체스카는 타르를 떠나 다른 권력에 붙어 그녀를 배신한다. 주변인들은 더는 타르의 주관성에 잠식되고 싶지 않다. 타르의 주관성은 그녀 작업실 옆집 이웃이 신문을 묻는 소음, 변기에서 자빠져 오물이 묻고 악취가 진동하는 어머니를 도와달라는 불쾌한 주관성과 동급이다. 함께하면 ‘더러워진다.’ 집을 팔려는 이웃의 친지는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소음으로 치부하고, 실제로 그녀는 아코디언으로 소음을 연주한다. 그녀의 주관적인 음향은 객관적인 동의를 얻지 못하고, 기피하고 싶은 불쾌하고도 말초적인 주관으로 전락한다.      


주관성보다 객관성의 비중이 높았을 때, 그녀의 시선에는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주관의 시야를 다른 사람들에게 확장했고, 이들을 내게로 통합했다. 그러나 이젠 나만 볼 수 있는, 극도로 주관적인 꿈이 펼쳐진다. 그간 여성들을 응시하며 지시하던 현실의 타르와 달리, 꿈에선 그녀와 관계 맺은 여성들이 타르를 쏘아본다. 크리스타는 타르의 귀를 물어뜯고, 그녀의 욕망이 펼쳐진 침대는 불탄다. 의식의 통제가 무너지자 불안을 감지한 무의식이 의식을 잡아먹고 진실을 현시한다. 이를 맞닥뜨린 타르의 의식은 약화되어 무의식이 가리킨 진실을 통제할 수 없고, 그저 불안에 넋을 놓는다. 병약한 어머니에 의해 삶이 뒤엉킨 작업실 옆집 여인처럼, 타르도 서서히 신경질적으로, 또 제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는 광인으로 변한다. 타르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외부 요인을 이성적·의식적으로 통제하기는커녕 넉다운 당하고 지배됨에, 최후의 자신을 보존하는 말초적이고 저열한 감정만 그녀 곁에 맴돈다. 절대자이자 신으로서 구성원을 관장하던 이성적인 가장 및 지휘자는 이제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동물로서 자신만 남게 된다. 올가를 따라가다 자빠져서 다친 직후 그녀는 지휘한다. 그 지휘는 외부에 집중한 몸짓이 아닌, 다친 신경이 자아내는 통증에 따른 몸짓으로 보인다. 타르의 지휘는 이제 미심쩍다. 외부에서 동의할만한 것이 아니라, 오직 타르 본인만 동의할만한 통증이다. 그간 영화의 연출은 떨림 없는 스테디캠이었다. 떨림은 타르 옆에서 긴장하는 막스, 타르가 약속 시간에 늦을까 전전긍긍하지만 그녀에게 쉽게 말 붙일 수 없는 프란체스카의 미약한 지배력 등에 상응하였다. 그러나 타르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를 대변하는 카메라는 이곳저곳 발 빠르게 타르를 따라다니지만, 안정적이고 멀끔하며 비장함이 넘친다. 세차게 흔들릴 법한 힘에 쉽게 동요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움직임이 곧 타르의 이성적인 통제력을 가시화하였다. 그렇게 나 자신으로도, 여러 사람과 엮여있어도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존경스럽던 타르가 흔들린다.      


이성을 잃은 타르가 공연장에 침입하여 지휘자 자리를 내놓으라고 난동을 부릴 때, 타르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격정적이고 감정적인 핸드 헬드를 동반한다. 타인의 불안과 감성을 통제하던 존재가 이제 원초적 기분과 욕구에 휘둘린다. 영화 도입부에서 시각과 청각을 대비한 것처럼, 무너져가는 타르를 포착할 때도 시청각을 절묘하게 활용한다. 그녀가 지휘하는 교향곡은 그 어떤 청각보다도 더 명료하고, 시각 또한 마찬가지다. 외의 행위들도 구체성이 ‘보인다.’ 행위자가 타르임이 명확하다. 누구나 동의할만한 객관성, 사실이다. 그러나 환청과도 같은 비명이 울려 퍼진다, 끊임없이 벨이 울린다,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린다, 샤론이 켠 것으로 추정되는 메트로놈이 그녀의 수면을 방해한다. 그녀는 지금 위치한 공간과 보이는 것을 통제하는 가장, 그리고 청각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지휘자다. 그러나 그녀가 규정하는 시각, 공간을 뚫고 청각이 침투한다. 누구나 다 동의할만한 명확하게 규명된 청각이 아니라,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국한된 소음, 주관적인 상상의 여지가 가득한 모호한 청각이 침투한다. 시각도 흐트러지긴 매한가지로, 그녀가 정리해놓은 말러 5번 교향곡 악보가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지휘자로서 그녀의 엄격한 신화가 무너지고 있음을, 우발적으로 침투하여 경악을 자아내는 신경질적 음향으로 들려준다. 크리스타의 비명, 집에서 자신이 이러저러하게 연주되어야 함을 알리는 메트로놈, 올가의 방문 등에 의해 타르는 반대로 지배를 받는다. 또 시대가 바뀌어서 학생들이 인터넷에 유포한 짜깁기 영상, 타르를 배신한 프란체스카가 폭로한 크리스타 문건이 물질적인 공간을 넘어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증폭한다. 이전 시대의 통제로는 불충분하다. 이렇게 청각을 지배하는 사람임에도 청각을 지배하지 못하고, 남을 통제하는 사람임에도 타인을 통제하지 못하며, 변화한 현재에 여전히 고루한 과거를 신봉하는 타르는 부적응에 휘둘린다. 본래 클로즈업으로 포착되어 확신에 찬 느낌을 주던 그녀는 이제 풀숏 수준으로 멀어진다. 그녀의 몸이 자신의 통제를 떠나 멀리 동떨어졌다는 듯 말이다.      


또 그간의 롱테이크는 타르를 중심으로 카메라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세바스찬, 프란체스카, 샤론 등과 함께한 롱숏에서 카메라가 더는 타르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주도권이 옮겨갔다. 올가가 솔리스트로 공연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학교나 집에서의 타르는 자신의 지배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발’을 먼저 뗐다. 무지한 학생들을 인도하는 교사로서, 가정을 통제하는 가장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올가에게 홀딱 반했을 때, 그녀의 발은 올가의 동선에 의해서 좌우된다. 자제력을 잃고 올가를 뒤쫓아 가다가 넘어진 타르는 얼굴이 망가진다. 이로써 타르 자신이 가까이서 통제하던 얼굴로부터 멀어진다. 즉 필드는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카메라가 주목하고 주목하지 않는 연출을 교차시켜 타르의 성공과 몰락을 대비한다. 타르가 몰락하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주관성으로의 퇴조, 다른 하나는 가부장제의 약화다. 가부장제에서 제 자신을 돌볼 권리조차 박탈당하는 여성과 달리, 남성은 가정을 자신만의 원리로 다스릴 수 있는 특권을 지닌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밝히길 군주·가장의 특권은 식구나 구성원을 소유하고 지배하며, 그들의 목숨을 처분할 수 있는 '생살여탈권'이다. 가정을 잘 통제한다고 인정받은 가장은 향후 사회 전반까지 지배력을 확장할 수 있다. 마스터 클래스에서 타르는 음악계에서의 성차별이 별문제 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긴다. 성비불균형이나 성차별은 사실상 종식되었고, 남성만 지칭하는 마에스트로라는 단어가 여성형인 마에스트라로 수정될 필요가 없다는 식이다. 또 줄리어드의 학생 막스는 여성 편력이 심했던 바흐가 불편하다. 음악가의 삶이나 현실에서 유리된 것처럼 들리는 추상적인 음악에만 집중한다면 덜 불편할지 모른다. 그러나 타르의 방법론은 한 곡을 지배하기 위해선 그 곡을 둘러싼 시간 및 사람들과 동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백인이나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들이 타르의 방법론을 따른다면 가부장적인 음악가의 곡은 불편할 수 있다. 가장으로 군림하는 타르는 가부장적 태도를 문제 삼지 않기 때문에 바흐를 손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랴.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다양성을 부정하는 대사도 그렇다. 그녀는 서구 백인 남성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모더니스트, 가장이다. 가정에서 타르와 샤론의 관계는 경직되어 있다. 굳이 젠더를 나눌 필요가 없음에도, 타르는 남성 가장, 샤론은 어머니 여성을 연기한다. 영화 끝자락에 타르와 샤론의 결혼이 특정한 역할이나 계약을 강제하는 전근대적인 결혼의 답습임이 밝혀진다. 몰락 이후에 결혼 이전 그녀가 살던 누추하고 곤궁한 집을 확인할 수 있고, 샤론의 경제력과 베를린의 연줄이 타르를 위대한 지휘자로 만들어준 토대임을 유추할 수 있다. 그들의 결혼은 이성애를 극복하는 레즈비언들의 자유로운 연합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과 의무를 잘 수행하는 계약, 동등한 결합이 아니라 위계가 나뉘는 가부장적인 결합으로, 그녀는 레즈비언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애 남성 중심적인 이데올로기에 찬동하여 그것이 가져다주는 수혜를 입었다. 가부장제에서 화자는 오직 아버지만이 유일하다. 다른 구성원들이 화자임이 허용되는 것은 가장의 말을 반복하거나 답습할 때, 답할 때뿐이다. 고시아와 샤론은 서로를 바라보며 타르를 의심하는 눈초리를 주고받더라도, 그녀들은 쉽게 반기를 들 수 없다. 샤론은 타르가 먼저 말을 꺼내야지만 뒤이어 말을 잇고, 그간의 적법한 관행을 무시하고 독주 오디션을 보자는 타르의 제안이 못마땅해도, 전근대적인 사근사근한 여성으로서 그저 순응한다. 그녀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타르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역할, 오케스트라에 참여하는 구성원임에도 집에 있는 모습이 더 많이 부각된다. 샤론은 전화를 걸어서 타르의 '여성 편력'을 통제하려고 하지만, 가부장제의 어머니이자 아내를 연기하는 샤론은 그이의 바깥일에 관여할 수 없다. 가부장제는 취약한 여성을 주문하고, 이에 여성은 사회적으로 입지가 없는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반면 타르는 집보다 본인만의 작업실, 콘서트홀, 외부 미팅하는 모습이 더 잦다. 입양한 딸 페트라가 학교에서 요한나와 겪는 불화를, 가부장제 내의 수동적인 여성들은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페트라가 겪는 문제는 가장의 탈을 뒤집어쓴 타르의 힘을 빌려서 해결된다.      


타르는 요한나에게 가장의 지위와 힘으로 협박하여 굴복시킨다. 물론 타르에게 현재의 지위를 가져다준 샤론이 왜 그토록 유약하고 수동적인 건지 알 수 없다. 샤론이 수동적인 여성을 연기하고 얻는 수혜가 주체성과 자유를 추구하는 것보다 더 막대한 것일까? 아니면 타르가 지휘자인 것이 사적 영역에도 반영된 것일까? 여하간 타르의 풀네임은 ‘리디아 타르’다. 영화에선 그녀만 유일하게 성으로, 즉 아버지들의 계보로 불리는 여성이다. 외의 여성들은 성이 아닌 이름 샤론, 프란체스카, 올가로 불린다. 다른 여성들과 달리 타르라는 부계 성으로 불리는 그녀는 가부장제를 강화한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명망 있는 지휘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남성성을 빌린 여성으로서 그 자리에 오른 것인가? 남성성을 빌린 그녀는 권위 있는 남성들이 가부장제의 세습을 위해서 승인해줄 모습을 충실하게 이행한다. 즉 법에 의해서 자유로운 결합일 수 없는 결혼, 자신일 수 없는 개인임을 폭로하던 필드는, 이제 여성 지휘자임에도 여성일 수 없는 법과 구조를 밝힌다. 집에서는 가장이라는 형태로 가부장제가 답습된다면, 학교에서는 선생, 오케스트라에서는 지휘자라는 역할이 가부장제를 강화한다. 학교에서 여성이자 레즈비언의 탈을 쓰고 가부장제를 수행하는 타르의 말이 곧 법이다. 학생들은 반기를 들 수 없고 오직 침묵하고 수동적으로 수용해야만 하는 나약한 자식이다. 오케스트라에서 틀렸다면 틀렸다고도 볼 수 있고, 다르다면 다르다고도 볼 수 있는 음악가들의 연주가 타르의 귀에 거슬린다. 학교에서와 달리 롱테이크가 잘리고 나뉘어, 이젠 각기 다른 음악가들의 얼굴이 개개의 숏에 담긴다. 틀린 것이 아니라 각자의 동등한 개성, 표상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카메라가 되돌아가는 곳은 타르의 얼굴이 위치한 프레임이다. 그녀의 말이 연주자들의 다름을 잠식한다. 가장의 법이 확대되면 파시즘, 전체주의로 이어진다. 한 명의 말이 전체를 획일화하여 아우른다. 거기서 다른 것은 더럽다. 지적되고 제지된다. 가장 대신 말하는 것, 즉 연주자들의 '수다'는 허용되지 않는다. 가장 밑에서 가장의 심기를 거스르는 다른 것들은 모조리 짓밟힌다.     


그런데 타르가 무너진다. 더는 가부장제가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 가부장제는 여성들이 주관성을 포기하고 따라야 한다는 강제적 객관성을 부여받았다. 과거 가부장제에선 타르의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는 자식들이나 여성들은 곧 죽음으로 직결되었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자신들의 주관성을 포기하고 가장이 부여한 역할을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스와 줄리어드의 비백인 학생들은 반기를 든다. 타르는 다양성은 더러운 것이라 표현하였지만, 그 더러운 것들이 민주적으로 존중받는 시대가 오늘날이다. 오늘날에 하나의 원리를 강요받아 프레임 바깥으로 이탈하는 행위는, 가장의 프레임에서 배태된 약자의 무기력한 좌절이나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폭로와 저항을 가리킨다. 또 타르는 크리스타라는 여성에게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보상을 미끼로 삼아 권력형 성범죄를 저질렀다. 이후 크리스타는 자살했고 타르는 그녀와 자신이 주고받은 모든 증거를 말소하라고 프란체스카에게 지시한다. 그러나 더는 가장의 권력으로 여성을 그루밍하는 범죄가 오늘날에 유효하지 않고, 가장은 권력형 성범죄에 수반되는 모든 증거를 더는 통제할 수 없다. 또 타르는 프란체스카에게 가장으로서 대가를 주지 못한다. 즉 여성은 가장을 따르지 않고, 따를 필요도 없어졌다. 가장이 제 목숨을 쥐고 있지 않으므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금까진 타르가 잘 통제한 구체적인 시각에, 통제할 수 없는 추상적인 청각이 침투하였다. 무의식, 타인의 소리, 환청 등 어찌할 수 없는 것들만 타르에게 침범했었다. 그런데 이젠 시각도 그녀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다. 크리스타 사건이 별 타격 없으리라 믿었지만, 타르를 규탄하는 여성들이 시위를 일으켜 그녀를 응징한다. 곳곳에서 그녀를 쏘아보고 촬영하며, 그녀가 노출하고 싶은 모습이 아니라, 대중들이 보는 모습, 또 보고 싶은 모습으로 타르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전근대적인 사고로 남성적인 음악계에서 나름의 특권을 얻었을지 모르지만, 서서히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단일한 원리로 지탱되던 음악계가 다양성이 뒤섞여 변화하고 새로운 법이 들어선다. 그 법을 따르지 않는 타르는 몰락한다.      


영화는 주로 두 개의 언어가 교차된다. 하나는 베를린임에도 일반적으로 번역되는 영어, 다른 하나는 잘 번역되지 않는 독어다. 번역되고 누구나 다 해석할 수 있는 영어가 다수가 일반적으로 수용하는 사회의 법이자 가치 체계라면, 일반적인 감상자에겐 잘 번역되지 않지만 음악인들은 해석 없이도 수용하는 독어는 음악계의 고유한 가치체계라 말할법하다. 즉 독어는 누구나 다 구사할 수 없는데, 그중에서도 발화의 특권은 타르가 가진다. 말할 순 있다. 그러나 효력이 없다. 영화에선 영어가 통용되기에 독어는 더더욱 주관적인데, 타르의 주관적인 독어는 음악계 구성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객관성을 획득한다면, 타르 작업실 옆집 주민의 독어를 타르는 무시하며 주민의 주관성은 단지 스스로만 아는 주관성에 그친다. 한편 프란체스카가 ‘발화’하는 불어도 사용되는데 차이는, 타르의 발화는 객관성을 띠어 음악계의 구성원 누구나 다 고개를 끄덕인다면, 프란체스카가 말러와 알마의 관계를 페미니즘으로 해석한 주장을 담은 불어는 타르에게 수용되지 않는다. 즉 프란체스카나 옆집 주민의 주관적인 언어와 달리, 타르의 주관적 언어는 객관성으로 확장하는 힘이 있었다. 이를 타르 본인의 전문성과 가장이라는 위치가 보장했다. 이후 타르는 음악계의 언어를 일상으로도 넓힌다. 타르가 프란체스카에게 비밀스러운 말을 건넬 때의 독어, 샤론과 페트라에게만 미치는 지휘자나 가장으로서 통제 범위를 요한나에게 뻗칠 때의 독어… 이렇게 주관적 언어를 확장하자 타르는 서서히 몰락한다. 타르의 언어는 일반적인 사회가 아니라 음악계라는 특유한 체계 하에서만 가치가 있었고, 또 타르가 가장이자 권위자이기에 막연하게 동의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더는 동의하지 못할 억지 주장을 하거나, 가장으로서 권위가 약화되며 그녀의 주관적인 언어도 이제 그녀 자신에게만 그친다. 이와 연관하여 영화의 편집에 눈여겨볼 법 한데, 앞서 타르를 중심으로 '연결'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숏 내에서의 아주 거친 잘림이다.      


타르와 인터뷰하는 한 기자는 위키백과를 읽으며 "샤론과 필하모닉에서도 함께 하는데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나누기가 쉽느냐"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타르의 답이 미처 들리기 전에, 미완의 상태로 숏은 거칠게 잘리고 다음 숏으로 연결된다. 또 호텔에서 타르의 연주 또한 온전하게 마치지 못한다. 즉 타르는 공적 영역에서 수행해야 하는 연주를 완벽하게 마치지 못한다. 더욱이 공적 영역, 곧 상징 공간에서 통용되는 상징 자본을 영화 내내 상징 공간 바깥, 사적 영역에서 오남용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 공적 영역에서의 불확실성과 권위의 오남용으로 타르는 완전히 몰락한다. 추락 이후 그녀는 오래된 비디오를 튼다. 그녀가 존경하는 지휘자의 공연과 인터뷰가 담겨있다. 지휘자는 음악이란 ‘고유하고 다양한 감정의 자극’, 그리고 ‘움직이는 것’이라 말한다, 현실 그 어느 것도 가리키거나 재현하지 않으며 비일상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추상적인 음악, 그런데 그녀는 지상의 사사로운 쾌락을 위해 음악을 인질로 삼았다. 또 움직이는 음악을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도그마를 위해 도구화하고 붙잡아두었다. 그래서 타르는 필리핀으로 떠난다. 강에서 배를 타고 폭포에 푹 잠기며 무한하게 움직이는 음악을 액체로써 환기한다. 또 시차에 적응하고 몸의 피로를 풀기 위해 마사지를 받으러 간다. 그런데 마사지할 여성들이 백인과 남성에 의해서 '선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타르는 전근대적인 여성 착취에 역겨움을 느낀다, 이전 자신의 여성 혐오를 반성하며 게워 내려는 듯 ‘구토’한다. 고리타분하고 부조리한 가부장성과 20세기 서구 모더니티의 잔재를 답습하던 그녀는 이제 오늘을 산다. 필리핀에서 오케스트라를 조직한다. 카메라는 리디아 개인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전체를 포착한다. 한 가장에 의한 획일화된 지배가 끝났고, 이젠 다수가 공존한다. 그리고 정통적인 클래식 공연이 아니라 게임 시연식이다. 청중들은 ‘코스프레’를 하고 있어서 시각이 특별한데, 음악회에서 청각이라는 본질에만 집중하던 모더니즘적 환경을 뛰어넘는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를 재생산하던 타르는 비로소 오늘날다운 ‘혼종적’인 경험으로 오감을 자극한다.      


거기서 타르는 말러 제5번 교향곡을 연주하며 꿈에 다다르나, 그 과정에서 음악의 고유성은 게임의 시각성과 오락성에 기댄다. 타르는 말러가 알마에게 작곡을 그만두라고 종용한 바를 '사랑'이라고, 가부장제의 독단적 태도를 포장하였다. 그럼으로써 오늘날에 말러에 의해 희생되는 제2, 제3의 알마들을 소환했었다. 그러나 필리핀에선 독단적인 말러, 곧 '오직 음악'이 아닌, 시각·게임과 조화하며 알마와 화해하듯 싶다. 또 스스로 박자를 통제하며 외부 기술에 의존하지 않던 타르는 이제 헤드폰을 쓰며, 자신 바깥에서 기계적으로 들려오는 박자에 의존한다. 독단적인 음악의 법을 반성하기 위해서 외부와 접속하며 정화하고 새로움으로 도약하는 것인가, 아니면 타르가 꿈에 다가서기 위해서 음악의 독립성을 포기한 것일까? 구 타르는 지키면서 잃었다면, 새롭게 태어난 타르는 내려놓고 잃어버리면서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일까? 필드는 모더니즘에 갇혀있던 타르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행한 오늘날의 타르를 비추며 마무리한다. 분명 중점적인 반성의 대상은 모더니즘의 그늘이 드리운 구 음악계지만, 현재의 음악계를 마냥 긍정하지만은 않는다. 본 작품은 음악계 전반을 반성한다. 사회가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객관성에서 이탈한 상징공간에선, 사회에서 주관적이거나 이질적으로 일컬어지는 것에 객관성을 부여하여 가치체계를 이룬다. 그것이 예술계이자 여기에 속하는 음악계다. ‘예술성’, ‘음악성’을 예찬하고 숭상하였다. 그러나 부지휘자 세바스찬이 연주자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 철지난 주장을 하는데도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가 ‘안드리스와의 애정’에서 비롯되었듯, 구 음악계는 ‘오직 음악’이라는 모더니즘을 주창하면서도 음악성이라는 고유한 가치체계를 설득하지 못했다. 타르도 음악성이 아니라, 자신의 사사로운 애욕과 당파성, 권력욕에 따라 낙하산 인사를 꽂음으로써 음악적 가치가 아니라 음악 외적인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려 했다. 세바스찬 방의 무수한 골동품처럼 순수 음향이 아니라 음악 외적인 ‘물질’, 곧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이라 말할 법한 것의 가치를 빌려옴에 구 음악계는 고유의 가치를 입증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앞선 필리핀에서 게임-음악의 관계, 헤드폰을 쓴 타르도 그렇고, 초반부 타르에게 반기를 든 새로운 시대의 학생들은 순수 음악에 관한 그녀의 주장은 반박하지 못하고, 타르의 발화를 짜깁기하여 당파적으로 그녀를 매도한다. 어제나 오늘이나 음악계의 신뢰할만한 고유한 가치체계를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필드는 오늘날까지도 반성의 대상으로 삼는다. 음악 고유의 가치체계를 이룰 수 있도록 변증법을 멈추지 않는다. 여전히 가부장적인 ‘법’을 탐구하는 필드는 <리틀 칠드런>에서처럼 변증법을 통한 법의 변화 가능성을 엿보고, 이를 통해 그 법에 속하는 타르의 리디아로의 전환을 기대한다. 다만 후반부의 오리엔탈리즘이 크게 거슬린다. 영화 속 필리핀은 서구가 모더니즘을 극복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오케스트라가 창조되는 공간이라는 점은 긍정적이다. 단 하나의 본질이나 원칙을 주장하는 서구의 교조적인 모더니즘을 동양으로 시야를 넓혀 극복하니 말이다. 또 말론 브란도가 영화 촬영을 위해 악어를 풀어 생태계를 망쳤기에 서구가 빚을 지고 반성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한편 여전히 필리핀으로 대변되는 아시아는 백인에게 계몽되고 교육받아야 하는 공간으로서, 서구의 찌꺼기와 떨거지들을 받아먹는다. 오늘날까지 아시아인은 백인에게 꽃을 주고 환대해야 하는가? 왜 리디아의 반성은 여전히 여성 혐오가 만연한 자국이 아니라, 먼 나라 필리핀의 '후진성'을 보고 자극되는가? 필리핀은 서구 사회의 타자화를 위해 열등성을 환기하는 도구일 뿐인가? 음악의 유연함을 논하는 지역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을 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리디아 타르의 대서사시가 끝나는 지점이 아쉽다 못해 의아하다.  

----

감상일: 230222 광주극장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지아니 아멜리오, <개미 대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