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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Feb 25. 2023

카트린 코르시니, <균열>

대화의 나라로

카트린 코르시니(Catherine Corsini), <균열>(The Divide) - 대화의 나라로 

“거울을 보면서 어느 쪽이 자신인지를 주장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오르한 파묵-

균열: 친하게 지내는 사이에 틈이 남. 우리에게 친하다는 것은 주로 무엇인가. 우리가 몸담은 국가, 사회, 이데올로기가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정상성’과 사람들은 친밀하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비정상성이 낯설다 못해 적대시한다. 이성애 기준으로 동성애, 남성 기준으로 여성, 내지인 기준으로 외지인을 접할 때, 친밀함이 낯섦이나 경계로 변해 균열이 발생한다. 그러나 친밀한 것이 언제나 참도, 선도 아니다. 우리가 더 나은 길로 가려면 이 균열을 겪고 수용하여, 기존의 친밀함을 뛰어넘는 변증법으로 발전을 도출해야 하리니. 언제나 영화에 도발적인 섹슈얼리티와 이민자 등의 타자들을 위치시키며 균열을 자아냈던 카트린 코르시니의 신작 제목이 바로 <균열>이다. 그녀는 어떤 균열을 일으키고, 거기엔 무엇이 파고들까. 1956년 드휴 태생의 카트린 코르시니는 프랑스의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멜로극, 특히 레즈비언 연애담에 탁월한 강점을 보인다. 그녀는 프랑스 내 레즈비언 및 여성의 권리를 촉구하는 Les Culottées의 리더로서, 자신의 페미니즘을 영화 내에 녹여낸다. 그녀는 가부장제에 반발함과 동시에 특정한 여성상을 강요하지 않고, 진정 자유로운 여성의 실존을 지향한다. 자유로운 여성을 반영하는 코르시니의 영화는 성 지향성에 있어서 매우 유동적인 점이 특징이다. <리허설>에서 루이즈는 소꿉친구이자 짝사랑하는 나탈리를 흠모하지만, 레즈비언으로서 성 지향성은 이성애자 남성들이 바글거리는 사회에서 불발된다. 어렸을 적, 단둘이 놓인 방에서 가능하던 우정과 미묘한 애정은 성인이 되고 사회에 진출하며 점차 사그라든다. 루이즈는 나탈리와의 멀어짐 때문에 자살까지 결심하나, 정작 영화의 결말에서 루이즈는 나탈리의 연인이던 남성 마티아스와 교제한다. <쓰리 월드>에서는 연인의 아이를 임신한 줄리엣이 대뜸 뺑소니 가해자인 알에게 욕망을 느낀다. 거기에 명확한 이유는 찾기 어렵다. 즉 코르시니는 특정 성 지향성이 가능함을 넘어서, 성 지향성의 자유로운 유동 또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단지 이를 인지할 수 없는 이유는 가부장제 내 남성 이성애자에 의한 '배역'이 사람들, 특히 여성에게 입혀지기에, 코르시니는 개개인이 거짓되고 닫힌 성으로 살게 만드는 구조를 비판한다. <리허설>은 제목처럼 연극 현장을 다룬다. 연극계에 뛰어들기 이전 나탈리와 루이즈는 특정 배역을 입지 않았고, 소꿉친구인 서로가 세상 그 누구보다 친밀했다, 카메라가 빙글빙글 돌아가듯 그녀들 스스로가 지구였다. 그러나 루이즈는 레즈비언으로서 자신은 자살하고, 이성애자이자 내가 아닌 타인을 모방하는 의치사로 부활한다. 나탈리는 제 능력을 온당 펼치지 못하고 남성 마티아스를 위한 도구로 국한된다. '사고'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균열>과 유사한 작품 <쓰리 월드>에서는 섹슈얼리티의 타자들이 아니라, 민족적 타자들이 등장한다. 곧 결혼을 앞둔 프랑스인 남성 알이 음주운전으로 몰도바 이민자 아드리안을 뺑소니한다. 사고를 당했음에도 원인 규명을 할 수 없고, 끝끝내 죽어서까지 장기 기증을 요구받으며 '피착취자'라는 배역이 입혀지는 이민자들이 겪는 부조리를 고찰한다. 사고 이후 알은 태연한 일상을 이어가고, 목격자 프랑스인 여성 줄리엣 또한 희생자의 아내인 베라와 연대하듯 보이다가도 알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흡사 프랑스 내 백인으로서 그의 편에 선다. 가해자 프랑스인은 가련한 피해자로 역전된다. <썸머타임: 아름다운 계절>에선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하던 1970년대에 여성이 입는 배역을 고찰한다. 생산을 주목적으로 삼는 전원, 그곳에서 사랑과 결혼은 마찬가지로 남과 여의 번식을 위한 수단이다. 델핀은 동의한 적도 없는데 남성 앙투안과의 결혼이 기정사실로 되어있고, '정상성'을 확인하는 이성애자 남성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이성애자를 연기한다. 파리에서 페미니즘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는 카롤도 마찬가지로 여성의 권리 신장을 외치지만 정작 그녀 자신에게 소홀하다. <임파서블 러브>에서는 성별에 따라 배역이 규정된다. 남성 필립은 주로 배역을 입지 않는다. 언제나 자유분방하게 실존한다.      


그러나 그의 연인 레이첼, 딸 샹탈은 그에 의해서 배역 ‘피해자’가 강제된다. 남성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말년에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제 모든 책임을 잊는다. 그러나 여성은 늙어서까지 남성이 자신에게 가한 상흔과 책무를 기억하고 짊어진다. 남성에 의해 배역을 입은 여성은 옷을 입은 모습, 거울에 의해 왜곡된 모습으로 비친다. 하지만 코르시니는 강제된 배역을 연기하는 연극을 중단한다. 대신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이 허위이자 가상으로서 펼쳐질 수 있는 연극에 주목하여, 그녀들이 자유로운 배역을 선택하여 입기를 촉구한다. <리허설>에서 여성들은 남성 관객이나 감독에 의한 검열에 시달린다. 배우였던 루이즈는 관객에게 위축되어 연기를 포기하고, 나탈리 또한 연인이자 감독인 마티아스가 원하는 연극에만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루이즈는 나탈리가 저명한 감독 아마르의 연극에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남성에 의한 여성으로부터, 여성에 의해 남성의 각본이 규정된다. 하지만 연극이기에 성취는 반쪽짜리다. 나탈리는 배우로서 성공했으나 정작 루이즈와는 소원해졌고, 루이즈는 연극을 성공하기 위해 현실의 자신을 희생했다. <쓰리 월드>에서 알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감추던 줄리엣은 이를 털어놓고, 사건을 숨기던 알은 서서히 진실을 털어놓는다. 코르시니는 줄리엣에게 보편적이었던 학업, 알에게 일반적이었던 업무를 '중단'하는 목격자의 양심을 촉구한다. <썸머타임: 아름다운 계절>에서 코르시니는 '나체'를 적나라하게 포착한다. 배역이 덧입혀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몸이 주문하는 레즈비언, 농장주로서 여성, 임신 중절 등을 실현한다.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법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이를 유린하면서 연대한 소수자와 자신의 권리를 실현한다. <임파서블 러브>에서도 나체를 강조한다. 옷이 입혀지기 이전에 필립과 레이첼은 약혼, 수감 사실 등을 고백하며 솔직하다. 그러나 점차 불평등한 젠더가 덧입혀지며 여성에게 나체는 불가능으로 전락하고, 오직 가능한 것은 가부장제 내 여성 젠더의 연기다. 마지막으로 코르시니의 작품은 욕망과 사랑을 넘나든다.   

   

<리허설>에서 루이즈는 나탈리를 위해 헌신하면서도, 배우로서 불발된 자신의 욕망을 나탈리에게 투영한다. 그녀가 복통을 호소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한편 결말에서 루이즈는 나탈리 대신 마티아스와 사귀는데 그것이 욕망인지, 아니면 나탈리를 위함과 동시에 마티아스에게 상처 준 대가를 짊어지는 사랑인지, 명확하게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상태에 머무른다. <임파서블 러브>에서 여성에게는 헌신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이 요구되는 한편, 남성은 방종한 나르시시즘 곧 욕망을 허용한다. 그리고 여성 또한 실제 남성이 아닌 헛것의 남성을 욕망하며 사랑은 불가능과 욕망으로 영영 대체된다. 즉 나는 욕망하거나 타인을 사랑하려고 시도해도, 내가 외피만 접할 수 있는 타인은 내면까지 전부 파악하기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사랑은 불완전하거나, 사랑하지만 사랑을 망치는 에로스로 뒤바뀌는데, 과연 코르시니의 신작에서 연극과 욕망은 어떻게 펼쳐질까. 코르시니의 그간 작품과 달리 레즈비언 커플은 더는 연기하지 않는다.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러나 다른 영역에서 연극과 욕망이 충돌하여 균열이 발생한다. 코르시니는 본 작품에서는 섹슈얼리티보다 사회 전반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 영화의 제목 '균열'은 왜 발생하는가. 상상해보자, 지진이 발생하여 땅이 흔들리고 막대한 힘이 가해진다. 그리고 대지는 쩍쩍 갈라지는데 우리는 이것을 균열이라 부른다. 즉 균열은 막대한 힘의 충격이 원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어떠한 힘이 가해지고 충돌하는가. 영화의 도입부, 인류가 자야 할 시간, 밤이다. 그런데 라파엘은 잠들지 않는다. 어딘지 불만족스럽고 심심한 듯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깨어나 스마트폰을 뒤적인다. 어둠과 상반되는 새하얀 빛이 캄캄함을 날카롭게 가로지르며 균열을 낸다. 이윽고 라파엘은 옆에서 눈을 감고 어둠 속에 몸을 맡기며 잠을 청하는 쥘리에게 문자 폭탄을 보낸다. 즉 어둠 속에서 자는 것이 일반적인 쥘리에게 빛과 깨어남이 균열을 일으키고, 쥘리가 '투렛 증후군'이라 비난하는 라파엘에게는 자는 것이 반대로 균열이다.    


영화 초반에는 교차 편집이 도드라진다. 분명 같은 하늘 아래에서 닮았으며 향후 만나게 될 사람들, 그러나 아직은 단절된 부르주아(쥘리, 라파엘)와 프롤레타리아(얀)가 영화 내부에서는 이어지지 않되, 교차편집으로 감상자의 눈과 프랑스의 현 주소를 다루는 영화로써 이어진다. 라파엘은 노란 조끼 시위에 참여한다. 그리고 경찰을 향해 도발한다. 시위에 참여하는 라파엘의 시선에선 인권과 노동권을 침해한 국가가 범법자지만, 반면 경찰의 눈에는 법을 집행하겠다는 자신들의 경고를 어긴 시위자들이 위법자다. 양자는 서로를 이해하지 않거니와 못한다. 각자의 귀는 형식상 열려있을 뿐, 사실상 닫혀서 서로를 포용하지 못한다. 교차편집을 뛰어넘어서 실제로 만나게 된, 각자가 담긴 두 숏은 충돌한다. 라파엘은 팔꿈치에, 얀은 종아리에 균열이 인다. 코르시니는 이를 '핸드 헬드'로 보여준다. 핸드 헬드는 코르시니가 선호한 형식은 아니다. <썸머타임: 아름다운 계절>과 <임파서블 러브>만 하더라도 그녀는 부드럽고 안온한 트레블링 숏을 선호했다. 그러나 본 작품에서는 흔들려야만 한다. 그 이유는 영화가 다루는 대상들이 같은 숏에 동승하면, 절충되지 않는 두 개의 거대한 욕망, 그것을 추동하는 힘이 충돌하여 흔들리고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핸드 헬드를 발생케 하는 상황은 다수가 하나의 숏에 공존할 때며, 이러한 숏에는 언제나 폭력이 동반된다. 잠들지 않고 귀찮게 구는 라파엘을 향해서 쥘리는 베개로 그녀를 사정없이 내리치고, 경찰은 시위자에게 돌진한다. 이후 병원으로 향해서도 계급 및 정치적 견해가 다른 라파엘과 얀은 끊임없이 부딪히고, 외부 객관적인 현실을 보지 못하는 애드리안은 자신의 망상대로 간호사 킴을 오해하여 그녀를 겁박한다. 설령 이들이 말이 통하더라도 그 시간은 짧다. 병원에서 쥘리는 동창 로랑과 재회하지만 그와 말을 섞고 싶은 눈치가 아니다. 또 엄격한 쥘리에게서 그녀의 아들 엘리엇은 항상 떠난다. 그래서 영화는 다수가 하나의 숏에 욱여넣어짐에 발생하는 소요와 충돌을 핸드 헬드라는 형식적 타당성으로 확보한다.    

  

그렇게 하나의 숏에 다수가 욱여넣어지는 이유는 젠더나 계급에 의한 충돌이 프랑스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름을 뛰어넘고 공존할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숏에는 주로 한 사람만 놓이며, 자신이 아닌 타인이 포착된다면 재빨리 카메라의 시선과 주의를 자신으로 되돌리려는 듯 시끌벅적하게 존재감을 과시하고, 그렇게 소란스러운 각자를 모두 포착하려는 카메라의 운동과 영화의 편집은 매우 기민하다. 하나의 숏에서 다수를 바라볼 수 없는 분열과 충돌, 그렇기에 소모적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각각의 숏에서 개개인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버겁게도 느껴진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들은 충돌하는가. 얀은 구급차에 실려 간다. 이후 응급실 TV 속 시위 보도를 시청한다. 그러나 언론은 시위자들에 의해서 폭력적으로 변질되었다고 곡해하여 보도한다. 실제 현장에서는 경찰이 먼저 시위자들을 향해 폭력을 사용했고 최루탄을 발포했지만, 정작 언론은 폭력의 원인으로 시위자를 지목한다. 이후 마크롱의 연설이 이어지고 얀은 이를 들으려고 하지만, 간호사는 볼륨 높이는 것을 제지한다. 또 경찰의 진압으로 시위대가 병원 앞까지 내몰렸다. 그런데 라파엘이 스마트폰으로 확인하길, 실제 현장을 적확히 보도해야 할 언론은 이를 별문제 없다는 식으로 은폐한다. 만약 사실이 객관적으로 전달되고 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충돌은 덜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주장하는 '시뮬라시옹'을 하고 있다. 시뮬라시옹이란 현실에서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다. 회화, 조각 등 현실과 비교적 차이를 보이는 것에서부터, 현실과 대응한다고 믿곤 하는 객관적인 사진, 영화, 심지어 '기사'까지도 시뮬라시옹에 해당한다. 분명 후자의 유형들은 우리에게 현실이나 객관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현실의 총체가 아니라 편린이거니와, 그 편린을 총체이자 일반성이라고 왜곡할 수 있는 법이다. 영화에서도 시위 현장에 다른 ‘자막’을 붙이며 현실과 멀어지고, 마크롱의 연설은 음소거되어 이를 듣고 싶은 사람과 단절된다.      


그리고 시뮬라시옹은 현실에서 가상으로만 향하지 않고, 가상이 곧 현실을 시뮬라시옹한다. 영화에서도 그렇다. 얀이 먼저 경찰을 도발하긴 했지만, 폭력을 먼저 사용한 쪽은 경찰이었다. 또 로랑의 동료 엘로디는 시위 현장에서 그저 길을 걸었을 뿐인데, 경찰이 강압적으로 폭력을 휘둘러 과잉 진압했고, 그 여파로 갈비뼈가 부러졌다. 그런데 가상이 현실을 ‘폭력적인 시위자’라고 시뮬라시옹하니 전후 관계가 모두 뒤집힌다. 그리고 현실에서 직접 겪은 사람들과 시뮬라시옹의 결과물인 '시뮬라크르'를 접한 사람들 사이에 커다란 오해가 발생하고, 그것이 충돌하며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현실에 속한 사람과 언론을 접한 사람은 커다랗게 벌려진 균열에 의해 더더욱 낯설어진다. 라파엘은 쥘리를 비난하는 문자를 보낸다. 라파엘이 그녀를 힐난하는 언어는 쥘리에게 대응하지 않기에 충돌한다. 얀 또한 마찬가지로 경찰을 조롱하고, 그것을 부정하고자 경찰은 얀을 진압한다. 우리는 스마트폰 덕분에 멀리 있는 대상과 함께하는 것처럼 느낀다. 쥘리에게 엘로디가 그렇다. 그런데 스마트폰에 의한 친밀함은 오독이다. 엘로디는 멀리 있고 싶지만 쥘리는 계속 아들에게 집착한다. 스마트폰을 통해 아들과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스마트폰에 매개된 대상과 실재는 다르다. 이윽고 스마트폰에서도 엘로디는 멀어진다. 즉 대상의 객관이 아니라, 내가 상상한 욕망을 대상에게 덧씌우고, 그것을 거부하는 대상에 의해서 균열이 더 커진다. 사회 전반에 가득한 통념·편견도 마찬가지다. 응급실에서 라파엘과 얀이 충돌한 이유 중 하나가 라파엘이 얀은 '르펜'을 지지했을 것이라며, 막연한 계층적 통념으로 그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또 프롤레타리아인 얀은 부르주아 쥘리를 막연히 오해하여 피해의식을 드러냈다. 또 노동자 얀과 경찰은 자신의 신분, 직업에 따른 일반성을 추구하다가 충돌한다. 즉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대변한다고 믿는 이미지나 편견을 지레짐작 믿고, 이에 따라서 행동하면 이와 차이가 있는 개별적 실재와 충돌한다.      


그리고 충돌에 따라 대응하고 연결하게 만드는 행위들이 모두 좌절된다. 라파엘은 화가다. 그녀는 꽤 사실적인 화풍을 추구하는데, 오른팔을 못 쓰게 되자 왼팔로 환자들의 초상을 그려보고 이는 제법 닮았다. 즉 그녀의 그림은 현실에 대응한다. 또 얀은 화물 운송 기사로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과 사람,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를 매개한다. 그런데 충돌로 뼈에 균열이 발생하자 라파엘은 그리는 행위가, 얀은 운전이 어려워진다. 그들은 병원에 갇힌다. 그러나 라파엘은 얀의 초상을 그려주고, 얀은 다쳤어도 운송을 그만둘 수 없다. 우리는 뼈가 다시 붙듯, 균열을 흡사 바느질처럼 꿰매어 연결하고 매개해야만 한다. 그리고 코르시니는 공간성을 탐구한다. 라파엘과 쥘리는 집의 침실에, 얀은 동료와 함께 퇴근길 차 안에 있었다. 사적인 공간의 그들은 공적으로 공공을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자기 멋대로 굴었다. 라파엘과 쥘리는 그래서 충돌했고, 얀은 동료와 노래를 부르며 극도로 흥분했다. 이윽고 집 밖으로 나간다, 길거리다. 집이 사적인, 이로써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길거리는 무수하게 다양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한다. 라파엘은 길에서 멀어지는 쥘리를 붙잡다가, 마찬가지로 얀은 경찰을 제멋대로 비난하다가 충돌한다. 즉 하얀 캔버스와 같은 집에서는 시뮬라시옹을 제 마음대로 펼쳐보기도 하고, 이에 따른 시뮬라크르에 갇힐 수도 있지만, 백지가 아니라 이미 사실로 가득 찬 외부 길거리에 가상이 확대되면 실재와 충돌한다. 이렇게 길거리에서 각자의 시뮬라크르에 의해 충돌하여 나 자신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최후의 공간인 병원으로 향한다. 철학자 헤르만 슈미츠는 자신의 연속성을 위협하는 경악을 접한 인간은 원초적 현재로 회귀하여, 주관성에 집착하는 개체적 퇴행의 발생을 논하는데, 영화 속 환자들이 그렇다. 말초적 주관성, 곧 제 목숨과 생존이 급하다. 다른 환자가 먼저 진료실로 들어가자 “왜 자신은 들여보내 주지 않느냐”면서 타인의 아픔을 헤아릴 수 없는 조급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수술복 안에 속옷도 입지 않은 채로 복도를 활보하며 엉덩이를 노출한 환자, 규칙을 무시하고 반려견을 데려오려는 환자, 몸을 주체할 수 없어 복도에 구토하는 환자, 불안하여 쥘리를 부르는 라파엘과 망상에 휩싸인 애드리안 등… 고로 코르시니에게 병원은 시뮬라크르와 타협하지 않는 주관성의 진실과 생존의 최후의 보루다. 환자들은 자신을 이미지나 가상으로 꾸미지 않는다, 지나치게 솔직하다.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병원 앞까지 닥쳐온다. 응급실까지 최루 가스가 스며든다. 그리고 경찰이 지시하는 법에 따라서 병원의 입구를 폐쇄하려 한다. 그러나 한 의사는 병원은 열려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찰은 시위대를 범법자 취급하고 이를 위해서 병원에 협조를 구한다. 그러나 얀이나 엘로디의 사례에서 보듯 그들 전체를 범죄자로 매도하는 일은 개인의 진실을 훼손하는 시뮬라시옹이다. 개인의 진실을 지키는 병원은 문을 열어 시위대를 받아들이고, 지하실 통로 또한 개방하여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게 한다. 병원이 이타적인 공간일 수 있는 이유는 의료인들의 희생 덕분이다. 외부에서는 모두 다 타협하지 않는다. 심지어 국가도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도그마를 국민에게 강압하여 권리를 침해한다. 이러한 와중에 병원에서는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내려놓는 의료인들로 북적거린다. 환자들이 시끄럽게 우겨대도 묵묵히 들어주는 의료인들, 불쾌하고 거북한 오물들을 내내 접하며 자신의 오감을 포기하는 간호사들, 심지어 킴은 제 자식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제 손을 다른 환자의 가슴 위에 올리며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타인과 연결하며, 애드리안의 난동으로 해를 입었음에도 신고하지 않는다. 즉 의료인들의 무조건적인 열림, 이후의 받아들임에 의해서 환자들은 병원에서 막무가내로 군다. 환자들이 엉망이더라도 의료인은 수용하기 때문이다. 이에 병원은 카오스다. 이기적인 이들은 타인을 보지 않고 또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적대하지만, 사실 서로는 닮아있다. 영화의 편집은 매치컷에 가깝다. 라파엘이 쥘리를 비난하는 문자를 보내는 것과 얀이 경찰을 조롱하는 숏이 닮았고, 충돌로 라파엘과 얀이 일을 못 하게 된 것도 닮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욕망, 그리고 충돌로 인한 균열, 이에 따른 고통으로 타인이 보이지 않는다. 내 통증이 우선이다. 그러나 내가 조금 진정되니 엘로디와 엘리엇의 고통이 느껴져 걱정된다. 간호사는 호흡이 가빠진 엘로디에게 호흡법을 시범삼아 보여주고 엘로디는 이를 따라 한다. 이후 병실에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가 들어오자, 라파엘과 얀 또한 호흡을 시범 보이고 그녀는 이를 따라 하여 조금 진정된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자아가 '내속'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우리는 보이는 것, 느껴지는 것, 만져지는 것들에 나를 속한다. 내 안에다가 대상의 현존을 불러일으키고 반대도 되며, 이에 자아는 오롯이 나 혼자 이룬 것이 아니다. 내가 구성하지 않은 나의 삶과 행동에 익명적으로 머문다. 닮은 인류는 타인에게 나를 속하는데, 우리는 좋은 것을 따라 하고, 또 사회에 이롭기 위해 좋은 것을 실천해서 따라 하게 만들어야 한다. 즉 우리는 독립적이고 고유한 내가 아니라 따라 하는 서로다. 그렇게 유사해지며 서로의 호흡과 사정을 헤아린다. 간호사는 근무 시간을 바꿀 때마다 인수인계한다. 이전에 일하던 간호사가 경험한 것들이 이후 시간대의 간호사에게 이어진다. 그것이 간호사 외의 일반 인류에게도 가능해야 한다. 그것은 서로 간에 긍정적인 것, 이해를 위한 모방에서 비롯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화'로 가능하다. 라파엘과 쥘리, 또 라파엘과 얀은 다툰다.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제 망상만 고집스럽게 떠들어댐에, 이를 객관적으로 부정하는 상대방이나,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망상에 갇힌 상대방과 충돌한다. 각자는 닫힌 채로 충돌하며 균열을 일으킨다. 그러나 라파엘이 배터리가 다 떨어진 얀에게 핸드폰을 건넨다. 이후 대화를 나누고 그들은 배시시 웃는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 시리즈에서, 신화 속 웃는 행위는 '열림'을 의미한다. 웃는 행위는 열림으로써 내 약점이 노출돼 취약해지기도 하고, 그 틈을 타서 상대가 침투할 수도 있다. 그래서 과도한 열림을 지양하기도 하지만, 과도한 닫힘은 변비나 부패로 이어진다.      


즉 무절제한 열림이 아니라, 적정 수준의 열림이 필요한데, 영화에서도 그렇다. 이들이 웃음뿐만 아니라 다른 얼굴과 오감을 열어서 수용하는 것은 각자의 진솔한 이야기다. 얀과 라파엘은 서로가 어째서 입원했는지, 또 애드리안이 킴을 납치했을 때는 그의 생각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설득하고, 엘로디가 부당하게 진압당했음을 확인한 의료인은 같이 눈물을 흘린다. 그간 이들은 계급, 직업, 각자의 이기심에 갇혀 상대방과 고립되었다. 언론뿐만 아니라 서로도 시뮬라시옹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에 따라 나와 다른, 이로써 나의 뜻을 관철하는 것만 같은 타자를 악마화했다. 그러나 대화해보니 적개심과 분개가 누그러진다. 실제로도 그렇다. 페미니즘 학자이자 평화학자인 배티 리어든은 타자화에 동반되는 공포와 적개심, 악마화가 실제로 대화하고 교감할 시 경감되다 못해 친밀함으로 뒤바뀐다는 것을 주장한다. 계급 간 확연한 차이를 보였던 라파엘과 얀은 대화하며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애드리안은 경찰이 도처에 깔려있다는 망상에서 벗어나며, 어느 한 경찰은 얀이 시위자임을 확인하지만 도망갈 수 있도록 눈감아 준다. 그렇게 모두는 간호사가 되어야 한다. 응급실에서 쥘리는 라파엘이나 엘로디에 국한되지 않는 환자들을 돕고, 라파엘이나 얀 또한 마찬가지다. 스스로는 분명 환자의 보호자, 또 환자이지만 그들은 간호사임을 닮을 수 있다. 환자인 그들이 간호사를 따라 하며 침상을 더 급한 환자에게 양보한다. 그들이 누군가의 말을 들으려는 태도와 이타심을 말이다. 그래서 <균열>의 후반부에 ‘개인의 최후의 보루’로서 병원이 위기에 처할 때, 카메라의 흔들림과 긴장감은 극에 달하지만, 사람들이 상대방을 바라보는 질서와 대화, 이타심을 회복하며 연출은 점차 얌전해진다.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 서로의 경계선으로 발생한 오해와 단절을 극복한다. 라파엘과 쥘리는 얀과 다른 병실에 있다. 시각은 얀이 포착되고, 딱딱하고 불투명한 고체로 막혀있는 벽 너머의 쥘리와 라파엘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청각은 침투할 수 있다. 반대로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의 오해에 항변하는 얀의 목소리가 그녀들만 포착한 숏에 침투한다.      


물질적·물리적 제약이 있는 공간, 거기에 안주하는 우리는 갇힌다. 그러나 제약이 덜한, 덜 가로막히는 청각에 열려있을 때 무지와 오해는 이해로 맺어지고, 이로써 화합과 연대로 나아간다. 다만 코르시니는 막연한 희망에 안주하지 않는다. 라파엘과 얀 둘 다 퇴원한다. 그러나 라파엘은 보호자인 쥘리와 함께 퇴원하는 반면, 얀은 혼자서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 몰래 퇴원한다. 라파엘은 평화롭게 퇴원하는 한편, 얀은 다시 병원으로 되돌아온다. 기댈 곳이 없는 얀은 무리하게 운송 업무를 하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즉 일순간 ‘우리’가 되더라도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가면, 연대의 여유가 있는 부르주아/연대하기에는 촉박한 프롤레타리아로 다시 나뉘고, 전자가 길거리에서 연대가 가능하다면 후자는 병원으로 향해야지만 연대가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병원 바깥에서도 간호사의 태도로, 그리고 화자임을 잠시 멈춰두고 청자가 되어 ‘더 넓고 긴 우리’로 연대해야 할지다. 코르시니가 바라보는 오늘날의 프랑스, 그곳에는 진실과 거짓, 계급과 편견을 무한히 시뮬라시옹하며 사회 곳곳엔 분열과 충돌, 이로 인한 균열로 가득하다. 그러나 시뮬라크르는 허구가 아니라 진실을 품은 허구가 되어야 하고, 각자는 혐오의 유사성이 아니라 배려와 공존의 유사성을 지향해야 할지다. 거짓말과 혐오는 연쇄되어 결국 나 자신에게 닥쳐올지니. 작년 넷플릭스에 공개된 <아테나>와 유사한 시선으로 프랑스를 진단하는 작품으로, 코르시니는 정신 사납고도 복잡한 편집으로 프랑스를 가시화하며, 형식으로 오늘날을 지칭한다. 그 어지러운 형식은 안온하게 뒤바뀌어야 할지다. 병원이 사회와 국가 전반으로 확장되고, 우리는 드넓어짐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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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225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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