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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r 01. 2023

대런 아로노프스키, <더 웨일>

네 안의 나

대런 아로노프스키(Darren Aronofsky), <더 웨일>(The Whale) - 네 안의 나

“타인의 시선을 눈을 직시하면서 견디는 일은 쉽지 않다. 이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한 자는 상대에게 굴복한다.” -헤르만 슈미츠- 

고대 그리스에 주체성의 요건은 완벽한 정신과 훌륭한 육체였다. 뛰어난 몸과 영혼을 가진 자는 정신이 요구하는 바를 육체가 성실하게 수행하고, 육체가 받아들인 바를 정신이 기민하게 수용한다. 훌륭한 육체는 단순한 미용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렇게 물질과 관념,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람이 제 자신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일컬어졌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넘어서 타인, 가정, 사회, 국가를 지배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본 고대 그리스적 관점에서 고도비만은 나의 주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지름길이다. 물론 고도비만까지 이르게 된 과정에서 내 욕구는 솔직했을 것이다. 몸이 요구하는 것을 무절제하게 따랐고 이로써 즐거웠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정신이 요구하는 바를 비대해진 육체가 수행하기 어려워진다. 너무 빨리 지치거나, 행동하기 불편하다. 하지만 지배 불응은 육체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간 필요 이상으로 섭취한 폭식이 습관이 되어 포기하지 못한다. 정신은 맹목적으로 해왔던 것을 답습함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를 되풀이한다. 고도비만자는 몸은 점점 더 불어나지만, 제 삶의 만족도는 퇴행한다. 그렇게 내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비만이라는 질병과 습관이 나를 지배하는 노예화, 그것을 극복해야 주권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아로노프스키의 신작 <더 웨일>에서는 고래와도 같은 고도비만자의 이야기를 담는다. 1969년 뉴욕 태생의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미국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인간의 내면과 심리를 탐구하고, 특히 반복과 강박증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가시화하는 감각적인 연출로 유명하다. 일단 아로노프스키가 탐구한 심리는 지금 여기의 육신에 만족하지 않고 과거든 미래든, 현재 너머를 바라본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도 같다. 그의 초기 대표작, <레퀴엠>의 부제는 '꿈을 위한 진혼곡'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네 명의 등장인물 모두 다 꿈이 있다. 그들의 꿈은 과거에 가능했으나 지금은 불가능한 것, 현실이 아니라 TV에 송출되는 허황한 가상이다.      


과거로부터 변한 현재의 육체, 현실에 지당하지 않은 가상은 꿈을 실천하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약에 의존하며 꿈을 의존적으로 성취하나, 한편 그 꿈을 자신이 꾸는지, 약물이 이행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천년을 흐르는 사랑>에선 영원을 꿈꾼다. 그 영원은 변화와 유한성을 거스르는 집착이다. <더 레슬러>에서는 한때 전설적인 레슬러, 하지만 현재는 도시의 변변찮은 중년일 뿐인 램이 등장한다. 그는 고립되어 사랑도, 인정도 받지 못하고, 새로운 일을 하더라도 과거의 명성만큼 만족스럽지 않다. 이런 그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레슬러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육체는 낡았고, 레슬링을 둘러싼 환경도 변했다. <블랙 스완>에서 어머니가 이루지 못한 꿈이 어린 니나에게 세뇌되어 타인의 꿈이 자신의 것인양 둔갑된다. 이에 니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배역, 제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배역이 무엇인지를 자각하지 못한다. <마더!>에서 여성은 계속 집을 닫지만, 남성은 집을 열어젖히고 마음대로 침입한다. 꿈은 오직 인간 남성만 가능하고 반복하며, 단순한 인간 여성이 아니라 대지에 상응하는 여성의 꿈은 남성의 꿈만 허용하는 가부장제 내에서 허황한 것으로 전락하여 언제나 좌절된다. 이렇게 아로노프스키의 인간은 가능했지만 잃어버린 것에 강박적인 태도를 보이며 과거를 반복한다. 또 그들의 눈은 현실, 진실을 바라보기보다는, 허황한 가상이 덧씌워져 있음에, 무리하게 이를 실현하려다 현실엔 폭력과 충돌, 균열이 인다. 그러나 원하는 꿈은 지나가버린 과거이거나 허황한 가상이기에 영영 도래하지 않고 과정만 반복되며, 결과에 다다른다 한들 꿈이 인간을 대체한다. <레퀴엠>에서 반복되는 것은 마약, 타인, 매스미디어가 만든 환상이자 의존이다. 나의 바깥에 있는 만족, 현실에 뿌리내릴 수 없는 환상은 줄곧 내게서 휘발되고, 이에 제 자신은 점점 더 궁핍해져 현실에서 추방된다. <천년을 흐르는 사랑>에서 반복되는 것은 현재 바깥으로 이탈하는 시간 여행이다. 하지만 인간은 모름지기 필멸하고, 설령 영생이 가능하다고 한들 질량 보존의 법칙이 진실이기에, 불변이라는 가상을 중단한다.      


<더 레슬러>의 반복은 과거임과 동시에, 영화에서 언급되는 '예수의 고난'이다. 꿈과 기억은 현재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는 늙고 쇠락한 육체를 고려하지 않는다. 예수의 고난에 따른 구원도 한갓 가상일뿐이다. 가상 속 예수는 부활했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램은 부활하지 못한다. <블랙 스완>에서의 반복은 어머니의 욕망을 위해 니나가 제 육체에 가하는 가학적인 폭력, 배역을 얻기 위한 투기다. 니나의 꿈은 실현됐지만 정작 자신의 사망으로 무대를 마무리함에, 꿈은 현실을 희생한다. <마더!>에서 반복되는 것은 여성성, 대자연의 희생이다. 여성은 침입당하고 임신하며 출산하나 이내 곧 그 아이는 살해되고, 자신과 집은 파괴되지만 이윽고 부활하여 자애로운 표정으로 침입을 받아들일 준비를 다시 마쳐야만 한다. 인간 남성에 의해 잠식당하는 여성, 대지의 희생이 <마더!>에서 밝히는 역사다. 여성과 대지의 꿈은 영영 지연된다. 이렇듯 현재-현실과 무관한 과거-가상을 꿈으로 재현하고 숭상함에, 현실에서 이들은 좌절·실패하거나 크나큰 대가를 치른다. 아로노프스키는 본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부각하는 연출로 유명하다. <레퀴엠>에서는 극단적인 익스트림 클로즈업, 패스트모션과 슬로우모션, 비현실적이고 기형적인 구도를 반복하여 마약이 자아내는 초현실적인 촉각을 시청각적으로 승화한다. 이후 뒤따라오는 것은 파괴된 현실을 반영한 연출이다. <천년을 흐르는 사랑>에서는 그의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연출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그럼에도 거대한 규모가 동원된 황홀한 CG로 현재 너머로 영속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을 가시화한다. <더 레슬러>에서는 가상적이고 작위적이던 연출을 포기하고, 다큐멘터리적이라 말할법한 객관적이고 건조한 연출과 스콜세지의 <레이징 불>을 연상케 하는 피학적인 클로즈업을 결합한다. 다큐멘터리적인 연출은 극 중 램을 맡고, 램과 유사한 삶을 살아온 배우 미키 루크가 자아낼 수 있는 효과를 고려한다. 피학적인 연출은 자신이 재현하고자 하는 달콤한 과거의 꿈과 현재 육체가 감당해야 하는 수난을 극적으로 대비한다.      


아로노프스키는 <더 레슬러>에서의 극한으로 치닫는 몸의 통각을 부각한 연출을 <블랙 스완>에 이어온다. 어머니의 욕망으로 형성된 꿈을 위해 육체에 가학적인 폭력을 가하는 니나를 클로즈업으로 밀착한다. 그리고 <마더!>는 롱테이크 안에 여러 시간이 공존하는, 이로써 긴 시간 동안 반복된 가부장제의 폭거를 함축하는 연출이 특징이다. 이러한 그의 영화는 언제나 '무대'가 주를 이룬다. <레퀴엠>에서의 TV, <천년을 흐르는 사랑>에서 판타지 영화의 문법, <더 레슬러>에서의 링, <블랙 스완>의 발레 무대, 마지막으로 <마더!>에서의 집은 일반적 집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라는 각본이 반복되는 연극 무대와 같은 집이다. 무대, 세트장에선 똑같은 배역과 상황만 주어지기에 아로노프스키의 ‘출구 없는 공간’에선 오직 반복만 허용된다. 아로노프스키의 무대는 광고주, 부모, 남성, 이데올로기, 구조가 건축하고, 필연적으로 여기에 속한 인간은 그들의 이익을 위한 꿈을 좇다가 희생된다. 아로노프스키의 연출은 분명 감각적이다. 그러나 그 감각은 편하게 수용할 순 없다. 오히려 수용하기 어려운 불쾌이자 숭고다. 그는 불쾌를 발생시키는 꿈을 의심하고, 또 불쾌로써 꿈의 실체를 까발린다. 가장 아로노프스키답지 않지만, 아로노프스키가 가장 지향할 법한 태도는 <천년을 흐르는 사랑>에서 유한성, 불가능의 수긍이다. 과연 <더 웨일>에서는 어떤 꿈을 좇을까, 그것은 허황할까, 아니면 가능할까? 일단 아로노프스키는 신작에서도 실내극에 '갇힌다.' <더 웨일>은 <마더!>와 형식, 장르 면에서 유사한 작품이다. <블랙 스완>이나 <더 레슬러>처럼 직접적인 무대는 아니지만, <레퀴엠>이나 <마더!>처럼 집이 '각본'을 반복해서 연기하는 ‘무대’로 전락한다. 영화 속 찰리의 집은 어떤 변화도 없이 언제나 그대로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이 아주 무겁고도 둔탁하게 느껴지는 그의 집을, 채도·명도가 낮고 탁한 미장센으로 표현한다. 매번 배달되어 오는 피자도 똑같고, 리즈가 사오는 바게트도 변화 없다.      


그가 머무는 집에는 시간의 때가 잔뜩 낀, 특정한 목적만을 따르는 사물들이 들어차 있다. 이러한 사물들로 꽉 찬 공간에 항구적으로 머무는 찰리는 당연히 할 수 있는 것, 곧 자유가 협소하게 제한될 수밖에 없을 지다. 그 공간을 1.33:1의 화면비로 담아낸다. 안 그래도 답답한 공간은 아주 좁고 폐쇄적인 화면비에 담겨 더 질식할 듯 다가오고, 양옆에 필러박스가 프레임을 막고 있어서 더 넓게 확장되거나 저 너머로 나아갈 여지를 차단한다. 절망적인 심연 사이에 갇혔다! 그러나 영화는 반복과 폐쇄성에서 이탈하는, 찰리의 마지막 5일을 담는다. 필러박스가 횡으로 가로막는다면, 결말에서 찰리는 종으로 이탈하고 올라가며 구원받는다. 끝없이 반복되는 어둠 대신 변화와 시간의 흐름으로 충만한 빛을 만끽하며 말이다. 그렇다면 그간 찰리에겐 무엇이 반복됐고, 무엇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는 것일까? 찰리는 교수다. 그러나 연단에 직접 서진 않는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공화당,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트럼프, 샌더스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건대 2016년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온라인 강의가 전면 대중화되진 않았다. 그럼에도 찰리는 온라인 강의를 하고, 또 노트북에 카메라를 연결하지 않아서 '어두운 화면'으로 학생들에게 송출된다. 그리고 그 어두운 화면을 아로노프스키는 '줌인'한다. 더 깊숙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 '무'로 빨려 들어간다. 즉 연극과도 같은 실내극인 영화에서 지독하리만큼 빨려들며 반복되는 각본, 연기는 곧 '보이지 않음'이다. 찰리는 자신이 보이지 않아야 하는 각본과 배역을 반복한다. 이는 어느 한 초원을 롱숏으로 포착한 도입부와 대비를 이룬다. 자신을 보이지 않게 은닉하는 찰리와 달리, 빛으로 충만한 양지에서 버스에서 내린 청년은 자신의 도착을 널리 알린다. 글의 서두에서 비대함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비대함에 다가서기까지는 내재적 원리에 충실할 수 있다. 그러나 비대해진 이후에는 자력으로 내재적 원리를 따르기 어렵다. 찰리는 비대해지며 내재성이 보이지 않게 되는데, 그렇다면 어째서 비대함은 발생하는가?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 철학자 헤르만 슈미츠의 '개체적 해방'과 '개체적 퇴행', 후자를 발생케 하는 '경악'을 언급하고자 한다. 개체적 해방은 주관성이 떨어져 나오며 사태, 계획, 문제를 객관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으로, 더욱 냉정하고도 차분하게 집중, 반성, 사려할 수 있는 능력이다. 반면 개체적 퇴행은 주관성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개체적 해방이 주관성 너머로 나아간다면, 개체적 퇴행은 원초적 현재로 되돌아가서 개체적 해방 상태에서 명석하게 바라보던 사태, 계획, 문제 사이의 윤곽을 흐리게 만든다. 개체적 퇴행은 경악으로 인해서 발생하는데, 경악은 삶의 연속체가 정지되고 떨어져 나오게 만드는 사태로서,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되고 있음을 감지한다. 개체적 해방 상태에서는 자신의 주관성을 객관성으로 확장하여 세계에 뛰어든다면, 경악이 가해져 개체적 퇴행이 발생하면 지켜야 하는 제 자신에게로 수축한다. 그래서 보존하고자 하는 자신을 위해 부단히 솔직해지고, 지켜야 하는 것에 따라 주관성은 매우 말초적일 수 있다. 슈미츠의 주장을 따른다면 찰리는 개체적 해방을 멈췄다. 주관적인 자신을 타인에게 설득하거나 호소하지 않으며 객관적으로 넓히지 않는다. 오직 개체적 퇴행으로 뒷걸음치고 있는데, 경악이 위협한 자신의 연속성을 보존하려는 시도이랴. 그렇다면 찰리의 경악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또 개체적 퇴행은 과연 보존일까? 일단 후자를 먼저 살펴보기 위해 영화의 ‘다리’와 '입'에 주목하자. 사족 보행을 하는 여 타 포유류와 달리 이족 보행을 하는 인간의 발과 다리는 인류만의 특유성을 보증한다. 한편 입은 의식적·이성적으로 나를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기관, 얽히고설킨 문제를 구술로써 풀어보는 기관이다. 이와 동시에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것은 충동적이고 우발적인 비명이나 신음이요, 또 원초적인 호흡을 하는 기관이자, 동물적인 육체를 보존키 위해서 허겁지겁 본능적이고도 무의식적으로 먹는 기관이다. 즉 입은 인간성과 동물성이 이중적으로 뒤섞이는데, 영화에서 찰리의 입은 그 이중적인 욕구 모두를 만족하지 않는다.      


물론 강의를 하며 객관적인 주장이나 정보를 내뱉지만 그것은 자신의 인간다움에 봉사하지 않고 오직 타인을 위한 것, 자신을 위한 입은 오직 동물적인 욕구만을 만족한다. 그리고 발과 다리는 자의로 움직이지 않고 기계의 도움이 필요하다. 즉 인간다움은 사라졌고 동물적이라 말할 법한 원초적 욕구와 외부에의 의존만 남았다. 하반신이 함께 포착되는 풀숏은 드물고, 오직 입만을 중점적으로 포착하는 클로즈업이 연속하여 좁은 화면비를 꽉 채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찰리는 272kg이다. 현재도 그렇고, 영화 속 그의 과거 사진도 지금보다는 말랐지만, 정상 체중에 비해선 배가 불룩 튀어나와서 동물적 욕구나 생존을 걱정할 체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에 경악을 느낀 것인가? 그가 봉쇄된 것은 이성적이고 의식적으로 말하는 입, 곧 위협당한 것은 사회적인 지위나 인격이다. 영화 내내 찰리가 부정당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찰리의 전 부인 메리는 뒤늦게 성 지향성을 자각했거나, 혹은 숨기고 있다가 앨런을 보고 튀어나온 그의 욕망을 원망했다. 엘리는 앨런 때문에 가족 곁을 떠난 찰리의 과거를 비난 소재로 사용하며 역겨워하고, 찰리는 이에 말로써 대응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거나 외면한다. 영화 초반, 찰리는 게이 포르노를 보면서 자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친 흥분으로 호흡이 가빠졌고, 또 선교사 토마스가 들이닥쳤다. 낯 뜨거운 순간 그의 성 지향성을 확인한 토마스는 찰리에게 구원을 말한다. 그러나 게이의 육체를 기독교는 구원해주기는커녕, 그 육욕을 호되게 질타한다. 또 영화 속 텔레비전에서는 건강 보험을 축소하고, 호모포비아적인 공화당 경선이 송출되고 있다. 물론 찰리는 건강 보험 들 수 있는 재력은 충분히 있다. 그가 위협을 느낄만한 것은 공화당의 호모포비아 흑색선전이다. 즉 찰리가 위협을 느끼는 것은 원초적인 목숨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무엇 혹은 무언가’를 자기 자신으로 간주하는 '자기의식'이다. 그 자기의식을 위협받자 그는 폭식한다. TV에서 공화당 경선이 송출되어 신경을 건드리자 아주 기름진 치킨을 먹는다.   

   

기계가 빽빽거리며 찰리의 건강을 경고하고, 또 음식을 오롯이 넘길 수 없을 정도로 몸 가누기가 어려워지자, 그 사실을 잊으려는 듯 샌드위치를 다시 움켜쥔다. 자신의 혈압 상태를 검색 엔진으로 찾아보자 곧 죽을 수 있다는 쓰디쓴 진실이 밝혀지지만, 초콜릿을 먹으며 달콤함으로 이를 잊는다. 토마스가 설교해대자 달달한 음료수를 마신다. 댄에게 제 모습이 노출된 이후 피자와 과자를 와구와구 폭식하며, 일련의 수치심과 모멸감을 잊으려한다. 그러나 자기의식에 가해진,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공격과 문제는 폭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말초적인 만족감으로 망각하고 회피했을 뿐이다. 그는 더더욱 사람들의 시선 앞에 나설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처음 만난 사람, 오랜만에 만난 사람 모두 다 당황해하고 기겁하며, 심지어 혐오한다. 말초적인 감각에 탐닉하는 존재를 사회에서 꺼려함에 자기의식은 더 소극적으로 위축된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의식에 따른 문제를 외면하고, 음식이 가져다주는 황홀한 '꿈'에 도취하면서, 찰리는 현실을 외면하여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리즈는 그의 생명이 주말을 못 넘길 거란 걸 인지하고, 찰리 또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다. 목요일의 폭식은 더는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구토로 이어낸다. 즉 아로노프스키는 신작에서도 자기의식에 가해진 문제를 말초적이고 동물적으로 해결하고, 가상으로 도피함에 현실이 붕괴하는, 허황한 욕망과 꿈을 파헤친다. 타인의 검열하는 시선이 문제이기에 이를 외면하고자 단단한 벽이 타인의 시선을 방어해주는 집에 자신을 가두고 보존한다. 그러나 변화 없이 고이고 썩어서 악취가 날 정도로 무대와 각본, 배역은 악순환되며, 문제를 면피하기 위한 책략에서 또 다른 문제가 파생된다. 자기 의식적인 사회적 위기뿐만 아니라, 말초적이고 본능적인 위기가 이어진다. 찰리는 내재적인 문제와 맞닥뜨린다. 타인에게 자신의 내재성을 항상 부정 당한다, 자기의식에서 출발하여 이제는 말초적인 육체까지 전부 다. 이에 자신을 걷게 해주거나 이동해주는 보조 기구나 휠체어, 물건을 잡는 기다란 집게에 육체를 의존한다.      


찰리는 제 몸이 내 몸 같지 않다. 찰리는 흡사 사물이나 공간을 청소하듯 세척기구로 제 몸을 벅벅 문댄다. 음식이 눈앞에 있으면 흡사 그것에 홀린 듯, 입을 의식적으로 사용하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삼키다가 기도가 막힌다. 음식이 구강과 목을 지배한다. 그렇게 목이 막혀도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고 리즈의 도움을 받는다. 즉 찰리는 내재적 원리의 위기와 불안을 외재적 원리로 잊는 인물인데, 영화 속 타인들도 유사한 상황에 처한다. 리즈는 찰리가 사귀었던 남자 친구, 앨런의 남매다. 리즈는 앨런에 이어서 찰리조차 잃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앨런을 찰리에게 투영하고 유일무이한 벗으로 소중하게 여긴다. 앨런의 죽음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 고통을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앨런의 일부를 간직하고 있는 찰리에게 기대며 간접적으로 형제의 죽음을 부정하는 듯하다. 즉 외부에 기댐으로써 형제의 죽음을 맞닥뜨릴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외면한다. 선교사 토마스는 고향 워털루에서 대마를 피운 사실이 적발당했고, 교회에서 자신의 선교 방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앙심을 품고 달러를 훔쳐서 가출하였다. 즉 제 욕망에 충실했지만, 이를 가족과 교회가 비난할까 봐 문제를 외면하고 도망쳐왔다. 도망치기 이전에는 자신만만했으나 그 이후에는 소극적으로 변한 토마스는, 자신은 선한 사람으로서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는 선교 일에 집중하며, 자신이 직접 해결해야 할 문제를 내팽개치고 외부 절대자의 권위와 인정에 기댄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도움을 받아야 할 존재 찰리에게 절절히 매달린다. 그러나 찰리는 그의 도움이 필요치 않으니, 토마스에게 외부에서 구원은 찾아오지 않는다. 절대자 또한 그에게 빛을 내려주지 않는다. 또 내재적으로 빈곤한 인간이 이를 타개하고자 외재적으로 기대는 종교 외의 또 다른 대상인 ‘정치’는 앞서 언급했듯, 의료보험 축소 및 호모포비아 정책으로 위기를 심화한다. 즉 빈곤한 내재적 원리가 도망친 외재적 원리는 마찬가지로 허황하여 믿음을 배신한다. 내재성과 무관한 외재성으로 내적 문제를 해결하려 함에, 인간은 영영 해소에 다다를 수 없고 과정만 안일하게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아로노프스키의 작품 중 유일하게 해피엔딩이라고 말할법한 <더 웨일>은 끝없이 반복되는 과정만 담지 않는다. 찰리 최후의 5일 동안 그가 문밖으로 나가서 댄과 마주치기도 하고, 잠겨있던 문을 열어서 메리와 함께 찍은 사진이나 애런과 함께한 사진을 발견하는 등, 그간 외면하여 망각된 자기의식, 내재성을 루틴을 이탈하며 드러낸다. 이는 영화의 형식에서 가시화된다. 찰리가 자신의 말초적인 감각을 만족시킬 때, 카메라는 그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흡사 찰리가 중심이 되고, 카메라는 위성이 되어 그의 주위를 뱅뱅 맴돌듯, 이로써 찰리의 중력에 의해 카메라가 좌우된다는 듯. 또 찰리가 핸드폰을 떨어뜨린 것을 토마스에게 주워달라고 부탁할 때, 이로써 밖에 있던 토마스가 찰리의 세계로 편입될 때도 카메라는 찰리를 중심으로 뱅뱅 돈다. 그러나 말초적인 행위에의 탐닉은 곧 호흡곤란, 목 넘김 장애, 심장에의 무리로 이어져 그는 동물적이고 기본적인 욕구에서조차 더는 중심일 수 없다. 이에 혼자서 불가능한 것들을 리즈에게 의존하며, 그녀가 검진을 할 때 숏은 나뉜다. 다른 인물들의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방문이나 목격도 마찬가지다. 즉 그는 오롯이 혼자일 수 없으며 이에 영화의 카메라는 그들과 대화하는 리버스 숏을 이룬다. 그러나 위협적인 타인에게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에, 제 몸을 지키고자 집안에 갇혀 폭식하고 비대해진 그는 타인과 마주하는 것이, 대화와 시선 교환이 영 불편하다. 특히 죄책감을 느끼는 엘리에게는 항상 고개를 떨구고, 자신에게 가해진 비난에 대해서 항변하거나 핑계 대지 못한다. 경악이나 당혹스러움은 내 주관성이 타인에게 확장되지 못했을 때, 이로써 내 주관성이 자신 바깥으로 해방하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그럴 때 우리는 소극적으로 집에 자신을 가둔다. 외부에서 나를 부정한다면, 반대로 나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를 부정하고 내부로 향하여 ‘나만 좋은 것’에 탐닉한다. 반면 서로 강한 개체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주관성이 서로에게 섞여 들고, 이로써 주관적인 내가 타인의 동의를 얻으며 일련의 객관성을 띠게 되는 '내체화'는 사랑으로 가능하다.      


그렇게 내체화를 이뤄야 하는 이유는 자신을 보완하고 영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내체화는 폭력적이다. 가족이 앨런에게 결혼을 강요하고, 이후 가문의 뜻을 거부하자 식구들과 교회가 그를 추방한 것, 또 아시안계 리즈를 입양하여 종교를 강요하는 것은 개인의 주관성을 침탈하는 일이다. 일방적인 내체화는 어느 한쪽은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나, 받아들이는 쪽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일방적이고 권위적이며 독선적인 일신교인 기독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토마스의 도피, 찰리의 위축을 기독교가 만들어낸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는 앨런이 입었다. 가족과 교회는 앨런의 주관성을 침략하여 그와 무관한 것을 채워냈고, 그렇다고 가족과 교회가 그의 주관성을 보존해주지도 않았다. 연인 찰리가 남아 있었지만 그가 앨런의 시신을 확인할 수 없었던 만큼, 앨런의 주관성을 오롯이 내체화하기엔 간극이 있었다. 이로써 내면이 황량해진 앨런은 자살한다. 그러나 상호 내체화는 각자의 주관성을 보존함과 동시에, 상대의 주관성이 섞여들면서 주관성이 가진 결핍을 극복하고, 또 상대에게 포용됨으로써 나름의 객관성을 이룬다. 나는 자신으로 살지만 이와 동시에 상대로도 살고, 상대 또한 나의 일부로 산다. 그렇게 나의 삶은 고양되고 세계 속으로 이어진다. 아로노프스키는 경악, 이로 인한 고립과 자기 폐쇄성, 환각으로의 도피에서, 사랑을 가능케 하는 연결과 사실을 긍정하며 일방적 내체화를 상호 내체화로 뒤바꾼다. 여전히 영화의 시각은 변치 않는 집이다. 조금씩 바뀌고 있긴 해도 크게 바뀌진 않는다. 그러나 청각은 큰 규모로 뒤바뀐다. 메리와 찰리의 대화, 그녀는 퉁명스럽고 비판적이며 살림이 서툰 반면, 찰리는 매우 긍정적이고 요리도 잘해서, 혼인을 유지하던 당시 균형을 이뤘다고 회고한다. 즉 상호 내체화는 각자의 결핍을 보완한다. 또 마지막 날, 찰리는 리즈와 대화하며 서로를 분리한다. 리즈 또한 토마스처럼 찰리를 지나치게 필요로 했고, 언제나 제 마음과 그의 마음이 같으리라는 듯 발화했다.      


더욱이 리즈는 동양계 여성이요, 찰리는 동성애자이자 비일반적인 고도비만인임을 생각할 때, ‘백인 이성애자 남성 중심 사회’에서 약자 및 타자의 연대가 각자의 주관성에 큰 응원이 되었으랴. 그러나 리즈가 찰리에게 지나치게 투영한 주관성을 이젠 분리하여 앨런의 대체품이 아닌 찰리, 그와 달리 죽지 않는 리즈를 회복한다. 찰리뿐만 아니라 엘리도 대화한다. 엘리는 지나치게 내재성, 주관성에 충실하다. 당돌한 주관성만을 위해서 돌진하는 엘리는 제 기분만 생각하다가 정학을 당했고, 타인은 엘리만 웃긴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녀가 사악하다고 말하는 메리는 손을 놓기 직전이다. 즉 엘리는 남들과 달리 내재성을 잃지 않고 솔직하지만, 그 내재성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추방된다. 그런 엘리는 토마스가 고백한 녹음과 사진을 워털루에 보내서, 소년이 내재성을 회복하여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게 한다. 즉 엘리의 적극적인 주관성이 토마스의 소심한 주관성을 보완하여 그가 발걸음을 내딛게 하는 상호 내체화를 이룬다. 엘리와 찰리의 대화도 마찬가지로, 아빠는 딸과 대화하며 어째서 살이 쪘고 모녀를 왜 떠났는지 고백하며 꽁꽁 숨겨놓은 내재성을 회복한다. 또 찰리는 엘리의 기분을 배려하고 그녀가 똑똑하다는 사실을 긍정함에 엘리는 찰리 안에서 보존된다. 찰리는 숨김없는 엘리와의 만남 이후 점차 개체적 해방하는데, 수요일의 원격강의는 월요일과 달리 검은 화면에서 ‘줌아웃’으로 멀어진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멀어져 드러내겠다는 듯이, 이윽고 금요일 수업에선 자신을 기꺼이 노출하여 강의 내내 말하던 ‘솔직함’을 직접 실천하고, 폭식으로 도망가지 않는다. 찰리는 경련이 일 때마다 엘리의 에세이를 읽었다. 죽기 직전 마지막 하고 싶은 행위, 또 자신과도 같은 딸의 솔직함으로 주관성의 긍정, 그리고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통찰은 '모비딕'으로서 자신이 '애이허브'에게 박해당한 사실을 위로해 주었으랴. 이를 엘리가 읽어줬으면 했지만 그녀 대신, 찰리나 토마스가 대신 읽었다. 그러나 엘리가 읽어야만 했다. 찰리는 엘리가 제 에세이를 읽으며 주관성을 긍정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엘리가 찰리를 위해 주관성을 긍정해야 하는 이유는 부모자녀 간 내체화는 잉태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찰리가 저축한 돈이 엘리를 위한 목돈이듯, 엘리가 퉁퉁 불어버린 찰리를 보고 자신도 저렇게 될까 걱정하듯, 서로는 자신의 과거이자 미래다. 엘리가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면 찰리 또한 마찬가지요, 그 반대도 똑같다. 그간 분리되었던 이들은 서로에게서 자신을 찾을 수 없었으나, 찰리가 내내 강조하는 '솔직한' 에세이를 상호 내체화하여 숨김없는 서로를 밝힌다. 딸이 에세이를 읽어주자 소극적이던 찰리는 어떤 기구에도 의존하지 않고 홀로 일어서며 엘리처럼 주체적으로 변하고, 반면 제 쾌감에 지나치게 몰입하여 마리화나를 피우거나 상대를 괴롭히던 엘리는 찰리처럼 이타성을 절충한다. 내체화를 메리하고만 해서 까칠하던 엘리는 이젠 부드러운 아버지도 자아에 간직한다. 그렇게 자신 안에 상대를 보존한다. 이후 찰리는 어둠 속의 자신을 밝혀주는 빛으로 나아가며, 죽어서 구원된다. 비록 그는 죽어서 구원되지만 살아서의 구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찰리가 메리와 대화할 때, 즉 살아생전에도 플래시백으로 그는 집안에서 과거의 해변으로 이동하였다. 서로가 잠들어 있던 행복한 기억을 밝혀주었다. 현재의 시각엔 기억 속의 파도 소리가 침투하였고, 플래시백으로 해변을 비추는 동안에는 현재의 음성이 결합하였다. 즉 살아 생전의 상호 내체화 또한 자신을 밝히고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하는 구원이다. 또 죽더라도 상호 내체화된 찰리의 일부는 엘리 안에 영영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게 유한한 자신 너머로 자유를 확장하며 자기의식을 영속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구원이다. 

이를 위해 아로노프스키는 외재적 원리가 일방적으로 내체화되는 ‘무대’에서의 이탈을 주문한다. 일방적 내체화는 엘리가 『모비딕』을 해석한 것처럼 침략당한 고래의 감정 상실, 상호 불행이다. 내체화를 강요하는 상대를 위해서 나를 상실한다. 하지만 죽고 잊히는 인간은 필연적인 공허를 극복해서 스스로를 남겨야하고, 이를 위해서 외재적 원리와 내재적 원리가 한쪽에 쏠려 있는 인간은 전자에겐 '솔직함', 후자에겐 ‘사랑’으로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 나만의 특유한 주관성이 타인이 수용할만한 것이 될 때 객관성을 획득하고 비로소 나는 타인 안에 흡수되어, 자신 바깥에 보존되리니.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각기 다른 주관성의 상호 내체화, 이를 통해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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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301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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