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3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Mar 04. 2023

<라비예 쿠르나즈 vs. 조지 W. 부시>

정의, 움직이고 공감하기

안드레아스 드레센(Andreas Drsen), <라비예 쿠르나즈 vs. 조지 W. 부시> 

(Rabiye Kurnaz vs. George W. Bush) - 정의, 움직이고 공감하기     

“우리는 아마도 어머니에게 이런 걸 원할 거예요. 세상을 유지하라고, 거짓일지언정, 계속 세상이 유지될 것처럼 굴라고.” -히샴 마타르-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미국은 2000년대 초반 중동을 벌집처럼 들쑤셔놓았다. 본인들이 피해를 당한 9.11 테러 이상으로 중동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은 미국, 그러나 악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전쟁에서 체포한 몇몇 무슬림들을 쿠바의 관타나모 해군 기지로 이송시켜 강제 수감하고 잔혹하게 고문한다. 미군의 민간인 학살 및 관타나모 고문은 내내 보도되지 않다가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문제시되었고, 특히 적법한 절차를 무시하고 수감 및 고문하는 관타나모의 비민주성이 큰 논란이 되었다. 범죄 사실이 확정되지 않은 용의자들, 심지어 용의자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한 무고한 피해자들이 미국의 강대한 힘에 가려 허송세월을 보냈다. 안드레아스 드레센의 신작 <라비예 쿠르나즈 vs. 조지 W. 부시>는 독일계 터키 여성 라비예가 자기 아들을 부당하게 관타나모에 수용한 미국과 대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실화다. 1962년 동독 게라 태생의 안드레아스 드레센은 현 독일의 영화감독이다. 보통 서독 출신의 감독들이 모여 있는 베를린파(동독 출신인 앙겔라 샤넬렉을 제외하면 크리스티안 펫졸드, 마렌 아데, 울리히 쾰러, 토마스 아슬란 등 다수의 구성원 모두 서독 출신이다)의 영화 미학적 탐구와 달리, 드레센은 동독 출신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영화를 연출한다. 장르 영화를 연출하기도 하는 최근에는 형식에서의 출생성분이 느껴지지 않으나, 초기작들의 경우 조악하여 값싼 35mm 필름을 사용하고 이를 휴대용 카메라로 촬영하여 노동자들도 만들 법한, 삶에 밀착한 리얼리즘 영화를 선보였다. 또 피사체와는 친밀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인터뷰 및 즉흥적인 구도를 이용하여 다큐멘터리적인 효과도 자아냈다. 이로써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허물고 교란하는 그는 영화가 그저 환상에만 잠겨 있기를 거부한다. 필름에서 디지털로 이행한 21세기에도 드레센은 저렴한 35mm 필름을 적극 활용하는데, 2008년 작품인 <우리도 사랑한다> 또한 그렇다.      


그가 오늘날에도 필름을 선호하는 이유는, 필름의 거친 매체성이 평범한 노동자의 삶의 질감과 밀접하여, 그들의 삶을 시지각적으로 승화할 수 있기 때문이랴. 이러한 매체에 드레센은 노동자 배역과 잘 구분되지 않는 비전문배우의 거친 얼굴을 담아낸다. <스탑드 온 트랙>에서는 현실에 개입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다큐멘터리적인 촬영, CCTV와 유사한 고정된 카메라가 인상적이다. 그러나 드레센은 카메라를 멈춘 상태, 현실에 종속된 상태에 두지 않고 움직이게 한다. 인간을 멈추게 만드는 현실 속 뇌졸중과 같은 제약이 ‘멈춤’이라면, 가능성 넘치는 아이들과 삶, 문제 극복이 곧 그에게 ‘움직임’이자 ‘예술’이다. 즉 현실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연출로, 실제 노동자들의 삶과 거의 차이가 없는 배역을 비추며, 그는 사회에 이바지하는 예술을 지향한다. 이러한 그의 리얼리즘은 동구권 독재자들에 의해 악용된 선전으로 전락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반성하여, 사회를 냉엄하게 진단하고 이후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흡사 루마니아 뉴웨이브와도 연관될 수 있는 작업 색채다. 현실에 밀착한 그의 영화처럼, 안드레아스 드레센은 영화감독임과 동시에 브란덴부르크주의 헌법재판관이라는 사회적 직위를 함께 갖고 있다. 다만 최근 드레센은 장르적 문법과의 타협을 시도한다. 그간 보정을 거의 하지 않은 아마추어리즘, 리얼리즘을 지향한 드레센은 <우리가 꿈을 꾸면서>에서 꿈꾸는 유년기와 그것이 불발되는 현재를 채도를 조절하여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영화는 앞서 언급한 현실적인 연출을 바탕으로 사회를 냉철하게 진단한다. 그의 초기 대표작 <그릴 포인트>에선 통일 이후 동독 지역 노동자들의 삶을 고찰한다. 통일은 되었지만 타인과 내가 구분되지 않던 공산주의적 삶이 일상 곳곳에 남아있다. 타인의 감정을 중시하느라 내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다. 개개인이 자유롭고 솔직해야 할 사적 시간 또한 일련의 '서비스직'으로서 가식적인 미소를 서로에게 제공한다. 영화 속 크리스-카트린, 우베-엘렌 부부는 모두 맞벌이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특히 여성들은 집에서도 쉴 틈이 없다.      


집에서 겨우 일을 끝내면 딸이 남자친구를 데리고 즉흥 방문해서 또 일을 벌인다. 즉 사적 소유할 수 없는 삶, 에너지를 사적으로 유용하기보다는 발전에 할애하는 공산주의적 삶이 동독 지역 노동자들에게 통일 이후에도 남아있다. <우리도 사랑한다>는 <그릴 포인트>의 노동-불륜을 가부장제 내의 보편적인 여성의 삶으로 확장한 작품으로, 남성이 은퇴할 나이에 여성 잉에는 여전히 가사 노동자다. 집은 그녀에게 휴식의 공간, 자유로운 사적 공간이 아니라 여전히 남성을 위해 헌신하는 공간, 할머니로서 손자를 돌보는 직장이다. 여자 없는 남성은 목숨을 잃는다, 남성의 목숨에 대한 책임과 죄책감을 협박당한 여성은 자유 대신 희생을 강요받는다. <스탑드 온 트랙>에서는 비정치적이라 할 수 있는 억압이 가해진다. 바로 뇌졸중, 알츠하이머, 죽음이다. 모든 법적, 정치적 구속과 부조리를 탈피해도, 인간에게 원인 모를 가혹한 유한한 운명이 닥쳐온다. 그것은 곧 영화 속 시몬이 운행하는 전철과 같다. 다른 길이 없고 피할 수 없다. 다시 드레센이 다루는 ‘정치’로 돌아가서 일단 독일은 통일은 되었고 교류는 자유롭다. 이에 자유를 추구하는데, 드레센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을 고찰한다. <그릴 포인트>의 주요 사건은 불륜이다. 카트린과 크리스의 딸은 욕망에 솔직하다. 통일 이후의 자녀들은 동독의 금욕적이고 이타적인 삶보다는 자신의 욕구를 따른다. 이에 자극받은 크리스가 친구의 아내인 엘렌을 넘본다. 영화 속 우베와 엘렌이 기르는 잉꼬가 새장에서 탈출하는 것처럼, 집에서조차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들은 아예 집에서 탈출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에서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 무너진다. <우리가 꿈을 꾸면서>에서는 통일 이전 동독의 상황을 묘사한다. 정치에 동원 및 선동되는 학생들, 사업을 독점하는 공산주의에 청소년들은 갑갑함을 느낀다. 이와 동시에 권력 유지에는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 정작 시민들 간의 분쟁이나 폭력에 무관심한 공권력을 비판한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청소년들은 할머니를 돕거나 지하에 클럽을 차리며 빛을 밝히는 등 반항한다. 다만 청소년들의 저항은 과도하고 파괴적이어서 그 끝은 암담하며, 늘 고주망태의 상태로 현실을 이탈하기에 꿈은 비현실로 전락한다. 즉 드레센은 동독의 과도한 금욕, 이에 따른 과도한 분출에 따른 부작용을 반성한다. <그릴 포인트>에서 서로를 속이고 배신하던 커플은 화해하고 정직하게 대화하며 존중에 이른다. 여전히 사랑하는 크리스-카트린은 부부 관계로 남지만, 대화 이후에 오히려 서로의 사랑이 식었다는 것을 확인한 우베-엘렌은 각자 갈 길을 간다. 이렇게 상호 합의 속에서 개개인의 자유를 되찾을 것을 촉구한다, 잉꼬는 자기 집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우리도 사랑한다>에서 불륜은 연이어 등장한다. 여성이 불가능한 것은 자신의 욕망이었다. 잉에는 물리적으론 함께 있지만 정신적, 정서적으론 단절되고 고립된 남편 베르너가 아닌, 옷을 수선해주며 고객으로서 알게 된 칼과 키스 및 섹스한다. 그 과정에서 카메라는 잉에에게 더 가까이 밀착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가까워진다. 그러나 베르너, 딸 페트라 모두 잉에를 질책한다. 그녀가 자유를 되찾자 가족이 무너졌다며 말이다. <그릴 포인트>가 노동자들의 희생이었다면, <우리도 사랑한다>에서는 여성의 희생으로 굴러가는 가족과 사회, 여성이 자유를 되찾자 무너지는 공동체를 지적한다. 그럼에도 여성은 대화가 불가능한 남성에게서, 동등하게 대화가 가능한 남성을 연인으로 삼으며, 순수한 자신의 즐거움을 누려야만 한다. 노동의 공간인 집은 포용의 공간으로서 집이 되어야 하고, 남성이 허용한 공간에만 위치한 여성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경기장으로 향할 수 있어야 한다. <스탑드 온 트랙>에서는 죽음이 의식의 질서정연함, 지식과 기억의 축적을 앗아가고, 이로 인해 파생되는 무분별함과 혼란을 어떻게든 극복한다. 의식이 점점 더 흐려지는 프랭크는 아이폰을 이용해 촬영하며 기계를 통해 대신 기억하고, 그의 거동이 불편해지자 시몬 및 다른 식구들은 기구를 이용하여 보조한다.      


물론 죽음은 다만 유예일 뿐 피할 수 없이 닥쳐오지만, 그런데도 살아있는 딸 릴리는 죽음에도 굴하지 않고 할 일을 하러 떠난다. 뇌졸중과 알츠하이머는 프랭크가 가구를 조립하지 못하게, 이로써 건립하지 못하고 역으로 그와 주변을 파괴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건설하는 것이 곧 인류의 숙명이다. 즉 드레센은 대화 회복, 그리고 자신의 회복을 ‘건설’적인 삶을 위해서 촉구하는데, 과연 그는 신작에서 미국의 대통령에게 맞서 싸운 라비예 쿠르나즈를 어떻게 바라볼까? 도입부, 아직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 시각은 묻혀 있다. 느껴지는 것은 오직 청각뿐, 라비예가 장남 무라트를 부른다. 그러나 호출하고 보채도 무라트가 방에서 나오지 않자, 라비예가 직접 방으로 들어간다. 시각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무라트를 찾아 헤매던 라비예, 그러나 방문을 열어도 무라트의 시각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무라트는 어둠 속에, 이후 차남 젬과 막내 아틸라에게 무라트의 행방을 물어서 그가 프랑크푸르트로 향했다는 사실을 접한다. 장남은 코란을 공부하고, 무슬림으로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독일을 떠나려 한다. 그리고 내내 롱테이크로 포착되던 영화에 컷이 발생하며 구도를 전환한다. 여전히 라비예는 똑같은 장소와 똑같은 시간에 놓여있기에 컷이 발생해야 할 이유는 없다, 불필요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컷이 사용되면서 라비예가 다른 각도로 '전환'된다, 그녀의 삶이 뒤바뀐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뀌기 시작하는가? 드레센은 본 작품에서 '젠더'와 '법'에 중점을 두어 고찰한다. 일단 젠더다. 쿠르나즈 가족은 독일에 거주하는 튀르키예인들이다. 그들은 독일에서 거주권을 갱신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관타나모 구금으로 인해 무라트가 타의로 거주권을 갱신하지 못하자 독일 당국은 그를 추방하려 한다. 또 튀르키예 국적이긴 하지만 정작 모국에서는 독일에서 더 많이 거주했다며 관타나모 문제에 소홀하다. 즉 이들은 이중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만, 정작 두 개의 정체성 모두 갖지도 못할뿐더러, 어느 하나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메메트는 무기력하다. 가족은 무라트가 관타나모에 부당하게 붙잡혀있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메메트는 초를 친다. 굳이 나서지 말라며, 또 언론이나 경찰들에게도 굳이 말을 흘리지 말라며 라비예를 단속한다. 외부에서 그는 자신의 흔적이 희미하지만 정작 집안에서 메메트는 가장의 흔적을 확실히 남긴다. 라비예가 꿈에 그리던 스포츠카를 사주며 경제력을 과시하고, 또 라비예가 워싱턴으로 출국하지 못하게 문을 잠그며 열쇠를 가져간다. 즉 메메트는 무슬림 가정 내에서는 가장, 곧 남성 젠더의 지위를 공고히 단속하는 한편, 가정 바깥 독일 사회에서는 무기력하고 체념적이다. 자신과 가족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어떤 투쟁에도 참여하지 못한다. 그래서 집에만 놓여서 항상 볼 수 있는 메메트와 달리, 무라트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실물로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항상 바깥으로 나돌기 때문에 집에 머무는 카메라에서 줄곧 달아난다. 메메트가 독일계 튀르키예인 1세대라면 무라트는 2세대다. 그리고 무라트는 아버지를 롤 모델로 삼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처럼 무시당하고 사회에서 흔적이 지워지는 타자이자 이방인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다. 특히 이중 정체성 중 튀르키예인, 무슬림으로서 인정받고 싶다. 그는 빚을 졌다고 하는데, 거주권을 위해 빚을 지고 살아가며 메메트처럼 서구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싫다. 그래서 2세대 독일계 튀르키예인들은 무슬림으로서 자신들을 드높이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심취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져 아버지를 넘어서고자 하는 아들은 2등 시민인 아버지보다 강한 무슬림이 되고자, 집 밖으로 나가서 서구와의 충돌을 불사한다. 그러나 무슬림 가정 내에서 라비예, 파티메와 같은 여성이 남성의 폭정을 인내해주어 남성의 권위가 인정됐다면, 외부에서는 참아주는 이가 없다. 초헌법적인 힘으로 무라트를 기소하지도 않고 구금하며 가둔다. 즉 메메트와 무라트는 기질이 분명 다르지만, 그들은 이슬람에 기대어 권위를 챙기는 젠더임은 동일하다. 집에서만 수동적으로 머무는 모습, 관타나모에서 자력으로 나올 수 없는 모습이 곧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기대는 무슬림 남성의 실체다.      


반면 여성은 움직인다. 라비예는 영화 내내 '러닝머신'을 달리는 자, 그걸로 모자라서 ‘자동차’를 몰고 널따란 야외를 누비는 자다. 집에만 머무르면서 무라트를 구출하려는 시도조차 않는 메메트와 달리, 이로써 권위가 인정되는 세계에만 갇힌 가장과 달리, 라비예는 일단 행동한다. 무슬림 남성이 허상의 권위, 관념의 표상에만 갇혀서 현실 유리적이라면, 여성은 현실 참여적이다. 메메트는 무라트가 잘못했기에 붙잡혔을 거라며 비감정적인 냉정함을 보인다면, 라비예는 무라트와 더불어 주변인들을 언제나 감정으로 느끼고 공감한다. 남성 법률가가 고리타분한 기존 법률을 가져와서 무라트의 입국 금지를 주장한다면, 정권이 바뀌고 취임한 여성 총리 메르켈은 그간 독일 정부의 관조적 태도를 참여적 태도로 뒤바꾸며 공감하고 움직인다. 이처럼 여성은 현실에 참여한다. 그리고 여성에 의해서 남성도 현실에 참여한다. 베른하르트는 인권변호사긴 하지만, 라비예 문제를 맡아야 할지 의구심이 들었다. 사무실 월세 문제가 있어 돈이 되지 않을 사건이 영 미적지근 끌리지 않았고, 라비예가 약속을 잡지 않았기에 틀린 ‘절차’를 문제 삼았으며, 동료 위브케가 9.11 테러 유족이었기에 망설였다. 그러나 라비예에 의한 베른하르트은 움직이고 참여한다. 영화의 연출은 인물을 포착할 땐 주로 대상의 얼굴을 강조하고 그들에게 밀착하는 미디엄숏이나 바스트숏에다가, 이들을 추적하는 달리 숏을 결합한다. 한편 인물들이 참여할 세계는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한 롱숏으로 펼쳐서 보여준다. 그 세계는 기존 남성에게는 유리되어 있거나, 세계 속에서 남성은 무기력했다. 그러나 라비예가 정부 청사에 들러 직접 '장관'을 만나고 다니듯, 라비예에 의한 베른하르트는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여 사실을 확인하거나 정정하고 다닌다. 남성에 의한 기존 여성은 모스크에서 히잡을 쓰고, 가장의 집에 머물며 수동적인 가사 노동을 반복했다. 그러나 수동적인 여성을 거부하는 라비예와 메르켈에 의한 남성과 사회는 참여적으로 뒤바뀐다.      


물론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라비예가 공적 영역에 뛰어들긴 하지만, 이는 오직 자녀만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자신을 포기하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어머니상의 재생산이 아니냐고 말이다. 여성 학자 재클린 로즈는 서구 사회가 어머니를 다루는 태도를 비판한다. 어머니들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이상화되고 숭고하게 여겨지며 완벽을 요구받았다, 자녀를 위한 희생에 있어서 말이다. 그 자녀가 잘못될 시 탓은 어머니에게 전가된다. 어머니가 모유를 먹이지 않았다거나 덜 희생했다는 식으로, 정작 그 자녀에게 책임이 있는 사회는 슬그머니 자리를 회피한다. 사회가 맡아야 할 ‘돌봄’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어머니에게 대신 부여하지만, 정작 그 희생에 따른 보상이나 권리는 어머니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어머니들은 사회의 책무를 부여받지만, 정작 어머니가 됨으로써 공적 영역과 끈이 끊겨 사회와 단절된다. 그런 점에서 라비예도 사회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희생적인 어머니상을 재생산하고 있는가?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영화에선 라비예가 공적 자리에 나가서 연설하고, 그녀의 호소는 적지 않은 파급력을 지닌다. 라비예는 헌신만 한 채로 토사구팽당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그 희생에 따른 타당한 대가를 거머쥐는 어머니가 된다. 이로써 드레센은 가부장제에 의해 수동적이었고, 대가 없는 책임만 지던 여성 젠더의 능동적인 발전을 조명한다. 그리고 어머니, 여성들은 희생 외의 여성적인 특질이나 솔직함을 악덕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드레센은 희생만 하는 어머니의 보상과 사회적 위치를 돌려놓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감성적이고 적극적인 태도 또한 복권한다. 남성이 거리를 두고 계산하는 이성적 태도와 달리 말이다. 메메트는 대상과의 거리가 비교적 멀다. 법원의 남성 재판관들은 주로 서류와 법에 적힌 대상을 간접적으로 보지, 상대를 직접 마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라비예는 코슬로바의 손을 직접 만지며 핸드크림을 물어보고, 동생 누리예와 언제나 스킨십으로 소통하며, 누리예 또한 라비예의 일을 자기 일처럼 밀착하며 공감한다.      


그녀는 기쁜 일이 있으면 언제나 요리한다. 9.11 테러 때문에 무슬림인 그녀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던 위브케, 그러나 그녀가 해다 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즉 그녀에 대한 긍정적인 감각을 몸으로 느끼며 마음을 바꾼다. 그녀의 사과파이를 먹는 베른하르트 또한 마찬가지다. 워싱턴 기자회견장에서 라비예는 즉흥적으로 연설에 참여하여, 감정을 자극하는 연설을 한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관계를 따져 묻는다면 무슬림에 대한 감정이 조금은 껄끄러울 수 있는 9.11 유족들이 관타나모 피해자들을 동정하며, 이성과 경계를 뛰어넘고 느끼게 만든다. 거리를 두는 이성은 나와 너의 사이에 경계를 긋는다. 법으로 국경과 국적을 나눈다. 그러나 감정은 성별과 민족과 국적과 위치를 초월하여 인류를 하나로 묶는다. 또 무라트를 자신처럼 여기고 세상으로 뛰어드는 라비예는 기존 젠더에 따른 한계 또한 초월한다. 자신이 바깥으로 나돌고, 그녀를 위해서 차남 젬이 가사를 돕는다. 그럼으로써 서로를 이해한다. 가사를 해본 젬은 라비예가 컨디션이 안 좋은데도 다림질하려 하자 이를 말린다. 감정적으로 엄마를 느껴보지 않았다면, 그녀가 되어보지 않았다면 그렇게 반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비예 또한 공적인 업무를 직접 수행해보며, 가사 노동을 떠맡은 젬이 학업과 가사를 병행하기 힘들겠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오직 자신의 위신이나 지위만 중요한 가장 메메트는 라비예를 가로막는다. 하지만 라비예가 남성에 의해 강제된 '주부'를 떠맡지 않았을 때, 제약을 무릅쓰고 여성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남성적인 세상에 책임과 연민으로 참여할 때, 이성적이다 못해 비감정적이던 기존의 법은 자신이 수호해야 하는 인간을 비로소 쳐다보며 느끼기 시작한다. 여성은 세계에 참여하여 감정으로 남성적이던 법을, 그 법이 미치는 가부장적이고 공격적인 세상을 따스하게 뒤바꾼다. 드레센은 기존의 법, 법과 결탁한 언론, 이들로 이뤄진 구조를 심층 분석한다. 무라트 실종 직후 라비예는 그녀에게 찾아온 언론과 인터뷰한다. 그러나 그녀가 말한 것을 독일 편향적인 언론이 왜곡한다.      


또 소송이 진행되는 와중에 튀르키예에서는 독일계인 그들을 도와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고, 독일에서는 관련 법률을 들어 “탈레반을 입국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무라트가 탈레반인 물증은 없다. 독일 경찰의 심증에 불과하다. 그러나 구조에 의해서 무라트는 범죄자임이 확실시되고, 라비예는 범죄자 어머니로 전락한다. 그래서 드레센은 휴대용 캠코더에 담긴 무라트와 가족의 푸티지를 교차한다. 일상적인 푸티지 내에서 무라트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생일파티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이들은 쾌활하고 즐겁다. 그러나 조악하지만 솔직한 것을 사실적이지만 거짓인 보도로 대체하며, 진실을 현실에서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조, 즐거움을 과거와 가상으로 전락시키는 독일의 법을 폭로한다. 그래서 영화에선 라비예가 일방통행 도로에서 역주행을 하거나, 빨간불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과속을 하는 등, 어딘가로 가기 위해서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장면에 주목할법하다. 그것 자체로 보지 말고 하나의 상징으로써, 라비예는 가부장제와 독일의 법을 지키며 여성이자 이민자로서 ‘원하는 곳’에는 갈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초록불에서, 즉 합법에 의해 멈추고 주저앉는다. 이후 과속을 해도 사고 하나 없이 멀끔하다. 이러한 법아래서 메메트는 체념하고 무라트는 저항한 것이다. 아들이 고문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소송과 기나긴 절차가 너무나 버거운 라비예는 "진실은 때때로 독보다 쓰다"라는 말을 남기며, 그녀를 근거리에서 포착하던 카메라는 저 멀리 멀어진다. 또 '무라트 쿠르나즈'가 아니라, '무라트'라는 이름에만 꽂혀서 미 당국은 인물을 혼동하는, 즉 법이 무라트 쿠르나즈를 부정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렇게 구조에 의해서 개인이 멀어지고 흔들리는 상황을 가시화하는 영화의 연출에 주목할법하다. 드레센은 <우리가 꿈을 꾸면서>에서는 멀끔하고 가상적인 장르 영화 문법에 타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본 작품에서는 전작의 경향과 <스탑드 온 트랙>까지의 리얼리즘을 절충한다. 바로 거칠게 흔들리는 핸드 헬드와 영화 속 시간이 현실의 시간처럼 비교적 덜 잘리는 롱테이크가 그렇다.      


물론 영화는 많은 시간을 담아내고 있기에 현실의 두 시간과 억겁의 시간을 함축한 영화는 마냥 동일시될 수 없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본 작품을 보며 꽤 현실적이란 느낌을 받기 충분하다. 시간성도 그렇고, 무라트를 석방하고자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며 고군분투하는 실존 인물 라비예의 발걸음이 연출로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즉 핸드헬드는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연출이나, 이와 동시에 핸드헬드의 형식적 특징은 ‘불안정’이다. 영화에선 핸드헬드의 속성이 가리키는 이들의 삶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 작품에서는 핸드헬드만 사용되지 않는다. 현실의 불안정함을 아주 매끈하게 정돈하고 정제하고 다듬은 스테디캠 또한 사용된다. 민주적 권리를 주장하는 베른하르트가 재판에 앞서 판사와 대화할 때 말이다. 그러나 정작 재판에 들어가자 카메라는 다시 흔들린다. 법에 따른 안정성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듯, 민주적 권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다는 듯 말이다. 스테디캠이 곧 흔들림 없이 이상이 실현될 개개인의 권리와 삶에 상응한다면, 핸드헬드는 그것이 실망하고 좌초되는 흔들림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등장 인물들이 꿈꾸는 이상이 점차 실현되어가는 영화 말미, 라비예가 참여한 기자회견장에서 영화는 스테디캠이 유지된다. 베른하르트는 기자의 초헌법적인 인종차별을 완전히 제압하며, 그렇게 무라트의 권리는 조금씩 실현되고 이상은 흔들림 없게 조금씩 뿌리를 내린다. 즉 드레센은 결함 많은 현실을 보완한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영화로의 이행을 움직임으로 보여준다. 현실의 추를 극복하는 영화다운 영화가 간직한 아름다움은 정의와 결부해야 한다. 본 작품에서 눈에 띄는 기성 배우인 알렉산더 쉬어가 인권변호사 베른하르트 역을 맡은 것도 마찬가지다. 롤 모델, 되고 싶은 사람, 우상으로서 배우는 마땅한 자유, 지켜져야 하는 권리를 상징해야 한다는 듯 말이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개인은 젠더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간 역사에서 과소 평가된 여성, 아버지들만 가득한 워싱턴에서 소외된 라비예, 그러나 그녀 또한 영어를 배우고 재판과 관련한 자료 조사를 충분히 해낸다.      


이와 더불어 드레센은 헌법이 보장한 민주적 권리는 만인에게 동등해야 함을, 권력자들에 의해서 편향적으로 사용돼선 안 됨을 역설한다. 언제나 불륜하고 실수하며 때론 이성을 잃는 불안정한 사람들이 등장하던 드레센의 영화, 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탈레반에 가담할 뻔한 유혹에 빠지고, 라비예 또한 미국의 문화가 익숙하지 않아서 스테레오 타입에 갇힌 인종차별 실수를 한다. 즉 이들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진 않다. 그러나 그 이유가 민주적 권리를 누리지 못할 명분이 되진 않는다. 그럼에도 모두에게 인권은 동등해야하며 그런 사회에서 기울어짐에 발생한 부도덕은 조금씩 정화되어 간다. 이렇게 드레센은 신작에서도 여지없이 ‘구속’을 탐구한다. 구속하는 거대한 국가는 무고한 한 개인에게 족쇄를 채워 걸음을 제한하고, 누구에게나 당연할 밤과 수면을 네온사인으로 앗아가며, 작은 개인이 수습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를 제시하고, 법을 이용해 무한하게 기다리게 만들다 끝끝내 이혼을 선사한다. 즉 법은 개인과 개인을 찢는다. 그러나 드레센은 찢긴 서로가 다시 이어져야 하는 이유를 논한다. 이성과 구조의 방해 공작이 실제 인간을 대체하려 함에도, 두 발로 직접 세계에 참여하고 행동하며 체감하고 이어지는 여성성으로 인간은 보존된다. 물론 드레센 특유의 단순성과 소박함이 노동자의 삶이란 대상과 잘 맞아떨어지던 초기작에 비해서, 현재의 장르 영화나 전기 영화는 다소 평범하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 특히 노동계층에 대한 사랑스러운 시선을 놓지 않는 드레센의 카메라는 스크린 너머의 우리가 라비예란 인물에게 호감과 애정을 갖도록, 이로써 그녀의 미덕을 체감하게 해준다. 

----

감상일: 230304 집에서(MUBI 스트리밍)

매거진의 이전글 대런 아로노프스키, <더 웨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