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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r 16. 2023

마틴 맥도나, <이니셰린의 밴시>

전체주의와 이기주의는 똑같은 뿌리에서

마틴 맥도나(Martin Mcdonagh), <이니셰린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rin) - 전체주의와 이기주의는 똑같은 뿌리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가까이 살고 있으며, 동시에 지치고 기운을 잃은 채 가장 멀리 떨어진 산 위에 있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우애가 깊은 두 형제가 있다. 두 형제는 아일랜드라는 민족적, 지리적 풍토 위에서 끈끈한 유대를 맺었다. 설령 서로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아일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이 두 형제의 결속을, 범형제적인 유대감을 강화한다. 이러한 아일랜드인의 결속이 다른 때보다 더 진해짐과 동시에, 민족적 정체성의 위기를 겪은 해는 1920년이었다. 영국의 횡포가 심해지고 이에 따라 민족주의와 독립 열기도 들끓었다. 형제는 '아일랜드인'으로서 결속이 돈독해진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더는 '개인'일 수 없었다. 이전에는 아일랜드인임과 동시에 개인일 수 있었지만,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개인임을 용인하지 않는다. 또 영국과의 정전 협정으로 아일랜드 자유국 독립, 북아일랜드 분단이 결정되지만, 이를 두고 무엇이 아일랜드를 위한 최선의 결정인지 이견이 오간다. 이견이 오가기는 하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다른 형태의 아일랜드는 타협할 수 없었다. 각자가 가진 아일랜드에 대한 견해가 곧 지켜야 하는 아일랜드였다. 그래서 이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심지어 형제나 친구조차도 무찔러야 하는 적으로 돌변했다. 영국은 아일랜드의 개인도 앗아갔고, 아일랜드인 정체성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았다. 이는 이념이 개입된 개인의 처절한 삶을 포착하는 영국의 사회파 감독,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줄거리다. 이를 서두에 언급한 이유는 마틴 맥도나의 신작 또한 호형호제하던 친구의 우정이 아일랜드 내전 당시 싸늘히 식어가는 내용을 담으며, 아일랜드 영화 계보를 이어가기 때문이다. 1970년 런던 태생의 마틴 맥도나는 아일랜드인 부모 밑에서 나고 자란 영국-아일랜드의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이다. 극작가로서 맥도나는 아일랜드의 리논, 아란 제도를 배경으로 한 3부작으로 유명하며, 그의 극은 인간과 세계의 어두운 심연을 들춰낸다. 가족을 다루는 작품에서는 역기능 가족이나 남편을 살해한 아내를 다뤘고, 총격 사건이나 폭탄 테러 등의 범죄가 발생한다. 

     

영화에서도 맥도나의 어두운 색채는 이어진다. 그의 장편 데뷔작인 <킬러들의 도시>의 배경인 아름다운 도시 브뤼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아름답지 못한 청부살인업자다. <세븐 싸이코패스>는 범죄 영화 각본 집필에서 시작된다. 기상천외한 범죄들은 모두 가상의 차원에서나 일어나는 것 같지만 각본에 반영되는 범죄들은 모두 현실에서 발생한다. 심지어 우리 곁에 천연덕스레 머무는 이웃의 민낯이 사이코패스다. <쓰리 빌보드>에서는 트럼프 집권 당시의 미국을 반영하듯, 백인 우월주의와 여성혐오가 펄펄 끓어오른다. 평온한 이미지로 포장된 현실의 민낯을 들춰내는 맥도나, 그의 세계에서 범죄는 어째서 범람하는가? 폭력이나 범죄의 주체들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한다. <킬러들의 도시>에서 청부 살인은 죽어 마땅할 이들이 표적이다. 또 레이는 자신을 불쾌하게 만든 사람들에게 정당방위라며 주먹을 휘두른다. 하지만 정당방위라는 이름 속에서 자신은 또 다른 폭력, 즉 그들과 똑같이 사악한 행동을 재생산한다. <세븐 싸이코패스>에서 백인들의 추격전과 총기 난사는 강아지 납치에서 비롯한다. 자신의 소유물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을 극악무도하게 살해하는 것이 그들에겐 정당방위다. 하지만 이기적인 선택은 언제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 애초에 소유물이라 생각했던 여성, 강아지들은 그들의 소유물이 아니라 제 자유가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또 몇몇 사이코패스들이 극악무도해진 이유는 정당방위, 여성 범죄에 대한 아버지의 대리 복수, 미국에 대한 베트남인의 앙심 등으로 폭력은 폭력에 꼬리를 문다. <쓰리 빌보드>에서도 밀드레드, 딕슨의 분노는 또 다른 악덕으로 이어지고, 가정폭력과 인종차별주의 등을 일삼는 백인 남성과 궤를 긋고자 하는 밀드레드는 그들과 같아진다. 즉 물리적인 세계에서 필연적인 힘, 무력, 폭력의 연쇄, 이를 정당화하는 법에 의해서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어둡다. 그래서 맥도나의 인물들은 입체적이다. 명백히 악한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악한 자들에게 대항하는 선한 자들도 악한 면모를 띠게 된다.      


그 악한 자들, <세븐 싸이코패스>와 <쓰리 빌보드>에서 범죄를 일으키고 주도하는 이들은 백인 남성이다. 이들의 독점으로 타자와 약자의 권리가 박탈당한다. <킬러들의 도시>에서 레이는 난쟁이와 여인의 관계를 시기·질투하여 비하·모함한다. 오래 살지 못하고 우울증에 빠지기 쉬운 난쟁이보다 '우월'한 자신을 택하도록 여성을 회유한다. 또 단지 백인 남성이라는 이유로 선천적 특권을 누리고자 하는 심리를 스킨헤드를 통해 탐구한다. 이들은 범죄를 상부에서 지시받는다. 휴가는 범죄라는 노동의 대가다. 백인 남성 권력이 지시하고 달콤한 몫을 챙겨주는 범죄는 일반화되어 단절될 줄 모른다. 백인 남성들 사이에서 여성은 수동적이다. <킬러들의 도시>에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전락하고,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두 남성의 다툼에 의해 거취가 결정된다. <세븐 싸이코패스>에서 여성들은 범죄의 희생양이거나 인질이다. 남성의 시선에 의해 규정된다는 걸 보여주듯 성적으로 매력적인 모습이 부각된다. <쓰리 빌보드>에서도 젊은 여성은 부유한 늙은 남성에게 팔려 간다. 남성에 의해 여성은 입이 가로막힌다. 가정폭력이 습관인 찰리는 밀드레드의 얼굴을 잡고 그녀의 행동을 저지한다. 맥도나의 영화는 여성의 희생에서 시작된다. <세븐 싸이코패스>에서는 아버지가 딸의 복수를 위해 대신 움직이지만, <쓰리 빌보드>에서는 행동이 저지당하는 여성이 직접 움직인다. 맥도나는 이러한 생지옥에서 두 가지의 반성을 논한다. 하나는 자살이고 다른 하나는 죄책감이다. 맥도나의 작품에서 ‘자살’이 반복된다. <킬러들의 도시>에서 아이를 죽인 것이라 착각한 레이는 살인자의 윤리를 어겼다며 죄책감을 느끼고 자살한다. 그는 실제로는 난쟁이를 죽였는데, 난쟁이는 죽여도 되는 것인가? 자살은 회개가 아니라 합리화다. <세븐 싸이코패스>에서 자살은 저승까지 쫓아가서 대상에게 복수하기 위한 선택이다. 악덕을 끝내기 위함이 아니라 악덕을 이어가기 위한 폭력이자 죽음이다.    

  

<쓰리 빌보드>에선 윌로비가 자살한다. 그는 자기 가족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남기지만, 밀드레드에게는 주민들의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했고, 결국 제 손으로 성폭행범을 잡지 못한다. 자살은 피상적으로는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묻어있지만, 실제로는 소수자 및 약자 혐오, 여성 범죄를 근절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방조하고 문제 해결을 포기한다. 자살은 기존 부조리한 이념을 강화하고 재생산한다. 그래서 맥도나가 말하는 진정한 반성은 살아서 죄책감을 느끼며 반복되는 부조리를 몸소 중단해야 한다. <킬러들의 도시>에서 상부의 지시는 살인, 세계에 만연한 것도 폭력이다. 레이와 켄은 살인을 합리화했지만, 곱씹어보니 죽일 이유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맹목적이던 살인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며, 폭력을 거부한다. <세븐 싸이코패스>에서는 소유에 대한 일반적 정당방위, 개인의 안위를 위한 유혈이 낭자한 추격전을 이타적인 희생으로 전환한다. 무엇보다 메타 영화로서 맥도나 스스로도 헐리우드 장르영화의 허술함과 엉성함을 폭로하며 이를 전복하고 반성한다. 명확하지 않은 선악 구도와 이로 인한 입체성, 통쾌하지 않은 폭력의 쾌감, 예측할 수 없는 우발적인 전개를 통해 헐리우드가 아닌 현실에 이바지하며 반성한다. <쓰리 빌보드>에서 흑인 서장이 딕슨을 직무 해제시키며 백인 남성이 누리던 특권적 공권력을 중단한다. 경찰들의 태업에 복수하기 위해서 방화한 밀드레드, 윌로비의 편지를 읽은 딕슨은 죄책감을 느끼고 혐오와 분노를 중단한다. <킬러들의 도시>에서 백인 남성의 입에 좌우되던 난쟁이는 <쓰리 빌보드>에서 능동적으로 성장하며 비장애인들에 의한 수동적 일반화를 거부한다. 딕슨에게 폭행당한 웰비는 복수를 복수로 되갚지 않고 그와 화해한다. 그리고 여성 범죄를 떳떳하게 떠벌리는 구조와 작별하고자 함께 길을 떠난다. 즉 이기심이 사회 전반에 가득 찬 문명의 심연을 비추고 이를 반성하던 맥도나가 신작으로 돌아온다. 그의 희곡 애런 제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이니셰린의 밴시』를 영화화하며 말이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도입부, 하이앵글로 안개와 구름이 뒤덮인 이니셰린을 포착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점차 하강하는 카메라는 구름 밑에 숨겨진 대지를 드러낸다. 땅은 생명력이 충만한 녹색으로 뒤덮여있다. 하강하는 카메라는 하이앵글을 아이 레벨 숏으로 낮춰, 즉 이데아에서 지상으로, 현실과 삶으로 내려온다. 이후 카메라는 주인공 파우릭의 발걸음을 뒤따라간다. 그는 미량의 핸드 헬드가 동반된 달리 숏으로 포착된다. 카메라가 이동함에 나름의 활력이 느껴지는 양식이다. 그런데 이내 곧 달리 숏이 멈춘다. 활기찬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파우릭을 성모상이 내려다보고 있다. 종교가 탄생하고 조각이 만들어진 당시에 멈춰서 움직임 없는 성모상은 이에 걸맞은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된다. 이러한 움직임의 대비, 과연 파우릭은 성모상과 대적하는 것일까, 아니면 파우릭은 활기 넘치는 카메라로 포착되긴 하지만 실제론 고정된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일까? 또 파우릭의 목적지는 콜름의 집이었다. 서서히 그 집에 도착하자 카메라는 멈춘다. 과연 그 집이 멈춰있기 때문에 카메라는 멈추는 것일까, 아니면 그 집으로 가야한다는 강제된 목적에서 달아날 수 없으므로 멈추는 것일까? 더불어 도입부에선 무제한의 하늘에서 딱딱하고 무거운 대지로 내려왔다. 카메라는 내려온 만큼 ‘삶 너머의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비출 수 있지만, 그만큼 중력에 의한 제한도 가득한 법이다. 과연 맥도나는 무엇에 주목할까? 또 <쓰리 빌보드>에서는 펄펄 끓어오르는 미장센이 감상자의 이목을 끌었다면, 본 작품에서는 이니셰린의 풍경이 아주 경이로워 감상자의 눈길을 끈다. 이니셰린의 초원이나 바다, 절벽 등을 아주 수려하게 포착한 롱숏은, 흡사 실경을 객관적으로 포착한 사실주의, 인상주의 풍경화를 연상케 한다. 포착된 하늘과 바다가 쉴 새 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아침, 오후, 석양과 황혼, 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갑갑하다. 물이 가득 차 변화의 여지로 가득한 바다는 섬을 둘러싸고 있어서 도처에서 포착되지만, 정작 섬사람들은 바다와 그 너머로 향하지 않는다.      


목사와 경찰은 본토와 섬을 사무적으로 오가고, 그 너머로 자유롭게 향하는 것은 시오반에 그친다. 인물들의 움직임은 작은 마을의 제한된 공간을 반복하며 어느 순간 지루해진다. 변화무쌍한 것이 섬을 에워싸고 있지만, 정작 그 섬에선 변화나 ‘다름’이 조금도 발생하지 않는다. 즉 자연과 세계의 광대하고도 변화무쌍한 자유로움에 미치지 못하는 인류를 대비한다. 또 본 작품은 아일랜드인들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정체성·민족성에 따라서 발생하는 충돌과 오해, 폭력을 고찰한다. 그래서 이를 가시화하는 숏의 분리에 주목해야 한다. 본래 파우릭와 콜름은 친구였다. 그런데 콜름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틀어져서 파우릭을 냉대한다. 그래서 더는 같은 숏에 공존하지 않는다. 반면 파우릭과 죽이 잘 맞는 도미닉, 파우릭을 잘 참아주는 시오반은 그와 같은 프레임에 공존한다. 물론 그마저도 영원하지 않다. 시오반은 남성을 위해서 희생하는 전근대적인 여성상을 강요받아서 어쩔 수 없이 남성을 보필한다. 시오반은 오빠 파우릭을 위한 삶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삶을 택할 때 그와 숏을 분리하고 프레임 바깥으로 멀어진다. 또 도미닉은 마음이 잘 맞을 때는 그와 함께하지만, 파우릭이 거짓말을 고백하자 이에 치를 떨며, 자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떠난다. 프레임에 더해서 본 작품은 거리감에 주목해야 한다. 타인에 의해 규정된 자신은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소외되어 있었다. 영화 시작부터 자기중심적인 파우릭은 카메라에 가까이 있다. 그러나 그에 의한 콜름은 그만큼 카메라가 그 자신에게 가깝지 않다. 파우릭은 유리창으로 콜름을 본다. 그러나 콜름의 얼굴을 이니셰린의 풍경이 뒤덮는다. 즉 이니셰린의 문화나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이 그를 대체한다. 하지만 콜름은 파우릭에게 진솔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 때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비로소 제 자신에게 가까워졌다는 듯, 이후 파우릭이 콜름과 친한 음대생에게 거짓말을 했을 때, 그 음대생은 자신을 둘러싼 진실로부터 '멀어진다.' 즉 나 자신의 삶을 위해서는 이를 침해하는 상대방과 멀어지고 내게 가까워지는 것이 당연하나, 영화 속 아일랜드 내전이 한창이던 배경에선 그러기 어렵다.      


자신에게 가까울 수 없는 이유를 상세히 살펴보자. 콜름은 파우릭에게 그가 싫어졌음을 고백한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는 이제 그에게 지루하고 시간이 아깝다. 길어야 인생이 12년쯤 남았을까, 또 손가락을 자른 이후 그가 심장 부근을 매만지는 것을 보건대 12년에 못 미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은 삶은 사색과 창작 활동을 하며 솔직하게 보낼 수 있기를 기원한다. 콜름이 파우릭에게 토라진 이후 처음으로 대화를 나눌 때, 파우릭의 뒤편은 ‘초원’인 반면, 콜름의 배경은 ‘바다’다. 파우릭이 대지, 곧 중력으로 붙잡는다면 콜름은 부력으로 두둥실 뜨거나, 헤엄치며 자유롭게 누비고 싶다. 그런데 파우릭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파우릭은 왜 콜름에게 집착하는가? 마을 사람 모두 다 콜름과 파우릭을 친구로 여긴다. 콜름이 파우릭에게 절교 선언을 하니 둘이 싸웠을 거라며 지레짐작한다. 즉 타인들이 콜름과 파우릭의 우정을 그들과 무관하게 만들어낸다. 파우릭은 시선을 신경 쓴다. 자신은 마을에서 '친절'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지, 콜름과 싸우거나 절교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 영화 속 친절함과 똑똑함은 아일랜드인들이 높게 치는 가치다. 콜름과의 우정에서 파생하는 가치를 위하여, 콜름이 부탁한 절교를 묵살한다. 그렇다면 왜 파우릭은 시선을 신경 쓰며 검열하는가? 이니셰린에선 사적인 자신을 보존할 수 없다. 아무리 파우릭이 콜름과 친하다지만, 그는 무례하게도 주인 없는 콜름의 집을 막무가내로 열고 들이닥친다. 콜름의 자리에 앉아서 그의 망원경으로 창밖을 바라본다. 사적 영역을 공공을 위해 봉사하며 주객이 전도된다. 술집에서도 다들 “콜름은 앉아서 뭐한데?”라며 물어본다. 콜름이 무엇을 하는지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이 알기 위해서' 전해져야 한다. 항구의 우체국 주인은 언제나 편지를 주인 마음대로 뜯어보고, 손님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해달라고 보챈다. 그렇게 우체국 주인의 귀에 들어가는 소식은 페더 경관이 전해주는 개신교도를 비난하는 소식이나 살해당한 내연녀 사건 등이다. 이는 사실상 ‘아일랜드의 검열’이다.      


아일랜드에선 불가항력적으로 국교 가톨릭을 믿는다. 이에 종교가 법을 구성하고, 법은 종교를 수호한다. 영화에서 경찰과 목사는 한통속이다. 목사가 본토에서 돌아오자 페더는 그를 환대한다. 경찰은 가톨릭교도 입장에서 듣고 싶은, 적대시하는 대상이 몰락한 소식을 전한다. 또 내연녀 사건은 가부장제에서 통쾌한 이야기로서, 이들은 정보를 미리 파악하여 아일랜드에 뿌리내린 이념에 유리한 정보만 널리 알린다. 사실상 ‘선전’이다. 사적인 삶, 개인은 배려 받지 못하고, 아일랜드 ‘전체’, ‘다수’를 위해서 강제로 희생한다. 반면 파우릭이 페더 경관의 치부를 까발리자 이는 진실임에도 입막음 당한다. 진실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다수에게 그럴 듯하고 합당한 것’으로 대체된다. 우체국 주인은 시오반이 사서 자리를 수락하면 파우릭은 누가 챙겨 주냐며 주제넘게 참견한다. 시오반이 접하고 선택할 진실을 먼저 보고 ‘검열’하여, 보편적인 아일랜드인이 바라는 모습을 강요한다. 진실하던 개인은 거짓이 된다. 보편적인 하나의 믿음이 다수를 조종하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제재를 가한다. 그래서 전체주의에서 진실은 확인 불가능하다. 페더 경관이 도미닉을 추행하고 폭행한 사실은 간접적인 증거가 되는 숏을 확인했기에 참으로 여길 수 있지만, 페더 경관이 전하는 소식은 참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 전자는 입막음되는 한편, 후자는 어떤 검증도 없이 경찰과 신부, 우체국 주인의 입이 널리 퍼트려 범람한다. 신부도 고해성사를 하는 콜름에게 '죄'는 아니지만, 보기 좋지 않은 행동으로서 파우릭과의 불화를 지적한다. 즉 이들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을 접한다. 혹 보고 듣기 좋지 않게 행동하면, 그것이 설령 진리라 하여도 불이익을 당한다. 콜름이 신부의 주제넘은 간섭을 비꼬며 권위자의 귀가 듣기 싫은 소리를 하자, 신부는 콜름의 언사를 '죄'로 규정하고 회개해주지 않겠다며 엄포를 놓는다. 우체국 직원은 페더 경관이 도미닉을 폭행했다는 사실을 듣고도 그는 주전자로 맞아도 싸다고 말하며, 페더 경관은 사실을 말한 파우릭에게 앙심을 품어 그를 반쯤 죽여 놓겠다고 선포한다.      


그래서 보편적인 타인의 눈에 보기 좋게끔 개인의 진실이나 다름을 없앤다. 전체주의는 구성원을 천편일률적으로 모두 다 똑같이 보기 좋게 만든다. 여기서 영화 도입부, 파우릭 걸음의 실체가 탄로 난다. 그것은 성모상에게 보기 좋을 움직임이다. 움직이고 있긴 하지만 행동을 특정하게 고정하는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한 ‘제한적 움직임’이다. 전체를 위해서 개인들이 단 하나의 기준에 맞춰 보기 좋은 모습으로 단장하고, 이로써 획일화되는 해악은 이기주의와 같은 뿌리를 둔다. 사실상 둘은 같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 눈에 보기 좋은 파우릭을 요구하고, 파우릭 또한 자기 기분대로 시오반을 간섭하지만, 정작 시오반이 '외로움'에 대하여 그와 대화를 하려 하니, 혀를 끌끌 차며 응해주지 않는다. 제 기분이나 감정은 중요하지만, ‘타자의 다름’은 무시한다. 도미닉은 마을에서 모자란 소년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꽤 박식하고 기억력이 매우 좋다. 만취한 파우릭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모조리 기억한다. 그렇다면 도미닉의 행동은 마냥 미련한 것이 아니라, 기억한 바를 모방하는 것일지 모른다. 도미닉이 시오반을 성적 대상화하고, 술집에서 연주자 본인들이 원하는 음악이 아니라 도미닉이 원하는 음악을 연주하라며 생떼를 쓰는 것은, 아버지 페더 경관이나 마을 사람들의 이기주의적, 곧 이기적인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형성된 전체주의적인 태도를 모방한 것이랴. 페더 경관은 아들 도미닉을 제 쾌락을 위해서 추행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폭행한다. 자신은 주인이요 아들은 종으로서 일꾼처럼 부린다. 또 페더 경관은 본토에 사형 집행을 위해서 갈 일이 생겼는데, IRA가 죽든 자유국 사람이 죽든, 제 이익을 위해서는 별 상관없다고 말한다. 이기주의와 전체주의는 내가 믿는 유일무이한 이념을 위해서 다른 견해를 가진 상대방을 폭행하고 심지어 살해하는 아일랜드 내전으로 번진다. 본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아일랜드 내전임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 사건을 직접 비추진 않는다. 다만 아일랜드 내전이 발생한 기원을 아일랜드 사람들의 생활을 비추며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똘똘 뭉쳐서 사람들을 검열하는 경찰, 가톨릭은 영국에 해당할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의 특정 정체성을 폐쇄적으로 강요하는 아일랜드 ‘구조’에도 상응한다.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가 1차적 문제이지만,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두고 아일랜드 내전이 발생한 이유는, 아일랜드 내 서로 간의 다름을 이해하지 않고 힘과 수세로 찍어 누르려는 전체주의적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파우릭은 본토에서 발생하는 총성과 폭발을 접하며, "무엇 때문에 싸우든 행운을 빈다"라고 말한다. 전형적인 아일랜드인 파우릭에게 '무엇 때문에', 즉 개인의 신념은 중요치 않다. 아일랜드인으로서 그저 맹목적으로 아일랜드인에게 행운을 빌 뿐이다. 영화의 제목 '이니셰린의 밴시', 이는 콜름이 작곡하는 노래임과 동시에, 제목의 단어 ‘밴시’는 아일랜드의 초자연적인 요정이다. 통곡하는 여성, 죽음을 예고하는 존재, 피 묻은 옷을 빨래하는 존재다. 밴시에 구체적으로 해당하는 이는 맥코믹 부인이다. 허구한 날 음흉하고 불길한 소리만 일삼기에 시오반과 파우릭은 그녀를 기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만나서 초대해야 할 일이 생기면 시오반은 그녀를 깍듯이 맞이하는데, 싫지만 친절하게 맞이해야 하는 것이 곧 사회가 요구하는 ‘예절’이랴. 이러한 친절함은 곧 가식, 그래서 콜름의 집에도 내 얼굴이 아니라 '다른 얼굴'을 착용하는 '가면', 타인에 의해 조종되는 ‘마리오네트 인형’이 도처에 즐비해 있다. 다시 맥코믹 부인으로 되돌아가자면 그녀는 죽음을 거의 정확히 예고한다. 곧 마을에 두 개의 죽음이 닥칠 것이라 했고, 이후 도미닉이 사망한다. 그녀가 죽음을 맞출 수 있는 이유, 모든 것을 획일화시켜 예상 가능하게, 뻔하게 만드는 일신교, 전체주의 사회에서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기 때문이다. 시오반이 본토에 가지 않고 이니셰린에만 머물며 자기의 꿈을 포기한다면 그녀는 산송장과 다를 게 없다. 그래서 그녀가 이니셰린에 머물 때, 부인은 그녀에게 ‘죽음을 손짓’했다. 가부장제에서 보편적인 폭력적인 가장을 페더는 계속 수행했으며, 다른 여지가 없던 도미닉은 참지 못하고 자살했고 이는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맥코믹 부인은 두 개의 죽음을 예고했다. 그 죽음에 동물도 포함한다면 제니의 것이겠지만, 인간에게만 해당한다면 다른 하나의 죽음은 콜름이나 파우릭의 것이었으랴. 시오반이 떠나는 순간, 그녀를 배웅하는 파우릭의 옆에 흉흉한 ‘검은 그림자’가 동행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둘 다 죽지 않았다. 어째서 맥코믹 부인의 예언 절반은 빗나갔을까? 죽을 수 있던 세 사람, 일단 파우릭은 지금껏 전체에 충실했으나 이젠 달라졌다. 전체를 위해서 봉사하지 않는 주변인들에게 자극을 받으며 말이다. 전체주의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콜름은 파우릭이 찾아오면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럼에도 파우릭이 자신의 소망만 중요시 여기며 다가오자 제 손가락을 자른다. 콜름은 누군가의 이기심에 의해서 자신의 육체가 훼손될지언정, 말초적인 욕구나 그저 숨만 붙은 전체주의 내에서의 생존보다는, 정신의 자유와 해방을 바란다. 콜름은 왼손에 남아있던 네 개의 손가락 모두 잘라버렸다. 그러나 되레 카메라는 하늘로 두둥실 떠오르며 하이앵글로 콜름의 궤적을 따라간다. 이기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중력에 붙잡히는 것이 곧 지상이라면, 거기서 제재를 당하더라도 자신을 회복하여 손가락이 모두 잘린 왼손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이 고양된 영혼, 하늘로의 자유로운 해방이다. 이후 그는 가면을 벗고, 따분하고 지루할 뿐 어떤 의미도 남기지 않는 친절함보다는, 괴팍하더라도 자신의 족적을 예술로써 남긴다. 시오반도 그렇다. 오빠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지친다. 그녀에 의해서 오빠는 존재하게 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없게 된다. 이후 자기가 하고 싶은 사서직을 수락한다. 이렇게 자신에게 충실할 때, 제 몸에 무언가가 차오르고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법이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삶이 되돌아온다. 즉 서로 간 이기주의, 전체주의에 의해서 원치 않은 자신으로 전락할 때, 이들은 곡소리를 내며 서로의 죽음을 불러오는 밴시다. 항상 똑같은 소리와 시답잖은 소리, 다 아는 내용만 지껄이는 교류는 내게서 생명을 빠져나가게 한다. 콜름과 시오반은 외롭다, 타인과 진정한 교류도 없거니와, 제 삶이 가짜에 자리를 뺏겨 소외당한다.      


이들은 빛이 충만하게 들어오는 '창문' 아래 위치한다. 닫힘이 개인을 차단하는 전체주의적인 아일랜드라면, 열림이 곧 어딘가로 나아가고 싶은 자신의 개방이리라. 또 파우릭은 콜름이 자신의 집을 닫아둘 때 막무가내로 문을 열었고, 이때 콜름은 더 닫혔다. 즉 개인이 열고자 할 땐 닫고, 반면 개인이 닫고자 할 땐 연다. 그러나 그가 도망갈 수 있게끔 예고하고, 콜름 스스로 문을 열 때, 이기주의와 전체주의에 따라서 닫혀있던 예언이 빗나간다. 우발적인 개인성, 왜곡된 친절함을 ‘친절한 개인성’으로 전환한다. 그간 파우릭의 친절함은 상대가 자신을 친절하게 여기도록 강요하고 희생시킨 친절함이었고, 친절하지 않은 콜름의 퉁명스러움이 제니의 질식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친절하지 않다. 맥도나는 진정한 친절함을 긍정한다. 만취해서 가치 있는 얘기를 하는 파우릭은 친절함도 예술처럼 기억될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친절함은 식구를 배려하는 가족의 희생이다.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고, 친절한 자신이 희생한다. 서로를 배려하는 상호 친절함은 개인들을 보존한다. 콜름은 페더에게 얻어터진 파우릭을 대신해 운전하고, 파우릭은 콜름의 집을 방화하겠다는 사실을 미리 선포한다. 그에게 차오르는 울분과 분노를 삭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친절하게 상호 합의해야하리. 친절한 개인성으로의 이행에 콜름은 죽지 않고 내전도 끝나간다. 하지만 파우릭의 말처럼 다시 내전은 발생할지 모른다. 퉁명스러워질 때, 친절함을 왜곡하여 상대를 구속할 때, 그래서 강제된 숏에의 동거로부터 프레임 바깥으로 멀어짐을 존중하며, 진정한 친절함을 지향하다보면 전체주의적인 지상의 한계를 벗어던질 수 있을 지다. 대지에서 다투던 그들이 ‘해변’에서 시오반과 작별하거나 마음을 터놓는 것처럼, 지상으로 내려와 머물던 카메라가 각 자 갈 길을 가는 희망찬 결말에 의해 두둥실 하늘로 떠올라 ‘하이앵글’로 이니셰린을 비추는 것처럼, 서로 친절할 때 비로소 개인들은 자유로워진다.     


영화 내내 갈매기와 할미새의 ‘비행’을 비추며 ‘친절한 자유’를 외치는 맥도나의 신작은, 서두에 언급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처럼 아일랜드 내전을 관통하나,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은 간접적이고 분석적이다.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이 파생된 과정과 원인을 진단한다. 아일랜드의 폐쇄성을 비슷한 시대에서 다룬 <브루클린>처럼 모국을 떠나게 만드는 전체주의를 비판하되, 그 탐구는 더 깊다. 전체주의의 해악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맥도나는 폭압적인 이념이 앗아갈 수 없는, 개인이 회복하고 싶은 ‘인간성’을 고찰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 삶'을 위한 인간의 근본활동을 세 가지로 규정한다. 하나는 ‘노동’, 두 번째는 ‘작업’, 마지막은 ‘행위’다. 노동은 인간을 생존케 하는 삶의 필수재라면, 작업은 노동으로 막을 수 없는 유한함에 영속성, 지속성을 부여한다. 콜름은 노동에서 작업으로 뛰어넘으며, 사후에도 남겨질 불멸의 작곡에 집중한다. 도서관에서 사서가 되는, 후대에 전할 책을 관리·보존하는 시오반도 마찬가지다. 맥도나는 분명 작업을 긍정하나, 마지막 근본 활동인 행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행위는 인간 사이를 직접적으로 매개하는 활동, 새롭게 오는 자가 어떤 것을 시작하게 해주는 능력인데, 콜름은 지리멸렬한 파우릭과 행위를 그만두었다. 사실상 따분하게 반복되는 스몰토크는 행위에 해당하지도 않았다. 맥도나는 진정 서로를 자극하는 행위를 부각한다. 시오반은 콜름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하지 않고, 모차르트는 18세기 사람이라며 그의 틀림을 정정하고 새로운 앎이 차오르게 한다. 콜름은 따분한 이니셰린 사람들과의 만남을 넘어서 음대생들과 교류할 때 새로운 곡을 창작한다. 또 콜름은 파우릭이 그나마 만취해서 솔직하고 특유해질 때 얘기를 들어줄만 하다고 평가한다. 즉 서로가 어떤 일을 새로이 시작하게끔 자극하는 ‘대화’와 ‘교류’, 중단될 각자의 삶을 다시금 일으킬 ‘대화’를 거두지 않는다. 이렇게 아일랜드의 역사와 인간성을 논하는 맥도나의 신작은 자신을 묵묵히 고집하려는 브렌던 글리슨의 우직한 연기와 콜린 파렐의 사려 깊은, 그러나 질식할 것만 같이 답답한 이중적인 연기 덕분에 더더욱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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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316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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