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아닌 카메라에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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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3970
“진실은 평균 온도, 평균의 시선, 평균의 언어를 지향해야 하는 모양이다.” -잉게보르크 바하만-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로 제 61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대기록을 세우며 다시금 이란 영화계를 국제적으로 주목하게 만든 아쉬가르 파라디, 이후 2022년 제 75회 칸 영화제에서 파라디는 <어떤 영웅>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또다시 이란 영화계에 쾌거를 알렸다. 그렇게 파라디의 신작은 순항을 탔으나, 마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암초에 부딪혔다. 그가 제자 아자데 마시자데의 단편 <올 위너스, 올 루저스>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마시자데는 패소 시 처할 과한 신체형에도 겁먹지 않고 파라디를 고소했으며, 법원은 1차 판결에서 파라디의 표절을 인정하며 마시자데의 손을 들어준다. 아직 2차 판결이 남아있긴 하지만 본 사건은 예술가로서 파라디의 진정성에 타격을 가하였다. 파라디는 제자의 아이디어를 가로채고 입막음할 수 있는 스승의 위치, 표절을 입증하지 못할 시 자신에게 더 유리한 사법 체계를 악용하여 권력형 비리를 저질렀단 의혹을 꼬리표처럼 달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떤 영웅>을 다룰 본 글에선 마시자데의 <올 위너스, 올 루저스>를 검토할 것인데,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는(https://www.youtube.com/watch?v=Y66MElQXutA) 그녀의 단편은 다음과 같다. 아내에게 지참금을 지불하지 못해 5년 7개월간 교도소에 복역한 쇼크리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귀휴 당시 한 여성이 떨어트린 막대한 돈을 우연히 줍는다. 만약 이를 절도했다면 쇼크리는 빚을 탕감하여 출소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양심을 따라 주인을 찾아 돌려준다. 이후 영웅담이 널리 퍼져 교도소장 및 은행의 후원을 받아 빚을 청산한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승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일단 그가 주장하는 당일의 행적이 앞뒤가 안 맞아 영 석연치 않다. 그래서 마시자데는 인터뷰를 시도하지만 떳떳한 영웅 쇼크리는 취재를 떳떳하지 못한 태도로 거부한다. 이후 마시자데는 돈을 잃어버린 여성으로 지목된 자흐라 야쿠비를 찾아가는데, 정작 그녀는 돈을 잃어버린 적도, 돌려받은 것도 없다고 말한다. 클로즈업으로 확실하게 포착하던 쇼크리의 주장과 법원 관계자의 진술은 이윽고 롱숏으로 저 멀리 아득해진다.
이렇게 마시자데는 사건을 다루는 저널리즘은 있지만, 정작 보도가 가리키는 진실을 확인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사건을 책임이지 않음에 모두가 승자임과 동시에 패자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표절했다는 의혹에 휩싸인 1972년 콤이니 쉐이 태생의 아쉬가르 파라디는 동시대 이란을 대표하는, 이제는 다른 의미로 대표하게 될지도 모르는 시네아스트다. 그의 영화는 종교 및 제도, 구조에 의해 거짓이 범람하고, 삶이 소외당하는 현장을 고발하기에 르포적인 측면이 있지만, 마찬가지로 사회를 직격하는 자파르 파나히나 모함마드 라술로프와는 다른 경향의 영화를 보여준다. 심리 스릴러에 강점이 있는 그는 '진실한 개인'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 개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딜레마, 균열에 주목하고, 그 사이에서 진실을 끄집어낸다. 그렇게 진실이 서서히 밝혀지나 싶지만, 거짓으로 팽배한 구조에서 진실은 선뜻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평온하고 보편적인 일상에 누군가의 부재, 특정 사건으로 균열이 일고, 이로 인해 일반성 아래 숨겨졌던 비밀과 실체가 비일반적으로 발생한 틈 사이로 빠져나오는 것을 재빨리 포착한다. 이란에서의 근작 <세일즈맨>에서 견고한 건물에 금이 발생하는 장면은 그의 특징을 시각적으로 집약한다. 이란에서 심리 스릴러를 주로 연출하던 그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를 찍기 위해 프랑스로 향하거나, 페넬로페 크루즈와 하비에르 바르뎀 부부를 기용한 <누구나 아는 비밀>을 스페인에서 연출하는 등, 2010년대엔 국제적으로 활동 반경을 넓혔었다. 국제적인 작품들에선 보편적인 인류 다수가 처할 수 있는 딜레마를 다룬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누구나 아는 비밀>, 양자의 가정 모두 대충 보기엔 평온하다. 하지만 표면적인 평온함을 위해서 누군가는 십자가를 짊어진 채로 가사상태에 빠져있고, 모순적인 거짓말을 모아서 평화를 건축했다. 그 거짓말 중 하나가 탄로 나자, 진실은 거짓말이 빠져나간 틈 사이로 막을 새 없이 세어 나온다. 진실을 맞닥뜨리는 일은 신경증과 짜증이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망각하여 기만한 행복을 누린다. 행복은 거짓의 결과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에서 피해자는 말할 수 없고, 오직 가해자들만 깨어서 항변한다. <어바웃 엘리>에서도 실종된 타인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이는 찾을 수 없고, 피해자를 두고 남겨진 사람들은 책임지지 않고 제 처지를 수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피해자의 진실은 영영 비일반적인 것으로 은폐된다. 그리고 이러한 ‘입’은 이란에서는 남성들에게만 허용되는 입, 대신 여성들에게 허용되는 것은 오직 침묵으로, 가부장적인 사회상을 드러내는 장치다. <세일즈맨>에서 피해 당사자인 여성은 쉬쉬하고, 진실과 거짓을 분간할 수 없는 남성의 진술이 사건을 규정한다. 진실은 사라지고 남성의 입에 의한 허구가 자리를 대체한다. 그리고 <누구나 아는 비밀>은 스페인에서 연출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처럼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지만, 20세기 중반 프랑코 정권과 결탁한 가톨릭과 대지주, 이들에게 억압받은 노동계층이라는 계급론적 알레고리다. 우리가 망각하거나 외면하고 사는 역사적·사회적 진실이 평온함의 이면에서 스멀스멀 드러나는데, 이러한 정치성은 이란에서 연출한 영화에서 크게 도드라진다. 그의 대표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이란 내 성차별주의, 이슬람에서 비롯한 썩어빠진 이데올로기가 서서히 드러난다. 부조리한 이념의 개입에 의해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교리는 제 이득을 취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여, 모든 인물들의 입에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오히려 교리에 어긋나는 거짓말이 쉴 새 없이 세어 나온다. 삶과 현실에서 유리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진실이 밝혀져도 삶은 지상으로 되돌아오지 못한다. <세일즈맨> 역시 피해자 여성이 피해사실을 밝힐 수 없는 사법체계의 무능과 개인적인 남성 가장의 손에 의해서 좌우되는 이란의 가부장제를 규탄한다. 이러한 그가 이란으로 다시 돌아온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및 <세일즈맨>처럼 종교 및 구조의 여파가 대화와 삶에서 드러날 영화, 이와 동시에 거짓의 범람을 비판하던 그가 제자에게서 진실을 훔쳐 거짓말을 일삼았을지도 모르는 영화가 바로 <어떤 영웅>다.
일단 <올 위너스, 올 루저스>와의 유사성부터 짚어보자. 파라디는 쇼크리의 실화에서 영감을 받아 <어떤 영웅>을 연출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올 위너스, 올 루저스>에서 마시자데가 직접 취재한 쇼크리가 다니는 시장, 벽화를 그리는 직업은 본 작품에도 반영되어 있다. 또 현실에서 쇼크리 사건을 처음에는 대다수가 믿었던 만큼, 믿음이 의심으로 뒤바뀌고 영웅의 신화가 한 꺼풀씩 벗겨지는 구성을 취한다. 이 또한 <올 위너스, 올 루저스>에서 길어온 것이 아니라, 실화에서 차용한 것이라 항변할 수 있으랴. 다만 실화와 무관하게 <올 위너스, 올 루저스>와 유사한 지점은 교도소나 자선단체, 의회 등을 상세하게 주목하는 시퀀스다.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검증되지 않은 소식을 부풀리고 유포하는 기관들의 위선을 마시자데는 <올 위너스, 올 루저스>에서 중점적으로 폭로하였다. 파라디 또한 <어떤 영웅>에서 보고 싶은 ‘허구의 이미지’를 꾸미고 책임지지 않는 기관의 부도덕함을 폭로하였는데, 과연 이러한 요소가 그만의 독창적인 탐구인지, 제자의 것을 표절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물론 실화와 단편을 여러 방향으로 뒤트는 지점도 있다. <올 위너스, 올 루저스>에서 인터뷰를 회피하던 미심쩍은 쇼크리와 달리, <어떤 영웅>에서 라힘은 꽤 떳떳한 인물로 그려지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영웅>의 기본적인 뼈대와 파라디가 비판하는 바가 마시자데의 단편과 상당히 유사하기에, 본 작품에서 비판하는 바와 똑같은 과오를 저질렀을 수 있다. '보고 싶은 이미지'를 위해서 진실을 희생하는 풍조를 비판하는 영화, 파라디 또한 자신이 보기 좋게끔 마시자데의 영향을 지워버렸을 가능성이 전무 하지 않기 때문이다. 1차 판결대로라면 그가 제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시인하고 공과 책임을 나눠가졌으면 좋았을 작품 <어떤 영웅>, 일단 본 작품의 '편집'에 주목하자. 전 장인어른 바람에게 돈을 갚지 않아서 교도소에 복역 중인 라힘은 이틀 간 귀휴를 받아서 잠시 출소한다. 그리고 매형이 일하는 유적지로 향한다. 구불구불한 계단을 올라 높디높은 유적지로 걸어 올라가는 라힘을 파라디는 원테이크로 담아낸다. 그가 다 올라갈 때까지 어떤 잘림도 없다.
그렇게 올라가서 매형과 만난 이후 라힘은 연인 파르크하데를 만나러 간다. 파르크하데는 그를 만나기 위해서 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그런데 라힘이 계단을 오르던 숏과 달리, 그녀가 한 층씩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컷'이 발생한다. 또 라힘이 계단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담은 원테이크에서 카메라는 적극적으로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감상자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나 파르크하데가 내려오는 숏에서는 기둥에 가려 멀어진 그녀를 잘라내며 항상 가까운 그녀를 전달한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아주 짧기 때문에 굳이 컷이 발생할 이유가 없음에도 말이다. 더욱이 본 작품에서는 서로의 대화를 리버스 숏으로 필히 잘라야 할 때는 컷을 동반하지만, 대체로는 롱테이크가 도드라지며 불필요하게 숏을 자르지 않기에, 파르크하데가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에서 컷의 비효율성은 더더욱 부각된다. 똑같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두 장면에 왜 연출은 차이가, 특히 효율적으로 따진다면 불필요하고 다만 탐미적일 뿐인 잘림이 발생하는 것일까? 전자의 경우 가족들 그 누구도 라힘이 귀휴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달받지 못했다. 라힘은 타인이 그를 ‘보고 싶어 하는 욕망’에서 유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파르크하데는 라힘의 귀휴를 미리 알고 약속했다. 두 연인에게 서로는 '보고 싶은 이미지'다. 그래서 컷을 이용해서 기둥으로 파르크하데가 가린 보기 싫은 순간을 잘라내고, 오직 보고 싶은 그녀의 얼굴만 이어낸다. 그런데 그렇게 잘리고 새로 이어진 이미지가 진실이라 단언할 수 있을까? 원테이크는 잘림이 없다. 그럴듯하지만 전혀 다른 숏이 이어지며 몽타주될 조작 가능성이 전무 하다. 그러나 파르크하데가 계단을 내려오는 시퀀스는 컷으로 진실을 자르고, '보고 싶은 이미지'를 그럴듯하게 이어 붙일 여지가 분명 존재한다. 즉 영화의 컷은 보고 싶은 이미지를 위한 조작 가능성을 명시한다. 라힘을 만나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약 3번 가량의 컷을 거친 파르크하데는, 실제로도 연인을 위해서 자신의 진실을 잘라내고, '거짓 자신'을 3회 가량 이어 붙인다.
의회에선 사실 확인을 위해 가방을 돌려받은 여성을 증인으로서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행방이 묘연해진 그녀를 도무지 찾을 수 없어서 파르크하데가 가방을 돌려받은 여인으로 위장한다. 입을 맞추기 위해서 시아바시의 언어 선생님인 그녀는 소년 앞에서 라힘과의 관계를 은폐하고, 또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쉬쉬하며 둔갑한다. 즉 보고 싶은 이미지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진실을 거짓으로 대체한다. 라힘을 위해 돈을 모으는 재단의 모금회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장르 영화를 연상케 하리만큼 컷이 잦아서, 지루할 틈이 파고들 수 없게끔 이미 본 숏을 재빨리 잘라내고, 신선한 숏을 다급하게 이어 붙인다. 동공에 매번 신선한 충격을 주는 본 자극적인 이미지를 다들 보고 싶어 하리라. 그렇게 보고 싶은 이미지는 ‘라힘에게 이어질 기부금’, 기부자들의 선량함을 드높이는 '손'이다. 자신들이 보고 싶은 이미지만을 위해 마찬가지로 보고 싶지 않거나 불필요한 이미지는 잘라낸다. 본 기부 시퀀스는 파르크하데가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보다 다량의 컷이 발생하기에, 진실은 더 많이 잘려나가고 그만큼의 거짓은 더 침투할 수 있다. 실제로도 그 기부 시퀀스에 이르기까지 바람이 폭로한 라힘의 거짓말이나 결혼 생활 등은 모두 잘려 나가고 보고 듣기 좋은 라힘만 연결된 것처럼, 교도소에 의해서 파르크하데가 처음 가방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잘리고, 또 언론에 의해서 라힘이 돈을 빌린 대상이 사채업자에서 은행으로 변경된 것처럼 말이다. 즉 보고 싶은 이미지를 위해서 현실이 왜곡되는 과정을 영화는 '컷'으로 가시화하는데, 이를 ‘거리감’과 함께 살펴봐야 한다. 라힘이 계단을 올라서 매형에게 깜짝 방문했다. 매형은 라힘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매형에게 라힘은 '보고 싶은 이미지'이긴 했다. 매형의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라힘은 보고 싶은 그들의 눈 가까이서, 이에 상응하는 '클로즈업'으로 크고 확실하게 포착된다. 라힘과 파르크하데가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교도소 또한 항상 적확하게 보여야 하는 감시의 공간이다.
그러다가 귀휴를 받으면 더는 보이지 않아도 된다. 항상 보여야 하는 공간에서 간수의 '호출'을 기다리는 라힘은 감시하는 시선에 상응하는 프레임 내에 얌전히 머무르고 있었지만, 비로소 귀휴를 받아 바깥으로 나오자 감시될 필요가 없다는 듯, 자유분방하게 움직이고 떠난다. 카메라가 그를 쫓아다니기 버거워 보일 정도다. 교도소 부근에는 ‘철창이나 철조망’이 있다. 교도소에서 죄수를 잘 감시할 수 있게끔, 그들의 목적과 의무에 따라서 봐야만 하는 죄수들이 언제나 보일 수 있는 장소를 조성한다. 이에 따라서 움직임도 항상 노출되게끔 수동적으로 제한되나, 귀휴를 받은 라힘은 철조망과 철창을 넘어서 저 멀리 떠난다. 이전까진 카메라가 최소 풀숏 수준으로 포착하여 전신을 온전하게 볼 수 있던 라힘, 귀휴 이후에는 프레임 바깥으로 멀어지거나 롱숏으로 변화하여 라힘임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는, '잘 안 보이는 상태'가 된다. 그렇게 잘 안 보이는 것이, 누군가가 보고 싶어 하는 욕망과 감시하는 의무에 봉사하지 않는 라힘의 자유다. 누가 보고 싶은 라힘이 아니라, 라힘 자신이 어디로든 향하고 싶은 자유가 곧 그의 진실이다. 그렇게 자유로운 그는 상승하는 운동감으로 가시화된다. 교도소를 떠나 매형을 만나기 위해 높디높은 유적지에 오를 때 말이다. 심지어 로우 앵글로 포착되기에 그는 거대하게, 영화의 제목처럼 ‘영웅’으로서 보인다. 실제로 그 유적지는 페르시아의 영웅들이라 할 수 있는 다리우스 대왕과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 등이 묻힌 왕가의 무덤 낙쉐 로스탐이다. 하지만 영웅이 되는 맥락은 무덤 주인들과 다르다. 왕가의 무덤에서 왕족들이 영웅의 이미지로서 제시된다면, 라힘은 특정한 기대가 투영된 이미지로 보이지 않을 때 영웅적으로 묘사된다. 즉 자유로우며 진실한 자가 영웅이라는 듯 말이다. 물론 이틀간의 휴일이기에 자유가 간헐적인 그는 높은 곳에서 다시 내려온다. 그리고 파르크하데도 자처해서 '내려온다.' 사랑하기 때문에 보고 싶은 그를 위해 기꺼이 ‘추락’한다. 두 연인은 서로가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합의했다.
특히 파르크하데는 라힘의 처지가 어떠하든 개의치 않는다. 아이가 딸린 이혼남과의 사랑이 자신에게 미칠 여파를, 서로가 보고 싶은 이미지로 전락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 파라디의 사랑은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추락을 선택하고 감내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 자의를 따른 추락은 파르크하데에만 그친다. 파라디는 자의가 아닌, 타율이 보고 싶은 이미지를 위해 진실이 희생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비춘다. 왜 보고 싶은 이미지로 전락하는가? 파르크하데의 오빠는 여동생의 결혼을 반대한다. 지나치게 가부장적인 이란 사회에선 남성이 여성을 좌지우지하고, 남성 가장이 기대하고 승인하는 모범적인 남성성이 있다. 아이가 딸린 이혼남 파르크하데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파르크하데 오빠의 예측에 걸맞게, 라힘의 남성성은 모자라다. 가장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져 시아바시는 그를 따르지 않고 누나는 남동생을 의심한다. 지금까지 가부장제에서 가장은 가정을 자신이 보고 싶은 이미지로 꾸미지 않았던가? 그래서 다시 가장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라힘은 시아바시의 태블릿을 빼앗아 자신이 보고자 하는 이미지로 만들고자 시도하지만, 소년은 토라져서 더더욱 그를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라힘의 선행이 외부에 알려지자 그는 음식을 전해주러 파르크하데의 집에 가까이 간다. 그녀의 집으로 가기 위해서 계단을 올라 다시 한번 '상승'한다. 또 그를 따르지 않던 시아바시가 아버지가 입던 '스트라이프 티셔츠'와 유사한 옷을 고르는 것처럼, 아들이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우상으로 격상한다. 즉 남들이 보고 싶어 하는 '영웅'의 이미지여야만 라힘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고 상승할 수 있다. 반면 영화 후반에 라힘이 '보고 싶지 않은 이미지'로 다시 전락하자, 파르크하데의 오빠가 그를 반대하고 라힘은 그녀의 집에 얼씬 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또 시아바시는 세간의 의심과 파르크하데-아버지의 재혼을 맞닥뜨리며, 자신이 기대하지 않은 그에게 실망한다. 즉 귀휴를 받는다고 해서, 설령 완전히 석방된다 한들,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다. 승인하고 검열하는 존재들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다, 이득을 챙길 수 없다.
그래서 영화 속 컷이 잦은 이미지가 자아내는 ‘흥미진진한 감각’처럼, 이득이 되기 위해서 보고 싶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일단 보고 싶은 이미지는 안정적이다. 영화에선 롱테이크와 핸드 헬드가 결합되어 현실과 유사한 감각, 곧 리얼리즘을 지향한다. 그러나 핸드 헬드가 흔들리는 정도가 숏마다 차이가 있다. 영화 후반부 타헤리가 시아바시를 이용해서 영상을 찍는다. 아이에게 대사를 주고 이를 외우게 만들며, 시아바시의 말더듬을 평소보다 심하게 부각한다. 사실 경미한 언어 장애가 있는 시아바시를 마냥 동정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편견이다. 소년은 보고 싶지 않은 아버지를 외면하는 강단도 있고, 학교에서 들려오는 소식으로 유추하건대 아예 약자는 아니다. 그 소년과 반대되는 불쌍함을 인위적으로 부각하며, 재단의 기부자들이 약자를 구원하면서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이미지로 전락시킨다. 이를 운동감으로 따진다면 현실의 붕괴이므로 흔들림이 더 늘어나야만 하리. 그러나 영화에선 아이러니하게 흔들리지 않는다. 익히 교도소나 재단에서 기대한 이미지라는 듯 핸드 헬드가 약해져서 아주 안정적이고 보기 좋은 상태가 된다. 반면 핸드 헬드는 라힘과 택시기사가 가방을 돌려받은 여성을 수소문, 곧 '진실'을 추적할 때, 또 라힘과 파르크하데가 금은방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금값을 접할 때, 자선단체에서 바람에게 빚 탕감을 요구하는데 그가 이에 동의하지 않고 뛰쳐나갈 때, 라힘이 타헤리에게 영상 삭제를 요구할 때 극심하다. 현실 그 자체이거나, 따가운 진실이 보고 싶은 거짓말을 향해 항변할 때와 그 반대 또한 충돌에 걸맞은 흔들림을 자아내나, 오히려 기대에 부응할 때는 현실이 왜곡되며 붕괴하는 상황이더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즉 보고 싶은 이미지는 거짓임에도 '안정감'이 있다. 보고 싶은 이미지들이 왜 안정적인지는 영화 속 이미지에 따른 이익을 살펴봐야 한다. 라힘은 본래 사건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라힘이 전단지를 붙이는 과정을 롱숏으로 담아낸 것이 이에 관한 힌트다. 그가 타인의 기대와 시선에 부응하기 위해서 전단지를 붙이는 것이라면, 파라디는 그렇게 멀리서, 그가 잘 보이지 않게 선행을 포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라힘은 파르크하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 양심을 따라서 행동한 것인데, 이를 부풀리고 떠벌린 것은 교도소와 언론이다. 그들은 라힘을 핑계 삼아 자신들의 '보기 좋은 얼굴'을 내세워 인터뷰한다. 교도소는 선인 라힘을 내세워 본인들의 죄수 교정 능력을 증명하고 실적을 쌓게 되리라. 더욱이 최근 교도소에서 자살 사건이 발생한 모양이니 이를 잠재울 긍정적인 이벤트가 필요하다. 라힘 사건은 필요에 따라 포장된다. 바람은 라힘에게 그의 사건을 부풀리는 행위가 '선전'이라 말하지 않던가. 언론이 라힘 사건을 부풀리는 이유는, 저널리즘을 좌우하는 당국이 바라는 ‘여전히 살기 좋은 사회’라 위장하기 위해서, 또 밝고 희망찬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대중들의 기대를 응집하며 권력이나 이익을 얻기 위함이랴. 라힘 또한 사실 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은 증명서와 평판으로 이득을 얻는다. 재단의 증명서를 금은방에 들이밀자 경찰의 수색영장 없이 CCTV를 보여주는 것처럼, 형부가 라힘의 실재 대신에 언론에서 송출되는 그의 이미지를 녹화하려는 것처럼, 실체 없는 가상이 현실을 압도한다. 그런데 곳곳에서 라힘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가방과 금화를 돌려받았다는 사람을 찾을 수 없거니와, 바람처럼 그의 꺼림칙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교도소, 언론, 재단은 제대로 검증조차 하지 않고 보고 싶은 이미지를 무한하게 부풀렸다. 안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지만 허구로 신뢰감과 안정성을 '조작했다.' 무겁고 육중한 현실에 대응하지 않는 이미지는 가볍다. 그래서 그들이 쟁취한 이익은 쉽게 허공으로 흩날릴 위기에 처하나, 이미지를 만든 주체들은 꼬리를 자른다. 과거에는 라힘의 선행을 부각해야 본인들의 이익으로 이어졌다면, 영화 후반부엔 라힘이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야지만 기관들이 손실을 면한다. 또 바람과 나자닌은 분명 라힘의 진실을 접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악의 때문에 사건에 객관적으로 접근하지 못한다. 나자닌은 바람과 라힘이 싸운 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한다. 영상을 촬영한 CCTV는 객관적으로 시각을 포착하되, 그것을 진술하는 나자닌의 주관적인 청각이 나레이션으로 곁들어진다.
즉 보고 싶어 하던 이미지가 거짓이거나 허술하다는 것이 탄로 나도,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 이미지가 범람한다, 진실이란 명예가 아니라 오직 이익만을 위해서. 거짓 이미지가 범람하는 이유는 영화 속 '진실'이 박해를 당하기 때문이다. 금화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는 여성의 가방 진술은 라힘이 아는 것과 일치한다. 즉 그녀는 정말로 가방을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신뢰할 수 있다. 그런데 가방을 되찾은 이후 그녀라는 진실은 사라져서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 여성은 집안 남성들이 금화를 도박에 탕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를 현금으로 전환하여 숨기는 과정에서 가방을 분실했다. 만약 라힘의 증인으로서 협조하여 금화가 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고, 끝끝내 집안 남자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남자들이 보고 싶은 금화를 위해서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 남성들은 금화를 이용해 앞서 언급한 우월한 남성성을 가꿀 것이며, 이를 위해서 희생될 그녀를 사회는 보호해주지 않는다. 그녀로 위장한 파르크하데에게 의회의 담당자는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몰아세우는 것처럼 말이다. 여성이 번 금화라는 진실을 훔치는 남자들, 파르크하데가 주운 가방을 라힘이 주웠다고 둔갑시킨 교도소와 언론 등 여러 진실 중에서도 여성의 진실이 박해당하고 보호받지 못하며, 이를 희생하여 우월한 남성이라 거짓말한다. 그래서 진실은 거짓에 잠식당하지 않고자 몰래 자신을 은닉한다. 더욱이 이는 미시적 문제가 아니라, 공공기관들이 나서서 부추기는 거시적인 문제이기에, 진실을 숨기는 것이 국가에 속한 다수 국민에게 일반적이다. 그나마 진실의 최후의 등불이라 말할 법한 의회에선 진실을 요구하지만, 진실을 밝힐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선 의회가 보고 싶어 하는 진실 역시 꾸며질 수밖에 없다. 또한 거짓으로 만연한 세상에서 유별난 진실은 모나있고 난폭하다. 라힘은 타헤리에게 시아바시의 말더듬을 부각한 작위적인 영상을 삭제하라고 요청한다. 말을 듣지 않자 흉포하게 달려든다. 결국 타헤리는 영상을 삭제하지만, 라힘에게 “교도소에 가서 보자”고 말하며 협박한다.
그 전에도 라힘이 문을 꽝하고 닫았을 때, 교도소장은 자기가 기대하지 않은 화난 라힘의 진실이 불쾌했는지 그에게 엄포를 놓는다. 즉 진실이라 하여도, 그것을 수용하거나 보기 싫어서 이에 불이익을 준다. 영화 속 교도소는 어둠으로 빼곡하다. 유적지가 웅장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휘어잡고, 화사한 햇살이 모든 것을 찬란히 밝히며 동공을 유혹하는 외부와 달리, 날카롭고 차가운 금속 재질의 회백색으로 가득한 교도소는 보이지 않는 공간임과 더불어 흉흉하고 괴괴해서 조금도 쳐다보기 싫은 공간이다. 보이지도 않고 보기 싫은 곳에, 마땅히 보여선 안 되는 거짓들이 수감된다. 사기와 거짓말, 허위의 약속을 남발한 채무불이행자를 말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보기 싫더라도 분명 봐야만 하는 진실마저 유폐하여 보이지 않게 된다. 라힘은 분명 빚을 갚지 못해서 복역하지만, 자신의 진실이란 명예를 복권하고자 하는 라힘이 교도소 관계자들의 시선에 '보기 싫기 때문에' 불이익이 예정되어 있다, 박해당할 이유가 없는 진실임에도. 그러나 영화는 반성한다. 영화 속 곳곳의 상징을 통해서 말이다. 일단 바람이 인쇄소를 하는 설정에 주목할 법하다. 인쇄소에선 무언가를 무한 복사할 수 있다. 그런데 복사하는 것이 언제나 원본이자 진실일까? 영화 속 보고 싶어 하는 이미지를 무한히 생산하는 촌극은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시뮬라크르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현실에서 가상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가 시뮬라시옹이요, 그 결과물을 시뮬라크르라 지칭한다. 그리고 사진, 영화 등 무한 복제할 수 있는 매체가 지배적인 현대 사회에서는 현실에서 시뮬라시옹함과 동시에, 현실을 뒤덮은 시뮬라크르가 시뮬라시옹되며 실체 없는 가상들이 무한하게 범람한다. 이중, 삼중, n중의 시뮬라시옹 이미지는 현실에서 점점 더 멀어져 무의미에 가까워지지만, 현실과 그럴듯하게 닮아있고 무한 복제되어 만인이 접하고 이를 정보라고 공유함에, 마치 사실인 듯한 환락에 빠진다. 즉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는 현실을 외면한다. 바람과 나자닌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들이 보고 싶은 부정적인 라힘을 무한 유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의심'한다. 최소 시각에선 객관인 CCTV가 촬영한 영상을 유포한다. 무한 복제할 수 있는 그들이 의심하며 진실로 나아가는 것은, 마찬가지로 무한 복제할 수 있는 영화감독이 그들을 빌려 무분별한 시뮬라시옹을 반성하는 것이랴. 복제는 신중해야 한다. 의회 또한 마찬가지다. 교도소, 언론, 재단 모두 다 나서서 시뮬라시옹한다. 교도소, 언론, 재단 등의 공권력, 공공기관은 곧 제도와 체계를 이루며 국가의 구조를 형성한다. 그 구조에 불가항력적으로 속한 국민 라힘은 그들에 의한 이미지로 전락한다. 그러나 여러 기관 중 삶과 제일 밀접한 정치 기관인 의회는 의심한다. 마치 진실의 최후의 보루는 남아있어야 한다는 듯 말이다. 마지막으로 라힘은 화가다. 그를 아니꼽게 보는 한 수감자는 '짝퉁이나 그리는 주제에'라며 그를 비난한다. 즉 라힘은 허구를 그리는 사람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귀휴 첫날, 그는 시아바시가 보고 싶고, 바람의 선처를 기대한다. 그러나 시아바시와 바람은 그가 보기 싫다. 시아바시는 그를 외면하며 게임에 집중하고, 바람은 약속한 시간·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라힘은 보고 싶은 짝퉁을 그리는 화가처럼 시아바시의 태블릿을 거칠게 빼앗고, 언론 인터뷰에서 바람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보고 싶은 존재가 보이지 않는 공허한 프레임이 라힘의 눈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은 그들의 진실이라면, 라힘은 그 텅 빈 프레임에 억지로 그들을 끌어들이거나 그리는 사람이었다. 또 아름답지 않은 것, 추하고 보기 싫은 것을 숨겼다. 파르크하데가 가방을 돌려받은 사람이라고 입을 맞추기 위해서 누나와 시아바시를 부엌에 불러 모은다. 이후 그는 아이에게 거짓말을 강요하는 추한 진실이 펼쳐진 부엌의 문을 닫고, 방문 너머의 카메라가 사실을 포착할 수 없자 이내 곧 숏은 잘려 거짓이 펼쳐지는 다음 숏으로 연결된다. 심지어 바람과는 이미지를 정정하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구조에 의해서 본인이 시뮬라시옹되는 수모를 직접 겪으니, 더는 상대를 시뮬라시옹하지 않는다. 바람과 나자닌에게 영상을 삭제해 달라고 간청하지도 않는다. CCTV의 시각은 빼도 박도 못할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재단에서 모인 기부금을 거부한다. 그의 선행에 따른 이익인 기부금이 모이는 시퀀스에선 잦은 '컷'이 발생하며 숏과 숏 사이의 진실이 듬성듬성 빠져있었다. 이로써 허위로 모인 이익을 그는 챙길 수 없다. 사라진 증인, 곧 진실을 노출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서 그의 명예는 복권되지 않는다. 하지만 구멍 난 명예를 또 다시 거짓으로 채워내기보다는, 자신이 빚을 갚지 못했다는 진실부터 일단 짊어진다. 교도소로 돌아가기 전에 라힘은 삭발했다. 보기 좋은 머리칼이 포장하지 않는 맨살의 진실 그 자체를 감당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복귀 직전의 라힘과 가족은 도로의 자동차 소음이 교차되는 정신 산만한 롱숏에, 즉 그들만을 명료하게 보고 싶어 하는 감상자의 시선에서 벗어난 채로 자유로이 놓인다. 그렇게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이 진실이다. 영화의 결말, 어느 한 출소자와 라힘이 교차된다. 라힘은 거짓말을 한 자신의 진실을 짊어지기 위해서 보이지 않게 되는 교도소로 향하고, 출소자는 더는 교도소에 감시당할 이유가 없기에 사라진다. 거짓은 보여선 안 된다. 거짓말을 했다면 거짓이 보이면 안 되는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그러나 보여야 하는 진실이 숨어서는 안 되며, 누군가가 보고자 하는 욕망에 거짓을 보여줘서도 안 된다. 출소자는 교도소를 나오기 직전까지 재소자들과 간수의 눈에 보기 좋게끔 음식을 전한다. 좋은 것을 보고 싶어 하는 타인의 눈과 일치한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누군가의 보고 싶은 욕망에 봉사하지 않는, 그들의 시선에서 보이지 않을 때 가능하다. 그렇게 보이지 말아야 할 거짓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아야 자유로운 자유는 시선 바깥으로 사라진다…
정리하며 이란에서 발생한 쇼크리 사건에 파라디의 현란한 영상 언어가 결합한 <어떤 영웅> 속 인류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대 시뮬라시옹 시대’를 조장하고 있다. 대 시뮬라시옹 시대에서 진실은 실종된다. 시뮬라시옹의 대가인 ‘상승’을 위해 보잘것없는 진실을 착취하고 짓밟는다. 그러나 허위가 탄로 나면 오른 자리보다 더 밑으로 추락한다. 본래 서있던 자리의 진실을 찾을 수 없으므로, 또 대상을 부정적으로 시뮬라시옹하는 대가를 누군가가 애타게 갈망하므로. 그래서 우린 정직하게 요행을 바라지 않고 묵묵하게 교도소에서 복역하며,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 벽을 덧칠하는 초반부의 라힘처럼 올라가야 한다. 이렇게 파라디는 진실을 비추며 허위의 시대를 반성한다. 자신 또한, 진실을 드러낼 수 없는 시대 속에서 사라져버린, 가방을 돌려받은 여인을 생생한 롱테이크에 보존한다. 또 대상을 보고 싶은 모양으로 왜곡하지 않고 그저 총체를 긍정하며, 되레 자신을 희생하는 파르크하데의 사랑을 예찬한다. 타인의 진실을 희생하여 허위를 생산하는 시대와 정반대로 말이다. 그러나 영화의 사유가 오롯이 파라디만의 것일까? 마시자데 또한 <어떤 영웅>처럼 <올 위너스, 올 루저스>에서 쇼크리 사건을 둘러싼 기관의 시뮬라시옹을 심층 분석하였다. 이를 접할 수 있었던 파라디의 기억과 위치가 <어떤 영웅>과 전면 유리될 수 있을까? 영화에서 말하는 진실이란 명예를 파라디는 가질 수 있을까? 과연 마시자데와의 유사성이 똑같은 소재를 다뤄서 발생한 촌극이자 우연의 일치일까? 최종 판결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영화를 보는 우리도 속단하기엔 까다로운 문제다. 다만 영화에서 파라디 본인이 말하는 바처럼,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선 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많은 '의심'을 거쳐야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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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319 광주극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