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3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Mar 21. 2023

나탈리아 로페즈, <로브 오브 젬스>

폭동의 임계점

나탈리아 로페즈(Robe of Gems), <로브 오브 젬스>(Robe of Gems) 

- 폭동의 임계점     

“그 모든 질서, 그 모든 명령이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대혼란을 야기했고, 유혈 참극과 엄마들의 절규, 세계 질서의 해체를 초래했을 것이다.” -안나 제거스-

계급이 전면 철폐된 국가는 없다. 전 세계 모든 국가의 국민들은 경제력이나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서 공식적이든 은밀하든 계급을 나눈다. 계급에는 소속 구성원만 이해할 수 있는 행동 양식과 교양이 ‘은어’처럼 통용되고, 또 계급이 부여하고 허용하는 직업이 각기 나뉜다. 그래서 각기 다른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피부색과 신체적 특징을 공유하는 한 민족이라 할지라도, 계급이 나뉘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이나 타민족만큼 낯설게 느껴진다. 그런데 다양한 민족이 어울려 사는 다민족 국가, 연방국에서는 계급에 더해 민족성까지 혼재된다. 각 민족, 인종의 고유한 언어나 행동양식이 있기 마련이고, 설령 피부색만 다르더라도 서로는 ‘다른 것’에 대해 본능적 경계심, 적대감을 느낀다. 교육과 사회화가 이를 해소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부추긴다면, 계급·민족의 고립과 고착화는 더욱 극심해진다. 백인, 메스티소, 원주민이 부대끼는 멕시코 영화의 화두가 언제나 그래왔다. 알폰소 쿠아론의 자전적인 이야기 <로마>에서 백인과 원주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각기 다른 생활사가 포착되었고, 미셸 프랑코의 최근 두 작업, <뉴 오더>와 <썬다운>, 작년 MUBI에서 공개된 로렌조 비가스의 <더 박스>도 그렇다. 나탈리아 로페즈의 장편 데뷔작 <로브 오브 젬스>도 이 물결에 올라탄다. 영화감독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전 부인이자, 편집자였던 1975년 라파스 태생의 나탈리아 로페즈는 멕시코를 오가며 활동하는 볼리비아의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레이가다스의 건조한 브레송적 리얼리즘을 이어가고, 최근 멕시코 영화에서 도드라지는 극단적인 관능성과 폭력성 또한 반영한다. 편집자로서 로페즈는 원주민/백인, 남성/여성, 종교적 세계/관능적인 세계, 주관적 표상/객관적인 외부 세계 등 두 차원이 분열되고 나눠진 작품에 편집자로 참여하였는데, <어둠 뒤에 빛이 있으라>, <침묵의 빛>, <헬리>, <도원경> 등이 편집자로서 그녀가 참여한 작품 목록이다. 로페즈는 그녀의 장편 데뷔작에서도 백인/원주민,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등 두 세계를 오간다.      


멕시코의 계급, 젠더, 인종은 고착화되어 있다. 무한한 존재자를 꽃피울 수 있는 존재를 계급, 젠더, 인종을 핑계 삼아서 단 하나의 존재자만을 '박제'하고 여 타 가능성은 '실종'된다. 즉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존재자를 고정시키나, 이와 달리 자연과 세계는 움직인다. 로페즈는 레이가다스를 연상케 하는, 긴 호흡으로 세계의 변화와 유기적인 운동을 담아낸 익스트림 롱숏을 도입부와 극의 중간 중간 삽입한다. 도입부에서 로페즈는 ‘동이 트는 순간’을 비춘다. 프레임 내의 여명과 어둠 속에서 서서히 빛이 번져가는 '페이드인'은 상호 맞물린다. 침묵으로 자욱하던 청각 또한 온갖 종류의 날벌레가 자아내는 울음소리가 들어차 풍성해지고, 풍경 자체는 어떤 미동도 없어서 윤곽은 일정하지만, 빛의 양에 따라서 어둡거나 선명하거나 눈이 부시거나, 색채는 달라진다. 로페즈는 가히 인상주의적(인상주의자 모네는 한 풍경이 빛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연작으로 탐구하였다)이라 말할 법한, 한 풍경만을 정향한 하나의 테이크 내에서 빛과 시간에 따른 변화를 포착하여, 하나의 세계가 품은 무한함을 증명한다. 멈춤은 무요, 운동은 유라는 듯이. 이후 풍경에 정원사 벤투라가 다가온다. 그의 출입 또한 일종의 변화이지만, 무한하거나 가능성으로 충만한 변화는 아니다. 그는 정원사, 즉 직업적 목적에 따라서 풍경을 다듬기 때문이다. 자연 그 자체의 변화는 무한한 반면, 정원사에 의한 변화는 오직 하나다, 사람이 개입하면 가능성은 축소된다. 인간의 행동 제한은 그를 지배하는 고용주, 이념 등이 규정한다. 이후 영화의 중반부에, 사람은 없고 들개들과 나무, 대지만 포착한 적막한 풍경을 끼워 넣는다. 로페즈가 본 숏에서 주목하는 대상은 '바람'이다. 바람은 대지를 가만히 덮고 있던 모래를 대기 중으로 휘날리게 하고, 또 고정되어 있던 문도 바람의 힘에 속절없이 펄럭인다. 즉 자연은 끊임없이 운동하며 변화한다. 그 자연은 이윽고 인세에 개입한다. 문명은 자연과 세계 안에 속해있지, 결코 그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자벨 가족의 대저택, 거기서 인간이 만든 유리잔은 물을 가둔다. ‘물’은 유연하게 변신과 이동이 가능한 유동적인 물질이다. 영화 속 홍수로 인해 터전을 잃은 할머니, 집에 물이 샌다는 대사, 바닥에 흥건한 물 등은 액체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 물을 인간이 가둔다. 영화에서 도드라지는 사물이 자유로운 물을 강제로 붙잡아두는 ‘수영장과 유리컵’이다. 물의 형태와 양을 통제하는 유리잔, 거기에 바람이 불어 닥친다. 이윽고 유리잔을 넘어뜨려서 물이 어디로든 자유롭게 향하거나 흡습되도록 하고, 또 멀쩡하던 유리잔은 산산조각이 나서 새로운 유리 사물로 부활할 수 있는 '원석'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렇게 자연은 생성, 변화, 소멸로 순환하는 반면, 그 변화에 따른 결과가 두려운, 특히 변화하기보단 보존하고 비축한 정통성으로 권위와 위신을 드높이고 싶은 부르주아는 가둔다. 편집자로서 항상 두 세계를 오가던 로페즈, 이제 그녀는 영화감독으로서 두 쌍의 형식을 오가며, 두 세계를 교차한다. 그럼으로써 계급으로 분리된 두 세계를 반영한다. 고정된 카메라로 형성한 ‘회화적이고 사진적인 프레임’과 ‘핸드 헬드를 결합한 달리 숏’을 교차한다. 먼저 도입부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다. 그 시선은 실내에 머무는 부르주아의 시선이다. 바깥의 노동자는 움직이는 반면, 실내에 머무는 부르주아는 이동이 드물다. 그 부르주아는 부부다. 법은 결혼에 따른 의무 중 하나로 ‘성 관계’를 명시하는 만큼, 고정된 법에 따라 두 남녀는 애무를 한다. 그러나 권태롭고 시시하며, 심지어 원치 않는 감정 및 감각에 신경질이 치민다. 그래서 고정된 카메라가 서서히 줌아웃되며 그들 ‘삶’에서 멀어져가고, 짜증이 폭발하여 집의 기물을 파손하는 부부를 포착한다. 그러나 여전히 크게 움직이진 않는다. 이후 이자벨과 남편은 별거를 선택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녀들과 작별하나, 그 장면도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된다. 다른 여지가 없다는 듯이, 그래야만 하는 운명이 강제된다는 듯이.      


이자벨 부부 뿐만이 아니다. 뇌물을 받고 편향된 수사를 하는 부패한 백인 경찰 로베르타는 원주민, 프롤레타리아들이 실종된 가족을 수색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다. 제한구역이라며 말이다. 경찰에 의한 이동은 기껏 패닝 수준에 그치다가, 끝끝내 멈춘다. 즉 부동하는 것은 부르주아, 백인으로 이는 꽉 막힌, ‘혼탁한 미장센’과 결합한다. 도입부에서 풍경은 선명하지 않고 흐리다. 그 이유는 부르주아가 실내에서 창 너머의 정원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 서약에 따라 섹스하는 부부는 세계를 ‘날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을 규정하는 무엇처럼, 그들이 보존해온 재물이 대변하는 무엇처럼, 덧씌워진 막에 매개된 세상을 본다. 부르주아의 세계는 막혀있다. 아버지가 자녀들과 이별할 때, 넘어서기 어려울 정도로 위압적인 건축물이 자녀들 눈앞에 닥친다. 서서히 여명을 밝히던 도입부의 자연과 달리, 우람한 건축물은 답답함을 넘어서 페이드아웃으로 서서히 사라져가며 폐쇄성을 강화한다. 흐리고 왜곡되어 있으며 불투명하다 못해 차단하는 세계가 부르주아의 세계다. 이와 달리 프롤레타리아는 움직인다. 부르주아와 달리 영화 속 그들은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다. 부르주아의 섹스가 포착된 이후, 수영장에서 뛰노는 소녀들이 등장하고, 이들을 돌보는 유모 후아나가 수영을 하는 숏으로 연결된다. 후아나는 ‘시각 장애인’이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를 밝히고자 하는 듯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유리창과 같은 불투명한 막에 의해서 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쨍한 태양의 화사하고도 투명한 자연광으로 모든 것을 밝힌다. 또한 부르주아의 고정된 카메라와 달리, 핸드 헬드에 달리 숏이 결합한다. 즉 걷거나 뛰거나 수영하는 인간의 팔과 다리가 카메라의 운동에 반영되며 생동감이 넘친다. 흡사 도입부에서 프레임 내의 운동감을 이젠 카메라가 모방하고 반영하듯, 시각은 더 능동적으로 변화한다. 이후 마리아 가족은 밤에 수색을 한다. 로페즈는 킁킁거리는 개를 포착하고, 이후 온 지상에 자욱한 어둠을 적게나마 몰아내는 손전등과 보름달의 은빛이 보인다.    

  

마리아 가족이 찾는 것은 실종된 가족이다. 고정된 카메라로도 충분히 ‘보임’이 항구적인 부르주아와 달리, 프롤레타리아는 멕시코에서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래서 ‘보이지 않음’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는 수색하고, 이를 반영한 달리 숏은 아주 요란하며, 날카로운 하얀 조명은 단순히 대상을 비추다 못해 과잉 상태로 넘어서서 렌즈플레어를 만들어낸다. 안 보이는 것을 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천명하듯… 그런데 이 수색을 앞서 언급한 경찰이 저지한다. 즉 부르주아는 감추고 은닉하는 자라면, 프롤레타리아는 드러내려는 자다. 그 계급성을 좀 더 살펴보자. 영화 초반 아딘은 어떤 남자와 대화를 한다. 아버지일까, 아니면 할아버지일까. 그러나 그 남자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고정된 카메라가 만들어내고 감상자가 보고 있는 프레임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 이유가 청각에서 제시된다. 프레임에 담기지 않는 그 남자는 어렸을 때 미국으로 입양을 가서 부호의 자제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빈곤한 상태이며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반면 포착되는 아딘은 부패한 돈으로 산 금목걸이를 차는 등 꽤 부유하다. 즉 부유해야만 보일 수 있거나, 아니면 그들의 부유함을 위해서 프롤레타리아와 빈자들은 착취되어 사라진다. 영화 중반부에 이자벨 가족 시골 별장의 어두운 창고 내지는 지하실이 프롤레티라아의 장소라면, 그래서 프롤레타리아의 신원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아주 불명확한 익명적 상태, 추상으로 전락하는 반면, 이자벨 가족의 저택은 훤히 드러나다 못해 충만한 빛에 의해 창백해질 정도다. 거기서 부르주아는 잘 보이며 보존된다. 영화로도 그렇고, 초상화로도 부르주아의 젊음이 붙잡혀있다. 또 영화 초반부, 이자벨 가족 저택에서 주최한 부르주아 연회가 포착된다. 로페즈는 이를 롱테이크로 포착한다. 여러 숏으로 구성된 시퀀스의 경우 운동이 숏과 숏의 잘림, 이어짐에서 생겨나는 반면, 롱테이크나 원쇼트원씬의 경우 운동은 프레임 내에 머문다. 롱테이크에 담긴 부르주아의 운동은 굳이 외부로 나아갈 필요가 없는데, 그들만 담긴 숏 내에서도 충분히 삶을 충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테이크 안에 아이와 어른, 노인이 전부 존재하며 서로로 연속한다. 부르주아는 보존하는 존재, 그렇게 축적한 것으로 그들 내부에서 자족한다. 자족하며 부르주아끼리 삶을 순환시킨다. 이후 줌인을 이용해 그들에게 접근하여 더 크게 비춘다. 그들은 거대하고 가깝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다르다. 멀어지고 보이지 않는다. 부르주아의 연회가 포착되기 이전 시퀀스에서, 식구가 납치된 원주민과 프롤레타리아로 가득 찬 경찰서가 포착됐다. 형식은 마찬가지로 롱테이크다. 그러나 촬영법은 다르다. 연회는 고정된 카메라에 담겼다. 고정된 카메라가 회화적, 사진적 프레임을 형성하였기에, 부르주아가 초상화에 붙잡힌 양식과 유사한 연출로 그들의 존재 각각을 세심하게 보존하였다. 반면 경찰서에선 카메라가 달리 숏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실종자를 찾으려는 가족의 시점에 상응하듯. 그러나 아무리 카메라가 움직여도 찾고 싶은 실종자의 얼굴은 영영 포착되지 않는다. 더욱이 달리 숏으로 이동하면서 포착되었던 유족의 얼굴은 프레임 바깥으로 잊혀져간다. 즉 피해자들이 담긴 테이크는 죽음이나 부재라는 공통성을 이루기에, 이들의 운동은 테이크 너머, 다른 숏에 있는 유(有)를 밝히려고 하지만, 정작 그 테이크가 한번 분절되어서 연결된 숏에는 부르주아 이자벨의 얼굴이 담긴다. 실종과 납치의 종착역이 그녀의 이익이라는 것인가, 마리아를 위해서 경찰서에 동행했지만 실상 그녀는 위선을 떨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가? 이렇게 프롤레타리아들은 어떻게든 밝히고자 이동하지만, 그 운동은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거나, 또 실종자가 영영 돌아오지 않음에 '끊김', '부동', 제자리를 뛰는 달리 숏이다. 멕시코의 계급은 보통 인종, 민족과 깊이 결탁한다. 물론 인종-계급이 언제나 비례하는 것은 아니고 반비례할 가능성도 있지만, 보편적으론 백인-부르주아, 원주민-프롤레타리아가 정합한다. 생김새는 원주민에 가깝지만 메스티소로서 백인, 그것도 경찰의 자식인 아딘은 원주민 마리아를 동원하여 사람들을 납치하고 돈을 뜯어낸다. 주도자는 카르텔에 몸담고 있는 혼혈 아딘이다.      


반면 원주민 마리아는 자신이 고용을 결정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오로라 부인에게도 고용된 마리아는 부정직한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하지만, 부르주아의 읍소에 쉽게 때려 칠 수 없다. 아딘의 납치에 가담한 이유도 마찬가지이랴. 그러나 백인 경찰이자 아딘의 엄마 로베르타는 자기 아들 대신 마리아에게만 죄를 덮어씌우려고 협박한다. 더욱이 원주민, 프롤레타리아 피해자들이 발생했을 때 경찰의 수사는 미적지근하다. 로베르타의 아들이 납치범인 것처럼, 또 로베르타가 뇌물을 챙기는 것처럼, 부르주아 및 납치범들과 경찰은 한패이기에 수사에 시큰둥하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가 용의 선상에 올랐을 때, 피해자가 백인이나 부르주아일 때 그들의 수사는 일사천리다. 마리아 가족이 피해자일 땐 몇 년간 진척이 없다가, 마리아와 아딘이 가해자가 되자 바로 정보력을 동원하듯 말이다. 즉 편향된 법에 의해 원주민-프롤레타리아는 실종자이자 가해자라는 객체에서 도망갈 수 없는 반면, 백인-부르주아는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은 은닉되며 항상 피해자, 권력자가 된다. 로페즈는 이를 연출로 가시화한다. 가장 먼저 ‘렌즈’다. 그녀의 전남편이자 예술적 동지인 레이가다스가 <어둠 뒤에 빛이 있으라>나 <우리의 시간>에서 왜곡한 렌즈를 사용한 바가 있듯, 로페즈 또한 본 작품에서 렌즈를 평범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렌즈에 왜곡을 가해 중앙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내는 한편, 외곽과 주변부를 희끄무레하게 처리한다. 그래서 인물은 중앙에 놓여야만 드러날 수 있고, 그 중앙에는 보통 부르주아의 얼굴만 들어차있다. 그 중앙은 자리가 협소하다. 한 명만 유효하다. 그래서 모서리, 측면에 놓인 인물들은 중앙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며, 중심부의 인물을 제거하고자 투쟁한다. 중앙에 놓여있던 아딘은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사라지고, 중앙에 있었던 프롤레타리아를 제거하거나 주변부로 치움으로써 부르주아는 항상 보인다. 또 중앙에 포착되는 것이 언제나 인간은 아닌데, 그것이 인종-계급을 가시화하는 로페즈의 두 번째 장치다. 감독은 중앙에 인간이 아니라, 그 인간이 다루는 ‘사물’을 대신 놓는다.      


포착되는 사물로는 벤투라를 정원사로 만드는 '땔감과 도끼', 젠더-남성과 경찰을 만드는 '총기류', 부르주아의 호사스러움을 증명하는 '접시와 식기' 등이 대표적이다. 해당 물건을 들고 있는 인류는 사물의 목적을 수행하며 몸소 사물과 동화되고, 이에 ‘사물에 의한 객체’로 전락한다. 사물과의 관계가 역전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가 하니라 특정한 목적만을 위한 존재자가 되어 가능성이 축소된다. 고용주 이자벨의 마조히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어서, '둔기'를 들고 억지로 그녀 등을 가격하는 벤투라처럼 말이다. 다른 행동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인종, 계급에 의해서 객체로 전락하는 현장을 살펴보았는데, 영화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이중굴레에서만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삼중굴레에 가까운데 바로 총기류에서 나타난 '젠더'까지 끼어든다. 앞서 언급한 렌즈 왜곡은 보통 남성을 포착할 때 도드라진다. 남성과 경찰이 총기류에 관심을 보일 때, 그들끼리 서열 다툼을 할 때, 외곽에 있는 사람들이 가운데로 몰려들며 충돌이 인다. 남성들의 세계는 밀려나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중앙에 놓이고자 경쟁한다. 또 총기와 남근의 유사성처럼, 그것에 좌우되는 남성은 항상 찌르고 발사하며 내뿜는다. 반면 여성들끼리 모인 수영장이나 풀밭에서는 렌즈 왜곡이 덜하다. 측면에 있는 여성들의 육체가 프레임 바깥으로 잘려 나가긴해도 비교적 선명하다. 품는 존재인 여성은 찌르기보다는 포옹하고 안부를 묻는다. 즉 여성의 세계는 보존하지만, 그만큼 지루하고 잔잔하여 이자벨은 권태롭다. 또 여성이 포착된 시각은 남성에 비해서 불안정하지 않다. 왜곡되지 않은 선명한 렌즈를 이용하여 성숙하고 관능적인 여성의 육체를 프레임에 가득 채운다. 그러나 청각은 이와 다르다. 이자벨의 독백이 담긴 음향은 약동하는 육체와 상반되게 죽어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남성들의 육체는 항상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그러나 여성들의 육체는 가둬진 물처럼 수영장에 머물거나, 또 초원에 가만히 누워있다. 남성은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여성은 가둬짐에 따분함과 불만을 느낀다.      


로페즈는 마찬가지로 계급을 탐구한,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 루크레치아 마르텔의 <늪>을 연상케 하는 끈적거림, 호사스러움 가운데의 권태와 적막, 부동을 구현한다. 계급, 민족, 젠더가 만들어낸 질척거리는 구속은 이제 극단적으로 폭발한다! 로베르타는 아딘을 계속 통제했다. 그녀의 남편은 힘이 전무 하여 그녀가 ‘가장’이다. 가장인 그녀는 백인인 반면, 아딘은 원주민의 특질이 얼굴에 묻어난다. 백인인 어머니는 원주민 아들이 부유하지 못하게, 입고 있는 모든 옷과 장신구를 벗겨서 헐벗은 상태로 빈궁하게 만든다. 또 납치범임이 탄로 나자 그를 폭행한다. 백인은 원주민에게 특정 상태를 강압하지만, 이를 원치 않는 아딘은 오기가 생겨 오히려 더 일탈한다. 그녀가 자신의 기준, 검열에 아들을 맞춰놓았다면, 이로써 항상 그녀의 눈에 검열했다면, 아딘은 이로부터 영영 사라진다. 그래야만 자신으로서 자유롭고 솔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인의 편향된 수사와 폭정을 더는 버틸 수 없는, 또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원주민들은 이제 스스로 납치범이 되어 백인을 납치한다. 백인 이자벨이 프롤레타리아 및 원주민을 착취하여 몰고 있는 '차량'을 자신들이 탈취한다. 이자벨은 남편과의 성애에서 어떠한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남편과의 섹스는 하고 싶은 것이 아닌, 법에 따른 의무였기 때문이다. 또 모든 자극들이 지리멸렬하다. 부르주아로서 도처에 보존된 충만한 물질적 자극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즐거울만한 감각에 둔감해졌고, 그 이상의 것을 느끼고자 벤투라에게 피학적인 폭력을 요청한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 그녀는 더한 폭력을 갈구하다가 카르텔 및 납치범에게 휘말린다. 영화 속 계급, 민족, 젠더는 사회학자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자면, 그들 내부에서 통용되는 습관, 행동 및 삶의 양식을 의미하는 ‘아비투스’를 지리멸렬하게 반복한다. 여기에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를 곁들이자면, 아비투스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의 자극, 허용된 자극으로서 감각의 '방어막'을 이룬다. 그 방어막들은 합법적으로 가능한 것과 연관되고, 개체적 차이 및 문화권에 따라서 방어막의 두께는 제각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방어막이 외상적 자극, 경악 등의 어떤 이유로 깨지면, 적정 수준으로 통제되던 자극이 무제한으로 풀려나 극한에 이르고, 불법적이기에 금기시되어 방어막을 넘지 못하던 자극들이 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본 작품의 상황은 방어막이 깨지기 직전이거나, 방어막은 이미 깨졌다. 계급·인종·젠더에 따라서 할 수 있는 것이 극도로 제한된 갑갑한 멕시코, 그 임계점을 버티지 못한 모든 객체들의 방종이 폭발한다. 이후 멕시코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가능해야 할 것’과 ‘불가능한 것들’ 모두 다 뛰쳐나와 거대한 카오스로 전락한다. 분명 인류가 잃어버린 변화를 다시 회복하였지만, 과연 그 변화를 모두 다 긍정해야할까? 인류는 자연의 야만성, 잔혹성을 거부하고자 문명을 세웠다. 자연의 부정적 변화를 척결하였으나, 정작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잔혹했던 공동체가 문명이다. 자유, 긍정적 변화나 가능성, 여지를 모두 말소하고 오직 이성, 합리성만을 허용하며 획일화를 이루었다. 이는 철학자 아도르노의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변화와 자유를 되찾되, 자연 속에서 몰아내고자 한 부정적 변화가 아니라, 태초의 인류가 긍정하고자 한 변화를 회복해야 할지다. 로페즈는 인류가 회복해야 할 긍정적 변화를 물색한다. 먼저 이자벨이 납치되었을 당시, 그 옆에선 가무의 무아지경에 빠진 소년이 렌즈플레어로 빛났다. 합의되어 틀에 박힌 이자벨의 사도마조히즘 액션이 아닌, 제 몸의 분방함을 따르는 자유로운 춤이다. 소년의 춤은 찬란하게 반짝이고 자유가 흘러넘친다. 이를 가시화하는 렌즈플레어를 회복해야 한다. 또 영화 후반부에는 두 차례의 슬로우 모션이 활용되는데, 첫 번째 슬로우 모션이 사용된 숏은 이중적이다. 슬로우 모션이기에 행동을 붙잡는다. 그러나 조명이 깜박거려서, 붙잡지만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행위인지, 또 포착되는 인물의 신원도 불분명한데, '단 하나로 해석되지 않음', 목적이나 수단화되지 않은 '순수 시지각'이다. 특정한 내용, 논리, 이성으로 정리할 수 없고, 단지 ‘다면성’만 보일 뿐이다.      


그것이 곧 우리가 회복해야 할 ‘변화무쌍함’이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형태로서, 곧 자유로서. 그 다음 숏에서 로베르타는 뒷거래를 거절한다. 그간 로베르타는 뇌물을 받고 편향된 수사를 하며, 이로써 납치가 일반화된 사회를 만들어냈다. 그 사회는 로베르타가 아끼는 아딘을 앗아갔다. 뇌물을 거부한 로베르타는 '멍청한 년' 소리를 들으며 ‘일반적으로 부패한’ 경찰 조직에서 추방당하고, 잘 보이던 뒷거래 현장을 헬기의 모래먼지를 이용해 잘 안 보이게 만든다. 그렇게 일반화된 부패를 조금이나마 지워내니 아딘의 주검이라도 되찾는다. 그 변화를 위해 로페즈는 ‘아이’들을 긍정한다. 아비투스에 지배되고, 그것의 억압에 따른 극단적인 반항심을 표출하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내적으로 순수하게 내뱉거나 본다. 벤야민은 납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발레리아는 이자벨이 걱정되어 진심으로 운다. 그 아이들의 시선에서 두 번째 슬로우 모션이 발생한다. 거기엔 산 채로 불태워지는 원주민과 그것을 방관하는 사람들이 담긴다. 로페즈는 아이들의 시선을 빌려 납치되고 사라져간 사람들, 그것을 방관하는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모두 다 담아낸다. 단순하게 담아냄을 넘어서 ‘느리게 붙잡으며 세세하게 주목’한다. 그것이 계급, 인종, 젠더의 삼중굴레에서 벗어나서 봐야할 진실이기 때문이다. 로페즈는 후반부 이자벨을 포착하는 렌즈를 거꾸로 뒤집어 중앙을 흐리게 만들고 주변부를 선명하게 촬영하며,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멕시코를 보여준다. 그것은 계급, 인종, 젠더가 만들어낸 야만이자 그 부작용을 감내하고 있는 멕시코다. 아비투스의 구속과 겁박에서 달아나려는 극단적 일탈, 그러나 아이들의 적정 수준의 일탈 속엔 여전히 순수와 앳된 희망이 남아있다.

-----

감상일: 230321 집에서 (MUBI 스트리밍)

매거진의 이전글 아쉬가르 파라디, <어떤 영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