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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r 27. 2023

시릴 쇼이블린,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

보고해야 하는 시공간을 넘어서…

시릴 쇼이블린(Cyril-Amon Schaublin),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Unrest) 

- 보고해야 하는 시공간을 넘어서…     

“우리가 가진 것은 시간뿐이다. 집이 없는 사람들조차 시간을 향유한다.” -발타자르 그라시안-

철학자이자 예술가이며 사회주의 이론가인 ‘기 드보르’는 인간이 시간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인간이 제 본성을 파악하기 위해선, 시간에 의해 세계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물론 시간의 자연적 토대는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개인이 막연하게 시간 속에서 자신을 길어올 수 없다. 인간의 시간화는 대체로 집단적이다. 시간은 두 유형이 있다. 하나는 인간과 무관하게 시간 내부에 영원함이 있는 ‘순환적 시간’, 다른 하나는 이 순환적 시간과 대립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불가약적 시간’이다. 그리고 불가약적 시간에 참여하는 인간은 기술과 언어를 통해서 ‘역사적 산물로서 인간’, ‘현재의 의식’을 자각하고, 불가약적 시간을 이루는 기술과 언어는 개별적이기보단 집단적이고 보편적이기에 공통된 하나의 의미를 관통한다. 그 의미는 불가약적 시간을 형성한 역사의 소유자들이 부여된다. 그런데 이 불가역적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언어는 달라지고 기술도 진보하며, 이를 이루는 이념도 흔들린다. 그럴 때 사회에 의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찾는 인간도 당황한다. 산업화와 자본주의가 꿈틀대며 부르주아는 축적된 역사를 통한 불가역적 시간을 만들려는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무정부주의가 꿈틀거리는 불안한 19세기의 스위스를 시릴 쇼이블린이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에서 재현한다. 과연 그들은 과거와 현재의 사이, 또 새로운 이념이 불가약적 시간을 탈취하려는 경쟁구도 속에서 어떤 자신을 발견할까? 1984년 취리히 태생의 시릴 쇼이블린은 스위스의 영화감독이다. 시계공 가문의 후손인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신작,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에 녹여낸다. 그는 2017년 <도즈 후 아 파인>이라는 작품으로 장편 데뷔하였다. 극도의 형식주의자인 그는 <도즈 후 아 파인>에서 형식을 절륜하게 활용하여 오늘날을 비춘다. 그 오늘날엔 사물이 인간을 잠식한 ‘물신주의’가 판을 친다. 쇼이블린은 클로즈업으로 사물을 부각한다. 포착된 쓰레기통, 신호등, 헤드폰 등 사물에 의해서 인간은 쓰레기를 버리고, 신호등 버튼을 누르며, 헤드폰에서 들려오는 발화에 맞춰 입을 뗀다.  


즉 인간이 제 목적에 따라 사물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목적이 인간을 좌우한다. 사물의 위치에 의해서 인간의 모습과 행동도 뒤바뀐다. 카메라는 부동하고 마찬가지로 사물도 멈춰있기에, 사물에 의해서 인간도 정지된다. 이후 쇼이블린은 인간 역시 클로즈업한다. 사물을 포착할 때와 똑같이 비좁게 촬영한다. 그들은 군인, 경찰, 콜센터 상담사 등 모두 특정 직업으로 자신을 대신 말한다. 직업을 갖기 전과 노동 이후에 어떤 사람인지 영화에선 도통 알 수 없다. 경찰은 수사, 군인은 검문 및 경비, 콜센터 직원은 상담 등 정형화된 행동을 반복할 뿐이다. 그 이유는 영화의 편집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눈길을 건네거나 말을 건다. 이후 그 시선이 기대하거나, 상대의 발화에 맞춘 얼굴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연결된다. 연기자 및 배역 앞에 카메라 내지는 시선이 자신을 숨기지 않고 노출한다. 그 카메라가 요구하는 모습을 위해서 사람들은 발화나 행동을 교정한다. 그래서 영화 속 인간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대자 또는 주체가 아니라, 특정 본성이나 목적을 부여받는 즉자 내지는 객체로 전락한다. 영화의 사람들은 와이파이나 핫스팟, 비밀번호 등을 요구하고, 카메라 앞에서 이들은 모두 비밀번호를 술술 노출하거나 전파로 서로에게 연결되며 편집과 조응한다. 내밀한 비밀은 상실되고 모든 것이 공적으로 까발려진다. 이로써 까발려지고 승인될만한 것만 남는다. 즉 갑갑한 클로즈업은 사물에 의한 인간, 특정 목적과 의무, 기대에 봉사하는 수동적 인간으로의 전락을 가시화한다. 그러나 클로즈업이 주를 영화에 롱숏이 교차한다. 그 롱숏은 CCTV 구도이며, 하나의 인간 및 사물만을 조명하거나, 또 그들을 자신의 시선에 가두기보단, 거대한 풍경을 느슨하게 응시할 뿐이다. 또 CCTV는 숨겨져 있기에, 카메라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시민들은 프레임 안팎을 마음대로 나갔다 들어오며 행동은 자유롭다. 시선은 개인에게 특정한 정체성을 검열하고 요구하며, 내밀한 사적 비밀을 모두 까발리고 앗아간다.      


그러나 시선이 약화된 도입부의 롱숏에선 오른편으로 흐르는 강물과 남성들의 시선, 반면 왼편을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 등 두 개의 각기 다른 운동이 병존한다. 강물과 남성이 현재라면, 여성은 회고하기에 과거로서, 특정한 하나의 흐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두 개의 운동이 교차한다. 또 클로즈업에는 주로 하나의 행위만 담기나, 롱숏에서 어느 한 군인은 검열하고 다른 군인은 경비를 서는 등, 다른 목적과 행위가 공존한다. 즉 덜 바라볼 때 자유롭고 가능성이 열린다. 영화의 카메라는 내내 고정되어 있지만 자동차를 따라다닐 때는 트래블링 숏으로 뒤바뀌는데, 한편 카메라는 자동차를 온전히 따라가지 못하고 때때로 궤적을 이탈한다. 이에 자동차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카메라가 비추는 시각이 간혹 불일치하는데, 서로 불일치하는 시각과 청각이 결합하며 새로움을 만든다. 앨리스라는 콜센터 직원은 사라라는 거짓 신분을 꾸민다. 본래 노부인들의 시선과 연결될 수 없는 존재가, 노부인들의 시선 앞에 나타날 수 있는 존재로 둔갑하며 이익을 챙기는 것처럼, 불일치와 거짓말은 가능성이다. 그러나 CCTV도 어찌됐든 카메라로서 사라가 아니라 앨리스이길 요구하고 그녀를 추적한다. 또 사회 질서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도처에 깔린 경찰과 군인들은 대상의 시청각이 일치하는지 확인하고자 클로즈업하기에, 결국 불일치에서 발생한 우연과 가능성은 협소해진다. 즉 쇼이블린이 바라본 오늘날 취리히는 극단적이다. 타인과 카메라를 위한 단 하나의 목적으로 가능성을 축소시켜 자유를 말소하거나, 거기서 이탈한다면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입히고, 서로에게 기대하는 시선이나 입에서 이탈하면 대화는 이뤄지지 않는, 그런 고립되고 갑갑한 구조에 우리는 몸담고 있다. 그렇다면 쇼이블린이 바라보는 19세기는 어떠할까? 그 19세기는 미장센이 흥미롭다. 비교적 선명하던 쇼이블린의 전작에 비한다면 본 작품의 미장센은 아스라하고 뿌옇다. 흡사 필름의 효과와 유사해 보이는 본 작품만의 미장센은 왜 선택된 것일까?      


이는 19세기를 담아낸 회화에 잔뜩 낀 ‘노이즈’에 상응할 수 있고, 또 영화에서 사진 기술 발전이 주된 화두이듯, 당시를 포착한 필름에 낀 자글거리는 노이즈나 ‘그레인’과도 유사하다. 즉 시간성과 쇼이블린의 향수어린 미장센을 결부 짓는다면, 21세기에서 19세기를 바라보는 불명확성, 혼탁한 한계를 가시화한 형식이라고 읽을 수 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드러나 있지 않기에 본 작품의 탁함은 신비롭다. 그런데 본 미장센은 시간성을 지칭하는 역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후술하겠지만 쇼이블린은 본 작품에서도 '사물에 의해서 부수적으로 포착되는 인간'과 '본연의 인간'을 교차하여 클로즈업하는데, 전자가 영화의 미장센과 관련을 맺는다. 클로즈업으로 포착한 사물에는 담배, 굴뚝, 증기 등이 있다. 거기서 쉴 새 없이 ‘연기’가 새어나온다. 산업화의 징후를 가리키는 사물들과 매연, 그것이 뿌옇고 탁한 영화의 미장센에 반영되어 인간을 가린다. 당시 발전된 산업과 자본이 인간을 착취하였듯. 즉 본 작품만의 미장센은 오늘날에 명확히 규명할 수 없는 역사의 신비로움과 동시에, 본연의 인간을 가리고 은닉하는 갑갑함에 상응한다. 그 미장센은 인간을 왜곡한다. 물론 미장센에 덧씌워져 왜곡당하기 이전의 인간 또한 완전무결하고 절대적인 객관성으로 전달되진 않는다. 매연이 아니더라도, 낮과 밤, 햇살과 달빛, 빛과 어둠 등에 의해서 어떻게 보일지는 ‘상대적’이다. 쇼이블린은 인간의 상대적인 시각을 영화 중반에 언급한다. 사진사와 군인이 대화를 나눈다. "이 사진은 나처럼 보인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들이 대화하는 와중, 구름이 움직이며 태양을 드러냈다가 은폐했다가 하는지 빛의 총량이 뒤바뀐다.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가… ‘영상’은 그 모든 어두움과 밝기를 하나의 테이크에 종합해서 보여준다. 그러나 ‘사진’은 객관적이라고 일컬어지지만, 대상의 모든 것에 대한 총체적 객관성이 아니라, 한 찰나에 대한 객관성일 뿐이다. 사진은 밝음과 어둠, 낮과 밤, 모두를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포착한 특정 시간, 그리고 사진을 위한 시간만을 함축한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사진이 객관적으로 포착할지언정 그렇게 담아낸 것이 진실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회화는 사진과 마찬가지로 정지되어 있지만, '움직임의 비밀암호'를 찾아내어 정지된 시간 속에서 다양한 시간을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거나, 다양한 시간을 하나로 응집하는데 실패한 사진은 우리 몸에 대응하지 않아서 특정한 반응을 이끌지 않는다. 이로써 사진의 편린은 현실의 무수한 총체에 대응하지 않는다. 반대로 움직임의 비밀암호를 해독한 회화는 그것이 가상이고 정지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에 대한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로서 인간을 움직이게 한다. 그 회화가 사진에 의해서 대체되었고, 도입부처럼 사진에 담기길 원하는 사람들은 멈춘다. 회화는 멈춘 모델에 움직임의 비밀암호를 덧붙인다면, 사진은 정지된 그 순간에 그친다. 영화에선 이 사진이 갖고 있는 하나의 객관이 모든 객관을 일반화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사라진 조세핀과 표토르을, 그들의 단 한순간만을 붙잡은 사진으로 대체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영화는 무한한 인간을 제한하는 협소한 미장센을 벗겨낸다. 도입과 결말은 유일하게 덜 탁하다. 또 ‘탁함’으로 일정하지 않고, 빛의 양에 따라서 화사하기도 하고, 그늘의 위치에 의해 어둡기도 하다. 여전히 신비로운 안개 내지는 연기, 빛살은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은 매연이 아닌 자연광이다. 사진은 20초간 정지할 것을 요청한다면, 실제 인간이 속한 세계는 20초간 흘러간다. 쇼이블린은 사진의 발전, 산업화 곧 노동 외의 목적을 설정할 수 없던 인간과 물신주의에 의한 '고정되고 탁한 필터'를 걷어낸다. 이로써 고정되지 않고, 움직이면서 자유로운 인간을 회복한다. 결말에서 조세핀과 표토르가 사라지듯 말이다. 즉 쇼이블린은 인간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고정된 본질에 앞서 ‘실존’하고 삶을 만들어가는, 매 순간순간 상대적인 ‘대자’임을 예찬하는데, 이를 위해서 달아나야 할 아주 많은 족쇄들을 쇼이블린은 해제한다. 그 장대한 것은 바로 ‘시공간’이다.      


먼저 공간이다. 쇼이블린은 전작에서 보여준 연출의 기조를 본 작품에서도 이어간다. 가장 먼저 ‘롱숏’을 이용해 공간을 포착한다. 시간은 흐르고 공간은 멈춘다. 물론 시간은 흘러가며 공간을 변형시키고 흔적을 남기며 재규정한다. 반대로 공간은 시간의 흐름을 더디게도 하고, 공간의 법과 규칙으로 시간에 퇴행을 놓거나 반복을 첨가하기도 한다. 본 작품의 도입에서는 후자다, 바로 '축소된 공간'이라 말할법한 사물이 20초간 시간을 멈추게 한다. 롱숏에서의 인류는 주로 자유롭다. 영화 초반 롱숏으로 포착되는 것은 굴뚝, 건물의 기둥, 전봇대 등이다. 카메라는 건물과 구조물을 쏘아본다. 그 건물이 특정 목적에 따라서 작동하는지를 감시하듯 말이다. 거기서 어긋나면 목적에 맞춰 뒤바꾼다. 경찰 내지는 군인인 한 남성이 '공장 시간'에 맞춰 시계의 침을 고치고 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건물이 규칙이나 원형에 갇히는 것과 달리 사람들은 자유롭다. 그들은 건물이 포착되는 프레임의 안팎을 자유롭게 오간다. 물론 그 건물에 귀속된 ‘직업군’의 경우 프레임을 자유롭게 떠날 수 없다. 건물이 포함된 사진을 찍어야 하는 사진가, 그 공간의 출입을 통제하는 군인은 건물을 포착한 프레임에 귀속된다. 그러나 공간에 목적이 없는 인류는 자유롭다. 외부에서는 비록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시간이 아니라 '도시 시간'이 공간을 좌우하고는 있다지만, 그 도시 시간을 모두 제각각 유용한다. 도시에 속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체국이나 공장에는 도시 시간이 아니라 '공장 시간'을 사용한다. 또 '교회 시간'도 따로 있다고 언급된다. 공장 시간을 생산하는 공장, 우체국의 실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된다. 일단 우체국의 창구는 하나다. 그 창구를 향해서 줄을 길게 서있도록, 다수가 '기다리는 사람'으로 획일화되도록 공간을 형성한다. 또 시계 공장에서는 모든 노동자들이 똑같은 의자와 책상, 기구를 배정받고, 똑같은 일을 하도록 짜인다.      


그래서 우체국이나 공장의 실내를 포착한 숏에서 인류의 모습이나 크기는 천편일률적으로 다 똑같다, ‘정량’이다. 크기, 행동 등 모든 것이 일정하고, 심지어 각 개인 간 특질을 확연히 부각하는 클로즈업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한참 멀어진 롱숏이기에 신원은 익명적이다. 즉 공간에 소속되는 인간은 제한되며 자유와 개성을 포기한다. 그러나 공장 외부의 '거대한 나무'를 포착할 때는 다르다. 우체국과 공장은 모든 인류가 똑같아지도록 공간을 구성한다면, 나무가 위치한 건물 외부에서 인간은 비교적 자유롭고, 인간과 나무는 서로에게 특정한 사심이 없어 무관심하다. 그래서 굴뚝이나 전봇대를 포착할 때보다도 자유롭다. 특히 후반부, 전봇대를 중심으로 포착한 롱숏에 사람들은 전보를 고치기 위한 목적으로 몰려든다. 사물의 목적이 우선이기에, 이를 위해서 인류는 모서리 부근으로 소외되었다. 반면 나무를 포착할 때 사람들은 카메라 멀리서 포착되기도 하고 카메라 가까이서 포착되기도 한다. 천편일률적으로 같아야 하는 인간이 아니라, 크게 보일 수도 있고 작게 보일 수도 있는, 정형화되지 않은 자유로운 인간이 자연에서 회복된다. 더불어 그들이 회복되는 시간은 특정 목적이 강제되지 않은 휴식시간이다. 영화 결말의 숲도 마찬가지다. 군인은 도시의 카탈로그에 담을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 제한 구역을 많이 설정했다. 이에 인간은 특정한 통로로만 다닐 수 있고, 모든 공간이 아닌 특정 공간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이에 조세핀과 표토르는 군인이 제약하는 도시를 피해서 숲으로 향한다. 도시 계획은 인간을 위해서 적재적소의 효율성을 추구한다. 그래서 도시 안의 카메라는 아무리 다양한 구도로 뒤바뀐다 한들, 언제나 인간을 위해서인지 사람들은 꽤 잘 보인다. 그러나 숲은 다르다. 숲은 인간만을 위한 목적에 봉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을 위한 건물에 따른 일정한 시선이 유지되던 도시와 달리, 인간과 무관하게 뻗어가는 나무들을 각기 포착하는 숲 속 카메라의 구도는 매우 제각각이다. 그래서 숲으로 들어가는 두 남녀도 도시에 비해서 더 다양하게 포착된다. 다양하게 포착되면서 때론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즉 ‘특정 목적에 좌우되는 인간’, 그러나 본래부터 이런 목적을 타고나지 않은 ‘자연과 무위의 인간’을 공간에 따른 형식으로 대비한다. 전자는 보이는 반면, 후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는 ‘움직임’에도 반영된다. 영화의 카메라는 내내 멈춰있다. 고정된 상태에서 제한적으로 움직이는 틸트, 패닝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사진이라는 '사물'을 위해서 인간은 멈추듯, 이후 촬영된 피사체를 필름이라는 '공간'에 영원토록 고이 모셔두듯, 이를 포착하는 영화의 카메라도 부동한다. 멈춘 공간과 사물에 봉사해야지만 인간은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에서 그토록 부동하던 카메라가 패닝하며 좌측으로 이동한다. 조세핀이 지니고 있던 시계는 사라지고, 오직 나무들만 가득한 텅 빈 적막이 포착된다. 공장시간의 휴식시간을 확인하는 시계, 곧 인류가 귀속되는 사물과 공간을 떠난 조세핀과 표토르를 카메라는 뒤늦게 따라간 것이 아닐까? 그러나 모든 제한을 벗어던진 인류는, 카메라를 바라보라거나 사진을 위해서 정지하라는 의무에 봉사하지 않는다. ‘있어야 할 곳’이라는 예상이나 규칙에서 벗어나기에 포착할 수 없다. 결말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감시하고 검열하는 시선에서 아예 사라진다. 결말 직전 광장을 포착한 롱숏에서 이러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었다. 어느 한 모퉁이에서는 사진 촬영을 위해서 20초간 인간을 정지시키는 ‘사진기에 의한 인간’을 포착한다. 다른 한구석에서는 우연이 결정하는 ‘추첨’, 인간 스스로 ‘노래’를 하며 시간을 자유로이 유용하는 모습이 담긴다. 시공간에 좌우되는 인류, 반면 그 시공간을 자유롭게 점유하는 인류, 그 두 세계가 하나의 테이크 내에서 공존 내지는 충돌하며 긴장감을 이룬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간 인류는 공간이나 사물에 예속되며 제한을 감내한 것일까? 왜 그들은 항상 카메라나 시선에 의해서 보여야만 했었나? 이 또한 사물과 시간 속에 원인이 있다. 영화 초반, 여성 노동자들이 보험을 논한다. 그 보험은 유부녀만 가입할 수 있어서, 즉 가부장제에 적극 협조해야지만 보장 받을 수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무정부주의자를 위한 보험이 나왔다고 한다. 보장받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하다.      


‘선거’ 장면에서도 자격을 줄줄 읊는다. 투표권이 주어지는 대상은 세금을 낸 사람, 남성, 내국인, 성인에 국한된다. 그 중 납세자와 탈세자의 차이, 공장을 들여다보면 고의 탈세자는 없어 보인다. 공장 시간과 도시 시간의 혼재, 또 정치적 이유에 따른 해고 등 노동자들은 세금을 내기가 빠듯하다. 그래서 세금을 항상 안정적으로 낼 수 있는 부르주아만 투표에 반영될 것이요, 노동자들의 참여를 막는 불리하고 기울어진 구도에서 이들은 특정 이념에 비추어서 보여야만 하든가, 공간이나 사물에 예속되는 노동으로 생존하는 수밖에 없다. 특히 여성은 정치적, 사회적 권리가 더더욱 제한되기에, 기혼자가 되어서 남성에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이들은 ‘살해’당한다. 무정부주의를 논하는 숏에서 언급되길, 파리 코뮌은 그간 반복되던 임금 불평등을 해소하여 최초로 ‘남여 동일 임금’을 이룩했다. 반복을 벗어나서 새로운 시간을 창조했으나, 인위적으로 반복되는 불가역적인 시간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그들은 처형당했다. 그래서 이들은 무정부주의를 지지하면서도, 생존하기 위해서 일단 공장시간을 따른다. 공장, 그리고 공장시간에 의해서 시청각이 규정된다. 노동자여야만 하는 인간은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이, 과거부터 쭉 있어왔고 조립되기로 정해져있는 시간을 천편일률적으로 반복한다. 그것이 곧 편집에 반영된다. 이탈리아에서 수배령이 떨어진 무정부주의자가 마을에 숨어든 모양이다. 불가약적 시간을 거역한 무정부주의자는 보이거나 연속돼서는 안 된다. 이에 마을에서도 수배령을 내려 양지로 올라오지 못하게, 영화 내내 영영 보이지 않게 만든다. 또 당국은 세금을 내지 못한 노동자를 짧은 기간 교도소에 가두며,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게 한다. 불가약적 시간을 따르면 아주 짧은 '휴식 시간'을 준다. 반면 불가약적 시간을 따르지 않으면 그나마 자유로운, 나무와 함께하는 롱숏조차도 빼앗는다. 그렇게 잘 보이지 않게 되면 생존을 위협받는다. 반면 잘 보인다는 것은 생존 보장이다.      


그런데 카메라는 인간에겐 관심이 없다. 카메라의 관심은 오직 ‘사물’에게, 그래서 영화 내내 잘 보이는 대상은 사물이기에, 사람들은 잘 보이고자 사물의 곁에서 봉사한다. 시계가 조립되거나 사물이 작동되는 메커니즘에 따라서 인간은 보이거나 안 보인다. 즉 문명에서의 삶은 불가약적인 시간을 거스르면 불연속적이요, 불가약적인 시간을 따르면 비교적 연속적이다. 인간이 몸소 창조적인 시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존재했고 현재에도 반복되는, 낡고 쇠락한 시간이 인간을 조종한다. 그 불가약적인 시간은 사물에 봉사한다. 그래서 영화는 사물을 포착한 클로즈업에 주목할 법하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대두되는 사물은 시계 조립 기구 및 부품이다. 그것들은 아주 미세하다. 맨눈으론 잘 보이지도 않는 사물들을 카메라가 크게 확대하는 과정에서, 사물을 집는 손이 프레임을 가득 채우게 된다. 즉 사물에 의해 인간은 상대적으로 '거대해진다.' 또 사물을 집는 손, 그 사물을 주의 깊게 살피는 '안경' 낀 얼굴 부근만 포착될 뿐, 사물과 무관한 타 신체 기관은 포착되지 않는다. 즉 사물을 클로즈업하는 숏에 부수적으로 끼거나 욱여넣어진 인간이 물신주의를 반영한다. 근무 중 한 노동자가 입에 무는 '약', 휴식 시간의 '담배' 또한 마찬가지다. 노동을 위해서 약으로 버티는 몸, 그나마 자유로운 휴식시간 또한 사물인 담배가 인간을 중독 시키고 지배한다. 또 다른 사물은 냄비, 유리병이다. 냄비에는 소로 추정되는 동물의 머리가 우려지고 있고, 병은 육수로 가득차길 기다린다. 즉 존재는 사물의 쓰임에 따라 절단되고, 그 사물에 들어차며 형체가 변형된다. 분방하고 가변적인 액체조차도 말이다. 즉 시간이 공간에 봉사한다. 시간은 공간을 변형시키기는커녕, 그 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적법한 수단인 ‘공장 시간’으로 얼굴을 뒤바꾸고 인류에게 닥쳐온다. 인류가 만들어낸 공장과 불가약적 시간이 스스로를 옥죈다. 그러나 인간을 해방시키는 새로운 이념이 도래한다.     

 

표토르는 지리학자로서 지도를 제작한다. 물론 ‘지리’는 객관적이다. 그러나 ‘인간에 의한 지도’는 무엇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부각할 것과 부각하지 않을 것을 선별할 수 있다. 식당에 본래 걸려있던 지도가 내려가고, ‘아나키스트의 지도’가 투표를 통과하여 걸리게 된다. 그 지도에는 공장시간을 위한 지리가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장소들이 부각되어 있지 않을까? 공장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공간을 따라갈 때, 비로소 인간의 얼굴이 ‘보인다.’ 인간을 제한하고 붙잡는 공장시간 및 사진 기술의 보편화 이전에, 사람들은 어떤 사물의 조력도 없이 그저 ‘얼굴 자체’만 포착되었다. 영화의 도입부, 사진을 찍기에 앞서 기다리는 귀부인들이 대화를 나눈다. 사회주의,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등 19세기에 태동하고 충돌한 구 이념과 신 이념을 여러 갈래로 논의한다. 여성들은 답을 내리지 못한다. 인간이 처한 상황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완전무결한 단 하나의 이념이란 없다. 인간이 필요에 따라서 이념을 유동적으로 선별하는 ‘대화의 불확정성’과 사물의 완고한 목적에 좌우되지 않는, 어떤 행동과 발화를 할지 알 수 없는 ‘불확정적인 인간을 조명한 클로즈업’은 서로 맞물린다. 영화 결말의 조세핀과 표토르도 그렇다. 지금까지 본 작품에서 분명 사람들이 포착되기는 했다. 그렇지만 9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중에서 도입과 결말을 제외하고 인간은 언제나 조연, 단역에 그쳤다. 영화의 주연은 '공장시간'이기 때문이다. 공장시간에 의한 부수적인 인류는 소외되었다. 공장시간을 위한 목적으로만 그들의 얼굴을 알았다. 그러나 영화의 마무리를 앞둔 5분가량에서 본 작품의 주인공이 비로소 인간 조세핀과 표토르로 바뀐다. 85분간 내내 모르고 있던 두 남녀는 겨우 서로를 알게 된다. 사물이 인간을 대신 말하던 ‘종으로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물을 말로써 설명하고 지배할 수 있는 ‘주인된 인간’을 알아간다. 조세핀은 공장시간을 멈췄다. 영화 내내 똑딱똑딱 들려오며 공장시간을 암시하던 시계 초침 소리가 인류를 지배하였으나, 비로소 시계의 음향이 중단되고 자유로운 인간의 발화가 제자리를 찾는다.     

 

이렇게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요소는 ‘음향’이다. 공장이나 우체국 음향에 반영되는 ‘시간’과 '숫자'는 노동자들의 업무나 행동을 결정하고, 이는 시각과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 영화 후반부, 마을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을 색출하는 법안을 통과했고, 이에 따라 공장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을 찾아내어 해고한다. 법안을 외치는 청각에 따라서 본래 일하고 있던 노동자들은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시청각이 일치한다. 그런데 본래 시청각은 항상 일치할 필요는 없다. 시각은 여기 있어도, 청각은 저기를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법이 시청각을 일치시키며 가능성을 축소한다면, 시청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며 저 너머를 가리킬 때 가능성이 확장된다. 쇼이블린은 인간을 제한하는 시청각으로부터 무한한 시청각을 해방한다. 노동자들은 비록 몸은 공장에 속하더라도 전보나 신문으로 접한, 시각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미국의 파업이나 파리 코뮌 이야기를 한다. 지금 여기에서 자아낼만한 음향은 ‘일하는 소리’지만, 지금 여기 너머를 외친다. 마을의 노동자들은 지금 여기 너머의 미국 무정부주의자들과 연대하고, 노래하며 자유를 되찾으리라. 그러나 그 희망이 21세기에 실현되었을까, 과연 바라던 청각에 닿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도즈 후 아 파인>은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에 대한 답변이 아닐까 싶다.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인간이 규정하고 따르지 않을 시 처벌을 내리는 공장시간, 교회시간, 현지시간, 도시 시간이라는 거대한 불가약적 시간을 쇼이블린은 감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불가약적 시간이 봉사하는 사물에 의한 인간 소외, '주연 박탈', 혼탁함을 촬영으로써 가시화한다. 영화다운 고유한 연출로 감상자에게 갑갑함, 서늘함이란 파장을 일으킨다. 아주 현대적인 <모던 타임즈>라 볼 수 있는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는 여전히 꿈꾼다. 찰나만을 붙잡는 사진에 담긴 노동자라는 단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산업화의 매연과 연기를 벗겨낸 변화무쌍한 얼굴을, 이로써 때로 보이지 않는 '여백'으로 말하더라도 생존할 수 있는 인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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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327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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