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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r 31. 2023

앤 조라 베라치드, <나의 연인에게>

여성의 블랙아웃 숏

앤 조라 베라치드(Anne Zohra Berrached), 

<나의 연인에게>(Copilot) - 여성의 블랙아웃 숏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3995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지금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평화는 가능한가?” -베티 리어든-

2001년 9월 11일, 뉴욕을 대표하던 상징적인 건축물 쌍둥이 빌딩이 검은 불길에 휩싸여 붕괴한다. 원인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조종하던 비행기 충돌로서, 본 사건이 전 세계에 경악을 안겨다 준 ‘9.11 테러’다. 미국이 중동으로 패권을 확장하는데 반감을 품은 원리주의 무슬림들은 역으로 그들이 미국을 지배하고, 미국인들이 공포에 벌벌 떨게 하고자 테러를 감행했다. 그런데 9.11 테러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것일까, 과연 전조 증상은 없었을까? 여성학자 베티 리어든은 가부장제에서 여성이나 아이들, 약자를 지배하는 남성 가장의 입김이 스멀스멀 사회로, 국제적으로 불어온 결과가 테러나 전쟁이라고 분석한다. 즉 9.11 테러가 발생하기 전부터, 끔찍한 비극의 주도자들은 타인을 지배하는 예행연습을 해왔을 것이다. <나의 연인에게>는 9.11 테러리스트가 자신의 연인에게 가했을 바로 그 예행연습을 상상해보는 작품이다. 이를 연출하는 1982년 에르푸르트 태생의 앤 조라 베라치드는 독일의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여성 감독으로서 지금껏 남성 감독들이 조명하지 않던 여성들의 몸, 가부장제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초에 주목한다. 그녀는 데뷔작 <투 머더즈>에서 여성이 겪는 인공수정 과정을 상세하고도 적나라하게 포착하며, 그간 몰랐던 여성의 몸과 수모를 밝힌다. <24주>에서는 임신중단 딜레마에 처한 여성의 고민을 상세하게 조명한다. 그녀들의 몸이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 또 고민하는 이유는 가부장적인 법에 의해서다. <투 머더즈>에선 이성애자 부부를 표본으로 삼는 인공수정 제도에 의해서, 레즈비언 커플은 고충을 겪는다. 레즈비언 커플은 변호사나 공무원이 판단하는 수입 기준에 의해서 임신이 결정되는데, 그 검열을 이성애자 커플은 겪지 않으며, 법은 성 지향성에 따른 차별을 공식화한다. 이성애 중심적인 법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레즈비언 커플은 변두리로 몰려나 민간 남성의 도움을 받는다. 이후 정자 제공자와 임신한 여인이 더 친밀한 유대감을 맺는, 이성애 중심적인 제도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지만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레즈비언이 이성애자로 전락하는 비애를 담아내었다.      


<24주>에서 주인공 아스트리드는 코미디언이다. 임신한 그녀는 어머니가 될 예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태아의 다운증후군을 확인하고, 엎친 데 덮친 격 태아의 심장에도 문제가 있어 아기는 태어난 직후 중대한 수술을 받아야 한다. 아스트리드는 숭고한 임신과 출산, 그 이후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지만, 현실은 이를 배반한다. 현실이 비극 그 자체라면, 그녀는 이를 어떻게든 극복하는 희극인으로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본 과정에서 남성인 연인 마르쿠스가 여성의 몸에서 발생하고, 여성이 주체적으로 결정해야할 사항에 개입한다. <24주>의 초중반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여성의 심리에 집중하나, 중후반부턴 남성이 개입하는 구조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베라치드 작품 속 여성들의 몸은 전쟁터다. 자신의 의지와 남성의 월권이 충돌하고, 후자에 의해서 좌지우지 될 위기에 처한다. 이렇게 베라치드는 그녀들의 몸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딜레마를 다룬다. <투 머더즈>에서 레즈비언 커플의 엄마 되기는 여성 둘이서 할 수 없는 일, 태아가 찾아와야 하고 정자 기증자가 있어야 함에, 타인을 필요로 한다. <24주>에서의 결정도 단순히 나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태아 또한 고려해야 하는 일임으로 쉽지가 않다. 하지만 여성들은 결국 제 자신이 바라는 결정을 내린다. <투 머더즈>에서 소외된 연인의 씁쓸한 마음과 엄마가 될 기대에 벅찬 연인은 각기 다른 프레임에 놓이며 각자의 감정을 표출하고, <24주>에서도 그녀는 마르쿠스나 타인에게 구애받지 않고 솔직한 자기 결정권을 지향한다. 그리고 여성 모두가 천편일률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여성들이 지향하는 결정은 각기 다르다. <투 머더즈>의 커플은 <24주>에서도 등장하는데 아스트리드와 유사한 상황에 처했다. <투 머더즈>에서 <24주>로 이어진 커플은 '엄마 되기'가 최우선이기에, 코미디언이기도 한 아스트리드와 달리 출산을 선택한다. 이렇게 여성의 자유로운 선택과 삶을 천명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베라치드는 신작 <나의 연인에게>에서 어떤 여성과 어떤 이데올로기를 비출까?      


그 여성, 아슬리는 영화 내내 아주 거대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광활한 화면비라 해도 과언이 아닌 2.35:1에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이나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빼곡하게 담아내기 때문이다. 프레임에 그녀의 얼굴이 꽉 들어찬다. 더욱이 영화에선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포착하는 연출과 그녀가 외부를 바라보는 ‘시점 숏’이 교차된다. 그래서 영화의 연출은 아슬리의 표정과 시선을 프레임을 한가득 채우며 오직 그녀만을 반영한다. 아슬리의 삶에 아주 충만한 형식, 그러나 영화는 왜인지 공허하다. 그 이유는 프레임 내에 물질인 아슬리의 얼굴은 가득하지만, 그녀의 정신은 항상 빈곤하기 때문이다. 아슬리가 가진 것이 오직 육체뿐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은, 그녀가 사이드에 의해서 베이루트의 시댁으로 가게 되었을 때다. 침실에서 쉬고 있는 그녀의 육체에서 영혼이 슬그머니 빠져나온다. 이후 아슬리의 육체가 영혼을 뒤따라가서 옷장을 열어보니 거기엔 아슬리의 영혼은 전무하고 사이드의 옷만 가득하다. 아슬리는 사이드가 입을 수 있는 ‘껍데기’로 전락하여 빈궁해졌다. 영화는 아슬리가 영혼을 잃고 껍질만 남는 과정을 담아내는데, 이는 처음에는 가족에 의해서, 이후에는 사이드에 의해서다. 하필 그녀는 사이드가 가까이 있었으면 싶다. 그것이 그녀의 욕망이자 바람이다. 그러나 욕망이 성취되면 영혼은 사이드에게 빼앗겨 공허해지고, 한편 아슬리가 영혼을 되찾으면 그녀의 시점 숏에서 사이드는 멀어져가며 육체의 욕망이 불만족스럽다. 그래서 그녀가 가득 차 있지만 모순적으로 텅 비어 있고, 그녀와 아주 가깝지만 그녀만의 삶에 아득히 먼 ‘딜레마’에 빠진다. 어떻게 해도 그녀 자신으로서 꽉 차지 않는다. 그녀 삶이 자신에게서 까마득하게 먼 이유, 여성이 제 영혼을 박탈당하는 이유를 베라치드는 영화의 원제인 항공기의 '부조종사'를 의미하는 ‘copilot’을 인용하며 고찰한다. 여성은 조종사의 능력을 타고 났다. 도입부, 조종사가 되길 꿈꾸지만 겁이 많은 사이드는 하늘을 나는 놀이기구에서 불안해하며 하차한다.      


반면 아슬리는 용감하게 놀이기구에 탑승한다. 아슬리는 흡사 '조종사의 구도'인 하이앵글로 사이드를 내려다보며 사랑을 싹틔운다. 또 아슬리는 사이드에 의해서 플로리다에 간다. 거기서 사이드는 드라이브를 시켜주는데, 지붕이 탁 트인 스포츠카에서 아슬리는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서서 시원한 공기를 만끽한다. 사이드는 그녀가 혹 잘못되지 않을까 불안해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성이 안전하게 앉히지 않아도 충분히 혼자 서서 자신을 운전할 수 있다. 이후 사이드는 아슬리에게 비행기를 태워준다. 그는 자신이 조종사 자격증을 땄음을 그녀에게 증명한다. 이윽고 사이드가 비행을 하다가 슬그머니 제 손을 떼고, 아슬리가 조종간을 잡게 하여 운전하게 한다. 아슬리는 불안하다. 하지만 그녀는 사이드에게 기대지 않더라도 충분히 안정적으로 비행한다. 스스로도 제 삶을 운전할 수 있는 아슬리는, 그녀를 조종해줄 사이드 가족의 재력 때문에 교제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부장제에서 조종사 여성이 승객 남성을 사랑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사이드는 아슬리와 결혼을 약속하자 자기 가문의 재력이 충분하니 경제적으로 기대라고 말한다. 이후 그녀의 가족이 레바논에서 열릴 결혼식에 참석할 비용을 대주겠다고 말하며, 그에 의해서 아슬리 가족의 위치가 조종된다. 이후 사이드는 편지에서 아슬리를 '나의 부조종사'라고 호칭한다. 충분히 조종사인 여성은 남성과 사랑하며 부조종사로 전락한다. 사이드와 교제하는 아슬리는 항상 그의 ‘목마’를 탄다. 조종사로서 그가 부조종사 내지는 승객인 그녀를 비행시켜주고, 아슬리가 착륙해야 할 곳을 결정한다. 조종사인 그는 아슬리와 상의도 않고 베이루트 행 ‘항공권’을 제공하고, 그녀는 선택할 겨를도 없이 그에 의해서 베이루트에 가야만 한다. 사이드는 부조종사인 아슬리에게 날개, 곧 '양 팔'을 펴라고 지시한다. 조종사가 부조종사의 몸을 좌우한다. 또 아슬리는 어머니에게 사이드를 소개할 준비가 아직 안 되었다. 어머니는 민족적·종교적 차이로 사이드를 맹렬하게 반대한다. 그래서 사이드에게 아직 때가 아니라며 소개를 미루자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부탁을 무시하고 아슬리의 어머니에게 자신을 소개한다. 아슬리는 충분히 조종사로서 자립할 수 있다. 의학도인 아슬리는 대학교에서 남성 의학도들의 모범이 될 정도로 연구 성과가 좋다. 암 치료에 대한 획기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인재라며 촉망받는다. 그렇게 주체적인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아슬리는 사이드에게 휘둘린다. 베라치드는 여성이 수동적인 부조종사로 전락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일단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것 또한 주체적인 자유이긴 하다. 아슬리의 어머니는 자신이 중매를 서서 그녀의 혼사를 결정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어머니 및 가족에 의해서 제 인생이 좌지우지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녀의 마음은 오직 사이드에만 향한다. 그녀의 눈에 상응하는 시점 숏은 항상 사이드를 졸졸 따라다닌다. 그녀는 그가 보고 싶다. 사이드가 결혼식 사회를 보기 위해서 자신의 곁에서 풀숏으로 멀어지는 것을 시점 숏으로 좇고, 예멘이나 플로리다에 가기로 결정하며 아슬리가 머무는 프레임 바깥으로 그가 사라지는 것이 애달프다. 아슬리가 사이드를 애달프게 기다리는 이유는 그녀에게 '짜릿하고 황홀한 감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육체가 그를 열망한다. 지상에만 있으면 따분하다. 딱딱하고 거친 감촉, 더욱이 의대생인 아슬리는 대학교 연구실에서 대지의 촉감과 유사한, 말라비틀어진 주검들을 연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을 뛰어넘어서 바다로, 하늘로 향하고 싶다. 건조함 대신에 촉촉함을, 딱딱함 대신에 말랑말랑함과 부드러움을, 구속 대신에 부력이나 해방감을 느끼고 싶다. 아슬리의 육체는 이를 열망하고, 그녀의 욕망을 충족해주는 존재가 바로 사이드다. 부드럽고 촉촉한 피부를 가진 사이드는 하늘과 인접한 옥상에서 아슬리와 애정을 키워간다. 사이드는 거무튀튀하고 삭막한 주검과 달리, 알록달록한 ‘종이 공예’ 사이로 비쳐져 신비롭고 아름답게 보인다. 관계가 진전되자 바다에서 데이트를 하며 아슬리의 피부에 닥쳐오는 생생한 물살을 느끼게 해준다. 이후 드라이브를 시켜주며 쾌속과 바람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 목마를 태워주거나 비행을 시켜주는 등 푸르른 배경 위에 그녀를 살포시 놓아주는 존재가 바로 사이드다.  


영화에선 주로 앞선 숏에 아슬리의 몸이 바라지 않는 삭막한 일상이 담겼다면, 이후 숏에서 특별한 사이드가 등장하며 그녀 몸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에, 대비되는 편집 속에서 사이드는 더 반짝거리고 신비롭게 아슬리 눈에 비친다. 그녀 육체는 그가 자신의 곁에 있기를 조종하고 싶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할 것을 강제하는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사랑을 솔직하고도 주체적으로 싹틔웠다 한들 결코 남성과 동등하지 않게 흘러간다. 여성이 조종사로서 사랑을 시작하더라도, 남성은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여기지 않는다. 아슬리는 사이드와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계속하면서도 육체는 간간이 행복하다. 그녀가 선택한 것, 여전히 끌리고 바라는 것이므로. 그러나 육체는 행복할지언정 조종사 남성은 부조종사인 여성의 영혼, 정신을 앗아간다. 남성이 여성을 좌우하는 가부장제 내에서 여성의 사랑은 육체를 대가로 정신을 내놓아야 한다. 즉 여성이 부조종사로 전락하는 첫 번째 이유는 가부장제 내 여성 사랑의 딜레마에서 비롯한다. 또 다른 이유, 아슬리는 그토록 주체적인 여성은 아니다. 해를 거쳐 가며 보다 주체적으로 성장해가지만, 첫해만 하더라도 사이드와 어머니 양자 모두에게 휘둘렸다. 그녀는 충분히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서부터 배정받은 또 다른 조종사인 '아버지'에게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일 것을 교육받는다. 즉 어려서부터 여성을 승객이나 부조종사로 양성하는 구조가 두 번째 이유다. 비록 아슬리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권위를 빌려서 "이런 모습을 아빠가 허락하시겠니!"라며 딸을 검열하는 어머니의 질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버지, 남자 친구, 남편이라는 조종사는 그렇게 여성을 부조종사로 주저앉힌다. 지배하는 그들은 여성의 공간과 언어를 좌우한다. 먼저 공간이다. 일단 사이드 이전, 아버지의 후광을 빌린 어머니는 아슬리가 독일에서 지낼 거처를 제공해준다. 어머니는 아슬리가 다른 자매들 내지는 여성 룸메이트와 함께 지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아슬리가 폭탄 발언을 한다. 남성 룸메이트 사이드와 지낸다며 말이다.    


남자 친구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지만 룸메이트가 남성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어머니는 분개한다. 아슬리는 벌벌 떤다. 어머니가 말하는 것처럼 저승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을 만한 일'이요, 어머니에 의해 좌우된 공간을 위협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슬리는 성인이다. 성인들은 자립하여 자기만의 공간을 꾸린다. 사이드와 그의 친구 파레스는 독일 유학을 원치 않았다. 사이드는 치의학과 진학 대신 항공학과 진학을, 파레스도 대학을 때려치우고 식당을 차리고 싶다. 지금까지 모두 부모에 의해서 좌우된 삶,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성인이기에 사이드는 조종사가 되기로, 파레스는 식당을 차리기로 결심한다. 그 남성들처럼 아슬리도 어머니가 마련해준 공간에서 벗어나 자립한다. 하지만 아슬리는 망자가 된 아버지의 영향을 걷어낸 대신, 사랑하는 새로운 가장 사이드의 지배하에 놓인다. 남성과 달리 여성은 자립하여 공간을 결정할 수 없다. 대학에 있던 아슬리는 사이드가 선호하는 공간인 ‘모스크’에 '히잡'을 쓰고 간다. 조종사로서 여성이 아닌, 남성에 의해서 신분을 은닉하는 여성이 된다. 아슬리는 형식적으로 자립하자마자 사이드를 찾아서 함부르크에 간다. 이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이드의 항공권에 의해서 베이루트로 가게 되고, 그를 찾기 위해서 독일로 돌아와 다시 모스크로 향한다. 이후에는 플로리다로, 사이드가 9.11테러를 주도한 이후에는 경찰서로의 발걸음이 반강제된다. 남성에 의해 그녀가 있어야 하는 공간이 결정된다. 조종사 남성이 여성을 착륙시킨 공간에서 여성은 심지어 잘 보이지 않는다. 일단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기 전에는 창문을 열고 화사한 햇빛을 만끽하며 그녀의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사이드와의 교제를 은닉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그늘로 향하며, 진실이 어둑해진다. 사이드와도 마찬가지다. 사이드는 파레스와 함께 폐가에서 창문을 봉해놓은 판자를 떼어내어 새하얀 빛이 가득 들어오게 만든다. 이로써 창문 부근에 있는 자신을 훤히 비춘다. 조종사로서 자기 마음대로 비행하는 남성들은 항상 자연광이 풍부한 창문 부근에 위치한다. 그들은 언제나 창구나 통로를 통해서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며, 그들의 자유를 '밝힌다.'      


그러나 사이드와 함께 있더라도 아슬리는 항상 어두침침한 그늘에 위치한다. 사이드에 의한 아슬리는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외부로 향하는 사이드와 달리, 아슬리는 어두컴컴한 실내에 주로 머문다. 남성은 외부로 향해서 식당을 차리기도 하고 조종사가 되며 사회적으로 위신을 드높인다. 그러나 아슬리가 바깥으로 향하는 일은 시댁에 가거나 사이드를 찾으러 다니는 일을 제외하고는 전무하다. 사이드는 아슬리에게 좌우되지 않은 채로 제 삶을 비행한다. 반면 보통의 아슬리는 집에 찾아온 사이드가 언제든지 볼 수 있게끔, 흡사 그가 소유한 사물처럼 집에서 그를 얌전히 기다린다. 아슬리는 사이드가 보고 싶은 대상이어야만 한다. 사이드가 영영 사라진 줄 알았던 4년차에야 의대생으로서 제 삶을 조종하는 아슬리가 대학에서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즉 프레임을 꽉 채웠던 아슬리의 얼굴이 곤궁하고 텅 비어 보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은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오직 물질뿐이다. 원하지 않은 공간에 가득 찬 그녀의 얼굴에서 영혼은 빠져나가 있다. 그 얼굴은 '자기 언어'를 말하지 못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아슬리는 대학 동기들과 '진실 게임'을 했다. 그녀는 오직 그 순간에만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항상 자신을 '거짓말'한다. 아슬리는 튀르키예어로 엄마와 대화한다. 엄마는 아버지의 위신을 빌려서 딸의 인생을 통제한다. 아슬리는 어머니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진실을 말했을 시 닥칠 여파를 감당하기 어렵기에 사이드와의 관계를 거짓말로 일축한다. 아슬리는 튀르키예어를 잘 구술할 수 있다. 튀르키예어로 교제 사실을 밝힐 순 있다. 그러나 그 언어로 제 사실을 구술해선 안 된다. 망자가 된 가장 아버지의 권위를 빌린 어머니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는 가짜 발화만 가능하다. 튀르키예어로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가능하지 않다. 영화의 끄트머리까지 어머니에게 사이드와의 관계를 밝히지 못한다. 가장은 식구들이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을 구분한다. 여성은 이를 약속했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아슬리는 영어나 독어로 말하는 사이드는 잘 안다. 영어나 독어로 말하는 사이드는 그녀에게 '보고 싶었어', '사랑해', '이젠 안착하고 싶어'와 같은 달콤한 말을 내뱉는다. 그녀와 많은 아이들을 낳아서 북적거릴 '미래'를 예견한다. 그러나 사이드는 이와 동시에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랍어'도 구사하는데, 영어나 독어로 말하는 내용과 아랍어에 담는 내용이 다르다. 사이드가 어머니와 아랍어로 통화할 때, 치의학과 진학은 그의 뜻이 아니라 어머니의 바람임이, 사실 그는 '조종사'를 바랐다는 진실을 고백한다. 이 사실은 영어나 독어에는 담기지 않았다. 그는 영어나 독어로는 연기한다. 도입부에서 아슬리가 가르쳐준 '기절 게임'을 사이드가 시도할 때, 그는 기절하지 않았음에도 쓰러진 척 한 것처럼, 다만 듣기 좋은 대사를 구술할 뿐이다. 이후 사이드는 아랍어로 소통하는 익명의 누군가와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통화하며 아슬리 몰래 예멘으로 갈 꿍꿍이다. 예멘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진실이 영어나 독어에는 담기지 않는다. 문제는 사이드가 아슬리를 영어와 독어로 구슬려놓고, 정작 결혼, 맹세, 약속 등은 자기만 아는 아랍어로 체결한다는 점이다. 아슬리는 영어와 독어를 쓰는 사이드를 믿었지만, 정작 그녀가 해독할 수 없는 '아랍어 서약' 아래서 그와 결혼한다. 사이드가 그녀에게 서약한 맹세를 해석은 해주지만 번역해준 바가 맞는지 그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윽고 그녀가 확인하지 못한 약속은 아슬리를 부조종사로 전락시킨다. 아슬리가 함부르크에 머무는 사이드를 찾으러 간 당시, 그와 친구들은 그녀의 흡연을 영 못마땅해 한다. 자기들끼리 아랍어로 속닥거리며 흡연에 관한 회의를 마치고 그녀에게 금연을 통보한다. 또 사이드가 원리주의 이슬람에 경도되어 파레스와 다툴 때, 그의 부조종사인 아슬리는 맹목적으로 부군의 주장에 찬동한다. 하지만 아슬리의 속마음은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이드가 플로리다로 떠난 이후 아슬리는 남편 때문에 토라진 친구들과 재회하는데, 친구들의 주장과 자신의 뜻이 크게 엇갈리지 않았기 때문에 만나는 것이랴. 하지만 사이드와의 맹세에 의해서 그렇게 말해야만 했다.      


또 아슬리는 사이드가 예멘에 갔다는 사실을 시댁에 영어로 구술할 수 있다. 그러나 사이드와 결혼하며 맺은 맹세에 의해서 말할 수 있는 그녀는 말할 수 없게 된다. 이후 사이드가 9.11 테러를 일으킨 이후에는 경찰서에 가서 그를 구술하는 ‘입’이 반강제된다. 즉 사이드는 겉으로는 아슬리의 바람을 헤아려주는 척 위장하지만, 실제로는 보이는 것과 상반된 조항을 여성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체결한다. 사기를 당한 여성은 이후 부조종사로 전락하여 공간과 언어를 조종사 남성에게 전면 빼앗긴다. 그래서 아슬리가 바라는 삶은 남성이 공간을 옮기거나 언어를 박탈함에 자꾸 '끊기곤'한다. 베라치드는 자유롭게 연속되지 않는 여성의 삶을 편집으로 보여준다. 아슬리가 사이드와 사귄 5년을 년도 별로 나눈 5장 구성의 본 작품에선, 이전 장에서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 당혹스럽게 어둠이 내려앉는 블랙아웃 숏이 활용된다. 블랙아웃 숏은 보이던 것을 보이지 않게, 이전 장과 다음 장을 어둠으로 가로막고 차단한다. 단순히 형식만 그런 것이 아니다. 블랙아웃 이후의 아슬리는 항상 이전 숏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1장의 말미에서 아슬리가 바란 것이 2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슬리의 바람인 진실한 연애 대신, 친구의 결혼이 연결되고, 1장의 아슬리는 어둠으로 차단된다. 3장에서 4장으로의 연결도 마찬가지다. 사이드가 실종된다. 아내이자 며느리로서 시달리던 아슬리는 다시 의대생이 된다. 사이드의 아내인 상태에서 의대생 아슬리는 거의 포착되지 않았다. 사이드가 사라진 이후 블랙아웃을 통해서, 아내로서 아슬리는 단절되고 의대생으로서 아슬리로 회귀한다. 아내 아슬리와 의대생 아슬리는 공존할 수 없다. 사이드의 유/무에 둘 중 하나는 이후로 연결되지 못하고 거칠게 차단된다. 4장에서 5장으로, 또 5장 내에서도 블랙아웃이 발생한다. 4장에서 사이드는 돌아왔지만 그는 항공학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플로리다로 떠나겠다고 통보한다. 그래서 사이드의 귀환에 아슬리가 기대했던 안정적이고 평온한 가정에 대한 꿈이 무너진다. 사이드와 함께 있었던 아슬리는 블랙아웃으로 단절되어 이후 홀로 남는다.      


사이드가 사라지니 1장의 바다에서 그가 아슬리를 목마 태워주던 장면은 불연속된다. 대신 차가운 겨울 바다를 홀로 수영하는 그녀로 이어지며 두 연인은 분단된다. 즉 블랙아웃은 아슬리가 바라는 삶을 단절한다. 한편 유일하게 2장에서 3장으로의 연결은 페이드아웃이다. 서서히 부드럽게 사라졌다가 다시 조심스레 나타나는, 흡사 두 숏이 녹아들며 중첩되는 디졸브처럼 섞어든 전후가 연속된다. 희소한 페이드아웃은 2장에서 결혼을 마치고 눈을 살포시 감는 아슬리와 3장의 아기 탄생을 이어낸다. 그녀가 바라는 삶은 항상 거칠게 단절되지만, 남성에 의한 여성인 ‘아내’와 남성과의 결과물인 ‘아기’는 여성에게 부드럽게 연속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여성의 블랙아웃 숏은 남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성이 조종사 남성을 끊어내며, 이로써 조종사 여성을 회복하는 양식이 되어야할 것이다. 5장 말미, 어머니가 아슬리에게 사이드를 아냐고 질문한다. 하지만 아슬리는 답하지 않고 블랙아웃 숏이 출현한다. 이후 그와 함께 하던 시절의 긴 머리를 짧게 친, 전혀 다른 용모의 그녀가 나타난다. 조종사로서의 그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슬리는 그 능력을 충분히 타고 났다. 사이드가 빈털터리에 패자가 되어 집으로 되돌아왔을 때, 아슬리는 이제 역으로 사이드를 지배한다. 술 먹기를 꺼려하는 사이드에게 술을 강요하고, 또 그가 밤 외출을 삼가 하라고 당부해도 뿌리치고 밖에 나가 술에 진탕 취한다. 아슬리는 실내에서 외부로 나감과 더불어, 충만한 빛이 내려오는 창가에 위치한다. 그녀는 사이드가 유약해도 충분히 혼자서 제 인생을 조종할 수 있는 존재, 자유를 밝힐 수 있는 존재다. 물론 그 자유는 세차게 흔들림에 불안정한 반면, 사랑은 스테디캠을 이용한 트레블링 숏처럼 부드럽고 안정적이다. 영화는 핸드 헬드와 스테디캠에 의한 안정적인 카메라 워킹이 오간다. 평소에 카메라 워킹은 핸드 헬드, 즉 가냘픈 팔과 손이 카메라를 겨우 붙잡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쉴 새 없이 흔들린다. 그런 와중 사이드는 아슬리에게 드라이브나 비행을 시켜준다. 본 시퀀스에서 카메라가 스테디캠에 올라타며 안정적으로 변한다.      


즉 핸드 헬드가 불안정과 역경이라면, 스테디캠은 사랑이 가져다주는 안온함과 평화로움이랴. 그러나 사이드와 사랑할 때도 핸드 헬드는 항시 등장했다. 사이드의 행방에 대한 질문공세를 받으며 시댁에서 시달릴 때, 사이드가 아슬리의 담배를 거칠게 빼앗으며 통제할 때, 아슬리가 애타게 사이드를 찾아다닐 때 말이다. 남성과 함께 있어도 흔들린다. 오히려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세찰지 모른다. 그 핸드 헬드를 여성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5장 초입에서 아슬리는 겨울 바다에 풍덩 빠진다. 본래 바다에는 사이드가 함께 있었으나, 지금 그는 플로리다로 사라져 아슬리 홀로 남았다. 그와의 공간, 하지만 홀로 바다에 있더라도 아슬리는 겨울 바다에서 첨벙거리며 차가움을 감당한다. 스스로의 핸드 헬드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아슬리를 사이드는 사후에도 좌지우지한다. 그녀가 암 연구를 하기 위해 가야하는 보스턴 대신, 사이드를 증언하고 유품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되듯, 죽은 그가 남긴 편지로 그녀를 옭아매듯 말이다. 그러나 사이드는 검은 불길로, 죽음으로 뛰어들지만, 아슬리는 병원에 가서 호흡기 질환을 검사하고 치료한다. 조종사 없이 부조종사 여성 혼자 남는다 한들, 죽어가는 남성과 달리 살아남은 여성의 길을 홀로 개척할 수 있다. 베라치드는 사이드가 9.11 테러로 사망한 직후, 창문을 열고 크게 호흡하는 아슬리를 주목하는데, 이처럼 남성 조종사가 사라지며 여성 부조종사는 조종사로 거듭나고 제 호흡을 회복한다. 물론 유혹에 빠진다. 영화 말미, 4중 거울이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아슬리의 육체가 네 개로 복사된다. 왜 하필 네 개일까. 영화에서 블랙아웃 숏이 활용된 숫자도 넷에 가깝기에, 블랙아웃 숏이 개입하며 박탈당한 그녀 영혼의 개수가 네 개이리라. 조종사 남성에 의해 박탈당한 네 영혼의 시선은 편지 대신 제 육체로 향한다. 영혼은 사이드에게 빼앗긴 자신의 육체를 돌려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아슬리의 육체는 여전히 편지를 바라본다. 보고 싶은 그가 기다린다는 멜라네시아에 유혹된다. 하지만 사이드를 위해 선택하면 죽음, 설령 죽지 않더라도 유품을 전달하러 온 사람들이 말하듯 주체적인 삶은 영영 불가능할, 죽음에 필적한 삶이 이어질 것이다. 

즉 남성의 유혹을 뿌리쳐야 여성은 살 수 있다. 베라치드는 분명히 여성의 솔직한 에로스(육체적 사랑)에서 자유를 출발했다. 그러나 가부장제는 남성이 조종사되기로, 여성은 부조종사되라고 양성하고 강제한다. 그래서 정신도 세뇌되거니와, 육체 또한 자유롭게 출발했을지언정 가부장제 안에선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사이드의 할머니가 "좋은 여자면 남자의 행방을 알아야지!"라고 다그치듯, 남성의 책임조차도 여성의 몸과 영혼에 전가된다. 정작 그 여성은 어떤 선택도 내리지 않았는데 말이다. 조종사로서 남성은 여성의 공간과 언어를 다각도로 파멸시키며 테러 예행연습을 한다. 그래서 여성은 가부장제를 깨트릴 수 없다면 육체적 자유를 포기하고 남성에게서 멀어져 정신적 자유를 선택해야 하리라. 아슬리의 육체는 고민한다. 그러나 충분히 옳은 선택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편지를 제외한 유품은 다시 돌려주고 ‘그에 의한 공간’에서 황급히 빠져나가듯, '사이드에 의한, 그를 아는 여성'에서 '그와 무관한, 그를 모르는 여성'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블랙아웃을 선택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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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329 롯데시네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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