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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06. 2023

앨리스 디옵, <생토메르>

어머니들의 진실

앨리스 디옵(Alice Diop), <생토메르>(Saint Omer) - 어머니들의 진실     

“아이를 갖지 않기로 선택한 이는 아이를 여럿 낳은 이보다 더 많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들만큼은 아이를 사랑한다.” -마셸 옹프레-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회에서 자애롭고 헌신적인 어머니상을 여성들에게 선동한다. 여성에게 한도 끝도 없는 이타심, 모성, 희생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음은 사실이나 여전히 사회 전반에 보편적이고, 불과 21세기 초반까지는 아주 유효했다. 어떤 여성에게 헌신석인 어머니 상은 자신의 꿈과 일치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여성에겐 자신과 아주 무관하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사회의 주문을 거부하는 '능동적인 여성'의 상은 고대 그리스에 있었다, 바로 ‘메데이아’다. 그 능동성은 남동생과 자식들, 정적 ‘살해’, 그 자체는 아니다. 살해 행위가 상징하는, 당대의 윤리·법을 거부하고 제 인생을 개척하는 '솟구치는 창조력'에 있다. 메데이아는 ‘강요된 어머니로서 여성’과 ‘능동적으로 욕망하는 여성’ 사이에서, 후자를 위해 분열을 일으키는 자유인이다. 여성학자 재클린 로즈는 메데이아가 '감히 품어선 안 되는 생각' 따위는 없는 여성, 욕정 또한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긴 여성이라 평가한다. 그럼으로써 가부장제가 강요한 어머니임을 거부하나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은 이아손은 제 방종을 위해서 그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메데이아에게 떠넘겼지만, 메데이아는 자신의 자유와 더불어 아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부모 없이 남겨질 자손의 불행을 깊이 헤아려 살인했다. 그렇게 남성에 의해 강제로 노역하게 된 어머니로서 여성이 돌봄 의무를 거부할 때, 사회 전체가 슬픔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가부장적 사회는 여성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지탱되고 있었기에, 메데이아는 자신에게 떠넘겨진 책무를 사회가 다시 가져가라고 꾸짖는 여성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기묘하고 중요한 여성 메데이아를 서두에 언급한 이유는 앨리스 디옵의 장편 픽션 데뷔작, <생토메르>에서 현대적 메데이아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법은 그녀들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고 ‘헌신적인 어머니’를 꿰맞추려 한다. 1979년 오네수부아 태생의 앨리스 디옵은 프랑스의 영화감독이다. 역사학과 사회학을 전공한 그녀는 파리 외곽에 거주하는 노동자, 난민의 삶을 다큐멘터리로써 기록하였다.      


세네갈 이민자의 딸로 태어난 디옵는 마찬가지의 처지와 삶을 공유하는 이민자들과 기록으로 연대한다. 디옵의 다큐멘터리는 ‘시네마베리테’로 분류된다. 그녀의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은 덜 개입한다. 그녀의 작품 <온 콜>에서 카메라는 진료소의 의사, 간호사, 환자들의 시선에 따라 구도와 위치가 결정된다. 기록하는 대상이 결정한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피사체의 움직임에 따라서 아주 간헐적인 틸트, 패닝만 허용되며, 이들의 진료가 끝남에 컷이나 페이드아웃이 발생한다. <우리>에서도 디옵은 카센터 노동자, 방문요양보호사가 먼저 움직이면 그 뒤를 따라나선다. 이렇게 감독의 주관이 아니라, 대상에 의한 객관적인 기록은 다이렉트 시네마의 기수,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영화와 닮아있다. 감독이 덜 개입하고, 영화와 무관하게 행동하는 의사와 환자들의 태도가 그렇다. 그런데 한 가지 차이는 와이즈먼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은닉되고, 디옵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나름의 존재감을 뽐낸다. 와이즈먼의 영화에서 촬영 대상은 카메라의 존재를 덜 의식한다. 카메라는 영화가 다루는 공간의 본래 일원이었던 것처럼, 능청스럽게 군중 사이로 스며든다. 카메라는 함께 일하거나 생활하는 구성원의 일부가 되어, 인위적인 존재감을 지운다. 그러나 디옵의 <온 콜>에서 의사나 간호사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이에 환자와 카메라만 남게 될 시, 환자는 카메라 렌즈와 어색하게 눈을 맞춘다. <우리>에서 노동자들은 시각적으로는 포착되더라도 말하지 않거나, 말한다 한들 업무와 관련한 발화만 쏟아내어 제 자신에게 소외된다. 이에 시각적으로는 진실을 담더라도, 청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진실은 오리무중이다. 그래서 청각의 진실을 기록하고자 디옵은 대상에게 질문한다. 또 한 할머니가 카메라와 디옵의 존재를 궁금해 하기도 하고, 마지막 사냥 시퀀스에서도 마을 구성원은 디옵의 존재를 언급한다.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베리테의 차이는 ‘감독의 개입’이다. 다이렉트 시네마가 CCTV와 같은 태도를 지향한다면, 시네마베리테는 그 이름이 의미하는 진실의 영화를 위해서 촬영자의 개입, 대상과의 상호작용도 꺼리지 않는다.      


디옵은 카메라를 굳이 숨기지 않고, 카메라를 의식하는 대상의 어색함, 약간은 불편한 감정 또한 진실로서 담아낸다. 카메라의 존재를 어색해하는 환자들의 반응은 드러나고 노출되는 것이 어색한 난민, 유색인종이라는 위치, 이에 프랑스 주류로서 자신을 표출할 수 없는 억압을 반영한다. <온 콜>에서 파리 교외에 사는 이민자, 난민들은 진료소에 오기 전까지 고립되어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에서 말동무가 없고, 서류가 미비함에 분명 실존함에도 자신을 은닉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들은 카메라가 자신을 쏘아보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러나 디옵은 실존하는 게 그들의 진실이라면, 그 실존은 의료소와 연결되어 존재가 밝혀지고, 이를 포착하는 감독과 이어지며, 그렇게 카메라 너머의 감상자에게까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대체할 수 있는 단기 일용직을 전전하는 그들의 얼굴을 정기적으로 비추며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실존을 간직한다. 또 디옵은 서류로 대체되는 현대사회에서 종이에 선행하는 인류의 초상, 서류가 담지 못하는 그들의 눈물, 애환, 고통을 기록한다. 영화의 맨 마지막은 텅 빈 진료실, 사람이 없으면 공간이며 종이며 모두가 다 무용지물이니, 공간 및 서류라는 사물은 우선할 수 없고 먼저는 사람이다. <우리>는 기록과 연결, 관계의 의미를 곱씹는다. 카센터 노동자와 디옵의 관계, 그리고 방문요양보호사와 환자들의 관계는 '밝힘'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혼자 놓여있는 사람들은 망각, 소외에 빠져 제 진실을 드러낼 수 없으나, 상대방과 관계를 맺으면 타인은 커튼을 열어 숨겨진 나를 개방하고, 나의 망각 속에서 대신 기억해주는 등 말동무는 실존을 증명한다. 타인은 단순히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들추고 밝히는 빛이다. 이를 계기로 디옵은 자신의 오네수부아 시기의 기억을 회고하고 곱씹는 나레이션, 푸티지를 인서트하기도 한다. 기록 대상과의 접촉으로 감독 자신도 밝힌다. 디옵은 성당이나 추모관 등을 통해 먼 과거의 진실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백인들의 기록에 비해서 미비한 이민자의 기록을 자신이 몸소 수행한다. 즉 디옵의 다큐멘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실을 연결한다.      


이렇게 그간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던 디옵이 첫 번째 픽션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어떤 진실, 특히 어떤 여성의 진실을 매개할까? 또 문서화되지 않은, 틀에 가둬지지 않은 어떤 여성의 얼굴을 보존할까? 본 작품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프리미어 된 당시 아주 긴 호흡의 롱테이크로 주목을 받았다. 이는 작품에서 언급되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출법과 아주 흡사한데, 일단 디옵이 롱테이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영화의 롱테이크는 대체로 ‘고정된 카메라’가 창출한다. 가만히 머물러 있는 카메라가 포착한 대상들은 영화를 상영하며 마르그리트 뒤라스 강의를 하는 라마와 이를 수강하는 학생들, 꿈에 붙잡힌 라마, 재판장에서 과거를 진술할 때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미 완결된, 물론 해석의 여지는 열려 있지만, 사태는 종결되어 사실의 객관성 자체론 더는 변화하지 않는 ‘과거’라는 점이다. 흐르는 현재와 달리 멈춘 과거를 포착할 때 카메라는 마찬가지로 부동한다. 그것을 롱테이크로 담아낸다. 롱테이크로 구성된 시퀀스의 운동은 숏 내부에서 부각된다. 여러 숏으로 구성되어, 각 숏을 오가면서 운동이 발생하는 시퀀스와는 상반된다. 그 롱테이크로 포착한 것이 과거다. 현재는 여러 다른 숏이 조합되듯 불특정하게 흐르면서 운동할 수 있지만, 종결되고 완결된 과거의 운동은 오직 과거 내에서만 끝나야한다는 듯이 운동이 제한적이다. 즉 고정된 카메라와 롱테이크는 과거의 속성을 반영하나, 카메라는 영화 내내 멈춰있지 않는다. 오프닝에서 라마의 꿈인지, 아니면 앨리스를 죽이려는 로렌스인지 알 수 없는, 신원이 다소 불분명한 바닷가의 한 여인이 포착된다. 신원도 명확하지 않은데 파도 소리와 여성의 호흡, 아이의 호흡마저 겹쳐져, 음향조차도 이중, 삼중으로 뒤섞인다. 이로써 영화에서 반복 사용되는 단어, '애매모호'함이 강조된다. 사태가 완결된 과거인지, 아니면 변형 가능한 꿈이나 현재인지 식별할 수 없는 모호한 숏에서 달리가 사용되며 움직인다. 불특정한 시간, 공간, 신원일 때 운동은 비교적 자유롭다, 특정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또 라마가 어머니에게 방문할 때, 과거를 진술하기 이전 재판장이 현재를 정돈할 때, 라마가 재판장에서 혼란을 겪고 이후 밖으로 뛰쳐나갈 때,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집에 방문할 때 달리 숏이 사용된다. 이들 카메라 워킹은 과거에 구애받지 않고 분방하게 흐르는 현재를 반영한다. 본래 라마와 어머니의 관계는 삭막했다. 장-클로드나 다른 식구들이 초대하지 않는 이상 자의로 방문하지 않았다. 라마는 어머니에게 서운한 앙금이 남아 있는데, 그 감정을 촉발시킨 과거에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라마에게 어머니는 그 기억 속에 멈춰서 오직 서운함과 어색함만 허용된다. 그러나 어머니가 자신에게 모질게 군 이유가 어머니만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재판을 거쳐서 확인하고, 이후 마지막 시퀀스에서 라마는 과거에 붙잡혀 어머니와의 악연을 재생산하지 않고, 화해라는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낸다. 영화의 달리 숏은 대체로 아주 부드럽고 안정적이다. 그러나 라마가 재판장에서 뛰쳐나올 때, 카메라는 핸드 헬드로 변화하며 급박하게 흔들린다. 라마는 재판에서 혼란을 느꼈다. 세네갈에서 프랑스로 이민을 온 여성 로렌스는 프랑스에 정착하고 싶지만 오롯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렇다고 세네갈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이에 자신을 특정 가치 체계에 근거하여 확정할 수 없는 모호함이 도드라졌다. 그 어느 법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역사 속에서 규명된 백인 여성의 보편성은 누구나 동의할 만한 정설로서 라마가 학생들에게 강의할 수 있더라도, 아직 흑인 여성, 이민자 여성의 가치 체계는 덜 규명된 상태다. 그렇기에 로렌스가 백인 여성의 피해자성과 차이가 있는 도발적인 발화를 할 때, 라마는 자신이 아는 것에 비춰서 당황해하고, 흡사 기존의 믿음이 붕괴하듯 카메라는 흔들린다. 더욱이 이러한 솔직함을 가부장적인 가치체계가 악마화한다. 그래서 여성, 특히 이민자 여성은 딜레마에 빠진다. 솔직함과 타협의 불안정한 기로에서 카메라는 흔들린다. 그러나 라마와 눈을 마주친 로렌스는 아주 도발적인 미소를 날린다. 로렌스는 프랑스의 가부장적 가치·사법체계에 간청하기는커녕, 적나라하게 진실을 모두 고백했다.      


로렌스의 미소를 본 라마는 이후 감정이 북받쳐 올라 재판장 밖으로 뛰쳐나왔고, 이후 그녀에게 심경 변화가 생겼다. 즉 영화의 부동은 과거, 기존에 믿어오던 이데올로기의 고착화를 의미한다면, 안온한 것을 붕괴시키는 극심한 흔들림과 어딘가로 향하는 운동은 과거에 갇히지 않은 현재의 솔직함과 흐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엇에 솔직하고, 무엇을 흐르게 해야 하는가? 라마는 앞서 언급했듯 뒤라스 강의를 한다. 라마는 2차 대전 당시 적군과 매춘을 했다는 이유로 삭발을 당한 여성들을 기록한 푸티지를 영사한다. 본 장면을 용이하게 해석하기 위해서 여성학자 베티 리어든이 밝힌 가부장제와 전쟁의 메커니즘을 인용하고자 한다. 가부장제는 남성의 힘과 폭력,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언제나 취약한 존재를 필요로 한다. 불안정한 치안과 안보로부터 나약한 존재들을 지키기 위해 폭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부장제는 신체에 차이가 있는, 그러나 취약한 상태에만 머물 필요가 없는 여성들을, 더 나약하고 수동적인 상태로 퇴보시킨다. 남성들은 약하고 아픈 여성을 지킨다는 명목, 핑계로 폭력을 합리화한다. 보호가 명목인 힘으로 가정의 여성을 착취하고 지배하던 남성들은 그 공격성을 사회와 국가 전반, 심지어 다른 국가에게도 뻗쳐서 전쟁을 일으킨다. 취약한 것으로 평가되어 사회 진출이 불발된 여성은 정치적 발언권이 없음에 전쟁에 책임은 없고, 더욱이 가부장제가 사회 전반으로 확장된 군사주의적 국가는 모든 사회적 비용을 군인들, 곧 남성에게로 집중하기에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몫은 더더욱 현저히 줄어든다. 가부장제는 여성이 생존을 위해서 남성에게 해를 입더라도 묵묵히 의존할 것을 요구하나, 전시에는 여성의 목숨을 보장해줄 남성들이 사라지고, 이에 여성은 남성에게 할당된 사회적 비용을 자신이 거머쥐어 어떻게든 생존하고자 적군들과의 매춘을 결정한다. 바로 그 여성들이 남성에 의해 죄악시되어 삭발을 당한다. 이는 남성 없이는 죽어야 하는 피해자 여성, 경제활동이 불가능한 여성, 사회적 발언권이 없는 여성 등 가부장제가 ‘합법적’으로 규정한 여성상에서 반대로 ‘불법적’으로 행동한 여성을 벌하는 것이다.      


가부장제에 의한 피해자 여성, 남성에 의해 악마화된 여성을 라마가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라마가 가르친 이론이 실제로 재판장에서 이어진다. 뒤몬테와 남성 검사는 둘 다 동일한 주장을 한다. 로렌스를 향한 뒤몬테의 사랑은 순수했으나, 로렌스는 단지 그의 돈만을 노린 불순한 흑심을 품었다는 점, 로렌스가 뒤몬테에게 편집증적으로 집착했다는 것, 그녀가 애초부터 아이를 살해할 생각으로 뒤몬테에게 임신과 출산 사실을 명확하게 알리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러나 가정이 있는 뒤몬테 또한 로렌스를 순수하게 사랑하거나 임신을 반기지 않았으며, 사회적 비용이 남성에게 집중되는 가부장제 내에서 여성의 사랑은 필연적으로 순수할 수 없다. 로렌스는 가장인 아버지가 원치 않는 철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학비 지원이 끊겼고, 이후 뒤몬테가 자신의 등록금을 지원해주겠다고 하자 교제를 시작했다. 즉 여성은 남성에게 집중된 사회적 비용을 쟁취하기 위해서 불순한 사랑이 강제되지만 검사, 곧 사법체계는 그 불순한 사랑을 문제시하며 여성은 언제나 법적으론 ‘용의자’, 존재 자체론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고정된 채로 여성을 억압해온 가부장적인 가치 체계, 묵묵히 여성이 인내하며 수용해야만 했던 가장의 주장, 그러나 디옵은 영화 말미 검사의 마지막 발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칠게 잘라버린다. 디옵은 이전 작품, 본 작품 모두 다 대체로 대상의 행위와 발화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며, 자기 선에서 대상을 곡해하거나 뒤바꾸지 않고, 대상 스스로가 동의할만한 객관성 그 자체에 도달하려 했다. 그것이 디옵이 진실을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가부장제는 더 이상 찬동하지 않기에, 검사의 주장을 더는 기록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거칠게 잘라버린다. 가부장제의 완성이 아닌, 가부장제의 끊김과 단절, 이로써 다른 형태로의 나아감을 긍정한다. 이로써 흘러가야 하는 것은 바로 여성이다. 그런데 영화는 여성-남성의 이분법적 구도에 따른 여성만 부각하지 않는다. 라마는 여성의 역사를 가르치지만, 삭발 당한 여성들, 2차 대전을 경험한 여성들은 모두 백인이다.      


그러나 세네갈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흑인 여성 로렌스는 백인 여성의 역사에 해당하지 않는다. 흑인 여성이나 이주민 여성의 박해를 백인 여성의 피해자성과 동일시하여 해석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백인에 의해 가둬지고 멈추는 유색인종을 의미하니, 디옵은 이민자·흑인 여성의 삶과 진실을 연결한다. 그 여성들은 어디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간 백인 여성의 삶을 강의하던 라마는 연단에서는 ‘화자’였다. 그녀는 있는 그대로 흐르는 삶을 말하기보다는 충분히 객관적으로 동의를 얻고 멈춘 것, ‘정설’을 주장한다. 또 영화를 강의한다.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정제된 정보를 바탕으로 학생들이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재판장에서 라마는 ‘수용자’가 된다. 그녀가 수용하는 것은 특정한 이론의 도식에 딱 들어맞는 정보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로렌스다, 선하게도 보이고 악하게도 보이는. 이제 그녀는 정보에 맞춰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바라본다. 라마가 바라보는 로렌스는 세네갈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여성으로서, 백인 남성의 도움 없이는 병원에서의 출산, 앨리스의 출생신고, 수두 치료 등 구조의 지원을 받는 것이 불가능했다. 프랑스 내 백인 미혼모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냉대를 받으면서도, 프랑스에게 잘 보여야만 했다. 세네갈 출신 로렌스의 어머니는 딸에게 불어만 교육했다. 로렌스의 어머니는 라마와 대화할 때도 딸이 예절 교육을 잘 받은 것처럼 보이길 원한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가르친 언어와 예법을 보는 사람들은 바로 ‘프랑스인’이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역사가 있는 만큼, 세네갈에서 프랑스로 이주하기 전부터 프랑스적 양식을 체화했다. 프랑스적 습관을 강요받은 로렌스는 프랑스인들의 시선에선 보기 좋을지 몰라도, 정작 세네갈 여성의 입장에서 억압적이고 행복하지 않았던 유년기라고 고백한다. 어머니의 교육에 의해서 세네갈에서 사용하는 월로프어는 조금도 구술할 수 없고, 프랑스적이고 백인적이라 할 만한 양식을 체화하여 파리에 갔더니, 백인을 따라하며 흑인의 문화와 양식을 거부하는 이들을 의미하는 '오레오'라는 멸칭으로 모욕당한다.      


그렇다고 프랑스인들에게 자국민으로서 인정이라도 받는가? 그것도 아니다. 로렌스는 증언을 하러 나온 지도교수에게 모욕을 당한다. 로렌스가 아프리카나 흑인과 가깝지도 않은 오스트리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연구하는 것이 이상하다며 코웃음 친다. 라마가 재판장에서 나온 직후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만, 재판장 앞의 백인들은 맥주를 마시며 축제를 즐긴다. 흑인 라마가 담긴 숏과 백인을 포착한 숏은 유기적으로 뒤섞이거나 연결되지 못하고, 다만 교차할 뿐이다. 흑인들은 백인이 구성해놓은 구조에 참여하려 고군분투해도 백인에게 흑인은 여전히 타자, 이방인이다. 그래서 흑인 여성은 백인 여성과 무조건적으로 동일시될 수 없다. 백인 여성을 기준으로 한 라마의 신념이 핸드 헬드로 흔들리며 무너진다. 로렌스의 딸 또한 마찬가지다. 로렌스는 뒤몬테에게 앨리스를 세네갈로 데려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로렌스는 딸을 세네갈로 데려가지 않았고 대신 죽였다. 로렌스의 딸은 로렌스에겐 앨리스로 불리는 반면, 뒤몬테에게는 릴리로 불린다. 프랑스인 아버지에게 릴리로 불리지만 릴리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삶, 그렇다고 앨리스로서 세네갈에 가지도 못할 불우한 삶, 이중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환대받지 못하는 사랑하는 딸아이를 로렌스는 죽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메데이아처럼, 사랑하기에 죽였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억울하게 떠안게 된 남성과 국가의 몫도 내려놓는다, 딸 못지않게 자신 또한 사랑하기에. 그렇게 어머니가 자녀를 죽이게 된 이유, 서론에서 언급한 여성학자 재클린 로즈는 서구 사회가 어머니를 취급하는 방식을 연구한다. 사회 구조는 자신이 떠맡아야 할 돌봄이나 복지 의무, 책임을 모조리 어머니에게 전가하였다. 이로써 국가가 담당해야 할 경제적 어려움이나 불평등이 심화될 때, 항상 사회는 어머니들을 비난하며 그녀들에게 돌봄 역량을 높이라고 촉구하였다. 이렇게 사회는 ‘모성’을 신성시하고 숭배하나, 이는 여성이라면 응당 아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선전이자 질책의 눈가림, 실체 없는 보상일 뿐, 실질적인 이득은 사회와 남성이 누렸다.      


즉 어머니가 된 여성은 사회의 의무를 대신 수행하고도 몫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의 주체적인 역량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자녀를 원망하는 어머니, 자녀를 살해하는 어머니가 생겨난다. 나를 회복하기 위해선 자녀가 없어져야 한다. 라마와 어머니의 관계도 그랬다. 라마의 유년기 플래시백, 어머니는 항상 신경질적이다. 라마의 어머니는 딸이 흰 바지에 생리혈을 묻히고 오자 기겁을 하며 혼낸다. 그녀는 가부장제에서 요구하는 정숙하고 순결한 여성을 라마에게 주문하고, 이로써 남자들이 요구하는 완벽한 여성상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 또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어머니라며 문책당하기 때문이다. 또 라마의 어머니가 먼저 부엌에 있었다. 이후 라마가 부엌 프레임 내로 진입하여 음식을 먹지만, 딸이 들어오니 어머니는 프레임 밖으로 나가버린다. 딸 없이 그녀는 포착될 수 있고, 딸이 있으면 그녀는 포착될 수 없다. 로렌스는 어떨까, 그녀가 양육을 포기한다면 아이에게 공동 책임이 있는 뒤몽테나 사회가 그 몫을 떠안아야 하지만, 이들은 그럴 생각이 없다. 그들은 면피하고자 책임을 알았음에도 몰랐다는 말로 일관한다. 살해 책임은 구조나 뒤몬테에게도 존재하나, 그들은 구속되거나 질책당하지 않는다. 반면 여성은 아이에 대한 책임을 모르고도 알아야만 한다. 오직 여성만이 교도소에서 매를 맞는다. 매를 맞는 여성 로렌스는 프랑스와 세네갈 사이, 가부장제와 주체적인 여성 사이에 끼어 있어, 단 하나의 확고한 가치체계를 따라 판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기에 진술은 애매모호하고 항상 뒤바뀐다. 그녀의 지도교수가 로렌스는 구술에 뛰어난 반면, 글쓰기에는 능하지 못하다고 언급하는 것처럼, 로렌스는 진술서에는 충분한 호소력이나 설득력을 담지 못했기 때문에, 경찰 진술과 재판 진술 사이에 괴리가 있을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진술서엔 법의 판단에 유리한 ‘기술적인 글쓰기’를 했다면, 구술에선 ‘솔직하게 발화’한다. 둘 사이의 모순과 긴장감은 피식민국이 식민지에 속하지만 속하지 않고자 하는 번뇌, 마찬가지로 여성이 남성에게 속해야 하지만 속하지 않으려는 내적 갈등에 상응하는데, 결국 로렌스는 피식민국과 여성적 입장을 선택한다.      


이를 영화의 연출에 반영한다. 영화의 롱테이크는 두 방식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프레임을 오롯이 점유한 한 사람만의 ‘감정과 반응’을 긴 호흡으로 담아내는 롱테이크고, 다른 유형은 가족 전체나 재판장에 주목하며 사람들의 ‘관계’를 조명하는 롱테이크다. 전자에서는 개개인을 긴 호흡으로, 흡사 현실 속 생생한 시간처럼 잘림 없이 보존한다면, 후자에서는 개개인보다는 그 개인들을 아우르는 거대한 전체를 주목한다. 전자에서는 강의를 듣는 학생들, 검사와 변호사 및 용의자와의 성별에 따른 분절, 배심원들 각각의 반응, 어머니와 분리되고 싶어 하는 라마를 담는다. 검사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묵묵하게 제 진술을 고집하는 로렌스의 분리된 숏은 그녀를 보존하는데 의의가 있다. 즉 타인과 나뉜 오직 개인만을 보존한 숏은 서열과 위계에 따라서, 또 전체를 포착하는 롱테이크에 의해 잠식당할 수 있는 약자·타자들의 주관성을 보존한다. 전체를 포착하는 롱숏에선 클로즈업과 달리 개개인의 개성은 약화되고 집중은 분산되니 말이다. 디옵은 롱테이크 뿐만 아니라 영화 내에서 언급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미학으로 이중적 굴레에 처한 여성의 모호함, 복잡함을 형상화한다. 영화감독으로서 뒤라스는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독립적이고 순수 시지각적인 시각과 청각을 결합시킨 연출을 영화계에 유산으로 남겼다. 보통 뒤라스의 시각은 조각과도 같이 정적이고 고요한데, 그 이유는 인물들의 움직임이나 표정이 고도로 통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청각은 묘한 관능성과 강과 바다의 습기와도 같은 추상성이 도드라진다. 본래 결합하지 않던 분리된 시각과 청각이 서로 이끌리며,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 너머를 가리키고, 추상적인 것엔 일정한 특정성을 부여한다. 이로써 본래의 시청각 그 이상의 상위 차원으로 초월한다. 그 상위의 것, 이데아는 뒤라스가 페미니즘이나 후기 식민주의적 탐구를 일삼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가부장제 이전과 너머의 여성, 식민지화되지 않은 원주민들의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자유, 일반성과 보편성 너머의 광기의 진실로 나아가는 것이랴. 그것이 구체적인 것들로부터 얼마만큼 제약을 당하는지, 또 그 관념이 어떻게 특정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며 말이다.  


디옵은 뒤라스의 작업을 계승한다. 명백하게 뒤라스적이라 할 수 있는 영화 초반부, 시각은 현재와 과거의 라마 얼굴을 비추는 반면, 청각은 그녀만의 호흡이 아닌, 프레임 너머의 여러 호흡이 뒤섞인 전위음악이다. 일단 포착된 흑인 여성들의 표정은 백인들과 달리 무표정하다. 아주 정적이고 건조하며, 조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생명이 박탈된 듯한 무(無)에 가까운 부동의 얼굴, 그 아무 것도 아닌 얼굴 너머에서 생명의 유(有)로서 호흡이 다가와 결합한다. 그리고 그 유는 하나가 아니기에, 즉 그녀의 얼굴이 낼 수 없는 음향과도 결합한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영화 중반부, 라마가 로렌스의 당돌한 미소를 마주하기 직전에 재차 발생한다. 라마는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를 미워한다. 라마가 아는 여성은 백인 여성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즉 백인 페미니즘이 설명해주지 못하는 흑인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머니와 자식은 분리될 수 없다. 영화에선 어머니의 자궁과 태아는 서로의 세포를 교환하며, 어머니는 자녀의 세포를 공유하는 '키메라'가 된다고 언급하는데, 이처럼 자녀의 세포를 체내에 간직하는 어머니는 곧 자신과 같은 자녀를 미워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세포를 교환한 자녀 또한 자신이 품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인 어머니를 증오할 수 없다. 어머니를 미워하던 얼굴에는 어머니의 호흡과 자신의 호흡, 라마가 뱃속에 품고 있는 태아의 호흡까지 복잡하게 뒤섞인다. 미워하게 된 얼굴이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만들어진 기계적·조각적인 느낌이라면, 생명의 본질 그 자체를 가리키는 청각과 결합하며 이데올로기가 덧씌워지기 이전 여성을 회복한다. 즉 영화 속 여러 인물의 호흡을 뒤섞은 전위 음악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변질된 어머니와 인간의 기원을 발굴하는 ‘고고학’으로, 본원적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를 드러낸다. 또 재판장에서 뒤라스적인 숏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 너머를 알게 되었을 때, 이로써 모든 것이 꽉 막힌 재판장 너머의 하늘, 현재 너머의 과거로 향하고 싶은 열망을 가시화한다. 단일한 지금 여기를 넘어서고 싶다.      


더욱이 급진적으로 뒤라스적이진 않지만, 로렌스와 뒤폰테를 포착하는 숏도 간소하게 뒤라스적인데, 로렌스의 얼굴은 눈매가 올라가서 조금 표독스러워 보인다면, 뒤폰테의 얼굴은 유약하고 부드러워 보인다. 그러나 이는 검사의 주장이 그들 얼굴 위에 조응할 때 그렇고, 그들 스스로가 얘기하거나 다른 입장이 수놓아지자 로렌스의 날카로운 얼굴은 프랑스와 세네갈, 가부장제 사이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사활을 건 공격성’으로 느껴지고, 반면 뒤폰테가 동정을 호소하는 얼굴은 비열해 보인다. 즉 그간의 여성은 일반적인 청각과 결합하여 모습이 제한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디옵은 비일반적인 음향을 시각 위에 얹는 뒤라스적인 연출을 택하여,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보이던 여성 이상의 ‘다양성’과 ‘진실’을 드러낸다. 특히나 지금껏 백인 여성만 주목받은 영화계에서 보이지 않던 흑인 여성, 이민자 여성의 진실을 발굴한다. 이로써 그들의 존재를 알리는 ‘호흡’을 이어낸다. 개인의 얼굴만 담긴 롱테이크는 개인을 보존함과 동시에 서로를 분리, ‘고립’시킨다. 하나의 테이크에 함께 머물던 라마의 식구들, 그러나 라마는 가족에게 사적인 비밀을 숨기고, 또 병원에 보호자를 대동해야할 어머니를 도와주지 않는다. 이후 각자의 프레임이 나뉘고 거기에 홀로 갇힌다. 가부장제에 의해서 증오하게 된 어머니와 자녀, 이로써 발생한 분리, 그러나 영화 말미에서 변호사의 최종 변론을 듣고 각기 다른 숏에 분리된 여성들이 ‘눈물’이라는 공통성으로 매치 컷되며 이어지듯, 서로 분리되어 있더라도 이어져야만 하고, 또 모녀는 공존해야만 한다. 그렇게 세포를 교환하고 호흡을 공유하는 키메라임을 디옵은 긍정한다. 연결은 영화 내에서 그치지 않고, 최종변론을 하는 변호사가 영화 바깥에 있는 감상자와 눈을 마주치는 소격효과로 이어져, 영화가 호소하는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 현실로 이어지도록 한다. 감상자 또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으므로, 어머니의 세포를 지니고 있으므로, 어머니와 연결되고 그녀들을 사랑해야하므로. 그렇게 어머니와 자식, 가상과 현실 사이에 가교를 놓는 영화, 그러나 본래 라마에겐 이어져야할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또 다른 연출은 플래시백이다. 영화 초반 플래시백은 현재의 라마가 엄마를 싫어하는 원인을 가리켰다. 어머니의 냉대, 위축된 라마, 어둠을 헤매는 라마가 보였다. 플래시백에서 라마가 엄마를 서운해 하는 원인은 드러났지만, 엄마가 라마를 냉대한 이유를 백인 페미니즘으로 분석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후 라마는 어머니와 보편성을 공유하는 로렌스를 접한다. 이후 플래시백은 어머니를 증오하는 필연성에 그치지 않고, 어머니가 라마를 싫어하게 된 원인을 밝힌다. 그간의 플래시백에선 보이지 않던 몸을 치장하고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이후 남성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어머니가 보인다. 누리기만 하는 남성 대신 책무를 짊어진 어머니, 그 부당함 때문인지 딸에게 모질게 굴었을 어머니를 이해한다. 어둠 속에서 어머니가 보이지 않아 헤매던 딸, 지금도 꿈속에서만 보이는 어머니를 현실의 어둠 속에서 애타게 부르던 딸은 비로소 어머니의 진실과 마주한다. 영화 결말에서 그간 클로즈업, 미디엄숏, 바스트숏에 그쳤던 카메라가 익스트림 롱숏으로 널따랗게 확장되며,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공간, 세계와 함께 라마를 포착한다. 시야의 확장, 이는 세네갈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흑인 여성을 뒤라스적으로 규명함과 동시에, 가부장제에서 긍정하지 않는 ‘메데이아적 여성’ 또한 밝혔기 때문이다. 재판 당시 라마는 현재 임신 4개월이지만 맥주를 마신다. 즉 낳을 생각이 없거나, 임신 중단과 출산 사이에서 망설인다. 그녀의 임신은 백인 연인, 장-클로드에 의해서 규정된다. 장-클로드는 라마가 불안해하는 로렌스의 사례가 자신들과 분리된 것이라 위로하며 임신 유지를 유도한다. 그러나 남성이 회유한 임신과 출산에 여성은 메데이아가 된다. 라마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사례를 백인 남성이 부정하고, 백인 남성이 바라는 임신을 여성이 수행하면, 결국 여성은 메데이아가 되어 남성이 떠넘긴 책무를 살해하고 자신을 회복한다. 라마는 파솔리니의 <메데이아>를 감상한다. 지배자로서 여성으로 나아감을 의미하는가, 하지만 나아감이 아니다.      


뒤라스를 강의할 때 영사한 푸티지도, 파솔리니의 영화도 모두 다 고정된 과거의 정보만 반복될 뿐이다. 그녀는 ‘가부장제에 의한 증오’, ‘가부장제에 의한 메데이아’ 되기 모두 다 끊고 싶다. 그래서 디옵은 다른 메데이아를 제안한다. 영화 결말 라마는 장-클로드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곁에 있다. 장-클로드에 의해 좌우되는 임신이 아니라, 자신과 제 몸에 세포로서 간직한 어머니와 함께 임신을 긍정한다. 즉 남성에 의해서 어머니와 딸, 딸과 손녀에게 이어지던 증오를 오늘날의 메데이아는 ‘주체성’으로 화해한다. 물론 낙관적이진 않다. 디옵은 판결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텅 빈 생토메르를 비춘다. 다시 재클린 로즈를 따른다면, 사회 대신 돌봄 의무를 짊어진 어머니는 세계를 유지시킬 수도 있고, 전면 포기해버림으로써 종말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텅 빈 생토메르는 여성 박해와 착취가 이어져 어머니들이 돌봄을 포기하고 불러온 공허이랴. 그러나 모든 인류가 사라진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한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인다. 결국 남성이 결정한 세계를 재건하는 것도 어머니의 몫이다. 디옵은 바로 그 어머니들의 권리와 진실을 각기 다른 문화적 맥락 속에서 규명한다. 그럼으로써 그녀들이 가져가야 할 몫을 되돌린다. 이러한 디옵의 작업은 서구의 원리가 피식민국에 뿌리를 내려 원주민의 원리와 식민주의자들의 원리가 혼합된 상태를 '대위법'에 비유하며, 두 체제의 관계와 영향을 밝히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대위법적 읽기’, 서구의 단일하고 거대한 '세계구성'에 반하여 지역적이고 세분화된 담론을 논하는 가야트리 스피박 등의 ‘후기 식민주의’ 담론을 따른다. 그런 점에서 로렌스의 모순적인, 명확하게 참/거짓을 식별할 수 없는 발화는 가부장제/여성, 프랑스/세네갈, 그 사이에서 솔직한 자신까지 오가는 다양한 언어와 이데올로기를 폭넓게 드러낸다. 한 이민자 흑인 여성이 처한, 대양과도 같은 몇 겹의 굴레를 묵묵하고 느리게 뒤따라가는 디옵은 탐구의 결과를 뒤라스를 빌려 가시화하며, 몇 겹의 진실을 가진 여성들에게 가장 적법한 형식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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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406 집에서 (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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