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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14. 2023

홍상수, <물안에서>

기대하는 것은 여기에 없다

홍상수(Sang-soo Hong), <물안에서>(in water) - 기대하는 것은 여기에 없다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029

“꿈꾸는 자는 어느 특정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거의 자발적으로 그는 방금 있던 곳을 떠나 움직인다.” -에른스트 블로흐-

지형은 예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내륙 지방/해안 지방이 각기 다른 미술을 발전시켜온 미술사가 본 주장에 대한 예시다. 내륙 지방은 대체로 변화가 더디고 견고하다. 그렇기 때문에 내륙 지방의 화가들은 선을 이용하여 미래에도 대체로 변화가 없을 내륙의 단단한 풍경을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붙잡아두었다. 내륙의 예술은 항구적이고 조각적이며 피렌체, 독일, 중국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 시시각각 변화하는 물로 둘러싸인 해안 지방은 미술에 변화가 많은 지형적 특성을 반영한다. 그래서 해안 지방의 예술은 불확정적이다. 확고한 윤곽선보다는 경계가 불분명한 색 뭉텅이, 색면 등을 이용하여 풍경의 가변성을 남겨놓았으며, 베네치아나 일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즉 물은 대체로 불변하는 대지보다 여지가 무한정 열려있고, 그렇기 때문에 감상자가 보고 접하는 것에 의심을 불러온다. 물로 가득한 풍경은 현재에는 이러하지만 과거에는 달랐고, 미래에도 달라질 것이다… 이러한 물의 불확정성을 홍상수가 신작에서 도입한다. 최근 홍상수의 영화는 언뜻 보면 구체적인 현실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가의 영화>에서 김민희는 배우 자신이 연상되는 배역을 빌려서, 배우로서 영화계에 복귀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긴다. 그 이전, <도망친 여자>에서도 마찬가지로 김민희는 결혼을 한 이후, 아주 오랜만에 외박하는 여성을 연기했다. 배우로서 김민희, 홍상수와의 교제 이후 외부 노출을 꺼리는 김민희가 반영된 것처럼 보였다. 김민희 뿐만이 아니다. 홍상수 자신은 <소설가의 영화> 결말에서 그녀와 결혼하지 못하는 처지를 반영하듯 보였고, <탑>에서는 홍상수와 딸의 관계를 투영하고, 딸과 흡사한 배역이 홍상수와 유사한 배역을 진술한다. 이는 모두 실재 김민희, 홍상수, 둘의 주변인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픽션이다. 그것이 진실인지 비교하고 검증할만한 정보도 우리는 모른다. 과연 그럴듯한 배역들이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      


그래서 홍상수의 작품은 현실과 유사하지만 수면 위에 비친 풍경처럼 의심과 균열이 일고, 바로 그 점에서 그의 근작이 액체 같다. <탑>에서는 물과 같은 연출로 편집을 들 수 있다. 분명 하나의 숏에서 발생한 음향적 요소, 행위들은 그 이후 이어질 숏을 잠재한다. 그러나 홍상수는 잠재된 예측을 항상 빗겨간다. 예상과 전혀 다른 숏이 이어지지만, 그렇다고 불연속적이지는 않다. 전과 후는 이어지긴 하지만, 이르고 짧은 시간이 아니라, 꽤 먼 시간이 지나 추상적으로 연결되기에, 친밀함과 동시에 낯설다. 즉 불변하며 연속하는 대지와 같은 편집이 아니라, 가변적으로 연속하는 그러나 분명히 물인 것이 자명한 편집이 도드라졌다. 정리하자면 최근 홍상수 영화는 현실에 기대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픽션이라는 장르가 현실의 견고함을 가변적으로 무너뜨리기 때문에 양 차원을 오가는 물의 상태변화가 도드라지고, 이러한 특징은 합정적이고 구체적인 연결에서 벗어난 유연한 연결에서도 비롯한다. 그렇다면 물과 같은 특성은 어째서 비롯하는가? <당신 얼굴 앞에서>는 분명 오늘날을 반영한다. 수도권의 집값이 많이 올랐다. 그러나 외국에서 오랜 시간 거주하다가 돌아온 주인공은 오늘날에 잠기지 않는다. 이미 변해버렸지만, 기억 속에 남겨진 공간과 인물들을 방문한다. 한편 과거에 잠김과 동시에, 마냥 그 상태에 침잠하지 않는다. 미래에 영화를 찍자고, 그간 자신이 해왔던 것과 정반대의 약속을 잡는다. 그러나 정작 약속한 미래는 불발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미래로 이어진다. 즉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나 미래로 개인은 빠져나가고, 구체적으로 계획했던 시간도 미끄러지듯 변화한다. 같은 시간을 살아도 서로 다른 시간 속에, 다른 시야로 기민한 물과 같이 빠져나간다. <오! 수정>과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선 하나의 현상을 남/여가 얼마나 다르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지, 이로써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제시된 것이 물처럼 주관적으로 녹고 변형되는 시선을 고찰하였다. 또 <강변호텔>과 <당신 얼굴 앞에서>에선 죽음이 암시된다. 그 죽음은 해방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써 아들이, 남성의 죽음으로 여성이 풀려난다.      


또 죽음을 앞둔 개인은, 그간 살아가기 위해 고체처럼 단단히 붙잡아서 유지하던 자신을 액체처럼 녹여보며 새로운 상태를 미리 경험한다. 즉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현실, 시간, 시선, 삶을 가변적으로 변형하고 녹여내기에 물과 같다고 말할 수 있는 홍상수의 영화, 그 유동성을 <물안에서> 더욱 급진적으로 실험한다. 그 실험의 여파를 영화 보기 전 부터 느낄 수 있었다. <물안에서>를 보러 영화관에 가서 매표를 하는 도중, 직원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영화가 흐린 것은 영사사고가 아니라, 감독의 의도이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본 작품은 투숙하는 숙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장면, 이후 들어가서 피자를 먹는 숏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웃 포커싱'으로 촬영되어 숏이 흐리고 혼탁하다. 얼굴이고 풍경이며 정확히 보이는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감상자가 당황할까봐 직원은 경고를 했는데, 그렇다면 왜 감상자에게 이런 화면은 당혹스러울까? 왜냐하면 감상자가 기대한 화면이 아니기에, 홍상수가 생각하는 영화란 언제나 '기대'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안에서>는 홍상수가 본인의 작가론을 탐구한 영화인데, 작품에선 홍상수와 유사한 고민을 하는 '청년 영화감독'이 등장한다. 그는 영화를 찍으려고 제주도에 왔다. 그러나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가 섭외한 '촬영감독'은 청년 감독이 '여배우 이야기'를 찍으려 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청년 감독은 기존의 시놉시스가 도무지 성에 차지 않는다. 청년 감독은 자신이 찍으려고 계획했던 모든 소재가 기존에 봤던 작품들의 짜깁기 같다고, 그래서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심한다. 이로써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청년 감독, 곧 그에게 투영된 홍상수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뻔하지 않은 이미지', '새로운 이미지'다. 그것이 곧 영화 속 아웃 포커싱으로 촬영된 흐릿한 숏이다. 감상자는 일반적인 영화 관람 경험에 비추어서,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화면을 기대한다. 그러나 홍상수는 그 기대를 배반하는 것이 일반성, 일상적인 현실과 차별화되는 예술이라고 흐린 숏으로 답한다.      


청년 감독도 마찬가지로 각본도 뭣도 준비하지 않은 채로, 즉흥적으로 영화 촬영을 시작한다. 봤거나 알고 있는 이미지가 아니라, 낯설고도 무한한 가능성으로 들어찬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런 예술이 곧 '유령'과도 같다고 홍상수는 상징으로써 말한다. 유령이란 단어는 청년 감독의 영화에 ‘배우’로 참여하는 여성이 맨 처음 꺼낸다. 그녀는 자다가 일어나서 화장실에 갔는데 누군가가 '정신 차려!'라고 외쳤다고 한다. 배우는 청년 감독이나 촬영감독이 장난친 줄 알았는데, 둘 다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니 정체가 묘연해진다. 여성은 분명 잠에서 깨어 눈을 비비며 화장실에 갔을 때 관성적으로 예상한 것이 있을 것이다. “분명 어두컴컴할 것이고, 두 남자는 평소 행적을 비추었을 때 자고 있겠지”, 그런데 낯설고 생경한 유령이 나타나 그녀의 예상을 뛰어 넘었다. 배우에게 불현듯 나타난 유령처럼, 본 작품에서 홍상수가 보여주는 숏들 또한 전혀 예상치 않은, 기대에서 벗어나는 이미지의 향연이다. 이렇게 예상을 뛰어넘어 나타나는 유령은, 촬영감독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자 할 땐 다시 꽁꽁 숨는다. 홍상수는 여자의 유령 이야기를 재현하지도 않고, 또 촬영감독에게 유령을 직접 보여주지도 않는다. 유령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보고 싶어도 나타나지 않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흡사 영화 속 신원과 구체적인 지명을 희미하고도 뿌옇게 뭉뚱그려놓는 아웃 포커싱처럼 말이다. 그 무엇도 아님과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현실과 다른 것을 보여주는 예술은 그래야 한다. 영화는 특히 더 현실에 기대는 예술이기에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현실과 유리된 백지에서 시작하는 유형의 예술과 달리, 영화의 캔버스는 '현실'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비롯한 기대를 전면 비틀 수 있는 예술 매체와 달리, 영화는 예상치 못한 유령이 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영화가 현실 그 자체는 아니라면, 현실과 차별화된 무엇이라면 유령, 그리고 물과 같아져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 철학자 들뢰즈는 정보가 무용하고 비효율적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인 정보에 대한 통념 및 생각과 딴판이다.      


들뢰즈가 정보의 가치를 폄하한 이유는, 정보는 ‘해당 지식을 원하는 심리’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즉 정보가 새로운 앎이나 깨우침을 불러오지 않고, 익히 기대하고 예상한 것을 지지부진하게 반복하기 때문에 가치를 낮게 평가한 것인데, 그래서 들뢰즈는 발화된 정보를 뛰어 넘어서 순수한 발화 행위, 창조적인 이야기를 꾸며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의 정보 이론은 글자로 나타나는 것이 대표적이긴 하지만 이미지, 곧 영화에도 반영된다. 그래서 영화가 따분한 정보나 감각을 지지부진하게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앎이자 이미지가 될 수 있으려면 유령이자 물이어야 한다. 보고 싶다면 보여주지 않거나 변신하고, 반면 예상치 못할 때 급습하는 유령과 물로서 말이다. 홍상수는 <물안에서> 속 촬영 과정에서 이를 보여준다. 영화 내내 준비 및 조사만 하다가 비로소 후반부에 촬영이 시작된다. 청년 감독은 해변을 청소하는 어느 한 제주도 주민과 만난 경험을 영화의 소재로 삼는다. 그 경험을 감상자는 알고 있다. 청년 감독과 주민의 만남을 미리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영화 속 촬영감독과 배우다. 영화 내내 세 사람은 주로 붙어 다닌다. 그러나 청년 감독이 제주도민과 만난 그 순간은 촬영감독 및 배우와 동떨어졌었다. 그래서 촬영감독 및 배우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새로운 앎을 영화로써 청년감독은 전한다. 영화의 결말 또한 마찬가지다. 촬영감독과 배우는 모르고 있던, 죽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던 청년 감독의 내면을 알게 된다. 기존에 두 사람이 알던 청년 감독은 유령과도 같은 새로운 얼굴로 경악을 불러오고, 물처럼 다른 상태로 승화한다. 그런데 새로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분명 촬영 현장에선 청년 감독과 주민이 만난 그 당시가 생생하게 소환된다. 하지만 청년 감독은 소재를 '막연한 상태'로 열어두고, 지금 여기 촬영 현장에 있는 '즐거운 관광객'들을 즉흥적으로 촬영하여 대비를 자아내겠다고 말한다. 고정된 각본, 익히 알거나 기대한 앎과 기억에 골똘히 매여 있었다면 보여주지 못할 이미지, 그러나 욕망과 기대를 거두고 생경하고 다른 것들에 주의를 기울임에 비로소 산뜻한 이미지로 재탄생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홍상수는 촬영 시퀀스에서 ‘유령으로서 영화’를 몸소 실천한다. 세 사람은 지금까지 촬영한 숏들이 어떻게 찍혔는지 확인해보자고 한다. 그렇다면 감상자는 다음 숏에서 촬영한 영상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기대한 것을 보여주지 않고, 촬영·계획한 것에 더해서 무엇을 새롭게 첨가할 지 즉흥적으로 제안하는 장면을 이어낸다. 이후 태연하게 촬영을 재개한다. 촬영을 재개했으니 촬영장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러나 홍상수는 촬영되는 장면이 아니라, 촬영지를 촬영하는 촬영감독과 배우를 비춘다. 마지막으로 청년 감독이 몸소 배우가 되어서 바다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장면이 <물안에서>의 피날레다. 분명 합의된 연기이기에 컷이 외쳐져야 하고, 그는 물 밖으로 다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청년 감독은 물속으로 사라지고 '컷'은 그 누구도 외치지 않는다. 감상자가 기대한 것은 영화 촬영 현장, 그러나 감상자가 예측한 것은 곤혹스럽게 빗겨나가, 허구의 자살은 현실의 자살로 뒤바뀐다. 청년 감독은 점점 더 멀어져서 인간임을 분간할 수 없게, 흡사 영화 도입부에서 포착된 바위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거뭇거뭇해지고, 또 전 여자 친구를 위해서 작곡한 노래 또한 본래의 용도인 '생일 축하'가 아니라 '장송곡'으로 뒤바뀐다. 즉 홍상수는 말한다, 영화란 현실을 흐리게 지우고 심지어 죽여야지만 새롭게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다고. 기대한 것들이 흐려져 가고 현실은 죽어감에 영화는 먹먹하다. 분명 그는 기대하게 만들었다. 전작 <탑>에서 제주도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언급하였으니, 감상자는 익히 알거나 기대하는 제주도의 풍경을 홍상수의 신작에 기대했겠지만, 그가 주목하는 것은 '현실의 제주도'가 아니라, '제주도를 소재로 했을 뿐인 영화'다. 영화 속 현실의 제주도는 등장인물들이 예쁘다고 입을 모아 찬미한다. 골목길이 영화 촬영하기에 너무 적합하다고, 담벼락에 핀 이름 모를 꽃이 아주 예쁘다고, 관광객들도 제주도의 해변을 하하호호 즐기며 거닐고 있다. 그렇지만 그 아름다운 구체적인 제주도를 아웃 포커싱으로 흐릿하게 지운다. 제주도라 말하지 않는다면 겨우 가늠만 할 수 있을, 그럼으로써 현실의 제주도가 아닌, 현실과 차별화된 영화에 도달한다.      


홍상수는 다각도의 형식을 활용하여 현실에서 영화로 멀어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웃 포커싱, 그리고 본 글에서 청년 감독, 촬영감독, 배우로 등장인물들을 지칭한 것처럼 인물들의 ‘이름’이 불명확하다. 이들을 지칭하는 이름 또한 아웃 포커싱처럼 흐리다. 기존의 현실에선 부모가 붙여준 이름, 이들에게 구체적인 무언가를 기대하는 단어로 지칭했다. 본래 청년 감독은 '배우'였고, 촬영감독은 '직장인'이였으며, 배우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개인을 구체적으로 특정하는 단어를 지워내고, 이를 '수정'하고 '덧칠'하여 현실과 다른 ‘영화 속 얼굴’을 보여준다. 그 영화는 기대하거나 알던 사람이 이토록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촬영감독은 배우가 청년 감독과 이토록 친했는지 전혀 예상조차 못했다고 말한다. 이들은 영화를 촬영하면서 알게 된 서로, 관계가 너무나도 새롭다. 익히 알던 얼굴이 한 꺼풀 벗겨지며 새로운 얼굴이 드러나고, 흐려진 얼굴엔 새로운 얼굴을 덧대본다. 세 사람은 영화 내내 주로 하나의 프레임에 함께 머문다. 영화 전부터 알던 서로는 물리적으로 친밀하고 가까우며 유사한데, 영화가 진척되니 실상 서로가 까마득하게 멀고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다. 동상이몽, 내가 생각한 자신의 얼굴과 상대가 생각한 나의 얼굴이 상반된다. 촬영지를 조사하기 위해서 해변이 펼쳐진 어느 언덕 위에 세 사람이 올라가 있다. 분명 다 같이 올라가기로 동의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청년 감독은 머물고 싶은 반면, 촬영감독과 배우는 추워서 내려가고 싶다. 또 촬영감독과 배우가 라면을 사러 가겠다고 했는데, 청년 감독의 예상과 달리 너무 늦게 왔다. 그리고 청년 감독이 본래 계획에 두던 여배우 이야기를 촬영감독이 넌지시 꺼내본다. 배우는 모르고, 오직 촬영감독과 청년 감독만 안다. 함께 있어도 아는 것이 다르다. 그런데 아는 두 사람 사이에서도 본 소재를 두고 생각이 상반된다. 청년 감독은 영 별로라고 말하는 반면, 촬영감독은 괜찮은 눈치다. 이렇게 각자가 생각하는 서로가 전혀 다르다. 영화는 이를 보여주고자 '롱테이크'와 '롱숏'을 결합한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세 사람이 위치한 롱숏은 언뜻 보기엔 따분하고 진부하다. 세 사람이 하고 있는 행동이나 동작이 큰 변화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가 일기도 한다. 일단 ‘흐리기’ 때문이다. 얼굴, 표정 등에 대해서 많은 궁금증을 자극한다. 더욱이 처음 포착된 상태 그대로 머물러있진 않는다. 수면 위에 비친 얼굴 마냥 서서히 일렁이고 흘러가며, 서로가 예상하지 못한 상대의 얼굴과 마주한다. 하나의 숏이 가진 잠재력이 물과 같이 유동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홍상수는 흐름을 보존하는 ‘롱테이크’, 여러 사람들을 다 같이 포착하여 서로 간에 미치는 운동과 이에 따른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롱숏’을 선택한다. 이를 위해서 편집도 활용한다. 불명확한 숏들은 담고 있는 이미지와 달리, 연결은 기대에서 조금씩 엇나가긴 하지만 비교적 또렷하다. 청년 감독은 동료들이 라면을 사오길 기다리고, 이후 그들이 라면을 사온 숏으로 연결된다. 또 숙소 인근을 이곳저곳 더 둘러보자고 말하니, 그 다음 숏에선 주변을 산책한다. 영화 도입부 골목길도 인근으로 추정되는 길이 유기적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영화에서 단 두 숏밖에 없는, 포커싱이 아주 뚜렷한 시퀀스는 다르다. 동료들은 묵고 있는 숙소의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그렇다면 이후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간 숏’으로 연결되는 것이 당연하다. 안으로 들어가긴 한다, 그러나 곧장 '피자'를 먹고 있다. 안에 들어가서 피자를 주문하는 과정이 생략된다. 영화 후반부, 회를 먹는 시퀀스에선 청년 감독이 회를 사주겠다는 과정이 있었다. 그런데 피자를 먹는 숏은, 먹기까지의 과정이 없으니 어딘지 미심쩍다. 비밀번호를 입력해서 집으로 들어가 피자를 주문하고 먹는 순서가 선형적일까, 혹 양 숏의 시간대가 까마득하게 멀거나 전후가 뒤바뀐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이 샘솟는다. 즉 이미지가 불친절하고 불명확하면 비교적 편집이 명료하고 유기적인 반면, 이미지가 확고하다면 편집이 낯설고 생경하다. 전자의 경우 불명확함을 앎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편집으로 맥락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상투적인 이미지들의 맥락을 재설정하여 새로운 이미지로 재탄생시킨다.      


명료한 이미지들은 포커싱만 뚜렷한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해답인 비밀번호를 풀고, 세 사람이 있는데 피자가 한 조각만 남았으니 이를 삼등분하여 나눠먹으며, 콜라가 있으니 마시는 등 이미지의 내용 까지도 상투적이고 뻔하다. 이렇게 단순하고 따분한 이미지를 새롭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미지가 위치한 맥락을 바꿔야 한다. 내가 익히 아는 것들도 새로운 맥락에서는 낯설어진다. 본래 영화 속 인물들은 청년 감독, 촬영감독, 배우, 세 사람의 맥락에 얽혀 있었다. 그러나 촬영감독과 배우 곁에서 멀어진 청년 감독은 헤어진 연인과 연락하며 그녀의 음성이 들어간 자작곡을 영화에 써도 괜찮겠냐고 묻는다. 기존의 맥락에서 멀어져서 새로운 맥락에 위치하니 그에 관한 새로운 앎이 덧붙여진다. 이미지뿐만이 아니다. 청각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 초반에는 유독 대사와 배경음악, 그리고 프레임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 새소리가 중첩된다. 그럼으로써 대사가 불명확해진다. 따분하여 흥미가 없던 평범한 대사들이 ‘들리지 않게 되는 맥락’에 위치하자 괜시리 궁금해진다. 또 프레임에 담긴 이미지 너머에서 청각이 들려오니, 보이지 않는 것을 유추하고 싶어진다. 이렇게 새롭게 더해지는 것, 물처럼 변형하는 것들이 감각적이라고 홍상수는 말한다. 청년 감독은 계획을 미리 짰다. 피자를 먹은 이후에는 촬영에 용이하도록 빵을 먹자, 그것이 가장 효율적일 줄 알았다. 그런데 촬영감독은 약하게 불만을 피력한다. 빵만 먹으니 느끼해서 이젠 밥이 먹고 싶다고, 또 계획에 딱 맞춰서 빵을 먹지 않아도 밥을 먹을 여력이 있었다. 익히 아는 것들, 계획한 것들이 반복되면 질리고 물린다. 계획이 불발하면 불안해지지만, 현실은 계획이 불발되어도 이를 극복할만한 여지를 충분히 제공한다.

영화 후반, 이곳저곳을 무계획으로 돌아다니다보니 도처에 즐비한 횟집이 눈에 띈다. 그래서 청년 감독은 즉흥적으로 회를 사서 회식하자고 제안한다. 이후 회를 먹으며 두 남자는 예상치도 못한 귀신 이야기를 배우에게 듣는다. 계획·예상에서 이탈한 새로움은 이토록 감각적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특유하고도 참신한 감각을 제공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홍상수는 흡사 지우개로 그림을 지우듯 이미지를 흐려보기로 작정한다. 여기에 더해 기대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 편집과 롱테이크 내에서 기존의 흐름을 벗겨내어, 지지부진한 현실과 다른 것을 탄생시킨다. 이 생경한 감각은 단순한 느낌에 그치지 않는다.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나만의 시선을 뛰어넘어서, 상대의 시선과 연결한다. 영화의 카메라는 곧 상대방의 고유한 시선이다. 타인의 동공으로 나는 본다. 그 타인은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달랐고 새로웠기에, 흡사 영화 초반 홍상수가 포착한 '물고기'를 다각도에서 보는 것과 같다. 지상에서 바다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홍상수의 카메라는 기껏해야 물고기의 등밖에 보지 못한다. 그러나 이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다양한 각도에서 물고기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선을 <물안에서>가 보여준다. 다만 아웃 포커싱이나 편집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내실을 좀 더 다졌어야 했다. 연출은 새롭지만, 실험적인 형식에 담은 인물들은 아무리 신선하게 변화시키려 노력해 봐도 새롭지 않다는 것, 물 같기는커녕 영화의 특정 장치로서 대지나 사물과도 같은 견고함을 유지한다는 점이 한계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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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412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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