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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26. 2023

사에드 루스타이, <레일라의 형제들>

가부장제의 민낯을 까발려라

사에드 루스타이(Saeed Roustayi), <레일라의 형제들>(Leila's Brothers) 

- 가부장제의 민낯을 까발려라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063

“변혁은 인간이 선택을 하고 현실을 바꾸고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변혁이란 생명이다. 페미니즘은 생명을 선택한다.” -베티 리어든-

2022년 9월 13일 이란에서 마흐사 아미니라는 여성이 경찰에 연행됐다. 그녀가 경찰에 체포된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구치소에 수감된 그녀는 9월 16일 의문사를 당해 주검으로 석방되었다. 그 사실을 접하고 분개한 이란 시민들은 9월 말부터 히잡 반대 시위에 참여하였다. 히잡은 남성 권력의 상징이다. 온 몸을 내보이며 외부에서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는 남성, 반면 히잡을 쓰고 수동적으로 위축되어야만 하는 여성, 또 히잡을 쓰지 않음에 다양한 가능성을 발현할 수 있는 남성, 반면 히잡에 의해 천편일률적인 용모가 강제되는 여성, 즉 히잡은 여성의 자유와 여지를 말소하는 성차별주의의 온상이다. 물론 그간의 '히잡 쓰기'는 서구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전통 운동이라고 역사학자 카렌 암스트롱이 지적한 바 있지만, 오늘날에는 전통을 빌려 여성 혐오를 부추기는 추세다. 어쩌면 이슬람 사회에서 서구 페미니즘를 식민주의로 규정하는 시도는, 이슬람의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목적이 숨어있을지 모른다. 여하튼 그 알량하고 하찮은 한갓 사물에 의해서 여성의 생사, 이란의 젠더가 결정되었다. 히잡에서 자유로운 성별은 하찮더라도 우월하게, 반면 히잡을 쓴 존재는 유능하더라도 수동적이고 열등하게. 사에드 루스타이의 신작 <레일라의 형제들>은 히잡 시위가 소재인 영화는 아니지만 이와 연관해서 바라볼만한 작품, 히잡 문제에서 나타나는 차별적인 젠더를 분석하는 영화다. 숭상된 허구의 남성성과 그렇지 못한 현실의 남자들, 반면 열등하게 묘사된 여성성으로 현실을 건사하는 존재가 바로 <레일라의 형제들> 속 레일라다. 1989년 테헤란 태생의 사에드 루스타이는 이란의 영화감독이다. 보통 국제적인 영화제에서 주목받아 타국에서도 상영되는 이란 영화들은 느리다. 또 현실과 가상의 명확한 경계를 구분 짓기 어렵다. 더욱이 이란 영화만의 특징인 아이 영화 전통을 배제할 수 없고, 대체로 진실을 추적하는 영화가 많다. 키아로스타미, 파나히, 라술로프가 아주 느리게 진실을 추적했다면, 그나마 아쉬가르 파라디가 비교적 빨리 전환하는 편집으로 리듬감있는 이란 영화를 보여줬다.      


본 이란 영화의 물결 속에서 사에드 루스타이는 진실을 추적하는 선배들의 기조는 이어가되, 이를 기성 감독들과 전혀 다른 양식으로 풀어낸다. 파라디가 편집만 빨랐다면, 루스타이는 편집도 짧고 탄력적임과 동시에 카메라 워킹까지 급박하다. 연출이 흡사 <벤허>를 연상케 하는 그의 대표작, <저스트 6.5>의 도입부 추격전은 그간 이란 영화에서 느낄 수 없었던 약동하는 감각을 자극한다. 그의 형식은 ‘형식을 위한 형식’으로 전락하진 않는다. 남성적인 긴장감이 가득하여 박진감이 넘치는 그의 하드보일드한 양식은 이란의 마약 문제를 체감하게 한다. 마약을 다루는 그가 온화하고 부드러운 여성적 양식 대신, 거칠고 폭력적인 남성적 양식을 택한 이유는, 이란 내에서 마약이 남성들의 추상적 권위를 드높이는 '가부장제'와 유착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마약 중독은 빈민가에서 창궐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마약을 흡입하지 않는다. 남성들은 마약을 흡입하며 환각의 세계에 빠져 현실에서 유리된다면, 여성은 남자의 부재를 메우려고 열심히 일한다. 이후 경찰 사마드는 마약 운반책과 공급자들을 필사적으로 추적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남성이 마약으로 무수한 돈을 거머쥔다면, 마약과 연루된 여성은 남편도 돈도 남는 것이 없고, 남편에 의해 운반책이 되어 희생되기도 한다. 마약 운반책으로 적발된 10살이 갓 넘은 소년 바히드에게 그의 아버지가 누명을 씌운다. 그는 아들을 희생하여 교도소에서 빠져 나온다면, 죽은 어머니는 한때 소년이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려 했다. 마약을 추적하는 사마드 또한 마약 공급자 나세르가 제시한 뇌물에 흔들릴 뻔한 순간이 있었으며, 사마드와 하미드는 진실과 무관한 가부장적 남성의 자존심, 복수심으로 수사에 혼선을 빚는다. 즉 남성들은 현실과 무관한 환각적인 욕망, 가부장적인 환상에 젖어있기에 이를 가능케 하는 마약은 결코 근절되지 않고, 그 유혹을 연출로써 보여준다. 또 경찰은 진실을 추적하여 사형으로 단죄하고 끝내려는 자라면, 마약사범들은 추적의 연쇄를 끊고 대신 마약을 이어내려는 자라는 것을 편집으로 보여주며, 즉 루스타이는 형식으로 말한다.      


한편 마약상과 경찰은 가부장적인 남성이라는 점에서 동일하여, 진실보다는 제 권위와 사리사욕의 유혹에 빠지기 일쑤다. 그래서 그 유혹을 만족시켜 주는 마약 문제가 종식되지 않음을 지적하는데, 남성에 의해 현실이 짓밟혀가는 가운데서 이를 재건하는 '여성'을 루스타이가 신작 <레일라의 형제들>에서 주목한다. 일단 영화의 도입부, 루스타이는 카메라를 우아하게 달리 인하여 유유야적 담배를 피우는 이스마일을 포착한다. 이후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그 다음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알리레자와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레일라를 포착한다. 본 도입부에선 총 세 가지가 도드라진다. 바로 ‘카메라의 거리감’, ‘그 카메라로 포착하는 것’, 그것을 잇는 ‘교차편집’이다. 일단 거리감, 도입부에서 루스타이는 클로즈업과 롱숏을 오간다. 처음에는 각 인물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러나 더는 인물을 클로즈업하지 않는다. 인물 대신 공장의 기계, 병원의 의료 장비를 주목한다. 이윽고 그 사물에 의해서 인간이 부수적으로 포착된다. 공장의 기계가 멈추자 알리레자의 노동은 중단되고, 레일라는 의료기구에서 치료를 받는 모습, 즉 기계에 의한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처음에는 인간이 있었지만, 그 인간이 가까워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차가운 기계와 사물이요, 그것에 의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인물을 포착하던 카메라는 롱숏으로 멀어진다. 알리레자와 이스마일은 롱숏에 담긴다. 일단 알리레자는 멀리 있는데다가, 비슷한 노동자들과 뒤섞여 있어 그의 신원을 구별하기 어렵다. 12개월 동안 일한 정당한 봉급을 지불하라는 파업에 참여하는 알리레자는 다른 동료들과 똑같은 노란 헬멧을 착용한 상태이다. 골람의 추도식에 간 이스마일도 마찬가지로, 다른 남성들처럼 수염을 기르고 검은 상복으로 예의를 갖췄기에 구분하기가 어렵다. 즉 이들은 유일무이하게 특유한 개인으로서 떳떳하지 못하다. 기계, 곧 그 기계가 만들어낼 자본으로 좌우되거나, 아니면 똑같은 타인들로 자신을 대신한다. 도입부의 인간들은 자신에게 소외되면서 기계와 타인에게 고분고분해진다. 그것이 도입부의 교차편집에 반영된다.      


세 사람은 모두 제각각의 시공간에 놓여있다. 그들의 시선이나 행동에 의해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서 영화 속 서로는 단절되어 있다. 감독과 편집자에 의한, 영화 외부의 연결이다. 영화 내적으로 유기적이거나 연속적이진 않지만, 외부에서 잇는 교차 편집은 나름의 연속성 내지는 법칙이 있다. 바로 느슨한 ‘매치 컷’이다. 루스타이는 앞선 행동이나 시선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다음 숏을 잇는 것이 아니라, 유사한 숏들을 엮고 이어서 시퀀스를 구성한다. 즉 유사한 것이 반복된다. 이들의 유사성은 다음과 같다. 앞서 언급한 기계에 의해서 각 인물들이 좌우된다. 공장의 알리레자, 병원의 레일라와 더불어, 추도식에 방문한 이스마일도 가문의 '수장'직을 얻기 위해서 ‘선물’을 들이밀며 아첨한다. 즉 인간은 ‘사물’에 의해서 좌우되고, 또 사물로써 연결된다. 또 하나의 매치 컷은 ‘비겁함’이다. 사물로 매치 컷 된 이후에 레일라는 편집에 끼지 않고 오직 이스마일과 알리레자만 남는데, 남겨진 두 남성 모두 겁이 많고 교활하며 비겁하다. 알리레자는 파업 도중 두려움을 느끼고 전열에서 이탈하여 도망친다. 적법한 권리와 몫을 챙기기보다는, 조금의 몫과 안위를 치졸하게 보존한다. 이스마일 또한 마찬가지로, 수장은 가문의 혈족들에게 막대한 선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스마일은 제 가족조차 건사 못하는 모자란 가장이기에 수장이 될 만한 재력을 갖지 않았다. 실제로 막대한 재력을 가진 그의 형제, 가다실리는 수장을 논하는 장소의 문을 닫아 이스마일을 차단한다. 이스마일이 자격이 없다는 듯, 그 논의에 낄 필요도 없다는 듯 말이다. 즉 저 자신에게 변변치 않은 그들은 정당한 제 권리를 팔아서 조금의 이익이라도 챙기려하거나, 아니면 분수에 맞지 않는 이익을 욕심 부린다. 그것을 결정하는 '또 다른 가장'을 고분고분 잘 따른다. 이렇게 도입부에서 알 수 있는 것, 오늘날의 인간과 가부장적 지위는 배금주의와 물신주의가 결정하나 레일라 주변의 남성들은 모두 그 힘이 미비하다는 것, 그럼에도 남성은 가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지 못하고 요행을 바란다는 점이다.      


즉 도입부에서는 오늘날 이란의 여러 상황이 압축되어있는데, 일단 본 극에서 가장 핵심적인 소재는 가부장제다. 수차례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목된 여성학자 베티 리어든은 "가부장제가 안보 위기에 대한 공포 선전으로 지탱되었다"고 주장한다. 남성들은 건강하고 튼튼하다는 이유로 치안이 흉흉한 사회에 진출하여 맞섰고, 그 대가로 사회적 비용을 받았다. 반면 취약하게 평가된 여성들은 위험한 사회에 나설 수 없었고, 남성이 보호하는 집 안에만 머무르며 제 몫을 직접 벌 수 없었다. 가부장제는 "식구들을 건사하고 보호하라"는 명목으로 가장에게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급했다. 하지만 남성에게 건넨 아내나 식구의 몫은 응당 분배되지 않았다. 이렇듯 남성이 사회적 비용을 독식하기 위해선 가부장제의 명분인 안보 위기와 약한 존재들을 필요로 한다는 게 리어든의 설명이다. 영화 속 가부장제도 마찬가지다. 노동으로 사회적 비용을 챙길 수 없는 백발의 노인 이스마일은 이제 가장의 지위에서 내려와 보호받아야 하리. 반면 중년으로서 가정을 꾸리거나, 어엿한 사회적 지위를 갖추는 것이 일반적인 자녀들이 사회적 비용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아들들은 이스마일에게 의존한다. 이스마일은 네 아들을 유약하게 키웠다. 레일라가 말하길 부모는 자녀들에게 '교육'을 제공하지 않았으며, 가장이 보기 싫어하는 행동들을 엄격하게 '체벌'했다. 일단 교육의 부재에 아들들은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없었고, 이에 가정을 꾸리거나 독립할 수 없다. 중년이 되어서까지 사리분별이 불가능한 네 아들은 실업자고, 현재 가정을 유지하는 형제는 파르비즈에 그친다. 나머지 형제들은 이혼하였는데, 파르비즈 마저도 돈이 없어서 레일라의 조력으로 생계를 근근이 이어간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변변찮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운 아들들은 마누셰르와 파르비즈를 제외하곤 얹혀산다. 마누셰르 또한 영화 중반부엔 부모의 집으로 들어온다. 이혼 위자료를 마련하기 위해 제 집의 소유를 포기했다. 또 수년간의 체벌로 가장의 눈에 보기 좋게끔 훈련된 아들들은 행동의 기준이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에 맞춰져 있다.      


체벌과 관련해서 철학자 미셸 푸코는 '생살여탈권'이 가장이나 군주가 가진 가장 강력한 권력이라 말한다. 가장은 죽게 하거나 살게 내버려둘 권리, 또 생존을 위해서 위협하는 자를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그 권리는 가장의 절대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다. 이스마일은 늙었지만 여전히 가장으로서 생살여탈권이란 전권을 휘두른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체벌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어야지만 지켜준다. 그가 자녀의 삶을 결정함에 아들들은 그 밑에서 빌빌 긴다. 아들들은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가 요구하는 조건에 자신을 맞춘다. 파르비즈는 아내가 딸 다섯을 내리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마일의 요구에 따라서 어떻게든 아들을 낳기 위해 계속 아내를 임신시켰다. 겨우 아들이 태어나자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아기의 하반신을 들추어 적나라하게 남근을 보여주는데, 이스마일에게 아들과 손자는 남근 숭배를 위한 도구다. 타인에 의해 좌우되는 목숨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없고, 그 타인의 목적에 맞추어 결정된다. 그 아기는 할아버지가 원하는 '골람'이라는 선조의 이름을 강요받는다. 레일라도 이스마일에 의한 피해자다. 그녀는 사랑하는 연인과 주체적인 결혼을 염원했다. 그러나 부모는 딸이 병에 걸렸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파혼시켰다. 그 이유는 이스마일이 원하는 가문에 딸을 시집보내어 가장이 이익을 챙기기 위함이었고, 그 목적이 아닌 이상 레일라는 그에게 쓸모가 없다. 레일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부하여 지금까지도 미혼이고, 부모와의 관계는 냉랭하고 적대적이다. 심지어 가장은 협박한다. 레일라와 형제들이 빼돌린 금화를 주택담보대출로 빌렸다고, ‘가장의 몫’을 돌려주지 않으면 가장이 지배하는 식구들 모두 길거리에 내쫓길 것이라며 협박한다. 아버지가 삶을 결정하는 형제들은 협박에 벌벌 떨며 금화로 계약한 사업을 파기하고 아버지에게 몫을 돌려주려 한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돌려줄 금화가 과연 그의 정당한 몫인지 레일라는 의심한다. 만약 아버지가 가족을 보살피라는 명목으로 지급된 비용을 식구들에게 정당하게 분배했다면, 자녀들이 그의 돈을 갈취한 것은 범죄이리라.      


그러나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어떤 것도 베풀지 않았다. 레일라는 파르비즈와 그의 아내에게 음식을 챙겨준다. 딸린 아이는 많은데 파르비즈는 실업자다. 그런데 이스마일은 그 조금의 음식조차도 아들이 못 가져가게 한다. 파르비즈가 번듯한 가정을 꾸릴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노예’로서 복속되길 바라는 듯 말이다. 즉 가부장제에서 가장은 아내와 자식들을 건사하고 보호하라는 핑계로 받은 사회적 비용을 식구들에게 분배하지 않고 제 배만 불린다. 가장은 자신에게 비용을 집중하여 식구들을 더 가난하고 유약하게 만들고, 자신은 더 높은 자리인 가문의 ‘수장’직을 집적거린다. 심지어 그는 가장으로서 자격이 없다. 이스마일은 '문맹'이라서 '골람'이라는 글자를 읽지 못할 정도로 무능력한데도 불구하고 식구를 건사한다는 명분, 통념에 의거한 남성이라는 이유로 고도의 사회적 비용을 누린다. 강인한 가장이 유약한 식구에게 나눠야 할 사회적 비용이, 모자란 가장을 강인한 가장으로 포장하는데 사용된다. 이스마일은 가장으로서 최악이란 사실을 은폐하고 완벽한 가장, 많은 사람을 아우르는 권력자로 '보이길' 원한다. 이렇게 유약한 식구를 구제하라는 명분으로 지불한 사회적 비용을 가장 자격이 없는 남성이 자신의 이미지를 꾸미는데 사용하는 게 가부장제의 민낯이라고 루스타이는 분석한다. 자격이 있는 가장이라면 사회로 나가서 식구를 건사할 몫을 챙기고, 경제나 안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 영화 속 가장들은 실제론 무능한데, 그저 보기 좋게 가장으로 포장되었으니 문제를 풀지 못한다. 영화에선 세계 경찰을 운운하는 ‘국가 가장’인 ‘미국’이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 당시 미국을 지배하던 트럼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금값과 이란의 물가가 휘청거린다. 강인한 가장이라면 이를 극복해야 하지만, 영화 속 아들들이나 이스마일과 같은 남성들로 이뤄진 이란은 위기 속에서 식구를 보호하지 못한다. 그런데 인류는 분명 위기를 극복해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가짜 가부장제, 가짜 가장들에 의해서 발발한 위기를 실제적으로 극복한 대상은 여성이었다고 루스타이는 레일라를 통해 말한다.      


영화 내내 레일라는 하나의 몸뚱이가 종합병동이라 해도 할 말이 없는 늙은 부모가 먹어야 할 무수한 약을 챙긴다. 병원에 데려가는 것도 그녀 몫이다. 그런데 남매의 어머니는 알리레자에게 내일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약보다 상위의 처우를 알리레자는 약속하나, 정작 알리레자가 어머니를 병원에 데려간 숏은 연결되지 않는다. 어머니는 약을 주는 딸보다 더 보기 좋은, 병원에 데려가주겠다는 장남에게 미소 짓지만, 실상 그 미소는 실효성이 없다. 대신 원망의 대상은 자신을 실제로 챙겨준 딸 레일라다. 여성은 추한 현실이고, 남성은 보기 좋은 망상이다. 가족의 삶을 망친 것은 남성들이지만, 항상 보기 좋게 포장하고 숭배하는 ‘남근들’은 그럴 리가 없다. 굳은 일을 도맡아 해서 누추해진, 망상을 진실로 깨트리는 레일라가 부정적이기에 원망하며 가장의 책임을 떠넘긴다. 그렇게 여성이 책임진 결과를 남성들이 누린다. 가정의 생계를 고민하는 레일라는 현행 물가상승률로는 네 아들이 전부 실업자인 현 재정상태를 못 버티리라 판단한다. 그래서 일터에서 좋은 정보를 얻고 사업을 추진한다. 그 과정에서 아들들은 우람하고 황홀한 빌딩의 아름답고 보기 좋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한편, 레일라는 낡고 허름한 마누셰르의 집 엘리베이터에 배제된다. 구체적인 아이디어와 계획, 실행은 레일라가 주도했으나, 정작 아름답고 황홀한 이미지와 계약은 아들들이 누린다. 이후 이스마일은 계단에서 고꾸라지거나, 주택 담보 대출로 금화를 샀다고 아들들에게 거짓말한다. 측은하고 가련한 이미지에 홀린 아들들은 계약을 파기한다. 그러나 금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현실을 고려한 선택이 아니어서, 계약금으로 기존 금화 개수를 맞추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사리분별이 불가능해 이스마일의 이미지와 현실을 판단할 수 없는 형제들은 이도저도 아닌, 아버지도, 가정도 구할 수 없는 최악의 결정을 내린다. 반면 레일라는 이스마일의 거짓말과 만행들을 모조리 폭로하며 자신이 지켜야 할 현실을 사수한다. 이스마일의 따귀를 때리며 그의 거짓말에 대적한다. 실제로 유약하고 아무것도 아니며, 다만 사악할 뿐인 가장을.     


그는 서사로 이를 말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연출로 가시화하며 영화로써도 말한다. 앞선 도입부에서 카메라 워킹이 매우 감미로웠다. 이후 결혼식 시퀀스에서도 위압감 넘치는 하이앵글로, 흡사 고풍스럽고 신성한 천상에서 축복을 내리는 듯한 구도로 남성들을 포착한다. 그들은 절대자가 내려다보는 듯한 초월적인 구도에서, 안정적이고도 아름다운 트레블링 숏으로 포착된다. 반면 레일라는 집에서 조카들을 돌본다. 남성들이 집에서 시답잖은 '레슬링' 얘기를 하는 동안, 레일라와 파르비즈의 아내는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느라 ‘허리’가 뻐근하다. 또 이스마일은 부엌 싱크대에서 오줌을 싸는 버릇이 있고, 그 뒤치다꺼리를 하는 사람도 레일라다. 레일라의 고행은 남성들을 포착한 연출과 상반된, 아름답기보단 거칠게 흔들려서 멀미가 날듯 불안정한 핸드 헬드로 담긴다. 구도 또한 아이 레벨 숏으로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가장들에게 힘겨운 일을 하라고 사회적 비용을 집중했고, 또 온 나라가 나서서 그들을 숭고하고 아름답게 포장했다. 그러나 루스타이는 가장 이미지의 이면과 실체를 들춰내어, 실제로 가정을 건사하는 현실적인 흔들림이 누구에게서 비롯했는지 밝힌다. 레일라는 알리레자가 "힘겨울 땐 도망치고, 장밋빛일 땐 가족에게 돌아온다"라고 말하며 정곡을 찌른다. 가장 및 ‘예비 가장’들은 보거나 듣기 좋은 일에만 나서고, 정작 그것을 위해 짊어져야 할 힘든 책임은 여성에게 떠넘긴다. 남자들은 가장을 포장하고 칭송하는 '아름다운 이미지'만 누린다. 이스마일뿐만이 아니라 레일라의 형제들 또한 마찬가지다. 마누셰르는 전문직 분위기를 풍기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있다. 파하드는 거기에 담긴 줄 알았던 여권을 되찾기 위해서 비밀번호가 걸린 가방을 무식하게 열어젖힌다. 아름답던 이미지가 거칠게 흔들리며 폭로되는 것은 그의 가방 안에 전문적인 서류들이 아니라 하잘 것 없는 '과자'가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마누셰르가 그간 숨겨온 이혼 사실과 위자료, 횡령 사건에 얽혔다는 사실이 탄로 나고, 알리레자 또한 실업했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기 싫었다. 부끄러워서, 대신 내세운 것은 번듯한 이미지…      


이스마일 또한 마찬가지로 식구들에겐 금화 반 푼어치도 베풀지 않은 주제에, 수장이 되고자 식구들에게 향해야 할 돈을 아득바득 긁어모아 자신을 ‘연출’한다. 그리고 결혼식장에 들어찬 무수한 남성들의 선망과 부러움, 존경이 가득 찬 시선을 받는다. 그러나 존경할만하지 않은 인물에게 향하는 시선은 허위다. 그래서 레일라는 이스마일이 수장이 되기 위해서 제공하기로 한 금화 40푼을 빼돌린다. 그 돈을 이용해 자식들이 사업체를 꾸리려는 ‘화장실’은 현재엔 불결하고 추한 공간이다. 그러나 레일라는 그곳의 투자 가능성, 경제적 가치를 본다. 이를 통해 가족 전체를 건사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다. 반면 결혼식장에서 호사스러운 지위를 누리는 이스마일은 화장실에 제 돈을 썼다는 것이 불쾌하고, 오직 ‘보기 좋은 것’만 볼 줄 아는 그는 보기 좋지 않은 것의 가치를 모른다. 보기 좋은 결혼식장은 가족 모두의 삶을 개선하기는커녕, 허위의 명예를 대가로 가족들을 무한 착취한다. 식구들이 가난한 와중에, 수장이 된 이스마일은 비교적 번듯한 친척들에게도 선물을 돌려야 하는 것이 의무다. 가부장적으로 인정받고 칭송받으며 말초적인 쾌락을 느끼고 싶은 가장은 가정을 쥐어짠다. 제 가족에게 집약되어야 할 사회적 비용이 애먼 데로 향한다. 그 희생을 여성이 짊어진다. 영화에선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는 장면’이 반복된다. 레일라는 늘그막까지 아득바득 계단 위를 오르고 상승하려는 아버지를 끌어 내리려고 한다. 그 이유는 가장이 보살펴야 할 자녀들이 밑바닥에 뒹굴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레일라의 추궁에 이스마일은 계단에서 내려오다 고꾸라진다. 이렇게 영화 속 여성은 남성이 보기 좋은 허위의 이미지를 누리는 동안 희생된 현실을 재건하는 자, 가장의 방종에 의한 식구들의 원망이 타자화된 자, 남성들을 현실로 되돌리는 자다. 영화에선 상징으로 '물'이 등장한다. 이스마일의 집은 항상 물이 부족하다. 물이 부족하다면 꼭 필요한 생계를 위해서 써야하지 않을까? 그런데 남성들은 과시하기 좋은 결혼식에 가기 위해, 거기서 양복을 입은 자신을 뽐내기 위해서 물을 쓴다. 보기 좋고 번듯한 가장의 이미지만을 위해서…     


반면 레일라는 그 물로 조카들과 놀아주거나 설거지, 청소 등 꼭 써야할 곳에 쓴다. 그녀가 채워놓은 대야의 물을 길고양이가 허겁지겁 마시며 목을 축인다. 여성은 물을 현실, 생명을 위해 사용한다. 남성이 낭비하는 물을 여성이 점유하며 생명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떡해야 할까? 가부장적인 신화 속 가장이 되기 위한 아들들은 아버지를 죽이거나 몰아낸다. 그리스 신화 속 우라노스-크로노스-제우스로 이어지는 계보와 그 제우스가 두려워한 '아들의 탄생', 인간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며 그의 아내이자 자신의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크로노스가 왕위를 지키기 위해 아이들을 먹어치웠고, 제우스가 제 왕위를 찬탈할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매티스를 삼켜버렸듯, 이스마일 또한 제 가장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자 아들들을 나약하게 키웠다. 가장의 아귀에 집어삼켜진 머저리 같은 아들들은 찌꺼기를 받아먹고자 그를 감히 넘어 설 수 없다. 그렇지만 주체적인 성인이라면 마땅히 대적해서 권리를 찾아야 하고, 루스타이는 단순 가장의 자리를 대체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여성들을 긍정하며 궁극적으로 가부장제의 철폐를 논한다. 계약도 파기했고 금화도 사지 못한, 그야말로 최악의 난관에 부딪힌 형제들은 거대한 빌딩 앞에 앉아있다. 그런 와중 알리레자가 ‘탱크’에 비유하는 거대한 차에서 여성들이 하차하고 빌딩 안으로 진입한다. 그 순간을 루스타이는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한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하잘것없는 욕구에 휘둘리고 자신의 무능함에 외국으로 도주해야하는 남성, 반면 전문직으로 추정되는 여성들은 빌딩 안으로 진입한다. 서로가 교차하고 그 순간을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한다.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지연되었기에 ‘비일반적인 시간’, 이제 일반적인 남성의 시간은 비일반적인 여성의 시간으로 전복되었다. 여성은 일반적으로 흘러가던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몫을 느리고도 길게 붙잡는다. 남성들이 누리던 허위의 이미지를 깨부수고 현실을 폭로한다.      


결말에서 파르비즈 딸의 생일에 이스마일이 사망한다. 남근을 달고 태어난 아기를 위해서 딸들을 등한시하고 원망하던 가장이 사라진다. 이제 무수한 손녀들은 풍선을 빨리 부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고, 더 많은 딸들이 생일파티에 초대되며 가부장제가 가로막아 축복받지 못했던 삶을 비로소 축하받는다. 알리레자는 그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만, 레일라는 묘한 미소를 짓는다. 비로소 여성은 족쇄에서 해방된다. 생일파티에선 ‘가짜 눈’이 내린다. 차갑지도 않은 눈이 강한 척 허풍을 떨던 가장의 목숨을 앗아간다. 여성의 탄생을 축복하는 눈은 아주 희다. 가장에 의한 여성이 아닌, 순수한 여성을 축복하고 정화하듯. 무엇보다 남성이 악용하던 물은 이제 여성을 축복하는 물로 뒤바뀐다. 또 본 장면은 황홀하고 순수하다. 드디어 영화는 아름다워야 할 대상을 아름답게 포착한다. 즉 루스타이는 말한다, "가장과 가부장제는 죽어야 한다"라고. 이로써 남성에게 집약되던 사회적 비용을 여성도 만질 수 있는 법이요, 신화적인 이미지가 해체됨으로써 이에 가려 보이지 않던 현실, 희생하던 여성이 비로소 보인다. 많은 돈이 오가는 중대한 결정이나 결혼식장에서 배제된 '히잡을 쓴 여성'들은 가장이 사라지며 비로소 제 얼굴을 찾을 것이다. 남성들 또한 마찬가지다. 기존 가장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모자라게 자라난 남성, 그러나 자격이 없어도 가장이 되어야만 하는 남성들은 가장의 못된 습관인 '허위의 이미지'를 꾸며서 가부장적인 세계에서 책임 없는 쾌락만 누리려고 한다. 실상 마누셰르는 신분을 노출할 수 없어서 파하드의 여권을 빌려 겨우 출국하는, 포장된 이미지와 상반된 빈곤한 존재인데 말이다. 그 가장들로 가득 찬 이란은 점점 더 살기 어려운 나라로 전락한다. 그러나 가장의 몫을 누리고자 아첨하던 남성들이 아버지에게 맞서면서 주체적인 자신을 회복한다. 후반부의 알리레자는 공장이라는 가장이 3개월분의 봉급만 주겠다는 간계에 휘둘리지 않는다. 12개월분이 아니면 안 받겠다면서 제 권리를 위해 저항하고 그들이 가로막는 '유리창'을 깨부순다.  


루스타이는 이 모든 과정을 흥미진진한 장르 영화 문법으로 풀어낸다. 그 이유는 대중적으로 이란 가부장제의 해악을 널리 폭로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장르영화의 특징인 '감상자의 눈에 즐거운 이미지'를 가부장제가 만들어내는 ‘보기 좋은 가장의 이미지’를 폭로하는 장치로 삼기 때문이다. 결혼식장에서 춤을 추는 남자들을 구경하는 감상자는 매우 즐거울 것이다. 덩실덩실 춤사위를 발리우드 영화처럼 흥겹게 포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숏들은 단지 허울 좋게 아름답고 즐거울 뿐, 본 심미성에 대한 근거나 실체가 없다. 금화 40개를 레일라가 빼돌린 것이 탄로 나서 수장직을 박탈당하니, 즉 몰락이 예고된 그들은 가장이 된 것처럼 싱글벙글 웃어선 아니 되었다. 앞서 언급한 트레블링 숏과 핸드 헬드의 대비, 그러나 이스마일은 그렇게 아름답게 포착되어선 안 되는 존재다. 알리레자가 파업에 참여하던 시퀀스의 급박한 카메라 워킹과 자극적인 크래쉬 줌 또한, 노동자가 권리를 호소하는 처절함이 아니라, 이기적인 그가 전우를 배신하고 도망치는 열등함과 비겁함을 쾌로 포장했었다. 단지 보기 좋을 뿐, 실체 없는 남성의 운동은 제자리걸음이거나 추락으로 귀결되지, 실제로 보기 좋아야 할 성공을 잇지 못한다. 루스타이는 그간 섣불리 보여주지 않던, 운동의 추한 결과를 밝힌다. 즉 보기 좋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보기 좋을만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 루스타이는 가부장제의 신화로 포장된 남성들의 이미지를 장르영화로써 의심한다, 맹목적인 쾌에 매혹되지 말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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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422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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