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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29. 2023

카를로타 마티네즈-페레다, <피기>

진실과 욕망, 무엇에 솔직해야 할까

카를로타 마티네즈-페레다(Carlota Martinez-Pereda), <피기>(Piggy) 

- 진실과 욕망, 무엇에 솔직해야 할까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070

“그렇다면 진실이란 사용하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진실이 사용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올바른 것이며 정확한 것일까?” 그때 진실은 어떤 목적을 가진다는 말인가?“ -잉게보르크 바하만-

스테레오타입은 특정한 대상이나 집단에 대한 일반화되고 고정된 견해를 의미한다. 스테레오타입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인종, 민족, 계급, 성별 등의 일반성, 편견에 맞추어 판단한다. 스테레오타입과 대상이 일치하기를 ‘기대’하며, 스테레오타입에 해당하지 않으면 의아하게 여기거나 심지어 대상을 부정한다. 그래서 스테레오타입에 편향된 사람들은 상대의 진실을 접할 수 없다. 또 스테레오타입에 맞추어 재단된 사회에선 개인의 특유함을 검열하고 부정한다. 개인은 개인으로서 자유로울 수 없고, 오직 스테레오타입에 맞춰서 행동해야만 한다. 즉 스테레오타입은 개인의 자유와 솔직함을 방해하는 가장 악명 높은 걸림돌이다. 본 스테레오타입을 줄곧 탐구해온 스페인의 영화감독이 있다. 바로 1975년 마드리드 태생의 카를로타 마티네즈-페레다로 지금까지 다수의 단편으로 스테레오타입을 탐구해왔으며, 본 작품 <피기>가 그녀의 장편 데뷔작이다. 그녀의 가장 유명한 단편은 <라스 루비아스>와 본 작품의 원형이 된 단편 <피기>다. 두 작품은 전혀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카를로타가 줄곧 관심을 갖는 '스테레오타입'을 탐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고, 이에 관한 한 쌍의 영화로 볼 수 있다. <라스 루비아스>의 주인공들은 솔직하지 못하다. 금발 여성들이 소비자라면 흑발 여성 페파는 그들의 물건을 계산해주는 캐셔다. 어느 날 페파는 계산대에 지갑을 떨어트린 한 금발 여성의 신분을 훔친다. 그리고 '물건을 소비하는 부유한 금발'이라는 스테레오타입에 따라, 머리만 염색한 그녀는 별 의심 없이 훔친 신분을 누린다. 이후 다른 금발 여성을 납치하여 또다시 신분을 갈취하려는데, <라스 루비아스>에서 사람들은 스테레오타입을 위해서 죽어야하고 살아남아도 스테레오타입에 따라서 살며 자신으로선 죽어야 한다. 이로써 카를로타는 진실은 없고 오직 스테레오타입과 이미지로만 점철된 삶, 이로 건설된 사회를 고찰한다. 반대로 <피기>는 스테레오타입과 정반대의 인물 사라가 등장한다.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연약하고 파리한 이미지가 아니라, 고도 비만으로 살이 많이 찐 모습이다.      


<라스 루비아스>에선 사회가 요구하는 '금발'이 되기 위해서 본래 신분을 버린다면, <피기>에서의 ‘비만’은 자신의 식욕에 솔직하다는 얘기고, 실제로도 영화 속 사라는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헤드폰을 항시 착용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바로 오줌을 싸는 등 제 몸과 욕구에 솔직하다. 그러나 솔직함이 사회가 요구하는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녀불문 사라를 놀리고 괴롭힌다. 제게 솔직한 존재는 이를 거부하는 사회에 의해, 휴가가 끝나서 ‘텅 빈 수영장’, 일반 도로가 아니라 ‘빗길’로 밀려간다. 나를 포기하고 타인과 사회가 원하는 스테레오타입을 택하면 살아남고, 반면 내게 솔직하면 사회가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과연 장편 <피기>에서는 스테레오타입이 아니라, 솔직한 나를 선택했을 때의 딜레마와 고충을 어떻게 더 확장했을까? 일단 단편 <피기>는 장편 <피기>의 대략 10분경부터 20분경에 해당한다. 장편 <피기>는 단편 <피기>의 전/후를 확장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확장하는가? 일단 카를로타는 연출로써 개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숨 막히는 스테레오타입을 가시화한다. 가장 먼저 스테레오타입이 영화의 카메라 움직임을 좌우한다. 수영장에선 향후 무수한 사람들을 살해할 '뚱뚱한 살인마'가 포착되고, 그 주변으로 웨이트리스 로사와 안전요원 로베르가 자유롭게 누비고 있다. 그리고 사회가 기대하는 스테레오타입에 해당하는 날씬한 사람들은 처벌이나 검열당하지 않고 어디로든 오고간다. 그들은 뚱뚱한 사람보다 우월적인 위치에서 로베르를 무시하며, 이들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유려하게 움직이고 수직적으로 깊숙하게 이동한다. 그러나 이전까지, 친구들에 의해서 SNS에 마음대로 게재되고, 또 아순에게 붙잡혀 외부에 나가는 것이 제한적인 사라는 실내에 우두커니 머물고, 이로써 카메라도 고정되어서 조금의 미동도 없다. 이후 식구들과 집에서 식사하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움직이지만 3차원적인 수직 이동을 선보인 수영장 시퀀스에 비해서, 2차원적으로 수평 이동하는 식사 장면은 매우 단조롭다.      


제한적인 움직임으로 포착되는 사라가 수직적인 이동이 가능할 때는 수영장의 비만인들을 좌지우지하는 '보편적'인 날씬한 사람들과 금발이 사라졌을 때, 그리고 가족이 강요하는 정육점의 노동이 끝났을 때다. 즉 이러저러하게 보이길 요구하는 시선 아래서 이동은 제한되고, 그 시선이 해제되면 움직임은 자유롭다. 그래서 다시 시선이 들이닥치면 움직임은 멈추거나 제한되는데, 범죄를 목격하고 살인마의 눈에 띈 사라가 황급히 돌아오는 장면에서 카메라 워킹은 편평한 수평 이동으로 뒤바뀌고, 이에 깊고 입체적으로 그녀를 조망하지 못한다. 이후 살인마는 사라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아순이 사라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는 장면에서는 수직적인 이동이지만, 그 수직적인 이동조차 뒤에서 살인마가 스토킹을 하고 있기에 방향이 제한된다. 또 살인마의 비밀 아지트에서 피해자들은 묶여 있고, 공간은 미로처럼 구불구불 사방이 막혀 있어 움직임이 제한된다. 이렇게 화면비, 움직임 모두 다 제한적인데 과연 움직임은 능동적이고 유려하게 변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는 쉽지 않다. 움직임은 숨길 수 없는 사라의 두려움과 공포를 가시화한 핸드 헬드에만 오직 허용된다. 그래서 제한을 뛰어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실재와 환청의 결합이 특징이다. 본 연출은 영화에서 두 차례 등장한다. 일단 아주 평화로운 휴가철의 수영장을 시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시각은 살인 사건이나 폭행이 발생하지 않았으니, 둘 중 하나는 허위이거나, 아니면 각각은 별개이다. 이윽고 그 비명은 로베르와 로사에게 무시당한 뚱뚱한 남자가 상상했을 '환청'임이 암시되고, 이후 그는 실제로 그들을 죽여서 수장시킨다. 또 사라는 살인마가 자신을 놀리던 또래 소녀들을 납치한 것을 보고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와 목욕한다. 그녀는 당시 사건을 마주한 순간 너무 두려운 나머지 오줌을 쌌고, 또 살인마가 건네준 클라우디아의 수건에는 피가 묻어있어, 증거가 그녀 몸에 묻은 셈이다.      


그러나 목욕으로 이를 은폐한다. 시각은 진실을 지우는 그녀, 반면 청각은 마찬가지로 비명이 울려 퍼지는데, 이는 살인마와 달리 진실이다. 전자는 계획을 현실에 실현하는 반면, 후자는 진실을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는 양심의 비명이다. 과연 어떤 환청이 승리할 것인가? 이러한 본 작품은 숏의 잘림이 잦다. 도입부에서 정육점에서 도축되는 고기가 포착되고, 이후 사라의 각 신체 부위를 카메라가 클로즈업하여 각기 다른 숏 안에 담아내니, 흡사 가족에 의해서 사라는 절단된 듯하다. 이후에도 사라는 페드로를 몰래 흠모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외부 검열에 의해서 불발되고, 그녀를 돼지나 베이컨이라 놀리는 날씬이들에 의해 기존에 가졌던 물품이 도난당하고, 수영복은 찢긴다. 그렇게 검열과 괴롭힘에 의해서 사라는 계속 ‘잘려’나간다. 영화의 빠르고 잦은 편집이 이를 가시화한다. 후반부도 마찬가지다. 보편적인 스테레오타입은 아니지만 살인마를 위한 피해자와 사라가 만들어지자, 기존의 그녀들은 절단되어 현재로 이어낼 수 없고, 또 탈출이나 구출이 그의 방해로 불발됨에 그녀들의 삶은 잘려나간다. 이와 더불어 숏의 분절은 두 세계를 나뉜다. 정육점 안의 사라와 외부에 놓인 친구들의 세계, 친구들이 SNS에 그녀를 무단으로 게재한 세계와 이를 바라보는 사라의 눈 등을 분리한다. 나아가고 싶지만 닿을 수 없고 불가능한 세계, 사회가 설정한 스테레오타입에 부합하지 않음에 차단 및 언팔당하는 세계, 반면 가족들과는 하나의 숏에 놓이긴 하지만 그녀가 이를 원치 않음에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살인마가 사라를 강제로 태우고, 자신의 아지트로 데려가는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과연 사라는 강제로 분리되거나 배척당한 세계와의 화합을, 또 강제로 동거하게 된 세계에서 자신을 분리할 수 있을까? 본 작품의 미장센은 여름날이라서 색상 자체는 매우 다채롭고 환하다. 그런데 어딘지 채도가 낮아서 흐리고 차가운 느낌이다. 흡사 세계의 피상적인 화사함에 안주해선 안 될 것만 같은 불쾌감, 미심쩍음이 이중적인 미장센에 암시된다. 그것이 서서히 까발려지기 시작한다.   


카를로타는 화사함을 누리는 사람들이 짓밟는 피해자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들 시점에서 비추고, 낮이 서서히 밤과 어둠으로 변하며 드러나는 실체를 포착한다. 그 스테레오타입과 실체는 아주 좁은 4:3 화면비에 담긴다. <피기>에서 설정된 4:3 화면비가 스테레오타입을 가시화하는 본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형식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선 본 화면비에 도마, 칼, 고리, 그릇 등 정육점에서 사용하는 사물을 담아낸다. 오직 하나의 사물만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 그것 이상을 담기에 화면비의 좌우는 너무 좁다. 그렇게 담긴 사물들은 인간의 목적에 좋은 것만 남겨져있다. 고기를 부위별로 나누고 토막 내는 목적에 말이다. 이후 그 사물들을 이용하여 절단한 돼지머리, 다짐육 등을 담는다. 군침이 도는 맛있는 고기들은 감상자의 쾌를 자극하기에 보기가 좋다. 하지만 고깃덩이로 전락하기 이전의 동물들은 인간의 눈에 보기 좋지 않았거나, 아예 보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동물들은 인간이 제게 부여하는, 잡아먹히는 가축이란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영화에선 스테레오타입에서 달아난 동물과 붙잡힌 동물이 각기 포착된다. 바로 농장을 탈출한 황소와 사라네 집에서 키우던 반려견 스파키다. 그 중 황소는 영화 내내 잘 보이지 않고 이따금 포착되는 반면, 스파키는 한번 보일지언정 또렷하게 잘 보인다. 황소는 투우소나 식육용 소라는 인간의 뻔한 스테레오타입에서 달아난다. 스테레오타입에서 달아나면 이를 기대하는 시선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반면 스파키는 보인다. 다만 스파키는 살아있지 않다. 사라 가족은 세상을 떠난 스파키를 ‘박제’했다. 반려견으로서 스파키가 그립고 보고 싶기 때문, 그 기대를 벗어나는 스파키를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스파키는 죽어서도 반려견이어야 하는 스테레오타입에 갇힌다. 이렇게 영화의 4:3 화면비에 담긴 사물이나 동물들은 스테레오타입의 전형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목적, 기대, 감각을 충족시킨다.      


이 좁은 화면비에는 ‘보는 사람에게 좋은’ 사물이나 동물만 담기지 않는다. ‘보는 사람을 위한 인간’도 담긴다. 사냥당한 동물이 먹기 좋은 고기나 피소시지로 만들어져 고분고분해지듯, 인간 또한 다른 누군가의 눈에 보기 좋게 재단된다. 일단 사회통념 상 긍정적인 스테레오타입을 따르는 인간이 포착된다. 영화 속 부모들은 자식이 공부를 잘 하고 일을 도와주며 교우관계가 괜찮은, ‘좋은 자식’의 스테레오타입을 막연히 기대한다. 그 기대에서 엇나가는 자식, 불행하거나 가슴아파하는 자식을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영화 속 아순이나 엘레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딸은 그럴 리 없어!", 또 아순은 사라의 마음이 자신의 목적과 마냥 같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며 자녀들을 마구 노동에 부려먹는다. 사라의 남동생이 냉장실에 널브러져 무목적한 놀이를 즐기고 있으니, 누나는 동생을 타박한다. 부모의 뜻에 들어맞지 않을 것이라며 말이다. 만약 사라가 그 기대에서 벗어난다면 아순은 사라를 다그치고 꾸짖는다. 그래서 사라는 부모가 기대하는 스테레오타입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친구들에게 ‘돼지’라고 놀림을 당한 것, 수영장에서 익사 당할 뻔한 사실을 고백하지 못한다. 설령 사라가 스테레오타입으로 위장하지 않더라도, 아순이 나서서 사라를 스테레오타입으로 꾸민다. 실종 사건을 진술하기 위해서 사라는 경찰서에 가는데, 아순은 미성년자인 딸을 대신해서 부모가 기대하는 '선량한 딸', '무고한 딸'을 진술한다. 또 우리가 스테레오타입에 맞춰서 ‘보고 싶어’ 하거나 ‘기대’하듯, 스테레오타입은 아니지만 ‘보고 싶거나 기대하는 사람’들이 포착된다. 사라는 자신과 부모님을 '아기돼지 삼형제'라고 놀린 사악한 여자애들이 수모를 당해도 싸다고 생각한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놀림을 당한 살인마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살인마는 뚱뚱함을 비하한 사람들을 자신이 보고 싶은 '피해자', '주검'으로 매달아놓고 전시한다. 이를 사라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그녀의 기대도 흡족해진다. 또 살인마는 사라를 자신의 '여자친구'로서 보고 싶다. 그래서 사라와 그녀 가족을 ‘스토킹’하며 자신의 기대에 맞출 수 있는 통제 속에 둔다.      


이렇게 4:3 화면비에 담기는 스테레오타입이나 기대한 이미지는 모두 클로즈업으로 포착되어, 대상을 보고 싶어 하는 기대에 부응하고 가까워진다. 그런데 이 화면비에 스테레오타입이나 보고 싶은 이미지만 담기는 것은 아니다.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난 보고 싶지 않은 진실 또한 담긴다. 뚱뚱함은 보편적인 미적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다. 즉 보고자 기대하진 않는다. 이에 영화 속에서도 다들 보고 싶지 않은 뚱뚱한 사람들을 박해한다. 또 부모 입장에서 '자녀의 실종', '나쁜 자녀'를 직면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스테레오타입에 들어맞지 않은 진실을 긍정하지 않고, 그 진실들을 스테레오타입이나 기대에 맞춰서 재단한다. 뚱뚱한 사람들은 보기 싫다. 그러나 잡아먹혀서 내 혀를 즐겁게 하는 돼지처럼 괴롭히거나 사냥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영화에선 비만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돼지'라는 스테레오타입에 가둬서 취급한다. 베이컨이라고 놀리고, 또 사라를 뜰채에 가두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기대하지 않은 대상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도록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대상이 보고 싶은 데로 '도축'하고 '궁지'에 몬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 또한 마찬가지다. 딸들이 실종되었지만 그녀들은 '파티광'의 전형이기에 다들 안 좋은 일이 있을 거라 예상하기는커녕, 파티를 하느라 귀가가 늦는 것이라 지레짐작한다. 그러나 스테레오타입에 맞춰 태평하게 기대하는 동안 실종된 세 여성 중 한 명은 사망했고, 클라우디아는 한쪽 팔을 잃었다. 사라는 살인마가 가져간 휴대폰을 되찾으러 나갔다가 슬그머니 되돌아와 세탁기로 그와 만난 흔적이 묻은 옷을 빨지만, '뚱뚱한 딸'이란 스테레오타입으로 그녀를 판단하는 아순은 세탁기를 돌리며 증거를 은닉하는 딸의 진실을 감히 의심하지 못한다. 딸이 배고파서 냉장고를 뒤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젊은 경찰 후안-카를로스는 아버지가 상사 경찰이다. 아들은 사라를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아버지는 지레짐작하여 아니라 단언하고 자신의 생각을 아들에게 강요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가진 스테레오타입과 달리 후안-카를로스가 옳았다.      


클라우디아의 엄마 엘레나는 딸이 사라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듣고 "내 딸은 그럴 리가 없다"며 손 사레를 친다. 스테레오타입에 갇힌 딸만을 기대하고 진실을 외면하니, 뚱뚱한 사람을 도발하여 실종된 딸의 진실을 추적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렇게 영화의 좁다란 4:3 화면비는 스테레오타입을 가시화한다. 스테레오타입만을 옹졸하게 허용하는 아주 좁은 공간임과 동시에, 진실을 스테레오타입에 가두고 재단하는 편협한 프레임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클로즈업에서 멀어지거나, 4:3 화면비 바깥으로 달아나야 한다. 사라는 자신을 스테레오타입에 가두는 아순의 시선, 또래들의 SNS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사라로 매순간 클로즈업된다. 그런 와중 잠시 시선이 약화된 틈을 타서 사라는 수영장에 간다. 본래 카메라에 가까웠던 사라는 수영장에 가면서 점점 더 멀어지고, 이윽고 프레임 바깥으로 이탈한다. 카메라와 프레임에서 멀어지는 연출은 경찰서에서 귀가하는 장면, 어머니의 지시를 무시하는 숏에서도 마찬가지로, 스테레오타입을 기대하는 시선에서 멀어질 때 인간은 자유로워진다. 그 수영장에서 괴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목격한 사라는 인적이 드문 도로로 헐레벌떡 도망친다.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된 사라는 해방되는가? 그러나 멀리서 차가 한대 다가오고, 그 차를 모는 청년들은 사라를 목격하여 베이컨이라고 놀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뛰어도 그들에게서 달아날 수 없는 사라는 다시 카메라에 가까워져 풀숏, 미디엄숏으로 포착되고 스테레오타입에 갇힌다. 스테레오타입에 의해서 진실이 설자리는 좁다. 스테레오타입에 해당하지 않는 사라와 살인마의 진실을 다들 원치 않자 외부에선 설자리가 없고, 결국 사적인 ‘집’과 으슥한 ‘아지트’로 숨어든다. 특히 사라는 날씬한 스테레오타입을 닦달하는 아순을 피해서, 오직 사라 자신만 허용하는 ‘좁다란 방’으로 파고든다. 이런 살인마와 사라는 '물'을 좋아한다. 스테레오타입에 따른 구체적이고 엄격한 검열에 처한 개인은 추상적이거나 유연하기 어렵다. 반면 폐쇄적인 스테레오타입과 달리 물은 변형가능성으로 가득하다.      


사라는 아순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텅 빈 수영장에 갔고, 소녀들의 놀림에서 달아나기 위해 다이빙했다. 사라가 수영장으로 가는 길목은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된다. 아득해서 잘 보이지 않는, 그래서 모호한 대상을 상상으로 채워 넣거나 추측하는 익스트림 롱숏처럼 물은 확실함에서 멀어져 추상적이다. 이렇듯 변형의 여지가 많은 액체는 스테레오타입을 파기할 수 있으나, 한편 그 가능성이 우리가 필연적으로 머물러야 할 지상을 과도하게 변형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일반적인 지상과 달리, 영화 속 수중에는 시체가 수장된다. 또 사라와 살인마는 물과 더불어 ‘어둠’ 속에서 자유롭다. 빛으로 가득한 낮엔 스테레오타입에 따라서 보여야 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스테레오타입에 따라서 진실을 괴롭히고 검열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선 특정한 무언가로 보여야할 필요가 없다. 투우소나 식육용이 아니게 된 황소는 어둠 속을 거닐고 있다. 황소처럼 사라는 밤에 외출하기가 더 편하다. 진실은 어둠 속을 숨어 다닌다. 또 페드로는 실종자들을 최후로 목격한 사라를 스테레오타입에 따라서 의심한다.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며 말이다. 그러나 어두운 밤에 페드로가 보고자 했던 사라는 보이지 않고, 대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울먹거리는 사라를 위로하고 이해한다. 이와 동시에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을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낮과 달리, 이를 감시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살인 피해자들이 발생한다. 산 사람은 주검으로 전락하고, 뚱뚱한 사람들을 놀렸던 소녀들의 손에 매듭이 묶인다. 즉 어둠과 물은 낮과 지상에서 묶이지 않던 사람들을 묶는 가능성도 내포한다. 결국 낮과 지상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이기에, 카를로타는 물과 어둠을 무제한적 가능성을 전적으로 긍정하진 않는다. 작품의 결말에서 카메라는 수중은 아니지만 흡사 수중의 자유로운 움직임과 같은 드론의 '하이앵글 숏'으로 지상을 포착한다. 즉 우리가 사는 지상에서 물의 유연함과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에 솔직하고, 무엇이 제한되어야 하는가?      


이를 사라의 ‘폭식’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사라는 항상 폭식하진 않는다. 폭식을 유도하는 기폭제가 있다. 그녀는 자신이 목격하긴 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엔 두려운 사실을 숨길 때 과자를 꺼내 먹는다. 또 증거가 될 수 있는 팔찌를 훼손함과 동시에 사탕을 사서 먹는다. 불안한 상황에서 먹을 게 없다면 머리카락을 씹거나, 헤드폰을 끼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들으며, 제 방에 있다면 자위를 즐긴다. 즉 그녀는 부정직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솔직하기 위해서 구미가 당기는 무언가를 취식하며, 정직한 욕구 일부를 회복한다. 하지만 정작 정직해야 할 진실은 증언하지 못하고, 솔직하지 않아도 될 것엔 억지로 솔직하다. 카를로타는 진실 대신 선택한 ‘욕구의 솔직함’을 경계한다. 영화 속 솔직한 욕구는 스테레오타입이나 보고 싶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로써 진실을 훼손하는 폭력이다. 내 욕구에 솔직하기 위해서 동물이든 타인이든 도구로 삼아 사냥·도축한다. 또 어둠 속에서 솔직한 두 존재, 황소와 살인마가 마음껏 날뛰다가 서로 충돌한다. 황소는 즉사하고, 차에 탑승했던 두 사람도 다친다. 즉 솔직한 욕구는 충돌과 파멸을 자아낸다. 그래서 솔직한 욕구를 멈추고, 대신 진실에 솔직해야 한다. 박해를 피해 어둠 속에 진실을 숨긴 사라는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빛, 곧 손전등과 불꽃놀이, 조명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결말의 사라는 어둠에서 빛으로 한 발짝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내디딘다. 비로소 서로의 진실을 긍정하게 됐을 때 광명을 찾는다. 사라는 살인마의 욕구와 바람이 덧씌워진 소녀들을 자유롭게 해방시킨다. 사라는 본래 클라우디아와 친구였지만 스테레오타입이 둘의 우정을 갈라놓았다. 그러나 클라우디아는 사라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라 또한 그녀를 사냥하지 않고 구조하며 스테레오타입이 씌워지기 이전으로 되돌아간다. 이후 사라는 피범벅이 된 상태로 살인마의 아지트에서 탈출한다. 피가 묻은 대상을 다들 불결하게 여긴다. 소녀들이 정육점을 대하는 태도, 생리가 터진 사라를 대하는 아순이나 페드로 아빠의 반응이 피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의 전형이다.  

    

그러나 페드로는 피 묻은 사라를 의심하거나 곁눈질하지 않고 그저 도와줄 뿐이다. 이렇게 스테레오타입을 이용해서 진실을 박해하지 않을 때, 더는 진실을 밝히는 빛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실은 제자리를 찾는 법이다. 즉 카를로타는 스테레오타입이나 각자의 기대, 솔직한 욕구를 현실에 무리하게 대입하다보면 충돌이 일고, 자유롭고 진실한 개인이 해를 입는다는 것을 <피기>에서 탐구한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에게 바라는 상을 덧씌우기보단, 그저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긍정해야 진정 자유로워질 것이다. 카를로타는 스테레오타입이 씌워지기 이전의 생생한 진실을 아주 적나라한 연출로 보여준다. 진실을 잘 부각하게끔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파격성도 특징이다. 신예 시네아스트의 패기가 느껴지는 작품, 다만 연출에 비해서 스테레오타입을 탐구하는 깊이가 아쉽다. 가족 간 스테레오타입을 요구하는 이유는 꽤 충분하지만, 왜 사회가 날씬한 상을 요구하는지, 물론 우리는 ‘보기 좋을 거란’ 이유라고 추측할 수 있긴 하지만 좀 더 상세했어야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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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426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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