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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02. 2023

주앙 페드로 로드리게스, <도깨비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불꽃

주앙 페드로 로드리게스(Joao Pedro Rodrigues), <도깨비불>

(Will-o'-the-Wisp) -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불꽃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073

“땅보다 하늘이 더 단단하고 가차 없는 장소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동서고금에서 불은 성욕과 깊이 연관된다. 인도의 불 제물인 만타나의 도구, 프라만타를 통해 불과 성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프라만타를 이루는 밑에 구멍이 뚫린 나무는 음문, 그것에 마찰을 일으키는 막대기는 남근, 점화로 발생한 불은 아기의 탄생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고대인들은 왜 불을 만드는 행위를 보면서 간접적으로 성을 엿보았을까? 그 이유는 막대한 에너지가 수반되는 성욕을 생존을 위해 억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세할 수 없는 성욕과 쾌락은 어떻게든 해소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퇴행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성욕을 되살렸는데 막대기와 구멍이라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성 행위의 마찰, 삽입, 소모된 막대한 에너지의 결과물을 확인한다. 불이 아니더라도 우회적인 방식으로 삽입의 도구와 구멍을 만든다. 호주의 바찬디스 부족은 땅에 구멍을 파고 거기에 창을 꽂는 외설적인 춤을 추며 수태마술을 부린다. 여기선 착상이 불에 상응한다. 즉 불은 분명 무언가를 죽이는 상징이다. 소모하거나 삼키는 ‘입’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막대한 에너지를 흡수하여 탄생하는 생명의 상징이다. 불은 소멸시키는 것들을 먹으면서 탄생한다. 그래서 불을 꺼트리고 싶은 소방관으로서 인류는 끝끝내 불을 다시 피워야 한다. 불을 꺼트리고 싶은 자가 운명적으로 불을 지피는 인간의 필연적인 불장난, 항상 신묘하게 반짝거릴 뿐 화재로 이어져서는 안 되고, 존재하지만 존재해선 안 되는 도깨비불로서 동물적 인간과 욕망을 1966년 리스본 태생의 주앙 페드로 로드리게스가 신작 <도깨비불>에서 탐구한다. 그는 현대 포르투갈 영화를 대표하는 시네아스트 중 한 명이다. 리스본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그는 자연의 일부로서 환경에 맞춰 유기적으로 진화·실존하는 인간을 탐구하고, 자신의 성 지향성인 동성애를 작품에 투영한다. 항상 유동적이고 유기적인 인간을 탐구함에 그의 영화에선 ‘여행’이 끊이지 않는다. 그 여행의 특징이라면 인간적인 여행이 아니라 동물적인 여행이다. 로드리게스의 작품에서는 항시 동물에 의해서 여행이 시작된다.      


<유령>에서 주인공 세르지오는 반려견 레오에 의해 여행을 떠나, 이성애자에 국한되어 있던 자신의 성 지향성을 넓힌다. <남자로 죽다>에서는 동물이 머무는 숲과 인간이 머무는 도시를 오고가며 대비한다. 숲에선 군인이 책무를 내려놓고 동물적인 인간으로 되돌아가고, 인위적인 구조에서 고정된 젠더는 자연에서 자유롭게 성 전환한다. 또 숲에서 길을 잃고, 반려견 바디우가 본래 목적인 주인의 손을 떠남에 여행이 시작된다. 이후 도시의 제도와 법에 의해 불변하던 사람들이 자연에서 자유롭게 변신한다. 항상 토니아에게 보살핌을 받던 로사리오는 여행에선 토니아를 보살펴주는 존재로 변한다. 로드리게스가 자전적인 영화라 밝힌 <조류학자의 은밀한 모험>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로 자연의 신비를 걷어내는 인물인 페르난도는 그가 연구하는 '검은 황새'를 관찰하다가 문명에서 이탈한다. 자연 내지는 절대자의 화신으로 불리는 새에 의해 미로와도 같은 자연에서 길을 잃고 떠도는데, 그 여정 속에서 무신론자임을 포기하고 성 안토니오가 되어가며 가변적이고 불확정적인 순수한 인간을 회복한다. 로드리게스의 이 같은 여행은 자연에만 국한되지 않는데, 또 다른 여행은 과거, 기억으로의 여정이다. 로드리게스는 <남자로 죽다>에서 처음 태어난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인간을 고찰한다. 인류는 처음 태어난 모습,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며 변신하지만, 태어나면서 규정된 것들과 과거에 선택한 결과들을 여전히 현재에 반영하므로 드랙퀸 토니아는 여성, 가슴이 있는 남자임을 포기하고, 멀끔한 양복을 입으며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아버지 토니오와 아들 제마리아는 하나의 장소로 되돌아가며 순환한다. 토니아는 정원을 파며 시간 속에 파묻힌 과거의 유물을 발굴하고 기억 속에 침잠한다. <조류학자의 은밀한 모험>에선 중세, 고대 그리스 등을 연상케 하는 태곳적이고 근원적인 신화적 체계로 여행을 떠나며 원초적인 인간으로의 회복을 말한다. 즉 로드리게스의 시간은 순환적이다. 현재를 살지만 과거의 답을 선택하고, 물질적으론 앞으로 나아가지만 정신은 언제나 되돌아간다. 인간은 불안하게 현재에 머물고, 기대는 곳은 존재하지 않게 된 기억이다.  

    

그 현재는 주로 속박과도 같아서, 로드리게스의 여정은 포박에서 달아나며 자연이나 과거로 향한다. <유령>에서 인간의 부드럽고 연약한 살갗이 어떻게 해보지 못할 쇠창살, 수갑 등의 금속, <두 유랑자>의 반지, 연인에게 거는 통화 등이 포박의 형태다. <조류학자의 은밀한 모험>에서도 순례자 자매에 의해 페르난도는 묶이고, 또 인간에 의해 시간이 정지된 박제된 동물과 마주한다. 로드리게스의 영화에선 포박에서 달아나거나, 자신이 몸소 포박하는 사람이 된다. <유령>에서 스토킹하는 남자에 의해 수갑이 채워진 세르지오는 자신이 쇠고랑을 채우는 사람으로 몸소 변신한다. 욕망에 소극적인 인간 세르지오는 수캐의 여정을 떠나며 삽입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그가 흠모하는 경찰처럼 추적하는 사람이 된다. 즉 여행에서 접한 새로운 환경에서 로드리게스의 인물들은 구속을 벗고 진화하듯 변신하는데, <두 유랑자>(포르투갈 원제 <오데트>)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데트라는 이름의 근원인 『백조의 호수』처럼 주인공들은 기존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변신하며 유랑한다. 원전에서 오데트를 변신시키는 악마는, 본 작품에서는 악한 세상으로 바뀐다. 아이를 갖고 싶은 오데트에게 연인 알베르토를, 루이에겐 동성 연인 페드로를 앗아간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오데트는 ‘페드로’로 변신하며 루이와 상상임신 하려하고, 동성애자 루이 또한 페드로와 닮은 오데트를 사랑하는 이성애자로 변신한다. <남자로 죽다>에서 변신은 비관적이다. 드랙퀸으로서 여성 젠더를 모방하는 토니오는 끝끝내 남성으로 되돌아오고, 여행에서 토니오를 모방하던 로사리오는 그의 죽음에 목숨을 끊는다. 정신은 변신을 바란다. 그러나 그들이 속한 세계는 변신이 합당하지 않다고 불허한다. 즉 환경이나 물질이 변신을 허용하지, 정신의 의지만 갖곤 변신할 수 없다. 토니오의 성 전환은 현실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물질과 환경을 초탈했을 때 가능하다. 물질의 제약, 한계에 의해서 변신은 '따라 하기' 수준에 그친다. 고로 현실에서의 변신은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 좌우하고, 이로써 인류에게 수동적이다.      


<조류학자의 은밀한 모험>에서 순례자 자매에 묶여 규정당하는 페르난도는 예수란 이름의 한 남자를 마찬가지로 규정한다. 또 자전적인 영화에서 본인한테 솔직하지 못한 주인공은, 위반의 욕망을 허용하는 역사 속 밀교와 접하며, '다른 사람이 나를 연기'하는 배우의 껍질을 벗고 '감독 본인'이 페르난도를 연기하며 변태한다. 여기서도 변신의 근거는 환경, 이데올로기다. 이렇게 변신하고 달아나는 로드리게스의 영화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또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유령’과 같다. <유령>에서 유령성은 두 층위로 나뉜다. 하나는 쓰레기나 강간, 성욕 등 분명 물질로 존재하나 존재하면 안 되는, 그래서 은폐되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두 번째 유령성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자위'로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두 유랑자>에서 유령성은 오데트와 루이, 각각에게 다르다. 오데트는 알베르토를 페드로라 상상하는데, 그녀와 페드로의 관계 및 임신은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해야 하는’ 유령성을 띤다. 루이는 존재했던 페드로가 사라져서, 그의 시야에 환각으로 계속 아른거리는 유령을 본다. <조류학자의 은밀한 모험>은 ‘존재’는 동일하나, 존재가 만들어내는 ‘존재자’가 계속 변화하며 뒤바뀌는 유령성이다. 페르난도라는 존재는 동일하나, 존재가 내세우는 조류학자 및 페르난도라는 존재자, 본 존재자를 죽이고 탄생한 성 안토니오라는 존재자는 전혀 다르다. 존재자가 존재를 대표하기 위해서 페르난도의 두 존재자는 서로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유령들의 투쟁’을 벌이고, 존재로 봤을 때 그들은 동일한 존재의 일부다. 이러한 유령성은 유령을 갈망하는 주체의 내면, 상상에서 비롯하기에 외부 객관과 괴리를 일으킨다. <유령>에서 세르지오는 눈을 가린 존재를 '제다'라고 상상하지만 실상은 파티마였다. <남자로 죽다>에서 토니오는 자신을 여성으로 선언하고 자부심을 느끼지만, 로사리오는 그가 '가슴 달린 남성'이라고 폄하한다. 이에 여성으로서 실존은 오직 토니오 자신에게만 유효하고 타인의 눈에는 존재하지 않는데 자꾸 존재를 주장하는 유령이다.      


또 아버지 토니오를 찾은 제마리아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에 당황하여 그의 곁에 다가가면서도 떠난다. 토니오가 죽어가는 와중에 그의 눈엔 제마리아가 나타나지만, 타인의 눈엔 나타나지 않는다. <남자로 죽다>에서는 ‘하나의 대상을 달리 보는 각자의 눈’에 의해 유령성이 발생한다. <조류학자의 은밀한 모험>에서 순례자들은 페르난도가 기독교도이기를 바라고, 페르난도는 예수에게 해명을 바란다. 타자는 분명 다른 존재이지만, 본인들의 기대와 상상에 '같게'끔, 동일시한다. 이렇게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해야하고, 존재하는 것을 부정함에 유령성의 극복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그 모든 상태의 실존을 긍정해야 한다. <두 유랑자>에서 루이와 오데트가 페드로라는 헛것을 바라보고 외치며 정사하는 와중에 현재 페드로의 유령을 포착하는 것처럼, <조류학자의 은밀한 모험>에서 여러 갈래로 변신하며 기존을 부정하더라도 ‘지금 여기의 실존’을 긍정하며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과연 <도깨비불>에서는 어떤 변신, 여행이 유령을 만들어낼까,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실존할까? 일단 영화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도깨비불> 형식의 화두는 "어떤 방향으로 이동하느냐?"다. 도입부,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고, 포르투갈 마지막 왕가의 ‘주소지’를 포착한다. 그러나 이내 곧 비행선으로 추정되는 물체의 그림자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고, 그 그림자가 움직이는 방향은 '횡' 곧 가로이자 수평이다. 즉 수평과 멈춤에 의해서 어둠이 닥쳐온다. 이후 알프레도 왕이 머무는 거처 내부로 카메라가 진입한다. 왕의 손자 정도로 추정되는 산초가 수직적으로 알프레도 주변을 누비면서 놀고 있기에, 소년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3차원적으로 깊숙하게, 즉 수직적으로 이동한다. ‘종’적인 움직임에 의해서 누구의 것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살아있음을 알리는 '방귀 소리'와 알프레도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드러나고, 이후 '회고'가 시작된다. 즉 세로와 수직의 깊숙한 카메라가 과거와 현재, 젊음과 늙음, 더러움과 아름다움 그 모든 삶을 보이게 만들고, 로드리게스는 디졸브까지 동반하여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모든 삶을 포갠다.      


그 삶이 왕가에겐 이르지 못했다. 본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형식 중 하나는 왕족의 식사를 포착하는 시퀀스에서 현실에 있는 감상자의 시선을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의식하는, ‘제 4의 벽’을 허무는 소격 효과다. 이 소격 효과가 유령을 불러온다. 영화 속 문이 닫힌 상태에서 ‘감상자의 세계’와 ‘영화 속 세계’는 분리되어 있었다. 상대편 차원에서 발생하는 일이 내 차원에 미치지 않으니, 남 일이라는 듯 무관심하게 관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이 열려 제 4의 벽이 허물어지고 소격 효과가 발생하니, 상대 차원에서 비롯한 시선이 내가 속한 차원에 미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 일’이 되자 더는 태평하게 감상할 수 없다, 참여해야 한다. 그렇게 양측의 시선에 참여하며 영화 속 등장인물과 현실의 감상자가 새롭게 ‘변신’하기 시작한다. 왕족들은 감상자가 자신들에게 기품이나 우아함을 기대한다고 말하니, 감상자는 그들에 의해서 ‘기대에 찬 시선’으로 눈동자를 갈아 끼우게 될 것이다. 왕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닐 거란 기대에 찬 시선을 흠뻑 받으며, 철두철미하고 깐깐하게 품행을 정돈한다. 무대 위의 왕족들은 내면에서 발생하는 우발적인 불꽃을 모조리 꺼트리며, 초연한 이성의 경지에 오른 인간을 전시한다. 그래서 영화의 타이틀 <도깨비불>은 알프레도가 소방관이 되겠다고 선언하며 왕가를 뛰쳐나간 영화의 러닝타임 약 20분가량이 지나서야 떠오른다. 타이틀이 올라오기 전까지 왕가는 인간의 필연적인 도깨비불조차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이성적이고 정열적인 불보다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정함과 이성으로, 13세기부터 보존되어 온 왕가의 소나무 숲을 수호한다. 소나무 숲과 마찬가지로 오랜 역사를 유지해 온 왕가는 대중들이 기대하는 ‘변치 않는 고상한 이미지’를 고정한다. 이에 따른 제한을 고정된 카메라, 널따랗게 펼쳐져 있지만 너무나도 얕은 수평적 구도로 가시화한다. 그 수평적 구도는 흡사 연극 무대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선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인간, 연극 무대에서 자신과 유리된 배역을 연기하는 인간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일까?     

 

알프레도는 왕족의 의무와 역할에 봉사하고 싶지 않다. 왕족의 이미지와 알프레도의 자아가 불일치하기 때문에, 전자를 지향하면 후자가 실존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도 왕족을 기대하는 시선에 의해서 알프레도는 왕족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해야만’ 한다. 소나무 숲에서 순간 흥분하며 남근에 불꽃이 인 인간 알프레도는 타인의 시선이 이를 볼 수 없게끔 황급히 숨겨내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게 된다. 즉 시선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유령을 만든다. 그래서 알프레도는 시선을 뒤바꾼다. 테레사가 열어젖힌 문을 넘어 들어오는 시선은 그들을 왕가로 만드는 시선이다. 알프레도는 왕족을 기대하는 시선을 뿌리치고, 대신 기후위기의 여파로 가득한 현실에 책임을 요구하는 시선을 들어오게 한다. 감상자가 왕족을 숭배하게 만들던 시선을 본래의 시선으로 되돌린다. 이후 그 시선에 따라 왕족들의 위선, 가식을 폭로한다. 이에 당황한 테레사는 문을 닫아서 시선을 차단한다. 시선이 부재하며 존재하는 왕족의 추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왕족임을 반성하는 알프레도는 존재한다, 그러나 문이 닫힘에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1년 뒤, 다시 문이 열리고 알프레도는 소방관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식구들과 왕족을 기대하는 시선은 그의 포부를 반대하고, 이번에는 알프레도가 문을 닫는다.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자 시선의 통로인 문을 차단한 그는, 이에 더해 보이지 않게 만드는 연기 속으로 사라지며 소방관이 된다. 이로써 알프레도는 시선에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시선 때문에 인간은 유령과 같다. 시선에 의해서 허위의 존재가 만들어지고, 진정 존재하는 것은 시선에 의해서 등한시되고… 그래서 실제 삶, 수직적 연출로 나아간다. 타이틀이 떠오른 이후 로드리게스는 훈련이 한창인 소방서를 포착한다. 앞서 왕가를 포착한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2차원적인 수평적 운동을 지향한 나머지, 인물들에게 깊게 다가설 수 없어서 육체는 카메라에서 저 멀리 떨어졌었다. 카메라는 육체는 등한시하고, 과거부터 이어져 온 관념이나 이미지에 주목했다. 그러나 소방서에서는 육체를 우선으로 삼고 가까이서 부각한다.     


이후 로드리게스는 소방서에서 방화범이지만 소방관이어야 하는 인간의 양면성을 도깨비불에 빗댄다. 소방서는 화재를 진압하는 공간이다. 그 불은 문자 그대로의 불이기도 하고, 동시에 성적인 상징으로서 불이기도 하다. 영화 속 소방관들은 분명 불을 끄는 사람이지만, 이와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불을 피우는 존재다. 소방서 가까이서 포착한 건장하고 활력 넘치는 육체엔 정열이, 곧 불꽃이 들끓는다. 매우 뜨겁다. 하지만 소방관이기에 뜨거운 육체는 냉각되어야 한다. 그래서 뜨거운 육체에 지시된 동작들은 냉정하게 정돈되어 있다. 그러나 왕족과 달리 건장한 신체를 부각할 수밖에 없는 소방관의 행동은 어쩔 수 없이 에로틱하다. 이후 소방관들은 소방용 사다리를 건물의 상층부에 연결하여, 화재 현장으로 진입하는 훈련을 한다. 안 그래도 왕족을 포착할 때보다 역동적이고 가깝던 카메라는, 더 수직적이고 능동적인 워킹으로 변한다. 위로 올라간다, 제 육체의 유혹을 냉정하게 만들어 다른 인간을 구하고 희생한다. 그렇게 동물로서 인간 그 이상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위로 올라선 이후에 다시 아래로 내려온다. 내려간 이후에는 뜨겁게 춤추고 노래하는 소방관의 동물적인 육체를 포착한다. 카메라가 하강해서 비추는 것은 쾌락, 곧 화마다. 즉 영화의 수직적인 움직임은 삶에의 집중으로, 저 하늘의 이데아로 나아가는 상승, 동물로서 인간으로의 추락, 양자 모두를 내포하고, 이 모순적인 모든 것을 삶이 추구한다. 수평적인 카메라가 이미 죽어버린 삶이나 끝난 것에의 집착, 과거를 위한 현재의 희생이라면, 수직적인 카메라는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의 삶에 참여한다. 깊고 세세한 삶에의 몰입, 하늘이든 지상이든 어딘 가로의 나아감과 오고감, 그 사이에 놓이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도깨비불이다. 상승하면 추락하고 추락하면 다시 상승하며, 불을 꺼트림과 동시에 다시 불을 피우는, 이로써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오롯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서…  


그렇다면 인간은 왜 도깨비불처럼 불을 피우고도 황급히 꺼트리며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게 되는가? 소방서의 동료들이 알프레도에게 짓궂은 장난을 칠 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동료들은 알프레도가 미술사를 전공했으니, 해당 지식이 얼마나 해박한지 시험해본다. 동료들은 명화 속 포즈를 몸소 모방하며 알프레도에게 퀴즈를 낸다. 그러나 알프레도는 맞추지 못한다. 관련 지식이 부족한 탓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무관심적'이지 않아서 그런 것만 같다. 대상이나 사물에게 '관심'이 있으면 나는 그것과 관계 맺은 자신의 '이익'을, 대상과 함께한 스스로를 생각한다. 한편 대상과 함께한 자신의 목적이나 이익에서 무관심하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나 욕구를 바라보던 주관적인 시선을, 객관적인 외부 대상에게 확장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무관심적으로 관조하는 미술과 공공을 위한 일, 곧 소방관이 그렇다. 뜨거운 인류를 고결하게 이상화하고 냉각한 명화는 정욕 내지는 육욕이라는 불꽃이 발생하기엔 너무나 차갑다. 명화는 냉정하게 마찰을 거부한다. 그러나 동료들은 탈의실에서 속옷만 입거나 그마저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 알프레도 바로 옆에서 장난스레 포즈를 취한다. 심지어 포즈를 취하는 모델의 남근이나 하반신이 상대의 얼굴에 밀착한다. 알프레도는 평온하고 냉정한 관조가 아니라, 두 남성들이 일으키는 불꽃과 그로 인한 흥분에 델 것만 같다. 이윽고 느껴지는 것은 그들과 밀착한 알프레도 자신의 달아오름, 바라보는 것은 하반신의 불꽃이다. 즉 무관심적인 객관적 관조가 불가능하기에, 그들과 함께하는 자신의 욕망을 자꾸 바라보게 되기에 알프레도는 도무지 답을 맞출 수 없다. 불을 꺼야 하는 상황에서 불이 자꾸만 인다. 이렇게 얼음 같은 정신을 추구하려 하지만, 정작 그 지시를 장작과도 같은 달아오른 육체가 이행한다. 이렇게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인간들이 참여하는 현실에선 오롯이 객관적이거나 공적일 수 없다. 정신에 골똘히 몰입하려해도 육체가, 타인에게 집중하려 해도 그 육체가 맞닿은 내 살갗이 단번에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폰소와 함께하는 화재 진화 시뮬레이션, CPR 연습도 그렇다. 화재 진화 시뮬레이션에서 알프레도는 피해자를 연기한다. 그런데 두 살이 엉겨 붙고 부대낌에 자신이 맡은 배역과 무관한, 정신의 통제를 벗어난 감정이 육체에서 피어오른다. 이후 CPR 연습을 할 때도 알프레도를 피해자라고 생각해야 하지만, 연약한 육체가 아니라 건장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입술이 제 입술에 닿음에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드는 에로티즘이 엄습한다. 한편 알프레도는 제게 골똘히 몰입하며 불꽃을 피울 수 있는 사적인 환경에서는 자꾸 공적인 시선을 의식하며 불을 황급히 끈다. 영화 초반부, 알프레도는 에두아르드와 함께 있다. 에두아르드는 담배를 피우고 불씨가 약간 남아있는 담배꽁초를 숲에다가 버렸다. 그 옆의 알프레도는 화들짝 놀라며 담배꽁초를 비벼서 남은 불씨를 제거한다. 이와 동시에 알프레도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발기된 제 남근을 감추고 억제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불씨는 사정, 출산 등 분출 및 탄생과 관계가 있고, 그렇기에 불씨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발기나 부풀어 오름이 동반된다. 그런데 알프레도는 소방관으로서 불 끄는 자, 고상한 왕족으로서 불을 만들어내는 발기나 팽창을 억제하는 자다. 사적인 시간에도 말이다. 즉 사적인 환경에서 불을 뿜는 인간 알프레도는 존재하지 않고, 공적인 환경에서도 마찬가지로 그의 본능은 존재하지 않아야 하지만, 왕족이 아니라 ‘인간’ 소방관이 되기에 그나마 간접적으로 존재하는 유령이 된다. 즉 <도깨비불>의 유령성은 존재하지 않아야 하지만 존재하는, 자유와 욕망의 간접성이다. 그래서 영화 내내 삶은 반쪽짜리다. 분명 내 몸이지만 이를 타율의 시선이 규정하기에, 또 정신적이어야 할 때는 육체적이고, 반면 육체적이어야 할 때는 정신적이기에, 이도저도 아닌 도깨비불과 같다. 이에 눈이 맞은 알프레도와 아폰소의 사랑도 불꽃을 피우자마자 곧바로 꺼트리는 도깨비불로 전락한다. 로드리게스는 이렇게 도깨비불 같은 산불을 성애에 비유하며 고대적인 상징을 빌려온다.      


일단 숲을 남근에 빗댄다.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나무는 발기되는 남근의 속성, 수풀은 수북한 털의 시각적 유사성을 공유한다. 또 나무가 건조하게 헐벗은 상태에서 산불을 일으키는 것처럼, 인간 또한 하반신의 모든 거추장스러운 방해물들을 벗어던지고 매끈한 상태에서 마찰을 일으키며 성관계를 한다. 숲이 촉촉한 수분을 머금은 나뭇잎으로 장식이 되어 있을 때는 아주 질서정연하고 생산적인 것처럼, 인류 또한 하반신에 마찰이 발생하지 않게끔 옷으로 덮어놓을 땐 온건하다. 산불이 막대한 소실을 불러오는 것처럼, 인류사에서 섹스도 막대한 에너지의 낭비, 곧 위험을 동반하는 불법적인 것이었다. 알프레도와 아폰소는 소방관으로서 산불을 방지하기 위해 숲에 간다. 나무들은 죄다 쩍쩍 갈라지고 앙상하게 말라서 숲 전체가 거대한 장작더미와도 같아, 산불에 일촉즉발이다. 거기서 두 소방관은 되레 달아올라 섹스를 나눈다. 철학자 바타이유가 말하듯, 대다수의 인류는 노동의 시간엔 성애를 ‘불법’으로 규정했고, 때때로 집단적인 축제나 노동 이후의 간헐적인 해방, 위반만을 허용했다. 이런 관점에서 소방관으로서 둘의 성애는 불법이자 산불 방조다. 그들은 다시 천연덕스럽게 소방서로 복귀하여 남근을 옷으로 가리고, 불을 끄러 가야한다. 소방관으로서 인류에게 불장난은 항구적일 수 없다. 그렇다면 소방관이 아니라면 방화범으로서 욕망을 만끽할 수 있을까? 로드리게스는 여전히 그들의 사랑이 도깨비불일 수밖에 없는 장애물을 분석한다. 이 둘의 사랑은 사회에서 보편적인 이성애가 아니라, 많은 시간 금기시됐고 지금까지도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동성애다. 그래서 이들의 불꽃은 명화, 화재 진화 시뮬레이션 등을 빌려서 간접적으로, 도깨비불로서만 반짝인다. 불은 가까이서 마찰하며 발생한다. 알프레도와 아폰소는 소방관으로서는 함께 있다. 하지만 불꽃을 일으키기 위한 ‘함께’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소방관이지 않을 때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불꽃을 일 수 있겠지만, 소방서를 벗어나면 이들은 왕족/노동자, 백인/흑인, 즉 인종·계급적 차이로 벌어지고 멀어진다. 


알프레도와 아폰소는 흥분을 배가하기 위해 서로 모욕한다. 여기서 서로 비난하는 유형이 다르다. 아폰소는 백인의 제국주의를 폭로한다면, 알프레도는 흑인을 하대한다. 흑인은 여전히 아래서 위로 백인 왕족을 올려다보는 반면, 백인은 위에서 아래로 흑인을 깔본다. 각 인종·계급에게 기대하는 시선에 따라서 각자는 왕이자 노동자 소방관이 되며, 점점 더 멀어진다. 즉 동성애, 계급, 인종을 뛰어넘는 욕망이란 이름의 ‘산불’은 명화의 포즈를 빌려 간접적으로, 또 불법을 감시하지 않는 아주 ‘간헐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하기에, 도깨비불처럼 존재하나 존재해선 안 되고, 금기시되어 존재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거세되지 않은 채로 희미하게 깜빡이며 존재한다. 로드리게스는 이를 '뮤지컬'로 승화한다. 첫 번째 뮤지컬은 초반부 소나무 숲에서 발생한다. 춤과 노래는 인류의 몸과 감성에 가장 솔직한 정념적인 예술이다. 그런데 첫 번째 뮤지컬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가 지나치게 이성적이다. 숲이 스스로 자유롭게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계산적인 이익을 위해 친구처럼 돌봐야한다는 내용이다. 이윽고 노래하는 아이들은 알프레도를 에워싸고 빙빙 돌며 그를 숲처럼 보존한다. 아주 명랑하고 귀엽지만, 한편 안무와 가사는 즉흥이나 추상과는 거리가 멀어 갑갑하고 빽빽하다. 그나마 아이들의 엄격한 뮤지컬이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칠게 잘라내어 ‘미완의 여지’가 생기고 이로써 숨통이 트인다. 로드리게스는 완고한 이성적 의무를 자르고 망가뜨려서 감성과 본능이 숨 쉴 틈을 열어둔다. 이후 두, 세 번째 뮤지컬은 소방서에서 발생한다. 두 번째 뮤지컬은 앞서 언급한 소방관들의 훈련 장면으로, 소방서 내 훈련을 위한 행동을 관능적으로 포착하는 카메라, 청각은 추상적인 클래식이 결합함에, 몸의 사무적인 행동이 관능으로 뒤바뀐다. 세 번째 뮤지컬은 봉을 탄 알프레도와 아폰소가 '하강'하며 발생하는데, 성적 유희를 암시하는 유연하고 흐느적거리는 안무와 비교적 추상적인 가사가 인상적이다. 또 소방관들을 관리 감독하는 이성적 존재 소방서장이 뮤지컬에 즉흥적으로 합류한다.      


본 뮤지컬이 육체의 불확정적인 자유를 가리키지만, 이번에는 ‘사이렌’이 울려서 역시 뮤지컬은 끝마치거나 완성하지 못한다. 인류는 합법의 이성으로부터 금기의 본능으로 슬그머니 이동하지만, 이때 이성이 경고음을 울려 다시금 의식적인 현장으로 되돌아오게 만든다. 이로써 이성과 본능, 그 어느 것도 온전히 완성되지 못한다. 마지막 뮤지컬은 알프레도의 장례식에서 그의 역사를 함축한 노래가 울려 퍼지며 발생한다. 자유로운 춤과 노래로 나아가던 알프레도, 그러나 그는 죽어서 구체적인 노래 가사, ‘피에타’ 포즈로 규정된다. 그렇게 분방하고자 하던 존재가 죽어서 얼어붙은 2069년엔 아폰소가 '대통령'이다. 인종, 계급 간 사랑이 용이해진 시대라 추측할 수 있을 2069년, 그러나 죽은 연인에 의해서 아폰소의 자유분방한 뮤지컬은 불가능해진다. 즉 가능한 시대에는 불가능하고, 불가능할 때는 가능해진다. 불태울 수 있을 땐 불태우지 않고, 불태울 수 없을 때 불태우는 인류의 욕망, 앞서 언급한 바타이유가 말하길 에로티즘의 본질이란 짜릿한 위반에서 발생하는 쾌감이므로, 섹스는 쾌감의 극대화를 위해서라도 불법으로 규정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소방관일 땐 산불을 내고 싶은 반면, 익히 산불을 낼 수 있을 땐 내고 싶지 않은 우리의 욕망은, 항상 불법으로서 황급히 진화하고 보이지 않게 된 도깨비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로드리게스는 우리의 욕망을 도깨비불과 산불에, 성기를 숲에 빗대고, 금기를 넘는 쾌감의 메커니즘을 여러 장르와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으로 선보인다. 인간은 시니컬한 이성의 감독을 피해서 분방한 노래와 춤으로 가득한 뮤지컬로 나아가지만, 불가능한 시공간 속에서만 싹트는 도깨비불이기에, 뮤지컬은 영영 완결되지 않고 도달할 수도 없다. 그 불안정하고 분방한 여정을 단 하나의 장르나 스타일로 설명할 수 없는, 거친 실험으로 풀어낸 점이 매혹적인 작품이다. 다만 러닝타임이 다소 짧은데 많은 내용을 담아내다 보니 지나치게 메시지가 축약적이라는 점, 급급하게 말하는 바를 따라가려다 보니 영화가 부각하는 농밀한 감각성을 오롯이 즐기기엔 여유가 없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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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428 전주국제영화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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