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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04. 2023

루카스 돈트, <클로즈>

남성 되기: 자신의 타자화

루카스 돈트(Lukas Dhont), <클로즈>(Close) - 남성 되기: 자신의 타자화     

“몇 해 동안이나 나는 하나의 대역에서 다른 대역으로,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다녀야 했다. 내 두 가지 인격, 내가 맡아야 했던 두 가지 역할, 내 두 가지 사회적 정체성은 시간이 갈수록 연관성과 양립 가능성이 줄어들었고, 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는 내 안에서 견디기 힘든 긴장을 자아내 나를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디디에 에리봉-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우정을 두고 나의 개성과 잘 맞는 친구를 보고 기뻐하는 감정이라 말한다. 이에 따른다면 우정의 실체는 잔혹하다. 나는 타인을 실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게서 나를 확인함에 즐거워한 것이었다. 내가 맛있게 먹는 것을 대상도 즐겨줌에 그로부터 나를 지지받는다. 또 그가 나랑 똑같이 행동함에,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한다. 심지어 쇼펜하우어는 우는 것이나 고통 등의 감정까지도, 제 자신의 신세에 대해 동정을 느끼는 것이라 차갑게 일갈한다. 그에게서 우정은, 그리고 인류는 이기적이다. 아가페라 하더라도 결국 나라고 착각하는 대상에게 절대적인 온정을 베푸는 것이요, 타인의 절망을 보고 인류의 숙명을 마주하며 내 필연한 신세가 슬퍼서 엉엉 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별이란 상대방이 나와 닮지 않았을 때 발생하다. 어쩌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정과 이별을 오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닮았다고 여기는 것은 그저 피상적인 영역, 그리고 상대가 내 눈앞에서 행동하는 순간뿐이다. 우리가 바라볼 수 없는 내면의 영역, 그리고 우리의 눈앞에 놓여있지 않는 상대방과 나는 일치하지 않기가 더욱 쉽다. 그래서 상대의 진의가 나의 내면과 닮지 않음을 확인했다면,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의 상대방이 나와 닮지 않았다면, 우리는 실망하고 심지어 절연하리. 한편 니체의 친구 개념은 다소 다르다. 그는 애초에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니체는 친구들이란 저마다의 목표와 진로가 있기에, 다시 만난다 해도 서로를 못 알아볼 수도 있는, 서먹서먹해지는 것이 필연이라 말한다. 그래서 니체의 우정이란 이를 존중하는, 동등하게 존경하는 감정이다. 루카스 돈트의 신작 <클로즈>에서는 두 소년이 우정과 그 이상의 감정을 오간다. 과연 그들의 우정은 어떤 형태일까. 1991년 헨트 출생의 루카스 돈트는 벨기에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2018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과 퀴어종려상을 수상한 <걸>로 장편 데뷔하였다.      


그의 데뷔작은 벨기에의 선배 감독인 다르덴 형제의 리얼리즘을 계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선배의 형식을 마냥 답습하지 않고 감각적인 음악의 사용, 또 상징적인 색채를 가미하여 청년 시네아스트만의 재기발랄한 개성을 뒤섞는다. 돈트는 본 작품에서 성을 탐구한다. 오늘날의 인류는 진보한 기술과 이념으로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을 누구라도 주체적으로 바꿀 수 있다, 이론상으론. 하지만 스스로 여성임을 선언한 라라의 젠더를 타인과 구조가 미승인하는 부조리를 돈트는 고발한다. 이는 감독 본인의 소수자적 성 지향성을 줄곧 간섭하고 검열하는 사회에서 받은 억압을 간접 반영한다. 소사회인 학교에선 이분법적인 성, 또 생물학적인 성별과 사회적인 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타자들을 배척하지만, 돈트는 지하철, 거리에서 라라를 포착하며 타자들이 거대한 사회 내에서 주체적으로 얼마든지 뒤섞일 수 있어야 함을 천명한다. 라라는 일반적이지 않은 친부 가정에 놓였는데, 해당 환경을 돈트는 천연덕스럽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문법으로 그려낸다. 똑같은 것이 당연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이다. 그리고 타자를 다룬 영화로서 그간 영화에서 다뤄지지 않은, 성전환의 과정을 아주 상세히 포착하며 타자를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사회는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성이 본질이요, 후천적으로 성을 바꾸는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들을 모방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 작품은 익숙한 통념을 깨트린다. 선천적인 여성들의 발레 동작, 하지만 그녀들보다 라라의 동작이 훨씬 능숙하다. 그래서 선천적으로 타고난 여성이 후천적으로 여성임을 선언한 라라를 따라한다. 과연 여성성이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당연한 것은 없다.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다. 발레리나임이, 발레리나의 동작이, 그리고 여성임이 사회적으로 말이다. 라라의 가정엔 어머니가 부재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일반적인 성 역할 및 관행을 수행하지 않는다. 남들과 다른 환경에서 그들의 젠더는 다른 형태로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일반적으로 만들어진 젠더, 그러나 돈트는 나의 자유와 의지에 의해 주체적으로 만들어진 젠더의 자유를 추구한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몸을 은폐하는 라라, 하지만 그녀의 육체는 드러날 수 있어야 하고, 또 타인의 욕망이 아니라 그녀의 욕망을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 타인의 시선 때문에 더더욱 여성적인 몸에 집착한다. 더 빨리 성 전환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서, 또 영화에서 반복되는 '롤모델'을 따라 하기 위해서 변화할 필요는 없다. 타자들이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수 있기를 돈트는 데뷔작 <걸>에서 희망했다. 그렇다면 그의 신작 <클로즈>에서는 어떤 타자들이 등장할까. 또 그들은 무엇에 방해받고, 그들의 이상향은 어디에 있을까? <클로즈>의 도입부,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직 소리만 들릴 뿐이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문을 여는 소리, 이윽고 들려오는 사람의 숨소리, 그들의 속삭이는 소리… 이후 서서히 소리의 근원을 시각으로 포착한다. 그러나 앳된 목소리로 말하는 그들은 들켜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겨우 그들이 보인다, 소년들이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아지트’에서 놀고 있다. 무언가에게 쫓기고 추적당하는 상황을 연출·상상한다. 이윽고 캡틴 레오가 선원 레미에게 지시한다, 바깥으로 도망가자고. 도주하기 전까지 이들은 각각의 숏에 나뉘어서 포착되었다. 청각으로는 음성이 친밀하게 섞이고 겹쳤지만, 정작 시각은 두 육체가 물리적으로 가까움에도 분리됐다. 그러나 이들은 도망치면서 역으로 서로에게 가까워진다. 각자의 숏에 놓였던 서로는 하나의 숏에 공존한다. 그렇다, 이들이 도망치는 대상은 두 남성이 ‘가까이 함께’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두 남성을 멀리 갈라놓고 검열하는 ‘무언가’다. 그 무언가는 이성애 중심적 이데올로기, 가부장제다. 프랑스의 게이 사회학자인 디디에 에리봉은 저서 『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프랑스의 게이들이 끊임없이 자기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드는 이유를 분석했다.      


사회 내 보편적인 이성애자들, 특히 호모포비아들은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론적 특권이 있다. 동성애자에 대한 지식을 마음대로 규정한다. 이에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은밀하고 어두운, 이성애자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 아지트를 꾸린다. 그 아지트의 규칙은 이성애자가 아니라 동성애자들이 창조한다. 불량배의 폭행, 경찰의 검문, 성희롱에서 자유롭고도 주체적인 '사회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바로 게이들이 아지트를 꾸리는 이유다. 레오와 레미가 꾸린 아지트도 마찬가지로, 학교에 즐비한 ‘불량배’들의 압박, ‘이성애자들의 검열’에서 자유롭다. 물론 아지트를 넘어서 사회에 속하고 싶은 레오가 아지트를 자체 검열하며 고유한 법은 사라지지만 말이다. 아지트와 더불어, 아주 강렬한 빨간 색이 한가득 칠해진 레미의 방도 그들을 보존하는 공간이다. 빨강은 피나 살, 몸을 연상케 하는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색채로, 그 빨간 방에서 두 소년은 실로 자신의 육체와 정서에 솔직하다. 빨간 방에서 후술할 ‘클로즈업’과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가능하다. 붉음과 더불어 영화에서 인상적인 색채는 황금빛 조명이다. 황금빛 조명이 두 소년의 우정을 황홀하고도 사치스럽게 찬미한다. 반면 어두운 곳은 교실, 아무 것도 없는 차가운 하양이 도드라지는 공간은 아이스링크다. 솔직한 몸의 빨강, 황홀하게 드러내는 노랑은 사회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좁고 폐쇄적인 사적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레미의 방, 레오 가족의 꽃밭이 그들의 진실함을 관용했다. 그 공간에서 서로는 가까웠다. 그 상대는 자신과 유사하게 행동했기에, ‘닮음’에 가까웠다. 닮은 서로는 리버스 숏으로 서로를 눈을 똑같이 '응시 한다'. 레오와 레미, 그리고 소피까지도 몸을 포개며 '촉각을 느낀다'. 살갗이 내 것인지, 네 것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다. 포갠 상태에서 서로의 호흡을 '맡다', 레미의 오보에 연주를 '듣다', 그리고 같은 스파게티를 '먹는다.' 너와 나는 똑같이 느낀다. 특히 레오는 눈으로 확인하지 못할, 내 몸 깊숙한 곳에서 시작되는 호흡을 내뱉으며 레미와 자기만 아는 꿈을 공유한다.      


즉 이들은 물리적 가까움에 그치지 않고 영혼, 내면,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까지도 가깝다. 나만의 공간에 상대가 있으며, 그 상대방만의 공간에도 내가 있다. 서로가 곧 자신의 대리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대가 나를 품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클로즈업된다. 소년들은 감상자에게도 가깝게 느껴지지만, 영화의 클로즈업은 주인공 레오의 시점 숏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레오의 눈에 레미가 가깝다. 이렇게 밀착한 레미, 소피가 자신과 똑같이 행동하는 모습을 본다. 가까운 상대에게서 나를 간접적으로 엿봄에, 결국 레오 자신 또한 가까이서 본다. 프레임에 클로즈업되는 대상은 주로 하나다. 두 소년이 프레임에 함께 공존할 때는 미디엄 숏 내지는 바스트 숏으로 포착된다. 그보다 더 거대한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얼굴은 대부분 프레임을 각기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의 얼굴엔 가까운 상대방의 얼굴이 간접적으로 스며있다. 레미가 사망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레오는 불안에 동요하는 얼굴, 상심이 큰 얼굴이다. 클로즈업된 얼굴은 분명 레오의 것, 그러나 그 얼굴에는 레미의 죽음 또한 함께 포개진다. 레미의 죽음은 남 일이 아니다. 레오가 레미를 밀쳤지만, 그 이유는 사회가 여성적인 두 소년을 '계집애', '호모'라며 밀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레오는 살아남았지만 사실상 그 자신으로 살아남은 게 아닌, 죽은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의 죽음은 곧 레오 자신의 죽음과 같다. 또 레미 사후 레오는 클로즈업으로 포착되는 일이 드물다. 나와 같은 사람의 죽음에 마찬가지로 나 또한 사라지는 듯, 항상 프레임 바깥으로 멀어진다. 레미는 죽기 직전 복통을 호소하며 음식을 거부했고, 화장실이나 방 안에 틀어박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유리시켰다. 하지만 레미와 자신을 분리하려던 레오는 음식을 먹었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레미 사후에 아무리 분리해도 분리할 수 없는, 서로 끈끈하게 연결된 진실과 직면한다. 레오는 음식을 거부하고, 마찬가지로 문을 거세게 닫는다.      


그러나 레미 사후 방문한 친구의 방에서 레오는 익스트림 클로즈업된다. 나보다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해주던 상대방의 유물이 남겨진 레미의 방에서 레오는 자신과 가까워진다. 즉 나 혼자서 클로즈업할 수 없다.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까울 수 있게끔 지지해주던, 나보다 더 많이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나를 가까이서 바라봐주고, 나의 진실을 포용해줌에 자신은 클로즈업일 수 있다. 그래서 영화는 클로즈업과 더불어 줌인도 도드라진다. 음악회에서 레오가 레미의 오보에 연주에 집중할 때, 그의 연주를 흡사 나 자신의 것인 양 느낄 때, 레미 사후에는 절친했던 친구가 떠오르는 연주회에서 소피를 만났을 때, 아이스링크에서 재회할 때, 줌인으로 서서히 다가간다. 자신에게 중요한 대상을 함께 잃은 상대방에게서, 허망하고 쓸쓸한 나의 진실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그렇게 가까이 있기 위해선 도입부에서 두 소년이 무언가로부터 도망쳐서 그들의 우정을 사수했듯, 무언가에게 도망치지 못한다면 가까웠던 것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분명 가까웠던 그들, 그러나 중학교 입학 이후 공간이 변하자 서서히 멀어진다. 그들 곁의 카메라가 줌아웃으로 멀어져, 학교는 ‘롱숏’으로 포착된다. 거대하던 레오와 레미, 상대방에게 확신이 있던 서로는 학교에서 작게 소외된다. 너와 내게 가까웠던 것, 당연했던 것들이 학교에선 “너네 이상해”라는 말로 당연하지 않게 된다. 모욕당하지 않고자 행동을 검열하지만 그 과정에서 레미와 레오는 아득하게 서로, 나 자신에게 멀어진다. 그것이 영화의 핸드 헬드로 가시화된다. 영화는 루카스 돈트의 이전 작품인 <걸>과 연출이 일부 유사하지만, 전작에 비한다면 롱테이크보다는 숏의 잘림이 잦다. 그래서 마냥 현실적이지만은 않고, 핸드 헬드 또한 리얼리즘 이상의 역할을 부여받는데, 바로 이들의 안정적인 우정을 침략하는 외부 압력을 가시화한다. 도입부에서 소년들은 둘을 분리시키려 하는 무언가를 상상한다. 카메라가 급박하게 떨린다. 이윽고 달아난다. 자신들을 방해하는 무언가한테서 도망치니, 영화의 카메라는 스테디캠에 올라타며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이는 소년들의 소우주에서만 유효한 규칙이자 놀이다. 작은 아지트에서 거대한 학교로, 그들만의 규칙이 어찌해볼 수 없는 거대한 보편 원리로 확장되자 핸드 헬드-스테디캠의 방향은 반대가 된다. 입학 전까지 둘은 꽤 안정적이고 평온한 구도로 포착되었다. 그러나 학교의 학생들이 둘의 우정을 의아하고도 못마땅하게 쳐다본다. 그래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흔들림은 둘을 갈라놓는다. 서로를 지지하고 포용하던 온화한 스테디캠에서 카메라는 뛰어내려, 서로를 타자화하고 배격하는 공격적이고 외로운 핸드 헬드로 퇴조한다. 영화의 운동이 핸드 헬드로 변모하며 ‘나 자신’, ‘나와 닮은 상대방’이 가까이서 잘 보이던 클로즈업도 멀어진다. 잘 보이지 않게 된다, 나와 닮은 상대방이, 곧 나 자신이 ‘닫힘’을 의미하는 클로즈로 뒤바뀐다. 레오는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 아이스하키를 배운다. 아슬아슬하고 미끄러운 빙판 위에서 홀로 서기 위해선 강인해져야 한다.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 하나 없이 말이다. 모두 다 밀치고 공격한다. 이전까지 레미는 제 기준에 레오를 맞추지 않고, 레오의 꿈이 어떠하든 상대를 응원했다. 상대의 꿈을 배려하여 자신이 올라탔고, 레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아이스하키는 반대다. 환경이 내게 맞추지 아니하고, 내가 환경이 요구하는 것에 끼워 맞춰야 한다. 환경에 적합하지 않는다면 나는 진실을 포기하고 변해야 한다. 중학교와 사회가 그렇다. 영화의 배경인 벨기에에서는 불어, 독어, 네덜란드어, 총 세 개의 언어가 사용되는데, 중학교에선 오직 네덜란드어로만 자기소개를 시킨다. 또 사회는 유용함이나 좋은 것을 주문한다. 피터와 소피 둘 다 레미가 죽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복직'한다. 사회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을 것을, 빨리 생산적인 세계에 이바지할 것을 요구한다.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레미를 회고할 때, 레미가 울었다거나 레오와 다퉜다는 사실은 쏙 빼놓고, 다들 맹목적으로 '듣기 좋은 말'만 늘여놓는다. 이를 따르면 분명 나름의 이득은 있다. 레오가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을 체화해가니 친구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이와 함께 교차되는 것은 무목적하게 아름다운 레오네 밭의 꽃들이 경제적 가치라는 목적을 위해서 짓밟히는 장면이다. 레오는 무언가를 얻지만 정작 그 자신은 꽃밭처럼 황폐화되었다. 그렇게 진실한 내가 보이지 않게 됨에, 나 자신이 바라는 내게서 멀어져감에 핸드 헬드는 극심해진다. 똑같이 뛰더라도 상대에게 관심이 있고 포용적일 때는 잘 보이던 반면, 상대가 아니라 사회의 보편적인 기준에 관심이 있을 땐 아웃 포커싱으로 흐려지고 지워진다. 그 사회는 남성에게 공격성, 우락부락함을 주문한다. 감각에 둔감해져야지만 빙판 위, 축구 경기 등 남성들의 세계에서 버틸 수 있다. 서로를 부드러운 손짓으로 관용하는 스테디캠이 일반적이지 않고, 상대를 공격하고 때리는 탈의실, 눈싸움 장면에서 핸드 헬드가 일반화된다. 핸드 헬드가 보편화되며 나 자신은 타인,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진실에서 분리되며 멀어진다. 그래서 핸드 헬드를 버티지 못한 레미는 아예 보이지 않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아이스링크에서 상대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밀쳐진 레오 또한 한쪽 팔이 깁스에 감춰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치기 전에도 레오의 클로즈업은 서서히 실종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카메라는 다시 스태디캠 위에 올라타야 한다. 영화 말미에서 레오는 소피에게 자신이 레미를 밀어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소피는 처음에는 이를 듣고 레오를 원망했다. 차 안에서 나가라고 싸늘하게 말한다. 부정당한 레오는 길쭉길쭉하고 두꺼운 나무가 존재를 가리는 침엽수림에서 뜀박질한다. 머물 수 없고 나가야 하는, 이로써 보여선 안 되는 레오는 핸드 헬드로 포착되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소피는 레오를 부르고 호출한다. 진실에 대해서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남성들의 세계에 물든 레오는 소피가 자신을 공격할까봐, 나무 막대기를 쥐고 그녀와 대치한다. 그러나 소피는 부드러운 태도로 다가가서 단지 포옹할 뿐이다. 핸드 헬드는 멈춘다. 요구받은 공격성을 실행하며 멀어졌던 사람들은 다시 가까워진다. 소피는 자신에게 진실을 고백하기 위해서 다가와준 레오의 클로즈업을 헤아린다.      


상대가 '이상하든' 신생아처럼 '귀를 따갑게 만들든' 아이스링크에서 버티지 못할 정도로 '유약하든', 그 진실을 박해하지 않고 가까이서 부드럽게 매만질 때, 그 마음이 내 마음인양 공감할 때, 밀쳐진 레오의 손엔 새 살이 돋아나고, 조산원 소피가 껴안은 신생아는 성장한다. 즉 부드럽고 온후하게 긍정해야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 ‘존재 그 자체’다. 레오와 레미가 꾸린 아지트의 특성도 그렇다. 이들은 아지트에서 ‘군인’을 상상하며 역할극에 참여한다. 그런데 남성 중심적 사회의 일반적인 군인과 다르다. 페미니즘 평화 연구가인 베티 리어든은 일반적인 사회보다 '군사주의적 사회'에서 동성애, 그리고 '여자 같은' 사람들에 대한 공격성이 더 극심해짐을 분석한다. 군대에서는 여성적인 포용력이나 인간적 연민을 키워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인간 돌봄 역량 대신 비인간화와 이성을 강조하여 상대와 싸우기 적합한 ‘전쟁 무기’를 양성한다. 그래서 무찔러야 할 남성은 곧 우정 및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군대에서 체득하는 공격성을 확인하는 비정한 도구로 전락한다. 소년들은 팔굽혀펴기 대결을 하며 힘을 숭상한다. 축구를 좋아하며 힘이 센 스포츠선수를 선망한다. 이들의 사회라 할 수 있는 아이스링크에서 상호 소통은 없다. 일방적인 지시만 있을 뿐이다. 서로를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밀친다. 그것에 익숙하고자 벽에 몸을 거칠게 부딪치는 훈련이 잦다. 성인 남성의 사회를 모방하는 소년들은 남성성으로 일컬어지는 공격성을 체화하고, 본래 가지고 있었을 이타심이나 관용을 타자화한다. 이타심이나 관용을 본성으로 지녔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가진 나는 내가 아니라고 밀쳐내는 것이 타자화다. 레오는 남성들의 사회에 참여하고자 여성적인 자신을 부정하고 타자화한다. 아이스링크의 레오를 보기 위해 레미가 찾아왔다. 그러나 남성성을 체화하지 못한 레미는 남성성을 체화한 레오와 분리된 '창문'을 넘어서지 못한다. 레오는 여성적인 자신을 부정하며, 여성적인 자신과 닮은 레미도 밀어낸다. 하지만 레미의 도착에 핸드 헬드는 잠시 멈춰 레오는 클로즈업으로, 그 자신으로서 잘 포착될 수 있었다.      


그래도 레오는 레미와 거리를 두며 타자화, 곧 자기 부정이 심해진다. 중학교에 간 레오는 레미와 더는 침대를 공유하지 않는다. 맨 바닥에서 딱딱하게 잔다. 그리고 레미가 따라 내려오니 격렬하게 다툰다. 같은 것을 먹던 입은 이제 상대를 '문다'. 레미는 아프고, 레오는 멀쩡하다, 다르게 느낀다. 내가 편한 것이 상대방에게도 좋을 것이기에 서로의 몸에 머리를 포갰다. 그러나 이제 내가 좋은 것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에 좋은 행위를 한다. 레오는 제 배에 머리를 올리는 레미를 배척한다. 똑같이 느끼지 않는다. 레오는 얼굴에 제 팔을 포갠 반면, 레미는 딱딱한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다. 밀쳐진 레미는 복통을 호소한다. 이제 같이 자전거를 타도 속도와 방향을 달리한다. 질주는 둘 중 하나만 포착되는 공격적인 경쟁으로 변한다. 이렇게 군사주의적 사회에서는 남성들 간 ‘가까이’, ‘클로즈’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프레임을 찢는다. 요구받는 특정 남성상에 들어맞지 않는 총체적인 자신의 클로즈업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들의 아지트에서 '캡틴' 레오가 레미에게 지시한 것은 공격성과 차가운 권위, 규율이 아니다. 오히려 군사주의적 사회에서 비열하고 야비한 것으로 평가하는 '도주'다. 그렇게 도주하면서 상대를 무찌르지 않고 공존한다. 새로운 군대를 조직함으로써 사수하는 가치는 포용력, 관용, 우정이다. 레오 가족의 정원에서 꽃들이 무목적하고도 맹목적으로 피어나듯, 레오와 레미도 인위적인 남성성을 따라야 한다는 목적을 벗어던지고, 본연의 순수한 자신을 아지트에서 간직했다. 이로써 상대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가까워진다. 그 자신은 ‘잠재되고 가능한, 새로운 나’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 레미, 소피, 피터 모두 다 따라한다. 자전거 타기, 스파게티 먹는 묘기, 물을 함께 마시는 등, 그렇게 상대에게서 나를 확인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같지 않았다, 닮으려고 노력한 결과다. 인간에게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본성에 있다. 인간은 타자를 부정적으로 여기며 위협적인 적이라 생각한다. 항상 ‘우호적인 나’를 기준으로 다른 것, 틀린 것을 타자가 지닌다고 막연하게 간주한다.  


특히 남성성을 인위적으로 체화한 남성, 본래 태어날 때엔 부드러운 관용이 있었던 남성들은, 강요받은 남성성에 의해 선천적인 자신을 타자화한다. 여성적인 나는 내가 아니라며, 군사주의적 사회에서 평가 절하하는 여성이나, 군사화를 위협하는 ‘남성을 사랑하는 남성’인 게이를 적대시한다. 그러나 영화에선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타자성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흡수하여 닮아가는 과정을 우정으로 본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닮아서 좋아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닮은 것은 아니었다, 달랐지만 이해하고 공감하며 닮아갔고, 그런 우정이 가까웠다. 그러나 레미 사후, 레오는 새로 친구를 사귀어 그의 집에서 묵게 되는데, 레미만큼 가깝지 않다. 서로의 진실한 내면을 이해하며 닮아간 것이 아니라 그저 피상적인 남성성만 빼다 닮았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다가갈 수 없다. 소년들의 세계에 편입되던 레오와 달리, 영화 내내 레미는 타협하지 않으며 자신을 보존했다. 소년들의 세계보다는 슬픔을 곱씹을 수 있고 눈물을 흘리는, 공감이라는 가치를 타자화하지 않은 소녀들의 세계에서 어울렸지만, 그 소녀들도 레미와 레오를 바라보는 시선이 의아하긴 매한가지였다. 즉 레미는 모든 곳에서 타자화되어 적대시된다. 서있을 곳이 없다. 사라진다. 또는 타협하지 않는 존재가 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최후의 수단이 '죽음'이다. 그런 점에서 본 작품은 ‘그리스 비극’을 따른다. 그리스 비극의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공존에 주목하는 니체와 달리, 에른스트 블로흐는 사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죽어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인간의 자유가 그리스 비극에서 강조된다고 보았다. 레미 또한 마찬가지다. 죽어서도 빨간 방이 보존되어 있는, 그만큼 제 몸에 솔직하던 소년은 거짓되게 살지 않고, 오히려 죽음으로써 자신을 보존한다. 죽어서 남긴 방이 그와 닮은 레오의 익스트림 클로즈업, 곧 제 진실에 솔직해지고 가까워지는 순간을 가능케 한다. 반면 레미에 의해서 밝혀지던 레오의 진실은 자신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던 친구의 죽음에 의해 어둠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죽어서 보존해선 안 된다. 살아서도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돈트는 보편성에 편승하고 싶지 않은 개인의 진실을 회복하는데, 그 과정에서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베티 리어든은 의사소통이야말로 타자의 적대감을 몰아내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 말한다. 남/녀는 다른 언어를 구사한다. 그리고 서로의 세계에 커다란 장벽이 있는 남/녀는 이성의 언어를 사용하거나 들었을 때 경멸하거나 무시하는데, 특히 남성적 진영에서 여성적 언어를 사용했을 때 그렇다. 그러나 의사소통을 함으로써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가상적인 '적의 이미지'가 무너진다. 영화 속 학교에서도 소년/소녀의 세계가 분리되어 있고, 레오는 자신의 여성성을 소년 진영에서 지적받았을 때, 남성인데도 여성적인 레미를 적대시한다. 그런 레오가 용변실수를 하고 무서워서인지 형 곁으로 간다. 찰리는 벽을 치지 않고 동생을 보듬어준다. 강하고 공격적이어야만 하는, 포옹하기보단 밀어낼 것을 주문하는 보편적 남성성, 그러나 여기서 벗어난 존재를 이해한다. 소피와 피터가 나탈리의 집, 즉 일반적인 가정에 초대받았다면, 이제 레오가 유가족의 집에 방문한다. 그리고 보편성의 강요가 아닌, 비일반적인 유족의 삶과 허망함을 레오가 체감한다. 이후 레오는 집에 돌아온다. 죄책감으로 문을 걸어 잠근다. 들어오려는 나탈리를 배격한다. 소년은 울면 안 되는 남성이기에, 곧 혼자서 강인해야 한다고 사회는 주문한다. 그러나 나탈리는 레오가 문을 잠그지 못하게 저지하고, 방으로 들어가 레오를 끌어안아 남성적이지 않은 눈물을 위로한다. 그간 레오는 레미에게 지지받던 부드러운 감정을 아이스하키 훈련을 하면서 혐오하고 몰아냈다. 그러나 소년은 여성과 소통하고, 그럼으로써 적대시한 여성성을 다시 긍정하고 감정을 되찾으며, 궁극적으로 ‘나’를 회복한다. 아이스하키 도중 팔을 다친 레오는 눈물을 흘린다. 자신의 통증이 아프기 때문일까, 자기 폐쇄적 통증은 아닐 것만 같다. 레오가 밀쳐지며 느껴진 참을 수 없는 통증, 거기서 밀쳐지고 또 밀쳐져서 자살한 레미의 고통이 물밀듯이 밀려왔으리.  


그간 레미와 레오는 아이스하키 경기장의 단단한 창에 가로막혔다. 그러나 이제 레오와 소피는 그 창을 넘어서 ‘줌인’하며 다가간다. 소피의 집, 소피가 일하는 병원을 방문한다. 함께 강아지와 교감한다. 진실을 고백한다, 같이 운다. 처음에는 원망하더라도, 함께 흐느끼는 레오를 보며 타자로서 적개심을 누그러뜨린다. 자신처럼 힘들었을 레오의 고뇌를 이해한다, 포옹하며 느낀다. 진실한 서로를 긍정함에 삶은 피어난다. 누군가를 잃은 소피가 병원, 그것도 여성의학과에서 조산원으로 일한다는 것, 슬픔 속에서 아기는 여전히 보호자를 붙잡고 칭얼댄다는 것, 삶이란 죽음 사이에서 이기적이다. 짓밟혔던 밭에서 다시 묘목이 자라나고, 친구가 죽은 레오의 손목에 새살이 돋아나는 가운데서, 다만 삶을 만끽하는 사람이 망자의 진실을 기려준다면, 그렇게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면 삶이란 그리 이기적이지 않다. 소피와 피터의 빈 집, 그리고 항상 동행하던 레미를 쳐다보기 위함인 듯 무의식적으로 뒤돌아보며, 삶과 죽음의 만날 수 없는 장벽에도 불구하고 마주하려고 노력하며… 이렇게 돈트는 두 번째 장편에서도 퀴어 이야기를 꺼내본다. 이는 섹스와 젠더의 직접적 변화를 논하던 <걸>에 비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훨씬 보편적인 이야기다. 강요된 남성성과 여성성의 장벽, 보편성의 부조리 가운데서 개인성을 추구하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퀴어 영화다. 보편성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퀴어로 전락하는 분리는 이제 허물어져야 한다. 우리는 나와 같은 대상을 사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이해하고 좋은 것을 닮아가며, 설령 그 격차를 좁힐 수 없다면 이를 존중하는 우정을 지향해야 한다. 그렇게 동성과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이 더는 기이한 일이 아니게 될 때, 여성만이 포용적이지 않고 남간호사 또한 병원에서 부드러움과 이타심으로 레오를 위로할 때, 퀴어 낙인이 찍힌 개인은 그 특유성을 저버리지 않고서도 자신을 회복할 수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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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504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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