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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10. 2023

데이비 추, <리턴 투 서울>

내가 선택한 언어, 선택하지 않은 몸

데이비 추(Davy Chou), <리턴 투 서울>(Return to Seoul) 

- 내가 선택한 언어, 선택하지 않은 몸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091

“우리는 어떤 것은 기억하고, 또 어떤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것은 기억에 보존하고 싶어 하고, 또 어떤 것은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여전히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대한한국의 아이들은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해외로 입양되고 있다. 한국을 떠난 아이들은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접한다. 그 언어와 문화가 입양아들에게 과거와 기억으로 남아,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한다. 비록 맨 처음 배운 언어와 차이가 있을지라도, 본인과 보호자의 피부색이나 용모가 다를지라도, 새로운 보호자가 뇌리에 심어주는 경험과 기억이 입양아들의 향방을 좌우한다. 하지만 입양아들에겐 새로운 환경에서도 떨쳐내지 못할, 불가항력적이고 선천적으로 새겨진 과거가 있다. 새로운 국적을 부여받는다 한들 생물학적인 부모가 태어나기 전부터 각인시켜 놓은, 본래부터 타고 난 인종과 민족이란 불가항력적인 기억이 희미한 잔상으로 남아 그들을 따라다닌다. 의식하지도 못하는 과거이지만, 그 불가항력적인 기억은 입양아들의 현재와 미래에 큰 파장을 미친다. 자신도 모르는 역사에 관한 입양아들의 생각은 모두 제각각이겠지만, 그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입양되기 전으로, 흡사 연어처럼 입양아들은 회귀하기도 한다. <리턴 투 서울> 속 한국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입양된 프레디 또한 불가항력적인 기억이 가리키는 서울로 되돌아온다. 이를 연출하는 1983년 퐁트네오로즈 태생의 데이비 추는 캄보디아계 프랑스인 영화감독이다. 프랑스 국적을 가졌지만 캄보디아나 프랑스 바깥에서 영화를 연출하는 그는, 프랑스인이지만 쉽게 프랑스에 융화될 수 없는 캄보디아계라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작품에 반영한다. 또 자신이 선택한 정체성과 선택하지 않은 정체성을, 기대한 미래와 급변한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동시대 청년에게 확장한다. 그의 단편, <캄보디아 2099>에서 청년은 다들 꿈을 꾼다. 더 아름다워지고 싶고, 각자가 바라는 미래를 희망한다. 꿈을 꾸는 청년들은 둔덕, 아파트 못지않은 높이로 포착되어 웅대하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청년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며, 나를 넘어서 연인과 연애한다. 그러나 패닝으로 움직이는 영화의 카메라가 시작지점으로 되돌아오듯, 가도 가도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는다.      


또 오토바이를 타고 무한히 나아가도 보이는 것은 공사를 하다 만, 멈춰버린 미완의 황량한 풍경이다. 데이비 추가 포착하는 공사판은 캄보디아의 다이아몬드 섬으로, 완공되면 캄보디아인들은 추방되고, 오직 부유한 외국인 관광객만 입장할 수 있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미래는 진척되길 바라는 것임과 동시에, 결코 나아가선 안 되는 시간이다. 그들의 꿈은 고사하고 지금 여기에서 추방당할 실정이기에 공사는 멈춰야 한다. 그래서 나아감과 멈춤이 교차된다. 나아가고자 하는 곳엔 자신의 자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안주하지도 않는다. 커지는 결핍에 따라서 꿈 또한 점점 더 부풀어가지만, 그 극단화 속에서 현실-물질/꿈-정신은 양극화된다. 꿈을 지향하면 오직 관념만 남거나, 현실과 타협한다면 우두커니 물질만 남거나. 즉 데이비 추는 속할 수 없는 꿈과 속해야만 하는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청년의 초상을 단편에서 탐구하였는데, 그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 초상이 <리턴 투 서울>에서 이어진다. 내가 생각한 정체성/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진 정체성 사이에서, 주인공 프레디는 후자에 붙잡힐 것인가, 전자를 개척할 것인가. 영화 속 프레디는 몸소 선택한 정체성만을 완고하고 우직하게 따르는 개척자의 전형이다. 그래서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그녀 얼굴이 프레임에 한가득 담긴다. 이보다 더 그녀 자신에게 거대하거나 가까울 순 없다. 외부에서 그녀에게 파고들 틈이 조금도 없다. 거대하게 포착된 프레디는 한국에서도 불어를 사용하고, 항상 제 감정에 충실하다. 물론 외부에선 프레디 자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봐주지 않는다. 한국계 프랑스인이라는 이중적 정체성 중 '한국계'만을 그녀에게 기대한다. 술자리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들은 다들 프레디를 한국인으로 오해한다. 또 하몬드아동복지회(이하 하몬드)에 가는 당시, 지도에 골똘히 집중하던 프레디는 한 할머니와 부딪혔고, 그 할머니 또한 당연히 프레디를 한국인으로 간주하여 한국어로 주의를 줬다. 이후 프레디가 프랑스로 돌아가려 하니, 그녀와 섹스를 가진 남자는 돌아가지 말라며, 한국 남자를 위한 수동적인 여자 친구를 기대하며 애걸복걸한다.      


즉 프레디는 ‘한국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체성’을 추구하나, 타인들은 '한국사람'이자 '여자친구'로서 그녀를 기대한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선택하는 프레디는 타인의 기대를 당연히 거부한다. 그녀는 본인의 인생관을 설명하기 위해서, 악보를 단번에 보고 연주하는 '시주' 개념을 빌려온다. 시주는 타인의 연주를 따라하거나 답습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으로 해당 악보에 대한 '첫 번째' 연주를 도출한다. 또 앙드레와 동석한 당시 그녀는 ‘제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를 따른다고 말한다. 즉 그녀는 고유한 자신의 직감과 판단을 따르며, 답습을 거부하고 항상 처음을 지향한다. 테나, 동완과 술자리를 가진 당시, 프레디는 일면식 없는 손님들을 불러 모아 ‘군도’와도 같던 술자리를 하나의 ‘대륙’처럼 모은다. 한국인의 전형이 군도라면, 고유한 프레디는 대륙이라는 첫 경험을 다수에게 선사한다. 또 프레디 혼자 하몬드에 가는 도중 할머니와 부딪힌 장면을 데이비 추는 롱테이크에 담아낸다. 그 직전까진 프레디가 새로운 문화와 정보로 뛰어넘는 과정을, 기존 숏에서 다른 숏으로 이동하는 '컷'으로 가시화했다. 반면 하몬드로 향하는 시퀀스는 오직 하나의 테이크로 구성되어 운동은 여러 숏을 오가지 않고, 하나의 숏 내에서만 유효하다. 롱테이크에서 프레디는 "길을 잘 보고 다녀라"는 할머니의 경고에 ‘한국어를 받아들이는 한국인’으로서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의적’으로 넉살좋게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가 요구하는 반응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존의 프레디가 잘리고 다른 상태의 프레디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말을 해준 사람으로 해석된 할머니가 프레디의 자의적인 롱테이크에 역으로 편입된다. 마지막으로 사귀자고 제안하는 남자에겐, 프랑스에 남자친구가 있다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더욱이 그 관계는 프레디가 그에게 섹스를 하자고 해서 그녀 중심으로 편성된 관계이지, 그에 의해서 진척된 관계가 아니다. 항상 자신이 인생을 주도하고 이에 확신이 있기에 프레디의 얼굴은 거대하게 포착된다.      


그런데 프레디의 자아가 확신을 갖는 클로즈업과 롱테이크가 흔들린다. 프레디는 의식이 기억하지도 못하고 듣거나 구술하기로 선택한 적도 없는 <꽃잎>의 선율,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는” 가사가 귀에 맴돌고 그리운 듯 이끌린다. 그리움을 자아내는 떠나감 또한 프레디가 선택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떠나가서, 그녀에게 생이별을 선사한 사람은 그녀를 낳은 친부모다. 영화 후반부, 그녀는 비건이 되어서 환경 보호에 동참한다. 그것이 그녀가 추구하는 신념이자 정체성이다. 그러나 한국계란 운명에 의해서 오히려 환경과 세계를 위협하는, 모순적인 군수기업의 컨설턴트로 일하게 된다. 그래서 프레디의 클로즈업엔 서서히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프레디 한 명만 놓였던 프레임에는 ‘여럿’이 들어차고, 다른 사람들이 교차되며, 혼자 놓인다 한들 무언가가 채워질 ‘여백’이 많아진다. 항시 가까운 거리에서 포착되던 프레디는 하몬드에 가는 도중에는 풀숏으로 멀어진다. 그녀가 선택하지도 않은 친부모나 가족이 침투하게 되리라는 듯, 프레임에 여백이 생긴다. 이후 그녀가 선택하지도 않은 가족과 만나는 터미널에선 '롱숏'으로, 선조들 대대로 반복되었던 삶을 확인하는 새만금으로 향할 땐 '익스트림 롱숏'에 프레디가 ‘모래알’처럼 담긴다. 외부에서 파고들 틈을 허용하지 않던 빽빽한 익스트림 클로즈업에 틈이 벌어지며, 그녀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이 침투한다. 선택한 적 없는 거대한 불가항력이 틈 사이를 파고들어 작은 개인 주위를 에워싼다. 프레디가 추구하는 정체성은 위압적인 롱숏 앞에 가로막혀 낯설어진다. 불가항력은 그녀 자신이 알지 못했던 본명 '연희', 그 이름에 담긴 '순하고 밝다'는 의미를 가져온다. 그래서 롱테이크 또한 변화한다. 하몬드로 향하는 롱테이크를 프레디가 주도했다면, 친부가 새만금에 데려갔을 땐 아버지의 발걸음이 롱테이크를 이끌고, 해당 숏에 프레디가 뒤이어 따라온다. 저녁 식사를 포착한 롱테이크 또한, 그리스도에게 기도를 드리는 할머니가 주도하고 그 이후 프레디가 담긴다.      


본래 프레디는 ‘제 발’로 이동하여 한국 노래가 아닌, 듣고 싶은 영어 노래를 선곡하고 이에 맞춰 춤을 췄다. 외부 세상에 막연히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발걸음으로 원하는 세상을 개척한다. 그런데 그녀의 발과 다리가 움직이지 않기 시작한다. 군산으로 가는 '버스'가 그녀 하반신 대신 달린다. 좌석에 널브러져 앉아있던 프레디는 갑자기 ‘일어나’ 서울로 돌아가자고 기사에게 고함친다. 그러나 프레디의 발과 다리가 원하는 요청은 거부된다. 이후 친부가 운전하는 '트럭', 친부가 그녀 발에 신기길 원하지만 정작 프레디는 싫어하는 ‘발레 슈즈’, 영화 말미에는 친부가 부른 '택시'에 태워진다. 그래서 그녀의 발걸음에 상응하는 카메라 워킹도 둔탁해진다. 프레디가 자신의 발과 다리를 따라서 한국의 새로운 문화를 접했을 때 카메라는 그야말로 능수능란했다. 동완은 몽골어로 창작된 시를 프레디에게 불어로 번역하여 읽어준다. 그 과정에선 크래쉬 줌과 아주 유려한 카메라 워킹이 동반되고, 정면을 포착하던 구도는 측면 구도로 변화하며 ‘다른 것’들로 이리저리 이동한다. 그 다른 것은 불가항력적으로 닥쳐오는 것이 아닌, 그녀가 후천적으로 선택한 만남과 듣기다. 선천적인 제한, 불가항력의 한계, 구속 등을 뛰어넘는 이동에서 프레디는 제 발이 자유롭고, 형식은 유려해진다. 시퀀스는 여러 숏을 오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술자리를 하나로 모을 때, 음악을 선곡할 때, 클럽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출 때, 카메라 워킹은 그야말로 야생마처럼 날뛴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하지 않았던 운동인 핸드 헬드가 닥쳐온다. 그녀 말대로, 친부모 마음대로 딸을 버렸고, 만남 또한 자식에게 우선권이 있지 않고 친부모에게 있다. 프레디가 선택하지 않은 친부모에 의해서 그녀 삶이 흔들린다. 하몬드에서 전화가 왔을 때, 7년 후 프레디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친부가 보일 때 말이다. 즉 인간은 자의적인 하반신으로만 삶을 개척할 수 없다. 내 발도 중요하지만, 내가 어찌해보지 못할 불가항력적인 과거, 선천적인 환경이 나를 운송하며 삶을 뒤흔든다.     


친부는 ‘쥐똥섬’에서 놀았던 기억을 프레디에게 소개한다. 썰물 때 뻘이 다 드러나는 환경이 아니었다면, 섬까지 걸어가서 놀았던 친부의 추억은 쌓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기억은 불가항력적인 환경이 선물한 것으로, 친부만의 처음, 고유한 기억이 아니라 다수의 공통된 기억이다. 본래 새만금에서 프레디 가문은 대대로 '어부'였다. 환경이 이를 좌우했다. 그런데 간척 사업이 진행되고 환경이 뒤바뀌자 친부가 '에어컨 수리 기사'로 직종을 바꿨다. 또 프레디는 하몬드에서 6.25전쟁의 여파로 해외 입양이 늘어났다는 그래프를 접하고, 할머니는 "키울 여력이 도무지 안 되어서 입양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라고 한탄한다. 즉 불가항력적인 환경과 과거를 거스를 수 없다. 프레디는 자신이 어찌해볼 수 없는, 선택하지 않은 것들로 버거워한다. 데이비 추는 이를 ‘언어’와 ‘몸’을 빌려서 말한다. 먼저 ‘언어’, 프랑스인인 그녀는 입을 열면 ‘불어’를 유창하게 구술한다. 프레디는 불어를 발화하기로 ‘선택’한다. 그녀는 당당하고 솔직한 주체성을 불어에 반영한다. 타인을 신경 쓰지 않는다. 테나와 동완은 한국에서 술을 혼자 따라 마시면 동석한 상대방에게 '모욕'이라고 알려준다. 그러나 프레디는 관례를 따르기보다는 그냥 자기 마음가는대로 혼자 술을 따른다. 하몬드에서 프레디는 원칙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친부모와 만나게 해달라고 항의한다. 프레디는 친부가 자꾸 귀찮게 하니 '욕설'을 번역해서 보내달라고 테나에게 부탁하고, 욕설이 아니어도 프레디의 불어는 영화 내내 아주 적나라하다. 반면 한국어는 내게 솔직하지 않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프레디에게 내내 '사과'하고, 테나는 항상 청자의 기분을 신경 쓰며 한국어로 번역한다. 타인을 지나치게 배려한 나머지 프레디가 말한 것을 전혀 다른 의미로 번역하기도 한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프랑스인 프레디가 아닌, 가족의 일원인 연희를 주문한다. 즉 타인이나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가 영화 내내 한국어에 반영된다. 그 언어가 깊게 각인된 존재는 식구들을 위해 자신을 묵묵히 희생하는 친부의 현재 아내다.     


프레디도 한국어를 배웠을 때, 깍두기를 챙겨준 옆집 할머니에게 '감사 인사', 본인은 원치 않은 생일지만 케이케이의 성의를 생각해서 파티에 참여한다. 이렇게 공동체, 타인을 우선하는 한국어는 개인임을 지향하는 프레디에겐 영 석연치 않았다. 하지만 타인과 연결해주는 한국어와 달리, 불어를 구사하는 프레디는 외롭다. 선천적으로 당연한 한국어는 큰 노력 없이도, 또 프레디가 어떤 상태이든 그녀와 이어진다. 친부는 술에 진탕 취해서 군산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한국어를 토해내고, 또 프레디가 친부의 문자나 메일을 거절해도 그가 보낸 한국말은 그녀의 메일함을 꽉 채운다. 그러나 불어는 다르다. 프레디가 입을 열고 불어를 구술하면 프랑스인들과 가까워질 수 있다. 다만 그녀가 잠이 들어 불어를 발화하지 않으면 그녀 곁에서 맥심이 사라진다. 프랑스인은 먼저 다가오지 않는다. 불어를 말하는 프레디가 앙드레와의 관계를 주도한다. 또 프랑스인은 그녀를 프랑스인으로서 당연하게 보지 않고 한국계로서 특정한 상태를 주문한다. 앙드레는 프레디의 휴전 중인 한국계라는 특수성을 부각하여 ‘군수기업의 딜러로서 그녀’와 관계를 깊게 맺는다. 양어머니 또한 자신들과 함께 서울에 가지 않은 그녀를 존중하기보단 서운해 한다. 즉 그녀는 불어를 애써 구술하고, 특정 모습을 띠어야지만 프랑스인과 겨우 연결된다. 프레디는 양부모 앞에선 솔직하게 다 말할 수 있길, 또 앙드레에겐 직업적 만남이 아닌 즉석 만남을 바랐지만, 그녀의 바람을 편집은 이어주지 않는다. 앙드레는 저 멀리 화상통화로만 연락할 수 있는 존재, 맥심은 함께 있어도 자기가 먹을 삼계탕만 집중하는 존재, 그녀가 "마음대로 지워버릴 수 있어"라고 맥심에게 주도적으로 경고하니 되레 먼저 떠나버린 그 남자, 이로써 그녀의 곁에서 떠나는 존재가 프랑스인인 반면, 생물학적 부모와 한국인으로서의 기억은 아무리 떨쳐내도, 또 그녀가 애쓰지 않아도 다가오기에 그녀의 외로움을 해소시켜 준다. 프레디가 처음 하몬드에 간 당시 한국인의 불어는 원칙을 강요했으나, 이후 그 원칙을 파기하고 프레디의 사정을 헤아려주며 선천적으로 당연한 것을 연결시켜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프레디의 언어는 영화 속 한국어와 불어 사이인 ‘영어’와 같다. 영화에서 한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이 직접 소통하는 지대인 영어는 "섹스하자", "기사님 서울로 되돌아가요" 등 프레디의 솔직함을 반영함과 동시에, 고모라는 청자를 의식하며 타인을 배려하는 언어로 이중성을 띤다. ‘몸’ 또한 선택하지 않은 몸과 선택한 몸이 교차한다. 처음 하몬드에 들른 이후 프레디는 몸을 아주 깨끗하게 씻었다. 프레디의 몸 위엔 실오라기 하나 조차 걸쳐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한 한국계로서의 시각, 그 불가항력적인 몸만 남았다. 그 순수한 몸은 혈연을 다시 이었다. 그런데 2년 후, 프레디는 순수한 입술 위에 아주 강렬한 '다크 립'을 칠하며, 선천적으로 타고난 용모 위에 자신이 선택한 것을 덧칠한다. 또 당연하게 물려받은 피부를 새롭게 규정하는 타투이스트 케이케이와 사귄다. 반면 선천적인 피로 연결되는 친부를 ‘스팸 차단’하고,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탄생을 기념하는 '생일'도 싫어한다. 순수한 몸에 ‘술’까지 들이 붓는다. 영화 중반부까지는 너나 할 것 없이 죄다 술에 절어 있다. 그럼으로써 객관적인 몸을 잊는다. 친부는 술에 진탕 취해 ‘현재의 프레디’를 부정하고 ‘과거의 연희’로 취급한다. 프레디가 생일파티에서 술과 약에 절어 노래 가사처럼 ‘꿈’으로 도약하는 것도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진 몸을 초월하기 위함이다. 파티에 참여한 사람들은 각자의 프레임에 ‘클로즈업’으로 갇혀서, 타인과 연결되기보단 오직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밴드의 노래처럼 ‘섹스’, 곧 자신의 쾌락에만 탐닉한다. 설령 관계가 이어진다 한들 결코 항구적이지 않다. 루시가 케이케이와 키스를 하고, 또 프레디는 루시와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긴다. 관계는 자신을 규정하고 구속하는 과거나 성 지향성에 얽매여있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 시작 기준 총 7년 후 프레디가 다시 한국에 왔을 때, 그녀는 ‘금주’와 '비건'을 선언한다. 프레디는 5년 전과 달리 화장기 없는 얼굴이요, 케이케이와 사귀지도 않는다. (5년 전에도 프레디는 화장을 지운 ‘맨 얼굴’로 옆집 할머니와 ‘한국어’로 대화했다) 이젠 물려받은 육체를 칼을 대거나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      


이로써 불가항력을 따른다. 친부가 자신에게 바랄 옷차림이 무엇일지 골똘히 고민한다. 그가 선물해준 발레 슈즈를 가져왔어야 하나 장난을 친다. 이후 방콕에서 사고가 나서 꿰맨 쇄골 부근의 흉터를 친부가 만지도록 허용한다. 그럼으로써 떨쳐낼 수 없는, 멀어진 몸과 몸을 바느질하듯 다시 이어낸다. 그런 점에서 프레디는 한국인임과 동시에 성별까지도 똑같은 친모를 그토록 찾고 싶어 한 것이랴, 시작 기준 8년 후 생일 날 한국에 다시 찾아오며. 친부 또한 술을 줄이고 현실을 인식한다. 프레디는 친부가 술을 줄이니 더 젊어졌다고 말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간 현실에서 자신을 축내면서 비현실로, 관념으로 이탈했었으니 말이다. 버티기 어려운 현실을 부정하면서 비현실로 도망쳤다. 하지만 이제 친부는 현실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며 활동적인 일, 실제적인 일을 한다. 그런데 술을 덜 마시거나 아예 끊음으로써 부녀가 인식하는 사실이 서로 다르다. 본래 이중적인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해서 엇갈리던 서로는, 이젠 이해하지 못하던 이중적 요소를 이해하며 또다시 엇갈린다. 술을 줄인 친부는 이제 프랑스인으로서 프레디를 인식한다. 그녀가 군산에 못 내려오는 것이 내심 아쉬우면서도 비건이자 금주하는 프레디를 존중하고, 그녀가 프랑스로 빨리 돌아가도록 다급하게 택시를 태워 보낸다. 즉 친부는 프레디의 이중적 정체성 중 '프랑스인'을 인식한다. 반면 프레디는 한국계 프랑스인에서 ‘한국계’를 긍정하며 한국어도 배웠다. 하지만 자신을 연희로 여기던 한국이 이젠 그녀를 프레디로 여기며 밀어낸다. 친모 또한 마찬가지다. 프레디가 만나고 싶어 한 당시에는 만남을 거부한다. 그래서 프레디는 생일 파티에서 더 미친 듯이 초현실로 도주했다. 그런데 그녀가 거의 자포자기 했을 때 친모는 나타난다. 만난 당시 이메일 주소를 남겼다. 그 당시에는 진심으로 연락하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만난 당일로부터 1년이 지나서 프레디가 메일을 보내니, 잘못된 주소라며 발송이 불가능하다. 메일을 준 당시에는 프레디가 망설였다.      


이후 프레디가 연락을 결심하자, 이젠 친모가 모종의 이유로 이메일 주소를 파기했다. 친모는 프레디가 자신과 연락하기 싫다고 생각했을까, 염치없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나 그 순간 프레디의 마음은 달라졌다. 이렇게 영영 떠돌기만 할 뿐 정착하지 못하는 프레디의 여정이 이중적 정체성의 딜레마를 집약해서 보여준다. 입양아들은 후천적인 것에 익숙해져 잘 살고 있었지만 불현듯 선천적인 족쇄가 엄습하며 기존 삶은 영화의 핸드 헬드처럼 뒤숭숭하게 흔들린다. 처음에는 생경하게만 느껴졌던 선천적인 굴레에 반항하나, 결국 연어처럼 선천적인 끈에 회귀하며 후천적인 것을 밀어낸다. 그러나 이젠 후천적인 것이 선천적인 것을 반대한다. 이에 선천적인 것을 찾아서 도착한 숙소에도 머무를 이유가 사라진다. 나가야 한다. 나가기 직전, 친부와 닮은 ‘피아노 재능’을 애써 모방해야 겨우 숙소에, 곧 선천적인 곳에 남는다. 이로써 복수적 정체성을 가진 입양아들은 ‘둘 다’는 고사하고, ‘둘 중 하나’도 제대로 갖지 못한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며 길을 잃은 데이비 추의 이민자, 청년, 그리고 '입양아'는 미아다. 그들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양 측의 팽팽한 줄다리기, 그러나 데이비 추는 영화로써 두 정체성을 모두 품으며,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 길 잃은 초상에게 안식처를 제공한다. 그는 입양아,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 아웃사이더의 삶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구성, 다중언어로 현명하게 연출한다. 그런데 지적인 부분만 매력적인 작품은 아니다. 이방인에겐 당연하지 않은 한국의 풍경 또한 참으로 인상적이다. 한국인의 시선에선 당연해서 외면하던 표지판이나 도로, 아파트 풍경, 또 정신 사나운 전광판과 네온사인, 출근길의 정경 등 누군가에게 당연하지 않은 한국의 감각을 뛰어나게 환기한다. 우리에겐 익숙한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닥쳐올 때 발생하는 어지럽고 낯선 감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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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505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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