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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06. 2023

엘레나 로페스 리에라, <워터>

인간이 물과 같다면, 그만큼 불특정하게…

엘레나 로페스 리에라(Elena Lopez Riera), <워터>(The Water) 

- 인간이 물과 같다면, 그만큼 불특정하게…     

“반짝이고 있는 강물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것들과 다름없이 이들도 까맣다. 그러나 모든 것이 죽어 있는 그곳에 이들은 강물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나딘 고디머-

범람원 혹은 습지는 견고한 대지보다 더 풍부한 이야기를 내재한다. 딱딱한 땅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들은 그 지형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이고 큰 틀에서 변화하지 않는다. 견고하게 굳어 있다. 단단한 땅이 촉발하는 제한, 그 제한 속에서 살아가는 인류의 삶 또한 단출해지는 법이다. 그러나 범람원은 딱딱한 지형이 가져다주지 못하는 비릿한 냄새와 말랑말랑하고 끈적끈적한 질료를 제공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질료 위에서 살아가는 인류는 마찬가지로 흐물흐물해져 여러 상태로 변이한다. 더욱이 물이 차올랐다가 빠져나가고, 다시 차올랐다가 빠져나가길 반복하며, 무언가를 앗아가고 또 무언가를 더하며, 기존에 있던 것들은 자유분방하게 변신한다. 그 가운데서 땅은 헐거워져 딱딱한 대지가 숨기고 있던 것들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 범람원이 가져다주는 이야기, 또 습지를 다루는 영화답게 액체의 속성에 맞추어 자유분방하게 변형되는 형식을 엘레나 로페스 리에라가 <워터>에서 보여준다. 1982년 오리우엘라 태생의 엘레나 로페즈 리에라는 스페인의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총 세 편의 단편을 내놓았으며 보편적인 하나의 스페인이 아니라, ‘무수한 지역들의 전통과 설화를 보존하고 영상화하는 작업’과 ‘자유를 탐구하고 이에 걸맞은 영상문법’을 실험하였다. <워터>는 그녀의 장편 데뷔작이다. 물과 같은 것들을 포착하는 그녀의 첫 번째 장편, 그러나 의아하게도 도입부에 물기는 전무하다. 습기 대신 어둠으로 꽉 차 있다. 하지만 그 어둠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많은 부분 액체의 성질을 공유한다. 어둠 속에 숨겨진 청년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춤추고 서로 연애를 즐긴다. 흡사 우기의 범람이 가져다놓은 침전물들이 퇴적된 둔탁한 진흙탕 같다. 물컹물컹한 진흙 속에 손을 조금만 뻗어도 숨겨진 것들을 쉽게 잡을 수 있다. 그래서 어둠 속에 파묻혀있는 청년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 플래시를 터트리거나, 라이터의 불빛, 클럽의 휘황한 조명 등으로 손쉽게, 그러나 간헐적으로 발굴된다. 끈적거리는 진흙이 침전물을 붙잡고 놔주지 않듯, 언뜻언뜻 형체는 보이지만 오롯이 어둠 속에서 꺼낼 순 없다.      


리에라는 액체의 유동성과 불특정한 특징을 추상적인 어둠에 유비한다. 드러날 수도 있고,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대상이 늑대일지 개일지 차마 단언할 수 없는 가능성이 물처럼 무궁무진하다. 그 여지를 단 하나로만 좁혀서 드러내는 오후, 지상과 딴판이다. 본 어둠 속에서 카메라는 꽤 능동적이다. 인물들의 얼굴에 가까이 접근하고, 또 카메라 워킹 또한 능수능란하여 흡사 카메라 스스로 춤을 추는 느낌이다. 물속을 수영하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그러나 아침이 되었다. 수중과 유사한 어둠에서 빠져나온 청년들은 이제 탄탄한 대지 위에 서있다. 부드러운 진흙이 많은 것을 품고 있는 범람원과 같았던 어둠, 그러나 대지는 다르다. 대지는 딱딱하고 튼튼하다. 대지 아래에 숨겨진 것을 파내기에 인류의 가냘픈 손은 무기력하다. 견고한 대지는 어지간해선 항구적으로 그 상태에 머무른다. 덜 변한다. 또 대지는 인류를 중력으로 지배한다.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저 하늘과 달리 제한이 가득하고, 영화 속 아나와 호세가 부력으로 둥둥 떠있는 물과 달리, 밑으로 우리의 발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대지는 범람원처럼 아래로 침전시키지만, 그렇게 쌓인 것들을 쉽게 들춰낼 수 없음에 가능성이 축소된다. 또 떠오르는 태양이 어둠을 몰아낸다. 아침과 오후엔 찬연한 태양이 대상을 내리쬐어 잘 보인다. 눈에 보이는 대상이 무어라고 확고하게 단언할 수 있다. 그래서 태양이 존재를 노출시키고 밝히는 만큼, 상대의 눈에 의해서 우리가 무어라고 규정되는 만큼, 오후의 사람들은 '밝혀질 만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어둠 속에 가려 밝혀질 만한 상태가 아닌 청년들은 '춤꾼'이자 '연인'이었다. 그러나 오후의 그들은 '학생'으로 되돌아간다. 어둠 속에서 춤추는 청년들은 구체적인 말이 적었다. 추상적인 음악과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감정을 반영하는 표정, 몸동작만 있었다. 그러나 오후의 청년들은 학업과 공부에 대해서, 또 마을에서 떠날 수 없는 신세를 구체적으로 한탄한다. 오직 학생으로서 특정한 발화만 허용된다는 듯이.      


이에 따라 어둠 속 청년들에게 가까이 달라붙어, 그들의 능수능란한 몸을 포착하던 감각적이고 유연한 카메라는 멀어지고 얼어붙는다. 클로즈업과 미디엄숏은 롱숏으로 뒤바뀐다. 구체적인 세계가 더 크게, 확실하게 보인다. 이렇게 확장된 롱숏의 주인공은 학생들을 좌우하는 지상이다. 이로써 ‘자유로운 나 자신’이 아니라 ‘세계에 의한 자신’으로 전락한다. 즉 불특정하고 유연한 존재로부터, 구체적이고 특정한 존재로 제한되고 구속됨에, 이를 포착하는 카메라 또한 통제된다. 카메라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밝히는 빛’을 위해 봉사하는, 또 중력에 붙잡혀 널브러지고 가만히 멈춘 청년들의 상태를 반영한다. 그 대지가 뿜어내는 중력의 제한은 부모, 선대의 영향을 상징한다. 선조들은 강에 저주가 깃들어있다고 주장한다. 청년들은 머물러있는 상태가 싫으면서도, 그렇다고 강에 올라타 변화하지도 않는다. 청년들은 부모의 말을 넘어서지 못한다. 호세의 또래가 그를 비난하고 놀릴 때도, 호세의 아버지가 개입하니 이를 멈춘다. 호세의 아버지는 아들의 연애에 깊이 개입한다. 아나 가족의 여성들이 강의 저주를 받아서 사라질 예정이니 아나를 멀리하라며 단속하고, 이를 위해 아나의 어머니 이자벨에게 찾아가서 부탁한다. 중력이라는 외부 원리에 의해서 나 자신이 추구하는 내재적 원리가 소외된다. 나는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중력에 의해서 산다. 영화 결말에서 아나는 말한다. 지금까지 자신은 어머니 및 할머니와 다를 바가 없었다고, 비로소 이제야 '내 삶'을 살게 되었다고, 중력에 의해서 인간은 원치 않은 삶에 붙잡힌다. 그러한 삶 중 하나는 ‘젠더’다. 영화 속 아나의 동성 친구들은 모두 연애나 결혼에 관심이 많다. 또 강은 결혼을 앞두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에게 저주를 퍼부어, 그녀가 우기에 갑작스레 사라지게 만들었다. 즉 여성이 신부가 될 수 없는 것, 남성의 곁에서 멀어지는 것이 '저주', 곧 나쁜 것, 해선 안 되는 행위라 일컬어졌다. 마을은 여성들을 남편에게 의존하는 순종적인 아내로 만든다. 아나의 가족은 여성들끼리 모여 있기에 마을 사람들은 그녀 가족을 저주받은 나쁜 것으로 일컬었다.      


그 여성들을 먹여 살리고자, 남성은 언제나 일하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카메라는 호세가 과수원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만을 삭막하게 반영한다. 과수원에서 일하는 호세는 자신이 수확한 오렌지를 '계량', '측정'한다. 특정한 기준에 딱 들어맞아야 한다. 또 남자들 무리에서 호세가 아나와 사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사랑 또한 타인의 기준에 딱 들어맞아 승인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태되어 저주받는다. 이렇게 타인의 기준에 '전시되는' 중력에 붙잡힌 인류는 영화 속 '비둘기'라는 상징을 공유한다. 조류인 비둘기는 창공을 자유분방하게 날아다닐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붙잡힌 비둘기는 '경주용'으로 역할이 제한되어, 무한한 창공이 아니라 특정한 하늘길만 오간다. 이후 '새장'에 갇히고, 몸에 본래 색채가 아닌 다른 '물감'이 강제로 칠해진다. 인간도 그렇다. 비둘기가 경주라는 목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듯,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남성을 위한, 남성은 노동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들은 어둠, 물 속, 하늘을 이리저리 누비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가 강제된 '도로'만을 운전하라고 강제된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저주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신부가 아닌 저주, 길에서 이탈하는 저주가 실로 나쁜 것인가? 저주를 두려워하여 평범해지고 구속을 자처하는 인간의 상태와 상반되는 대상은 영화 초반 등장하는 '신생아'다. 신생아는 쉴 새 없이 울부짖는다. 다들 울음을 그치게 만들고 싶지만, 도무지 달랠 수가 없다. 아나의 할머니가 물에 소금과 기름을 넣는 미신으로 어느 정도 진정시켜본다. 신생아는 어떤 상태로 향할지 알 수 없는 물과 같고, 그 물을 비교적 평정한 상태로 만들어 놓으면 이에 조응한 아기가 평화를 찾는다. 인간의 몸은 70%가 수분으로 이뤄져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몸에 물이 가득한 인간은 우발적이고 충동적이다. 소금과 기름을 탄 물이 담긴 그릇이 멀어지자 신생아는 다시 울부짖는다. 엄마가 젖을 물려도 소용이 없다. 신생아의 울음은 특정하고 구체적인 하나의 이유나 목적만을 반영하지 않는다.      


물처럼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한 아기의 울음을 듣는 인간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서 이를 통제한다. 그런 인간은 ‘수영장’을 지어서 공간에 물을 통제한다. 본래 이리저리 넘치거나 스스로 변형할 수 있는 물, 그러나 구체적인 공간 속에 갇힌 물은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고, 또 인간이 수영하기 위한 목적만을 강요받는다. 과수원에 연결되는 ‘도랑’ 또한 마찬가지다. 사방팔방 이동하고 튈 수 있는 유연한 물을 흙길을 파서 통제한다. 오직 과수원의 나무들만 적실 수 있도록 특정 방향, 농수용이라는 목적을 강제한다. 그래야 인류는 평안하다. 우기엔 온 마을이 침수될 정도로 비가 와장창 쏟아지니, 그 비에 의한 변화를 원치 않는다. 홍수로 많은 것이 가라앉은 마을을 촬영한 보도 영상에서 아나운서는 그리스도에게 "기존 상태로 되돌려주세요"라고 기도한다. 오랜 세월 단 하나로 변치 않는 일신교가 지탱될 수 있었던 이유는 변화가 두려운 인간 본성에서 비롯한다. 아나 또한 우기가 닥쳐오고 이에 저주가 두려워지자 불현듯 교회에 이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예상할 수 없는 변화라는 저주가 두렵다. 그러나 교회에서 기묘한 여성과 만난다. 그 여성은 밖으로 나와서 아나에게 "모든 것은 너에게 달렸다"라고 조언한다. 강의 저주 중 하나는 '죽음'이다. 직접적인 저주에서 유리된 청년들조차도 죽음의 악취로 가득한 강이 꺼려진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강이 부여하는 변화란 곧 삶에서 죽음으로의 이행으로 여겨지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앞서 어둠/중력·오후를 대비할 때, 오히려 죽음의 절망적인 부동이 느껴지던 곳은 후자였고, 삶의 활력이 느껴졌던 것은 전자였다. 즉 기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절망적인 부동, 곧 죽음과 별반 다르지 않는 삶이요, 오히려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안고 변화하는 것이 삶 그 자체이랴. 리에라는 이를 연출로 보여준다. 본 작품은 마을의 실제 주민들을 인터뷰한 다큐멘터리, 보도 영상 푸티지, 이를 이용한 허구의 픽션을 자유분방하게 오간다, '물'처럼.     


그러나 다양한 매체의 혼용이 비단 물의 속성만을 반영하기 위해서 사용되진 않는다. 오히려 ‘대지에의 붙잡힘’/‘변용하는 액체적 속성’을 연출로써 대비하고 부각하며 가시화한다. 영화 속 직접적인 다큐멘터리는 마을의 저주와 설화를 읊는 주민들의 '인터뷰'요, 간접적으로 다큐멘터리와 흡사한 숏은 마을의 '노동'을 포착한 장면이다. 전자에서는 연기하지 않는다면, 후자는 일부 연기다. 그러나 전문배우가 아닌, 실제 마을의 거주자이자 농부이기도 한 비전문배우들이 자신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배역을 입고 일을 하기 때문에 단순 연기라고 단언할 수 없다. 또 본 작품 <워터>를 위해서 촬영된 숏이 아닌, 마을의 침수를 현실에 보도하기 위해서 촬영된 '뉴스'나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푸티지'가 인서트된다. 이들은 모두 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현실에 종속되어 있다. 무언가를 창조하기보단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밝히고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의 수동성·의존성을 따라서, 리에라도 인터뷰나 보도 영상을 왜곡하지 않는다. 그만큼 변할 수 없기 때문에 단조롭고 굳어있다, 대지처럼. 그곳에서 비전문배우들은 자신의 실제 삶과 밀접한 배역에서 떠나지 못한다. 촬영 또한 매우 건조하고도 객관적으로 대상에게 종속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픽션은 그 현실을 변용한다. 영화 속 무수한 비전문배우들과 달리, 아나의 가족들은 활발히 연기활동을 해온 기성 배우, ‘바바라 레니’와 ‘니에베 데 메디나’가 각각 이자벨과 할머니를 맡고 있다. 그들은 현실의 자신인 레니와 메디나에서 벗어나, 이자벨과 할머니라는 다른 배역을 입으며 물처럼 변화한다. 현실에선 저주를 받아 사라진 신부, 아나 가족을 다소 꺼려하는 분위기다. 그들을 배척하는 분위기에 단단히 매몰되어 있다. 그러나 이 현실을 픽션, 가상은 상상해보고 변화시켜볼 수 있다. 리에라는 우기에 사라진 여성의 발걸음을 픽션으로 상상한다. 그간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되어 현실에 붙잡힌 연출과 달리, 해당 여성은 아주 능동적인 달리 숏에 소환된다. 여성은 사라지면서 저주에 쓰러지지 않았다. 저주를 당해야 한다는 운명에서 물처럼 변화하여 꿋꿋하고 의연하게 떠난다.      


이와 달리 영화 말미 인서트된 홍수 푸티지에서,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진 사물들은 모두 주저앉았다. 거대한 물살이 변화를 촉구하는데, 하나의 목적만을 완고하게 고집하는 사물들은 버틸 수가 없었다. 즉 물의 변화를 긍정하고, 또 자신에게 운명처럼 부여된 저주에 마냥 굴복하지 않고, 가능성을 열어두며 삶을 개척한다면 변화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범람하는 물살에 휩쓸렸음에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존재로 변화한 아나처럼, 심지어 어머니도 할머니도 아니요, 역사에서 이어져 내려온 획일화된 여성들이 아닌, '나 자신'으로 돌아온 것처럼 주체적으로 변화를 긍정하는 존재가 진정 자유롭다. 리에라는 그 자유를 ‘사랑’으로 긍정한다. 일단 오늘날 인간이 속한 사회는 오직 유용한 노동만 천편일률적으로 주문한다. 영화 내내 잘 보이고, 탁 트인 곳에 위치한 행위가 바로 노동이다. 그래서 노동자가 아닌 인류는 잘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 침전된다. 그러나 사랑이 노동하지 않아서 숨은 존재를 밝힌다. 노동자끼리 오가는 대화는 오직 쓸모나 유용함과 관련된, 도랑을 잘 파라는 지시뿐이다. 그러나 아나와 호세는 의미나 이득과 전혀 무관한, 서로의 몸에 있는 문신이나 흉터를 궁금해 한다. 순수하게 서로의 몸에 호기심이 일고, 이에 집중한다. 또 프랑스인과 사랑하는 이자벨은 노동을 하다 말고 전화를 받으며 즐거워한다. 노동할 때 서로는 각자의 프레임에 분리되어 있었다. 상대의 프레임으로 흐르지 않는다. '노동을 위한 프레이밍'에 딱 갇힌 셈이다. 그러나 연애할 때, 서로는 상대의 프레임으로 흘러가 결합한다. 그렇게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될 수 있는 것이 물과 같은 사랑이다. 이자벨은 프랑스인에 의해서 불어를, 프랑스인 연인 또한 이자벨에 의해 스페인어를 구술하듯 말이다. 호세의 아버지는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집을 벽돌과 석고로 가로막는다. 그러나 호세는 아버지가 가두는 장소를 떠나서 아나와의 애정이 싹트기 시작한, 물이 들어차는 습지로 향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감정을 가둔다. 그러나 사랑을 따르는, 아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호세는 제 마음에 솔직하고 자유롭다.      


다만 그 사랑은 상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상대 또한 연인이라는 중력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 아나는 저주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기로 다짐한다. 호세는 아나가 떠나지 않았으면 싶지만 저지할 수 없고, 우기가 끝난 이후 그녀와의 사랑이 시작된 습지를 다시 찾아가 봐도 더는 아나가 없다. 떠나고 사라지는 대상마저 긍정하는 것이 사랑이다. 물과 같은 사랑은 시작에 얽매이지 않는다. 비둘기는 새장을 떠나서 비행하고, 사람은 기존의 자신을 초월하여 물처럼 유동할 때 비로소 자유롭다. 그 물처럼 자유롭기 위한 환경을 리에라는 <워터>에서 요목조목 탐구한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항상 습지에만 머물 수는 없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을 때 가능한 자유, 상대에게로 넘나들며 변용하는 사랑 등을 물과 같은 자유의 요건으로 제시한다. 어둠과 연인 속에 퇴적된 나를 발견하고 새로운 상태로 유랑할 때, 물이 가져다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꺾이지 않고 되레 유연하게 올라탈 수 있는 법이다. 그러한 물을 단순히 포착함을 넘어서, "물과 같은 영화를 어떤 형식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물씬 풍겨나는 영화가 바로 <워터>다. 이로써 최근 이베리아 반도에서 시도한 픽션-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물의 영화'의 흐름(미겔 고미쉬의 <천일야화 3부작>, 호나스 트루에바의 작품들, 카를라 시몬의 <알카라스의 여름>)에 그녀도 올라탄다. 다만 물의 유동성을 부각하기 위해서 이와 대비를 이루는, 지상의 특정하고 구체적인 구속과 폐쇄성이 더 상세히 묘사됐어야 설득력이 커졌을 것이다. 시도는 좋지만, 마냥 긍정하기에 영화가 다소 헐겁다. 마땅히 구체적이었어야 하는 대지의 영역은 물과 같은 느슨함으로 변명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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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506 전주국제영화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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