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3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May 06. 2023

마누엘라 마르텔리, <1976>

실종된 슬픔, 남겨진 기쁨

마누엘라 마르텔리(Manuela Martelli), <1976> - 실종된 슬픔, 남겨진 기쁨  

“순수한 사랑이란, 두려움 없이 스스로 전력을 다해 참여하고자 하는 포괄적인 열려 있음이자 그러한 참여를 위한 준비 상태다.” -헤르만 슈미츠-

1970년 칠레 대선에서 칠레 사회당을 이끄는 정치인이자 운동가 살바도르 아옌데가 당선되었다. 그는 민중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사회주의 정책을 적극 추진했으나, 이내 곧 암초에 부딪힌다. 중남미에 사회주의 물결이 불어 닥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미국이 아옌데의 칠레를 고립시켰고, ‘민주주의의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이 ‘반민주적인 칠레 군부’를 은밀하게 지원하여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1973년 9월 11일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를 끌어내린다. 피노체트는 아옌데를 살해하고 스스로 대통령에 올랐으며, 아옌데의 지지자들이나 반체제 인사들을 악독하게 탄압하였다. 피노체트의 악랄한 탄압에 의해서 집권 당시 칠레 국민 중 약 10%가 해외로 망명하였고, 칠레에 남은 국민들 또한 약 4만 명이 체포되어 모진 고초를 겪었으며, 그 과정에서 사망이나 실종으로 사라진 사람들은 3,225명으로 추산된다. 한편 피노체트의 암울하고 살벌한 독재 가운데서도, 그의 시선이 미치지 못한 외진 구석에서는 인간성이 만개하고 있었다. 마누엘라 마르텔리는 피노체트의 탄압을 피해서 자유와 연대를 보존하던 1976년 칠레의 어느 한 조심스러운 해안가로 카메라를 돌린다. 1983년 산티아고 태생의 마누엘라 마르텔리는 칠레의 배우이자 영화감독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다수의 연극무대, 영화에 출연한 그녀는 2010년대부터 단편을 연출하였으며 본 <1976>으로 장편 데뷔하였다. 그녀의 단편 <무호흡증>(Apnea)에서 장편으로 확장될 색채를 가늠해볼 수 있는데, 일단 그녀는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무호흡증>에선 영어를 구사하는 백인 소녀 클레어가 스페인어를 말하는 유모 마리아와 단 둘이 놓여 있다. 클레어가 기다리는 엄마는 오지 않는다. 마누엘라는 딱 이 정도만의 배경만 제공하고, 그 이상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추상적·불특정하게 처리한다. 마누엘라는 객관적인 정보를 상세하게 전달하기보단, 누구나 겪을 법한 불특정한 상황이 개인에게 어떤 주관성으로 수용되고, 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주목한다.      


그래서 클로즈업으로 인물들의 표정이나 반응이 발생하는 피부, 살갗에 주목한다. 오직 그 상황을 수용하는 사람들에게만 집중하고, 그들 뒤로 펼쳐진 배경은 일부만 제시한다. 이렇게 형성한 불특정한 상황은 ‘지배’에 의한 ‘부재’다. 영어를 쓰고 피부가 흰 클레어로 비추어보건대 그녀의 어머니는 인종에 있어 특권적인 백인 지배계층이다. 반면 스페인어를 쓰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유모 마리아는 피지배계층이다. 지배계층은 욕실을 헝클어트리고 갔다. 지배계층이 널브러뜨려 놓은 것을 피지배계층이 정리하고 씻긴다. 피지배계층은 자신의 집안은 청소할 수 없고, 지배계층을 위해서 봉사만 가능하다. 한편 지배계층의 시선을 피해서 클레어는 마리아에게 엄마가 쓰는 비싼 샴푸를 제공한다. 지배를 피한 비밀스러운 자유가 부드럽고 향긋하다. 그러나 지배자의 입김이 다시 불어온다. 클레어의 엄마는 마리아의 근무를 강제 연장한다. 이에 클레어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한 마리아에게 집착하고, 마리아는 제 가정과 자식에게 되돌아가지 못한다. 즉 지배자는 부모며 자식이고 온 삶이 충만하나, 피지배자들은 부모요 자식이요 항상 결여된 상태다. 지배자를 위해 강제 봉사하는 삶, 그 수혜를 누리는 백인 소녀 클레어만 명확하게 보이는 상황이 <1976>에서 이어진다. 일단 본 작품에선 그녀의 단편에서 풀리지 않았던 해답 하나가 해소된다. 바로 "왜 지배받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말이다. 도입부, 영화의 네모난 프레임이 있고 그 안에 '잡지'라는 작은 프레임이 ‘이중’으로 설정되어 있다. 영화의 주인공 카르멘의 육체는 영화라는 프레임에 놓여있지만, 그녀의 시선은 잡지라는 프레임으로 향한다. 그 잡지는 아름다운 휴양지와 유적지를 소개한다. 카르멘은 잡지를 살피며 별장을 리모델링할 때 사용할 아름다운 '염료'를 모색한다. 카르멘은 아름다움만을 보여주는 잡지의 좁은 프레임에 협소하게 갇혀있다. 정작 그녀의 몸이 속한 1.78:1 프레임에선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러나 카르멘의 눈은 대낮에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납치되는 참혹한 정경으로 향하지 않는다.      


그녀의 시점 숏에 상응하는 카메라가 시각을 포착하지 못함에, 오직 추상적인 청각만이 범죄의 간접적이고 불충분한 증거로 남지만, 그 단말마마저도 찰나 울려 퍼지고 이내 곧 사라진다. 즉 볼 수 있는 것, 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름다운 것' 뿐이다. 자신의 악덕, 추한 것은 관찰하지 말라고 국가가 통제한다. 두려움에 떠는 시민들은 빨리 고개를 돌려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한다. 이후 카르멘은 산티아고를 떠나, 가족의 별장이 위치한 어느 고즈넉한 해안가로 향한다. 운전하는 동안 라디오를 듣는다. 라디오에선 황홀하고 아름다운 관광지로서 칠레를 소개하고, 정치 얘기는 엄격하게 금지된다. 즉 국가가 나서서 그들의 추한 악덕, 처연하고 절망적인 민중의 죽음을 입막음한다. 지배 계층의 검열과 단속에 의해서, 지배가 어떻게 작동하고, 또 어떤 참혹함을 남기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다. 여기서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뉜다. 아름다움을 추구할 것이냐, 힘겹고 처절할 테지만 그럼에도 투쟁을 이어갈 것인가. 전자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하이힐’에 자신의 발이 올라가 있다. 그러나 후자를 추구하면 ‘다 헤진 신발’만 남고 주인은 사라져버린다. 설령 숨이 붙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은 허울만 남긴 채로 숨겨야 한다. 해안 마을에 도착한 카르멘은 신부의 부탁을 받고, 군부에 저항하다가 총상을 입어 숨어있는 청년 엘리아스를 치료한다. 물론 엘리아스라는 이름이 진짜인지 알 길은 없다. 진실이 탄압당하는 세상 속에서 모든 실체는 숨겨진다. 신부는 엘리아스를 똑같은 신부로 위장한다. 카르멘 또한 엘리아스라 불리는 그에게 자신의 본명을 밝히지 않고 ‘클레오파트라’라는 가명을 꺼내 놓는다. 신발만 남은 상황처럼, ‘엘리아스’와 ‘클레오파트라’라는 기표는 기의, 곧 주인과 실체를 잃어버린다. 엘리아스와 카르멘의 행위는 분명 신성하고 정의롭다. 그러나 군부의 시선에서는 아름답지 못하다. 군부의 눈에서 아름다운 것만이 삶으로 연결될 수 있고, 군부의 눈에 추한 것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영화 후반부, 군부는 카르멘과 신부, 엘리아스를 추적한다. 이후 신부는 외국으로 보내졌고, 엘리아스는 끌려가 차마 말 못할 환경에 처하며 그들의 신성한 삶은 불연속된다. 남겨진 카르멘과 여인은 살아야 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서로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약속한다. 입을 다문 아름다운 삶은 그만큼 권력에 아첨하며 부정한 반면, 처절한 죽음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몸을 바치기에 신성하고 정의롭다. 그러나 부정한 아름다움만을 강제하는 군부의 이데올로기가 사람들 간의 관계를 강제한다. 자식들은 먼저 별장에 도착해있던 카르멘에게 "무슨 일 없어?"라고 묻는다. 엘리아스를 치료해주는 카르멘은 자신을 의심하는 줄 알고 순간 당황하나, 자녀들이 궁금해 한 무슨 일은 '좋은 일'이다. 나쁜 일, 진실 등은 서로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발생해서도, 또 말해서도 안 된다. 해변에서 어느 한 여성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카르멘과 그녀의 손자들은 이를 멀리서 목격했다.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되어 그저 정황만 아주 작게 확인했다. 경찰이 이를 수습하고, 이후 한 '미녀'가 '교살'당해서 살해당했다며 흡사 치정극, 스캔들처럼 언론에 보도한다. 경찰은 영화 내내 군부의 끄나풀이다. 그들의 수사 결과를 믿을 수 없다. 군부는 경찰과 언론을 이용하여 여성의 죽음(아마도 반체제 운동가의 죽음)을 대중들이 물고 씹고 즐길만한 이야깃거리로 조작한다. 영화 중반부에 카르멘의 별장에서 미겔과 백인 남성 손님들은 술에 약을 섞어 마셔서 고도의 환각적인 즐거움을 만끽했다. 마누엘라는 백인 남성들이 누리는 즐거움을 환각적인 배경음악으로, 현실을 이탈하는 신묘함을 부각한다. 불쾌감이 남아있으면 사람들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문제에 골똘히 신경을 쏟는다. 그러나 쾌감만이 존재하면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고 막연히 수용한다. 아름다움은 곧 사람들에게 쾌를 불러온다. 근심 걱정을 다 잊고 오직 만족과 즐거움만을 제공한다. 현실은 추하지만 군부가 아름답게 위장하여 자신들의 만행을 망각하게 만드는 시대가 다름 아닌 1976년이다. 마누엘라는 이를 연출로 보여준다.      


일단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클로즈업’이 눈에 확연히 띈다. 클로즈업되는 대상은 앞서 언급한 잡지, 물감, 카르멘의 신발 등 ‘사물’이 주를 이룬다. 사람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다. 오직 국가가 허용한 아름다움을 목적으로 하는 사물만 남는다. 더욱이 구도는 하이앵글이다. 위에서 아래로, 흡사 전능한 누군가가, 아니면 빅브라더에 준하는 감시자가 내려다보는 질식할 것만 같은 구도다. 그 구도에서 클로즈업의 틈은 매우 협소하다. 단편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장소성을 추측할 수 있는 정보가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묘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묘사할 수 없는 시대를 반영한다. 하이앵글 구도는 바깥에서 발생할 납치 사건을 외면하도록 감시하기 때문이다. 군부의 영향력이 지대한 산티아고에서는 클로즈업이 그야말로 숨 막힐 만큼 조여 온다. 폐쇄적이고 빽빽해서 매우 갑갑하다. 그러나 군부의 감시를 피해서 해안 마을로 멀어지자 비로소 배경이 탁 트이기 시작한다. 물론 산티아고에서 마을로 운전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위에서 아래로, 카르멘의 뒤에서 누군가가 감시하는 듯한 음흉하고 저질스러운 구도가 이어진다. 그러나 마을에 도착하여 군부의 시선이 약화되자, 비로소 바깥에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 능동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풀숏 내지는 롱숏으로 영화의 이미지가 보다 해방감을 띠기 시작하고, 음흉하게 감시하는 구도가 아니라 정면에서 당당하게 그녀 얼굴을 포착한다. 물론 여전히 안심할 순 없다. 수도와 비교해서 감시가 ‘비교적’ 약화되었을 뿐, 당대에 감시는 칠레 전역에서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로즈업으로 정면을 포착한다 하여도, 그 얼굴에 카르멘 자신의 진실을 오롯이 반영하지 않는다. 표정은 언제나 무표정, 어떤 감정적 동요나 정치적 견해를 반영하지 않는 얼굴이다. 그런 얼굴만이 정면에서 포착될 수 있다. 카르멘은 총상을 입은 엘리아스의 다리를 소독한다. 청년은 비명을 내지른다. 얼굴은 아마 고통스럽게 일그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아스의 얼굴은 포착되지 않고, 아무리 벽으로 시각을 제한하고 차단해도 이를 뛰어넘는 분방한 청각만 울려 퍼진다. 군부 만행의 증거인 고통스러운 얼굴은 결코 포착되어선 안 된다. 다만 군부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비극적인 사고에 의한 것인지, 그것 자체로는 사유가 불분명한 상처는 클로즈업할 수 있다. 카르멘도 클로즈업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임신 중절에 실패한 여인을 위한 것이다', '개가 다쳤다'라고 핑계를 대며 약을 구해오는 것처럼, 어떤 신원으로도 둔갑할 수 있는 익명적이고도 추상적인 것들만이 크게 포착될 수 있다. 그래서 둔갑하는 외피는 바깥에 드러나고, 솔직한 내면이나 진실은 드러나지 못한다. 영화 내내 카르멘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열린 문', '투명한 창'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야만 한다. 영화에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카르멘, 신부, 엘리아스와의 대화에서 각자의 진실이 드러난다. 신부는 반군부 시위에 참여한 청년들을 숨겨줬다가 그들이 해를 당하자 죄책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엘리아스와 카르멘은 총상을 입게 된 이유, 이름 등의 진실을 밝힐 수 없을지언정 서로 어떤 사람인지 대화로 알아간다. 존재는 빛에 의해서 드러나고, 빛 또한 자신을 반영해줄 매개체가 있어야만 산란하며 보이게 된다. 서로도 마찬가지다. 혼자 있을 때는 굳이 자신이 누구인지, 제 진실에 대해서 밝힐 필요가 없다. 그러나 상대가 빛처럼 바라보고 질문하면서 나의 진실도 밝혀지는 법이다. 그것이 영화에서는 '대화'다. 대화를 통해 서로 새로운 것을 알아가며 국면이 변화하는 것을, 대화 전후의 연출 변화로 가시화한다. 엘리아스는 정면을 오롯이 드러낼 수 없었다. 겨우 정면이 보이더라도 그는 눈을 뜨지 못하거나, 금세 카메라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하지만 서서히 일상적으로 서로의 정면을 쳐다보는, 아주 일반적인 리버스 숏을 회복하며, 엘리아스의 얼굴을 보존한다.  


카메라뿐만 아니라 카르멘 또한 엘리아스의 연결책이 되어 그가 민주주의 공동체에 되돌아갈 수 있도록 주선하고, 청년의 온 존재를 밝힌다. 카르멘이 엘리아스를 치료하고 연결책이 되어주는 특별한 이유나 명분은 없다. '그냥', '맹목적'으로 카르멘은 해준다. 서로를 밝히고 진실을 보존하는 일은 특정한 이유가 있지 않다. 그냥 맹목적으로 밝히고 존중하며 보존하는 일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행위다. 그러나 영화 속 세계는 특정한 것만 밝히고 보존하도록 선별한다. 카르멘이 어둠 속에서 엘리아스를 씻기는 장면은 아주 부드럽고 섬세했다면, 카르멘이 교회에서 집으로 귀가하는 도중 검문을 당하고, 이후 돌아온 어두운 집에 그녀의 진실을 밝히려는 듯한 빛은 아주 날카롭고 공격적이다. 또 카르멘은 손자들과 나무가 무성하게 솟아오른 해변의 어느 숲으로 여가를 즐기러 떠난다. 태양이 따가우리만큼 찬연한 오후, 그런데 미심쩍은 한 남자가 카르멘의 곁을 지나가고, 이후 아이들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밝히고 싶은 아이들은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반면, 숨기고 싶은 진실은 어떻게든 들추고 밝혀내어 소멸시키는 시대가 1976년이다. 그래서 별장에 처음 왔을 때, 셔터를 내리며 삼엄한 감시를 차단하던 산티아고에서와 달리 창을 열고 외부 공기를 흠뻑 만끽하였으나, 이내 곧 다시 감시를 의식하며 창을 닫고 어두운 커튼을 드리운다. 마을에서 전화는 오직 호텔의 공중전화만 이용할 수 있다. 카르멘은 외부 시선에서 자유롭다고 느꼈을 땐, 남편 미겔에게 의약품을 부탁한다. 그러나 카운터에 앉아있는 직원이 도청하고 통화 내용을 받아 적는 것을 감지하자 이내 곧 자체 검열한다. 카르멘이 엘리아스의 여성 동지와 접선하였을 때, 순간 누군가가 감시하는 줄 알고 그녀들의 발걸음은 빨라졌고, 연출은 아주 위협적이고 불길한 핸드 헬드로 뒤바뀐 것처럼, 진실이 탄로 내면 안정적이던 기존의 삶은 세차게 흔들리고 쓰러질 것이다. 그래서 대화는 언제나 짧아야 한다.   


영화 후반부, 누군가가 뒤따라오는 인기척을 감지한 카르멘은 잠깐 차를 세워 식당에 들어간다. 이후 어느 한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직업을 밝히는데, 그 남자는 잠수부다. 잠수부는 해변에서 죽은 여성의 진실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 잠수부로서 직업적 전문성을 따를 수 없다. 몰라야 하고 대화는 끝나야 한다. 영화에선 카르멘이 도청을 당하거나, 또 신부 및 엘리아스와의 공모가 탄로 났을 때, '거울'을 이용해서 카르멘을 간접적으로 담아낸다. '거울'이라는 타인의 시선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 시선 안에 카르멘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카르멘은 더더욱 숨는다.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기 위해서, 시선에 노출되지 않고자 '고립'을 자처한다. 그러나 도입부에서 납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영화는 ‘줌아웃’으로 카르멘의 기존 삶에서 멀어져 바깥을 연결하였다. 카르멘의 기존 세계에서는 줌아웃으로 멀어지는 반면, 그만큼 줌인으로 가까워지는 것은 신부의 고백, 엘리아스 동지들과의 만남이다. 외부로 확장되는 그녀는 '백인 부르주아', 가부장제 내 순종적인 '아내'로부터, '원주민 프롤레타리아', '주체적인 여성'으로 시선을 넓힌다. 그렇게 시선을 확장해야 하는 이유는 전자가 피노체트 체제를 유지하는 원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후자와의 연대가 피노체트 독재를 무너뜨릴 균열을 더 크게 키운다. 본 작품에서는 '빨강'이 상징으로 등장한다. 부르주아 백인의 빨간색은 탐미적이다. 그들의 즐거움을 위한 '금붕어', 리모델링용 '페인트 색깔', 생일파티를 기념하기 위한 '빵 반죽', 카르멘의 '드레스'로서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수놓는다. 이를 누리는 백인 부르주아지들은 피노체트 체제에 찬성한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나 반군부주의자들을 다른 사과를 부패시키는 '썩은 사과', '기생충' 취급하고, 게으른 칠레인들은 강한 힘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상에서 백인은 고된 노동에서 유리되어 있다. 항상 영화나 TV를 들여다보고 티타임과 여가를 즐긴다. 반면 원주민들은 인부나 가정부로서 백인을 위해 무한 봉사한다. 그들의 ‘피’, 곧 빨강이 부르주아의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백인 부르주아들은 프롤레타리아를 게으른 국민이라며 폄하한다. 프롤레타리아를 게으르게 놔두면 안 된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착취한다. 이로써 프롤레타리아는 성실해지는 반면,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게으른 부르주아의 집이 ‘건축’되어 간다. 이 모순적인 부르주아의 지배를 허용한 자가 프롤레타리아에게 부를 재분배할 것을 주장한 아옌데를 끌어내린 피노체트다. 즉 마누엘라는 피노체트 독재와 백인 부르주아 기득권이 깊게 결탁되어 있음을, 백인의 일상을 비추며 밝혀낸다. 이와 더불어 백인의 세계는 매우 가부장적이다. 극중 카르멘은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끝내 의사가 되진 못했고, 반면 남편 미겔은 현재 번듯한 병원 원장이다. 미겔은 카르멜의 옷이나 행적을 단속한다. 카르멘이 식당에 들어갔을 때, 손님들은 온통 남성이요 그들은 여성이 밖에서 홀로 돌아다니는 것, 심지어 식당에서 여자 혼자 음식을 사먹는 것이 신기한 눈치다. 이후 움베르토라는 군부의 끄나풀은 카르멘이 잃어버린 신분증을 가져다주며, 행동을 주의하라고 경고한다. 그 신분증은 카르멘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군부의 첩자들이 그녀의 차를 뒤져서 빼앗아간 것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강제로 수동적이고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놓고, 이를 핑계 삼아 남성의 폭력적인 힘과 지배를 합리화한다. 카르멘이 의학을 공부했음에도 의사가 되지 못한 것, 신분증을 빼앗았음에도 구제해준 척 훈계하는 것, 해변에서 발견된 여성 변사체 모두 다 세상을 흉흉하게 만들어 국민을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전락시키고, 이로써 힘을 필요로 하는 군부를 합리화하는 수작이다. 

즉 백인 권력과 더불어, 가부장제 또한 피노체트 체제와 깊이 결탁하나, 마누엘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백인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항상 좋은 것만 보여준다. 카르멘의 어머니가 과거 휴가에서 사망한 이야기도 쉬쉬하거니와, 해변에서 시체가 발견된 사건도 잊으라고 종용한다. 백인이 허용하는 것은 리모델링을 마친 아름다운 저택과 탄생만을 축하하는 생일파티다. 그러나 아이들은 추한 죽음의 진실이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 한다. 비판을 마비시키는 아름다움에 도취되지 않으며 성장해야 한다. 카르멘 또한 마찬가지다. 이제 마을에서도 하이앵글로 숨 막히는 클로즈업으로 조여 오며, 그녀가 위치한 공간을 빽빽하게 검열한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카르멘은 일상으로 천연덕스럽게 되돌아가고자 연기하지만, 영화 결말의 핸드 헬드는 그럴 수 없다는 의지를 천명한다. 웃어야만 멀쩡하게 보일 수 있지만, 엘리아스의 비극적인 최후를 맞닥뜨린 진실한 눈물과 찡그림이 숨겨지지 않는다. 멀쩡하고 아름다울 것을, 정치적 견해로부터 순수할 것을 요구받던 얼굴은 흔들리며 불순해진다. 인간은 바로 그래야만 한다. 마누엘라가 정치적으로 불순해질 때 고립된 진실이 발굴되고, 고착화된 인종·젠더 문제가 해소될 기미가 보인다. 정리하며, 마누엘라는 백인 부르주아지 권력과 가부장제가 파시즘, 전체주의의 기원임을 분석하고, 결국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위해선 인종간의 대화와 여성의 주체성이 복구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를 빼어난 영상 언어로 풀어내며 걸출하게 데뷔하는 마누엘라, 그럼에도 아쉬운 점을 꼽자면 감각적 연출이 실로 감각적이어야 할 검열 시퀀스에서 평범해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탐구와 연출에 있어 뛰어난 가능성을 증명한 작품임은 확실하다.

----

감상일: 230506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엘레나 로페스 리에라, <워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