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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15. 2023

다르덴 형제, <토리와 로키타>

두 노장의 사활을 건 서늘한 경고

다르덴 형제(Jean Pierre Dardenne & Luc Dardenne), 

<토리와 로키타>(Tori and Lokita) - 두 노장의 사활을 건 서늘한 경고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097

“함께 피를 흘리지 않고, 함께 살며 사랑하지 않고, 희생과 투쟁을 하지 않으면 어떤 관계나 우정이나 감정도 우리 곁에 충실히 남아 있지 않게 된다.” -헤르만 헤세-

서구 백인은 아프리카의 다양한 민족·문화·종교를 고려하지 않은 채로, 단지 용이한 식민 통치를 위해서 아프리카 대륙의 국경선을 마구잡이로 그었다. 백인들이 그은 야만적인 국경선은 아프리카에 발생한 무수한 내전의 씨앗이었다. 아프리카 내전의 유형은 권력 찬탈 및 민주화 운동이기도 하지만, 각 민족들이 고유한 국경선을 되찾으려는 씁쓸한 투쟁도 포함한다. 형식적으론 하얀 것들에게서 독립했지만, 진정한 독립을 위한 투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이 투쟁은 아프리카 내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식민주의는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서구 거대 자본에 의해 아프리카는 거대한 공장으로 전락하여 착취당하고, 아프리카인들은 자국에 머물면서 백색의 일부로 스며들거나, 떠나서 백색과 동화되는 운명이 기다린다. 즉 국경선과 개인의 윤곽선이 백인에 의해 그어지고, 이를 지우려는 투쟁이 이어진다. 그리고 다르덴 형제는 백인에 의한 삶을 저항한다. 카메룬 태생의 로키타, 베냉 태생의 토리는 벨기에로 터를 옮긴 어린 난민이다. 백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카메룬과 베냉의 국경선, 그러나 두 청소년들은 그 선을 뛰어넘어 자기들만의 우정을 재건하나, 다시금 백인은 두 청소년 사이를 자신들이 그은 경계선으로 갈라놓으려 한다. 1951년 엔지스 태생의 장 피에르 다르덴과 1954년 플레말 아위어스 출생의 뤽 다르덴은 형제가 팀을 이뤄 공동 연출하는 벨기에의 영화감독들이다. 초기에 그들은 다큐멘터리를 작업했다. 그들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롱테이크와 핸드 헬드를 결합한 양식은 오늘날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무수한 감독들의 원형이라 해도 과장이 아닌데, 이러한 연출이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비롯하였다. 이들의 신작처럼 다큐멘터리나 전작에서도 이민자, 아이의 삶을 줄곧 탐구해왔는데, 먼저 다르덴 형제의 ‘이민자’에 대한 관점부터 살펴보자. 그들의 초기작인 <약속>부터 이민자가 등장한다. 벨기에로 다양한 국가의 이민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몰려든다. 다르덴 형제는 닭장과도 같은 공간에서 이민자들이 ‘가축’처럼 관리되고, 백인에 의해 무한 착취되고 죽음까지도 부정당하는 현실을 밝힌다.      


이후 <로나의 침묵>에서 이민자가 재등장한다. <약속>에서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인간을 체류증, 여권, 허가증이 대체하였듯, <로나의 침묵>에서도 ‘서류’나 국적이 살아 숨 쉬는 인간보다 우선한다. 알바니아계 이민자인 로나는 벨기에인 클로디와 결혼해서 시민권을 얻고 이를 러시아인에게 내어주는 '도구'로서 관리된다. 삶은 돈을 위한 장치, 하지만 다르덴 형제는 인간임을 회복하는 이민자의 여정을 담는다. 약물 중독으로 위기에 처한 클로디를 응급 처치하거나, 죽은 그의 아이를 상상임신하고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해야 하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자본이 규정한 목적 바깥으로 이탈하며 연대하고 자유로운 인간을 회복한다. 다르덴 형제는 배금주의, 물신화로 인해 소외되고 박탈된 감정, 양심, 죄책감, 삶을 복권한다. <로나의 침묵>에서 로나가 인간성을 회복하는 공간은 '병원'이다. 클로이를 응급처치하고, 임신 중절을 거부하며 삶을 싹틔우는 공간으로서 병원과 이민자의 결합은 <언노운 걸>에서 재활용된다. 영화의 주인공 제니는 의사다. 그녀는 진료 시간이 다 끝난 이후 다급하게 찾아온 환자를 거절했고, 다음날 그 흑인 소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다르덴 형제는 <약속>에서 사인조차 밝혀지지 않는 이민자처럼, <언노운 걸>에서도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고 착취당하다 사망하는 이민자의 현실을 알리며 마땅한 존엄을 표한다. <언노운 걸>에서 병원은 이민자를 비정하게 내모는 서구 사회를 비유한다. 다르덴 형제는 병원과 정치, 국가가 약자를 보듬는 본성을 회복하고, 이를 계승해야 함을 총 3세대의 의사가 등장하는 구조로 보여준다. 또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는 알퐁소라는 이민자가 등장한다. 공장에서 비정규직 알퐁소는 주인공 산드라가 복직하면 가장 먼저 희생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오랫동안 공장에 근무한 백인과 달리, 장기간 근무한 유색인종, 이민자는 전무하다. 항상 백인을 위해 실수를 핑계 삼아 버림당했으랴. 하지만 알퐁소는 자신에게 해가 될 수도 있는 산드라의 복직을 지지하고, 산드라도 제 이익 때문에 알퐁소를 희생하지 않는다.    

  

인간성과 자본이 역전되어 있던 세계, 백인을 위해 유색인종, 내국인을 위해 이민자를 얼마든지 희생하던 구도를 다르덴 형제는 뒤집는다. 이방인을 다룬 마지막 작품으로 <소년 아메드>가 있다. 다르덴 형제는 동시대에 범람하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연구한다. 벨기에에서 무슬림들은 중심부에서 배제되어 열악하고 불안정한 주변부로 내몰린다. 사회에 참여할 수 없는 소외된 이들, 열등감과 무력감을 느끼는 무슬림들을 이슬람 원리주의는 환대하며 자신감을 불어넣어준다. 개인의 무시당한 주체성은 무슬림이란 정체성으로 대신 채워진다. 민족적·종교적 정체성이 자아를 대체하고 타자를 박해하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개인 소외’, 다르덴 형제는 낯설고 다른 것들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고 환대와 연대를 되살려야 함을 루이즈와 아메드의 우정으로 촉구한다. 다음으로 볼 다르덴 형제의 특징은 ‘아이 영화’다. <약속>부터 <로제타>, <아들>, <더 차일드>까지 모두 미성년자들이 등장한다. 이민자를 착취하던 어른들은 약한 아이들까지 착취한다. <약속>에서 아버지로 불리는 로저는 아이에게 이민자를 착취하는 법, 양심을 외면하는 법을 가르친다. 사실상 아이도 교육을 명목으로 착취당한다. <로제타>나 <더 차일드>에서 가진 게 없는 기성의 어른들은 자신의 결핍을 아이들을 희생시켜 보완한다. <로제타>에서 청년들은 얼마 남지 않은 일자리를 두고 다투거나, 병들어 남겨진 어머니를 보필한다. <더 차일드>에서 어른들이 남겨놓은 쓰레기 더미에서 건질만한 것은 없고, 부모들의 이익을 위한 선택이 아이의 행선지를 결정한다. <로제타>와 <더 차일드> 양자 모두 홀로 남겨진 청년들에게선 간간히 순박하고 선한 모습이 눈에 띄나, 자본이 인간을 대체하는 사회에 몸담은 이상 이들의 결정은 항상 인간에게 악하며,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기성을 모방함에 대단히 무책임해진다. 인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딜레마’를 다르덴 형제는 항상 부각한다.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은 부모에게서 버려졌다. 외로운 시릴은 더 이상 어른을 믿지 않고, 대신 청소년 서클에 무력을 인정받아 입단하며 소속감을 느낀다.      


시릴은 사회란 ‘특정 조건’, ‘자격’이 갖춰야지만 참여 및 소속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배운다. 자유롭게 타고 달릴 수 있는 자전거조차도 누군가가 자꾸 무력으로 빼앗으려한다. 아이는 약육강식을 체화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다시 자신을 키울 수 있는 조건을 갖춰주고자, 또 강해야만 참여할 수 있는 사회에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자 소동을 일으킨다. 그렇게 아이들은 상상 실수를 범하지만 이와 동시에 유연하고 열려있기에, 다르덴 형제는 항상 그들에게 재차 ‘기회’를 주고, 거울과도 같은 그들, 때때로 순박한 그들을 바라보며 기성 세계를 반성한다. <약속>에서 이고르는 로저의 발을 묶어 피해자와의 약속, 자신의 양심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간다. <로제타>나 <더 차일드>에서 청춘은 양심과 인간성을 외면하지 않고 책임에서 도망가지 않는다. 책임지지 않은 어른들에 의해 방치되었던 아이들이 또 다시 자신의 아이를 유기하는 악순환을 끊는다. <아들>의 올리비에는 제 아들을 죽인 프랜시스를 우연히 견습생으로 들인다. 프랜시스에게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샘솟지만 가구를 만들고 제작하는 목공일을 극의 결말까지 가르친다. 죽이고 사라지게 만드는 대신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어른이 아이에게 복수한다면 연쇄적으로 끝없이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자전거 탄 소년>도 마찬가지다. 사만다는 시릴에 대한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단지 인간성과 양심이 가리키는 대로 소년을 입양한다. 복수의 꼬리를 물던 아이는 사만다 아래서 타인을 용서하고 자유롭게 전진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한다. <소년 아메드>에선 음악가 슈베르트가 삶에 대한 회오와 한탄을 표현한 <Piano Sonata No. 21 in B flat, D.960: 2. Andante sostenuto>를 삽입하며, 아이들이 반성할 수 있는 존재임을 환기한다. 즉 다르덴 형제는 서구 사회의 야만적인 이데올로기를 몸으로 증언하는 이민자와 아이들의 삶을 비추며, 서구의 무책임함과 미성숙함을 폭로하고, 궤도를 이탈하는 반성을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반성, 이상으로의 나아감은 2010년대에 특히 더 도드라지며, 그들의 근작에 등장하는 '우상'들인 <자전거 탄 소년>의 세실 드 프랑스, <내일을 위한 시간>의 마리옹 꼬티아르, <언노운 걸>의 아델 하에넬에 의해서 도달한다. 기존 다르덴 형제 사단에 비한다면 불어권 국가를 넘어 전 세계에 이름과 얼굴이 널리 알려진 스타들, 현실로부터 유리된 듯한 착란을 일으키는 아름답고 이상적인 그들의 역할이 현실에서 재생산되는 악덕을 정화하고 뛰어넘는 것임을 촉구하며, 그들 아래서 아이들과 이민자는 본래의 선함을 회복한다. 이러한 작품 세계를 일생 내내 펼쳐온 다르덴 형제가 신작으로 돌아온다. 스타들은 없고, 다시 초기 스타일로 돌아가 비전문배우들이 등장하며, 이로써 현실에 밀착한다. 과연 2020년대 난민은 어떤 상황에 빠져있을까? 다르덴 형제의 신작에서도 서구 사회는 아프리카에서 벨기에로 터를 옮긴 두 난민, 토리와 로키타에게 '서류'를 요구한다. 도입부, 고정된 카메라로 이민국 공무원과 면담하는 로키타의 얼굴을 담는다. 우리는 로키타라는 소녀를 보게 되고, 이로써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로키타를 알면서도 모른다. '카메룬' 출신의 로키타는 '베냉' 태생이라며 허위로 말을 꾸민다. 로키타가 유럽행 배에서 만난 토리는 보육원에서 재회한, 어렸을 때 헤어진 동생으로 둔갑되고, 멀쩡하게 살아있는 로키타의 어머니는 토리를 낳자마자 사망한 것으로 왜곡된다. 로키타는 분명 카메룬에서의 삶을 기억하고,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어머니와 다섯 남매에게 돈을 보낸다. 그러나 서류를 위해서 카메룬에서의 진짜 삶은 ‘기억나거나 존재하지 않음’, 공무원이나 감상자에게 ‘보고 들리지’ 않아야만 한다. 다르덴 형제는 아이들의 밀항 과정을 보여주지도 않고, 아프리카를 직접 비추지도 않는다. 백인들과 감상자의 난민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비춘다. 우리가 아는 것은 ‘백인이 요구하는 서류’에 의한 그들, ‘인터뷰 메뉴얼’에 따른 그들이다. 진실한 토리와 로키타 대신, 서류 발급의 자격을 갖춘 가짜 난민의 서사가 진실의 자리를 꿰찬다.   

   

이후 경찰에게 검문을 당하거나, 토리가 보육원 직원에게 둘러대는 말 모두 진실과 무관하다. 돈을 벌기 위해서 척박한 나라를 등진 난민의 차가운 진실이 아니라, 동정심을 살만한 난민의 가짜 얼굴과 거짓 서사만을,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합법적인 서류를 갖춘 그들만을 안다. 그럼으로써 난민을 구원해주는 내지인이 우월감을 느끼기 위함일까? 그들을 보듬어줌으로써 국가는 유리하게 선전을 하기 위함일까? 내지인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한, 보고 듣기 좋은 꾸며진 난민만을 우리는 안다. ‘흑인’인 토리와 로키타는 '백인'에 의해서, 나이는 ‘아이’인 남매는 브로커나 부모 등 '어른'에 의해서 허위로 꾸며진다. 백인·어른이 만들어낸 토리와 로키타를 다르덴 형제는 '롱테이크'로 길게 포착한다. 롱테이크는 컷이 잦은 숏과 달리, ‘잘림이 없는 실제의 시간’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기에, '리얼리즘'에 충실한 연출의 전형이다. 현실을 담아낸 것이라 믿는 연출에 ‘허위로 만들어진 남매’를 담는다. 혈연관계를 증명하는 서류 증빙, 브로커에게 진 빚을 갚기, 듣기 좋은 노래를 불러주기, 신분증을 내놓기, 대마 거래 및 재배, 성 착취를 고분고분 이행하는 난민만이 ‘현실’에 머물 수 있다. (또 다르덴 형제는 현실적인 연출로 난민의 진실이 거짓으로 둔갑하는 '과정'을 폭로한다, 그 과정이 현실이자 진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토리와 로키타가 마약 밀매를 하는 당시, 첫 고객의 ‘불상 점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비서구 문화에 관심이 있지만, 그가 선호하는 비서구란 자신에게 마약을 전해주는, 그저 감각에 좋은 ‘도구’에 그친다. 백인의 감각을 위해서 비서구는 만들어진다. 여전히 오리엔탈리즘과 식민주의가 이어진다. 이러한 백인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는 토리와 로키타는 그들의 시선 아래서 클로즈업으로 붙잡힌다. 이에 백인과 어른들이 원하는 난민 아이의 모습만 가까이서 볼 수 있고, 그간 봐왔다. 백인 자본에 따라서 토리와 로키타는 ‘보임’이 결정된다.      


화사한 햇살이 모든 것을 밝히는 '오후'에, 밤이라 할지라도 환한 조명으로 가득한 베팀의 '조리실'이나 경찰의 '경광등'에 의해서, 또 대마초 재배를 위한 쨍한 '조명 아래서'의 토리와 로키타는 백인이 요구하는 상태로 보인다. 그들을 비추고 감시하는 날카로운 시선이 요구하는 대로, 만약 그 시선을 따르지 않는다면 루카스는 로키타의 '따귀'를 때리고, 아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베팀은 로키타를 '폭행'한다. 즉 돈을 벌고 생존하기 위해서 이들은 백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보여야만 하고, 백인이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일 시 이들의 생사는 불투명해진다. 하지만 착취당하면서 보이고 생존하게 되더라도, 로키타는 '공황 발작'을 일으킨다. 공무원이 토리와의 생물학적인 관계를 입증하라 요구할 때, 어머니가 돈을 송금하라며 몰아세울 때, 토리를 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소녀의 호흡은 가팔라진다. 외부에서 진실로 둔갑시키는 ‘거짓 로키타’가 그녀의 '목숨'을 위협한다는 듯이. 그래서 살기 위해 백인·어른들이 특정한 모습으로 가두는 카메라에서 멀어지고 프레임 바깥으로 달아난다. 이들이 달아나기 위해 헐레벌떡 질주할 때, 영화의 카메라도 핸드 헬드로 함께 흔들린다. 그간 백인·어른들은 로키타의 감정을 부정한다. 토리는 영화 내내 카시트, 로키타의 침대 밑, 풀숲에서 '숨길 수 없는 숨결'을 숨겨야만 했다. 난민 스스로의 자유를 지속하기 위해서 그들은 보여선 안 된다. 비로소 백인과 어른들의 시선에서 달아날 때, 은닉된 숨결과 감격스러운 헐떡거림이 되돌아오고, 이를 시각으로 가시화한 핸드 헬드를 동원한다. 한편 롱테이크에 담긴 남매의 모습이 전부 허위는 아니다. 백인·어른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남매’가 달아나지 못하게 롱테이크로 붙잡기에 ‘컷’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와 동시에 토리와 로키타도 컷하고 싶지 않은 것, 영속적으로 유지하고 싶은 것을 롱테이크한다. 토리를 걱정하는 로키타의 마음, 노래를 부를 때 서로 애틋한 눈빛을 교환하는 남매 등, 서로가 곁에서 '길게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만은 거짓 속에서도 진심이다.      


로키타와 토리가 보호소에서 분방하게 놀 때도 행위가 완결될 때까지 기다리며, 섣부르게 남매를 잘라내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의 롱테이크는 이중적이다. 백인이 길게 붙잡는 것, 남매 스스로 길게 유지하고 싶은 것이 병존한다. 반면 컷은 연속하고 싶은 마음을 ‘자르고’ 단절한다. 보육원에서 토리를 호출한다. 백인이 부르는 공간으로 진입할 때마다 컷이 발생한다. 누나와 자유롭게 머물던 ‘토리 자신’이 아니라 ‘백인의 호출에 의한 토리’가 된다. 홀에서 노래를 부르고, 이후 베팀에게 가는 장면에서도 컷한다. 손님들에 의한 '가수 남매'는 잘리고, 베팀에 의한 '마약밀매상'이 새롭게 덧붙여진다. 대마초 재배지로 옮겨진 로키타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싶다"라고 말해선 안 되는 공간, 인간의 '식수'보다 대마초 재배를 위한 '농업용수'가 우선인 공간에서,(그녀는 깨끗한 물 대신 주로 ‘주스’를 마셔야 하며, 투명한 물은 오직 대마초에 물을 줄 때 잠시 입을 적실 수 있을 뿐이다) 로키타가 각 방으로 진입할 때마다 컷이 발생한다. 사실 공간 자체가 하나의 숏에 담아내도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만큼 협소하기에 굳이 컷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규칙이 제 각각인 내/외부, 침실, 재배지를 옮기며 컷이 발생한다. 서로가 연속되지 않는다는 듯이. 또 규칙 중 하나는 일을 다 마칠 때까지 밖으로 나올 수 없고, 토리와도 만날 수 없다. 이전 공간에서의 기존 삶과 단절된다는 듯 날카로운 컷이 발생하고, 새로운 공간의 규칙만을 충실히 따르는 로키타를 담는다. 컷이 발생함으로써 로키타가 길게 유지하고 싶은 삶은 잘려나가고 단절된다. 또 로키타는 돈을 주겠다는 베팀의 제안으로 두 차례 성 착취를 당한다. 베팀의 추잡한 제안은 당연히 로키타가 원치 않지만 가족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서 억지로 해야만 한다. 다르덴 형제는 로키타가 성 착취를 당하는 암시만 남기고 재빨리 컷하여, 과정을 적나라하게 비추지 않는다. 윤리적인 배려일 수도 있겠지만, 이와 동시에 베팀의 권력형 성범죄, 가족을 위해서 주체적인 로키타 자신이 '잘리고 단절'됨을 암시한다. 

     

컷은 영화 속 핸드폰이나 유심칩을 빼앗기는 상황과 연관한다. 핸드폰은 토리와 로키타를 연결하고, 벨기에의 로키타가 카메룬의 가족과 끈을 잇는, 즉 난민들의 진실을 매개하고 이어내는 수단이다. 그런데 휴대폰이나 유심칩을 빼앗김으로써 진실을 이어낼 수 있는 상대와 ‘컷’된다. 서로를 남매로서 소중하게 연결하는 로키타와 토리, 그러나 각자 출신도, 피도 다르다. 벨기에에서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모의로 남매가 되었다. 하지만 토리와 로키타가 서로를 헤아리는 마음만큼은 진실이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는가? 그 이유는 상대에게 자신이, 자신에게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총 3부로 나눌 수 있는 구성인데, 1부가 로키타의 시선이라면 2부는 토리의 시선이며, 3부에서 이들의 시선이 합쳐진다. 물론 1부나 2부에서 각자의 시선이 주를 이루면서도, 상대의 시선 또한 섞여들었다. 그러나 서로의 시선이 엮인 당시에도 토리가 모르는 로키타의 비밀(성 착취)이 있었고, 로키타가 밀실로 떠난 이후에 남매의 편집은 다만 교차될 뿐 연속되지 못한다. 그러나 로키타는 밀실에서도 토리와 연락하고 싶어 하고, 토리는 베팀의 차에 몰래 올라 타 로키타가 갇힌 밀실로 향하며 3부를 이룬다. 이로써 교차되고 단절되었던 서로는 연속되고, 심지어 토리는 로키타가 베팀에게 성 착취당하는 사실을 접하는데, 그럼에도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그저 포용한다. 토리는 공황 발작을 앓는 로키타에게 약을 챙겨주며 성심성의껏 살핀다. ‘특정 모습의 로키타’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로키타’를 '그림'으로 보존한다. 대마초 재배지에 갇힌 로키타를 대신해서 카메룬에 돈을 송금한다. 베팀에 의해 로키타의 발목이 꺾여서 함께 도망치기 어려워져도 상대의 목숨이 나와 같은 듯 ‘썰매’를 타며 연대한다. 로키타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을 희생해서 토리가 브로커에게 빚을 갚지 않도록 하고,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게 해준다. 또 토리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혼자 히치하이킹하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다. 서로를 그저 맹목적으로 소중히 품는 사랑이 남매의 삶을 보존하며, 이로써 순수한 롱테이크, 생동감 넘치는 핸드 헬드도 유지된다.     


하지만 남매는 분단되며 진실 또한 항구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 그들을 갈라놓는 건 바로 '돈'이다. 다르덴 형제는 <토리와 로키타>를 통해서, 경건한 시네아스트로 불리며 일평생 자본주의를 비판해온 로베르 브레송에게 경의를 표하는 듯하다. 로키타가 끝없이 착취당하는 작품의 내용이 브레송의 <무쉐뜨>나 <당나귀 발타자르>를 연상케 하고,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디렉팅에서 브레송의 색채가 느껴진다. 본 작품은 다르덴의 이전 작품들에 비한다면 디렉팅이 매우 딱딱하다. 백인에게 서류를 발급받고 돈을 벌기 위해서, 로키타와 토리의 입은 백인 자본이 원하는 ‘대사’를 무미건조하게 읊을 뿐이다. 그들이 지시한 행동을 기계처럼 뻣뻣하게 몸에 옮긴다. 인간이 자본주의의 기계로 전락한 야만적인 현실을, 삭막하고 무감한 디렉팅으로 표현한 감독이 바로 브레송이었는데, 다르덴 형제는 위대한 시네아스트의 디렉팅을 오늘날에 빌려오며 2020년대에도 여전히 인간을 쥐어짜는 자본주의의 야만을 경고한다. 또 브레송의 <소매치기>나 <돈>에서 얼굴이 아닌 ‘손과 손’, ‘손에 쥔 돈이나 사물’로 연결되는 '편집'도 자본주의를 반영한 그의 기념비적 연출 중 하나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발걸음을 결정하는 '역전된 운동'을 가시화하는데, 본 작품에서도 마약과 돈을 주고받는 손들에 의해서 이동과 공간이 결정된다. 즉 다르덴 형제는 브레송의 유산을 빌려오며 난민들의 얼굴, 손, 다리 등 모든 것을 ‘자본’이 규정하는 오늘날을 비춘다. 카메룬의 어머니는 돈이 덜 입금되자 로키타의 횡령을 의심한다. 빚을 갚지 못한 로키타는 목숨을 위협 당한다. 즉 돈의 정량이 딱 맞아야지만 로키타는 존재할 수 있다. 돈이 토리와 로키타가 부르는 노래 또한 결정한다. 영화에서 남매는 총 세 가지 노래를 부른다. 두 곡은 손님들이 모인 식당에서, 다른 한 곡은 남매만 있는 사적 공간에서 부른다. 전자는 백인 손님들이 듣기 원하는 노래로, 남매는 시칠리아에서 벨기에로 넘어올 당시 ‘파올라’라는 주민이 가르쳐준 노래를 부른다. 백인들은 난민의 감동적인 수난사를 원했다는 듯이, 또 그들을 구원해준 백인 이야기에 감격했다는 듯 남매의 노래에 만족한다.     


시칠리아에서 배운 노래는 로키타를 ‘호출’하는 전화벨이기도 한다. 영화 속 호출은 남매에게 교회 방문 및 빚 갚기, 대마초 재배, 서류 요구 등 특정한 모습을 주문하고, 이들은 그렇게 보여야만 한다. 이렇게 자본이 남매의 입과 그들의 호명을 좌우한다. 하지만 다르덴 형제는 오늘날까지 반복되는 브레송의 형식을 조금이나마 파기해본다. 남매는 백인·어른 앞에서는 조금의 감정도 노출할 수 없다. 하지만 남매끼리 있을 때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역동적인 디렉팅을 허용한다. 서로를 통해 망각된 감정을 회복하며 비로소 인간다워진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 또한 마찬가지다. 백인 손님에게 들려주기 위한 노래는 영화에서 '번역'이 된다. 그러나 남매만 아는 고향 노래는 번역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노래가 아니라는 듯, 오직 남매의 감정만을 표현하기 위한 노래라는 듯이. 하지만 백인은 난민의 감정을 거부한다. 백인은 난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착취하는 '공장'과도 같은 장소를 구축하고, 백인에 의해 공장으로 '옮겨진' 난민은 '기계'로 전락한다. 이러한 공간성은 백인이 마구잡이로 그은 국경선에 의한 ‘아프리카 내의 분단’과 이를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스스로 ‘재구성’하는 상징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백인은 카메룬과 베냉을 뛰어넘어 연합한 토리와 로키타가 또다시 서로를 바라볼 수 없게끔 둘 사이에 선을 긋는다. 경찰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도록, 또 그들이 착취하는 난민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빽빽한 경계선을 그리고, 로키타의 눈을 가려 주소도 노출하지 않는다. 백인 자본은 은밀하게 식민지를 만들어낸다. 백인이 그은 국경에 의해 토리와 로키타는 분단되고, 백인과 자본이 구해주지 않는 서로의 진실을 더는 보존할 수가 없다. 거기서 난민은 백인의 지시를 묵묵히 이행해야하는 반면, 기계로 전락한 난민이 백인·어른에게 울부짖는 호소는 항상 무기력하다. 밀실에 격리될 로키타가 토리를 만나게 해달라고, 정 안 되면 통화라도 허용해달라고 부르짖는 호소는 대부분 거부된다.      


토리가 공무원에게 왜 누나에게 허가증을 내어주지 않느냐고, 자신은 누나 없이 살 수 없다고 간청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베팀의 끄나풀 마르고는 절규하는 로키타를 침대에 주저앉히지만, 로키타가 마르고에게 간청하는 내용을 그녀는 매몰차게 외면한다. 백인에 의한 난민은 잘 보이는 반면, 난민의 요구를 듣는 백인은 ‘프레임 밖으로 교활하게 빠져나가며’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뒤집는다. 그간 백인에 의해서 운송되던 난민들, 그러나 토리는 ‘자전거’를 타고 능동적으로 운전하거나, 백인이 허락하지 않은 자동차에 몰래 올라타 접근이 금기시된 재배지를 확인한다. 난민이 직접 대마초를 재배하고 밀거래를 한다. 백인은 그 몫을 지금까지 아무 희생 없이 챙겼다. 그러나 토리는 로키타가 재배하고 자신이 밀거래하는, 난민들의 정당한 몫을 직접 챙긴다. 재배지에선 로키타의 탈출이 터부시된다. 그러나 토리는 백인이 만들어놓은 재배지의 '입구와 출구'를 재배치한다. 이후 베팀과 루카스를 역으로 가두고, ‘난민에 의한 백인’을 만든다. 그러나 남매의 시도는 다르덴 형제의 그 어떤 작품보다 더 암담한 결과로 이어진다. 남매는 숲으로 도망친다. 벨기에에 오기 전에 거쳤을 곳, 그들이 나고 자란 빈곤하고 궁핍한 곳이 바로 숲이다. 그렇기에 숲으로 도망쳐도 다시 도시로 향하는 '도로'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윽고 로키타가 도로로 나가서 히치하이킹을 시도 하지만, 남매가 통제한 밀실에서 손쉽게 빠져나온 루카스에게 적발당해 로키타는 살해당한다. 난민들은 백인의 공간을 탈출하고 역으로 규정하더라도, 결국에는 생존을 위해서 더러운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백인의 세계로 되돌아가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백인이 원하지 않는 ‘반항하는 로키타’는 살해당한다. 로키타의 장례식에서 토리는 로키타가 알려준 고향 노래를 부르지만, 정작 그 이후 크레딧에서는 시칠리아에서 배운 노래가 흘러나온다. 소년은 자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를 멈추고, 백인·어른에 의한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라는 듯이… 서류 없는 난민은 사라지고, 서류가 있는 난민이라 할지라도 백인과 자본이 미래를 규정한다. 

분명 다르덴 형제는 그간 작품에서 희망을 품었다. <로나의 침묵>이나 <언노운 걸> 모두 다 죽음이 발생해도 나름의 희망이 잔존했었고, 바로 전작 <소년 아메드>에선 죽어가는 아이를 다시 삶으로 이끌 스승이란 구원이 있었다. 이와 달리 본 작품은 어째서 이토록 비정하고 부질없을까? 다르덴 형제의 그간 작품에서 인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선 백인 성인이 주인공이거나, 만약 유색인종이나 아이들이 주인공이라면 그 곁엔 우호적인 백인이 있어야 했다. 본 작품에서도 토리와 로키타 곁에 보호소의 친절한 백인 나디아가 있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돈이나 허가증까진 수여할 수 없다. 힘 있는 백인은 착취하는 반면, 연대하는 백인은 힘이 없다. 결국 난민의 고립된 몸부림은 허망하게 죽음과 착취로 귀결된다. 백인 스스로는 낙관적인 가상에 갇혀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난민에겐 급박한 현실 속 인식 개선과 참여가 필요하다. 그 찝찝함을 몸소 현실에서 해소하게끔 두 노장은 그 어느 때보다 가혹한 경종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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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512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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