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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17. 2023

루벤 외스트룬드, <슬픔의 삼각형>

권력 재배치!

루벤 외스트룬드(Ruben Ostlund),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 

- 권력 재배치!     

“현대에서 신성한 것은 오직 환상뿐이며 진리는 속된 것이다. 현대인의 눈에는 진리가 감소하고 환상이 증대하는 정도에 따라 신성함이 확장된다. 결국 현대에서 환상의 극치는 신성함의 극치가 된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부유한 북부 이탈리아인들은 여름이 되면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지중해로 여행을 떠난다. 지상에선 볼 수 없는 신묘하고도 몽환적인 빛깔이 가득하고, 광대함과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바다, 밤이 되면 인공적인 조명이 아니라 달빛이 인물들의 윤곽선을 부드럽게 다듬어줌에 이를 만끽하고자 지중해로의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청각이 이내 곧 엄습해온다. 일렁이는 파도에 두둥실 올라타 대지에서 멀어지지만, 여전히 단단한 갑판에 머물고 있는 인간은 문명의 요소를 바다에 재현한다. 북부 이탈리아 부르주아지들에게 여름의 동의어는 휴가지만, 남부 시칠리아 프롤레타리아에게 여름은 노동의 연장선이다.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에게 멸시하듯 지시하고, 또 공산주의를 배격하며 이혼 금지에 관한 토론을 귀 따갑게 떠들어댐에, 그들이 말하듯 천국은 '하수구'로 변한다. 부르주아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입만 살았고 프롤레타리아가 가져다주는 음식과 음료를 마시며, 지겨워지면 사치스럽게 도박을 즐긴다. 프롤레타리아는 바쁘다. 그들과 달리 유능하지만, 부르주아에게 고용되고 지배되어 무능력하게 치부된다. 그렇지만 유능한 이는 무능한 이에 항거할 수 없다. 자본주의에 속한 이상 어찌됐든 돈을 벌어야 하고, 유능력하지만 빈곤함에 가치는 평가 절하된다. 문명의 물살이 바다에 그대로 이어졌다. 그런데 물살이 반대로 휘청거리고, 이후 귀부인 라파엘라와 선원 제나리오는 난파당해 표류한다. 이윽고 한 무인도에서 동고동락하고, 부르주아를 부르주아로 만들고 프롤레타리아를 프롤레타리아로 만드는 모든 습관, 행동양식은 무효화된다. 계급은 이를 가능케 하는 체제, 관습, 구조 내에서만 합당하고 그마저도 맹목적으로 답습되었다는 것임이, 부르주아의 지식은 한갓 광고에서나 배운 허울뿐임이 폭로된다. 부르주아에게 유리하게 설정된 법에 의해 부조리하게 떼돈을 거머쥔 무능력한 부르주아, 반면 생존에 있어 높은 가치를 지니는 프롤레타리아의 유능함이 제 자리를 찾는다. 과연 화폐는 노동의 가치를 타당하게 평가하는가?      


또 계급의식이 팽배한 국가를 벗어나, 모든 것이 태곳적 상태로 초기화된 무인도로 향하자, 계급과 젠더(사회·문화적인 성별) 대신, 원초적인 섹스(생물학적 성별)가 부상한다. 지배하고 싶지만 이데올로기와 계급에 의해 위축되는 프롤레타리아 남성, 반면 의존하고 싶지만 계급과 법에 의해 지배하게 된 부르주아 여성은 무인도에서 원초적 인간으로 되돌아간다. 이들에게 무인도 생활은 도시 생활보다 더욱 만족스럽다. 도시에선 돈을 지불하는 사람도, 돈을 받는 사람도 손에 잡히는 것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대상을 가리키는 돈은 내 손에 있는데, 정작 그 대상이 내게 있지 않다. 하지만 섬에서는 직접 노동하고 사랑이 손에 잡힘에 만족스럽다. 구조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들은 SOS 신호를 보내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도시로 복귀한다. 돌아간 도시에선 각자의 배우자, 법, 제도가 있고, 직접 행동하고 노동하던 세계가 돈을 지불하는 간접적인 세계로 뒤바뀌니, 이들의 진정한 사랑도 끝이 난다. 위 내용은 리나 베르트뮬러의 <귀부인과 승무원>을 요약한 것으로, 본 작품은 지상과 바다, 문명과 자연을 오가며 아비투스(사회, 계급, 공동체 내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버릇 및 습관을 의미한다. 아비투스는 다른 공동체 및 무리로부터 자신이 속한 사회를 구별하고, 참여와 소속의 조건으로 작용한다)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했다. 이를 서두에 언급한 이유는 루벤 외스트룬드의 신작, <슬픔의 삼각형>이 본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단 본 작품뿐만 아니라, 지지부진한 일상을 중단시키는 휴가, 우연, 예술에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던 외스트룬드의 작품 세계 자체가 베르트뮬러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다. 1974년 스튀르소 태생의 루벤 외스트룬드는 동시대 스웨덴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중 한 명이다. 그는 <포스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으로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고, 이후 <더 스퀘어>로 이른 나이에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감독으로 우뚝 자리매김 하였다. <슬픔의 삼각형>은 그의 두 번째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그에게 명성을 널리 알린 작품들은 일련의 탐미적 요소들이 존재한다. <포스마쥬어>의 경우 비발디의 사계에 맞춰 남성의 심리를 가시화한 에너제니틱한 이미지, 음절에 맞춰 숏을 분절하는 시퀀스의 편집이 압도적이었으며, <더 스퀘어>의 경우 영화가 다루는 미술에 발맞추어 화이트큐브 갤러리의 전시 형태를 영화에 적용한, 백색의 차갑고 딱딱한 미장센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연출들은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현실과 밀착하는데, 외스트룬드의 관심이 현실 그 자체이거나, 기대하는 이미지 및 이념/현실의 간극을 탐구하기 때문이다. 외스트룬드의 리얼리즘 경향은 200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지속됐다. 초기 작품인 <분별없는 행동>이나 <플레이>에서 외스트룬드는 외부의 개입이 최소화된 현실을 객관적이고도 즉물적으로 포착하는, 다큐멘터리와 구분되지 않는 리얼리즘 극을 연출했다. <포스마쥬어>나 <더 스퀘어>에서도 롱테이크가 도드라지지만, 구작들에서는 더 집요하고 끈질긴 롱테이크로 현실의 시간을 담아내고,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숏에선 스웨덴 내의 성, 계급, 교육 문제를 신랄히 꼬집는다. 즉 그는 영화로써 현실을 폭로하는데, 근작 <포스마쥬어>에서도 예측, 기대 등 우리의 관념에만 머물던 것들이, 불발되고 좌절되는 현실과의 간극, 이로 인한 균열과 불화를 담아낸다. 이를 통해 가장과 남성성의 신화를 해체하면서도, 영화의 결말에선 아내 또한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즉 허위를 폭로하는 현실의 힘이란 남성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만인이 관념과 도그마를 배반하는 타협적이고 불가항력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음을 시사한다. 외스트룬드의 주된 탐구 중 하나는 인물들을 극한의 현실에 몰아넣어 태평한 이성의 판단에서 큰 괴리가 있는, 급박한 실제의 선택을 보여준다. 그리고 <더 스퀘어>에서는 예술 권력, 부르주아지, 엘리트주의의 허상을 꼬집고, 그들이 되뇌는 도덕, 윤리가 정작 일상 행동에 뒤따라오지 않는 모순을 지적하였다.      


이렇게 외스트룬드는 초기 시기에는 건조하고 객관적인 리얼리즘으로 현실 그 자체를 포착했다면, 최근에는 무수한 우발, 즉흥이 침투하여 개인의 기대 및 관념과 상반되게 전개되는, 현실과 이미지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라는 관념·이미지로 가득 찬 국가와 도시에서 멀어지는 <귀부인과 승무원>에서 영감을 받은 신작, <슬픔의 삼각형>에서도 그의 탐구가 이어진다. 외스트룬드 작품의 때깔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고와지고 있다. <플레이>까진 현실의 투박하고도 흐린 색채가 영화를 지배했다면, <포스마쥬어>부터는 꽤 정제된 세계가 구성된다. 그 이유는 초기 작업이 ‘날 것의 세계’를 비추었다면, 최근작들은 이미지와 실제 사이의 간극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에, 외스트룬드 근작은 곱고 또 고운 이미지에서 시작한다. 과시적인 배경음악뿐만 아니라, 패션쇼와 크루즈의 호사스러움을 쨍한 채도·명도로 부각하는 <슬픔의 삼각형>은, 오늘날 범람하는 이미지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류의 삶을 환기하듯 아름답고 또 아름답다. 그러나 외스트룬드는 아름다운 이미지의 이면을 들추어내기에, 초기작부터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은 연출이 있다. 바로 '롱테이크'다. 무수한 숏을 자르고 이어 붙인 시퀀스는 현실의 일부를 삭제하고, 순서를 조작하며 새로운 허구의 이미지를 탄생시킨다. 이와 달리 자르지 않거나 덜 자르는 롱테이크는 촬영본 자체를 비교적 고스란히 보존한다. 본 롱테이크에 담기는 대상들은 역동적이더라도, 프레임 자체는 매우 정적이다. 길게 관찰하는 그의 카메라는 거의 멈춰있는데, 이는 현실에 적극 개입하는 태도가 아니라, 현실을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카메라는 인물들에게 밀착 접근하여 영향을 미치지 않고,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게끔 멀찌감치 동떨어져서 훔쳐본다. 물론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픽션이지만, 초기작에는 비전문배우들을 등장시켜 나름 현실적인 반응을 포착하였다. 한편 본 작품에선 정적인 카메라의 의미가 좀 다르다. 외스트룬드는 본 작품에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폭로하기에, 카메라를 적극 노출시켜 피사체와의 관계를 드러낸다.      


카메라 안에 남성 모델 지망생들이 담기고 있다. 카메라는 가만히 머물러 있다. 해당 카메라의 주인은 '여성적인 남성 인터뷰어', '게이 및 여성 디자이너', '명품 브랜드'들로, 이들은 남성 모델 지망생들에게 구애하지 않는다. 지망생들한테 그들이 간절하게 필요하지, 자신에게 지망생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2년 전에 모델을 관둔 칼, 여성 모델에 비해서 페이가 넉넉지 않은 것이 관둔 이유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푼돈이라도 벌려고 다시 복귀한건 칼 자신이지, 패션계가 그를 소환하지 않았다. 푼돈이라도 벌려는 그에겐 패션계가 필요하다. 패션계는 가만히 멈춰서 패션계라는 ‘프레임’에 담길 수 있는, 그럼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자격을 열거한다. 실제 지망생들이 요구받은 자격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요구하는 '이미지'를 어떻게든 충족해야만 포착될 수 있다. 자격 미달이면 프레임 상단에 ‘목이 잘려서’ 포착된다. 패션쇼에서 여성 VIP들에 비해서 자격이 모자란 관람객이나 칼은 어둠 속으로 추방되어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카메라가 줌인하는 것은 런웨이를 워킹하는 야야이지, 그녀의 부속품이자 아마추어 모델인 칼이 아니다. 포착되는 존재들은 아름다운 이미지로서의 자격을 모두 충족했다. 본래 영화 도입에서는 카메라에 이들이 어떻게 담기고 있는지, '카메라의 모니터'를 촬영하였다. 카메라의 모니터에 담기고자 고군분투하는 모델 지망생들, 이후 카메라 모니터를 벗어난 현실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이미지'가 되어야한다. 보기 좋은 이미지가 아니라면 보이지 않게, 존재하지 않게 된다. 현실은 이미지를 위해 봉사한다. 이렇게 인간이 자신에게 끼워 맞출 것을 요구하는 정적인 카메라로 외스트룬드는 무엇을 포착하는가? 일단 외스트룬드는 <포스마쥬어>에서 제기한, ‘가부장제의 쇠퇴’를 연이어 지적한다. 지금까지 남성이 집필한 역사에서 ‘바라보는 쪽’은 남성, ‘바라봐지는 쪽’은 여성이었다. 바라봄을 당하는 사람은 헐벗은 ‘모델’이자 ‘뮤즈’ 그리고 교도소의 죄수들이라면, 바라보는 쪽은 ‘예술가’이자 간수들이다.      


시선을 쏘아보는 사람은 그 시선을 수용하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변형시킬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바라봐지는 사람은 그들에 의해 승인되고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가부장제가 지배라는 특권을 허용한 남성들은 여성이 어떻게 보여야 할지 규정할 수 있었다. 서구 가부장제에선 ‘이성애자 백인 남성’의 시선에 의해 여성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젊은 백인 청년’들이 헐벗은 상체를 내놓고 모델 오디션에 참여한다. 본래 ‘액션페인팅’하는 화가였던 백인 남성들은 이제 ‘캔버스’로, 흡사 과거 뮤즈였던 여성처럼 도구로 전락한다. 브랜드와 심사위원의 주문에 따라서 표정과 워킹을 달리 한다. 칼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에 의해서 ‘슬픔의 삼각형’을 찌푸린 인상을 풀어야 하며, 젖살이 빠진 볼엔 보톡스를 채워 넣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타인에 의해서 젊어져야 한다. 주문하는 사람들은 서구 가부장제에서 배태되곤 한 동성애자, 여성, 유색인종들이다. 칼은 실제로 진보적인 의제에 전혀 관심이 없는, 허우대만 멀끔하지 정신은 볼썽사나운 ‘인셀’의 전형이다. 그러나 모델이 되기 위해서 진보의제에 관심이 있는 척 동조한다. 예전 같았다면 자신의 성차별적인 발언을 뻔뻔스레 과시했겠지만, 오늘날엔 이를 숨긴다, ‘자본’에 의해서. 오늘날에는 남성과 여성, 양자 모두 이미지를 선별하고 생성할 특권을 자본이 부여하고, 이와 동시에 누구나 수동적인 모델로 전락할 취약성 또한 동반한다. 이제 부유한 여성은 자유롭게 쳐다본다. 역사 속에서 ‘시선의 주인’이 아니었던 여성, 그러나 오늘날의 야야는 옆에 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육감적인 그리스인 선원을 능동적으로 쳐다본다. 그간 공간을 제공한 남성과 달리, 크루즈를 여성 야야가 남성 칼에게 제공한다. 즉 야야는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그 시선이 ‘자신을 위한 칼’을 만든다. 칼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지며 발생하는 이익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서도 그간 바라보는 쪽이었던 남성은 자신들의 부조리한 특권을 잃는 것에 반발한다.      


철학자 조르주 바타이유는 그의 경제론을 담은 『저주받은 몫』에서 축적과 낭비를 논한다. 아즈텍 문명의 낭비와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포틀래치'라는 증여 의식을 분석하면서, 증여 및 낭비가 권력을 과시하는 행위임을 밝힌다. 숨만 쉬어도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우리는 ‘받고 모으는 행위’가 일반적이다. 그래야만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받은 것을 도로 내주는 사람, 파괴하고 낭비하는 사람은 그만큼 비일반적이다. 그 비일반적인 낭비자들은 일반성을 따르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다는 강인한 능력을 증명한다. 낭비자들은 일반인들에게 흥청망청 재물을 내어주면서도 생존할 수 있는 '힘'이 여전히 건재하다고 과시한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낭비자가 내어주는 재물을 받기 위해서, 이와 더불어 낭비해도 힘이 있는 그에게 보호를 요청하며 권력을 위임한다. 본래 역사에서 낭비를 가부장제가 남성에게 허용했다. 끝없이 낭비해도 다시 남성들이 돈을 벌 수 있도록 이념이 뒷받침했다. 영화에서도 권력자가 되기 위한 낭비는 이어지지만 더는 가부장제가 남성의 낭비를 보조해주지 않는다. 야야는 자신이 일을 그만두게 될 미래를 가정하여, 과연 칼이 '낭비할 수 있는 남자'인지 식당에서 시험했다. 그런데 칼은 인색하기 짝이 없다. 칼은 야야 덕에 호텔에서 숙박하고, 크루즈 여행에도 따라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야야는 칼보다 서열이 높지만, 칼은 낭비하지 않고 야야와 서열이 같기를, '평등'하길 바란다. 낭비를 더 많이 하는 야야, 그만큼 힘이 더 많은 그녀가 그리스인을 눈여겨봐도 칼은 적극적으로 반발할 수 없다. 이후 롤렉스 시계를 선물하겠다며 끈질기게 낭비하는 야모와 달리, 칼은 디미트리와 함께 그를 헐뜯을 뿐 그처럼 낭비에 동참하지 못한다. 권력이 그에게 없다. 그간 사회적 비용을 남성에게 집중하고 이로써 남성이 낭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 가부장제가 약화되자, 패션쇼에서 야야가 무수한 시선을 끄는 것처럼 여성에게 사회적 비용이 집중되며 여성 또한 낭비할 여건이 생기고, 이제 여성이 낭비한다. 여성을 중심으로 남성이 모여든다.    

  

그런데 야야의 카드가 승인 거절당했다. 모델들의 짧은 직업적 수명을 암시하는 것인가. 이후 차 안에서 언쟁을 벌이고 야야가 먼저 자리를 뜨자, 칼보다 더 늙은 남성 기사는 야야에 의해 좌우되지 말고, 그녀와 싸워서 권력을 쟁취하라고 부추긴다. 칼은 이를 고스란히 이행한다. 칼과 야야가 호텔에서 언쟁을 벌이는 장면에서 야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려 하지만, 칼은 야야가 탄 엘리베이터가 닫히지 않게 계속 저지한다. 칼은 야야가 가장의 승인 없이 이동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여성의 이동이 가장 자신에 의해 좌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야야는 칼의 가슴팍에 돈을 꽂는다. 흡사 창녀를 구매한 남성들이 돈을 지불하는 것처럼. 모델로서 칼도 그렇게 돈을 번다. 그러나 그는 남창으로 격하된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분개하고 돈을 내팽개친다. 그의 낭비는 겨우 이 수준에 그친다. 돈을 벌 수 있는 규칙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낭비하는 그리스인 선원은 상반신을 내놓았다는 이유로 배에서 쫓겨난다. 그리스인 선원은 노동하며 축적하는 일보다, 감정에 충실한 낭비를 하며 내재적 원리를 따른다. 반면 칼은 어떠한가. 원초적 남성성이 흘러넘치는 그리스인 선원을 상대로 자신의 힘을 낭비하며 대결하기는커녕, 크루즈의 규칙을 활용하여 그리스인을 내쫓는 수준에 그친다. 그리스인을 몰아내기 위해서 그는 어떤 것도 낭비하지 않는다. 외재적 원리를 거스르고 내재적 원리를 추구할 수 있었던 남성, 그 남성들의 내재성을 허용한 가부장제가 서서히 종말하자 그들의 낭비도 쪼그라들고 있다. 낭비는 쪼잔해지면서도, 낭비의 특권인 자존심이나 지위는 ‘이퀄리즘’을 운운하며 바라고 있다. 이렇게 가부장제가 약화될 때 여성은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들은 카메라가 형성해놓은 프레임 안으로 기어들어가고, 남성들도 타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모델이 된다. 보이기 위한 ‘이미지의 시대’가 개막됐다. 남성이 자의로 여성을 촬영하거나 그리던 과거로부터, 이제 모델이자 감독인 여성이 단지 카메라나 스마트폰을 들었을 뿐인 남성 칼이나 디미트리에게 지시한다.      


즉 여성은 고용주로, 남성은 피고용자로 전락하며, 남성은 자신이 보고 싶은 데로 촬영할 수 없고, 이제 여성이 낭비한다. 최종 승인은 여성의 동공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여성은 이전 시대부터 회화나 사진의 주인공이었던 젠더를 고스란히 답습한다. 야야는 임신해서 더는 사람들이 원하는 아름다운 이미지를 창조하지 못하게 될 상황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자신이 트로피 와이프, 곧 ‘과시형 아내’가 될 미래를 염려하고, 칼에게 ‘가장’을 주문하며 전근대적인 젠더로 회귀한다. 분명 옛날에 비한다면 여성이 많은 사회적 비용을 벌고 있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패션업계에서는 분명 성과 환경에서의 진보 의제에 동참한다. 그러나 여성이 결혼하고 아이를 갖게 되면 가장에게 소유되어 더는 사회적 주체로 우뚝 설 수 없다. 크루즈의 여성 노동자들은 여전히 ‘가사노동’하는 전업주부에 가까운 여성으로서, 가장의 부에 의존하는 사회적 지위가 취약한 여성상을 답습한다. 크루즈의 부유한 기업가 디미트리를 정부를 대놓고 갖는다. 롤렉스 시계를 사주겠다는 야모 주위로 여성은 모여든다. 여성의 진보를 선전하는 이미지의 시대, 그러나 그 이미지가 실제 여성 인권에 오롯이 부합하지 않는다. 아름답게 보여야 하는 강박 속에서 여성은 오늘날에도 코르셋을 조여야 하거나, 아니면 성별을 나눌 것 없이 만인이 소수를 위해서 코르셋을 조이며 종속된다. 즉 외스트룬드는 사회 전반에 뻗친 젠더 이미지와 그 실체를 까발린다. 여성 이미지/현실 여성이 그렇듯, 이미지는 현실을 가리키지 않는다. 야야는 크루즈에서 스파게티를 먹는 척 사진을 찍지만, 디미트리가 궁금해 하듯 실제로 스파게티를 먹진 않는다. 이미지는 스파게티의 취식과 맛을 가리키지 않는다. 칼은 일광욕하며 『율리시스』를 읽고 있다.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귀환하는 이야기(혹은 가장 난해한 20세기 소설로 일컬어지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인가, 칼은 이를 이해하는가?), 그렇다면 칼 또한 오디세우스의 이미지를 빌린 만큼 난파된 이후 귀환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칼의 귀환은 결말까지 불확정적이다. 오히려 귀환하려는 칼의 몸에는 많은 생채기가 긁혀 실패를 예고한다.     


크루즈의 선장 토마스는 사회주의자다. 그런데 정작 선장은 반공주의자인 디미트리와 합이 척척 잘 맞는다. 사회주의자로서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명언을 남발하는 토마스는 정작 스스로 노동하지 않고 ‘서기장’의 자리에 올라 다른 선원들을 마구 부린다. 크루즈는 토마스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선원,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굴러간다. 디미트리 또한 마찬가지로 반공을 외치며 노동자들을 폄하하나, 정작 자신이 폄하하는 공산주의자 토마스에게 카드놀이를 내리 진다. 더욱이 크루즈에 타기까지는 신자유주의의 이득을 누리는 서구 백인으로서 반공을 외쳤으나, 이후 무인도에서 아비게일이 권력을 독점하려하자 노동과 부를 나눠야 한다며 '사회주의적인' 주장을 한다. 윈스턴 부부는 자신들의 군사사업이 '민주주의'에 일조한다며 이미지를 포장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수류탄은 해적들의 노략질에 사용되어 민주주의를 교란한다. 즉 계급적 특권을 보장하는 이념 없이 이들은 무능력하다. 그런데 이미지는 해당 계급들이 이념 없이도 유능한 척 포장하고 선전하여 항상 ‘잘 보이게’ 한다. 정작 어떤 이념이나 이미지의 도움 없이도 가치 있는 프롤레타리아 아비게일은 크루즈에선 내내 보이지도 않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의 카메라는 제한적으로 움직인다. 현실은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아니하고 카메라를 위해서, 이미지가 되기 위해 움직임을 한정한다. 그런데 줌인이나 달리가 동반될 때가 있다. 일단 뇌졸중에 걸려서 발화가 용의치 않은 테레세의 사실에 접근할 때, 또 함께 조난당한 넬슨을 해적으로 치부하다가 비번임을 확인할 때(물론 넬슨은 해적이 맞았다), 섬에서 아비게일이 '선장'임을 비장하게 선언할 때, 대상에게 다가가기 위해 카메라가 움직인다. 이미지로서 가두는 프레임, 곧 '틀'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현실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가 바쁘게 움직인다. 이미지와 현실의 역전된 관계가 비로소 바로잡힌다. 무인도라는 이미지와 통념에 갇혀 있던 야야와 아비게일이 직접 하이킹을 하고 엘리베이터를 발견하며, 그 과정을 트래킹 숏으로 포착하는 카메라가 진실에 다가가듯 말이다.      


반대로 움직이지 않는 부르주아, 이로써 현실 유리적인 부르주아들은 배가 불안하게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크루즈에 대한 안정적인 고정관념’에 매몰되어 위험을 느끼지 못한다. 즉 고정된 카메라는 ‘이미지’와 더불어, 난파된 이후에도 프롤레타리아를 부려먹으려 할 뿐 무능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부르주아의 ‘고착화된 계급성’에 상응한다. 반면 역동적인 카메라는 ‘실제적인 다가감’, ‘사실’을 가리킨다. 이는 곧 영화 속, 영어 외에는 해석되지 않는 외국어에도 상응한다. 영화에서는 스웨덴어나 불어, 독어 등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나 정작 영어 외에는 잘 해석되지 않고, 영화 내에서도 서로의 언어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아는 척 한다. 또 뇌졸중에 걸린 테레세는 ‘저 하늘 위에’라는 무능한 문장만 반복하여 무인도인 줄 알았던 섬에서 상인이 나타났을 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다. 군수업자들은 위협적인 기의를 선량한 기표로 포장한다. 언어는 기의를 가리키는 기표인데, 그들의 언어는 기표에만 그치는 이미지가 된다, 이로써 이미지는 '아는 척', 위험을 품은 ‘위선’이다. 아는 척 하는 이미지는 고착화된 계급성에 봉사한다. 영화 속 집단은 백인 부르주아지, 백인 프롤레타리아트, 유색인종 프롤레타리아트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백인 부르주아들은 유색인종 프롤레타리아를 관리하고 팁을 직접 받는 백인 프롤레타리아를 '하위 엘리트'로 선별한다.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몫을 쥐어주며 프롤레타리아들을 관리한다. 폴라와 다리우스, 토마스 등이 하위 엘리트에 속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유함이 유능함의 척도라 믿는다. 그래서 부유하게 보이는 부르주아, 똑같은 계급이어도 돈을 더 버는 백인들은 유능하게 보였다. 하지만 정작 선장이 ‘보이지 않았을 때’ 운행은 안정적이었고, 선장이 ‘유능하고 번듯하게 보이기 시작하니’ 역으로 배가 흔들린다. 가장 먼저 구토를 시작하는 이들, 또 흔들리는 배에서 멀뚱하게 앉아서 종말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들이 백인 부르주아다.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에게 지시한다. 무능한 부르주아는 유용한 지시를 하지 않는다. 이미지를 위한, 현실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지시만 반복한다.      


그리스인 선원을 사라지게 만든다. 돛이 필요 없는 크루즈에서 돛을 청소하라며 생떼를 부린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부르주아 베라의 ‘도덕적 우월감’을 부풀리기 위한 계급 간 평등 이미지를 위해 동원된다. ‘무릎을 꿇고’ 웃는 얼굴로, 그녀의 모순적인 주장에 YES를 외치며 일해야 할 시간에 수영한다. 비상용 슬라이더를 베라의 욕망에 동원함에 정작 위기가 발생했을 때 합당하게 사용하지 못한다. 이렇게 유능해보였던 부르주아가 멍청하게 설쳐대자 크루즈는 위험에 처한다. 배의 불안정한 흔들림과 그것을 반영하는 기우뚱거리는 카메라, 이는 무능한 부르주아에 의해 멸망 직전에 내몰린 세계를 가시화한다. 부르주아의 실체는 ‘구토’와 ‘역류한 오물’이요, 야야가 보기 좋은 사진을 촬영하는 동안 윙윙거리며 방해하는 더러운 ‘똥파리’다. 그들은 유익한 생산물이 아니라, 그 생산물들이 더는 유용해질 수 없을 만큼 너덜너덜해진 끝이다. 외스트룬드는 이미지를 까발려서 노골적인 현실을 전시한다. 부르주아들을 보이게 만드는 구조와 이념이 상실되자 무인도에서 이들은 보이지 않게 된다. 딱 하나 남은 ‘신호탄’을 낭비하여 보이지 않게 되고, 생존을 위협 당한다. 이러한 와중에 하위 엘리트인 폴라, 다리우스를 달리 숏으로 포착한다. 그는 토마스를 깨우고, 부르주아의 지시를 이행하여 일을 수습해보려 한다. 그러나 토마스를 제때에 깨우지 못했고, 누전차단기를 만질 줄도 모른다. 하위 엘리트인 그들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놓여 후자처럼 움직이긴 하지만 전자처럼 무능력하다. 프롤레티리아들은 이미지를 벗어나서 배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꼿꼿하게 중심을 잡는 존재, 부르주아들이 유용한 것들을 낭비시켜 난장판으로 만들 때 이를 청소하여 다시 유용하게 가꾸는 존재, 섬에서 사냥과 요리, 점화를 도맡는 존재다. 그런데 실제로 주목받아야 할 유용한 프롤레타리아들은 보이지 않고, 이들의 공로를 훔쳐서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포장한다. 디미트리는 해변에 떠밀려온 베라의 주검에서 보석을 모두 다 뗀다. 겉으로는 슬퍼하면서, 실제로는 강탈하며 웃음 짓는 사악한 자가 부르주아다.      


부르주아뿐만이 아니라, 가부장제 내 남성들도 여성의 몫을 절도한다. 칼은 아비게일의 가방에서 프레첼 스틱을 훔쳐 호의호식한다. 절도한 것을 낭비하며 이익을 누린다. 그러나 에비게일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고, 폴라와 야야는 에비게일을 따라 노동에 적극 참여한다. 그간 ‘맹목적인 부르주아 숭배’, ‘부유한 남성들이 곁에 소유한 여성’ 이미지가 반복됐다. 이것이 뒤집힌다. 노동하는 프롤레타리아가 낭비하며 권력을 거머쥐고, 그 노동자 곁에 젊은 청년이 귀속되며 진실로써 현실을 바로잡는다. 야모는 야야와 루드밀라에게 롤렉스 시계를 사주겠다며, 즉 낭비하며 여성들의 환심을 샀다. 그러나 크루즈 위에서 롤렉스 시계를 살 수 있는 남성의 재력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남성 부르주아지를 유능하게 포장하는 이미지나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지만 그 이미지가 더는 유효하지 않은 무인도에서 야모는 당나귀를 직접 사냥한다. 그간 노동자에게 잔혹한 도축을 시키고, 정작 이익은 부르주아가 누리던 위계로부터, 자신이 직접 사냥한 당나귀 고기를 구성원들에게 낭비한다. 합당하게 축적한 부를 낭비하여 자신의 업적을 ‘당나귀 벽화’로 칭송한다. 그렇게 실제적인 낭비로 야야의 환심을 산다. (물론 당나귀는 이들이 난파당한 섬에서 자연적으론 존재할 수 없는 생물이다. 가축인 당나귀를 보고 사람이 사는 섬일 거라 의심조차 안 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여전히 무능력하다) 아비게일은 직접 사냥하고 요리한 문어를 더는 폴라에게 빼앗기지 않고 스스로 선장임을 선언하며, 구성원들에게 재능을 낭비하여 권력을 쟁취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가 합당하게 가리키지 않는 개개인의 유능함과 달리, 아비게일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음식을 칼에게 증여하며, 그 대가로 그를 소유한다. 가부장제가 유능함을 억지로 보장하던 남성들, 이에 부조리하게 남성들에게 소유된 여성들, 그러나 가부장제가 사라지자 무능한 남성들은 생활력 있는 유능한 여성에게 귀속되어 그녀들의 지시를 따라 노동하거나, 아니면 ‘코르셋’을 조여서 그녀들의 기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타이유를 다시 소환하자면, 인간은 언제나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과잉 흡수하는데, 생존 이상의 에너지는 '성장'을 촉진한다. 그러나 성장은 무한하지 않고 어느새 상한선을 맞닥뜨려, 과잉 흡수된 에너지는 진짜로 필요 없게 된다. 이렇게 에너지를 더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없을 때 인간은 즐거움을 위해서 낭비한다. 심지어 즐거움에도 봉사하지 못할 때는 번식이나 죽음이라는 비합리적인 사치로 귀결된다. 영화에선 부르주아가 쥐고 있는 과잉 에너지가 죽음으로 귀결된다.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신선한 해산물들을 우수한 요리사들이 파인다이닝으로 승화한다. 이를 즐기는 부르주아들은 섭취한 에너지를 흔들리는 배 안에서 적응하는 성장으로 이어내지 못한다. 구토하고 설사하여 흡수한 에너지를 무용하게, 심지어 즐겁지도 않게 낭비한다. 난파 이후 살아남은 극소수의 부르주아는 에너지를 독점한 만큼의 성장을 섬에서도 증명하지 못한다. 대신 노동자들은 에너지가 주어진 만큼 흔들리는 환경과 새로운 장소에서 쉽게 적응하고 성장한다. 더는 성장할 수 없는 남성 부르주아지들이 독점한 부가 여성 프롤레타리아에게 분배되자 세계는 윤택해진다. 그러나 다시 이미지의 제국이 그들 곁에 성큼 다가온다. 무의미한 낭비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부르주아는 섬의 휴양지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려는 한편, 아비게일은 이미지의 세계에 되돌아가서 허위 부르주아에게 봉사하고 싶지 않다. 아비게일은 야야를 죽일 것인가, 칼은 자신의 무능함을 폭로하는 공동체에서 도망쳐 휴양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 갈림길을 줌인과 트래킹을 이용해서 촬영하며 외스트룬드는 극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외스트룬드는 오늘날 범람하는 가상 이미지와 현실의 괴리를 계급론과 젠더론으로 풀어낸다. 부르주아·남성은 풍요로워서 성장 없는 낭비를 일삼을 정도인데도 그들에게 필요 없는 부가 과다하게 쏠린다. 정작 여성·제3세계·노동자는 성장이 필요한데도 부는 주어지지 않고, 부르주아와 남성을 포장하기 위해서 동원된 그들은 보이지도 않게 된다. 후자는 전자를 전복시키려하고, 전자는 자신들의 부조리한 특권을 결코 놓지 않으려는, 갈등이 극에 달한 오늘날을 외스트룬드는 신작에서 포착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귀부인과 승무원>이 언급되고, 또 <절멸의 천사>와 같은 부뉴엘의 작업을 오늘날에 맞춰 재해석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사유가 그리 깊지만은 않다. 또 강렬한 음률에 맞춰 이미지와 편집을 구성하던 <포스마쥬어>와 달리, 본 작품은 호사스러운 청각과 시각에 비영화적으로 기대는 안일함이 아쉽다. 날카롭고 불길한 하프시코드 음조는 평범하고 단조롭게 이미지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킬 뿐, <포스마쥬어>처럼 청각이 시각적으로 승화되는 ‘청각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호화롭지만 영화 연출에선 빈곤하지 않나 싶은 작품, 시의적으로 유의미하나 황금종려상, 그것도 두 번째 황금종려상은 그에게 일렀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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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517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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