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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04. 2023

롤라 퀴보롱, <로데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것, 자유

롤라 퀴보롱(Lola Quivoron), <로데오>(Rodeo) -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것, 자유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075

“여기 발 딛고 있는 갈대는, 내일도 여전히 서있으리, 네가 어디에 있든지 네 영혼이 바라는 대로, 바람에 실려, 연결되어 있지 않은 곳으로.” -파울 첼란-

인간은 교통기술을 발전하며 더 많이 자유로워졌다. 자유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 인간은 교통수단을 발전시켜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고 가고 싶은 곳으로 향할 수 있게 되었나니, 바다를 넘고 대륙을 횡단하며, 창공을 넘어서, 느끼고 싶은 것을 충분히 만끽한다. 그렇게 인류를 자유롭게 해주는 진보된 교통은 자유로운 만인이 누릴 수 있어야만 한다. 특정 교통수단을 소수만, 특정성별만 누리는 것은 곧 자유의 독점과 편향을 의미하는 것이니. 롤라 퀴보롱은 장편 데뷔작 <로데오>에서 교통수단 중 하나인 바이클의 남성 중심성을 깨부순다. 또 구 교통수단인 말을 잘 다스리는 기술을 의미하는 '로데오'를 새로운 시대의 말인 바이크에 빗댄다. 1989년 파리 태생의 롤라 퀴보롱은 프랑스의 영화감독이다. 지금까지 그녀는 다수의 단편을 내놓았다. 파리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파리 교외에서 자란 자전적인 유년기를 작품에 투영하는데, 이는 최근 현장 참여적이고 로컬적인 프랑스 사회파 영화와 맥이 맞닿아 있다. 또 그녀의 작품에서는 동물이 등장하고 ‘지배’를 고찰한다. <늑대의 아들>이 이에 대표적이다. 퀴보롱은 아이온이라는 개를 경비견으로 훈련시키는 조니라는 젊은 청년을 이야기한다. 철창에 갇혀 있되, 제 감정에 따라서 위협적으로 울고, 또 좋은 사람임을 스스로 판단하여 온순해지던 아이온, 하지만 경비견으로 거듭나며 오직 명령만 따른다. 그것도 아주 단순한 단어들만 지시받으며, 흡사 사물을 조종하는 리모컨 같이 밋밋하게 변한다. 이는 자신의 상관에게 개 훈련법을 교육받는 조니 또한 마찬가지다. 퀴보롱이 단지 ‘사격장’이라는 소재를 선택했을 뿐인 다큐멘터리 <스탠드>도 유사한 관점이 이어진다. 장소를 청소하고 총기류를 닦으며 사격장을 운영하는 사장은 여성이다. 반면 사격을 즐기러 오는 손님들은 남성이다. 남성 이용객들의 파괴 욕망에 여성은 오직 일조만 하게끔 만들어지는 것일까, 인간을 지배하고 살상하는 무기를 인간이 닦는 아이러니를 포착하는 것일까? 실제로 그런 위협이 없지 않다. 어디선가 총기가 유출되었다는 다급한 연락을 경찰로부터 전해 듣기에.      


<볼티모어의 꿈>에선 아버지에 의해 바이크 주행을 금지당한 형, 가고 싶은 축구 경기에 갈 수 없게 된 동생이 등장한다. 형은 잠든 아버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바이크를 수리하고, 동생은 축구 경기를 보러가자며 보채지만 아버지는 깨지 않는다. 가장의 지배에 아이들이 바라는 자유는 불발된다. 즉 무언가에 지배받게 되면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없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게 된다. 자유가 박탈된다. 그러나 퀴보롱은 지배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움, 본성을 지향한다. <늑대의 아들>에서 조니는 아이온을 풀어준다. 이후 어둠 속에서 경비견이자 상관이라는 목적에 따라 만나지 아니하고, 동등한 우정으로 재회한다. 풀려난 아이온은 본성과 필요에 따라 사냥하고, 조니는 이를 이해하고 털을 어루만져준다. 서로의 자유를 긍정한다. <스탠드>의 말미에서 태양이 진 파리, 거기서 퀴보롱은 총기에 의한 인간이 아니라, 총기 없이도 홀로 서있는 인간을 포착한다. <볼티모어의 꿈>에서 자아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를 지시한다. 아버지에게 바이크를 숨겨준 동생이 풀죽어하자, 형은 바이크에 아우를 태워 함께 드라이브한다. 형제는 아버지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라, 제 자신들이 가고 싶은 도로를 짜릿하게 주행하며, 이를 위해 연대한다. 즉 개인성을 지향하되, 그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공존한다. 퀴보롱은 이 자유의 여정을 거친 연출로 풀어낸다. 핸드 헬드가 동원된 <늑대의 아들>은 영화 내내 마구 흔들렸고,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할 정도로 훈련 과정을 객관적으로 촬영했다. 즉 흔들려서, 또 현실을 다듬지 않아서 거칠었다. <볼티모어의 꿈> 또한 다큐멘터리와 구분되지 않는 수준으로 집요하게 기록했으며, 바이크 주행 장면은 감각적임과 동시에 핸드 헬드로 촬영하여 리얼리틱했다. 다큐멘터리인 <스탠드>는 건조하게 대상에게만 집중했다. 이러한 연출로 <늑대의 아들>에서는 백인 청년과 어린 개, <볼티모어의 꿈>에서는 흑인 청년, 즉 주인공으로 사회초년생을 설정하고 탐구했는데, 그 경향이 <로데오>에선 어떻게 이어질까?     


일단 <로데오>는 <볼티모어의 꿈>의 연장선이다. 다만 주인공 소년이 소녀로, 아버지라는 시련은 남성들이 독점한 바이크 세계로 뒤바뀐다. 줄리아라는 이름의 소녀는 그 가부장적인 세계에서 도망친다. 도입부, 줄리아는 집밖으로 나가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녀의 형제들이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서 자매가 못나가게 가로막는다. 집안의 남성들은 그녀의 오토바이를 처분해버렸고, 이로써 여성이 자유롭게 어딘가로 향할 것이 아니라 그저 집 안에 '얌전하게'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당찬 줄리아는 기어코 그들의 손아귀를 뿌리치고 밖으로 나간다. 이후 줄리아는 트럭이 있는 남성들에게 '원하는 곳'에 데려다달라고 부탁하지만, 남성은 여성이 간청하는 자유를 쉽게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몇 차례의 협상과 호소 끝에 겨우 탑승한다. 본 도입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부장제의 특징, 하나는 남성이 고분고분한 여성을 바란다는 것, 이에 또 다른 하나는 그녀들의 발을 봉쇄하여 집에서 잠자코 남성들을 기다리라고 강제한다는 것, 운송기구와 발, 다리를 박탈당한 여성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없다는 점이다. 남성은 여성이 원하는 곳에 데려다주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를 천명하는 여성은 부조리한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고압적인 남성한테서 벗어나는 여성의 힘은 영화가 핸드 헬드로 거세게 흔들리게끔 만든다. 그러나 탈출한 줄리아가 오토바이를 손에 넣고, 그야말로 광란의 속력으로 짜릿하게 도로 주행을 하는 장면에서 되레 카메라는 안정적이고 차분하다. 본 주행 장면에서 줄리아는 안정적으로 자신을 되찾는다. 반면 핸드 헬드로 거세게, 그야말로 폭풍이 휘몰아치듯 세차게 흔들릴 때는 남성들이 여성을 붙잡아두고자 포박할 때, 거기서 벗어나고자 줄리아가 처절하게 몸부림칠 때다. 줄리아는 그들의 알력에 결코 순응하지 않는다. 저항하고 반항하며 뛰쳐나올 때 핸드 헬드는 더더욱 거세진다. 핸드 헬드는 자유를 향한 여성의 완고한 의지와 힘을 표현한다.    

  

즉 여성은 자신을 붙잡는 남성의 고압에서 벗어나고자 흔들린다. 반면 여성이 자유를 되찾았을 때는 아무리 불안정하고 위태위태한 오토바이를 탄다 한들,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무너지기는커녕 자신을 올곧게 유지한다. 설령 붕괴하고 불타더라도 자유로운 여성은 자신의 선택을 기꺼이 짊어질 준비가 되어있기에, 생의 최후에도 결연하게 안정감을 유지한다. 그러나 남성은 여성의 자립 가능성을 폄하하거나 방해한다. 줄리아는 집을 떠났다. 그러나 홀로서기기에 여윳돈이 조금도 없다. 그런데 일은 분명 여성들이 한다. 여성은 일을 하는데도 돈이 없다. 그 이유를 도시의 법칙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의 제목 '로데오'는 줄리아가 오토바이를 능숙하게 조종하여 하반신을 대신하는 과정을 말이나 소를 길들이는 해당 단어에 빗댄 것이기도 하나, 이와 동시에 줄리아가 속한 불법적 오토바이 경주를 즐기는 남성적인 도시의 이름이 '로데오'다. 로데오에선 도미노라는 남성이 도시 전체의 가장이다. 줄리아가 로데오에 머물기 위해서는 가장의 승인이 필요하다. 더욱이 남성들이 경제권을 쥐고 있는 도시에서 그들에게 협조해야지만 돈을 벌 수 있다. 그래서 다혈질인 줄리아는 용모를 쑥 훑어보는 도미노 앞에서는 예의바르게 군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래야만 도시에 머물고 돈을 벌 수 있으므로. 이후 도미노는 줄리아에게 오토바이 거래를 시킨다. 그런데 합법적이지 않다. 줄리아는 '루시'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단정하고 번듯한 옷을 갖춰서 판매자에게 신뢰를 준 이후 오토바이를 훔친다. 그녀는 남성이 제공하는 잘 곳을 얻고, 또 일말의 돈을 벌기 위해서 가장이 지시한 일, 것도 불법적인 일을 묵묵히 수행한다. 줄리아는 불법적 거래에 참여함과 동시에 도미노의 집과 마트를 오가며 잔심부름도 한다. 온갖 굳은 일과 잡일, 심지어 더러운 일까지 도맡아서 하는 여성, 안타깝게도 그녀들에게 돈은 넉넉하게 지급되지 않는다. 가장이자 고용주인 남성은 노동자 여성을 착취하여 꽤 많은 돈을 만지고, 이를 사용하여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간다.     


즉 여성의 희생으로 남성은 자유를 누린다. 그래서 여성이 끝없이 일하도록 영영 정당한 몫을 지급하지 않고, 바이크를 타고 어디로든 가고 싶어 하던 여성은 남성이 지시한 '일터'만 오가며 지리멸렬하게 노동한다. 줄리아 뿐만 아니라 도미노의 아내 오필리어 또한 집에서 육아와 살림에 시달린다. 도미노는 오필리어에게 돈을 주지도 않을 뿐더러, 집밖으로 못나가게 단속한다. 줄리아가 오필리어-킬리안 모자에게 드라이브를 시켜주니 바로 경고를 가한다. 오필리어가 집밖으로 나가면 킬리안과 가사, 곧 떠맡긴 책임을 다시 돌려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운송수단과 돈을 남성이 독점하고 있다. 그것이 로데오란 도시의 암묵적인 규칙이기에, 사실상 남성의 자본과 자유 독점을 법이 보장한다. 이에 궁핍한 여성은 밖에 나가봤자 줄리아처럼 떠돌이,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거나, 또 다른 남성의 손아귀에 붙잡힐 뿐이다. 목숨이 저당 잡힌 여성은 연명하고자 집에서 하기 싫은 일을 꾸역꾸역 반복한다. 킬리안은 오필리어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녀가 청소해놓으면 아들은 바로 더럽힌다. 그녀가 '원하는 상태'는 항상 어긋난다. 그런데도 생존하고자 인내해야만 한다. 그래서 여성은 제 삶을 결정하는 남성의 시선에서 잘 보여야 하고, 혹 그 품에서 벗어나고자 '핸드 헬드'를 자처하면 잘 보이지 않게 된다. 다시 영화 초반, 카메라는 핸드 헬드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줄리아 또한 형제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몸을 이리저리 비틂에, 프레임과 프레임에 담긴 이미지 모두 뒤숭숭하게 흔들려 그녀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육체는 '아웃 포커싱'으로 처리되어 흐리다. 겨우 도망쳐 나온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 줄리아는 영화에서 두 번 사기를 치는데, 그녀가 오토바이를 갖기 위해 벌이는 사기와 도미노가 시킨 사기는 다르다. 남성은 돈을 벌기 위해서 불법적인 일을 한다면, 여성은 합법적으론 자본과 탈 것을 거머쥘 수 없으니 불법적으로 오토바이를 탈취한다. 가부장제에서 여성에게 돈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수긍한다면 영영 자립할 수 없으니, 여성은 자유를 되찾고자 사기를 쳤다.      


그러나 그 대가로 줄리아는 남성의 시선에서 멀어진다. 발각되어선 안 된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이후 다시 나타난 그녀의 모습도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자유를 되찾아서 나타난 줄리아가 운전하는 모습으로, 프레임엔 그녀의 육체, 얼굴이 오롯이 담긴다. 이를 긴 시간을 할애하여 생생히 보존한다. 반면 그녀가 원치 않는데 드러날 때가 있다. 돈이 없는 그녀는 연료를 살 수 없거니와, 남성들은 그녀의 주행을 무시하며 연료를 빌려주지도 않는다. 그런 그녀가 연료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남성들이 보고 싶어 요구하는, 그들에게만 보기 좋은 '미소'를 방긋 지을 때다. 가부장제에서 그녀의 자유는 간헐적이고 대체론 흩날리며 투쟁함에 잘 보이지 않고, 오직 잘 보이는 것은 ‘남성에 의한 얼굴’이다. 남성 바이커들의 허리를 붙잡고 뒤에서 수동적으로 매달리는 ‘탑승자’ 여성, 그들을 응원하며 춤을 추는 ‘치어리더’ 여성만 허용될 뿐이다. 혹 여성이 드라이버가 된다면 이는 남성의 심부름을 하는 여성, 남성의 아이를 옮기는 여성만 허용된다. 그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오필리어는 짜증과 울화가 치밀지만, 버티고 생존하기 위해서 다만 인내한다. 그리고 남성들이 보고자 하는 얼굴은 최대한 찡그리거나 흐리게 만든다. 그러나 형제, 아버지가 보고자 하는 줄리아의 얼굴은 집에 있어야 하니 문을 봉쇄하여 그녀가 못나가게 한다. 하지만 그 문을 어떻게든 뛰어넘고 나가려고 발버둥 침에 줄리아는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 과정이 롱테이크에 담기는데, 본 작품은 대체로 한 숏의 길이가 긴 편이다. 도입부에서부터 긴 호흡의 연출이 도드라지는데 형제들에게 붙들려 건물 내에 억류될 때 '컷'은 사용되지 않아서 롱테이크가 유지되다가, 이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공간을 이동할 때 '컷'이 발생하여 롱테이크가 비로소 다른 숏과 연결된다. 그 다른 숏에는 남성들이 바라지 않는, 그러나 여성 자신이 바라는 운동의 결과가 이어진다. 여러 숏으로 구성된 시퀀스는 각기 다른 시공간을 담아낸 숏을 이어붙이고 넘나들며, 그야말로 예측 불가능하고 무궁무진한 운동을 자유롭게 생성할 수 있다.      


반면 롱테이크로 구성된 시퀀스에서는 ‘시공간이 현실처럼 제한적인 하나의 숏’ 내에서 운동이 발생함에 제약이 있다. 영화에선 롱테이크에 아버지와 형제들이 줄리아를 붙잡아두려는 실내를 담는다. 줄리아의 운동은 가장이 지배하는 집 내부에서 살림만이 유효하다는 듯이, 줄리아가 집 밖으로 연결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듯이, 그러나 문을 박차고 나간다. 줄리아가 원하는 곳에 가자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기 시작한다. 태양이 그녀 얼굴을 비추며 밝게 빛내준다. 또 그간의 줄리아는 다른 신체 부위는 등한시되고, 오직 '얼굴'만 클로즈업되었다. 영화 내내 남성은 여성의 '예쁜 얼굴'만을 보고 싶어 한다. 보기 좋아서 그들의 흥을 돋우는. 그러나 여성은 남성이 없을 때, 2.39:1의 화면비에 얼굴 외의 다른 신체를 거대하게 담는다. 남성의 손아귀에서 달아난 줄리아는 사기를 치기 위해서 손으로 용모를 정돈하는데, 퀴보롱은 남성과 협상하던 그녀의 얼굴 대신 ‘손’을 거대하게 부각한다. 남성에 의한 얼굴이 수동적이고 강제적이라면, 2.39:1의 널따란 화면비에 담긴 그녀의 손은 자유롭고 활동적이다. 그 손은 '발과 다리'를 찾고자 활동한다. 이후 줄리아는 오토바이 하나를 탈취한다. 줄리아는 그 오토바이를 거의 사랑하다시피 한다. 그래서 본 작품은 알렉시아라는 여성이 차량을 사랑하고 흠모하여, 차가운 금속 아기를 잉태한 줄리아 뒤쿠르노의 <티탄>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양자가 교통수단을 사랑하는 이유는 각기 다르다. <티탄>이 광대한 교통수단이 자아내는 극한의 에로스에 도취된 것이라면, <로데오>에선 교통수단이 줄리아가 가고 싶은 곳을 어디로든 가게 해주기 때문에, 이로써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은 광란의 쾌속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사랑한다. 즉 고도로 발달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느낀다는 점은 일맥상통하다. 그러나 <티탄>에서 느끼고 싶은 것이 끈적끈적하고 농밀한 에로티즘이라면 이로써 솔직한 욕망이라면, <로데오>에서 느끼고 싶은 것은 자유의 짜릿함과 해방감, 육체도 육체이지만 바라던 관념의 자유로운 실현이다.      


즉 줄리아는 자유롭고자 바이크를 사랑한다, 한계가 있는 발과 다리를 대체하는 수단인 바이크를 사랑한다, 이로써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는 자신을 사랑한다. 자유를 사랑하는 줄리아는 도미노에게 의존적인 오필리어와 킬리안에게 오토바이가 선사하는 해방의 감각을 공유한다. 줄리아가 그들과 드라이브 가서 보여주는 것은 육지를 뛰어넘을 수 있는 '보트', 바다나 거대한 강으로 단절된 두 땅을 연결시켜주는 '다리'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야만하는 자유를 널리 퍼뜨린다. 운송수단으로 내가 닿고 싶은 사람들에게 향한다. 그러나 그 자유가 여성에게는 오롯이 닿지 않는다. 대신 남성의 자유는 무제한이다. 그 남성들은 제 자유를 스스로 책임진다. 로데오의 바이커들은 단 하나의 바퀴로만 운전하는 아주 위태로운 곡예운전을 선보인다. 자신의 육체가 닿을 수 있는 최대치의 해방, 관념으로만 상상한 것을 모조리 실현한다. 그 남성들은 무절제한 자유를 즐기다가 기어코 사고를 낸다. 중상을 입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남성들은 여성 줄리아의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자유의 몫을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음에, 치료받기보다는 죽음을 선택한다. 그들의 주행은 영화에서 '풀숏'으로 포착되어 전신이 오롯이 보존된다. 그러나 줄리아는 남성들의 곡예운전 수준까지는 아직 훈련하지 못했을 뿐더러, 가고 싶은 곳조차 온전히 도달할 수 없다. 밤길을 걸으니 그녀를 시기하는 남성 벤이 상해를 입힌다. 남성은 그녀들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결정하거나 책임질 수 없게 만든다. 그녀들을 지배하고 소유하여 이득을 누리고자 여성의 도약을 방해한다. 그래서 줄리아는 풀숏이 아닌, 상반신 일부만 유효한 '바스트숏'이 잦다. 그러나 퀴보롱은 말한다, 여성 또한 한계가 없는 존재라고, 나아가 여성 역시 자유를 짊어질 수 있는 존재라고. 영화에선 줄리아의 꿈이 세 차례 인서트된다. 첫 번째 꿈에서 줄리아는 아브라를 만난다. 아브라는 유일하게 줄리아를 지지해주었다. 백인 남성들이 특히 더 줄리아를 무시했다면, 흑인 남성 아브라는 타자이자 약자로서 동질감을 느껴 그녀를 응원하였다. 그를 줄리아는 사랑했으나 아브라는 사고로 사망한다.      


재회 이후 깨어나니 꿈에서 그가 포옹해주던 부근에 생채기가 났다. 사랑하던 남성이 사라진 여성은 오직 흉터만 남는다. 두 번째 꿈에선 오토바이에서 연료가 줄줄 새고, 이윽고 불이 붙는다. 불타오르지만 줄리아는 오토바이가 불탈 만큼 달리지 못한다. 남성에게 자유를 억압당한 여성은 꿈속에서조차 위축되고 소극적이다. 이윽고 세 번째 꿈에서 다시 아브라와 재회한다. 그는 말한다, “죽음과 키스하는 것이 불꽃과 오토바이, 질주와 별 다르지 않다”라고. 아브라는 운전이라는 자유에 따른 대가인 죽음까지도 짊어진다. 죽을 수도 있지만 필사의 자유를 멈출 수 없다. 자유로운 존재, 인간이므로. 그렇게 세 번째 꿈 이후 자유를 깨우친 줄리아는 그녀 자체가 막을 수 없는 화마가 되어 광란의 질주를 펼친다. 자유를 향한 척박하고 처절한 여정을 퀴보롱은 35mm 필름의 거친 질감과 까끌거리는 그레인을 극한으로 강조하며 가시화한다. 이에 따른 미장센은 오돌토돌 요철이 튀어나온 뾰족한 아스팔트의 표면을 고스란히 옮겨온 것만 같다. 그 아스팔트 위를 불태우리만큼 내달리는 것이, 그렇게 자신을 갉아먹으면서 해방하고 기쁜 행위가 다름 아닌 고된 자유다. 그러나 여성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죽음을 본인들이 선택할 수 없고, 이로써 꿈은 그저 꿈,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줄리아는 꿈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돈’을 빼돌린다. 오직 남성에게만 집약된 돈, 그래서 남성만이 실현할 수 있었던 꿈… 그 돈을 형제에게 나눠주고 자신이 필요한 사항을 '지시'한다. 줄리아는 트럭에서 오토바이를 탈취하는, 스마트폰으로 감상하던 영상을 결말에 기어코 실현한다. 서서히 꿈은 현실이 되어가지만, 벤은 이번에도 줄리아를 방해한다. 하지만 벤 따위를 가뿐히 즈려밟은 줄리아는 다시 속도를 내며 미친 듯이 질주한다. 그런 그녀의 몸에 불이 붙지만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랐다는 듯이 내달린다. 철학자 니체는 스스로를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초인’, 내가 진정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이를 실행하는 초인이야 말로 자유를 깨우친 사람이라 평가한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삶, 곧 삶에 따른 ‘죽음’까지도 긍정할 준비가 되어있다.      


줄리아는 충분한 돈, 이로써 남성에게 귀속되지 않을 때 진정 자유로우며, 그때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여성의 육체에 가부장제가 가한 모든 한계를 벗어던지고, 완전무결하게 자유로운 영혼만이 남아 다시 주행을 계속한다. 즉 퀴보롱은 육체의 한계를 무시하고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절대적인 자유를 예찬한다. 그 주행에는 연대가 필요하다. 자유의 책임은 선택한 본인이 짊어지는 것이지만, 다만 자유에 이르기까진 결코 혼자서 가능하진 않다고 퀴보롱은 말한다. 영화 내내 자유는 '불'을 상징으로 삼는다. 태양에 의해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 모닥불 앞에서 춤추는 것, 불타는 것 등 자유란 스스로를 떳떳하게 밝히는 것, 끓어오르는 제 육체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 불은 혼자 붙을 수 없다. 무언가와 마찰이 필요하다. 불은 줄리아가 오필리어와 함께 주행했을 때 인다. 줄리아가 오필리어와 함께 주행하는 장면은 '디졸브'로 희미해지고 섞여들며, 이후 어둠 속에서 아스라하게 반짝이는 불빛으로 이어진다. 그 자유를 서로 응원하고 연대해야 하리라. 오필리어 덕분에 피울 수 있던 줄리아의 불꽃, 이에 줄리아는 죽기 직전 오필리어-킬리안 모자에게 돈을 남긴다. 가장 남성이 허용하지 않았던 돈, 곧 여성의 권력과 자유, 그러나 십시일반 서로에게 힘을 건네고 자유를 지지하며, 이로써 모두 이로워진다. 이렇게 퀴보롱은 아주 거친 연출로, 남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여성의 척박한 일대기를 풀어낸다. 여성은 교통수단을 쟁취하여 가고자 하는 곳에 도착하고 이로써 자유로워지며, 이를 가능케 하는 세계의 첫걸음은 바로 연대다. 자유와 교통수단, 가부장제의 관계를 상세히 분석한 탐구가 인상적이다. 가부장제가 독점한 교통수단을 쟁취하고자 남성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날카로운 도로를 쾌속으로 질주하는 영화 속 여성은 활활 타오르지만, 한편 본 작품은 타오르다가 마는 느낌이다. 연출에 비해서 각본의 흡입력이 좀 모자라고 상투적인 편이기에, 초반부에 강렬하게 타올랐던 불꽃은 서서히 흡입력을 잃고 사그라진다. 그러나 아쉬움은 남더라도 퀴보롱의 페미니즘과 연출에 있어선 향후 활활 타오를만한 기대의 불씨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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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428 전주국제영화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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