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흐린 시대의 양심에 대하여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해야만 최종적인 진실을 들을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신조다.” -존 맥스웰 쿳시-
1964년 바르샤바 태생의 그제고르즈 피제미크(Grzegorz Przemyk)는 시인을 꿈꾸고, 곧 성년이 되기를 기다리던 소년이었다. 그가 성인의 문턱에 한 발짝 다가서던 시기는 바로 1983년으로, 피제미크는 성년이 된 자신과 폴란드 공산당의 계엄령을 함께 만나야 했다. 폴란드는 1952년 인민공화국 헌법을 제정하며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그리고 폴란드 사회주의는 진정 인민들이 힘과 권리를 지녔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1962년 소련 노보체르카스크에서 발생한 인민들의 봉기를 무참하게 진압하고 은폐한 소련 정부와 달리, 폴란드에선 1956년 인민들의 봉기를 수긍하며 토지의 부분적인 사적 경영을 허용하거나, 1968년 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하는 등, 인민들은 정부를 향해 자신들의 권리를 거세게 표명하였다. 심지어 인민들은 정권을 실각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1970년 물가 상승으로 인해 그단스크 등지에서 시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이를 불안해한 폴란드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며, 그간 존속되던 진정한 사회주의는 고꾸라진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폴란드 정부는 물가 상승, 경제 위기,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유지했고, 이에 수천 명이 체포되고 91명이 사망하는 등 인민들은 소수의 권력에 헌신하는 사회주의에 의해 쓰러져갔다. 바로 이 무고한 희생자 중 한 명이 그제고르즈 피제미크였다. 그의 어머니가 반동적이라는 이유와 더불어, 폴란드 공산당이 추모를 검열하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기일을 기념했다는 것이 체포의 이유였다. 경찰은 그제고르즈를 붙잡고 구타하였으며, 복부의 급소를 치명적으로 가격하였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경찰이 그를 병원으로 옮겼지만, 소년은 회복되지 못했고 끝끝내 사망한다. 이 같은 사고 경위와 죽음을 폴란드 경찰, 정부는 철저하게 은닉하였다. 하지만 서서히 진실은 드러났고 그의 죽음은 정부의 부당함에 항거하는 시위의 원동력이었으며, 1980년대에 폴란드의 투쟁은 더욱 격렬해져 마침내 1989년 원탁회의로 민주주의를 이룩한다.
이렇게 1980년대 폴란드 민주화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그제고르즈 피제미크를 폴란드의 청년 시네아스트 얀 P. 마투신스키가 <리브 노 트레이스>에서 영상화한다. 1984년 카토비체 태생의 얀 P. 마투신스키는 폴란드의 영화감독이다. 나고 자란 카토비체의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영화 학교에서 연출을 공부한 마투신스키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일삼다가 2016년 <라스트 패밀리>라는 작품으로 장편 픽션 데뷔한다. 폴란드의 화가, 즈지스와프 벡신스키의 기구한 팔자를 영상화하는 그의 '전기 영화'는 신작 <리브 노 트레이스>까지 이어진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일삼던 마투신스키는 리얼리틱한 연출을 선호한다.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된 롱테이크는 대다수가 원쇼트원씬으로 컷이 거의 없다. 흡사 크리스티 푸이유의 <시에라네바다>를 연상케 하는 본 작품은, 객관적으로 현실을 기록하고 실제 시간을 보존하는 다큐멘터리 경력을 반영한다. 이와 동시에 1977년부터 2005년까지 벡신스키 가족의 삶을 플래시 포워드로 포착하며, ‘과거’를 다룬다. 과거를 다루는 마투신스키는 이미 흘러가고 유실되어 제한된 과거의 속성을, 공간 일부가 잘려 나가고 세부가 온당 드러나지 않는 은밀하고도 관음적인 구도로 비춘다. 또 탄탄한 서사가 아니라 파편적이고 듬성듬성한 전개로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과거를 환기한다. 더욱이 즈지스와프의 작품 색채는 매우 염세적이며 비관적인, 데카당스 색채로 유명했다. 그가 즐겨 그렸던 소재가 종말론이나 죽음이었던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인물과 이를 포착하는 고정된 카메라는 즈지스와프의 철학을 구현한다. 이렇게 죽음이 가득하지만 한편 즈지스와프도 유언장을 녹음하는 와중에 허겁지겁 음식을 먹거나, 자살 기도를 하는 그의 아들도 비행기가 추락한 와중에 부랴부랴 탈출하는 등, 죽음에 순응하지 않고 삶을 붙잡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그들의 삶 또한 핸드 헬드로 움직이는, 간헐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 카메라의 운동감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시간성 및 즈지스와프의 예술관과 철학을 반영한 형식으로 전기 영화를 연출하는 마투신스키는 과거를 기록하는 자신의 예술관 또한 탐구한다. 즈지스와프가 사멸하고 멈춰선 대상들을 홈비디오로 클로즈업하고 보존하는 것처럼, 마투신스키 또한 정작 자신의 최후는 온당 기록하지 못한 즈지스와프에게 카메라를 돌린다. 마투신스키는 즈지스와프를 재현하고 포착하며 사멸하는 것이 필연인 세상이기에, 예술로써 반영구적으로 기록하고 붙잡는다는 지론을 길어온다. 이러한 마투신스키의 첫 번째 영화에서는 관념과 현실, 운명과 자유의 첨예한 대립이 나타난다. 현실은 악취가 가득하고, 또 자신을 기준으로 타인은 엉망진창이며, 방문하기보단 방해하고 침입한다. 가족 간에도 그렇고, 예술가에게 의뢰하는 사람도 그렇고, 글을 집필해주는 사람도 그렇고, 경제적으로 격차가 있는 프랑스와 폴란드의 양국 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현실이 자유를 방해하니, 그들의 바람과 이상은 오직 관념으로만 유효하다. 혹 이 운명을 거스른다면 토마스처럼 광인으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도입부에서 메타 현실 속 완전무결한 삶을 언급하면서도 그것은 바라지 않는다는 것처럼, 벡신스키 가족은 불완전함을 현실에서 극복하길 원한다. 그럼에도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은 언제나 닥쳐오고, 나의 기대와 계측에서 어긋나는 우발성이 즈지스와프의 목숨을 2005년에 앗아갔지만 말이다. 이러한 죽음과 반항의 일대기, 또 국가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운명에 반하는 현실의 전기 영화가 <리브 노 트레이스>에서 이어진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이전 작품과 <리브 노 트레이스>의 눈에 띄는 차이는 바로 매체다. 본 작품은 16mm 필름으로 촬영되었다. 그래서 자글거리는 노이즈, 때때로 불안정한 그레인이 눈에 쉽게 띈다. 또 디지털에 비한다면 거칠고 흐릿하여, 생생하고 선명한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본 16mm 필름은 영화가 포착하는 1980년대의 폴란드와 매우 잘 조응한다. 개인이 자유를 추구하기엔 곳곳에 거친 장애물과 요철이 있었던 시대를 시각적으로 느끼라는 듯이.
또 그제고르즈 피제미크의 진실과 외의 무수한 진실도 은닉되고 거짓으로 대체되는 시대의 흐릿함을 가시화한다. 영화는 160분이라는 비교적 긴 러닝타임 속에서 연출이 줄곧 변화하여 필름 외의 일정함은 없다. 그래서 형식을 각각 나눠서 살펴봐야 하는데, 일단 초반부의 연출은 전작 <라스트 패밀리>와 유사한 기조를 이어간다. ‘롱테이크’를 활용하여 시간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현실을 생생하게 감상자에게 전달한다. 이렇게 세태를 바라보는 롱테이크, 곧 카메라는 흡사 현실에 참여하는 인물의 것인 듯 ‘핸드 헬드’로 마구 흔들린다. 그리고 고정된 카메라에 의한 평평한 구도로 포착되었다가, 핸드 헬드와 결합한 달리 인으로 깊숙이 수직적으로 파고들어간다. 이는 당대 폴란드 정부의 폭거를 연출로써 반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정치권력은 본인들이 선전한 프로파간다만을 편평하게 보라고 요구하고, 이에 반해 깊게 파고 들어가는 행위나 의심은 불허했다. 이에 반해 영화 초반부 마투신스키의 깊숙하게 파고들어가는 카메라 워킹으로 포착한 것은 본 권력에서 자유로운 개인들, 독재를 의심하는 운동가들이다. 그리고 폴란드의 선배 감독들, 키에슬로프스키나 아그네츠카 홀란드,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 등이 필터를 즐겨 사용하는 것처럼, 마투신스키도 영화의 전체적인 명암, 색조를 인위적으로 건드린다. 그제고르즈와 예르지의 평온한 일상이 펼쳐지는 집이나 광장 등은 비교적 따스한 색감을 조성한다. 하지만 그제고르즈가 당국의 폭력으로 사망하자, 영화의 톤은 차갑고 어두워진다. 또 청년들과 행인들, 특히 연인이 손을 잡고 거리를 누비는 탁 트인 광장, 거리 등이 평평한 구도로 포착된다. 탁 트여서 볼 수 있다는 듯이, 하지만 마투신스키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펼쳐져서 전시된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그제고르즈 사망 사건의 진실을 품고 있는 장소로 카메라를 깊숙하게 들이민다.
이러한 공간에서 인물들을 포착하는 연출도 차이가 있다. 이들이 광장이나 거리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때, 영화는 풀숏이나 롱숏을 즐겨 사용한다. 화창한 날씨와 자유로이 야외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드넓게,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널따란 여지를 한데 어울러 포착한다. 하지만 두 청년의 체포, 그제고르즈의 사망 이후 영화의 연출은 좁아진다. 일례로 두 청년을 진압하는 장면에서 마투신스키는 예르지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한다. 당국이 좁혀오는 공간에서 달아날 수 없다는 듯이, 그가 보고 듣고자 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다는 듯이, ‘여백’을 말소한다. 이후에도 그제고르즈의 죽음을 마주한 예르지의 착잡한 표정, 이에 책임이 있는 군인의 발걸음을 ‘줌인’으로 서서히 좁혀가며 포착한다. 익스트림 클로즈업, 클로즈업, 줌인은 공간을 서서히 조여 오며 제한하는 형식, 개인이 공간을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비자유를 가리키는 형식이다. 이렇게 공간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 비자유인 이유는, 본 작품에서 걸음이 자유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집을 나선 청년들은 자유로이 거리, 버스, 광장을 활보한다. 자유롭게 뛰고, 또 시험 성적이 좋아서 들뜬 그제고르즈는 방방 뛰면서 예르지에게 장난을 건다. 그들의 발과 다리는 그들만의 것, 그러나 이들의 발과 다리를 거리에 깔려 있는 군인들이 감시한다. 심지어 그제고르즈의 행동이 난폭하다며 그를 포박하여 경찰서로 이송한다. 그제고르즈를 잔혹하게 구타하여 혼자 일어서지 못하고, 걷지 못하게 만든다. 경찰차에 태워졌던 그제고르즈는 의료인들의 어깨에 기대어 질질 끌려나오고, 경찰서에서 구급차로 실려간다. 그렇게 자신이 원치 않았던 '사후'로 옮겨지고, 이후 예르지의 삶도 마찬가지다. 진실을 알고 있는 예르지에게 당국이 누명을 씌움에, 그는 살기 위해서 바바라가 소개해준 은신처로 가야만 한다, 반강제로. 또 협박당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가 가야할 길을 꾸미고 강요한다. 예르지는 자유롭게 움직이고자 하지만, 그를 감시하는 스파이들이 도처에 깔려 있어 행동은 부자연스러워지고, 그들의 눈을 의식하며 방향과 공간을 선택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으로서 깨어있어야 한다. 영화의 도입부, 잠들어있는 친구에게 베개를 던져서 깨우고 일으킨다. 널브러져 있던 육체는 비로소 말하고 걷는다, 스스로. 잠들어 있으면 걸을 수 없다, 그리고 말할 수 없다. ‘발화’ 또한 본 작품에서 자유의 요건이다. 본 작품의 초반은 전작 <라스트 패밀리>처럼 매우 부산스럽다. 바바라의 집에서 모임이 개최되었는데, 손님들 각자가 자유분방하게 떠드느라 주제는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다양하며, 이에 따라 정신사납고 산만하다. 그렇게 누구나 다 자유롭게 말하고 떠들 수 있는 것이 자유다. 본 작품에서 고발하는 것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발설할 수 없게 만드는 당국의 폭압이다. 예르지는 친구와 바바라를 위해 자유롭게 진실을 증언하고 싶다. 하지만 당국이 부모를 협박하고 회유하여 그의 입을 틀어막는다. 또 능동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국의 요구와 질문에 따라서, 유도신문에 걸려들어서 말한다. 이에 따라 그를 질문하는 권위자들의 프레임에 가둔다. 그리고 실재의 진술이 아니라 신분증, 서류, 이와 무관한 전문가나 권위자들의 진술이 대상을 대체한다. 그의 말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하지만 영화의 말미, 예르지는 검사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똑똑히 바라본 바를 법정에서 자유롭고도 우직하게 진술한다. 이렇게 부당한 질서에 항거하고, 그들을 쏘아보는 시선을 무시함에 이들은 무례하고 무질서한 광인처럼 보인다. <라스트 패밀리>에서도 운명을, 또 기존 질서를 거스르는 토마스가 광인처럼 보이지 않았었나. 본 작품에서도 침묵과 은닉을 지시하는 당국의 손아귀에서 방방 뛰며 제 자신을 드러내는 그제고르즈, 거짓이 보편이 된 세상에서 홀로 진실을 떠벌리며 다니는 예르지는 광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질서와 보편이 부당하다면 광인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대다수 사람들은 은닉하기에 바쁘다. 국민들을 지배하는 정치권력의 전략이 ‘은닉’이다. 본 작품의 제목은 구타 흔적이 안 남게 그제고르즈를 때리라고 지시하는 군인들의 말에서 비롯한다. 그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폭력을 발전시킨다.
또 그들과 협력하는 병원은 그제고르즈에게 가해진 폭행을 '밝혀'낼 기술이 없다. 그저 알코올중독자, 정신이상자 수준으로 진단한다. 의사는 당국이 말한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입과 일반적인 사람도 판단할 수 있는 평범한 눈을 가진다. 당국은 이후에도 진실을 압살한다. 예르지에게 누명을 씌우고, 그가 사라질 것을 주문하며, 가벼운 음주를 심각한 음주로 규정하는 등 말이다. 폴란드 전역에는 당국의 영향권 아래 있는 신문사의 가짜뉴스가 그제고르즈의 진실을 대체한다. 하지만 폴란드에 거주하고 있는 외신 BBC가 사건의 진상을 보도한다. 여기서 영화는 연출에 변화를 준다. 폴란드 정치권력이 줌인과 클로즈업으로 좁혀가며 인민들을 통제한다면, BBC는 넓힌다. 기자의 보도가 미국으로 전파되어 세계 각국으로 퍼지는 장면에서 영화는 리드미컬한 카메라 워킹이 대두된다. 비교적 정적이었고, 멈춰 있기 일쑤였던 카메라와 대비된다. 또 이는 매우 안정적이고 매끈하다. 진실을 천명하는 과정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듯이, 더욱이 미국의 본사로 보도가 옮겨지는 과정에선 ‘줌아웃’을 사용한다. 도시의 정경이 서서히 확장되어 모든 세부가 드러난다. 자유와 진실이란 제한하지 않음, 밝혀냄, 넓힘, 개방이라는 것을 형식으로 가시화한다. 그래서 연출 변주에 하나 더 주목해야 한다. 바로 원쇼트원씬에 가까웠던 롱테이크가, 무수히 분절된 숏으로 이뤄진 시퀀스로 전환되는 과정을 말이다. 그것 또한 진실과 거짓의 관계에 부합한다. 그제고르즈의 죽음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당국에게 걸림돌은 오직 예르지 하나다. 그래서 당국은 앞서 언급했듯 예르지에게 누명을 씌운다. 그간 롱테이크로 진실이 잘리거나 왜곡되지 않는 예르지를 보존했다면, 이제 무수한 컷이 동반되어 여러 각도에서 포착되는 예르지는 당국에 의해 조작된다. 또 그제고르즈 사건에서 예르지는 증인으로서만 접근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예르지가 전과가 있어 소년원에 갔다거나, 바바라와 염문관계라는 등, 증인으로서 예르지와 하등 관련 없는 구설수를 유포한다. 증인 예르지로서 신빙성을 낮추기, 또 증인 예르지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만들어 사건의 집중도를 흐트러트린다.
이에 따라 더는 예르지가 하나의 숏에만 담기지 않는다. 무수한 관점과 각도, 진실과 거짓의 교차에 따라 예르지는 잘리고 이어 붙여진다. 또 당국은 그제고르즈 사건에 대한 책임공방이 오간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의 진실이 아니라 부서간의 책임소재, 그리고 권력다툼이다. 이에 따라 그제고르즈의 죽음은 어떤 각도에서는 은닉되고, 어떤 각도에서는 치열하게 설전하며 도구화되는데, 이 또한 마찬가지로 무수한 숏이 이어지는 부산스러운 시퀀스로 보여준다. 무수한 얼굴이 담겨진 시퀀스에서 얼굴은 진실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감시와 추적, 수색이 만들어낸 내가 원치 않은 얼굴, 식구들이 협박당하자 거짓으로 회유되는 얼굴, 이렇게 자신에 관한 부정적인 말들이 퍼져나가자 당혹스러워하는 얼굴 등 진실한 얼굴을 혼란스럽게 뒤흔든다. 개인의 얼굴에 대한 진실조차도 혼란스럽게 만드는 당국의 침입은 아주 ‘갑자기’, 예측 불허하게 발생한다. 그제고르즈 체포와 사망은 영화의 길고 긴 러닝타임에서 아주 조금 차지하고, 또 영화 시작과 동시에 사전 예고 없이 발생했으니 말이다. 본 사건에서 법을 따르지 않은 것은 군인이다. 그제고르즈가 떳떳하게 말하듯 신분증을 밝혀야할 의무도 없고, 영장 없이 체포하는 것도 법에 저촉된다. 법을 충동적으로 위반하여 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정치권력, 이에 따라 영화의 전개는 우발적이다. 그들에게 법은 마땅히 지켜야할 것이 아니라, 지배를 위한 수단이다. 그들은 법위에 군림하고, 인민들을 협박할 때만 선별된 법을 따른다. 불법으로 도청하고 추적한 그들은, 예르지 가족의 생업이 불법이라며 협박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의 경쾌함, 긍정적인 소란스러움, 활발함, 질서를 지키는 와중에 펼쳐지는 자유, 하지만 질서를 만든 이들이 질서를 파기하고 영화를 무겁고도 조심스럽게 위축시킨다. 초반에는 국가가 법을 위반하고 국민을 폭행하며 이를 은폐하는 것이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었지만, 영화가 전개되며 끔찍한 사건이 보편이 된다. 거짓말, 왜곡, 협박이 일반적이고, 이에 따라 개인들의 부자연스럽고 눈치 보는 생활도 보편이 된다.
이러한 보편성을 앞서 언급한 일반적인 영화 문법으로 버무리는데,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마땅히 당연한 것, 익숙한 것을 말이다. 본 작품 속 인류는 내가 아닌 것이 익숙하다. 나 자신보다 검사로서 법원에 우선하고, 개인의 자유보다 징집, 정신병원 수감 등이 선행되는, 개인의 박탈이 보편이 되는 부조리한 세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나를 되찾아야만 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에게 양심이란 의심하는 능력,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아는 능력이다. 양심을 위해서는 사유해야 하는데, 사유란 '내 안의 나'와 대화하는 활동이다. 그렇게 양심은 '나'로 사는 것, 반면 양심을 외면하고 사유도 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아닌 자'의 상태다. 영화에선 다수가 아무도 아닌 자다. 내가 직접 보고 듣고 확인한 것들이 국가의 협박에 의해서, 또 무의미한 육체만의 생존을 위해 묵살된다. 하지만 마투신스키는 위험천만하더라도 양심을 끝끝내 손에서 놓지 않는다. 당국은 그제고르즈를 이송했던 의료인에게 누명을 씌운다. 의료인이 하지 않은 행동이 한 것으로 여겨진다. 카메라는 이를 '단편적'으로 촬영하여 증거로 채택한다. 하지만 이는 그가 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의료인은 거짓된 자신을 살해한다. 죽음으로 나 자신에게 떳떳하고, 더 이상 거짓된 나로 살지 않기 위해서. 예르지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모두 부정되어 거짓인양 치부된다. 분명 보고 들었는데, 보고 들은 나는 내가 아니다. 그렇게 예르지 자신을 부정하는 아버지에게서 뛰쳐나간다. 양심을 유지한 그는 의연하게 기개를 펼치며 재판에 선다. 하지만 다수가 양심을 잃은 세상,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제고르즈의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규명되지 않았다. 영화는 국가의 탄압이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광장’을 누비는 군대,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터’ 바로 옆에서 불법 수색하는 감시요원, 원하는 재판 결과를 얻은 장군이 ‘도로’를 활보하는 장면으로 경고한다. 사건 자체가 갑작스럽게 급습한 것처럼, 의심하지 않고 양심을 잃는다면 보편적인 부조리는 언제 어디서든 나에게 엄습해 올 수 있나니.
이렇게 마투신스키는 그제고르즈 피제미크 사건을 리얼리틱한 연출과 보편적인 영상 문법을 뒤섞어 영화화한다. 더욱이 그는 관찰자의 위치에서 사건을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영화로써 직접 ‘수행’까지 시도한다. 마투신스키의 깊숙하게 파고들어가는 연출은,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거짓 증거를 유포하는 당시 폴란드의 프로파간다를 반성하니 말이다. 또 형식의 다양한 대비를 통해 자유와 비자유, 진실과 거짓의 속성을 부각한다. 다만 연출이 과하게 중구난방이고, 일반적인 문법에 순응하는 중반부터는 <라스트 패밀리>에서 보여준 마투신스키의 특유성이 사라진다. 더욱이 그제고르즈 사건을 일부 각색하나, 오직 당대의 재현에만 초점을 맞췄기에 각색이 무의미해졌다. 각색으로 첨가될 수 있는 마투신스키의 개인적인 시각, 통찰, 사유는 어디론가 실종되었다. 그래서 초반부의 강렬함에 비한다면, 갈수록 지겨워지고 늘어지는 점이 영화의 진한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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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725 집에서 (MUBI 스트리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