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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l 24. 2023

후카다 코지, <러브 라이프>

우리가 보는 것은 상상일까, 진실일까?

후카다 코지(Fukada Koji), <러브 라이프>(Love Life) 

- 우리가 보는 것은 상상일까, 진실일까?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234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향해 가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무엇이 우리를 맞이할 것인가?” -에른스트 블로흐-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추상적인 사랑과 종교적 사랑을 논한다. 먼저 ‘추상적인 사랑’은 타인을 해할지 모른다. 오직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사랑을 위해서 현실 속 연인을 변형하고 폭력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사랑은 미리 마음속에 특정한 모습을 그려놓고, 그 상이 외부 대상과 합치될 때 만족해한다. 우리의 욕망에 상응하는 추상적 사랑은 이 세계 너머의 것이다. ‘종교적 사랑’도 추상적인 사랑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쉽게 존재하지 않는 유형이지만, 지양해야 하는 추상적인 사랑과 달리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지상의 덕목이다. 추상적 사랑이 상대방을 추잡스럽게 곡해하며 저 하늘에서 심해로 추락한다면, 종교적 사랑은 아래에서 위로 점진해간다. 종교적 사랑 중 대표적인 기독교적 사랑(=아가페)은 억압받고 보이지 않으며, 천하고 미약한 무엇을 이타적으로 보듬는다.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게 만드는 것, 그럼으로써 지상에서 점차 천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종교적 사랑이다. 여기, 후카다 코지의 신작 <러브 라이프>에서도 두 유형의 사랑이 등장한다. 사랑이라는 목적으로 묶인 화목한 가족, 이와 동시에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가 엄습해오는 이야기… 


1980년 도쿄 태생의 후카다 코지는 일본의 영화감독이다. 코지는 자국의 중견감독 구로사와 기요시의 제자로서, 스승과 유사한 스릴러 장르와 초자연적인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을 선보인다. 전자의 경향으론 <하모니움>과 <옆얼굴>이 있고, 후자의 맥락으론 <바다를 달린다>를 꼽을 수 있다. 단순히 장르성 뿐만이 아니라 스승의 정신, 사유 또한 작품 속에 깊이 반영된다. 기요시는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타자의 '방문'을 고찰하였고, <크리피>나 <스파이의 아내>에서 표피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간 시야의 얄팍함을 꼬집곤 하였는데, 코지 또한 미지의 존재의 비밀을 꿰뚫지 못하는 시야의 한계를 탐구한다. 

코지의 대표작 <하모니움>에선 친절한 얼굴 이면의 섬뜩한 악의를 탐구한다. 친절한 얼굴로 방문한 야사카는 가족들에게 호감을 살만한 행동을 잔뜩 늘여놓고, 식구들은 자신을 위해주는 ‘타자’ 야사카를 ‘동일시’하여 ‘무해한 나 자신’인양 오해한다. <옆얼굴>에선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여러 얼굴, 타인이 보지 못하는 다른 쪽 측면을 탐구한다. 주인공 이치코는 '우치다'라는 가명으로 타인 앞에 서고, 사람들은 그녀의 본명을 간파하지 못한다. 인간의 시야는 가면이나 가명 너머의 진의로 파고들어가기엔 뭉툭하거니와, 객관적이지 못하고 주관성을 투영하기에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이렇게 동공이 착각한 친밀함은 항상 섬뜩함, 경악으로 변질된다. 대상을 오판하고, 상대방의 외피와 내면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지의 작품에서는 항상 범죄가 만연하다. 그 이유는 복수가 꼬리에 꼬리를 물기 때문인데, 심지어 복수 대상을 가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주변으로 삼기에 참작될 수 없는 범죄가 범람한다. <하모니움>에서 야사카는 토시오가 자신에게 진 부채를 되갚아주기 위해서,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아키에나 호타루를 표적으로 삼는다. <옆얼굴>에서도 마찬가지로 모토코의 애정 결핍은 제 어머니가 아니라 이치코에게, 이치코가 유년시절 타츠오의 남근을 바라보며 성적 수치심을 준 악몽은 사키에게로 향한다. 복수 외에도 <하모니움>에서 아키에의 남편 호타루의 자리를 야사카가 대체하고, <옆얼굴>에서도 스스로 맡아야 할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긴다. 복수와 무책임함은 서로 얽혀있어,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몫을 타인이 짊어짐에 ‘희생의 악순환’이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옆얼굴>에서 폭력 대신 경적을 울리고, 사과하는 등의 방식으로, 즉 스스로가 책임을 짊어지고 폭력을 연쇄하지 않으며 악순환을 끊어낸다. 명백한 타자를 동일시함에 발생하는 폭력, 그래서 애초에 우리는 친밀함을 내려놓고 타자로서 대상을 존중해야 한다. 타자를 환대하는 <바다를 달린다>의 경우 '다름'에 대한 난관이 분명 존재하지만, 오히려 똑같다고 오해하지 않고 다름을 이해하려고 노력함에 진실은 더욱 풍족해진다. 코지의 신작 <러브 라이프>에서도 가짜 얼굴과 희생에 관한 탐구가 이어진다. 친밀한 가족은 사실 비밀이 많았고 진심은 달랐으며, 동일시한 타자는 일순간 나의 기대에서 멀어지고, 어떤 타자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순간 방문해오고…     


코지의 신작에서도 '내가 보고 싶은 얼굴'과 이를 배반하는 '입체적이고 복잡한 민낯', 곧 두 얼굴이 교차한다. 도입부, 파티 준비가 한창이다. 아직까진 타에코가 계획한 것이 탄탄대로 실현되고 있다. 그녀는 최연소 오셀로 챔피언인 아들, 케이타의 경기 상대도 되어줌과 동시에, 공간 또한 완벽하게 치장한다. 코지는 이 현장을 카메라를 고정시켜 회화 내지는 사진처럼 포착한다. 그녀가 예상한 틀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듯이. 그런데 서서히 카메라가 움직인다. 가까이서 타에코와 케이타를 포착하던 카메라가 베란다로 멀어지면서, 파티를 도와주기로 한 외부의 동료들을 촬영한다. 파티의 의도가 '결혼을 반대하는 시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함'이니 만큼, 결혼식의 증인인 동료들은 파티의 목적에 따라 초대되었다. 그런데 동료들의 몸과 얼굴에 타에코의 계획이 매끄럽게 스며들지 않는다. 더욱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또 부부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지로의 옛 연인 야마자키가 나타난다. 타에코의 계획대로 선별한 순수한 얼굴에, 부부를 축복하고 싶지 않은 훼방이 침투함으로써 불순해진다. 이에 그녀가 생각한 틀에서 벗어난다는 듯 카메라는 이동한다. 또 미야자키는 결국 계획에 참여하지 않고 장소를 이탈했다. 이로써 계획은 프레임 밖으로 멀어지고, 동료들은 겨우 거리의 수녀들에게 도움을 부탁하여 위기를 모면한다. 

타에코의 계획이 탄탄대로 흘러가거나, 혹 조금 엇나가더라도 큰 틀에서 별 지장이 없다면 카메라 워킹은 안정적이었다. 계획에서 이탈한다고 한들, 여전히 타에코는 지로의 넒은 등에 기댈 수 있을 정도로, 그들 결혼은 기대대로 축복받을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타에코가 일하는 무료 급식소에 도착하자 카메라는 '핸드 헬드'로 흔들린다. 무료급식소에서 타에코와 금주를 약속했던 토요다가 약속을 어기고 술을 마셔 소란을 일으켰다. 기대를 전면 벗어난 얼굴과 상황, 그것이 핸드 헬드의 감각과 유사한 '지진'과 같다. 이후 영화에서 실제로 지진이 발생하는데, 케이타와의 추억을 보존한 집을 뒤흔들며 타에코의 의중을 와르르 무너뜨린다.

파티에서도 상징적인 지진이 발생한다. 타에코, 지로, 케이타가 함께 사는 신혼집 건너편에 시부모님이 거주한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지만, 자신의 시점에서 상대는 ‘익스트림 롱숏’으로 쬐끄맣게 포착되기 때문에 먼 거리인 것도 사실이다. 그 익스트림 롱숏에는 자신의 계획이나 의도, 기대 등을 그려볼만한 '여백'이 많고,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 인간은 추상적이어서 상상력을 자극한다. 심지어 목청을 높여 고함을 쳐야지만 겨우 대화도 가능하기에 오해를 사기 쉽다. 시어머니는 익스트림 롱숏으로 마주한 타에코가 시아버지와 관계를 개선하길 바라는 눈치로, 집에 없는 남편이 신혼집에 갔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멀리서 막연히 그려보기만 한 시공간을 가까이서 직접 맞닥뜨린다.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된 상대의 얼굴을 내 마음대로 그려볼 때 유지되던 평온한 질서는, 미디엄숏이나 클로즈업으로 가까이서 실체를 확인하니 거짓이라는 게 탄로 나며, 이때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는 지진이 발생한다. 세 사람의 기대와 달리, 파티가 시작되니 성화를 내는 시아버지처럼 말이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신지와 타에코는 지로의 눈에 항상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된다. 그들의 진의를 모르는 지로는 오해하지만, 타에코의 말처럼 가까이서 보니 그들은 "아무것도 안 했다." 

인간은 선과 악이 혼재된 실제와 달리, 항상 제게 좋은 것만 계획하거나, 믿고 싶은 것만 본다. 시어머니가 죽음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처럼, 케이타 사후 타에코가 아들의 환각을 보는 것처럼, 자기가 보고 싶거나 감당할 수 있는 이미지만을 ‘믿는다.’ 개인은 세상을 더 '추상적으로 사랑'한다. 그러나 긍정적으로만 계산하면 참혹한 결과를 대비하지 못한다. 시어머니와 타에코는 서로가 금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서로는 달랐다. 지로와 타에코는 케이타를 기쁘게 하려고 '비행기 장난감'을 선물했지만, 정작 이를 갖고 놀던 케이타가 욕실에서 미끄러져 사망했다. 케이타는 타에코가 물을 받아놓은 욕조로 넘어져서 바로 익사했는데, 그녀는 물이 찬 욕조가 이런 결과를 낳을지 감히 짐작조차 못했다. 외에도 타에코는 베란다에 앉아 용변을 보는 비둘기를 쫓아내기 위해서 CD를 매달아두었다. 정작 대롱대롱 설치된 CD는 비둘기를 ‘내쫓기’는커녕 박신지와 함께 있는 타에코를 밝히며 지로를 의도치 않게 ‘불러들인다.’ 신지 또한 마찬가지로 타에코를 일본에 내버려두고, 한국으로 돌아갈 차비를 벌고자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라고 거짓말을 꾸몄다. 그러나 이는 그녀가 그의 한국행에 동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등장인물들은 불완전하고 편향되어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데, 코지는 이를 다양한 '언어'를 상징으로 삼아 보여준다. 영화에선 일어와 수어가 교차 사용되고, 영화 말미 한국어를 조금 구사한다. 이 중 수어, 일어, 한국어가 다 가능한 쪽은 타에코와 신지요, 지로는 일어만 구사한다. 그래서 타에코, 케이타, 신지가 수어로 소통하는 내용을 지로는 모른다. 타에코는 신지가 지원금을 수령하게끔 도와주고 있는데, 이들이 대화하는 내용이 과연 사실인지 증명하기엔 지로의 언어 능력이 미치지 않는다. 수어를 향한 그의 의심과 착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분명 지로는 자신의 욕망이나 망상을 거두고, 객관적인 타에코와 신지에게 가까워지려 했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생생한 서로의 민낯을 접하는 '줌인'을 사용하였다. 객관적인 실재에 접근한다는 듯이. 그러나 아무리 다가가도 그의 시각으론 수어를 해석할 수 없고, 대신 질투심을 자극하는 주관적인 풍경만 매개될 뿐이다. 객관에 다가가던 줌인은 이내 멈춰서 주관으로 뒤바뀐다. 이는 영화에서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베란다에 놓인 카메라가 유리창 너머의 실내를 포착하는 촬영과 같다. 유리창에 비치는 불빛, 풍경 등이 실내에 겹쳐져서 보이는 롱숏, 그것이 흡사 주관과 객관이 디졸브된 인물들의 시야와 같다. 실내를 객관적으로 조망해야 하지만, 내 동공에 묻어있는 주관이 자꾸만 함께 보인다. 

더욱이 하나의 객관이라도 서로가 그것을 바라보는 '각도'가 다르다. 코지가 전작 <옆얼굴>에서 각도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얼굴들을 고찰한 것처럼, 본 작품에서도 똑같은 시공간에 참여하고 있더라도 개개인이 어느 각도, 어떤 측면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알게 되는 것이 달라짐을 환기한다. 영화 초반, 지로는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만들고 있고, 케이타와 타에코는 거실에서 오셀로를 두고 있다. 지로의 시선은 거실에 미치지 않는 반면, 타에코와 케이타의 시선은 부엌에 미친다. 그리고 케이타는 왜 지로와 오셀로 경기를 하지 않는지 수어로 타에코에게 알려준다. 지로의 시선에서 알 수 없는 비밀이 은밀하게 모자에게만 공유된다. 어찌저찌 타에코와 시아버지가 화해한 이후, 노래방 기계로 즐거운 삶을 누린다. 그들은 삶 중에서도 탄생, 곧 ‘생일’만 뚫어져라 집중한다. 그런데 카메라는 식구들의 시야와 달리, 노래방 기계가 위치한 안방-거실 사이를 포착하다가 이후 욕실을 촬영한다. 명랑한 시청각만을 마주하는 식구들이 보지 못한 각도에서 케이타가 사망한다. 삶만 바라봤다. 그러나 생일만 바라보는 각도에서 볼 수 없는 '사각지대'에 죽음이 있었다. 

타에코는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청각장애인의 민원을 받기 위해서 수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달려간다. 타에코는 신지와 '영원히 이별'하자고 앞선 시퀀스에서 선언하였기에, 그가 올 거라곤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지진, 곧 핸드 헬드가 인다. 이윽고 둘은 재회했고, 이들의 수어는 전 부부가 아니라 '직원과 민원인'의 관계, '생활 지원'을 위한 면담으로 활용된다. 감상자는 타에코와 신지가 어떻게 재회했는지 알 수 있는, 또 수어 내용이 번역되는 전지적인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둘의 관계를 관찰한다. 그런데 감상자와 달리 지로는 이들이 어쩌다 복지국에서 재회했는지, 시발점을 모른다. 대뜸 둘이서 수어로 대화하는 장면만 그의 동공에 맺힌다. 대체 왜 저 둘은 만나서 대화하고 있는가, 케이타 때문인가, 아니면 둘의 관계가 개선될 여지가 있기 때문인가? 지로의 각도에서 보지 못한 타에코와 신지의 사각지대엔 의심과 착각이 가득 불어난다. 케이타의 장례식에 사용된 '영정 영상'은 세 사람이 처음으로 '가족'이 된 날이라 말할 수 있다. 영상의 ‘좁다란 화면비’, 곧 지로의 각도에서는 다가와서 가족이 될 타에코가 보인다. 그런데 타에코의 시야에 상응하는 ‘널따란 화면비’엔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신지가 눈에 띈다. 그녀는 신지를 외면하고 지로에게 갔다. 그래서 둘은 그 순간과 신지를 다르게 해석한다. 지로는 신지가 모자를 내팽개친 것만 알고 있기에 영상 속에서 비로소 행복해졌다고 느낀 반면, 타에코는 자신이 신지를 버렸다고 원통해하기에 죄책감이 영 찝찝하다.      


이렇게 각자가 제한된 구도에 갇혀있기에 앎은 협소해지는데, 이 원인 중 하나는 ‘고착화된 통념’에서 비롯한다. 후반부의 한국인 여성 운전자가, 신지와 타에코를 막연하게 부부 및 연인으로 단정하여, 둘의 다툼을 '사랑싸움'으로 오해한 것처럼 말이다. 케이타가 사망하기 전까지 식구들은 아이에게 묶여 있었다. 아이에 의해서 볼 수 있는 각도, 보여야 하는 모습이 제한됐다. 케이타가 지로를 '아빠'로 보이게 만듦에, 감상자도 그가 '친부'가 아닐 것이라고 감히 의심조차 못했다. 그런데 케이타가 사망하자, 아들이자 손자에 의한 각도 제한이 완화된다. 호적상으로는 케이타가 지로에게 입양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케이타 생전에 시부는 까탈스럽고 무례했다. 하지만 케이타 사후 타에코가 몰랐던 친절함이 드러난다. 반면 케이타 생전에 시모는 친절했다. 시부의 무례한 언사를 방어해줬다. 그런데 중간 중간에도 케이타 대신 '친손자'를 낳아달라고 요구하기도 하였고, 케이타의 주검을 집에 못들이도록 저지했다. 즉 시부모님의 다른 얼굴이 케이타 사후에 드러난다. 

케이타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부모는 살던 집을 팔고 이사한다. 타에코는 집에 남았고, 지로는 그들을 도와주러 갔다. 이렇듯 특정 관계에서 해방되자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다채로운 각도를 선택한다. 이후 타에코의 집에 지진이 발생한다. 지진 당시 부부는 서로를 다음과 같이 알았다. 지로에게 타에코는 '지진에 무사한 사람', 타에코에게 지로는 '여전히 성심성의껏 걱정해주고 보살펴주는 사람', 이들이 아는 서로는 ‘평소와 같다.’ 그런데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창구 내지는 구도란 오직 '청각'에 그친다. 영화는 타에코나 지로만 포착하던 각도를 넓혀서, 타에코는 신지를 만나러 가고, 지로는 야마자키와 재회한 장면을 보여준다. 신지와 타에코는 화장실에서 일반적인 구도와 다른 '거울' 시점으로 대화한다. 거기서 타에코는 지금껏 밀어내던 케이타의 죽음을 직면한다. 미야자키는 지로가 눈을 마주하고 대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즉 특정 관계에서 해방되어 여러 각도를 허용하자 비로소 객관적인 대상의 진실, 한 얼굴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 보인다. 

'지진과 이사'는 분명 서로에게 다른 얼굴을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내 각도에선 그것이 보이지 않거니와, 여전히 보고 싶은 대로 상대를 본다. 야마자키는 지로와의 이별 이후를 덤덤하게 고백하는 와중, 그는 그녀에게 입맞춤하며 ‘보고 싶은 그녀’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추상적인 사랑은 ‘현실 유리’다. 현실을 모르고 오직 나와 관련한 욕망만 안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지로, 눈은 흔히 '영혼의 창'으로 일컬어진다. 눈을 마주치며 우리는 상대방의 피상 너머 내면을 간접적으로나마 읽어본다. 그런데 눈을 마주치지 않기에, 상대의 영혼을 접할 수 없는 지로는 대상의 내면을 알 수 없으리. 또 영화의 제목의 기원이 된, 아키코 야노가 부른 동명의 곡의 가사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멀리 있어도 사랑하고 싶다"라고, 영화에서도 내내 현실과 동떨어진 허구의 대상, 관념적인 계획을 사랑하고,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 땐 균열이 일지 않았었나. 추상적인 사랑은 멀리서 본 아스라한 희극을 사랑하는 것이다. 가까운 현실의 비극을 거부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진실에 다가서고자 억지로라도 협소한 구도를 넓혀서 봐야할 것이다. 영화 초반부의 롱숏이 안방과 거실을 한 번에 포착하는 것처럼, 여러 각도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시선을 끊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케이타의 장례식에서 아이들과 신지는 뻔한 관습을 따르지 않으며 세계를 바라보는 각도를 넓힌다. 장례식에 방문한 어른들은 마땅히 상복을 갖추고 예를 표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죽음도, 장례식도 잘 모른다. 부모가 상복은 입혀줬지만, 아이들이 표현하는 감정은 장례식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후 아이들처럼 감정에 솔직한 존재, 또 상복마저 입지 않은 신지가 등장한다. 그는 아이를 잃은 비통함에 분개하여 타에코의 따귀를 때리고, 제 뺨도 연신 강타한다. 기대에 없는 조문객의 모습이지만, 거기서 ‘자식의 죽음을 마주한 부모의 원통한 진실’이 드러난다. 내내 굳은 표정으로 조문객들을 맞이하던 타에코는 신지와 만난 이후 처절한 눈물을 터트린다. 장례식 이후 직장에 복귀한 타에코도 마찬가지다. 동료는 예상한 유족의 상이 있고, 이에 따라 타에코를 배려하기 위해서 일을 대신 하려고 한다. 그런데 타에코는 유족에게 기대하는 이미지에 갇히지 아니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충실히 책임지려 한다. 그녀에게 유족을 배려하겠답시고 일을 빼앗는 것은 그녀의 진실을 되레 존중하지 않는 일이다. 타에코를 향한 시선을 넓혀야 한다.

타에코는 현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케이타를 잃은 욕조에서 목욕을 하려고 하면 구토가 일어서 머물기 어려웠다. 그래서 시부모 댁의 욕실을 이용했다. 그녀는 케이타의 마지막 오셀로 경기와 욕조를 고스란히 보존해놓는다. 그렇게 과거에 머물고 있기에 현재에 참여하기가 더더욱 어렵다. 그러나 신지의 도움으로 욕조에서 버텨본다. 케이타를 앗아간 욕조가 아닌 객관적인 현재의 욕조로 각도를 달리하며 비로소 삶을 회복해간다. 신지가 키우던 고양이가 있다. 그런데 베란다에서 뛰어 내려 밖으로 탈출했다. 이후 신지가 아닌 지로의 손에 붙잡혔고, 신지는 고양이가 지로를 더 좋아한다며 양육을 부탁한다. ‘신지의 고양이’라는 기대나 기존의 앎에 얽매여있으면 또 다시 고양이는 탈출할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높은 층에서 뛰어내려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 고양이가 부릴 수 있는 변덕을 여러 갈래로 긍정할 때 삶이 이어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지는 한국에 가기 위해서 타에코에게 거짓말했다. 거짓말이긴 하지만 지로의 해석은 옳았다. 혼자서 떠나기로 결정한 그를 붙잡거나 연민의 대상으로 삼으면 안 된다고. 떠나는 사유는 거짓일지언정, 혼자 떠날 수 있는 신지는 진실이다. 그런데 타에코는 자신의 부채를 신지의 진실에 덕지덕지 덧붙여서, 마치 구원해야 할 누더기로 그를 전락시켰다. 그렇게 타에코 마음대로 오판하여 한국에 동행했더니, 정작 신지 아들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고, 신지에게 타에코는 필요 없어져 그녀는 동 떨어진다.

즉 구원을 필요치 않는 대상을 억지로 구원하려는 추상적인 종교적 사랑이 아니라, 객관적인 대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종교적 사랑이 필요하다. 기대하지 않은 결혼식에 간 타에코는 현장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트로트에 즉흥적으로 몸을 맞춘다. 이후 비가 내려 하객들은 계획된 결혼식을 위해서 대피하는 반면, 타에코는 야외에 남아 비를 우두커니 맞는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변덕스러운 얼굴을 가진 현실을 그저 긍정하는 것이다.     


물론 객관적인 현실을 가까이서 긍정하는 사랑은 결코 쉽지 않다.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결말에 타에코는 지로에게 돌아온다. 여전히 부부 사이는 멀리 벌어져있고 분위기는 냉랭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만, 함께 산책이라도 해본다. 그 현장을 코지는 ‘익스트림 롱숏’에 담는다. 길을 걷는 부부의 벌어졌던 간격이 점차 좁혀지는데, 그것이 익스트림 롱숏의 함정인지, 아니면 실제로 거리를 좁힌 것인지 단언할 수 없다. 여하간 남녀의 간격은 좁혀진 것처럼 보여서, 감상자의 눈엔 무탈한 남녀 사이처럼 보일 정도다. 즉 이들의 진실을 오롯이 반영하지 못하고 끝나는 영화처럼, ‘착각’이 인간의 한계이자 필연일지 모른다. 그러나 진실과 거리를 좁히고 이로써 복합적인 현실 그 자체를 긍정하려는 시도가 연이어져야 할 것이다. 

정리하며, 그간 '옆얼굴'과 '가면'에 주목하던 코지의 철학은 신작에서 '계획'에 '지진'을 일으키는 현실, 두 유형의 사랑으로 확장된다. ‘야누스의 얼굴’과 같은 세계와 인간의 복합성을 보여주는 시도는 여전히 흥미로우나, 다만 박신지가 일본인들이 '보고 싶어 하는', 부정적인 한국인의 전형이 아닌지 의심이 든다.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생활자금을 받는 구원의 대상’이거나, 이러한 편향된 시선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모순된다. 더욱이 왜 그가 청각 장애를 지녔고, 수어를 하는지 설득되지 않는다. 물론 장애인이 특정한 목적성을 가져야지만 영화에 등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도 비장애인 못지않게 일반적으로 출연할 수 있어야 하지만, 다만 최근 일본 영화(<드라이브 마이 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 청각 장애인의 등장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기 때문에, <러브 라이프>만의 고유한 목적 없이는 그저 타 예술가의 설정을 안일하게 따라간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굳이 청각 장애인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없다면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처럼 다른 장애 유형을 가시화하고 이해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즉 삶과 세계의 입체성과 복잡함을 잘 구현해놓고도, 스테레오타입과 유행의 단순성에 매몰되어 버린 점이 결함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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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719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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