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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l 28. 2023

오마르 엘 조하이리, <깃털>

교환 가능한 여성, 교환 불가능한 남성

오마르 엘 조하이리(Omar El Zohairy), <깃털>(Feathers) 

- 교환 가능한 여성, 교환 불가능한 남성

“침대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어. 전부를 희생해서라도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렇게 하는 편이 가장 올바른 길이야.” -프란츠 카프카-

그레고르 잠자, 그는 출장 영업사원이었다. 출장 영업사원은 허구한 날 출장을 다닌다. 기업의 지시와 고객과의 만남을 위해서 잠자의 몸은 불편하고 형편없는 생활을 감내하고, 이로써 사적인 삶은 불발되었다. 잠자가 이 부조리를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부친이 빚을 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그는 가족을 위해서도 살며, 이런 그에게 시곗바늘은 늘 강제였다. 그 시간에 어떤 행동을 할지 잠자는 선택할 수 없고, 오직 자본주의적 시간이 그에게 지시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잠자는 잠에서 깨기 몹시 어려웠다. 그 이유는 인간인 그가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몸은 벌레, 하지만 정신은 여전히 잠자이자 영업사원, 몸은 일어나길 거부하나, 정신은 어떻게든 일어나서 잠자이기를 바란다. 어쩌면 그가 벌레가 된 이유는 새벽기차를 타지 않아서, 출장을 가지 않아서, 그렇게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서일까? 오직 유용해야만 인간일 수 있는 자본주의의 부조리, 이윽고 직장의 지배인이 찾아온다. 잠자를 몰아세운다. 잠자는 어떻게든 항변한다. 나가서 일을 할 것이라고, 어떻게든 지배인에게 만족을 안겨드리겠다고, 그의 정신은 지배인이 인정하는 영업사원이 되어 인간사회에 다시 받아들여지고자 한다. 하지만 몸은 영업사원으로 되돌아가기를 극구 부인한다. 이러한 몸의 한계를 넘어서 그는 문을 박차고 나가고자 고군분투한다. 그의 정신은 동물이 되어 버린 몸의 한계와 규정을 저항한다. 한편 몸은 정신이 지향하는 것을 반대한다. 벌레가 되어버린 몸은 흘러내리는 커피의 향과 맛에 충동적으로 이끌린다. 그리고 잠자의 부모는 이전과 달라진 잠자를 아들로 여기지 않는다. 경악과 비명의 대상, 쫓아내야할 해충에 불과하다. 여동생도 그를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그의 정신도 몸을 부정한다. 하지만 이윽고 자신에게 주어진 감관의 가치를 헤아린다. 물론 정신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이전에 지향하던 평안하고도 행복한 삶, 제 몸의 변화에 일상이 무너지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그 삶은 어쩔 수 없이 무너진다.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의 생계를 잠자가 모두 책임지고 있었으니. 아무리 그들이 나이가 많다거나, 또 어리다고 한들 그들 또한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이전의 삶에서 ‘변태’해야 하리. 한때 변화는 당혹스럽고 낯설며 불쾌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충격이 무뎌지면 변화 또한 이윽고 보편이자 하나의 진리가 된다. 몸이 바뀌면, 그에 따라 공간도 화두에 오른다. 새로운 몸은 새로운 공간을 요구한다. 공간도 변신한다. 하지만 변화 이전의 대상을 본질로 여기는 어머니는 공간을 그대로 놔두자고 제안한다. 인간임을 기억할지 모르는 잠자의 정신이 변신을 부정하게끔. 그러나 정신도 변화한다. 잠자의 정신은 잠자라는 자아의 틀만 유지할 뿐, 서서히 육체의 변화를 따라간다. 사람의 것이 아닌 벌레의 것에 가까워진다. 이렇게 존재는 변화한다. 그것도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변화한 상대방의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은 변신이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잠자는 가장 가까운 아버지에게 박해를 받는다. 아비의 기대에 불응하는 아들은 참을 수 없는 존재로서, 잠자의 본질은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타자의 시선에서 비롯하였을지 모른다. 결국 가족들은 화목한 가정과 일상을 보고 싶어 하며 잠자를 추방해버린다. 이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으로 즉자로부터 대자임을 선언하는 실존주의, 인간이 실존할 때 발생하는 부조리를 포착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더불어 이는 '프라하의 유대계 독일인'이라는 카프카의 신분, 어느 곳에도 온전치 얽매지 않지만, 국가와 민족에 귀속될 것을 요구받는 그의 상황을 표현한 작품으로도 읽힌다. 이를 글의 서두에 언급한 이유는 1984년 이집트 태생의 신예 시네아스트, 오마르 엘 조하이리의 <깃털>이 카프카의 『변신』과 유사한, 인간-동물로의 변신을 고찰하기 때문이다. 『변신』과 유사한 본 작품에서도 자본주의의 노동자란 즉자로부터 탈자본주의적인 대자로의 변신이 극의 두 차례에 거쳐 발생한다.      


첫 번째 변신은 도입부에서 발생한다. 어둠 속에서 인간의 웃음 내지는 신음으로 해석할 수 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이미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청각에는 명확한 대응물이 없다. 그래서 웃음으로도 울음으로도 읽힐 수 있다. 이후 이미지가 펼쳐지며 그 소리가 울음임이 드러난다. 카메라가 일을 하며 어둔 밤의 공장을 촬영한다. 거기서 한 남성 노동자가 분신한다. 그는 분신하기 전 떨리고 공포스러운 최후의 감정으로서 솔직하게 울음을 터뜨린 것이랴. 이와 동시에 추상적인 어둠 속에서 남성의 울부짖음은 미약한 웃음기를 동반했다. 매우 슬프지만 동시에 아주 약소한 기쁨이 묻어난 것처럼 들렸다. <깃털>의 전반에 거쳐 노동자들은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끝없는 노동의 굴레에서 달아날 수 없다. 나의 감정과 지배, 모두 고용주, 자본주의에게 이첩된다. 하지만 그들은 노동자의 '죽음'까지 지배할 수는 없다. 비로소 그는 스스로 죽음을 지배하며, 지배받는 노동자로부터 노동할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대자로 실존한다. 살아서는 노동자임을 거부할 수 없기에, 자유를 바란다면 죽는 수밖에 없다. 노동자는 어두운 공장의 일부로 녹아들어 제 존재가 은폐되기보다는, 어둠 속에서 일순간 뜨겁게 활활 타오르며 제 존재를 밝히고, 그럼으로써 제 자신으로 실존하는 대자로 일순간 변신하고 죽는다. 본 죽음 변신 이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떠버리'라고 번역한 한 남성이 닭으로 변신하며, 두 번째 변신이 발생한다. 남성은 말 그대로 떠버리, 시끄럽게 입만 살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다. 입만 산 무능력한 인물, 루저라 폄하되는 인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나름 푼돈을 벌어 아내에게 가져다준다. 하지만 아들 생일파티를 위해서 부른 마술사의 마법에 의해서 그는 흰 암탉으로 변신한다. 완전한 변신은 아닐지도 모른다. 남자의 육체는 영화 후반에 경찰서에서 발견된다. 경찰이 말하길 갑자기 노숙자 무리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상태가 도입부에서 분신자살한 노동자와 유사하다. 즉 그는 흰 암탉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마술로 인해서 분신한 것이요, 단지 그 자리를 흰 암탉이 꿰찬 것인지 모른다.      


이런 그에게는 영혼이 없다. 반자본주의적인 인간은 자본주의 시대에 영혼을 가질 수 없는가? 인간으로서 반자본주의적인 삶을 살 수 없는가, 다른 존재가 되어야만 하는가? 또 분신자살이 현재인 마술 시퀀스 기준으로, 과거인 도입부에 발생하듯, 반자본주의적 저항은 시간을 이탈해야만 하는가? 그의 기묘한 변신은 여러 추측을 자아낸다. 여하간 자본주의에서 남자가 변신한 암탉은 인간에 의해 강제로 '가축'이 된다. 하지만 아내는 닭으로 변신한 남편에게 노동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평가받지 않는, 또 자본과 무관하게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평범한 자연물이 본 극의 닭이다. 동물병원에서 다른 나귀가 일을 더 많이 하기 위해서 치료를 받는다면, 남편이 변신한 닭은 경제적으로 무가치함에도 그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치료받는다. 그가 낳은 달걀은 아내에게 하등 필요 없다. 또 닭은 아무 걱정 없이 태평하게 사료를 허겁지겁 들이킨다. 이를 마구 어지르면서 먹는다. 하지만 영화 속 인간은 먹는 행위가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 중반, 어머니와 아들들은 차안에서 햄버거를 먹는다. 직원 혹은 남자가 그들에게 감자튀김을 건네지만 손사래 친다. 어머니는 마음 편히 먹을 수 없다. 돈을 아껴야 한다. 또 닭이 거주를 걱정하지 않고 마음대로 뛰어다니고 더럽히는 동안 어머니는 집세를 내지 못해 고심이 깊다. 닭으로의 변신은 자본주의에 의한 걱정을 더는 하지 않아도 되는, 태곳적 내지는 자연 상태로의 회귀다. 그 이전까지는 아내와의 관계, 가장으로서 의무, 집과 이집트라는 공간이 형성한 즉자가 솔직한 자신을 방해했다면, 이제는 먹고 싶으면 먹고 낳고 싶으면 낳는 제 육신에 솔직한 존재로 탈태한다. 이전의 남자는 지시받은 즉자를 수행하지 못하면 다른 남성, 가장이 된 아내, 아들 등으로 대체된다. 남편, 아버지의 자리를 대체하는 여성의 고군분투가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닭은 어떠한 유용성도 없는데도 대체될 수 없는 소중한 존재, 귀중한 생명으로서 알뜰살뜰 보살펴진다. 물론 남편으로 다시 돌아와 집안을 일으키리라는 경제적인 믿음에 따른 행위였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경제로 환원되지 않은 고유한 존재로 변신한 이유는 마술사의 특징이 한 몫 한다. 남자를 닭으로 변신시킨 마술사는 처음에는 평범한 마술사들 중 하나, 즉 대체될 수 있는 마술사로 생각되었으나, 남편을 다시 바꾸기 위해 아내가 마술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예사롭지 않은 존재임이 서서히 밝혀진다. 일단 그는 마술사 협회에 속하지 않는다. 마술사들은 그 마술사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남자를 닭으로 변신시킨 마술사는 협회의 다른 마술사로 대체가 불가능하다. 그렇게 발자취가 묘연한 존재를 서류에 언어로 교환할 수도 없다. 여인은 경찰서에 마술사의 행방을 추적해달라고 민원을 넣지만, 언어나 서류로 교환되지 않는 고유한 마술사는 존재의 대응물로 대체되지 않는다. 그리고 여인을 도와주는 남자가 무수한 마술사들을 촬영한 사진 뭉텅이를 들고 오지만, 그 무수한 사진 속에서도 이미지로 교환된 마술사를 찾아볼 수 없다. 나의 존재가 서류나 언어로, 나의 가치가 돈으로 교환되는 오늘날에 그는 오직 고유한 육신만으로 실존한다. 마술사 자신만 알고 있는 특유한 마술, 그래서 여인은 주술사를 불러서 남편을 되돌려보려고 하지만 이는 빈번히 실패한다. 주술사는 고유한 마술사의 변신을 헤아릴 수가 없다. 더욱이 마술사는 상자 속에서 남편을 닭으로 바꿨다. 후술하겠지만 영화 속 공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를 제한하고 오직 유용성만을 추구하며, 이에 공간 속의 인간은 '공간을 위한 존재'로 탈바꿈된다. 이집트 어딜 가든 공간의 영향에서 달아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상자 안은 이러한 유용성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으며, 또 마술사의 상자는 무용한데 단지 즐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물 이자 공간이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자본주의적 공간에서 탈피하여 유희적인 공간으로 이행하고, 그 이후 즐기기만 하더라도 괜찮은 존재로 변신한다. 신원미상, 일하지 않음, 영화에서 존재하지 않는 공간으로 치부되는 노숙자의 길거리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교환되지 않고도 존재한다. 그러나 어찌됐든 그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 속한다. 그래서 닭은 노동자 아내 밑에서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고, 반송장이 된 남편 또한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오직 교환 가능한 노동력만 생존을 허용한다.      


그래서 영화는 노동력, 상품 가치로 환원된 인간을 표현하는 연출이 특징이다. 영화 속 남성도 피고용인이 될 수 있다. 남편은 밖에서 일을 하고, 또 자신보다 나이와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선물과 돈을 받는다. 이와 동시에 남성은 고용주다. 인사권자, 지급인, 구매자가 가부장적인 이집트 내 남성의 지위다. 그리고 여성은 고용주가 되기 어렵다. 그녀들은 항상 피고용인이다. 영화 속 남편이 있는 아내, 남편이 닭으로 변신한 아내, 양자 모두 다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러한 그녀는 로베르 브레송의 '즉물적인 초상'을 연상케 하는, 어떤 감정도 내색하지 않는 삭막한 표정을 유지한다. 이는 남성, 아이와 다르다. 남성은 자본주의의 권력자로 고용, 구매 등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 이에 제 자신의 것인 표정 또한 자유롭게 표출한다. 아이들 또한 축적이 아니라 소모적인 불장난, 물건을 망가뜨리는 등의 놀이를 즐기거나, 무용하게 축 처진 반자본주의적 아버지를 보면서 울부짖는 등, 자본주의와 무관하거나 이를 지배할 수 있는 이들의 디렉팅은 매우 역동적이고 유연하다. 남자와 아이들은 제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은 그렇지 못하다. 언제나 피고용인인 여성은 남성들에게 간택되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상품 진열대의 무수한 사물들처럼 자신의 감정, 주체성, 정체성을 무표정으로 은닉한 채로 막연히 기다린다. 여성은 스스로의 얼굴을 사용할 수 없다. 영화 속 반복해서 클로즈업되는 여인의 얼굴,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저 '물질로서 얼굴'이지, '영혼이 드러나는 창구로서 얼굴'이 아니다. 물질로서 얼굴은 고용주 남성에 의해 사물로서 가치를 부여받기를, 질료로서 사용될 수 있기를 중립적인 무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다. 얼굴들은 포착돼도 영혼이 아니라 그저 껍데기, 표피, 물질만을 보여주기에 사물 그 이상의 가치로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얼굴은 쉽게 등한시된다. 도외시되는 얼굴 대신 포착되는 기관은 바로 ‘손’이다. 손은 세계의 도구나 사물로 전락하지 않고 오히려 능동적으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인간성을 보여주는 기관이다.    


그러나 영화 속 손은 사물을 능동적으로 집는 것이 아니라, 돈이 옮겨지기 위한 도구로 역할이 축소, 전복, 퇴행한다. 영화 속 손은 여인이 공무원에게 집세를 낼 때, 닭의 약값을 내고 남편의 치료비를 낼 때 부각된다. 브레송의 <소매치기>처럼 오직 돈을 쥐고, 그 돈을 받으려는 두 손의 교류만 포착되고, 각자는 사물로서 제 역할만 교환하면 끝이다. 그 이상의 여지인 감정, 영혼, 얼굴은 등한시된다. 이에 영화 초반에는 사람의 얼굴이 소외되고, 대신 공백을 부각하는 헤드룸을 넓힌다. 인간이 공간을 지배하지 못하고, 공간에 억눌린 역전을 가시화한다. 물질의 득세에 영혼과 감정은 소외된다. 더는 누군가의 삶을 '느끼지' 않는다. 제도는 가장의 부재로 홀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여인의 삶을 헤아리지 않고, 이들의 물건을 압류하여 제 자신의 손해만 보지 않으려 안달이다. 압류하러 온 남자들은 TV를 빼앗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듯, 아이들을 세차게 밀친다. 또 여자는 돈을 벌기 위해 도축장에서 일하는데, 그 과정에서도 동물의 죽음에 느낄 법한 연민, 불쌍함은 거세된다. 제 자신의 생존, 이익을 위해 다른 생명의 목숨은 경시된다. 그래서 여자는 스스로 기능하지 않는 상품으로 전락하며 자아로서 감정을 은폐한 것일 수도 있지만, 감정을 갖는다면 버티기 어려운 야만적인 자본주의이기에 몸소 감정을 거세한 것이랴. 이렇게 감정을 소거하거나, 남긴다 한들 자신의 쾌락과 즐거움만 느끼는 세상에서 타인은 욕망을 위해 마음대로 처분 가능한 사물로 전락한다. 한 남자는 여자에게 선심을 쓰듯 돈을 준다. 하지만 그 직후 본심이 드러난다. 그녀에게 세레나데를 부르고, 이후 그녀가 도망가자 돈을 돌려달라며 밤마다 집에 찾아와 위협하거나, 창문을 향해 계란을 던진다. 고용주들은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제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노동현장을 만든다. 남성은 일터에서만 꾹 참고 집에선 감정을 드러낸다면, 여성은 집과 외부 모두에서 일하며 어디에서도 제 감정을 드러낼 수 없다. 그래서 영화는 고정된 카메라를 이용한 정적인 촬영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촬영의 이유는 여자가 마술사를 신고하고, 남편을 되돌릴 방법을 강구하며 경찰서에 가는, '차를 탄 장면'에서 상세히 나타나는데, '움직이는 공간'인 차를 촬영할 때 카메라는 움직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공간, 집이나 직장, 세계를 포착할 때 카메라는 부동한다. 공간과 그 공간을 규정하는 의자, 옷장 등의 사물이 멈춘 상태 그대로 포착한다. 물신화에 일조하는 카메라는 인물에게 관심이 없고, 이에 움직이는 인간을 좇아가는 팔로우 샷이 영화에 드물다. 영화의 구도 자체가 화장실, 거실, 의자, 옷장 등을 먼저 포착하며 형성됐고, 인간은 사물에 의해 만들어진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야지만 부수적으로 포착된다. 인간은 공간이나 사물을 위한 존재로, 오직 의자에 앉은 '발과 다리', 화장실에 있거나 옷장을 여는 '얼굴과 어깨', 거실에 풍선을 매달기 위해 탁자에 올라가서 '얼굴이 잘린 몸' 등, 공간과 사물에 적절한 행동을 하는 기관만 포착된다. 이러한 공간은 좁고 폐쇄적이기 일쑤다. 드넓게 포착된다면 다른 사물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겠지만, 오직 하나의 장소와 사물만 포착되어 가능성은 축소된다. 인간, 특히 여자는 그 사물이 있는 공간에서 제한된 특정 행위만 해야 한다, 그것도 ‘반복’해서. 이에 여성의 몸은 전체가 포착되지 않고, 또 다양한 행동을 할 수 없다. 그것이 곧 '분업 노동'의 폐해다. 자본주의의 분업 노동은 개인을 협소하게 분화, 그것도 특정 기능만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로 축소한다. 노동자는 기계장치의 일부가 되어 오직 하나의 일에 뱅뱅 맴도는, 자동적으로 행하는 추진기관으로 전락한다. 분업화된 노동자는 자신의 기능과 가능성 중 자본주의가 허용한 편협한 일부만 사용할 수 있음에 충만한 잠재력을 거부하고, 또 자기가 맡은 행위만 특정 공간에서 반복하면 끝이기에, 그 이상의 행위로 연결되는 타인들과 단절되며, 이로써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서 소외된다. 영화 속 여성에게 가해진 분업 노동은 여성을 사회, 자신과 분리시킨다. 집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돈을 받고, 청소 및 요리, 육아 등의 잡다한 집안일을 천편일률적으로 반복한다. 영화의 반복적인 편집은 흡사 <잔느 딜망>과 같으며, 닫혀 있어 어디론가 나아가지 못한 채 끝없이 되돌아오는 집 안에서 여성은 가사노동자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물론 여성은 집밖에 나갈 수 있다. 남편이 닭으로 변한 이후, 생계를 해결하고자 여성은 집밖을 나서지만 선택지는 협소하다. 가부장제에 속한 남성은 여전히 여성에게 돈을 주는 우월적 존재다. 그 대가로 성을 요구한다. 여자는 그것을 뿌리친다. 이는 롱숏으로 포착된다. 집안의 좁다란 클로즈업과 달리, 롱숏이어서 여자는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뻗어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개방적인 롱숏은 여자가 선택할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드넓다고 해도 여성의 가능성은 ‘남성에게 의존’만으로 국한된다. 남성의 차를 얻어 타고 온 여성은 혼자 집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다른 남성이 모는 차를 히치하이킹 해야 한다. 또 여성의 ‘귀가’가 강제되는 이유는 사회가 여성의 취업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설령 취업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인력사무소에서 요구하는 조건에 맞춰 자신을 측정, 개량해야 한다. 그렇게 밖에서 머문다 한들 여성의 가능성은 집에서도 밖에서도 '더러워지는 자'다. 여자는 항상 도축업자, 청소부, 식당의 서버다. 그녀는 걸레로 닦고, 해산물을 먹기 좋게 발라놓으며, 도축된 동물의 역겨운 기관으로부터 고기만 분리한다. 타인의 집을 깨끗하게 만들어도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직 새우 껍질, 생선의 가시일 뿐, 즉 쓸모 있는 것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일하는 부르주아의 집에서 약소한 음식물을 훔쳤다. 분명 본인들에겐 그리 중요치 않은 음식물, 하지만 부르주아는 일하는 대가 이상의 손해를 원치 않는다. 노동자는 일하며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고, 부르주아는 무제한적인 자기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쥐어짜는 강탈자다. 이후 여자는 ‘공식적인’ 취업이 어려워지고, 이에 10살도 채 안 된 아들을 남편이 다니던 직장에 보내기에 이른다. 가부장적 경제 체제에서 여자는 남근 달린 존재에게 다시 의존한다. 그럼으로써 여자는 돈을 조금씩 모은다. 그것으로 디저트와 피자를 사먹고, 사장에게 부탁하여 제 집을 찾아오는 남편 친구를 호되게 패서 쫓아낸다. 그녀는 이제 고용주, 소비자가 된다.      


그래서 더는 암탉과 남편을 그리워하지 않고 살해한다. 그들의 자리, 역할을 완벽히 여성이 대체했기 때문이다. 또 부르주아에게 착취당하던 그녀는 몸소 부르주아가 되어 조금의 손해도 보기 싫어진 것인지 모른다. 제 이익을 위한 살해는 즐겁다. TV 볼륨을 크게 틀고 죽이기, 남편과 암탉의 죽음 이후 기름진 피자를 먹기, 자본주의에서 무용한 존재의 죽음은 즐거운 감각, 소식이 외부로 새어나갈 가치도 없는 일이다. 주체적으로 거듭난 여성은 목숨을 쥐고 협박하는 남성을 죽이며 분명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여성은 천부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돈을 벌어야지만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가부장적 경제 체제에 참여해야지만 자립할 수 있는 존재, 이로써 여자의 선택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모순적으로 강화한다. 그래서 다시 비극이다. 여성은 여성으로서 생존하는 게 아니라, 나약한 약자를 지배하는 가부장제의 남성성을 뒤집어써야지만 하기에,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앗아간 감정은 회복되지 못하였고 약자는 약자로서 살아남을 수 없기에… 이렇게 『변신』을 뒤틀고 변주하는 조하이리는 무용한 변신을 고찰하며 이집트 내 여성의 수난, 자본주의의 차가운 민낯을 비춘다. 이를 앞서 언급한 연출과 더불어 말수가 적은, ‘무성영화적 이미지’로 가시화한다. 이미지만 있고 이를 보조하는 청각이 드문 무성영화, 이는 영화 도입의 시각 없는 울부짖음처럼 현상을 하나로 축소시키지 않는 풍부함을 지닌다. 그러나 본 작품은 목소리가 없음에도 이미지는 비교적 명확하다. 자본주의 내의 정확한 계산, 교환, 이윤추구 속에서 선택지는 효율적이고 명확한 노동 하나로 축소되고, 거기엔 다른 여지나 감정, 목표가 첨가되지 않는다. 그 단순함과 무감함을 아이의 풍부함으로 뒤바꿔야 하리, 그 아이들조차도 결말에서 무심한 자본주의에 젖어가고 있지만… 이렇게 탈자본주의적 희망과 자본주의의 폐해를 이중적으로 반영하는 조하이리의 실험적인 연출은 정말 매혹적이지만, 자본주의와 사회비판, 여성혐오적인 이집트 내에서 여성의 성공 등 내용에서 다소 안일했던 감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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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728 집에서(BF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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