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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ug 14. 2023

마하 하즈, <메디터레이니언 피버>

발병 원인은 전체주의입니다

마하 하즈(Maha Haj), <메디터레이니언 피버>(Mediterranean Fever) 

- 발병 원인은 전체주의입니다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263

“하지만 시대정신은 너무나 막강한 불굴의 힘을 갖고 있어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꺾는 사람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두들겨 부순다.” -버지니아 울프-

가족성 지중해열: 지중해열 유전자의 변이로 발생하는 '유전병'이다. 전 인류에게 발병 소지가 있지만, 주로 지중해인에게 발병되기에 ‘지중해’라는 단어가 붙었다. 마하 하즈는 자신의 신작 제목에 해당 병명을 차용한다. 유전병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친구에게 자신을 ‘청부 살해’해달라고 부탁하는 이야기, 이를 ‘자살’로 위장하려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왜 지중해 열병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그가 자살로 위장한 타살을 선택하게 된 배후엔 바로 유전이, 곧 넓은 의미의 가족인 ‘민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연출하는 1970년 나자렛 태생의 마하 하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침례교 문화권에 속했지만 엄격한 이스라엘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팔레스타인인도 아니다. 하즈는 양 민족의 영향을 고루 받았지만, 둘 중 하나만 택하라고 강요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단된 상황’이 늘 자신의 반쪽을 지우고 부정하였다. 이에 반발한 그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자유롭게 오가는 영화로 자신의 모든 정체성을 반영하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자 모두 제작 지원 대가로 상대 국가를 지우라고 명령한다. 

이러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상황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장편 데뷔작 <퍼스널 어페어스>에서 탐구하였다. 일단 그녀의 영화에서는 '문'을 자주 닫는다. 집안에 무수한 방문, 커튼, 대문, 이스라엘로 향하는 검문소 모두 다 외부와 내부를 엄격하게 가른다. 그 문을 열고 통과하기 위해선 문의 여닫음을 승인하는 사람들의 '허가증'이 필요하며, 이로 인해 개인의 자유는 간헐적이다. 문과 그 문을 지배하는 권력자들에 의해서 개인들의 위치와 정체성은 결정되고, 충동성이나 우발성, 즉흥, 우연 이들로부터 가능한 자유는 모두 다 통제된다. 하즈는 이에 따른 문제로서 소외와 단절을 꼬집는다. 문의 닫힘으로 인간이 머물 수 있는 장소/불가능한 장소가 나뉘고, 인간은 가능한 장소만을 촬영하는 카메라가 만들어낸 '하나의 프레임'에 강제 동거한다. 서로는 가까이 있다. 그러나 단지 물질적으로만 함께 머물 뿐, 정신적이거나 감정적인 교류는 전무하다. 

하즈는 단절과 고립의 원인으로 남/여의 ‘젠더 차이’, 그리고 ‘권위주의’를 지적한다. 영화 내내 가장 살레는 아내 나빌라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라거나, 아니면 자신의 작업을 위해 TV 소리를 낮추라는 등 제 욕구에 봉사하라고 지시한다. 타렉은 이성인 여성의 삶을 예술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며, 조지 또한 마찬가지로 이성을 마주한 자신의 기분 '예쁘다"만 여성 앞에서 되뇔 뿐이다. 즉 이들은 보고 싶은 타인만을 본다. 살레가 영화 내내 현실의 나빌라가 아니라, 바라는 나빌라와 보고 싶은 것만 취합해서 볼 수 있는 노트북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이 가족이다. 자녀는 부모의 의도에 의해서 태어나고, 심지어 자식은 부모와 닮아있기에, 부모는 자식을 동일시하거나 목적을 투영한다. 살레는 자신과 닮은 아들, 딸들에게 어머니를 설득해달라고 보챈다. 그래서 부모와의 대화에 참여하는 자녀들은 타자인 자신을 지키고자 마찬가지로 문을 닫고, 내가 보고 싶은 TV 등에 탐닉한다. 그렇게 공간은 형식적으로 함께일 뿐, 더 많은 문이 설치되고 선이 그어진다. 

그러나 하즈는 반성한다. 일단 문과 선을 지우고 변형시키는 '물'로써 말이다. 조지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역할로 미국 영화감독에게 섭외되었다. 그 세트장으로 가면 감독이 바라는 배역으로 조지가 둔갑될 것이다. 그러나 조지는 세트장이 아니라 바다로 향한다. 자유를 회복한다. 살레 또한 나빌라를 아들 기샴이 머무는 스웨덴의 '호수'에서 이해한다. 

또 하즈는 가부장제의 남성성 대신 여성성을 부각한다. 배에 다른 존재를 품고 있는 사미르는 나를 위해서 상대를 통제하고 왜곡하기보단,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헤아린다. 그녀가 돌보는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어서 같은 프레임에 놓여도, 각자는 다른 시간에 살고 있다. 모두 다 할머니를 기피한다. 그러나 사미르는 할머니의 다른 시간을 이해한다. 그렇게 '타인이 요구하는 나'에서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나’를 드러낸다. 타렉과 마이사는 검열하는 군인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더는 굴종하지 않고 자신들의 진실인 '탱고 댄서'를 온 천하에 드러낸다. 즉 국가나 타인의 지배 속에서 개인의 회복을 촉구하는 하즈는 이번에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내에서의 정체성 위기, 관계를 고찰하는 <메디터레이니언 피버>으로 돌아온다.      


도입부, 주인공 왈리드는 ‘꿈’을 꾼다. 꿈은 이중적이다. 육체가 잠들고 마찬가지로 ‘의식’까지도 고개를 푹 떨어트리면, ‘무의식’이 육신의 지배자가 되어 인간의 가장 솔직한 욕망과 욕구를 꺼내놓는다. 그런 점에서 꿈은 나름 '명확'하다. 이와 동시에 그 욕망과 욕구는 현실에서 금기시된 것들이 많다. 그래서 결코 명확해선 안 되는 '거짓말'이거나 '가상'이어야 한다. 이토록 이중적인 꿈은 선명함과 동시에 아스라하고 불투명하며 흐리다. 하즈는 꿈의 특징을 선명한 윤곽을 아스라하게 뒤덮는 뿌연 미장센으로 가시화한다. 

이중적인 꿈속에서 왈리드는 어머니, 하나를 밀쳤다. 70대의 병약한 어머니는 낙상으로 사망했다. 이후 왈리드의 두 가지 생각, "자신이 어머니를 죽였기에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고의적인 살인 행위가 아니라 실수로 밀친 것이기에 책임이 없다"가 하나의 프레임에 동시에 담긴다. 이후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남편 왈리드/아내 올라, 유대인 의사/팔레스타인인 왈리드의 ‘대립’이 각기 다른 프레임을 점유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이루는 ‘리버스 숏’으로 가시화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의 프레임에 포착된 왈리드의 모순적인 두 속내는 대립이 아니라 병존이다. 그는 어머니가 죽길 바라지만 죽이긴 싫고, 그런데도 하나는 죽어야만 한다.

그녀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형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 도입부에서 카메라가 첫 번째로 주목하는 대상은 하나다. 싸늘한 주검으로 전락한 하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미동 없는 시체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마찬가지로 움직일 필요가 없어서 고스란히 얼어붙는다. 이후 사인을 확인하기 위해 검사관, 법의학자가 들이닥치고 망자를 중심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살아 있는 그들’에 의해서 카메라는 '달리 인'한다. 즉 죽음이 멈춤이라면, 삶은 이동이다. 그런데 살아서도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가 있나니 바로 왈리드다. 그의 마음은 어머니를 죽이고 움직여야 하나, 아니면 어머니를 살리고 부동해야 하나, 꿈과 현실이 교차한다.      


그렇다면 왜 왈리드는 하나에 의해서 움직일 수 없는가. 하즈는 전체를 위해 개인을 획일화하는 ‘전체주의’에 의한 희생을 탐구하는데, 왈리드는 가족이라는 전체를 위해 움직임이 제한된다. 움직이기 위해선 전체를 지배하는 권력자 내지는 가장을 죽이거나 전복해야 하는데, 그 지배자가 왈리드가 속한 가족 내에서는 하나다. 하즈는 본 작품에서 가부장제를 '모계 문화'로 뒤집어, 남성이 여성의 지배에 처해보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남성 가장이 여성과 식구들을 지배할 땐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했던 것들이, 실제론 전체주의였음을 고발한다. 왈리드와 또 다른 주인공, 잘랄 모두 다 경제적으로 무능하여 '여성의 돈'에 기대며 살아가고 있다. 여성의 자본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남성은 '빚쟁이'이거나 '고리대금업자'로서 상대에게 돈을 빌리거나 빚을 돌려받아야 하는 수동성이 부각된다. 반면 여성들은 의존하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자신을 쥐어 짜내어 아이들을 책임지는 모습인데, 의존적인 남성들은 여성에게 대가를 받는 만큼, 그 여성이 지배하는 '가족을 위한 존재'로 희생해야 한다. 하나는 왈리드가 수익을 내기 어려운 '작가'를 때려치우고 안정적인 직업을 택하길 바라며, 올라는 왈리드에게 가사, 등·하교 등을 지시한다. 그녀들의 요구를 행동에 옮길 시간에 왈리드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집필에만 매진하고 싶다. 하지만 그의 소망은 가족이라는 전체를 위해 묵살된다. 

가족에 의한 전체주의는 젠더에만 그치지 않는다. 부모인 하나와 자식 왈리드의 관계는 수직적이다. 중력에 의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긴 쉽지만,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긴 목이 뻐근하다. 위에서 아래로 지시하는 것은 순식간에 강하하지만, 아래서 위로 올라가 반항하긴 버겁다. 유약하게 태어난 자식은 커다랗고 강해보이는 부모에게 의존하며, 높다란 곳에 있는 가장의 뜻을 감히 거스르기 어렵다. 그래서 자연스레 자식 왈리드는 부모 하나의 명을 따르며 보호자를 위한 존재로 전락하고, 이는 부모 왈리드와 올라, 자식 누르와 사샴의 관계에도 반영된다. 자녀 중 누르는 자아가 커져가는 사춘기를 겪고 있기에 사적인 시간을 많이 갖고 싶지만, 왈리드가 항상 제지하여 불가능하다. 누르와 사샴은 부모의 눈에 보기 좋은 '예법'을 몸에 익히며, 권위자가 보기 좋은 자신을 만들어야 한다. 즉 가족 내의 수직적인 권력 구도 때문에 식구들, 특히 약자들은 가장이나 가족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여, 가족이라는 전체를 위해 희생한다.

하즈가 분석하는 전체주의는 가족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더해서,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전체주의도 포함하며, 이는 국민들을 옭아매는 형국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인류는 '특정 국가'에 소속된 '어느 나라의 국민'이거나 '구체적인 민족 내지는 인종'을 갖는다. 그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인적 사항은 자유롭고 고유한 '나 자신'으로서 자아나 개성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사샴이 병원에 갔을 때, 필수 기재 사항은 개별적인 특이 요소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종과 종교다. 특히 종교를 기재하지 않았을 시에, 개인의 '인적사항표'를 완성할 수 없고 진료를 받을 수 없다. 즉 종교·국적·인종 등이 개인을 뛰어넘어 인적 사항을 구성하는데, 그 여파가 일상생활에도 반영된다. 민족이나 인종·국적·종교 등은 해당 개념의 '보편적인 근가'가 있기 마련이다. 개인들은 보편성을 전부 따를 수도 있고, 일부만 일치할 수도 있으며, 모두 거부할 수도 있다. 보편성을 어떻게 대할지는 개인의 자유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성이 개인의 일상을 자꾸만 침범한다. 잘랄이 처음 이사 왔을 때, 저녁 12시 반에 자는 팔레스타인인은 없다며 왈리드의 집을 무례하게 방문한다. 또 팔레스타인인 자신이 듣는 노래는 다른 팔레스타인인도 좋아할 것이라는 듯, 건물이 떠내려갈 정도로 볼륨을 크게 키운다.

이는 팔레스타인 내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국가를 하나의 인격체로 본다면 보편적인 세계 원리를 구성하는 '유대 자본'이나 '백인 패권'이 팔레스타인을 침략하는 행위 또한 전체주의의 일환이다. 백인들이 구성해놓은 전체를 위해서 팔레스타인의 고유한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여파를 사샴에게서 목격할 수 있다. 사샴은 학교에서 ‘지리’를 배울 때, 유대인 선생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 막무가내로 주장하자 매우 불편해한다. 사샴이 이에 반발하자 유대인 선생은 전체를 따르지 않는 소년을 학급에서 내쫓았다.     


이렇게 전체주의에 의해 개인이 침탈당하는 상황을 하즈는 여러 상징으로 보여준다. 가장 먼저 '사냥'이다. 막 이사 온 잘랄은 왈리드의 일상을 계속 간섭한다. 왈리드가 개인적으로 산책을 할 때도, 왈리드의 마음이 자신과 같을 것이라 단정하고 자꾸만 개입한다. 왈리드는 잘랄이 주장하는 팔레스타인인의 보편성을 거부하는데, 그때 잘랄의 사냥용 '맹견'들이 왈리드를 물어뜯으려 한다. 전체주의 내에서 보편성은 선택이 아니라 협박이자 강제다. 또 사냥꾼으로서 잘랄은 숲에서 유유자적 자유롭게 살고 있던 멧돼지를 사냥한다. 멧돼지를 사살한 이후, 자신의 '사회적 위신'과 '만족감'을 위해서 쓸쓸하게 참수당한 사냥감을 모델로 삼아 '사진'을 남긴다. 즉 전체주의는 개인을 사냥하여 전체의 이익을 드높이고, 또 개인이 전체에서 이탈하려할 시에도 사냥한다. 

또 다른 상징은 바로 '건물'이다. 본 작품에선 다수가 함께 북적북적 모여 사는 거대한 '공동 주택'이나 '전원주택'이 눈에 띈다. 공동 주택 안에는 왈리드의 신경을 벅벅 긁고, 자신의 생각을 마냥 상대방과 '동일시'하는 무례한 이웃들로 빼곡하다. 그의 부모가 사는 전원주택에선, 잔치를 열 때마다 식구들을 사실상 강제 동원한다. 그래도 각각의 '가구'는 공동 주택 내에서 독립된 거주 공간을 구획하고, 가구 속에서도 식구들은 각자의 '방'을 나누어 사적인 공간을 점유한다. 그래서 형식상으론 서로의 독립적인 공간이 보장되어 있다. 그런데 건물에 문제가 발생한다. 문이 삐걱거리고, 배관이 새며, 천장과 벽엔 누수도 발생한다. 이는 건물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고, 각자가 책임져야 할 사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이때 건물에 함께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제에 전혀 책임이 없는 이웃을 소환해서 고쳐달라고 부탁, 사실상 강요한다. 항상 지나친 요청을 받는 왈리드는 거부하기 버거워 한다. 여기에 정치권력과 국민들 간의 관계가 반영된다. 집다운 집으로서 국가를 제공하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무만 짊어지게 만드는 전체주의로 국민을 착취하는 국가, 같은 국민이자 민족이라는 이유로 전체를 위해 희생해달라는 뻔뻔한 태도가 말이다.    

 

이에 개인들은 '아프다.' 왈리드는 작가다. 본래 은행원이었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일을 관두고 작가가 되었다. 은행원이 타인의 돈을 관리하는 이타적인 직업이라면, 작가는 타인이 볼 수 없는 '나만의 관점', '내 머릿속에만 있는 생각', '내면' 등을 가시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주관적인 직업이다. 왈리드는 작가가 됨으로써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전체주의가 작가의 주관성을 침해한다. 목소리나 음악 등 청각으로 타인의 집을 넘나들거나, 잘랄네 집의 현관문을 막무가내로 열고 쳐들어오는 ‘불한당’들처럼 사적인 시공간을 침범하는데, 이때 사람들은 '질병'을 앓거나, '어둠' 속에 빠져 보이지 않는다. 지리 수업에서 수도를 침탈당한 팔레스타인 소년 사샴은 '복통'을 호소하고, 의사는 영화의 제목인 지중해 열병이 원인일 수 있다며 의심한다. 비록 사샴의 복통은 지중해열이 아니라 스트레스성이었지만, 소년의 책임이 아닌 선조들이 물려준 유전병은 유전이라는 거대한 민족, 곧 전체주의에 의한 피해의 상징이다. 외에도 왈리드의 친구는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어서 인공호흡기와 산소탱크를 대동하지 않으면 삶을 유지하기 어렵고, 왈리드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 누르도 심리적으로 유사하다. 우울증이란 내게 소중한 것을 박탈당했을 때 발생하는데, 그들에게 소중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요, 전체주의가 값진 자신을 앗아가기에 발병한다. 

왈리드는 우울증에 더해 '폐소공포증'까지 동반된다. 어둠이 개인의 주위를 빼곡하게 칠하고 에워싸는 상황에서 왈리드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 ‘어둠’ 또한 전체주의의 상징이다. 식구들이 누르 또한 갑갑하게 에워싼다. 예법을 강요하고, 사적인 약속을 금지하며, 그녀가 낳지도 않은 단지 동생일 뿐인 사샴을 돌보라 강요한다. 누르라는 개인은 전체주의의 어둠에 잠식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어둠이 점점 더 엄습하여 왈리드의 작업실을 보이지 않게 만들고 소중한 그의 삶을 은닉하기에, 공포를 느끼는 왈리드는 살아야 할 이유를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그가 죽여 달라고 간청하는 곳, 멧돼지가 죽고 잘랄이 자살하는 장소가 바로 어둑어둑한 ‘밤의 숲’이다.      


하지만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국가에 속하고, 사회적 동물로서 타인과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영 우울증에 걸린 채로, 전체주의에 순응하며 살아야 하는가? 전체주의는 일방적인 희생이자 강요다. 왈리드가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 그래서 자아를 박탈당한다. 그렇기에 하즈는 왈리드와 잘랄의 건전한 관계를 제안하며 전체주의의 일방적인 희생이나 강요 대신, 상호 능동적인 배려와 희생에서 출발하는 ‘사회주의적 공동체’를 제안한다. 분명 둘의 관계 또한 이기적인 측면이 있다. 잘랄은 소음과 간섭, 왈리드는 창작을 위한 수단이자 청부살인업자로서 상대를 도구로 착취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여 상대에게 헌신한다. 잘랄은 왈리드에게 돈을 받지 않고 그의 집 배관 문제와 부모님 댁 누수를 바로잡아준다. 왈리드 또한 잘랄을 위해 케이크를 구워주고 많은 돈을 흔쾌히 건네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 잘랄을 건져낸다. 그가 누굴 사랑하고, 또 그라면 어디에 있을지를 진정 사려 깊게 생각하며 말이다. 

그렇게 상대를 구속하지 않고, 그저 스스로 빛날 수 있게 상호 조력할 때, 전체주의에 의해서 멈춰선 카메라를 탈피한다. 살 떨림과 박동이 느껴지는 '핸드 헬드'로 전체주의의 사회적 테크놀로지인 건축의 '실내'를 벗어나며, 그렇게 널따란 야외로 나아갔을 때 '트래킹 숏'과 '익스트림 롱숏'이 동원된다. 문을 뛰어 넘어 자유롭게 공간을 누비고 선택할 수 있을 때, 올라의 표현으로 왈리드는 명랑하고 경쾌해진다.     


그러나 이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하즈는 전체주의가 구성원 다수를 착취하고 희생시키듯, 일상에 만연한 ‘이기주의’ 또한 나를 위해 타인을 '살해'하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 왈리드는 잘랄에게 자기를 위해 살인의 짐을 짊어져달라고, 부탁으로 위장한 가스라이팅을 한다. 안 그래도 잘랄은 고리대금업자의 도구로 전락하여 위협을 당하고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는데, 왈리드 마저 동정심을 자극하며 삶을 피로 얼룩져 달라 압박하니, 제 소중한 삶이 타인에게 착취당하며 수세에 내몰린 잘랄은 자살을 택한다. 반면 이기적인 왈리드는 극의 말미까지 죽지 않는다. 잘랄을 착취하여 소중한 나를 고양한 왈리드는 우울증을 조금이나마 극복하고 귀중한 제 삶을 바로잡는다. 

결말에서 왈리드는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죽어야 하나, 살아야 하나."라고 고민하는 체호프의 문구를 자신의 글에 인용한다. 마찬가지로 아주 화창하고 맑은 날에 왈리드가 고민하는 와중 잘랄의 죽음으로 비게 된 옆집에 새로운 이웃이 도착했다. 그리고 왈리드는 새 이웃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조용함을 선호하는 그에게 향후 방문하겠다고 말한다. 새 이웃은 ‘마취과 전문의’다. 잘랄처럼 자신이 바라는 자살 욕구를 실현시켜줄 수 있는 존재,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존재에게 방문할 수 있다면 스스로 삶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오직 타인에 의해서 가련히 희생되길 바라는 이기적인 나르시스트는 결코 제 삶을 놓지 않을 것이다.

즉 전체주의와 이기주의는 전체와 자신만 생각하는 나르시시즘에 빠져서 타인을 착취한다는 점이 동일하다. 이를 기원한 민족주의, 팔레스타인의 생활사 등을 하즈는 여러 상징을 동원하여 풀어낸다. 소위 '영화적'이라고 말할 법한 연출에서의 성취는 덜 도드라지지만, 팔레스타인의 오늘날을 일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지적이고도 진지한 각본임에는 틀림없다. 작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각본상을 받은 것이 납득이 간다. 더욱이 무겁고 어려울 수 있었던 내용을 장르적 문법과 절충하여 경쾌하고도 가볍게 풀어낸 점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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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807 집에서(아랍영화제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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