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고 채워지고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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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298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만 했고, 새로운 세대를 알아야 했다. 특히 아는 사람의 이름이나, 이전에 가깝게 지내던 사람의 이름이 기사에서 발견되면 나는 달려들어 읽었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새로운 이름들도 많이 나와 있었다. 새로운 활동가들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열정적으로 그들을 알려고 노력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한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로마의 베스파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닌다. 여유롭게 도로, 거리, 골목 이곳저곳을 누비는 그를 촬영하는 영화는 매우 자유롭다. 느슨한 일상을 포착한 시각에 그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아무렇게나 삽입되어 자유분방함은 배가 된다. 이는 본 영화가 그의 '일기'이기 때문이다. 난니 모레티 자신의 일기를 스크린에 옮겨온 작품 <나의 즐거운 일기>는 주관으로 확장되어가는 세계, 타인, 예술에 대한 지론을 총 3장에 거쳐서 보여준다. 1장 베스파는 자기중심적인 일기의 특징을 부각한다. 타인과 수다스럽게 대화하는 모레티, 그는 언제나 제 얘기를 하느라 바쁘고, 타인들은 항상 청취하는 입장이다. 또 언제나 그가 만나고 싶은 사람만 골라 만난다. 일기란 바로 그런 것이다. 공적인 것, 유용한 것, 객관적인 것에서 벗어난, 매우 사적이고 진솔하고 자유분방한 오직 나만의 것, 하지만 우리는 일기에만 머무를 수 없다.
2막에서 모레티는 섬에 간다. 물론 거기서도 그의 변덕은 이어진다. 처음 도착한 섬이 너무 소란스러워 좀 더 조용한 섬으로 이동한다. 자신의 작업을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거기서 모레티는 타인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다. 바깥에 나오니 부모들이 눈에 띈다. 부모는 자식이 걱정되어 집에 전화를 건다. 어른들과 아이는 ‘전화기’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이 동일하지만, 그들은 수신자와 발신자, 걱정하는 쪽과 아무렇지 않은 태도 등이 다르다. 모레티는 바로 그 타인의 다름에 집중한다. 또 섬에는 TV가 없어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선택할 수 없고, 내가 원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이 산발적으로 펼쳐져 있다. 나와 다르거나 무관한 것들에 주목하며 각본을 쓴다.
3부도 유사하다. 자신의 가려움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의사가 필요하다. 타인이 나를 관찰해야 하고, 이로써 '시선'을 다각도로 바꿔야 한다. 의사가 나를 보는 시선, 내가 나를 보는 시선을 교정함에 문제가 비로소 해결된다. 즉 본 작품은 가장 사적인 일기를 영상화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이웃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궁금증을 해소하며 세상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20세기, '나의 영화'를 만들던 모레티는 이 작업을 위해 3막 구성을 취했는데, 21세기에 이르러 나뿐만 아니라 '모두의 영화'를 만드는 모레티는 신작 <일층 이층 삼층>에서 이와 유사한 3막 구성을 취하고, 가족, 타인, 이웃에게 눈길을 돌린다.
1953년 브루니코 태생의 난니 모레티는 동시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거장 중 한 명이다. 그의 작업은 ‘1인 제작 시스템’으로 유명한데, 모레티 자신이 직접 각본, 편집, 연기, 배급까지 일임하는, 가장 옹골찬 형태의 작가주의를 추구한다. 그가 최근 발표한 다큐멘터리 <산티아고, 이탈리아>에서 천연덕스럽게 “난 주관적인 영화를 만들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혼자이기에 버겁지만 그만큼 타인이 없어서 제약 없는 환경에서 자유롭고도 솔직하게 제 이야기를 한다. 장편 데뷔작 <나는 자급자족한다>에서 모레티 본인이 직접 주연을 맡은 미셸을 통해,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는 예술론을 천명한 바 있다. 아내와는 이혼했고, 연극을 위해 이곳저곳 발품을 팔지만, 제작을 지원받기가 쉽지 않다. 당시 20대였던 모레티는 20세기를 주름잡았던 이탈리아 기성에 순응하지 않는 자기 색채를 펼쳐 보이고 싶고, 또 주류문화인 미국에 대항하는 고유한 이탈리아 문화를 지키고 싶다. 하지만 그의 연극은 매우 실험적이어서 대중들에게 외면당하고, 또 기성과 절충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며, 궁핍한 생활에 양육권도 포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은 예술혼을 1인 제작 시스템에서 비롯한 소박한 양식, 오직 꿈에서만 실현 가능한 청년들의 창작을 초현실적인 편집에 반영하고, 즉흥적이고 솔직한 반응을 과감하게 표현하며 향후 전개될 모레티의 작품세계를 예고한다.
데뷔 이후 20세기의 모레티는 ‘정치 풍자 코메디’로 이름을 널리 알린다. <빨간 비둘기>가 대표적인 작품으로, 당시 야당이었던 공산당 정치인 미셸의 시선에서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외부에 반항할 힘은 있지만, 자력으로 운전하거나 이를 넘어설 수 없는 야당의 한계, 정치를 상징하는 수구 경기보다도 TV에서 방영되는 오락물 <닥터 지바고>에 관심 갖는 사람들의 우민화를 꼬집는다. 그리고 모레티가 주연을 맡은 '미셸'이라는 이름은 그의 20세기 작품에서 줄곧 반복되는데, 이전 작들의 푸티지가 미셸의 기억으로 다음 작품에 인서트되는 것처럼, 그의 작품은 유기적으로 이어지며 결코 단절되지 않는다.
이후 21세기에 이르러 <아들의 방>을 기점으로 정치성을 약화하였고, 대신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드라마로 전향했다. 하지만 <빨간 비둘기>에서 도드라졌던 ‘기억의 탐구’는 21세기에도 이어진다. <빨간 비둘기>의 미셸은 사고로 기억을 잃어 타의로 끌려 다니는 상황이지만, 기억이 점차 회복되며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또 자신만 아는 기억을 현재에 반영한다. 이렇게 모레티에게 기억은 현재의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다. 한편 야당의 무능력함이 어머니의 품에 갇혀있는 유아기적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기억은 극복의 대상이기도 하다. <아들의 방>은 기억을 탐구하는 모레티의 21세기 대표작이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사망으로 식구들은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옷가지, 기억, 관계에 천착한다. 아들과 관련한 자신의 선택에 계속 후회가 남는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로 거슬러 내려갈 수 없으니, 상실의 고통 속에서 가족은 ‘현재에 집중’하며 회복한다. <악어>는 현재를 전면 부각한 영화다. 20세기에 자신을 연기하던 모레티는, 21세기의 <악어>에서는 베를루스코니를 연기하는 배우를 연기한다. 20세기의 배역이 자신과 일치하던 것에 비해서, <악어>의 그는 허구적이다. 하지만 베를루스코니라는 인물과 사건은 진실이다. 허구에 진실을 반영해야 하는 이유는 <악어>에서 촬영되는 영화를 아이들이 현실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레티는 현실로 오도될 수 있는 영화에 분명한 사실과 현재를 반영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착화된 남성성이나 아집을 내려놓고 말이다.
또 모레티의 21세기의 관심 중 하나는 상실이나 결핍이다. <아들의 방>이 그랬고 2010년대 그의 작품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나의 어머니>도 그렇다. 어머니에 의해 규정되던 나, 그녀가 없으면 불안정한 나의 미래는 두렵다. 하지만 모레티는 <아들의 방>이 그랬듯, 불안정한 나를 극복해가는 인간의 초인적 힘을 담담하게 포착한다.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에서 신도들이 바라는 강대한 교황의 초상은 온데간데없다. 그 자리에는 불안하고 나약하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갓 인간일 뿐인 교황이 놓여있다. 신도들이 그렇듯, 교황 또한 다른 누군가가 곁에 필요하다. 이렇게 최근 모레티의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타인, 가족, 공동체와의 연대다. <아들의 방>에서 새로운 구성원의 편입, <나의 어머니>에서 소중한 존재가 떠나가더라도 내 곁에 여전히 함께하는 타인, <악어>에서 새로운 시대로 도약하더라도 이전 시대의 인물들이 그들에게 조언하며 토대를 이루는 것처럼 말이다.
또 모레티의 연출은 자유분방한 것으로 유명하다. 20세기와 21세기 모두 다 영화와 현실, 과거와 현재, 의식과 무의식 등 경계를 자유분방하게 옮겨 다니고, 또 주관적 시선, 일기 등 사적인 발로가 그의 영화이기 때문에 소박하다. 물론 즉흥적이고 산발적으로 통통 튀던 20세기 모레티의 연출은 21세기 들어서 묵직해지고 있다. 21세기의 <악어>나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정도를 제외하고 모레티의 연출은 매우 담담한데, <일층 이층 삼층>에서는 연출이 더욱 진지해졌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초현실적인 충동성이 아니라, 잔잔한 정통 드라마 문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21세기 모레티의 경향이 집약되어 나타난다. <나의 어머니>에서 일련 잔존하던 유머, 가벼운 분위기조차 본 작품에서는 아예 사라진 채, 인생의 비극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만 집중한다.
3부 구성으로 이뤄진 본 작품은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총 10년의 세월을 다루고 있고, 그 기나긴 시간은 익숙한 일상을 앗아가는 대신 변화를 가져다준다. 모레티는 시간이 발생시키는 ‘사건’을 ‘연출의 운동’에 반영한다. 오프닝 크레딧, 고정된 카메라는 영화의 무대가 되는 3층 건물을 포착한다. 밤이다, 다들 잠들어 있고 빛은 희미하다. 이윽고 배우, 감독, 프로듀서의 이름이 나열된 크레딧이 전부 올라가자 한 호에 불이 켜진다. 동시에 지금껏 멈췄던 카메라가 서서히 움직이며 ‘트래킹 숏’으로 바뀐다. 카메라가 이동하는 와중 배우의 이름은 배역으로, 심지어 모레티도 ‘비토리오’라는 허구의 옷을 입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깨어난 인물들이 발을 떼며 세계에 힘을 가하자, 밟힌 세상은 꿈틀거리고 사건이 발생한다. 안드레아가 음주 운전 사고를 일으켜 누군가를 죽인다. 세상의 이동이란 삶에서 ‘죽음’으로 향한다는 듯이. 21세기 그의 작품 <아들의 방>이나 <나의 어머니>에서 식구들의 공백이 자주 발생했듯, 본 작품의 10년 동안 보행자 여성, 레나드, 비토리오가 직접적으로 사라진다. 간접적으로는 안드레아와 프란체스카, 베아트리체가 성장 및 변화하며 부모에게 각인된 ‘아이 이미지’를 벗고, 대신 낯선 모습을 새롭게 입는다. 또 유아로 퇴행하는 레너드나 임신과 출산 이후 해리성 장애를 겪는 모니카의 어머니에게서도 상실이 반복된다. 동시에 모레티는 진통이 시작된 임산부 모니카를 비추며 '탄생'도 포착한다. 움직이는 시간은 ‘짓밟으며’ 소멸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밀어내며' 무언가를 탄생시키고 꺼내기도 한다는 듯이.
이후 카메라는 더 극적으로 움직인다. 비토리오와 도라, 안드레아가 길을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트래킹 숏에, 루치오와 프란체스카가 학교로 걸어가며 소통하는 모습은 ‘달리 숏’에 담긴다. 영화 내내 유려한 카메라 워킹과 등장인물들의 ‘대화’는 한 쌍처럼 묶여있다. 움직이며 발생하는 사건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를 우리 눈앞에 들이미는 것처럼, 대화 또한 상대방에게 이동하며 새로운 앎과 국면을 보여준다. 그래서 대화 또한 일종의 사건이지만, 한편 모레티는 대화와 이동을 주로 ‘제자리걸음’으로 처리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새로운 현재를 맞닥뜨리기보다는, 익숙하고 친밀한 과거에 집착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사건이나 대화를 부정한다. 운동이 부각되는 카메라 워킹뿐만 아니라, 형식이 담아내는 이미지도 루치오와 샬롯이 대화를 나누며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이동이다. 그러나 도착한 장소가 새로운 공간이 아니라 기존의 집인 것처럼, 도라가 루이지와 함께 차를 타고 안드레아의 집에 방문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더라도 언제나 ‘전진’하며 개척하진 않고, 때론 ‘퇴행’한다.
모레티는 전진과 퇴행을 줌인과 줌아웃에 반영한다. 음주 운전 사고를 일으켜 보행자를 죽게 한 안드레아는 집을 떠나 교도소로 향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의 어머니 도라는 떠나야 하는 안드레아 앞으로 다가서며 그와 팔짱을 끼고, 그리운 과거의 아들을 붙잡고 놔주지 않으려 한다. 모레티는 이를 줌인으로 처리하기에, 영화 속 줌인은 앞으로 흘러가는 흐름을 거슬러 과거로 퇴행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모레티는 줌인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죽은 비토리오의 목소리가 남겨진 자동응답기에 답하는 도라의 행위가 무의미한 '독백'인 것처럼, 과거의 아집에 상응하는 줌인은 진실을 거부하고 거짓을 믿는 덧없는 행위다.
이와 달리 줌아웃은 과거와 작별하며 멀어지고, 대신 현재에 닥쳐온 사건과 가까워진다. 프란체스카는 목욕을 하며 “아빠 거기 있어요?”라고 묻는다. 루치오는 거기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줌아웃으로 포착된다. 프란체스카가 기억하는 아빠는 멀어졌다는 듯이. 이후 프란체스카는 부부의 침실에서 같이 잠을 청한다. 프란체스카와 부모는 가까워지면서도, 영화의 형식은 동시에 멀어진다. 루치오는 현재의 딸과는 가까워졌지만, 기억 속의 딸과는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카는 부모의 품에 의존하면서도, 이제는 거동과 인식이 불완전한 레나드를 보필할 수 있는 존재로, 과거의 유약함을 떨쳐냈다. 결말에선 세 가구 모두 다 집에서 줌아웃으로 멀어진다. 가득 채워졌던 3층 건물은 멀어지면서 텅 비어간다. 대신 지금 여기의 상대방과 가까워지거나, 현재 나의 자아와 밀착한다. 조르지오가 바라는 모니카의 모습에선 멀어졌지만, 그로써 모니카는 자유로운 자아와 가까워졌고, 자신이 위치하고 싶은 집에 도착한다. 또 도라는 과거와 결별하고 현재의 안드레아와 가까워지며, 루치오와 사라는 프란체스카와 멀어지고 자신들의 얼굴에 밀착한다. 즉 우리는 과거를 줌인하면서 현재를 줌아웃 할 것이 아니라, 과거를 줌아웃하고 현재를 줌인 해야 한다. 인간은 사건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공장과도 같은 현재에 살지, 가만히 멈춰선 박물관과 같은 과거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는 밤과 낮을 오가면서 사건을 만들어낸다. 모레티는 본 작품의 사건을 주로 ‘밤’에 발생시킨다. 교통사고, 모니카의 출산, 레나드와 프란체스카 실종, 사라와의 불화, 정전, 모니카의 사라짐 등 영화 속 주요한 사건들은 밤에 발생한다. 특히 2부에서 발생한 정전은 안 그래도 어두운 밤을 더 칠흑 같이 만들고, 그렇게 화면이 새까매진 이후에 국면이 뒤바뀐다. 사라는 루치오가 샬롯과 간통한 것을 알고 사이가 냉랭해졌지만, 정전이 된 순간 자고 가도 괜찮다고 제안한다. 또 조르지오가 항시 자리를 비우는 모니카의 집에 로베르토, 사베리오 등이 들이닥치는 시간이 밤이요, 모니카는 로베르토에게 조르지오의 비밀을 듣고 '과부'로서 외로움을 해소한다. 그리고 3부에서는 모니카가 사라진 이후 아이를 양육하는 보호자가 된 조르지오가 밤에 대문 바깥으로 나선다.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세세히 밝히는 오후와 달리, 추상적인 어둠에 뒤덮여 상상력을 자극하는 밤은 무엇을 들이거나 비워낸다.
반면 ‘낮’은 주로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규명한다. 안드레아의 죄과, 레나드의 노망 증세, 프란체스카의 학교 부적응, 사라와 루치오의 불화 등을 확인하는 시간이, 밤의 베일을 빛으로 들추는 낮이다. 하지만 낮 또한 적지 않은 변화가 발생한다. 밤에 떠난 대상이 낮에 돌아오기도 하니 말이다. 모니카가 집밖을 갑작스레 뛰쳐나가며 조르지오와 베아트리체, 로렌조가 맞닥뜨리게 된 사건, 또 비토리오 사후 유품을 정리하는 도라가 루이지를 만나는 일 모두 낮에 발생한다. 이후 안드레아와 만나 집을 정리하며 새로운 옷을 장만하는 시간도 낮이다. 오히려 도라는 밤에 안드레아를 수소문했다. 2부의 아침에 안드레아가 출소하고 부모 곁에서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말이다. 즉 밤과 낮은 특정 역할을 갖는 것이 아니라, 기존 상태에서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며 사건을 일으킨다. 이 낮과 밤이 가져다주는 변화를 인간은 거스를 수 없다. 좋든 싫든 낮과 밤을 오가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모레티는 어떻게 변화를 수용해야할지 구체적으로 탐구한다.
영화 속 사건의 주체는 남성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동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안드레아는 사고를 일으키고, 조르지오는 항상 집을 비우며, 루치오는 레나드를 협박하거나 샬롯과 외도한다. 심지어 남성은 자신이 일으킨 사건의 책임에서 도망칠 정도로 이동이 자유롭다. 반면 그들의 책임을 무기력하게 감내하는 쪽은, 남성에 비해 이동이 제한된 여성이다. 안드레아에 의해 사망하는 보행자가 여성이요, 어떻게든 이를 뒷수습하는 대상도 그 자신이나 아버지 비토리오가 아닌 도라다. 사라 또한 루치오가 일으킨 문제를 전전긍긍 수습하고, 모니카는 조르지오에 의해 강제로 독박 육아를 떠안았다.
그런 여성은 ‘귀’가 열려 있어 변화를 수용하지만, 사건을 일으키면서도 변화를 거스르는 독단적인 남성의 귀는 항상 닫혀 있다. 루치오는 사라와의, 조르지오는 모니카와의 소통을 원치 않으며, 비토리오와 안드레아는 일말의 대화 가능성조차도 원천 봉쇄한다. 특히 비토리오는 현재의 꼴통 안드레아는 없는 셈치고, 어린 날에 사랑스럽고 귀여웠던 안드레아만 그리워한다. 반면 모니카는 집에 로베르토가 방문했음을 밝히거나, 샬롯 또한 루치오와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말함에 거리낌이 없다. 사라는 루치오의 고백을 들어주고, 대화를 거부하는 안드레아의 물꼬를 어떻게든 트는 사람은 도라다.
대화 가능한 여성과 불가능한 남성, 변화를 짊어지지 않는 남성과 그 몫을 대신 떠맡는 여성을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사상은 '가부장제'다. 영화 속 남성 대부분이 집안의 '가장'이요, 여성은 가장을 보필하는 '아내'다. 모레티는 남성의 심리가 현실의 변화 대신 머릿속에 기대한 '가정의 모습'에 집착한다고 분석한다. 앞선 사례 모두 다 가정이 원하는 데로 통솔되지 않으니 남성은 더더욱 귀를 막고 독선적인 태도를 띤다. 루치오는 프란체스카와 레나드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경찰과 정신분석가의 분석을 믿지 않는다. 레나드와 틀림없이 성 비위가 있었을 것이라 단정하는데, 성 비위는 1부에서 미성년자였던 샬롯에게 자신이 저지르게 된다. 어쩌면 그는 레너드와 프란체스카에게 자신의 죄의식을 투영하여 바라봤는지 모른다. 성적 공포 이외의 프란체스카가 학교생활에서 느끼는 불안, 교통사고와 같은 원인을 수용하지 않는다. 조르지오 또한 마찬가지로 그는 형 로베르토와 불화가 있다. 로베르토와 모니카가 친밀한 사이였던 것이 싫고, 모니카가 자아 없이 가장 뜻대로 행동했으면 한다. 그래서 로베르토가 보낸 선물을 반송하고 그를 협박하며, 모니카에겐 항상 거리를 두라고 당부한다. 모니카는 조르지오에 의해서 원치 않는 상태로 변형된다. 외에도 3부에서 루이지는 도라의 집에 불쑥 나타나거나, 상세히 설명해주지 않고 그녀를 아그네세의 집으로 데려간다. 또 5년 만에 만난 안드레아는 여전히 도라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변화를 거스르는 남성들은 현재에 고립되고 불완전해진다. 그들은 각자의 방에 놓인다. 함께 놓인다면 다투고 싸우기 바쁘다. 대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토리오와 안드레아처럼 말이다. 사라와 루치오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 비토리오가 놓였던 화장실이 잠기며 외부와 단절되고, 이후 다시 나오더라도 안드레아나 도라와 대화하지 않는다. 창문 너머로 안드레아가 살해한 여성의 남편이 보이지만 안드레아는 다가가지 못한다. 루치오와 사라는 침실과 거실에서 각각 따로 잔다. 심지어 모니카와 조르지오는 따로 자는 것을 넘어서, 서로 다른 지역에 있고 영상 통화를 통해 다른 매체로 얼굴을 바라본다.
반면 대화를 시도하는 여성들은 현재로 이동하여 문제를 극복하고, 또 타인에게로 참여하여 연대하고 보완한다. 그녀들은 서로 방문을 긍정한다. 레너드와 지오반나에겐 사라가, 홀로 육아를 하는 모니카에겐 도라와 로베르토가 찾아온다. 방문한 이들은 프란체스카를 돌봐주거나 말동무를 해주고, 또 육아를 보조해주며 침입한 까마귀를 내쫓아준다. 또 사베리오가 모니카에게 로베르토의 책무를 따질 때는, 베아트리체의 목소리가 방문을 넘어서 어머니를 구제해준다. 1부에서 안드레아는 창문 너머의 피해자에게 차마 말붙일 수 없었다. 하지만 3부에서 결혼한 안드레아가 유족에게 편지와 꿀을 보낸다는 것을, 도라가 유족을 방문하여 알게 된다. 말문을 닫았다. 이로써 연결이 끊긴다. 타인뿐만 아니라 사건과도 분리한다. 그러나 다시 입을 떼고 귀를 열어서 연결한다. 자신의 경솔함으로 발생한 상실을 몸소 책임진다.
운동이 가져다주는 새로움은 좋을 수도 있지만, 분명 나쁜 것도 동반할 수 있기에 우린 변화를 두려워한다. 3부 도라의 동공에 변화를 거부하는, 난민 혐오 여론이 들끓는 이탈리아의 현 주소가 비친다. 또 도라는 비토리오와 안드레아 어느 누구도 없이, 여성으로서 제 한 몸만 남은 상황이 불안하다. 프란체스카는 스페인 유학을 원하지만, 이와 동시에 새로운 환경이 걱정돼서 신경이 곤두선다.
하지만 바로 그 변화로 가득한 곳이 현재요, 우리는 거기에 산다. 모레티는 우리가 맞닥뜨린 현재를 카메라로 똑똑히 응시하며, 이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 변화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여성에게, 희망이란 가부장제의 철폐에서 맺힌다고 말한다. 결말에서 대다수의 여성들은 자아를 찾고, 남성들은 변화를 긍정한다. 도라는 망자가 된 비토리오와의 대화를 중단하며 비로소 현재로 빠져나온다. 그리고 살아 있는 안드레아와 대화한다. 망자와의 대화는 기억의 반복이었기에 새롭게 채워지는 것이 없었던 반면 현재에 참여한 모자는 신선하게 탈바꿈한 서로를 환대한다. 모니카는 베아트리체만 낳았을 때는 혼자서 육아를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렌조까지 낳은 상황에서 남편이 떠넘긴 몫을 홀로 유지하기 어렵다. 임신과 출산을 한 모니카에게 ‘까마귀’가 날아든다. 까마귀는 불길하고 꺼림칙한 변화를 예고하는데, 모레티는 이를 줌인한다. 처음에는 까마귀에 근접하며 그래도 변화를 긍정하지만, 까마귀가 제 삶을 아예 박탈하는 변화를 불러올 때 그녀는 더는 참지 않는다. 멀어지는 모니카는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변화를 택한다. 그녀의 빈자리에서 남성은 귀를 열어 내팽개친 책임과 그간 외면하던 변화를 수용한다. 이로써 현재를 거부하며 비롯된 많은 우환들이 비로소 타개한다.
정리하며 본 작품은 <나의 즐거운 일기>의 3막 구성에 21세기 모레티의 특징이 한데 종합한다. 마르게리타 부이와 난니 모레티가 분하는 비토리오와 도라 이야기는 그들이 출연했던 <아들의 방>과 <나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든다. 또 모니카 및 루치오 이야기는 교황의 특정한 이미지를 고집하는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가 연상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적극적인 카메라 워킹과 운동이 감지되니, 2020년대의 모레티는 시간의 흐름에 더욱 집중함을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2010년대까지는 '내 가족'에게 발생한 변화에 귀를 기울였다면, 본 작품에서는 '여러 가족'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일일이 주목한다. 그래서 ‘내’ 가족을 포착한 2010년대 작품엔 ‘나’의 통통 튀는 주관이 연출에 반영되어 있었는데, 자신을 아예 거두고 타인과 세계에 집중하는 본 작품에서는 그런 가벼움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로써 아주 진지하고 묵직해진 그의 영화가 누군가에겐 평범하게 느껴질 수 있다. 피상적으로 보기에 본 작품은 여 타 드라마와 별 다를 바 없는 통속적인 구성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3층에 사는 각기 다른 가족을 편집으로 이어낸 입체적인 구성은 다채롭지만, 복잡한 구성으로 탐구한 문제들의 깊이는 다소 얕다. 21세기 모레티의 강점인 상세한 심리 및 내면 묘사가, 복잡한 구성과 편집에 치중하느라 다소 납작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본 작품만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레티는 본 작품의 통속성에 질문을 던지며 드러마의 의의를 찾아내려 고군분투한다. “통속극을 구성하는 사건들은 어째서 발생하고, 이는 우리네 삶에 어떤 파장을 일으키며, 여기엔 어떤 성 역할과 관행이 반영되어 있는가?” 여전히 1인 제작 시스템으로 영화를 창작하는 모레티는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자신이 제기한 질문에 솔직한 답변을 한다. 또 영화 전반적으로는 위트를 잃었고, 모레티도 아주 진지한 배역을 연기할지언정, 20세기를 대표하는 '희극인' 중 한 명인 모레티는 비워졌지만 새로이 채워지는 춤과 노래를 잃지 않는다. 즉 모레티가 체감하는 현실과 시대가 여전히 그의 영화에 반영되고 있기에, 그 사실은 모레티를 제외하곤 누구도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독보적인 주관성을 자랑하는 그의 영화는 감상해야할 가치가 있다.
감상일: 230811 집에서(MUBI 스트리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