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신자유주의
“모든 것은 우리가 챙기고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애덤 스미스-
칠레의 군인이었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칠레 민중들이 '민주적으로 정당하게' 권력을 부여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1973년 쿠데타를 일으켜 무너뜨린다. 권좌에 오른 피노체트는 곧바로 계엄령을 시행했으며, 자신을 반대하는 칠레 국민들을 집권 기간 동안 무참하게 탄압하였다. 아옌데가 칠레의 주권을 바로 세우려 했다면, 피노체트는 자신의 권력만을 위해서 칠레의 많은 것들을 극악무도하게 착취하였다. 그에 의해서 양기를 잃고 황폐해진 칠레의 풍토, 이는 영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칠레 시네마를 국제적으로 처음 알린 다큐멘터리 거장 '파트리시오 구즈만'을 시작으로, 21세기에 칠레 시네마를 알린 젊은 기수들, '페르난도 구초니', '도밍가 소토마요르 카스티요', '마누엘라 마르첼리' 등의 작품에서 피노체트가 은폐하려한 진실과 짓밟힌 기본권이 신음하고 있다. 본 작업은 <재키>와 <스펜서>로 유명한 ‘파블로 라라인’도 초기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계속 해왔다. 201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활동하던 그는 오늘날 떠돌고 있는 피노체트의 망령을 경고하기 위해 칠레로 돌아간다.
1976년 산티아고 태생의 파블로 라라인은 동시대 칠레 시네마를 대표하는 시네아스트로, 현재는 미국에서 작가적 색채를 반영한 전기영화를 연출하고 있다. 할리우드에서도 자신의 색채를 잃지 않긴 했지만, 분명 칠레 시기와 미국 시기의 라라인은 어느 정도의 괴리가 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간 <공작>을 파악하기 위해선 그의 본토 영화들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일단 그의 칠레 스타일은 ‘정치적’이다. 이는 초기 대표작인 '피노체트 3부작'에서 도드라진다. 피노체트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토니 마네로>와 세 번째 작품인 <노>는 서로 얽혀있다. <노>에서 피노체트는 대중들에게 영영 도래하지 않을 약속을 남발하고 휘황한 가상에 빠져들게 만드는데, 그것이 <토니 마네로> 속 대중문화에 잠식된 주인공이 헛된 꿈을 꾸는 이유다. 또 피노체트가 독재를 위해 모든 것을 압제하는 폭력적 태도가 당대 민중 사이에 깃들고 모방되어 <노>에서 피노체트의 'YES' 신화를 위해 진실이 탄압받는 것처럼, <토니 마네로>에서 가상을 위해 무수한 현실이 희생된다.
이러한 영화들이 만들어진 계기가 된 피노체트 독재의 서막은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포스트 모템>에서 열린다. 라라인은 35mm 렌즈와 16mm 필름을 오묘하게 결합시켜 뿌연 잿빛 미장센을 만들어낸다. 이를 피노체트 독재에 빗댄다. 피노체트 이전, 아옌데 집권 당시에도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개혁을 가로막는 서방의 개인주의로 둔갑된 이기주의, 돈으로 인간조차도 소비하는 자본주의와 이로 인한 부패, 계급 갈등이 분명 칠레에 존재했다. 라라인은 아옌데 시절을 미화하지 않는다. 다만 객관적으로 민중들이 시위가 가능했고, 정치적 모임이 활발했으며, 개인 대 개인의 소통과 유대가 가능했던 사회적 분위기를 적확히 묘사한다. 그것을 피노체트가 짓밟았다고 진단한다. 라라인은 자신에게 부응하지 않으면 무참히 짓밟는 파시스트의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태도가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도 자리해 있었음을, 차갑고도 서늘한 현실 그 자체와 일치하는 느린 ‘롱테이크’로 고발한다.
피노체트 3부작 이후 공개한, 기독교의 위선을 첨예하게 까발린 <더 클럽>도 마찬가지다. 라라인은 언뜻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이는 기독교 공동체를 묘사한다. 수녀 한 명과 신부 여럿이 모인 소규모 사회다. 이는 피노체트 집권 당시 독재정권에 맹렬히 저항하며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아올린 기독교의 외피다. 하지만 그 이면은 추악하다. 라라인은 실제 칠레 가톨릭 교구에서 발생한 아동 성범죄를 폭로한다. 외부에서 이를 징계하기 위해 영적지도자가 도착하고, 성범죄 피해자가 공동체 주변을 서성거리지만, 폐쇄적인 공동체는 그들을 위협하고 회유하거나 떠나게 만들어 부패한 '클럽'은 되풀이된다.
마지막으로 칠레에서의 근작 <에마>는 춤과 여성의 욕망을 소재로 하여 가부장적인 세계를 전복하는 작품으로, 칠레에 팽배한 남성 우월주의를 과격하게 꼬집는다. 물론 <에마>에서 여성의 욕망은 방종, 가부장제의 성별만 뒤바뀐 반복이기에 라라인이 옳은 대안을 제시한 것이라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분법적 젠더로부터 무한한 젠더, 새로운 가족 형태 등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이행을 일상 속에 이식하려는 시도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런 그가 다시 피노체트로 되돌아간다. 물론 오롯이 과거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피노체트의 망령이 저물지 않고 여전히 현재를 떠돌고 있다는 이야기이므로, 그는 과거를 비추며 오늘날을, 곧 현재에 되풀이되는 역사를 비춘다.
오늘날에 엄습한 과거의 위협을 바라보는 본 작품은 '흑백'이다. 라라인의 작품에서 이따금 간헐적으로 흑백이 침투하긴 했었다. 당장 재클린 케네디의 흑백 푸티지를 재현하던 <재키>가 떠오른다. 하지만 <공작>처럼 흑백이 전면 사용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더욱이 지금까지 35mm 필름과 16mm 필름을 결합한 영화를 연출해오던 그가 처음으로 본 매체를 포기하고 흑백 디지털로 형식을 바꾸었는데, 그렇다면 고집스럽게 유지해온 매체를 바꿀 정도로 본 작품은 라라인의 그간 작품들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본 작품이 흑백으로 바뀌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변화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 흑백의 역사성부터 거슬러 올라가보자면, 흑백은 영화 기술의 탄생과 함께 태어난 '시원적인 매체'라 할 수 있다. 고로 영화가 흑백이고, 흑백이 영화다. 영화가 죽을 때 흑백도 사라지고, 흑백마저 사멸할 때 영화도 끝장날 것이다. 즉 흑백이란 영화의 시작과 함께했고, 영화의 최후까지도 함께할 태곳적이고 궁극적인 양식이다. 둘은 야누스의 얼굴이자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러한 흑백의 특성은 영생하는 뱀파이어가 상징하는 '인간 본성'이랄지 '이데올로기'가 인류의 시작부터 최후까지 쭉 불멸할 것임을 예언하는 불길한 형식이랴. 뱀파이어가 상징하는 탐욕스럽고 저질스러운 인간이 죽어야만 추한 본성과 사악한 이데올로기도 비로소 종말을 맞고, 반대로 추한 본성과 사악한 이데올로기가 없으면 천한 인간이 아니다.
또한 뱀파이어라는 소재만 놓고 본다면, 그들은 결코 '태양'에 노출 되어선 안 된다. 불멸의 존재이지만 영화에서처럼 '심장'을 공격당한달지, '참수'당해 목이 잘린달지, 마지막으로 '태양'에 노출되었을 때 그들의 불멸은 덧없어진다. 이 세 가지 퇴치법 중 흑백은 바로 햇빛을 차단한다. 흑백은 뱀파이어가 불멸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그렇다면 영화 시작부터 존재해온 양식이자 뱀파이어를 위한 매체로서 흑백에 흡혈귀가 거주함으로써 영생하는 '무언가'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영화에선 여러 뱀파이어가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극의 시작 전부터 뱀파이어였고 최후까지 살아남는 흡혈귀는 영화의 주인공인 피노체트와 그의 모친인 '마가렛 대처'다. 나머지 흡혈귀이자 중간에 뱀파이어가 된 표도르, 카르멘, 루시아는 모두 살해당하고 마는데, 즉 여러 뱀파이어 중에서도 시작부터 존재했고 최후까지 생존하는 뱀파이어들의 특권이 있다는 말이다. 그 둘의 공통점은 '독재자' 내지는 '철인'으로서 엘리트주의를 주창했고 기득권을 비호했으며, 20세기 후반에 태동하여 오늘날까지 끔찍한 '계급 불평등'을 야기한 '신자유주의'의 옹호자란 점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희대의 대사기극, '낙수효과'를 주장하며 기득권이 분이 넘치는 돈을 벌면 알아서 프롤레타리아가 수혜를 입을 것이라 선동했다. 이를 위해서 기득권이 많은 돈을 벌도록 크나큰 '면세' 특권을 부여하였는데, 신자유주의를 이끈 그들은 영화 내내 부를 쌓아둔다. 낙수 효과는 사기이기에 결코 그들의 돈은 아래로 향하는 법이 없다. 이로써 불평등을 강화하는 신자유주의는 부르주아가 계속 부르주아이게, 프롤레타리아는 계속 프롤레타리아이게끔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제거한다. 그 사이에 낀 신흥 기득권, ‘쁘띠 부르주아’들이 표도르, 루시아, 카르멘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이 감히 부르주아를 넘보는 욕망도 불허한다. 이에 영화에서 살아남는 것은 처음부터 최후까지 부르주아일 할머니 대처, 아버지 피노체트, 그리고 그의 자식들이다. 신자유주의의 면세 특권은 곧 상속세에도 적용되어 부유한 자는 죽은 이후에도 부유하다. 반면 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신흥 뱀파이어'가 되어 그들의 자리를 넘본 표도르와 카르멘이자, 대처나 피노체트의 피가 섞이지 않아 상속을 받을 수 없는 루시아요, 이들이 착취하는 이름 모를 프롤레타리아들이다.
라라인은 뱀파이어, 곧 영속하는 부르주아의 하위 계층 착취를 상세하게 분석한다. 도입부, 라라인의 카메라는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숨어있는 피노체트의 거처를 촬영한다. 그는 피노체트가 소유한 '사물'들을 고정된 카메라를 이용한 '필로우 숏'에 담아낸다. 사물들은 무생물이기에 움직이지 않는다. 더욱이 사물은 피노체트의 소유이자 그에 의해서 특정한 목적을 부여받았으니, 그들을 예속하는 피노체트의 허락 없이 움직일 수 없다. 피노체트의 야심과 목적에 따른 도구로서 얼어붙는다. 반면 능동적인 '달리 숏'이나 '트래블링 숏'이 허용되는 대상은 깨어난 피노체트다. 심지어 단순하게 걷는 수준이 아니라, 중력을 거슬러 날아다닌다. 사물과 달리 무제한적인 이동권이 보장된다. 하지만 마냥 날 수는 없다. '젊은 인간의 피'를 빨아먹어야만 영생을 유지하며 날 수 있다. 그 영생은 '쾌락'의 동의어다. 오랜 세월 살아온 피노체트의 곁에는 항상 '매춘부'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젊은 수녀 카르멘까지 있으니, 이를 위해서 피노체트는 죽으려 하다가도 다시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 즉 그의 쾌락을 위해서 '인간 사냥'이 시작되는데,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노동계층들은 살아있을 땐 피노체트처럼 카메라 워킹이 부각되었다. 왜냐하면 독재자는 공식적으로 죽었다고 알려져 있고, 형식 상 민주주의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그들 또한 어디로든 가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죽지 않은 피노체트, 곧 소수의 이동권과 자유만 허용하는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노동자들은 싸늘한 주검이나 토막 난 얼굴로 전락하여 멈춰서고, 카메라는 얼어붙은 필로우 숏과 같아진다. 즉 소수 기득권의 쾌락을 위해서 타 인류를 사물이자 무생물로 전락시키는 법이 인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체제와 이름만 바꿔서 존속해온 신자유주의적 이념이다.
라라인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사회를 분석한다. 가장 먼저 신자유주의를 이끄는 독재자들과 '기독교'와의 관계다. 영화에서도 언급되듯, 피노체트 정권을 칠레의 '기독교민주당'이 견제했다. 교회에서 파견된 카르멘은 피노체트의 몸에 악마가 깃들었다고 주장할 정도다. 또 <공작> 바깥에서도, 피노체트 정권 당시 기독교는 독재자에 의해서 핍박받는 이들을 숨겨주는 선인으로 등장한다. 마누엘라 마르첼리의 <1976>이 대표적이다. 칠레 기독교에게 피노체트는 '정화'해야 할, 심지어 카르멘의 태도로 보건데 '살인'까지도 망설이지 말아야 할 사탄의 화신이다. 그런데 말이 안 되게도 카르멘은 그런 피노체트와 사랑에 빠진다. 또 영화에선 기독교민주당 역시 피노체트 못지않게 부패했다는 사실이 언급되고, 애초에 라라인은 <더 클럽>에서도 그랬듯 칠레 기독교를 '위선자'라고 꼬집으며 긍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칠레 기독교는 사탄, 곧 피노체트가 존재해야만 '구마'하는 자신들의 입지를 보장받을 수 있기에 독재자와 상부상조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피노체트와 대립하면서도 일련 협력한다. 피노체트 일가가 '가부장적'이고 '여성 편력'이 극심한 모습으로 등장하기에, 기독교는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미녀'와 뇌물로 매수 가능한 '공모자'로 등장한다. 피노체트 일가의 마음에 쏙 든 카르멘은 그를 유혹함과 동시에, 그를 살해하여 독재자가 가진 무수한 자본을 손에 쥐고 기독교를 다시 부흥하려 한다. 즉 기독교는 독재자를 질투하고 견제함과 동시에, 그 앞에서 아첨하고 굴종한다. 그들을 증오하면서 자신들의 존재 당위성을 내세움과 동시에, 광대처럼 눈요기가 되면서 콩고물을 받아먹는다. 궁극적으로 그들이 사랑하고 목표로 삼는 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내어주는 콩고물’로, 기득권을 전복하고 부와 명성을 거머쥐어 권좌를 갈취하는 순간을 꿈꾼다. 카르멘이 뱀파이어가 되어 날아다니는 것처럼, 그들은 저 높은 천상에 오르고자 기도한다.
이 이중적인 감정은 피노체트와 자손들 간의 관계에도 반영된다. 피노체트의 자식들은 그에게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것이 기정사실이다. 신자유주의는 그들의 상속세도 면제할 것이기에 자손들은 유산을 한 톨도 안 빼놓고 모조리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죽었을 때의 일이다. 가장이 살아있을 때, 피노체트의 부는 먼지 한 톨도 자손들에게 내려오지 않는다. 그래서 피노체트를 둘러싼 가족들은 이중적인 책략을 계획한다. 죽고 싶어 하는 그가 먹는 음식에 피를 섞어서 억지로 목숨을 부지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상속을 확실하게 정하기 전까지 그는 죽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이후 카르멘에 의해서 유산의 윤곽이 드러나자, 이젠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한정되어 있는 다수의 부를 늙은 기득권이 독점하고 다른 계급이나 젊은이들에게 내어주지 않음에 '패륜'이 발생한다. 흡사 그리스 신화 속 우라노스-크로노스-제우스의 왕위를 노리려는 자식들의 반란이 연상되는 극의 후반부, 신자유주의는 패륜적인 '부친 살해'를 불러온다.
라라인은 이를 연출로 가시화한다. 본 작품은 아주 잔혹한데, 이 끔찍함에만 주목하게 만드는 형식이 도드라진다. 그간 라라인의 형식적 특징 중 하나는 프레임 정중앙에 인물의 얼굴을 배치하고, 그들을 인터뷰하거나 취조하는 듯한 다큐멘터리 구도였다. 본 특징이 <공작>에서도 이어지긴 하지만, 어째 그간 라라인의 색채보다는 다른 시네아스트의 느낌이 더 강하다. 바로 '웨스 앤더슨'이 떠오른다. 본래 라라인이 중앙에 배치한 인물들의 얼굴은 '키치적'이거나 '탐미적'이기보단 매우 '현실적'이었는데, 본 작품에서는 코스튬을 입고 분장한 듯한 아이코닉한 인물들이 프레임의 정중앙에 딱 위치해있으니, 마찬가지로 그런 탐미적인 피사체를 정중앙에 전시하듯 내걸어둔 앤더슨의 <프렌치 디스패치>나 <애스터로이드 시티> 등이 떠오른다. 또 본 작품에선 단두대에서 잘린 얼굴을 '골리앗의 머리를 집어든 다윗' 마냥 보여주는 숏이 재차 등장하는데, 서걱서걱 잘려나간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에서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연상된다. 더욱이 최근 앤더슨이 서사나 내용보다는, 숏이 담고 있는 '이미지와 형식' 그 자체에 몰두하는 것처럼, 라라인 또한 본 작품에서 내용은 단순하게 처리하고, 피노체트 일가의 사악한 만행이나 행위만을 순수하게 관조하기에 유사성이 느껴진다. 이로써 자르고 찌르고 쑤시는 피노체트 악행을 감상자가 체감하게끔 한다.
마지막으로 본 작품에서는 '안개'가 도드라진다. 본래 라라인의 컬러 영화에서도 안개처럼 뿌연 미장센이 특징이었다. 35mm 필름과 16mm 필름을 결합해서 만든 탁하고 오묘한 빛깔을, 영화가 다루는 불확실성이나 모호함, 답답함이란 정서에 상응시키곤 하였는데, 본 작품에서는 필름을 포기한 대신 안개를 직접 등장시킨다. 안개로 얼룩진 뿌연 세계, 이 와중에 모호함이 일순간 걷히는 순간이 있나니, 바로 피노체트가 비행하여 사냥을 시작하고 그의 후손들이 아버지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다. 즉 항상 ‘선명’하게 비춰지는 피사체는 이름만 바꾸고 매번 생존해온 뱀파이어의 탐욕과 착취요, 그렇다면 항상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것은 만인의 자유와 평등이라 하겠다. 이는 영화 결말까지도 이어진다. 이제 영화는 빛을 차단하는 흑백이라는 커튼, 곧 안개를 걷어내어 '컬러'를 드러낸다. 흑백은 앞서 언급한 속성과 함께, 우리가 오래된 앨범을 넘기면서 확인할 수 있는 '과거'에 상응하는 매체다. 반면 컬러는 '지금 여기'에 펼쳐져 있기에 오늘날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는데, 흑백이라는 안개가 걷힌 오늘날에 선명하게 접근해오는 것이 어려져서 부활과 권좌를 노리는 대처와 피노체트다.
즉 라라인은 뱀파이어로서 불멸해온 소수 기득권의 '탐욕과 특권'이 프랑스 혁명부터 오늘날까지도 반복되고 있음을 매체와 형식으로 가시화한다. 낙수효과라는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있고, 그들 자신 또한 불쌍하다고 자기 연민을 호소하는 신자유주의, 하지만 정작 그들이 잔혹하게 착취 및 도살하는 불행한 대상은 바로 다수의 인류다. 이를 눈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라라인은 여전히 현명한 비주얼 아티스트다. 다만 <공작>의 각본은 매혹적인 연출에 부합하지 못한다. 뱀파이어의 불멸을 신자유주의와 기득권의 세습에 빗대고, 역사 속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을 ‘모자 관계’로 설정한 점은 흥미로우나, 피노체트 후손들의 비자금 은닉이나 불륜 등의 부패상을 나열하는 방식은 평범하고 따분하다. 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것이 다소 납득이 가지 않는 작품, 차라리 '감독상'이 더 어울렸을 법한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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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916 집에서(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