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3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Sep 15. 2023

리즈 아코카&로만 게렛, <최악의 아이들>

현실이 영화가, 영화가 현실이

리즈 아코카&로만 게렛(Lise Akoka & Romane Gueret), 

<최악의 아이들>(The Worst Ones) - 현실이 영화가, 영화가 현실이     

“명성은 사람을 방해하고 옥죄는 반면에, 무명은 안개처럼 사람을 감싼다. 무명은 어둡고 풍만하며 자유롭다. 무명의 인간에게는 자비로운 어둠이 풍족하게 쏟아진다. 그가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진실을 추구하고 말할 것이다. 그만이 자유롭다. 그만이 진실하다. 그만이 평화롭다.” -버지니아 울프-

현실의 본질은 무질서와 파렴치, 악덕과 추함이다. 진보하고 또 진보해도 탐욕과 시기, 이기심을 거세하지 못한 인간들이 현실에 득실거리기 때문이다. 이 현실과 달리 예술은 아름다움을 지향해왔다. 단순히 물질적인 아름다움에만 그치지 않고, 정신성이나 교훈에 있어서도 아름답다고 느낄만한 것들을 모색해왔다. 이를 구상해온 과거의 예술은 비일상적인 것으로, 대중들은 특별한 날에 짬을 내서 예술을 감상하러 갔다. 일상을 초월한 이상향을 감상한 이후 속세로 되돌아온 대중들은 현실에서 예술을 보고자 했던 이유를 자각하고, 또 일상을 예술로 바꿔보고자 시도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적 예술은 일상을 뒤덮고 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지향점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전락했는데, 이는 교묘하게 현실의 추를 은닉한다. 이에 일조하는 예술 중 하나가 바로 영화다. 영화는 특히나 추한 현실을 어쩔 수 없이 반영해야만 하는 매체였기에, 한계에 더 반발하여 어떻게든 추를 덜어내려 더 안달이었다. 그런데 리즈 아코카와 로만 게렛은 그 ‘최악’을 카메라에 담아내고자 한다. 왜 피사체가 추하게 되었는지, 추의 근원과 이유를 추적한다. 이로써 현실 유리적 예술이 아닌 ‘현실 참여적 예술’을 지향한다. 

본 작품, <최악의 아이들>로 장편 데뷔하는 리즈 아코카와 로만 게렛은 둘이 함께 팀을 이룬 공동 영화감독이다. 그녀들은 영화 오디션 현장에서 ‘캐스팅 담당자’와 ‘인턴’으로 첫 연을 맺고, 이후 함께 30분이 약간 안 되는 단편, <샤스 로얄>을 연출했다. 일단 이들의 단편은 아주 시끄러웠다. 이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학교, 가정의 성격에서 비롯한다. 본 장편 데뷔작에서도 ‘학교’를 간접적으로 다루는 리즈와 로만은, 학교의 장소성을 '나를 잃게 만드는 공간'이라 분석한다. 극의 주인공 안젤리크는 ‘반항아’다. 언제나 분노와 짜증이 그녀에게 가득 차 있는데, 그 이유는 다른 학생이나 선생이 자신을 간섭, 방해, 놀리기 때문이다. 이는 ‘집’에서도 마찬가지로 장녀 안젤리크는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동생들을 떠안아야 한다. 벅찬 어머니, 부재한 아버지가 장녀 밑으로 제 책임을 달아놓는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시끄러워’야만 한다. 날카롭게 제 존재감이나 감정을 표출하지 않으면 무수한 사람들이 부대끼는 공간, 공동체, 사회에서 원치 않는 상태로 잠식된다. 

그들이 속한 사회는 매우 위험하다. 공원에는 어린 여동생 매켄지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남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유린당하지 않으려면 공격적이어야 한다. 또 학교와 가정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역에 위치해있다. 당장 집에선 시리얼이 다 떨어졌고, 앙젤리크에겐 자기만의 공간이 없는 등, 아주 기본적인 인프라조차 구비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열악하고도 협소한 인프라를 자신이 누리고자 경쟁하는 서로는 날이 서있다. 앙젤리크가 오디션에 합격하자 다른 학생들은 그녀를 질투하고 폄하한다. 제한된 기회를 어떻게든 자신이 누리고자 앙젤리크는 성격이 점점 모나진다. 이와 동시에 앙젤리크는 장녀로서 이타적이다. 리즈와 로만은 앙젤리크가 이타심을 선택하도록 한다. 이로써 인프라를 놓고 다투기보다는, 인프라를 나눠 갖고 만인을 위해서 확장할 수 있길 희망한다. 

리즈와 로만은 이를 다르덴 형제와 유사한, 또 작년 개봉한 <플레이그라운드>와 흡사한 리얼리즘 스타일로 풀어낸다. 카메라는 핸드 헬드로 거칠게 흔들리고 롱테이크가 주를 이루며, 인물을 팔로우숏으로 쫓아가고 그들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하여 아주 가까이서 촬영한다. 이런 형식을 지향하는 이유를 영화의 내용으로 보여준다. <샤스 로얄>에서는 캐스팅, 인터뷰, 카메라 테스트하는 장면이 나온다. 앙젤리크가 캐스팅된 이유는 그녀가 현실적이기 때문이요, 오디션에서도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삶을 얘기하도록 유도한다. 외에도 픽션이지만, 실제 학생이나 비전문배우들을 다큐멘터리로써 기록하기도 한다. 이렇게 리즈와 로만은 대상이 스스로 생생한 진실을 말하고 표현하는 영화를 지향한다.    

  

하지만 그 지론을 유지해나가기가 쉽지 않기에 리즈와 로만은 고충이 있다. <샤스 로얄>이 확장된 작품, <최악의 아이들>은 리얼리즘을 지향하면서도 주관성을 굽힐 수 없는 그녀들의 고충, 곧 감독의 의도와 상반되는 피사체, 현실과의 충돌을 담고 있다. <최악의 아이들>에서 ‘영화 속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 가브리엘은 자신의 청소년기를 아름답게 재현하려다가, 이와 상충되는 현실과 대립한다. 물론 가브리엘은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하려 했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동네, '피카소'의 장소성을 굳이 숨기지 않고, 그 동네의 기성세대들이 적극 은폐하려고 하는 ‘불량배’들을 되레 대표자로서 캐스팅한다. 그들이 피카소의 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아이들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해서 그 현실을 적나라하게 부각한다. 즉 가브리엘은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리즈와 로만 또한 자신들이 투영된 '영화인' 배역인 가브리엘과 빅터는 전문 배우에게 맡기며, 영화인으로서 진실을 반영한다. 반면 연기를 난생 처음 하는 설정인 '피카소 마을의 아이들'은 실제로 본 작품이 배우로서 데뷔작인 비전문배우들을 캐스팅했다. 비전문배우들은 영화 안팎으로 비교적 실제 삶과 유사한 배역을 맡았다. 반항아 라이언, 동생을 애틋해함과 동시에 성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릴리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허위로 배역을 꾸며내지 않고, 자연스레 배역의 진실을 드러낸다. 더불어 이들은 가브리엘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와 자신의 현실이 일치하기에 캐스팅에 별 불만이 없다. 이렇게 배역과 배우가 일련 일치해야 하는 이유는, 배우는 영화에서 배역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진실이 반영된다고 느낄 때, 연기를 시작한다. 릴리와 라이온, 제시 등은 맡게 된 배역이 비교적 자신과 일치하다거나, 자신으로 반영되어도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례다.      


그러나 일치하지 않는 사례도 있나니, 바로 메이리스다. 릴리의 동생이자 라이언의 누나로 캐스팅된 메이리스는 자신에게 대사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 것이 불만이어서 영화에서 하차하겠다고 선언한다. 캐스팅 당시 인터뷰에서 메이리스는 말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단역 수준인 배역이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메이리스는 달랐다. 발정 난 남자애들이 릴리에게 무분별한 성희롱을 일삼자, 강단 있는 독설을 내뱉어 그들에게 한방 날린다. 그들은 메이리스를 레즈비언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그녀는 주디트에게 관심이 있는 눈치다. 리즈와 로만은 메이리스가 주디트를 바라보는 동공을 '시점 숏'으로 처리한다. 메이리스는 능동적으로 주디트의 각 신체 부위를 살펴본다. 이렇게 눈과 입에 솔직한 메이리스에게 눈과 입에 소극적인, 그저 영화를 위한 수동적이고도 소극적인 배역이 주어졌다. 그래서 현실은 반발한다. 영화에서 반영되는 나는 진실이 아니라고, 나는 이런 모습이 아니라고.

가브리엘은 라이언과도 불화를 겪는다. 가브리엘은 라이언을 아름답게 촬영한다.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이동하는 숏을, 아주 매끄럽고도 온유한 트래블링 숏에 담아낸다. 이는 라이언의 실제 모습과 상반된다. 현실의 라이언은 아름답거나 안정적이지 않다. 집중력이 부족하여 이리저리 몸을 비틂에, 인터뷰 당시 그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애를 먹었다. 캐스팅 이후에도 가브리엘이 요청한 자전거 도착 지점을 훌쩍 뛰어넘어서 주행을 이어갈 정도니 말이다. 즉 가브리엘이 생각하는 라이언과 그에게 입힌 배역, 반면 라이언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이나 감정이 상충된다. 가브리엘은 라이언이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해서 분노할 때, 찡그리는 표정을 지었으면 좋겠다고 주문한다. 그것은 가브리엘이 생각하는 라이언, 감독이 상상한 배역이다. 하지만 라이언의 심리는 완전히 다르다. 괴롭힘을 당하고 반항하는 도중 씨익 ‘미소’를 짓는다. 그것이 라이언이 생각하는 분노다. 가브리엘이 현실에 이식하려고 하는 계획과 솔직하고 상반된 현실은 끝없이 부딪힌다.     


그래서 리즈와 로만은 가브리엘을 빌려서 다음과 같은 영화론을 말한다. “감독이 생각하고 예상한 데로 완벽하게 도출되는 픽션은 불가능하다고, 필연적으로 다큐멘터리나 모큐멘터리적인 요소를 동반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리즈와 로만은 현실과 '타협'하는 영화를 본 작품에서 여러 과정을 거쳐서 보여준다. 영화에선 내내 널따란 2.39:1 화면비가 사용된다. 그런데 도입부에선 레터박스와 필러박스, 양자 모두가 다량 노출된 좁다란 화면비다. 이는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검은 화면이 노출된 '가상'의 모니터를 환기한다. 허구의 프레임 안에서 아이들에게 '자연스러운 모습'을 주문하고, 또 아이들이 '일상에서 어떤 존재'인지 알기 위한 질문을 건네면서도, 가브리엘은 인터뷰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가장 안정적인 구도에서 클로즈업하여, 그야말로 '보고 싶은 아름다운 이미지'로 꾸며낸다. 가상적인 프레임은 허위의 이미지에 일조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현실의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침투하여 방해한다. 인터뷰 도중 갑작스럽게 뒷문이 열려서 소음이나 계획에 없는 사람이 침투한달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라이언이 몸을 계속 뒤척이면서 카메라와 프레임을 불안정하게 뒤바꾸니 말이다. 

영화는 현실의 충동 및 우발과 타협하는 수밖에 없다. 영화라는 가상을 위해 연기하는 배우도 현실에 속하고, 가상을 위한 토대도 현실이다. 가상을 위한 가상적 공간을 오롯이 만들어낼 수 없다면, 필연적인 한계로 현실을 대여했다면, 우리는 나만의 것이 아닌 현실과 영화를 위한 타협을 봐야 한다. 그래서 리즈와 로만은 스태디캠 위에 올라탄 카메라가 안정적으로 대상을 조망하는 트래블링 숏이나 트래킹 숏보다는, 현실의 불완전함과 조급함, 급박함을 환기하는 ‘핸드 헬드’를 적극 사용한다. 또 가브리엘 본인이라면 감정 표현을 이러저러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 표현을 주문받아 배역을 직접 연기하는 현실 속 라이언의 생각은 다르다. 더욱이 성인이 만들어낸 배역을 주문받은 아이들은 아직 시야가 넓지 않기에, 표현을 자기 바깥의 배역으로 확장하기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가브리엘이 원하는 표현이 아니라, 라이언이 생각하는 분노를 체념하고 유도한다. 이때 라이언, 그리고 그와 다투는 아이들의 감정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다. 카메라는 허구를 연출하지 아니하고 진실을 기록한다. 그래서 픽션은 다큐멘터리이거나 모큐멘터리적인 숏이 동반된다. 

즉 리즈와 로만은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이유로 영화를 제작하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이란 불가항력’을 지적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원인을 분석하는데, 바로 ‘영화가 현실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져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을 반영하는 배역', '좋은 배역'은 현실로 대체되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자신을 반영하지 않는 배역'이나 '나쁜 배역'은 꺼려진다. 그 이유는 자신이 아닌 거짓이 현실과 흡사한 영화에서 사실처럼 호도되기 때문이다. 이때 파생되는 부작용이 릴리와 제시의 관계에서 가시화된다. 현실 속 릴리와 제시는 적대적이다. 하지만 가브리엘이 의도하는 청춘의 사랑, 그의 추억을 재현하기 위해서, 서로에게 나름의 관용을 베푸는 섹스씬을 연출한다. 영화를 위해서 그들은 잠시 동안 휴전한다. 섹스씬 이후 리즈는 제시에게서 빠져나왔으나, 제시에게 리즈와의 관계, 섹스씬은 현실을 대체했다. 그에겐 허구의 감정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 감정이 긍정적일 때는 릴리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 동행하는 등 상대를 배려했으나, 부정적으로 발현될 때는 릴리가 자신의 연인인데 배신한 것 마냥 몰아세우고 집착한다. 영화를 현실이라, 거짓을 진실이라 오독한 결과다. 즉 현실을 그럴듯하게 닮은 영화는 '나쁜 것', '거짓말', '착각'이 현실이라고 호도할 수 있다. 그래서 조심스러워야만 한다.   

  

한편 현실이 영화에게 '피해 보상'을 요구할 만큼 항상 선하거나 아름답진 않다. 그래서 때론 선한 영화가 악한 현실을 대체하거나, 역으로 현실에 재현될 필요가 있다. 현실에는 가부장제에 의한 '성 권력'과 '성 관행'이 확연하다. 영화 바깥에서 제시는 폭군이다. 실제로도 문제를 많이 일으켜 복역했으며, 릴리나 동성애자 스태프에게 성 희롱을 일삼는다. 가부장제가 권력을 쥐어준 가장은 식구·약자들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한다. 가브리엘도 아니고 제시에 의해서 영화 촬영이 결정될 정도로 말이다. 영화가 끝나고도 가브리엘은 자기 마음대로 제시를 연인인양 취급하고, 제시가 가브리엘을 따라 호텔 파티에 방문하자 그녀를 창녀 취급한다. 가장은 여성이 끝내고 싶은 영화를 계속 재생되게 만든다. 라이언에겐 어머니가 있는 반면, 아버지는 본 적도 없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임신시키고 방종하게 떠나서, 그녀를 '미혼모'로 전락시켰다. 즉 현실에서 남성이 여성을 좌지우지한다. 현실에서 여성은 '남성에 의한 비디오'를 촬영한다. 릴리는 사이버 상에서 음란한 영상 채팅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메이리스처럼 현실에서 주체적이기에 자신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영화에 반발하기도 하지만, 여성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현실에서 ‘그녀들을 주체적으로 만들어줄 영화’라는 구원이 필요하기도 하다.

성 권력뿐만이 아니다. 피카소라는 마을 또한 개인의 존재를 지운다. 마을을 관리하는 정치인들이나 행정직들은 “왜 가브리엘 영화팀이 피카소의 '부유한 모습', 더 아름다운 '무용단 학생'들을 섭외하지 않고, 마을에서 말썽만 일으키는 '문제아'들만 캐스팅했느냐”며 원성이 자자하다. 피카소가 보편적으로 가난한 동네라 한들, 분명 그 보편성을 따르지 않는 마을 구성원들이 있을 지다. 어쩌면 가브리엘은 피카소의 ‘편견’만 촬영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다른 것을 촬영해야 하겠지만, 정작 촬영 현장 바깥에서 불만을 피력하는 마을 구성원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없다. 우악스럽고 거친 마을임을 증명하는 증거만 가득하다. 즉 가난한 아이들, 불량배, 문제아는 피카소 마을의 진실이다. 그러나 피카소에 질 좋은 주민들을 유치하려는 기성세대들은 그 진실을 애써 지우려한다. 존재하지 않거나 아주 드문 극소수의 포장된 사례들을 피카소의 얼굴로 내세우려 한다. 어른들에 의해서 거칠게 태어나고 길러진 아이들은, 또다시 어른들에 의해서 보이지 않게 된다. 현실에서 실종된 실존을 복권하기 위해선, 그들의 얼굴을 '긴 호흡'으로 붙잡는, 흡사 다큐멘터리처럼 반영하는 영화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개인의 존재를 지우는 것은 피카소라는 마을의 지역적 특성에만 그치지 않는다. 보존하기보다는 항상 앗아가고 삭제하는,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묵묵히 앞으로 전진 하며 많은 것들을 짓밟는 '현재' 또한 개인을 지운다. 릴리는 동생 켄조를 잃었다. 켄조는 희귀한 암 투병을 끝내 못 버티고 사망했다. 시간은 그를 보존해주기는커녕 그 짧은 삶을 조금도 유예해주지 않고 무참히 앗아갔다. 외에도 가브리엘이 영화로써 재현하고 싶은 유년기의 말랑말랑한 연애담도 지금 여기엔 없다. 현재가 앗아간 과거다. 릴리가 빅터에게 고백하려는 이유도 '멈춰주지' 않는 시간이 앞으로 흘러가며 앗아가 버린 '달콤한 시간'을 소환하고 붙잡기 위함이다. 그런 현재에 사는 우린 슬프다. 빅터에게 실연당한 릴리는 더는 그와 춤을 출 수 없고 농담을 나눌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또 릴리에게 켄조는 항상 애틋하고 아픈 손가락이기에, 그런 와중에 켄조가 보존되어 있는 '예술품'들을 보면 나름 ‘웃음’이 난다. 우리는 가혹한 현실을 버티기 위해서, 앞으로 흘러가지만 않고 플래시백, 되감기, 반복하는 영화의 힘을 빌려야 한다.     


그래서 리즈와 로만은 잃어버린 것을 되돌릴 수 있는 영화가 현실에 이바지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고찰한다. 이를 위해선 영화가 촬영되는 현실, 작품이 반영하는 현실의 부조리가 무엇인지 깊게 파악해야 한다. 경제력과 기회가 제한된 도시, 이로써 죽음이 만연한 도시 피카소에서 아이들은 다들 날이 서 있다. 책임 없는 쾌락만 누리는 남성에 의해서 여성은 이른 나이부터 수없이 임신하고, 그 여성 혼자서 무수한 아이들을 올바르게 길러내기엔 역부족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가정에서부터 경쟁한다. 외부로 나가서는 더 당연하다. 모두 다 가질 수 없는 빈궁한 재화를 어떻게든 쟁탈하고자 상대를 헐뜯고 시기한다. 피카소란 세계는 품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피카소를 반영하는 영화에 '화해'와 '포용력'을 담아서, 해당 미덕이 현실에 뿌리내릴 수 있게 돕는다. 가브리엘 영화의 후반에서는 '비둘기'가 날아오르고, 할머니와 라이온은 화해하며, 그 와중에 라이온은 임신을 한 것처럼 배가 불러있다. 그간 상대에게 침을 뱉고, 박치기를 하며 밀어내기만 급급하던 피카소의 소년들, 그러나 이제 그 소년은 자신 안에 배역, 곧 '다른 존재'를 품는다. 이로써 상대를 느끼고 이해하며 화해한다. 가브리엘 영화의 결말에서도 릴리와 라이온, 곧 누나와 동생, 여성과 남성은 화해한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던 눈높이, 성별을 알아간다.

또 다른 가치는 주체성이다. 가브리엘의 영화에서 새장에 갇혀 있던 비둘기들이 자유롭게 높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가브리엘은 개인을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만드는 현실을, 주체성과 자유가 담긴 영화로 밀어낸다. 가브리엘이 메이리스가 맡은 배역을 수정할 생각이 없고, 마찬가지로 메이리스 또한 자신이 소극적으로 보이기 싫다면,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서로의 독립성을 지키는 일이다. 메이리스와 가브리엘은 서로의 삶이나 작업을 존중하며 자신을 지킨다. 그간 여성은 남성에 의해서 더러워졌다. 남성의 거칠고도 흉악한 혀가 여성들을 상스럽게 재현했다. 그러나 가브리엘의 영화를 거친 여성은 주체적으로 제 삶을 아름답게 개선하고자 도전한다. 그간 남성들이 활용하던 릴리의 성, 그러나 릴리는 자신이 직접 '대사'를 써서 빅터에게 고백한다. 설령 그 시도가 불발될지언정, 남성에 의한 여성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 제 삶을 선택하는 시도를 연이어간다. 아이 또한 마찬가지로, 사회 제도에 의해 부모가 바뀌고 가정 또한 옮겨 다니던 라이온, 이에 스스로 제 삶을 표현하지 못한 라이온은 결말에서 뿌듯해하며 드디어 감정을 표현했다고 말한다. 현실에선 타인에 의해 감정이 만들어졌다면, 이를 반성하며 자신을 연기하는 영화에서 비로소 제 감정을 표출한다. 외에도 피카소의 기성세대가 지워내던 마을 내 가난한 아이들을 영화로써 보존하고, 그 아름다운 영화가 아이들에게 파티, 콘서트 등 윤택한 기회를 제공하며 그들의 삶을 개선한다. 

즉 리즈와 로만은 영화가 추구해야 할 아름다움이란 현실에 이바지하는 쾌감이자 좋은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의 아름다움이 현실의 진실을 가려서는 결코 안 되는 법이다. 분명 현실과 영화는 분리되어 있었다. 영화 초반, 배우들이 몰입하는 영화라는 차원/감독이 디렉팅을 지시하는 현실은 '컷'으로 차원이 나뉘었지만, 극이 진행되어감에 따라서 양 세계를 나누는 컷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뒤죽박죽 뒤섞인다. 흡사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나 자파르 파나히를 연상케 하는 모큐멘터리로 뒤바뀌며 배역으로 사는지, 배우로서 사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배역이 배우를 반영하고, 배우가 배역을 투영하며, 영화는 현실이, 현실은 영화가 된다. 그렇기에 리즈와 로만은 영화가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또 영화가 현실에서 어떤 가치를 모방할지 진지하게 탐구하며, 앞으로 자신들이 연출할 ‘진정성 넘치는 영화’에 대한 포부를 장편 데뷔작에서 당당하게 외친다.

---

감상일: 230915 집에서(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온라인)

매거진의 이전글 크리스티안 펫졸드, <어파이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