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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Sep 14. 2023

크리스티안 펫졸드, <어파이어>

산불의 시작은 가벼운 침범과 오해에서부터

크리스티안 펫졸드(Christian Petzold), <어파이어>(Afire) 

- 산불의 시작은 가벼운 침범과 오해에서부터     

“그는 이제껏 한 번도 의혹에 빠져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이제껏 무엇 하나 겁내본 적이 없었다. 지금에야 그는 자신도 함정에 빠져 있음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잉게보르크 바하만-

철학자 헤르만 슈미츠는 독일인들의 사랑이 연합적인 반면, 프랑스인들의 사랑은 변증적이었다는 사실을 역사 속에서 밝혀낸다. ‘변증적 사랑’은 상대에게 헌신하지 않고 내가 느끼는 성애만을 좇는다. 변증적 사랑을 즐기는 연인들은 사랑하더라도 상대에게 귀속되지 않으며 나를 보존한다. 이로써 하나로 획일화되거나 뭉쳐지지 않는 연인 간의 다양한 반응이 특징이다. 또 변증적 사랑은 나를 위해서 상대를 전유하는, 기만적이고 복종적인 성향이 있다. 반면 ‘연합적 사랑’은 두 연인 모두에게 좋은 공통된 환경이나 상황을 위해서, 서로 헌신하고 공동의 삶을 뒤엉키며 자유를 화합한다. 그리고 그간 펫졸드의 사랑 이야기는 지극히 독일적이라 말할 수 있는 연합적 사랑을 지향했다. 어느 한쪽은 밀어내더라도, 다른 한쪽에서는 상대를 위해 연합을 이루려 고군분투 하였고, 최근 <운디네>에서는 연인을 위해 희생조차 서슴지 않았다. 물론 양측 모두 다 똑같은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음에, 어느 한쪽에선 변증적인 사랑의 파괴적인 욕망이 대두되었지만 말이다. 과연 펫졸드의 신작 <어파이어>에서는 어떤 사랑이 펼쳐질까, <운디네> 속 연합적인 ‘물’이 태우고 소멸시키는 ‘불’로 바뀌었을 때의 사랑이란 과연 어떤 모양일까? 더욱이 펫졸드는 <운디네>를 시작으로 ‘파라켈수스의 4대 원소’에 해당하는 정령들을 모티브로 한 영화를 연출하고 있는데, 이를 따른다면 <어파이어>는 불의 정령 ‘샐러맨더’에 해당할 것이다. 독과 불을 품고 있어 위험하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대장장이들이 숭배한 샐러맨더, 과연 이는 <어파이어>에서 어떻게 현대화될까?     


1960년 서독 힐덴 출신의 크리스티안 펫졸드는 현 독일 작가주의 영화를 대표하는 ‘베를린파’의 선봉장이다. 일단 그의 영화는 대체로 정치적이다. 적군파 부모의 과격주의와 정치노선에 의해 핍박받는 딸의 이야기를 담은 데뷔작 <내가 속한 나라>도 그랬고, 이민자들의 삶을 그려낸 <열망>, 동/서독의 분리를 고찰한 <바바라>도 마찬가지며, <피닉스>와 <트랜짓>은 2차 대전을 관통했다. 즉 분리되거나 고립되며 핍박받는 역사가 반복되는데, 펫졸드는 여기에 남과 여의 사랑을 뒤섞는다. 전작 <운디네>에선 상대방을 죽여서 나를 돌려받아야 하는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연인을 자애로이 품어내는 물의 사랑을 역설했다. 이렇게 숭고한 사랑은 나만의 육욕을 거두고 상대방을 위한 헌신적인 희생을 보여주던 <바바라>, 2차 대전 당시 잃어버린 연인을 찾아 헤매고 탈출 기회까지 넘겨주던 <트랜짓>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우리는 상대방을 잘 알고 헤아릴 때 이타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으며, 그것을 비로소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펫졸드의 작품에서는 불같은 욕망이 더 대두된다. 상대방을 잘 모르고 나의 시선이나 기대를 일방적으로 투영할 때, 그저 나만을 위한 욕망의 상태에 머무른다. 또 내게 좋은 것을 위해서 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한다. <내가 속한 나라>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는 소녀, 이에 헛것을 사랑하는 소년, <볼프스부르크>에서 정체를 숨긴 채 다가오는 남자와 그 아스라함에 빠져들어 '유령'을 사랑하는 여인, <열망>에서 서로의 진의와 악의를 숨긴 채로 시작된 눈 먼 사랑, 어둠 속에서 나만을 위한 욕망이 대표적이다. 특히나 <열망>에서 범죄 이력, 불명예제대, 불륜 등 욕망의 배후에는 거짓이 숨겨져 있다. 또 나를 위해서 상대를 감시하거나, 지속해서 곁에서 만질 수 있게끔 옆에다 둔다. <피닉스>에선 내 목적을 위해서 상대방의 얼굴과 행동 양식을 뜯어고친다. 상대는 욕망의 도구로 전락한다.

연인에게 애욕을 느끼는 이유는 육체의 강렬한 매혹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인간을 머리 꼭대기 위에서 지배하는 이념에 의해서 사랑은 육체를 괄시한 채로 다만 ‘연기’할 뿐이다. <열망>에서 무수한 빚 때문에 알리와의 부부 관계를 연기하고, <피닉스>에서도 사랑은 돈에 선행한다. 즉 펫졸드는 거짓으로 얼룩졌지만 감정 하나만큼은 진실이던 욕망만도 못하게 되는 관계를 고찰한다. 이념과 시대에 의해서 말이다. 

이러한 뒤틀린 욕망, 부정한 사랑이 실로 진실한 사랑으로 정화되기 위해선 이념이 세뇌하던 소유를 포기해야 하고, 이로써 집착해온 아집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은 <열망>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아 더 이상 삶에 집착하지 않게 된 알리가 보여줬다. 알리는 로라를 더 이상 구속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어주려고 했다. <바바라>, <트랜짓>, <운디네>에서도 자신의 삶을 내려놓은 채, 상대방에게 나를 헌납하며 숭고한 사랑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이처럼 사랑은 삶의 끝에서 겨우 목도할 수 있는 것이거나, 대체론 사랑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열망>처럼 욕망의 끝으로서 불태워지고 소멸한다. 4대 정령 중 물의 정령인 <운디네>를 다룬 전작에서는 생명을 창조하는 숭고한 사랑을 그렸다면, 불의 정령인 샐러맨더를 연상케 하는 본 <어파이어>에서는 육체 간의 긴장감과 불꽃이 대두될 것만 같다.     


영화의 도입부, 주인공 레온과 펠릭스가 차를 타고 숲의 심장부를 관통한다. 여기서 카메라가 한 장소에 정박해있는 정적인 촬영이 눈에 띈다. 카메라를 실은 차량에 의해서 숏의 운동이 발생하는 것이지, 카메라 자체는 멈춰있다. 달리 숏이나 트래킹 숏, 트래블링 숏이 아니다. 그 카메라는 영화 내내 레온의 '시점 숏'이자, 발과 다리에 상응하는 '팔로우 숏'을 만들어내기에, 고로 도입부의 인물들은 멈춰있는 셈이다. 차량이 멈춰있는 그들 대신 움직이며, 숲 또한 사람들 대신 차량이 직접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숲의 소음 대신, 듣기 좋은 음악을 선별해서 감상한다. 숲을 직접 겪는 차량은 필터를 거쳐서 좋은 시각만 그들에게 제공한다. 하지만 자동차가 고장 나서 도로에 멈춰 서자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완전하게 탄로 난다. 뚱뚱한 레온, 곧 움직임과 영화 내내 어딘가로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 그는 자동차가 대신 해주던 운동을 직접 해야 함을 자각한다. 그런 레온의 벅차하는 ‘숨소리’가 부각되고, 이제 그는 음악 대신 굉음을 직면한다. 자동차라는 '스테디캠'에 올라탔을 때 안정적이고 온화한 움직임을 선보이던 카메라, 그러나 인물들이 제 발을 직접 움직여 별장을 찾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자 '핸드 헬드'로 카메라 워킹은 변한다. 자동차가 수용할만한 숲만 여과해서 매개할 때의 ‘안정성’은, 여과되지 않은 숲의 혼란스러운 힘과 맞부딪혀야 하는 ‘불안정성’으로 바뀐다. 여기서 숲의 미적 인식이 변화한다. 인물들이 직접 발을 떼지 않고 숲에 간접적으로 참여할 때, 울창한 수풀림은 매우 신비롭고 평화로웠으며 아름다웠다. 그러나 인물들이 직접 숲 속으로 발을 들이밀기 시작하자 긍정적인 미감은 괴괴함과 불안함으로 뒤바뀐다.

여기서 펫졸드는 미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에너지의 양면성'을 고찰한다. 인물들이 숲을 '통제할 수 있을 때'는 공간을 아름답게 여겼다. 숲을 마음대로 지나다니고, 또 보고 싶은 대로 감상할 때, 숲뿐만 아니라 레온이 펠릭스에게 지시하고 상대방은 이를 고분고분 따를 때 관계 또한 레온에게 평온하고 좋았다. 외에도 숙소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듣고 싶은 음악을 재생하고, 방 안을 내가 원하는 대로 말끔하게 정돈하며, 포트폴리오 및 창작 활동에 매진할 때, 청각이나 공간은 아름답게 보인다. 그것이 품고 있는 에너지는 나의 계획을 위해서 적재적소에 사용되었고, 이로써 질서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또 레온이 나디아를 일방적으로 바라볼 때, 즉 레온이 시선으로써 그녀에게 힘을 투사할 때 여인은 아름다워 보인다. 이렇게 우리는 에너지라는 질료를 내 마음대로 가꾸고 변형시킬 때 '쾌'나 '심미성'을 느낀다. 심지어 '사랑'에 빠진다. 나를 위한 사랑, 곧 변증적인 사랑에 말이다.     


이는 ‘숭고’의 메커니즘과 같다. 거대한 에너지가 감상 주체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 이로써 에너지를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있을 때 우린 미감을 느낀다. 그러나 거대한 에너지, 곧 파도랄지 지진이랄지 또 영화 속 '산불' 등의 유형이 직접적으로 내게 엄습한다면 이는 더 이상 감상하기 좋은 미의식에 그치지 않는다. 에너지가 직접 닥쳐오면 그것은 감상자를 뒤흔들며 산산조각 내어버릴 것이므로, 직접적인 공포이자 불안이며 불쾌가 된다. 숭고일 때 에너지를 사랑했었다면, 그 숭고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서 마구잡이로 날뛸 땐 증오하고 배격한다. 자동차 안에서 차창 바깥의 숲을 평화롭게 관조할 때는 그야말로 유토피아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 숲에 직접 참여하여, 거대한 공간이 품고 있는 혼란한 에너지를 직접 맞닥뜨려야 하는 레온은 벌벌 떤다. 자동차에 타고 있을 때는 '멧돼지'의 괴성이나 괴괴한 ‘비행기’ 소음 등을 아름다운 음악이 은닉했고, 짐승이 급습하는 힘을 차량이 대신 흡수했겠지만, 이제는 그 무시무시한 힘을 내가 직접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뿐만 아니라 레온의 통제에서 벗어난 펠릭스가 그를 놀래킨다거나, 옆방에서 섹스를 즐기는 나디아가 신음 소리로 공해를 일으키는 것이 매우 불쾌하다. 펫졸드는 내가 어찌 해볼 수 없는 에너지의 '불가항력'을 내 의지와 물리적인 공간을 뚫고서 들려오는 '청각'으로 처리한다. 아무리 귀를 막아도 들려오고, 공간을 차단하고 또 차단해도 청각은 벽을 뚫고 엄습하며, 내 통제를 거스르니 말이다. 외에도 레온이 별장을 쾌적하게 청소해놓는 것을 보건데, 별장을 어질러 놓으며 그가 바라는 에너지의 방향을 정반대로 거스르는 나디아는 그야말로 상극이다. 

그래서 숭고란 인간이 에너지를 오롯이 통제하고 가둬둘 수 있는, 어떤 우발이나 충동도 발생하지 않는 '예술' 속에서나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레온 또한 '문인'으로서 예술가인데, 예술가로서 그의 문학이나 뇌리 속에서는 에너지가 그의 계획대로 통제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곳은 작품 속이 아니라 '현실'이다. 현실에선 일순간 에너지를 통제하더라도, 그 힘이 인간을 다시 압도한달지, 아니면 계획에 없는 변수들이 들이닥쳐서 가둬놓은 에너지를 해방시킨다. 그래서 현실에서 에너지는 언제나 우연이자 불가항력인데, 그런데도 인간은 그 사실을 수긍하지 못한다. 인간은 예기치 않은 힘과 사사건건 '충돌'한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과 같은 불길은 꺼지지 않고 오히려 커져만 간다. 영화 속 이들은 '운전자'다. 펠릭스는 자동차를, 데비트는 트랙터를, 나디아는 자전거를 몬다. 그들은 운송 수단에 특정한 힘을 가한다. 그러나 자동차는 연기를 내뿜으며 고장 나고, 트랙터는 산불 현장을 빠져나오지 못했으며, 자전거는 쓰러진다. 즉 이들이 통제하려는 힘이 대상에게 수용되지 않아 '엇박자'를 내며 사물 및 대지와 '마찰'을 일으킨다. 이는 생물과 무생물 간의 관계에만 그치지 않는다. 레온은 영화 내내 잠을 자려 한다. 하지만 나디아와 데비트의 신음 소리, 모기가 왱왱거리며 접근하는 소리, 바닷가에서의 바람 등이 그를 방해한다. 이때 레온은 닥쳐오는 소음을 무시하거나 흡수하기는커녕 극렬히 대립한다.      


펫졸드는 대치 유형을 더 상세하게 분석하기 위해서 서로의 에너지가 충돌하는 ‘인간관계’에 주목하는데, 요즘 유행하는 MBTI에 비유하자면 외향형/내향형, 즉흥형/통제형의 대립이다. 영화에선 외향형과 즉흥형이 결합하고, 내향형과 통제형이 한 쌍을 이룬다. 영화 속 외향형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각자를 상징하는 운송 수단을 갖추고 있다. 이를 운전하여 해조류가 신묘하게 반짝거리는 바다로 향하거나, 야광 배드민턴 등을 즐기러 간다. 그들은 ‘반짝거리는 외부’, ‘보여주기 위한 외관’에 쉽게 현혹된다. 외부와의 만남을 선호하는 펠릭스는 항상 손에 ‘사진기’를 지참한다. 또 이들은 레온의 시점 숏에서 언제나 ‘다수가 롱숏’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이며, 펠릭스가 데비트 및 나디아, 나디아가 헬무트와 쉽게 친해지는 것처럼 계획에 없는 만남에 거리낌이 없다. 심지어 데비트는 펠릭스와 즉흥적으로 입맞춤할 정도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마른 체형'이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에너지를 쌓아두지 않고, 항상 타인을 관찰하는 데 온힘을 다한다. 레온이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서 수면의 질을 예민하게 따진다면, 펠릭스는 수면을 거두고 ‘조명’을 켜서 옆방의 섹스나 어둠 속의 무언가를 향해 눈과 귀를 쫑긋 세운다. 

문제는 이들이 상대도 그럴 것이라 단정하며 타인에게 가볍게 접근한다. 펠릭스는 마트 캐셔에게 이것저것 질문하고, 마찬가지로 데비트에게도 궁금증을 표한다. 여기서 펠릭스와 쿵짝이 잘 맞는 데비트는 그와의 접촉을 거부하지 않지만, 캐셔는 일을 방해하고 손님들의 기다림을 지연시킨 무례한 그들을 언짢아한다. 펠릭스가 레온을 깜짝 놀라게 해서 장난이 다툼으로 번질 뻔한 일촉즉발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즉 원치 않은 침입을 상대가 맹렬히 방어할 때, 다가감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은 마찰하며 불꽃이 인다. 그 이후 산불이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나, 연기 등의 징후가 담긴 숏이 편집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외향형들과 비교하여 내향형은 정 반대의 특징을 갖고 있다. 영화 속 유일한 내향형은 레온이라 하겠다. 빼빼 마른 외향형들과 달리, 레온은 자신을 위해서 많은 것을 비축해두고 쌓아둔 두터운 체형이다. 이렇게 축적해놓은 것을 침해받았을 때 레온은 매우 언짢아한다. 그는 휴가 계획이 꼬여서 나디아에게 방을 내어주고 펠릭스와 함께 방을 공유해야 하는 점, 나디아와 헬무트의 가혹하지만 꽤 정당한 비평을 참지 못한다. 또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로써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타인을 깎아 내린다. 데비트나 호텔리어의 말에 비아냥대며 우월감을 느낀다. 이런 레온은 반짝거리는 외부에 별 관심이 없다. 그것은 레온에게 항상 ‘소음’일 뿐이다. 영화에서 가시화되듯 레온은 밝은 외부보다는, '어두운 내면'에 잠겨 있기를 선호한다. 그래서 레온은 '운전면허'도 없고, 운송 수단도 갖지 않았으며, 두 발로 어디론가 나가기를 귀찮아한다. 펠릭스가 바다로 가자할 때는 한사코 사양하고, 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헬무트가 묵을 호텔을 잡으러 갈 때만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그는 내면에 닻을 내려 정박해두고 보존할 수 있는 집안을 매우 포근해 한다. 

그렇다면 외향형이 내향형에게 접근하지 않는 이상, 내향형에 의해서 산불이 일지는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레온과 나디아의 마찰 이후에도 산불은 번져오고, 심지어 ‘잿더미’의 형태로 그들의 별장에 더 가까이 엄습해온다. 즉 내향형도 충돌하는데, 바로 ‘내면과 외부의 불일치’에 따른다. 내향형은 쇼펜하우어식으로 표현하자면 ‘외부 객관 세계’보다는, 자신이 견고하게 건설해놓은 ‘표상’의 제국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표상에 푹 잠겨 있을 때 만족을 느끼는 그들이 외부에서도 쾌감을 느끼는 순간은 내면과 외부가 일순간 합치되었을 때다. 실제로 레온은 자신이 지금껏 뇌리 속에 그려보던 '이상형' 나디아를 만났을 때 외부에 눈길을 주고, 또 자신의 계획대로 헬무트가 별장에 방문했을 때 생기가 넘친다. 이때 그는 프레임에 다수와 공존할 수 있다. 그 전까지는 프레임에 제 얼굴만 '클로즈업'으로 꽉 채우며, 제 내면만 중요하다는 것이 연출로 가시화되었다. 그런데 그가 선호하는 대상들은 오직 내면에서만 완전하게 존재한다. 현실 속 실재는 내면에서 그려놓은 상과 다른 부분이 무척 많다. 앞서 숭고를 두고 예술과 현실을 비교한 것처럼, 현실 속 그들은 레온의 기대에서 자꾸만 달아난다. 나디아는 레온의 이상형이 아니었고, 그의 계획은 헬무트의 방문까지만 맞아떨어졌지, 그 이후의 혹평은 예상치 못했다. 이런 그는 외부와 대화하지 않는다. 내면에 잠긴 레온은 자동차의 이상 징후를 감지하지 못했고, 펠릭스의 성지향성을 모를 정도로 외부에 무관심했다. 또 나디아에게 '질문'하기도 전에 그의 마음과 일치할 것이라는 듯 신세한탄을 쏟아냈으며, 헬무트의 암 투병보다 제 소설이 더 중요하다. 이때 레온의 내면에만 존재하는 창조물로 호도된 타인들은 그와 충돌하며 불꽃이 인다. 그렇게 산불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     


즉 펫졸드는 착각과 오해로 발생한 충돌 및 마찰의 소산이 '불'임을 시사한다. 이 산불은 멀리 있지 않다. 서로의 진실을 직면하지 않고 거짓을 믿는 인간의 불완전한 시선, 욕망을 위해 타인에게 성큼 침범하는 무례하고도 경박한 발걸음에 의해서 일상도 뜨겁게 달아오른다. 산불은 멀리서 다가온 것이 아니라, 레온이 내내 입에 물고 있는 '담배'처럼 우리 주변에서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한때 초록색으로 우거진 산림을 흉흉한 검정색으로 뒤덮는 불처럼, 일상의 불 또한 상해를 입히며 대상을 서서히 잠식한다. 

이에 대비되는 원소나 속성은 전작에서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상징하던 '물'과 상대에게로 부드럽게 흘러가는 '바람'이다. 타인에게 흐르는 것을 좋아하는 펠릭스는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고, 그의 포트폴리오 주제 또한 물이며, 데비트는 '인명구조원'으로서 해변에 머무른다. 비록 그들의 발걸음이 상대방이 원치 않을 때, 그래서 강제로 새고 젖을 때는 별장 천장의 '누수'처럼 곰팡이로 오염되지만, 상대가 이를 긍정했을 때는 마찰 대신 포용하며 불을 일순간 진화한다. 비록 잘못 꿰어진 첫 단추이긴 했지만 나디아와 레온의 만남도 그렇다. 이들이 대화다운 대화를 할 때, 곁에는 바다가 있었고 들판엔 바람이 불어와 풀잎들은 흔들리고 나는 너에게로 흘러갔다. 

즉 우리는 흐르고 어루만져야 한다. 오해 대신 진실로, 침범 대신 방문으로, 아집 대신 수용으로… 그간 레온은 나디아의 표현으론 '한심한 소설'에 매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예술이 진실을 담고 있을 때, 또 현실을 정교하게 모방할 때 높게 평가한다. 그렇기에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레온의 소설은 현실을 괄시하여 재현과 인지적 가치 등 예술의 모든 방면에서 실패했을 것이다. 진실 대신 착오와 오판이 가득했을 것이다. 이런 그가 결말에서 변한다. 펠릭스와 데비트 사후, 나디아와의 이별 이후에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외부 관찰자'인 헬무트의 시선과 나레이션을 빌려서 '객관적'으로 써내려간다. 헬무트의 병마 대신 소설에 집착하고, 경찰이 불길한 소식을 몰고 온 와중에 나디아에게 사과와 고백을 전하며 자기변호만 급급하던 그가, 비로소 시야를 넓혀서 외부 세계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관조한다. 특히 별 관심을 두지 않던 펠릭스와 데비트의 최후의 발자취를 객관적으로 되짚어간다. 또 지금껏 그에게 귀 따가운 소음으로 여겨졌던 '노크 소리, '비평' 등을 불쾌해하지 않고 너그럽게 수용한다. 이때 영화의 산불은 진화되고 에너지가 충돌하지 않는 일상은 온화함을 되찾는다. 이로써 지금껏 ‘측면’이나 ‘아스라한 롱숏’ 등 나디아를 편향되게 쳐다보던 레온은 비로소 그녀의 정면을 똑똑히 응시하며 진실에 근접한다. 특히 펠릭스가 완수하지 못한 임무를 그가 끝낸다. 항상 대상의 ‘정면’, ‘뒷모습’, 피사체가 속한 ‘배경’을 한 세트로 촬영하여 대상의 진실을 완성하던 펠릭스는, 나디아의 뒷모습과 배경만 남기고 요절했다. 펠릭스가 찾지 못한 나디아의 진실에 관한 퍼즐 한 조각을 레온이 맞추는 것이다.      


정리하며 펫졸드는 <트랜짓>이나 <볼프스부르크>에서 탐구한, 진실 대신 거짓을 바라보는 인간의 아집과 한계를 본 작품에서 연이어 포착한다. 인간의 독단과 불안정함에는 이기심이 덕지덕지 얼룩져 있고, 그것이 산불을 불러온다. 즉 달콤한 거짓을 바라보며 진실을 외면하는 인간의 아집, 곧 이기적인 변증적 사랑이 세상의 종말을 불러오리라. 그렇기 때문에 듣고 싶은 음악만 흘러나오는 나디아의 귀에 낀 '이어폰'을 빼고, 레온의 자기 연민으로 가득 찬 '소설'에 갇히지 아니하고, 널따란 외부의 진실과 마주할 준비를 해야 한다. 동시에 <운디네>와 <바바라>에서 보여줬던, 대상에게 헌신하고자 차라리 나를 변형시키는 물과 같은 숭고한 사랑을 예찬한다. 서로 '깍지'를 꽉 끼고 두려움을 극복하며 죽음을 마주한 펠릭스와 데비트처럼 말이다. 그 사랑을 남성에게 요구한다. 본 작품은 꽤 오랜만에 펫졸드가 '남성 주연'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인데, 그래서 그런지 여성이 주연이었던 <바바라>나 <피닉스>, <운디네>에 비해서 포용력이 크게 모자란다. 세상을 원하는 데로 가꾸고자 하는 가부장적인 독단이 레온에게 부각되는데, 이를 여성의 포용력으로 전환하며 남성의 반성을 촉구한다. 

이러한 그의 신작은 오늘날 전 인류에게 성큼 엄습해온 '기후 위기'의 징후로도 보인다. 그간 인류가 내면에서 바라고 꿈꾸던 상을 현실과 일치시키기 위해서 에너지를 마음대로 소비하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 인간이 에너지를 통제하던 기기들은 모두 고장 났고, 거기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풀려난 힘은 기후 위기가 되어 인간을 덮치고 위협한다. 인간이 내면에서 그려보던 바람은 더는 외부와 일치하지 않고, 오히려 재앙은 점점 더 불어나 멧돼지와 사슴, 그 중에서도 새끼 멧돼지를 앗아가며 미래를 단축한다. 심지어 자연에만 그치지 않고 펠릭스와 데비트까지 덮치며 전 인류를 위협한다. 즉 자신의 사유를 기후 위기로 확장하고, 가장 일상적인 곳에서 그 원인을 찾는 펫졸드는, 진실과 자기희생을 기저로 한 연합적 사랑만이 인류에게 성큼 다가온 거대한 산불의 유일한 '소화기'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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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914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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