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느껴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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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상대방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슐라이마이허-
타인이 고통에 처했을 때, 나는 마치 그 현장에 속한 것 마냥 몸이 움츠러들거나 파르르 떨린다. 이러한 간접 경험 현상을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상세하게 분석한 바 있다. 그는 내가 상대를 만지고, 상대로부터 내가 만져지는 ‘이중 감각’을 통해서 나는 주체임과 동시에 상대에게 대상이 되고, 또 상대에게서 주체성을 확인하는, 일련의 ‘동일자의 경험’을 갖게 된다고 논증한다. 상대 또한 나처럼 만지고, 나는 상대처럼 만져지면서 서로 동일자로 인식될 때 우린 서로를 간접 경험하고, 또 타인에게 조심스러워져 ‘존중’의 첫 단추를 꿴다. 내가 감각하는 것, 특히 ‘아픈 것’을 상대 또한 똑같이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중 감각과 동일자의 경험을 에스킬 보그트가 탐구한다. 그의 신작 <이노센트>에선 동일자의 경험을 거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의 각기 다른 성장 과정이 ‘초능력’에 빗대어져서 나타난다.
1974년 오슬로 태생의 에스킬 보그트는 노르웨이의 영화감독이자 각본가다. 영화감독으로서는 2014년 <블라인드>로 장편 데뷔했으며, 각본가로선 요아킴 트리에의 작품 <라우더 댄 밤즈>와 <델마>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보그트가 초자연적인 설정을 뒤섞는 본 신작은 <델마>와 특히 더 유사하다. 일단 보그트의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항상 ‘비보편적인 타자’들이다. <델마>에서 주인공은 여성이자 마녀고, <블라인드>에서는 시각장애인 여성이다. 보그트가 창조한 <델마>의 마녀를 트리에가 몽환적이고도 비선형적인 연출로 풀어낸 바 있으며, 보그트가 직접 연출한 <블라인드>에서는 인물의 ‘눈’이 있어야 할 구도에 ‘손’을 위치시켜, 후각이나 촉각, 청각에 의존하는 시각장애인의 삶을 감각적으로 가시화하였다. <블라인드>의 그녀는 자신에게 펼쳐진 타자와 세계를 직접 볼 수 없다. 그래서 시각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상상하지 않을 부분조차도 그녀는 세심하게 공상한다. 그렇게 상상한 영역이 실제와 교차되고 혼란스럽게 뒤엉키는 의식을 보그트는 ‘편집’에 반영한다. 즉 보그트는 시각장애인 여성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연출을 <블라인드>에서 선보인다.
보그트가 영화로써 그들을 이해하려 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타자들은 이해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델마>에선 가부장적 세계가 펼쳐진다. 델마는 대를 이어서 선천적으로 마녀성을 타고났는데, 역사 속에서 델마의 선조 여성들은 억압당했다. 무의식이 바라는 바를 실현하는 그녀들의 힘은 강력하다. 그녀의 무의식은 남동생을 편애하는 ‘남아선호사상’, 레즈비언의 욕망을 억압하는 ‘이성애 중심적 이데올로기’, 가부장적인 여성성·‘델마다움’을 압박하는 구조에 반발하여 잠재된 욕구를 실현한다. 보그트의 색채가 비교적 옅은 <라우더 댄 밤즈>에서조차도 마찬가지다. 사진작가로서 경력을 쌓아온 어머니는 가정에서 타자이자 이방인이다. 사진작가로서 그녀를 가족들은 잘 모른다. 그녀도 식구들은 모른다. 그녀와 가족은 서로에게, 심지어 스스로도 낯설다. 그런데도 갈 곳이 가족밖에 없던 그녀는 결국 세계에서 추방된다. <블라인드>도 유사하다. 시각장애인이자 여성인 그녀는 언제나 제한적으로 갇혀있지만, 능동적으로 욕망하는 남성들은 외부를 자유롭게 누비고 욕망 또한 마음껏 표출한다. 그녀가 제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것, 그녀가 집필한 소설 속 여성이 욕망을 주도하자 시력을 잃는 것이 남성들과 대비를 이룬다. 능동적으로 바라볼 수 없이, 오직 상대가 바라봐줘야만 하는 수동적인 위치, 상대의 대답과 확인, 평가를 기다리는 존재로서 말이다. 그리고 시각장애인으로서 시력이 존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에 발을 딛기가 어렵다. 눈으로 주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없어서, 주어지는 것이 요구하는 것을 행동에 옮길 수 없다.
보그트는 <델마>에서의 억압, <블라인드>에서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구조를 극복한다. <델마>에선 마녀의 자유의지를 자애로운 절대자는 존중하고 있음을, 평온한 하이앵글 구도와 북유럽에서 신의 전령이라 불리는 까마귀로 보여준다. 더욱이 가부장제를 붕괴하고 성취하는 델마의 욕망, 어머니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수놓는다. <블라인드>에서는 상상계로 추방하게 만드는 구조, 불안한 상상과 현실이 구분조차 되지 않는 구조를 뒤집는다. 이러한 구조를 이루는 가부장제를 극복하며 말이다. <라우더 댄 밤즈>에선 서로의 단절을 예술로써 극복한다. 상대방이 볼 수 없는 시야를 드러냄에, 나의 표상에서 어머니에만 그쳤던 그녀가 사진작가임이, 어떠한 역할도 갖기 이전 그저 자유로운 여성이었음이 드러나고, 그녀 자체를 이해한다. 이렇게 자유로운 존재를 억압하는 편향된 구조를 극복하는 보그트, 외부의 가치체계를 통해 대상을 바라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는 감독은 과연 <이노센트>에서 어떤 순수를 보여줄까.
영화의 도입부, 보그트는 주인공 이다(라켈 레노라 플뢰툼)와 안나(알바 브륀스모 람스타드)의 관계를 묘사한다. 자폐증을 앓는 안나의 언어를 이다나 부모님은 읽지 못한다. 이다가 안나를 아무리 세게 꼬집어도, 신발 안에 들어있던 유리조각을 밟아서 피가 철철 흘러도, 허벅지에 나무 조각이 박혀도, 안나는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통증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안나의 첫 번째 친구가 되어주는 아이샤(미나 야스민 브렘세스 아샤임)는 “안나는 마음으로 말한다”라고 그녀의 언어를 대신 해석해주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 이다는 자신은 느낄 수 있는 고통을 안나는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론 ‘똑같이 느끼는데’ 말이다. 이렇게 이다는 안나 속에서 자신을 찾지 못하는데, 언니 외에 부모님이나 또래들과도 동일자의 경험을 갖지 못했다. 이에 나와 타인은 다르게 느낄 것이라 인식한다. 내가 기쁘면 대상은 슬프고, 반면 대상이 기쁘면 나는 슬플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다는 지렁이를 마구 밟고 개미집을 해치며, 고양이를 높은 곳에서 떨어트린다. 본 작품은 ‘아이 영화’로서 동일자 경험을 충분히 갖지 못한, 이로써 내가 느끼는 고통을 타인에게 투사하지 못하는 사회화 이전 아이의 ‘폭력적인 심리’를 분석한다.
보그트는 인간이 최초로 이중 감각을 느끼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분석하며, 인간의 유아기에 필요한 동일자의 경험을 고찰한다. 영화 속 가정환경 다수는 ‘부친’이 부재한다. 아이들은 최초의 남성이라 할 수 있는 아버지에게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아버지, 곧 남성이 느끼는 감각이 나와 똑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 내내 남성은 손쉬운 ‘사냥감’으로 전락한다. 남성이 느끼는 고통은 아이에게 남 일 마냥 치부된다. 타겟이 되는 남성이 가정을 등질 것을 아이나 여성이 떠밀지 않았다. 오히려 남성 본인이 자처해서 그들과의 이중 감각을 포기한 것이니, 아버지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아이샤는 어머니와 매우 친밀하지만, 벤자민(샘 아쉬라프)은 친모와의 관계가 냉랭하다. 차가운 수준을 넘어서서 벤자민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윽박을 지르거나 폭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즉 아이샤는 아버지와 맺을 수 없었던 이중 감각을 어머니를 통해 보완하지만, 벤자민은 그 어떤 타인에게서도 자신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샤는 ‘상대방의 감각을 나도 오롯이 느끼는 초능력’을 발전시켜가는 반면, 벤자민은 ‘타자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폭력’을 갈고 닦는다. 아이샤는 상대가 나 자신인 것처럼 소중하게 배려하는 반면, 벤자민은 상대의 죽음이 나와 일절 관련 없다는 듯 테러를 끊이지 않는다. 벤자민은 끝끝내 엄마를 쓰러트려 뇌진탕을 일으키고, 심지어 다리에 화상까지 입히는데, 그녀가 느끼는 고통을 아이샤는 멀리서도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벤자민은 가까이 있는 엄마의 고통에 연민하지 않고, 엄마 없는 자신의 상황에서 슬픔을 느끼는 듯하다. 이다도 마찬가지다. 어머니가 줄곧 자신의 곁에서 떠나는 것, 아버지조차 아나에게 관심이 더 많은 게 불만이다. 아나 때문에 휴가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 화가 나고, 이중감각이 드문 아나나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의 감정만 우선시한다. 즉 이중감각의 부재는 이기주의와 폭력성을 심화한다.
이중 감각과 동일자의 경험은 지금까지 '다정함'으로 살아남은 인류의 생존 전략이다. 그래서 이 삶을 앞으로도 계승해나갈 아이들은 어떻게든 많은 타자들 속에서 자신을 느껴야 한다. 이다는 안나의 신발 속에 유리조각을 넣으려다 미세하게 손이 베여 피가 난다. 이후 안나의 발에서 피가 철철 흐르자, 언니의 고통을 체감하며 살짝 죄책감을 느끼는 눈치다. 또 이다는 벤자민이 고양이를 떨어트릴 때 낙하하면 사망하는 인간과 달리,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 눈치다. 하지만 고양이가 추락한 인간처럼 다리를 절뚝거리고, 벤자민이 고양이를 밟아버리며 다음날 사체로 전락하자 경각심을 느낀다. 이후 벤자민이 아이샤의 심장을 마비시킬 때, 이다는 살인이 추가로 발생하지 못하게 저지한다. 이다는 아이샤와 동일자의 경험을 가졌기에, 상대의 의식과 목숨을 내 것인 양 수호한다. 즉 이중 감각을 느끼기 전에는 폭력과 죽음으로 얼룩졌다면, 이후에는 모두의 고통을 멀리하고 삶을 보존하려는 시도로 대체된다.
동일자의 경험은 직접적인 접촉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간접적인 ‘대화’로도 우리는 타인이 곧 내가 되는 경험을 가질 수 있다고 보그트는 말한다. 그간 안나가 왜 스위치를 반복해서 껐다 켰다 하는 지, 그 누구도 이해하려 하거나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아이샤는 안나와 마음으로 대화하며 문고리를 딸깍거리는 행위를 따라해 보고, 안나가 사는 공간이 신체에 미치는 여파를 체감한다. 외에도 안나의 그림을 따라 그리며 그녀와 대화하는 아이샤는 주로 '투명한 창문'을 바라본다. 그 투명한 창에 두 사람이 겹쳐지며 공존하는 것이 바로 동일자 경험이다. 반면 벤자민의 폭력은 닫히거나 갇히는 등 '폐쇄'적인 공간성이 부각된다. 그 안에서 벤자민은 상대의 정신을 지배한다. 즉 타인을 느끼지 않으면 서로 간에 크나큰 장벽이 생기는 것이요, 양자의 의식은 공존하지 못하고 어느 한 쪽만 살아남는다.
이렇게 아이들은 갖가지 동일자 경험을 거쳐서 ‘순수’한 타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법을 배워간다. 그러나 아이들을 둘러싼 ‘구조’가 동일자 경험 대신 폭력을 보편화한다. 이는 벤자민처럼 대상을 ‘불순’하게 변형시킨다. 아이샤는 고양이가 스스로 불리길 원하는 이름 '수수'를 읽어내어 종족을 뛰어넘어서 대상을 순수하게 존중한다면, 벤자민은 고양이가 원치 않는 '자바'라는 이름을 폭력적으로 낙인찍은 이후 추락시켜 삶을 죽음으로 변형시킨다.
보그트는 구조의 폭력이 부정적인 선입견이나 편견을 덧씌우는 ‘낙인 효과’나 편협한 틀에 가두어 보는 ‘프레이밍’으로 작동한다고 분석한다. 도입부, 투명한 타이틀 너머로 이다의 얼굴이 포착된다. 영화의 제목인 타이틀이 하나의 ‘프레임’이라면, 여기에 이다의 얼굴이 갇혀서 불순하게 변형된다. 그러다가 서서히 타이틀이 사라져 이다 자체만 포착되고, 직후 카메라는 잠들어있는 이다까지 순수하게 촬영한다. 그러나 이다가 깨어나니 다시 불순해진다. 그녀의 진실을 순진하게 투사하는 꿈에서 이다는 자신으로서 순수했을 것이나, 깨어나서 세상 속에 참여하니 부모는 ‘안나의 보호자’라는 틀에 가두어 그녀를 재단하고, 새로 이사 간 동네에서는 ‘자폐증 언니’를 뒀다는 부정적인 선입견이 씌워져 또래의 날카로운 눈총을 받는다. 또 영화 중반까지 안나를 제외한 아이들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호명되지 못하고, 대신 안나의 자매, 무슬림 꼬마, 백반증 소녀 등 대상을 왜곡하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부각되었다. 이러한 불순함은 상대방이 느낄만한 순수한 감각이나 의식을 나의 신체를 통과하여 느끼지 않는다. 오직 내가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지배하는 일방통행만 있을 뿐이다.
누군가와 건전한 이중 감각을 맺지 못한 채로 곧장 사회에 내던져진 벤자민은 낙인 효과와 프레이밍을 모방한다. 영화의 제목인 innocent가 ‘악의 없음’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것처럼, 벤자민의 폭력성은 그저 순진하게 사회를 모방한 결과일 수 있다. 벤자민은 어머니에게 이해받지 못함은 물론이요, 동네에서는 백인 소년들에게 공을 뺏겼으며, 멍 자국을 보건대 구타당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즉 벤자민은 백인에 의한 진로방해, 그들이 만들어놓은 ‘무슬림의 테러’라는 악의적인 편견에 갇히곤 하였는데, 소년의 폭력 또한 낙하하는 대상의 ‘진로를 방해’하기, 자신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강제 이동’시키기, 상대방의 시선을 벤자민의 시선으로 규정하는 것 등이기에, 벤자민은 구조의 메커니즘을 순진하게 따라했을 뿐이다.
이로써 세상에 종말이 닥친다. 벤자민은 백인뿐 아니라, 나이·인종·성별이 일치해서 동일자 경험을 갖기 더 쉬운 상대마저 살해한다. 즉 이중 감각의 거세는 아주 가깝고 닮은 존재와도 공존할 수 없는 사회의 종말을 불러온다. 이와 관련해서 메를로-퐁티는 이중 감각을 축적해가며 인류는 상호주체성 혹은 상호주관성을 쌓는다고 말한다. 나의 의도가 상대방의 신체에 체득되고, 또 상대의 의도가 내 신체에 축적되며, 타인의 주관 일부에도 내가 포함되어 있고, 또 내 주관의 일부에도 타자가 포함되어 있다. 아나의 일부에도 아이샤가, 아이샤의 내면에도 아나가 뒤섞여있다. 그 과정은 서로의 자연스러운 초대와 환대, 내가 선택한 따라 하기, 아이샤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녀가 자신인 것처럼 능동적으로 달려가는 행위 등이다. 그래서 자신으로서 여전히 순수할 수 있으며, 상대방이 나를 거부할 때, 상호주체성은 불발된다. 분명 이다는 아나가 말하는 것을 봤다. 그런데 엄마는 아나가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이다의 말을 못 믿겠다고, 딸의 의견을 튕겨낸다. 아이샤와 아나는 서로의 의식이 상대방의 신체에 침투하여 볼 수 있지만, 엄마는 이다의 의견을 튕겨내어 딸이 본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엄마와 이다의 상호주관성은 불발되고, 모녀는 멀어진다. 이다는 문을 닫는다.
즉 상호주관성 내지는 상호주체성은 ‘연결’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이중 감각을, 곧 나와 타인 간 연결을 포기해선 안 된다. 벤자민이 눈앞의 닮은 대상마저도 끊어내는 태도와 달리, 아이샤는 물리적으로 연결이나 관찰이 불가능한 대상과도 관계를 이어낸다. 또 피지배 대상의 공간을 고의로 왜곡하는 벤자민과 달리, 아이샤는 안나나 벤자민 엄마가 사는 아파트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제 삶에 투영하여 상대를 순수하게 느낀다. 피가 줄줄 흐르거나, 고통을 느끼고 똑같이 비명도 지른다. 그런 아이샤를 포착할 때, 영화에선 유사한 속성의 두 숏을 이어내는 ‘매치 컷’이 동반된다. 멀리 떨어진 두 공간이나 낯선 사람을 거리나 장애에 구애받지 않고 유사하게 이어내는 매치 컷을 통해, 우리는 생경한 타인의 감각과 시야를 내 것 마냥 바라보고 느낄 수 있음을 환기한다. 그렇게 아이샤와 안나, 이다는 '네 일이 곧 내 일'이 된다. 나의 의도는 그의 신체에, 또 그의 의도가 나의 신체에 뒤섞인다. 나를 보존하기 위해 상대를 존중한다.
이중 감각은 성장해가며 많은 굳은살이 배겨감에 점차 둔감해질지 모른다. 영화 속 어른들이 아이들의 심리를 제 것 마냥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와중에 여전히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아이들이야 말로 동일자의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보고’다. 영화의 결말, 안나와 이다가 벤자민을 치열하게 응시하며 죄책감을 자극한다. 이에 더해 자매의 감정을 알아챈 아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울음을 터트리고, 많은 어린이들은 그녀들과 똑같이 소년을 쏘아보며 벤자민을 쓰러트린다. 그간 벤자민은 고통으로부터, 또 타인의 시선에서 유리되어 있었다. 벤자민은 정신지배로 다른 사람들을 가해자로 만들어, 영화 제목의 또 다른 의미인 자신의 '결백'을 얻었다. 하지만 시선은 묻는다, “너는 진정 결백한 존재냐”고, 이에 벤자민은 고개를 푹 떨군다. 타인을 지배하며 자신으로서 순수하지 못하던 벤자민은, 순수한 자신을 견딜 수 없다. 이윽고 이다 또한 순수를 회복한다. 깁스를 깨부숴 맨 다리를 드러내고, 또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엄마에게 전달하며 포옹을 나눈다. 동생의 감정에 따른 혼란한 그림을 그리던 아나도 그리기를 멈춘다. 소통과 교감으로 비로소 서로는 순수로 되돌아갔다, 멀리 떨어져있는 서로는 클로즈업으로 맞붙으며 상호주체성으로 연결되었다.
즉 공감과 공존을 포기한 오늘날의 ‘목석 사회’를 아이들이 말랑말랑하게 정화한다. 물론 전복하기 이전의 사회를 순진한 아이들이 마냥 따라할 여지도 있다. 그렇지만 보그트는 아이들이야말로 폭력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나와 타인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이로써 인류의 다정함을 복원할 수 있는 희망이라 본다. 또한 보그트는 스크린 너머의 감상자가 아이들과의 간접적인 동일자의 경험을 가질 수 있게끔 2.39:1 화면비를 가득 채우는 '클로즈업'과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활발히 사용한다. 만져질 듯 가까운 그들의 살결이 우리의 눈꺼풀을 간지럽히며 촉감을 환기한다. 하지만 항상 가깝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연출은 단순히 물리적인 가까움만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심경까지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또래와 가까워지는 만큼, 부모와 멀어지는 거리감, 그 과정에서 부모에게 구속될 때의 정적인 촬영, 반면 주체적으로 뛰놀 때의 ‘핸드 헬드’가 특기다. 이로써 스크린 너머의 어른 관객들에게도 이중 감각을 환기하며, 만인이 회복해야 할 동일자의 경험을 역설한다. 다만 벤자민의 범죄가 이슬람 포비아로 연결될 수 있는 만큼, 좀 더 세밀하게 접근해야 하지 않았을까. 또 이다가 정신지배 당하기 직전, 착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유리조각을 쥔 것은 다소 작위적이지 않은가. 아이디어는 좋지만, 거기에만 의존한 일련의 느슨함이 아쉽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