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도 슬픔도, 길지도 짧지도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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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293
인간의 삶은 하나의 거대한 문제다. 그래서 당장 눈앞에 직면한 문제를 해결했다한들 근본적으로 문제인 인간의 삶 속에선 또 다른 문제가 샘솟는다. 그래서 근심하는 우리는 희망한다. 지금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를, 자고 일어났을 때 상쾌하고 후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람과 달리 문제가 많은 현실을 잠시 외면하고 잠을 청했을 때 우린 진정 바라는 것들을 목도한다. 현실에서는 우리의 의식이 사방팔방 분산되어 있다면, 꿈의 중심은 오직 나 자신이요 외부의 개입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꿈에서 일부 해소된 문제들을 보고 아침을 맞는다. 하지만 꿈과 아침은 단절된다. 꿈의 달콤함은 불연속적임에, 결국 어제의 문제를 다시 자각하고 오늘로 이어내며 머리를 싸매고 고군분투한다. 한편 간혹 자고 일어나면 문제가 해결되어 있는 날도 있다. 하지만 꿈이 이어지는 쾌청한 아침을 맞고 하루를 보내다 잠자리에 들어 내일 일어나면, 절대 떨쳐낼 수 없는 문제 그 자체인 인생이 우리를 기다리며 다시금 희망을 바라게 되리니… 그 문제 많은 인생과 아침에 기대하는 희망을 미아 한센-러브가 <어느 멋진 아침>에서 풀어낸다.
1981년 아홍디쓰멍 드 파리 태생의 미아 한센-러브는 프랑스의 영화감독이다. 현재 그녀는 영화감독으로 유명하나 사실 처음부터 연출로 데뷔하진 않았다. 10대에 한센-러브는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작품에 배우로 출연하였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는 까이에 뒤 시네마에 비평을 기고하며 평론가로 활동하였으며, 비평 작업과 단편 연출을 동행하다가 2007년 장편 데뷔하였다. 누벨바그의 영향 하에 놓인 까이에 뒤 시네마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누벨바그에 속하는 에릭 로메르에게 존경을 표했기에 그녀의 영화는 로메르의 파리 풍경이 연상되고, 또 배우자였던 아사야스의 <여름의 조각들>,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와 분위기나 결이 유사하게 느껴진다. 인생에 대한 진지한 탐구,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인간, 이를 가족으로 탐구한다는 점이 말이다. 하지만 아사야스가 성별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인간을 탐구한다면, 한센-러브는 젠더, 특히 가족 관계를 규정하는 젠더를 깊이 탐구한다. 또 철학 교수였던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그녀는 자전적인 소재에서 철학을 사유하는 영화로 유명하다.
한센-러브의 ‘아버지’가 반영된 작품 속 남자들은 항상 외부로 나돈다. <모두 용서했습니다>와 <다가오는 것들>에서 외도하는 아버지, <내 아이들의 아버지>에서 힘과 시선이 바깥으로 향하는 영화 제작자가 그렇다. 그녀의 첫 사랑을 다룬 <안녕, 첫사랑>에서도 남성 연인은 떠나간다. 이에 반해 여성의 에너지는 안으로 응축한다. 남성들이 새로운 영화나 연인에게로 시선을 돌릴 때, 그녀들은 가꾸어놓은 집이나 과거에 정향한다. <안녕, 첫사랑>과 <베르히만 아일랜드>에서 여자들은 옛 사랑을 그리워한다. <다가오는 것들>에서 나탈리는 이혼으로 인해 포기해야 할 정성을 들여 가꾼 별장, 과거의 교과서 디자인, 선생으로서의 철학 등을 변화하지 못한다. <마야>에서도 남성은 바깥에서 상처를 입고 돌아오는 반면, 여성은 그를 묵묵히 기다린다. <내 아이들의 아버지>에서 남성이 바깥에서 '전사'하더라도 여성은 강인한 생활력으로 집을 가꾼다.
이렇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관통하여 젠더를 탐구하는 한센-러브의 작품에서 주연은 <에덴: 로스트 인 뮤직>이나 <마야>를 제외하곤 친숙한 과거 및 기존을 바라보는 여성들이다. 과거에 얽매인 그녀들은 현재의 실존 사이에서 괴리를 겪는다. 현재에 그녀들은 무언가를 잃는다. 남편이나 연인을 잃고, 과거에 가졌던 것이 유실됐으며, 의존적이던 타인의 품에서 달아난다. 남자라 해도 상황은 유사하다. <에덴: 로스트 인 뮤직>에서 청춘을 불태웠던 음악 장르는 퇴조하고 아스라한 기억으로만 남는다. 그러다 결국엔 변화를 따른다. 한센-러브는 언제나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나 바다를 포착한다. 멈추지 않는 강물처럼 과거도 계속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달려가고 있으며 이별, 이혼, 사별 등에 낙담하고 좌절하더라도 그녀들은 어느 새 현재의 새로운 삶을 긍정한다.
한센-러브의 기억은 개개인의 현재를 지배한다. <마야>에서 인질로 잡혀 고문당한 트라우마가 남은 남자는 힘겨워한다. <안녕, 첫사랑>이나 <베르히만 아일랜드>에서 여성들의 뇌리에 남은 옛 사랑 또한 잊히지 않는다. 기억은 과거와 유사한 공간에서 계속 피어나거나, 과거에 가능했던 존재가 현재 내 눈 앞에서 얼쩡거림에 과거는 현재에 강박을 불러온다. 그래서 ‘공간’이 뒤바뀌어야 한다. <마야>에서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를 겪는 남자는 여행을 떠나 새로운 타자와 만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자신을 긍정하며 과거의 자신을 탈피한다. <다가오는 것들>에서도 완고하던 중년 나탈리는 젊은 제자가 독자적인 공동체를 구축한 산골에서 실존을 자각한다. <베르히만 아일랜드>에서 서로 다른 공간에 위치한 커플은 새롭고도 충실하게 적응하며 다름을 인지해간다.
즉 한센-러브의 작품은 실존적이며, 서로의 실존을 존중하기 위해서 성별, 세대, 계급에 따른 차이를 이해하고 극복해가는 과정이 담긴다. <다가오는 것들>에서 등장하는 여러 세대, <안녕, 첫사랑>의 상반된 계급, 문화권이 그렇다. 그리고 <베르히만 아일랜드> 속 상대방의 작업실에서, 타자의 시야로 세계를 관조하는 것처럼, 각자의 실존을 규정하는 표상을 이해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이런 그녀의 자전적인 탐구가 <어느 멋진 아침>에서 이어진다. 본 작품은 <다가오는 것들>의 느슨한 시퀄이라 할 수 있다. <다가오는 것들>에서 이혼한 부모님의 삶과 장성한 자녀들의 삶이 <어느 멋진 아침>에서 일련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 아리송하고 모호한 변화를 한센-러브는 영화로써 해독한다.
도입부의 산드라(레아 세이두)는 아버지 키엔츨러(파스칼 그레고리)에게 방문한다. 그녀는 과거 철학교사였던 위풍당당하고 현명하던 아버지가 익숙하다. 하지만 거산과도 같은 그 풍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대신 나약한 아버지만 남겨져있다. 그녀는 자신의 '보호자였던 아버지의 얼굴'에서 멀어진다. 이제는 그녀가 아버지를 보필해야 하기에 보호를 받던 소녀였던 자신과도 멀어진다. 산드라는 아버지를 돌보느라 딸 린(카밀 르방 마르탱)에게 가야할 시간을 놓치는 등 일상마저 흔들린다. 우린 좋았던 과거가 현재에도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시간은 묵묵히 흐르고, 결국 모든 것은 바뀌고야 만다. 변화는 좋을 수도 있다. 산드라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동그란’ 공을 짚다가 계획에 없는 클레망을 재회하여 기뻐한 것처럼, 산드라가 어머니라는 완고한 책임과 역할에서 달아나, 린의 아이스크림을 빼앗아서 도망치는 천진한 어린 아이로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쁠 수도 있다. 산드라가 존경한, 또 현재 번역가로서 산드라를 있게 한 독일 철학 전문가인 키엔츨러의 진리와 아름다움을 앗아간다. 그가 앓는 희귀병은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는 무지의, 두려운 앞날을 펼쳐낸다. 클레망과 린이 함께한 호수의 '안개'도 마찬가지다. 앞이 혼탁하다. 규정되지 않은 삶이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무엇이 엄습할지 모르는 것이다. 더욱이 어디로든 향할 수 있고, 어떤 형체로든 변할 수 있는 호수의 물살도 실존이다. 그것들이 어떤 나를 만들어낼지 모른다. 이는 정치에도 통용된다. 프랑수아(니콜 가르시아)는 마크롱을 지지‘했’다. 그러나 지금은 지지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좋았을 수도 있지만, 현재에는 나쁠 정도로 흐름은 변화한다.
긍정적일수도 부정적일수도 있는, 무엇을 만날지 알 수 없는 변화는 영화에서 ‘닫힌 문’을 두드리고 여는 장면에 반영된다. 문을 열고 문지방을 넘으며 사람들은 ‘새로운 국면’과 마주하고, 키엔츨러는 여러 요양원을 이사 다닌다. 또한 키엔츨러가 질이 좋은 요양원으로 옮기는 영화 중반부에 '대가자 명단', '교통체증과 경적'이 도드라진다. 변화는커녕 꽉 막힌 상황, 변화를 위해 하차하는 상황을 몰아세우는 경적, 그러나 이를 뚫고 키엔츨러는 좋은 요양원에 도착하고, 그토록 바라던 레일라도 당도한다. 즉 닫히거나 막힌 것을 열어젖히며 우리는 실존한다. 한센-러브는 이러한 변화를 긍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키엔츨러는 희귀병으로 인해서 시력이 좋지 않다. 기억 속의 과거만 잘 보이고, 현재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로써 현재의 실존을 확인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실존을 인지한 인간이라 한들 변화의 물결을 마냥 긍정하지 못한다. 키엔츨러는 자신의 병세에 실존주의 문학의 창시자인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인용한다. 인간은 자신이 바라고 규정하는 모습이 있고 그것을 본질로 삼지만, 삶이란 언제나 이를 배반하고 앞서기 때문이다. 린은 ‘성장통’을 겪는다. 린의 키는 쑥쑥 자라서 변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이 ‘고통’스럽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는 듯, 발을 질질 끌면서 변화를 저지한다. 영화 초반에 린은 증조할머니 재클린을 만난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 정도로 노쇠했다. 곧 죽을 것이지만, 그런데도 살아있는 한 자신을 옹골차게 지켜간다. 또 대체로는 문을 열곤 하지만, 산드라가 보존하고 싶은 키엔츨러의 취향, ‘슈베르트’를 들을 때는 문을 닫는다. 그의 소중한 영혼이 변하지 않고 문틈 사이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즉 인간은 나룻배에 타서 노를 잡고 물결 위에서 어떻게든 실존의 방향을 정향한다. 이렇게 인간의 일생은 실존과 이를 부정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시간은 공평하게 앗아간다. 그래서 영화 속 편집은 사적/공적 영역,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슬픈 순간과 사랑을 나누는 희열의 순간까지, 모든 숏의 길이가 치우치지 않고 균일하다. 행복과 고통이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게, 잠시 동안 머무르다가 다른 국면으로 뒤바뀌며 그저 유유히 흘러갈 것이라는 듯 말이다. 더욱이 한센-러브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의 행동이 미처 다 완결되기 전에 숏을 잘라낸다. 관객의 입장에서 그들은 완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는다. 하나의 행동으로 항구적으로 닫히지 않고 여러 갈래로 흘러갈 수 있는 ‘미완’이라는 듯이, 이로써 새로운 국면을 불러올 수 있다는 듯 말이다.
이 철학은 <어느 멋진 아침>의 촬영에도 영향을 미친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주로 고정되어 있는 반면, 주인공 산드라는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카메라가 틸트나 패닝을 하며 산드라를 어떻게든 촬영해보려 노력하지만, 이곳저곳 바삐 쏘다니는 그녀를 온전히 담아내기엔 역부족이다. 그녀는 카메라 앞으로 다가와서 '가까이', '커다랗게' 이따금 보일지라도, 다시금 '멀어지거나' '작게' 소외되곤 한다. 이러한 형식에 비추어보자면 실존이란 가까웠다가 멀어지는 것이자, 그 반대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때 잘 알고 친밀하던 서로, 그러나 필연적으로 변화하는 우리는 대상이 낯설어지고 어색해진다. 이로써 실존은 가까웠던 대상을 멀게, 반대로 멀리 있던 대상을 가깝게도 만든다. 그래서 서로는 카메라, 곧 '시선' 앞에서 가까워지고 멀어짐을 반복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 다수는 '가족'이다. 육체며 정신이며 쏙 빼닮았고, 태어나면서부터 가까이 위치하였기에 서로 동일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닮았던 서로는 점차 다른 구석이 아주 많은 '타자'로 변신해간다. 나와 전혀 다른 타자로 느껴질 때, 상대방은 오물이 가득한 ‘화장실’처럼 멀리 하고 싶다. 산드라에게 ‘교수’ 키엔츨러는 익숙하지만, 희귀병을 앓고 저물어가는 아버지는 익숙하지 않다. 그 아버지의 용변을 도저히 도와주질 못하겠다. 산드라와 자주 견해 차이를 보이는 프랑수아 또한 화장실에서 용변 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산드라는 이들의 화장실에 동행하지 않는다. 그들에 의해서 나 조차 더럽혀지며, 자신을 잃는 기분일까? 이에 영화에선 두 사람을 나누는 대립적인 ‘리버스 숏’이 잦다.
산드라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긍정적이다. 그래서 그와 함께했던 즐거운 기억을 자신과 닮은 엄마, 프랑수아에게 꺼내본다. 그러나 프랑수아는 키엔츨러와의 결혼 생활이 불행으로 얼룩져서 그와의 추억 대부분을 망각한 상태다. 똑같다고 생각하던 모녀는 멀어진다. 린도 마찬가지다. 산드라는 딸의 안위를 자신의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린은 산드라의 딸임과 동시에, 부모와 무관한 별개의 존재로서 변해간다. 산드라는 린이 보고 싶은 <겨울왕국 2>를 보기 싫다. 어쩌다 린과 함께 아동 영화를 봤지만, 산드라는 그것이 너무 폭력적이어서 혹평한다. 그러나 린은 그 영화를 좋아한다. 이에 린은 산드라와 가까우면서도 거리를 벌린다. 키엔츨러가 더는 혼자서 생활할 수 없을 거란 판정을 받자, 식구들과 친지들이 한데 모여 그의 집에서 작별한다. 키엔츨러라는 성을 공유하거나, 그를 사랑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닮은 그를 자신처럼 여기며 가까이 모인다. 하지만 키엔츨러는 죽어가는 한편, 모인 사람들은 창창한 삶을 여전히 이어가야 한다. 그래서 그의 우환이 곧 나의 것인양 슬퍼하다가도, 차 안에서 각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논하는 '정치 이야기'를 하며 그와 멀어진다.
다른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름휴가에서 식구들은 단어 조합 게임을 한다. 린은 산드라에게 게임하자고 보챘지만, 산드라는 너무 피곤해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약속했기에 일단 참여한다. 이후 알파벳으로 'SEX BITE'라는 단어를 조합하지만 이를 린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어머니는 딸과의 프레임을 분리한다. 또 키엔츨러는 레일라를 찾아 헤매지만 산드라는 레일라가 아니며, 레일라인 척할 수도 없다. 즉 그가 바라는 여성 레일라가 아니기 위해서 산드라는 냉정하게 요양원을 빠져 나온다. 또 점점 더 퇴행하고 추락해가는 아버지의 상황을 도저히 직면하고 있기 어렵다. 그래서 결말의 산드라는 아버지의 곁에서 멀어지는 한편, 린은 키엔츨러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산드라는 자신의 기분을 위해서 멀어졌지만, 한편 린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바람에서 멀어졌다.
이렇게 멀어질 때, 상대방도 나도 자신으로서 존재한다. 가까이 있을 땐 닮은 상대로서 존재했다면, 다름을 느끼고 멀어지면서 비로소 나 홀로 우뚝 선다. 한센-러브는 이를 '프레임 구성'에 반영한다. 본래 프레임에 함께 속했던 이들은 각자 독립하기 위해 서로한테 멀어져 프레임을 분리한다. 산드라와 린은 그녀들이 쏙 닮은 프랑수아와 휴가 계획까지 일치시켜,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함께 보낸다. 그러나 산드라는 식구들과 시간을 보내기 보단, 클레망(멜빌 푸포)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사실 더 컸다. 그래서 다 함께 별을 보다가도, 잠자리에 일찍 들겠다는 이유로 산드라 먼저 방에 들어온다. 이후 클레망이 보내준 편지를 읽는다. 프랑수아, 린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외부의 소음이 원천 차단되어 '진공 상태'에 빠진다. 외부의 개입을 절대적으로 불허하는 그녀만의 프레임에서 슬그머니 차오르는 것은 오직 그녀만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클레망의 편지다. 프랑수아와 린이 함께한 세계와 산드라의 세계가 분리되며, 산드라는 자신을 되찾는다. 그런 산드라는 '번역가'다. 가족끼리 있을 때도 그녀의 입은 식구들을 위해 헌신하지만, 공적 장소에서도 그녀의 입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통역해야 할 원본에 의해 수동적으로 그녀의 발화가 결정되고, 청중이나 관객을 위해서 언어를 정돈한다. 또한 그녀는 현재에 사는데, 이런 그녀의 입이 봉사해야 하는 것은 ‘참전용사’, ‘2차 대전’, ‘와인의 역사’ 등 과거다. 그래서 현재 그녀의 실존을 반영하지 못한다. 사적 영역, 공적 영역 너 나 할 것 없이 타인에게 잠식되어 제 존재를 잃어 버린 그녀는 자기만의 언어와 입을 되찾고 싶어 한다.
한센-러브는 이를 형식으로써 가시화한다. 가장 먼저 35mm 필름이다. 35mm 필름은 영화 전체를 뿌옇고 부드러운 진주색, 상아색 빛살로 가득 채운다. 또 화사하고 사치스러운 태양의 햇살을 부각한다. 이로써 스크린은 아주 따스하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드라가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데우거나, 때론 제 온기를 되찾고 자신을 밝히므로. 그러나 35mm 필름은 동시에 희고 흐리다. 디지털에 비한다면 그토록 불명확하고 혼탁할 수가 없다. 그녀 자신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을 만큼 참으로 흐리다. 타인에게 봉사, 타인과의 유사성에 잠식되며 자신을 잃어가기에.
35mm 필름과 더불어 한센-러브는 '옷'에도 신경을 썼다. 아버지를 간병할 때 산드라의 옷은 후줄근하다. 간병에 따른 굳은 일을 맡기에 불편함이 없는 의상이다. 통역가로서 산드라는 행사를 주최한 사람들의 의도에 맞춰 단정하고 전문적인 정장을 입는다. 즉 자신을 위한 옷이 아니라 타인에 의한, 그들에게 좋은 옷이다. 그러나 점차 그녀의 옷은 미술관에서의 쨍한 빨간 드레스, 경쾌하고 발랄한 푸른 블라우스나 드레스 등, 감정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또한 옷이 특정한 산드라를 규정하고 반영함을 넘어서, 그 옷을 모두 풀어 헤친, 행동을 섣불리 예견할 수 없는 무규정적이고 비확정적인 나체로 회귀한다. 감정적인 의상과 감정 그 자체의 나체, 그리고 35mm 필름의 온화한 밝힘, 이는 타인의 속박에서 벗어나 나 자신으로서 흐를 때 가능하다. 한센-러브는 여전히 유유자적한 강물을 포착한다. 또 나뭇잎을 찰랑찰랑 흔들어대는 바람을 담아내며, 본 작품에서 자주 언급되는 ‘거대한 우주’ 속에서 잠시 반짝거리다가 사라지는 ‘비눗방울’도 결말에서 부각한다. 그 와중에 재즈 피아니스트 ‘얀 요한손’이 이리저리 터를 옮기는 양치기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Liksom en herdinna>를 배경음악으로 삽입하며, 실존과 사멸이라는 운명을 긍정한다.
이렇게 자신을 되찾으면, 홀로 프레임을 분리하여 고독을 자처해야 하기에 '외로움'이 뒤따른다. 또 내가 굳이 상대방과의 분리를 각오하지 않더라도, 영화를 지배하는 실존은 익숙하고 좋았던 것들을 앗아가기에 인간을 허무하고도 '쓸쓸'하게 만든다. 시간의 흐름은 산드라에게 남편을 앗아가고, 듬직하던 아버지까지 데려갈 예정이니 말이다. 그래서 한센-러브는 변화가 필연이긴 하지만 인간이 맞닥뜨리기 싫을 수도 있으니, 이에 대항하는 '사랑'이야 말로 언제나 좋은 것이라 본다. 덧없는 소멸과 상실의 연속에서 함께 프레임에 머물려는 연인들이 서로에게 충만한 마음을 선사한다. 사랑이란 꽉 채우는 것이자 머무는 것으로서 인간의 필연적인 공허를 일순간 극복한다. 한센-러브는 사랑이 갖는 ‘보존’이라는 미덕을 ‘편집’으로 보여준다. 프랑수아는 키엔츨러의 병마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고수한다. 즉 프랑수아는 덧없는 키엔츨러의 변화를 적극 긍정하는 반면, 산드라는 그 사실이 너무나 슬퍼서 견디기 어렵다. 프랑수아와 산드라의 대립이 담긴 시퀀스 이후 이어지는 숏엔 산드라와 클레망의 만남이 담긴다. 그 사랑은 ‘미술관’에서 펼쳐지며 ‘영구적으로 붙잡음’이란 역할이 더욱 부각된다. 즉 공허라는 원흉이 보존하는 사랑의 당위성을 만들어내고 이어낸다. 하지만 미술관 데이트 직후, 미로와 같은 정원에서 길을 잃고 서로를 놓칠 뻔했다. 즉 사랑으로 일순간 보존하더라도 그 찰나가 끝나면 다시 사라지기 십상이기에 사랑에 더더욱 목을 맨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충만한 마음을 제공하는가? 딸이자 엄마, 번역가로서 산드라는 항상 타인에게 헌신하지만, 정작 타인은 산드라를 헤아려주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클레망은 산드라의 삶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느끼려는 존재, 말하지 않아도 먼저 나서서 그녀를 궁금해해주는 사람이다. 산드라는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땐 침해받는 불편함을 느껴서 프레임을 분리하려 했지만, 클레망과 함께한 프레임에선 안정적이고 평온하게 정착한다. 상대와 다를 때는 프레임을 분리하여 자신을 보존하고 싶지만, 함께 좋을 때는 프레임에 공존하고 싶다. 즉 사랑의 요건 중 하나는 함께 있더라도 서로에게 잠식되지 않는 것이다. 외로움을 해소함과 동시에 나를 보존해 주는 대상만이 연인이라 부를 수 있다. 이는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다. 클레망이 산드라를 보존함과 동시에, 산드라 또한 클레망을 보존한다. 그에게서 북극 이야기를 들은 날 밤, 산드라가 잠을 청하니 영화에선 '디졸브'가 발생한다. 현실 속 산드라의 육체에 관념으로서 클레망의 이야기가 포개진다. 영화에서 지금까지 이어진 대립적 리버스 숏이 화해하는 순간이다. 이 겹쳐짐은 둘 중 하나가 상대를 잠식하지 않고, 생생히 공존한다. 실제로도 그들의 관계는 자신을 위해 상대를 희생하지 않는다. 산드라는 사별했지만, 클레망은 아직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기에, 산드라는 마음이 아프지만 이를 존중하려 그를 기다린다. 이렇게 사랑이란 무한히 변화하고 상실되는 세상 속에서 서로를 보존하는 힘이다.
산드라와 클레망의 육체적 사랑, 곧 '에로스'만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다. 영화 속 일상에서도 '존경'이나 '가족애' 등 서로를 보존하는 사랑의 유형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로써 우린 좋은 것들을 평소에도 보존하며 살아왔다. 키엔츨러의 가족들은 그가 소장한 무수한 책들을 따로 보관할 여유가 없다. 좋아하는 일부 서적만 나눠 갖거나 병원비 조달을 위해서 처분을 결정한다. 이 와중에 키엔츨러의 강의가 너무 좋았던 제자가 자신의 집에 그의 이름을 딴 미니 도서관을 만들어 책을 보존한다. 시간의 흐름은 키엔츨러가 더는 철학교사일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제자의 ‘플라토닉’이 학자로서 그의 흔적을 보존해주며, 이로써 사랑은 상대에게 좋은 것을 대신 해준다. 크리스마스에 어른과 아이의 관계도 그렇다. 어른들은 아이를 위해서 산타클로스가 온 것 마냥 연기한다. 아이들은 이들의 엉성한 연기를 홀딱 속아준다. 아이를 위한 어른들의 연기, 어른들을 위한 아이들의 믿음, 양자 모두를 서로의 애정이 보존한다.
즉 인간에겐 실존이 필연이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유일무이한 진실이다. 그런데 소중한 것을 앗아가는 냉정한 운명을 엄숙하게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저절로 내 마음은 서글퍼지고, 그 동요를 이성이 쉽게 제어할 수 없다. 그래서 끝끝내 부질없는 일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사랑으로, 또 영화라는 예술로써 변화와 상실을 한번 거슬러 본다. 한센-러브는 지금까지의 모든 작품에서 20세기에 성행한 매체, 곧 '과거'에 상응하는 35mm 필름으로 지나간 순간들을 붙잡고 재현했다. 심지어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인 감정을 듬뿍 담아서, 35mm 필름 특유의 부드러운 진주색 빛살을 스크린에 가득 채우고 소중한 것들에게 사치스러운 햇살을 따스하게 내리쬐며 자신만의 기억을 붙잡았다. 또 본 작품에선 산드라, 린, 클레망이 함께 있는 행복한 결말을 '프리즈 프레임'으로 냉각한다. 그와의 연애도, 어린 린과의 사랑스러운 추억도, 애정이 잠시 동안 지켜주겠지만 이는 잠깐이요 결국 흘러가야만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변화를 거슬러 좋은 순간들을 박제해놓고 싶은 것이다. 즉 한센-러브는 나풀거리며 덧없는 인간의 운명을 그토록 냉정하게 반영하지만, 그 실존을 마주한 인간, 심지어 자기 자신의 나약한 반응까지도 함께 투사한다. 그래서 한센-러브의 영화엔 인간의 운명적인 실존과 이를 부정하는 모순적인 태도까지, 그야말로 인간의 모든 것이 반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