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을 원하는 자, 추락을 각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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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283
사회주의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는 만인의 궁핍을 해소하면, 모두가 자유롭게 제 능력을 펼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예측은 빗나갔다. 바로 인간의 의지와 탐욕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특정 노동을 인민에게 억지로 강제했고 자유를 압박했다. 한때 부르주아를 열렬히 비판하던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정작 그들이 높은 위치에 오르자 탐욕과 권력욕에 휩싸여 부르주아처럼 노동자를 착취했다. 이로써 인류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빈곤 해소가 아니라 금욕임을 몸소 증명했다. 한때 혁명가였고 사회주의를 널리 전파한 기자였던 스탈린의 말로도 그렇다. 서기장으로 군림한 그는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서 소련 내 특정 지역 수탈을 서슴지 않았으며, 폭력을 적극 활용하였다. 스탈린의 대숙청은 권력에 눈먼 추악한 지도자의 타락을 보여줬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며 대숙청은 겨우 끝나나 싶었지만, 실은 아직까지도 종결되지 않았다. 바로 오늘날에 푸틴이라는 새로운 차르가 두 번째 대숙청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스탈린 대숙청 시기’의 혼란스러운 소련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또한 대숙청이란 역사를 왜 오늘날에 소환해야 하는지 몸소 증명하는 작품이다. 본 작품은 2021년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뒤 2년이 지난 2023년에야 겨우 각국에 개봉하였다. 202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프리미어된 작품 다수가 2021~2022년 사이에 개봉을 마친 것을 생각하면 참 의아한 일인데, 본 작품의 개봉이 밀린 이유는 ‘제 2의 대숙청’을 감행하고 있는 푸틴의 심기를 건드려 배급에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국 러시아에서는 아직까지도 개봉하지 못했다. 즉 작품을 둘러싼 맥락으로 21세기에 대숙청이 재현되어야 하는 이유를 몸소 증언하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나타샤 메르쿨로바와 알렉세이 추포프 콤비가 연출한다.
1979년 오렌부르크 태생의 나타샤 메르쿨로바와 1973년 모스크바 태생의 알렉세이 추포프는 ‘부부’로서 함께 작품을 연출하는 공동 영화감독이다. 2013년 <은밀부위>라는 작품으로 장편 데뷔한 그들은 현 러시아 당국의 지나친 ‘검열’과 이에 반하는 ‘자유로운 예술’, ‘성’을 탐구한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출산율 집계로 인해 성이 정치·경제에 복속되면, 쾌락의 규제가 뒤따라오는 메커니즘을 밝힌 바 있다. 이처럼 러시아 당국은 출산율을 위해 포르노, 선정적인 예술을 규제하며 본래 자유로운 인류의 성에 제동을 건다. 쾌락을 위한 성은 양치하거나 목욕하는 ‘소음’에 가려진 은밀한 음지에서나 가능하다. 또 국가의 지나친 개입은 임신·출산하는 여성의 10개월을 아주 빡빡한 노동 시간으로 환산한다. 이를 버티지 못한 여성은 임신 중단을 결심한다. 음지에 숨겨진 성, 임신 중단은 출산율을 높이고자 하는 국가의 의중에 반하기에 언제나 은밀한 진실로 전락하다. 메르쿨로바와 추포프 콤비는 진실을 탄압하는 러시아 당국과 달리, 성을 규제하는 정치의 진실, 적나라하고 때로는 불쾌한 성의 진실을 묘사하는 ‘안티테제’가 예술임을, 작품 속 ‘사진 촬영’을 빌려서 역설한다. 예술은 자유로워야 하고 국가의 선전 도구가 아니며, 자유로운 일상에서 이로워야 한다. 또 권태롭고 지리멸렬한 일상을 위반하여 마법 같은 초현실성·초자연성을 맛보는 경험이 예술이자 자유로운 성이라 말한다. 무엇보다 인류에게 성은 거세할 수 없다. 쾌락을 위한 성, 자유로운 성에 강한 규제를 내리는 임원조차도 상대방을 에로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삶의 목적이자 이유, 심지어 ‘피뢰침’이 되어 위험을 불러오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성이다.
이후 <모두를 놀라게 한 남자>에서도 성을 깊게 탐구한다.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한 본 작품은, 모스크바를 넘어서 다양한 ‘지역적 풍토’를 담아내는 동시대 러시아 영화의 흐름에 일조한다. 낙후된 전원인 시베리아에선, 남과 여의 성 역할 및 관행이 엄격하게 분리 및 공고화되어 있다. 남성은 공적 영역의 우락부락하고도 완고한 ‘가장’이라면, 여성은 임산부로서 사적 영역에서 생명을 탄생시키고 유지하려 안간힘을 쓴다. 이러한 젠더는 ‘가축’들과 함께 살아가는 원초적인 사회가 ‘자연’을 모방한 것인데, 가축이 산업 동물인 것처럼, 인간의 성 또한 인위성이나 경제에 포섭된 것이라는 사실을 공동 감독은 까발린다. 작위적인 인간은 성을 협소하고 편협한 것으로, 오직 실익을 따지는 도구로 전락시킨다. 이고르를 강간하려던 남성처럼 제 욕망에 봉사시키거나, 숲속의 노동자들이 제게 도움이 되는 인간상만을 그려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무궁무진한 젠더를 지향하는 이고르를 ‘자연’은 품는다. 자연법을 주장하는 인간은 정작 배타적이고 편향적이지만, 실제 자연의 섭리는 관용적이다. 남성을 갈구하는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던 나탈리아도 이윽고 이고르가 어떤 모습을 띠던, 대상 그 자체를 사랑하고 품기에 이른다. 이렇게 자애로운 진짜 자연법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는 젠더에 순응하는 삶은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그저 ‘시한부 인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동 감독들의 연출은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도회적이고 세련된 연출을 연상케 하지만, 그보다는 가볍고 경쾌하게 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활동 시기가 겹치는 청년 영화감독 이반 트베르돕스키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들은 절대자의 시점이라 할 수 있는 하이앵글 구도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와 성기를 내려다보며, 우리가 필연적으로 절대자에게 봉헌하는 것이 성임을 말하며, 연출로 자신들의 탐구를 강화한다. 또 시베리아로 향한 <모두를 놀라게 한 남자>에서는 콘찰로프스키나 드보르체보이를 연상케 하는 거친 리얼리즘을 선택했는데, 시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그들의 양식은 과연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에선 어떤 모양새를 갖추고 있을까. 천연덕스럽고 뻔뻔한 리비도의 진실, 어떠한 이유도 명분도 없이 그저 마음이 이끌리는 젠더의 진실을 폭로하던 메르쿨로바와 추포프는 이제 그 시선을 역사로 돌린다.
도입부, '로우 앵글' 구도로 스탈린의 비밀경찰(NKVD)들을 흡사 거인처럼 웅장하게 포착한다. 충분히 몸집이 단단하고 거대한 그들이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한 듯, 배구를 하며 자꾸 저 위로 '상승'하려 안달이다. 이들을 천장에 매달린 호사스럽고 사치스러운 '샹들리에'가 내려다보는 듯하다. 궁전 ‘꼭대기’에 위치한 샹들리에에 비견하는 존재는 오직 스탈린 밖에 없다. 그만이 비밀경찰을 내려다보며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비밀경찰들의 배구공이 자꾸만 샹들리에를 건드리다가, 끝끝내 가지에 걸리고야 말았다. 비밀경찰들은 공을 가져오기 위해서 천상에 위치한 샹들리에의 지위에 접근한다.
지금껏 비밀경찰들은 스탈린의 '애완견'이었다. 볼코노고프와 그의 친구 '키도'의 장난이 스탈린과의 주종관계를 상징한다. 볼코노고프는 ‘주인’을, 키도는 애완견을 연기하는데, 애완견은 콩고물을 받아먹기 위해서 주인을 맹목적으로 따라한다. 주인에게 순종하는 애완견은 무해하다. 그런데 애완견의 태도가 돌변하여 주인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반려견의 태도가 180도 뒤바뀐 이유는, 주인을 따라서 위협적인 '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 ‘사냥개’로 훈련됐기 때문이다. 스탈린에 의해 군견이 된 비밀경찰들은 인민에게 누명을 씌워 '진실'을 조작할 수 있는 힘, 그들의 목숨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무시무시한 힘을 쥔 사냥개들은 자아가 생겨나며 주인의 머리 위로 올라선다. 볼코노고프는 여군에게 성희롱을 저지를 정도로 오만방자해진 어느 한 사냥개의 머리 위에 아주 무거운 '바벨'을 올려서 경고한다. 동시에 볼코노고프가 누군가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즉 명령을 따르던 존재들이 지시를 내리는 샹들리에의 위치에 근접하니, 스탈린은 위기감을 느낀다. 이에 그는 가장 충실한 사냥개 중 하나였던 '그보드제프' 대령에게 누명을 씌운다. 그는 압박에 못 이겨 자살한다. '골로브냐'에겐 힘을 마음대로 남용하지 못하게끔, 오직 스탈린의 명령만 순순히 따르게끔 '유효기간'을 설정한다. 이렇게 메르쿨로바와 추포프는 스탈린이 대숙청을 시작하게 된 ‘자승자박’과 그 이후의 경과를 상세히 분석한다.
앞서 언급했듯, 메르쿨로바와 추포프는 전작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착취되는 인간의 운명을 가축에 빗댔다. 가축으로서 인민들이 희생되는 양에 비례하여, ‘농장주’인 지도자나 국가의 '이익'이 상승한다. 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축, 그 중에서도 '희생양'으로 전락한 그보드제프가 도살될 위기에 처하니, TV에선 '경제 5개년 개혁' 소식이 흘러나온다. 메르쿨로바와 추포프는 인간을 지배하는 ‘절대자’임과 동시에, ‘절대자 위의 절대자’인 스탈린에게 착취당하는 가축으로서 비밀경찰의 ‘양가적인 정체성’을 '이중적인 미장센'으로 가시화한다. 비밀경찰들이 위치한 장소는 궁전처럼 호사스럽다. 이 우아한 공간엔 아름다운 합창과 무용이 가득 들어찬다. 연출도 이에 맞춰 우아하고 심미적이다. 불필요한 움직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흡사 ‘발레’와도 같은 정돈된 카메라 워킹과 피사체를 정교하게 촬영하는 안정적인 구도가 인상적이다. 그런데 이 고혹적인 궁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볏짚'이 바닥에 널려있고, 여기엔 '피'까지 묻어있다. 흡사 ‘축사’에서 가축을 도축한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도 볏짚 위에서 ‘인간 백정’ 스탈린은 가축으로 전락한 인민들을 살해하라 지시했다.
무수한 인간이 가축처럼 썰려나간 궁전엔 화사한 빛이 풍부하게 쏟아진다. 빛 또한 이중적이다. 빛은 밝히지만, 명예에 누가 되는 것은 숨기고, 가축으로서 사냥개나 인민들이 정상 작동하고 있는지, 볼코노고프가 도망치지 않는지 만을 감시할 뿐이다. 동시에 영화 속 너무나 충만한 빛은 연기이자 안개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밝히기는커녕 어떤 것들은 자욱하게 뒤덮는다. 비밀경찰들이 진실을 '은닉'하고 말소하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태우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고, 연기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그것이 많은 진실들을 덮는다. 그들은 오직 스탈린을 위한 것만 밝히고, 스탈린에게 누가 되는 것은 연기로써 뒤덮는다.
볼코노고프는 더는 상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도망친다. 메르쿨로바와 추포프는 연출을 변화하여 그의 도주를 가시화한다. 그의 탈출 이전까진 영화의 촬영은 안정적이고 온유한 ‘트래블링 숏’이 주를 이뤘다. 스탈린이 수여한 권력에 안착한 사냥개들처럼, 카메라 또한 권력의 '안정감'에 비례하는 '스테디캠'에 올라탔었다. 볼코노고프는 바로 이 안정감을 거부한다. 스탈린의 손아귀에 상응하는 스테디캠은 이내 곧 그의 목숨을 조여 올 것이므로, 스탈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벗어 던진다. 그런 볼코노고프에게 남는 것은 오직 '몸뚱아리' 하나뿐이다. 이에 권력이 보장하는 안정성과 상반되는, 불안정하게 헐떡거리는 몸뚱이가 파생하는 운동인 '핸드 헬드'로 카메라 워킹이 변한다. 그보드제프가 죽고 볼코노고프가 결심한 그 순간부터 쭉 말이다. 또 지금껏 트래블링 숏은 수동적으로 움직였는데, 그 이유는 스탈린의 명령만을 천편일률적으로 따르는 비밀경찰의 동선은 제한적이고 예측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코노고프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예상치 못한 그의 빠른 발걸음을 어떻게든 따라가고자 카메라 워킹은 능동적이고도 다급하게 변한다.
카메라 워킹뿐만 아니라 편집도 변한다. 상부가 명령한 바를 사냥개들은 다음 숏에 쭉 이어냈다. 스탈린의 계획이 불발하면 사냥개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졌기에, 폭군에 의해 있어야 할 곳에 사냥개들은 위치했다. 그런데 비밀경찰들이 예상한 볼코노고프의 동선이 다음 숏에 이어지지 않는, 단절적인 편집으로 바뀐다. 키도가 볼코노고프를 위해 명령을 거부하고, 상관을 속여 거짓 자백을 했기 때문이다. 이 형식들은 아름답지 않다. 거칠고 당혹스럽다. 그러나 동시에 예측이 맞아떨어지지 않아서 여러 가능성이 열려있고, 이로써 해방감을 띤다. 볼코노고프는 시한부 부귀영화를 거부하고, 오직 자유를 위해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로워진 볼코노고프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는 ‘회개’하기 위해 도망쳤고, 이로써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라 말한다. 이 회개는 ‘이중적’인데, 메르쿨로바와 추포프는 상승과 하강의 운동으로 이를 탐구한다. 천국으로의 ‘상승’에만 주목했을 때 회개는 폭력적이다. 밟고 올라가기 위해선 '디딤돌'을 높다랗게 쌓아야 하는데, 그 돌들이 영화에선 '인간의 목숨'이다. 볼코노고프가 키도의 ‘목마’를 타고 샹들리에 근접하는 것처럼, 볼코노고프가 팽될 위기에 처하자 그의 쾌적하고도 높은 주택을 노리는 중년 여성처럼, 처형된 사람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묻은 대지 위에 볼코노고프가 서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말에서 볼코노고프는 하늘과 가까운 '지붕' 위에서 골로브냐와 추격전을 펼치기에, 천상에 조금이나마 걸친 셈이다. 올라가는 과정에서 볼코노고프는 왜소증에 걸린 유약한 노동자의 술을 ‘빼앗거나’, 민간인을 인질로 붙잡아 '협박'하고 권총에서는 '오발탄'이 발사되어 상해를 입히는 등, ‘높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살인을 서슴지 않는 스탈린처럼 '폭력'을 동원하여 타인을 아래로 끄집어 내리고 쌓아서 위로 올라갔다. 메르쿨로바와 추포프는 대상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오직 나 자신만 천국에 가기 위한 독선적인 회개는 스탈린의 대숙청과 별 다를 바 없다고 진단한다. 또한 소수 권력자만의 상승은 사회 전반을 붕괴시킨다. 볼코노고프가 희생되어도 지금껏 꽤 많은 착취를 감내한 중년 여성에게 주택은 돌아가지 않고, 권력을 선전하는 비행선은 높게 올라가고 이를 연구한 기관은 유효하지만, 정작 실질적으로 삶에 도움이 되는 의사들과 병원들은 문을 닫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타인을 착취하며 ‘피로 물든 제복’을 입고 높은 자리로 올라섬에, 아무리 민간인으로 위장해도 '한기'가 느껴져는 비밀경찰들은 삶을 누릴 수 없다. 타인을 학살하고 태워서 얻은 권력에는 '폐질환'이 뒤따른다. 이를 치료해야 하지만, 병원들은 허물어져 빈곤하고 너절한 지대로 전락했으니, 높은 권력은 정작 삶을 단축시킨다. 이는 실제 역사 속에서도 스탈린의 대숙청은 정작 제 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아둔한 결과를 낳았다. 즉 누군가의 죽음으로 올라선 그 위는 '지옥'과 다를 게 없다.
메르쿨로바와 추포프가 생각하는 진정한 회개는 '추락'을 자처해야 한다. 키도가 주스를 핑계로 '동전'을 건네주며 볼코노고프의 탈출을 돕고, 이후 처형당하면서까지 친구를 숨겨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로써 땅 아래로 추락하게 된 키도의 희생으로 볼코노고프는 탈출한다. 이후 그가 향하는 곳도 인민들이 혹사를 당하고 있는, 숭숭 구멍이 뚫려있어 허물어지기 직전인 ‘낮은 지대’다. 본래 '병원'으로서 높았을 수도 있는 장소들, 그러나 현재는 버려진 건물이거나 시체 안치소 등으로 격하됐고, 그 안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래의 직업을 잃고 스탈린의 흠을 지우는 '청소부'로 전락했다. 장의사이거나 무언가를 태우는 사람들, 권력자들과 달리 위생이 좋지 못한 사람들로 등장하니 말이다. 그들 덕분에 천상에 올라선 권력자들은 뒤돌아보거나 내려오지 않는다. 바라봐지지 못하는 청소부들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있지만 없는 듯 망각된다. 그들의 비통함을 높다란 선전이 은폐한다. 반면 볼코노고프는 과거를 '플래시백'하며 낮은 곳으로, 있었지만 사라진 곳으로 되돌아간다. 이는 단순한 회고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희생자들이 처한 환경에 직접 속하며 ‘매치 컷’으로 죄책감을 곱씹고, 키도의 죽음을 상상하며 친구의 고통을 체감한다. 내장을 움켜쥐는 듯한 고통을 말이다. 또한 볼코노고프는 유족에게 따귀를 맞거나 가격당해서 기절하는 등 감당해야 할 죗값을 짊어진다. 처형될 위기에도 불구하고 진실이 담긴 ‘서류 뭉치’를 되찾으러 궁전에 잠입하고, 손을 데어가면서까지 모닥불에 떨어진 서류 뭉치를 집는다. 최종적으로 볼코노고프는 인질들을 위해 기꺼이 추락한다.
볼코노고프의 희생으로 구원된 인민들은 '나체'를 회복한다. 본 작품에선 스탈린 치하의 위협적인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도 연약한 나신이 간간히 등장한다. 볼코노고프의 연인, '라야'가 그의 고백을 들었을 때, 그녀는 옷을 벗고 나타난다. 일순간 진실하고도 자유로워진 볼코노고프 또한 속옷만 입고 그녀와 섹스를 시작하나, 라야가 그를 밀고한 사실이 탄로 나자 성 행위는 중단되고 다시 옷을 껴입는다. 또 볼코노고프에게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는 여인 또한 탈의하여 나체로 나타나는데, 어떤 옷도 입지 않은 '날 것의 육체'를 '진실'에 빗댄다. 그런 점에서 고문은 있는 그대로의 살갗을 왜곡하는 행위다. 누명이 씌워진 교수의 하반신을 벗겨서 상해를 입히고 거짓 자백을 받아내듯 말이다.
반면 볼코노고프가 신분을 밝힐 수 없을 때 몸에 옷을 겹겹이 덧대거나, 골로브냐가 폐질환 사실을 ‘손수건’으로 숨기는 것처럼, 영화에서 '옷'이란 누명이자 거짓, 은폐다. 그리고 스탈린 시대에 군인이거나 비밀경찰일 수밖에 없었던 남자들은 자신의 살갗을 은닉해야만 했다. 예민함과 동시에 친절한 성미를 가진 키도가 천성을 숨기고 처형에 동참하며, 멈추지 않는 눈물을 어떻게든 참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폐질환을 숨기는 골로브냐가 상반신을 탈의할 때 최초로 구체적인 병목이 드러나고, 볼코노고프는 자신을 희생하여 인민들이 입게 된 ‘누명’이란 옷을 벗겨 내며, 소음장치에 감춰진 살벌하고도 잔혹한 처형 사실을 폭로한다. 비밀경찰들이 내뿜는 안개를 걷어내고 태양에 다가서며 선명한 진실을 벗겨낸다. 딸이 누명을 쓰고 사망한 것을 알게 되어 식음을 전폐하는 노파의 몸엔 흡사 딸이 쓰게 된 누명, 곧 ‘오물’이 묻어있다. 볼코노고프는 노파의 오물을 씻겨내서 결백이라는 진실을 드러낸다.
동시에 볼코노고프는 '어린 아이'를 보존한다. 영화에서 클로즈업된 소련 인민들의 얼굴은 표정 없이 텅 빈 채로, 곧 '영혼'이 표상되지 않는다. 공허한 얼굴엔 상부의 명령이 새겨져, 그들에 의해 발화·목적지·행동 등 모든 것이 결정된다. 예컨대, 대중교통에 탑승하고 있던 인민들은 비밀경찰이 하차하라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는데도 군말 없이 내려야 하고, 아무 죄가 없더라도 볼코노고프를 생포하기 위해서 인질로 전락한다. 물론 영혼이 존재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순순히 거짓 자백하지 않는 무고한 피해자들이다. 하지만 영혼이 있어서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는 이들은 모조리 처형된다. 이에 상부의 명령과 지시만을 따르는 아첨꾼들과 순응자만이 남는다. 이렇게 운명을 사악한 독재자에게 떠넘겨야 하는 인질들의 체념적인 물결이 이어지는 가운데서, 제 기분에 솔직하여 '미소'를 짓는 순진무구한 아이가 있다. 외에도 다수의 인파가 독재자를 위해 뻣뻣하게 봉사할 때, 그 옆에서 어린이들은 유연하게 ‘공놀이’한다. 골로브냐가 폐병을 숨길 때, 옆방의 어느 한 아이는 볼코노고프와 골로브냐를 보고 놀라서 오줌을 지리고 바지를 내렸다. 볼코노고프가 만난 유족의 딸은 차마 궁금해 해선 안 되는 질문들을 그에게 묻는다. 이렇게 아이는 제 영혼의 반응을 충실하게 따르고, 볼코노고프는 회개 과정 중 아이의 천진함에 솔직하게 반응해주며, 특히 결말에서 풀려난 여러 인질 가운데서 키가 작은 아이들이 꽤 많다. 볼코노고프는 진실을 탄압하는 스탈린의 죄를 짊어지고 씻어내어 나신과 아이라는 진실을 보존하고, 비로소 이때 그는 회개한다. 낙하하여 사망한 그를 저 위의 천사들이 내려다보며…
메르쿨로바와 추포프 콤비는 볼코노고프의 희생으로 드러난, ‘특수한 방식으로 아무나 고문’하던 스탈린 치하의 참혹한 진실을 널따란 2.39:1 화면비에 ‘클로즈업 및 익스트림 클로즈업’한다. 진실을 커다랗게 확대하는 연출의 당위성은, 일단 영화 내에선 인민들이 차마 사실을 직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을 전해들은 유가족은 정신병에 걸려서 볼코노고프의 말을 외면하거나, 죄책감에 자살하고야 만다. 소련 내 모든 공화국의 수도를 줄줄 외우는 영특한 소녀역시, 진실은 망각하고 불태우니 말이다. 또 영화 외적으로는 오늘날의 독재자가 당대의 진실을 아직까지 검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줄곧 지금까지 ‘동시대’를 비추던 메르쿨로바와 추포프가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에서 처음으로 '과거'로 향한 이유이기도 하다. 본 작품에 담긴 스탈린의 외압을 푸틴이 쏙 빼닮았음과 더불어, 주인이 사냥개를 팽하는 과정 역시 최근 불거진 ‘푸틴-프리고진의 갈등’을 연상케 하기에, 은폐되는 과거를 어떻게든 들추어내어 오늘날까지 폭로한다. 이로써 드러나는 러시아의 역사 및 정치에서의 ‘악순환’, 그러나 볼코노고프의 저항 정신을 몸소 실현하는 메르쿨로바와 추포프는 오늘날에 꼭 소환해야만 하는 과거를 기어코 길어오며 악순환을 끊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