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3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Sep 22. 2023

<여덟 개의 산>

공간과 시간 사이의 삶

펠릭스 반 그뢰닝엔&샤를로트 반더미르히

(Felix van Groeningen & Charlotte Vandermeersch), 

<여덟 개의 산>(The Eight Mountains) - 공간과 시간 사이의 삶  

“엄마를 잃으면서 그리고 부정에 의지하면서 나는 엄마를 기호로, 이미지로, 단어로서 다시 찾는 것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그의 아버지는 타고난 산악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그 남자는 도시의 급박한 호흡보다 산골의 평온함을, 도시의 천편일률적인 삶보다 변화무쌍한 산의 즉흥성을 선호할 것을 천성으로 타고났다. 그래서 산골로 이주하기 이전, 아들은 아버지가 ‘목석’인줄만 알았다. 이후 서쪽의 험한 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을 때, 한 개인의 행복과 기쁨이 공간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소년은 깨달았다. ‘피에트로’라는 이름의 아들은 이후 산골에서 ‘브루노’라는 이름의 친구를 사귄다. 산에서 똘똘 뭉친 그들은 우정을 쌓아가지만, 각자가 바라는 삶이 달랐고, 이를 가능케 하는 공간도 달랐기에 이들은 흩어진다. 그러나 진실한 우정, 유유자적함과 변화무쌍한 삶이란 오직 산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으니, 아들은 아버지처럼 다시 산으로 돌아온다. 산은 두 친구의 이별과 재회라는 모순을 전부 허용할 만큼 자애롭다. 이렇게 변덕스럽고 내재적인 자유로 가득한 산을 고찰하는 파올로 코녜티의 『여덟 개의 산』, 이를 펠릭스 반 그뢰닝엔이 영상화한다. 그간 그뢰닝엔의 작품에 배우로 참여했던 그의 연인, 샤를로트 반더미르히 또한 공동 감독으로 이를 연출한다.      


1977년 겐트 태생의 펠릭스 반 그뢰닝엔은 벨기에의 영화감독이다. 그뢰닝엔이 속한 ‘겐트’는 구 플랑드르, 현 네덜란드와 인접한 문화권이기에, 벨기에에서 불어 영화를 선보이는 다르덴 형제, 조아생 라포스, 루카스 돈트 등과 확연히 차별화된 벨기에 영화를 연출한다. 히피 부모 밑에서 자란 그뢰닝엔의 작품은 매우 자유분방하며, 항상 마약이 등장하고 모호한 의식을 구현하는 점이 특징이다. 그의 영화엔 일정한 서사가 있긴 하지만, ‘자동기술법’도 섞여 있어서 개연적으론 이해가 안 될 때도 있다. 또 부모가 이혼한 이후 한 집에서 각자의 파트너를 두고 생활한 추억을 반영하듯, 하나의 고정된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유동성, 즉흥성이 특징이다. 

<스티브 + 스카이>에서 스티브와 장 클로드는 둘 도 없는 친구지만, 흠모하는 여성 스카이를 두고 우정은 불확정적으로 변하고,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사사로운 욕망이다. 욕망을 중시하는 인물들은 객관적인 외부에 참여하기보단, 욕망을 추동하는 마약, 음악, 술 등 각자의 표상에 침잠해있으며, 그들이 머무는 공간은 욕망을 가능케 하는 술집, 홍등가다. 그뢰닝엔의 유년시절과 흡사할 것으로 추정되는 <개 같은 인생>은 방탕하고 너절한 가정환경이 특징이다. 아버지는 할머니 집에 얹혀살고, 이혼한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여장을 하고 방탕한 파티를 즐기며, 항상 입에 담배와 술을 물고 산다. 남성이라는 성 관행이나 아버지라는 역할에서 느슨함과 방종함이 도드라진다. 이러한 방탕함의 일대기는 보통 부모가 됨으로써 사그라진다. <개 같은 인생>과 유사한 가정환경이 연속되는 <브로큰 서클> 또한 몸에 문신을 새기며 육체를 훼손하고, 안정된 집보다는 캠핑카, 트레일러를 선호하며, 나체로 활보하거나 하룻밤 자고 사라지는 ‘기체’와 같은 두 남녀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결혼 이후 아이가 생겨 ‘인정적인 주택’, ‘아이의 백혈병으로 인한 병원’에 발이 묶인다. '부모됨'은 철새 같은 사람들이 텃새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인간 본원적인 욕망의 방탕함을 그의 자전적 요소로 여길 수도 있고, 인접한 네덜란드의 감독 폴 버호벤의 초기 스타일과 유사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국가적 정체성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뢰닝엔은 유동하는 세계 속에서 단단히 얽매어있는 ‘기억’을 탐구한다. 고정된 기억은 흐물거리는 현재의 탄탄한 지지대 역할을 떠안는다. 유동하는 세계가 “내가 어땠는지”를 계속 지운다면, 고정되어있는 기억 속에서 개개인은 자신을 되찾는다. <스티브 + 스카이>는 앞으로 흘러가는 현재에 계속 뒤, 과거, 기억을 돌아보는 짧은 플래시백, 이에 아주 복잡해지는 교차 편집이 특징이다. 반면 기억이 개인을 되찾는데 조금의 쓸모도 없을 때도 있다. 오히려 기억 속에 가득한 방탕과 무의미함을 돌아보며 인생은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개 같은 인생>에서도 플래시 포워드 및 플래시백이 도드라지지만 실패로 가득한 기억을 되돌아보는 주인공의 서사는 매우 ‘비생산적’으로 흘러간다. 그뢰닝엔은 기억 속 트라우마, 두려움, 죄책감, 가장으로서의 태만 등을 모두 극복하며 ‘생산적 서사’로 나아가야 함을 천명한다. 

현재의 삶을 방해하는 도취적인 기억은 ‘젠더’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개 같은 인생>과 <브로큰 서클>, 두 작품 모두 남성은 여성의 임신을 반대하는 반면 여성은 임신을 긍정한다. 즉 남성이 변화를 거스른다면, 여성은 변화에 진취적으로 뛰어든다. <브로큰 서클>에서 아이 사후 여성은 새로운 문신을 새기고 아픔을 잊으며, 딸이 생전에 바란 '조류충돌방지 스티커'를 창문에 붙이고, 또 개명하며 현재에 참여하나, 남성들은 씁쓸하고 불만족스러운 현재를 외면한다. 여성은 플래시백을 멈추려하지만, 남성에 의해 플래시백은 반복되며 삶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벨기카>에선 지금까지의 남성들과 달리 임신을 바라는 남동생도 존재한다. 하지만 남동생의 연인은 임신을 바라지 않는데 <벨기카>에선 임신에 대한 상이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남성성을 관통하는 ‘독단’, ‘폭력성’을 탐구한다. 제 욕망을 제외하곤 포용력이 부족한 가부장적 세계는 거칠고 폭력적인 반면, <벨기카>의 여성들은 변화에 능동적이고 유연하다. 

여성과 더불어 필연적으로 급변하며 성장하는 아이가 남성성으로 물든 세계, 곧 아집에 둘러싸인 가부장제를 극복한다. <개 같은 인생>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방종을 답습하지 않는 것처럼, <브로큰 서클>에서 아이는 현재에 불가능한 줄 알았던, 과거 어머니의 문신을 '페이스 페인트'로 간접 실현하는 것처럼, 현재가 과거처럼 여전히 만족스럽고 자유로울 수 있음을 증명한다. 한편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의 순진한 얼굴이 비관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벨기카>의 결말은 형제가 아이를 보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데, 방탕한 아버지와 절연하면서도, 본 과정에서 가장을 닮아간 두 형제의 폭압, 이러한 형제 밑에서 자라날 순진무구한 아이의 얼굴에 새겨질 미래는 마냥 밝진 않다. <뷰티풀 보이>에서 아버지 데이빗은 아들 니콜라스의 엄마와 이혼하고, 새로운 부인과 재혼했으며, 그 사이에서 아이들도 갖는다. 그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자신의 바람을 아들에게 주입한다. 그러나 아이는 달아난다. 아버지의 손길이 곳곳에 묻어난 물질이 자신을 에워싸서 물리적으로 달아날 수 없다면, 마약을 하며 관념의 세계로 도망친다. 아버지의 욕망보다는 아들이 바라는 삶과 현 상태를 그저 껴안아주는, 내가 바라지 않은 아들을 포용하는 태도를 절실히 요구한다. 

그뢰닝엔은 이러한 욕망과 기억의 여정을 ‘노래’로 버무린다. <개 같은 인생>, <브로큰 서클>, <벨기카> 모두 노래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노래와 ‘술’은 언제나 한 쌍으로 결합하고, 음주가무를 즐길 수 있는 술집이 배경으로 빠지지 않는다. 악몽, 지우고 싶은 기억으로 가득한 그뢰닝엔의 인물들, 그래서 이를 잊고 싶은 모양인지 노래와 술에 한껏 젖어있다. 이러한 그뢰닝엔이 다시 부자 관계, 그리고 유동적인 삶이 가능한 산사람들의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항상 부자 관계를 다루던 그뢰닝엔은 원전을 어떻게 재해석했고, 또 반더미르히와의 공동 연출이 어떤 변화를 불러왔을까?      


반더미르히와의 협업으로 인한 변화를 꼽으라면, 그뢰닝엔의 기존 작품과 달리 고도로 '정돈'된 연출과 촬영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는 ‘기억’을 바라보는 그뢰닝엔의 관점이 달라진 데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이전 작품들에선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불가항력’이 기억이었던 반면, 본 작품에서의 기억은 ‘파편화되고 유실되지만 그럼에도 보존해야 하는 특별한 끈’이기 때문이다. 본 기억 속성의 변화에 따라 연출도 수려하게 바뀐 것이나, 이를 가능케 한 것이 거칠고 투박하던 그뢰닝엔의 손길과 다른, 섬세하고 부드러운 반더미르히의 손결인 것으로 추정된다. 끓어오르는 테스토스테론의 분출에 상응하던 ‘핸드 헬드’, 아주 급박하고도 빠르게 흔들리던 카메라 워킹은 특정 상황(피에트로가 고산병을 앓을 때)에서만 간헐적으로 사용되고, 대체론 안정적인 탯줄을 붙잡고 있는 듯한 부드러운 ‘트래킹 숏’, 하늘로 떠올라도 조금도 불안정하지 않은 드론 숏으로 바뀐다. 

반더미르히의 여성적 색채는 주인공 피에트로의 상황에서 기인한 '우울증적 형식'을 섬세하게 수놓는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여성학자, 미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한 개인은 소중하게 여기는 타인이나 사물을 '타자'로서 여기지 않는다. 나와 동일시한다. 그 대상들 없이는 나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듯 귀하게 여긴다. 이런 와중에 소중한 대상을 잃었을 때, 그 변화와 붕괴를 감당할 수 없다. 대상과 나를 동일시하고 있었으니, 대상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 내 삶의 ‘의미 상실’로 이어진다. 그래서 대상이 소멸했다는 '부정을 부인'하게 되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빠지고, 우울증 환자들에게 예술은 '소중한 것을 앗아가는 시간'을 이탈해서, 특별한 것을 보존하고 그들이 존재했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출구’이자 ‘도피처’다. 그래서 우울증적 예술은 잃어버린 것을 존재하게 만들며, 현실이 소중한 것을 추하게 만든다면 더 아름답게, 많은 것을 앗아간다면 더 방대하게 승화한다. 

본 작품에서 피에트로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을 잃었다. 한 명은 아버지 조반니, 다른 한 명은 영혼의 단짝 브루노다. 빽빽한 장소성이 강조되는 도시 ‘토리노’에서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산골 ‘그라나’로 거처를 옮긴 아버지는, 무제한적인 시간이 공간의 제약 없이 술술 흘러가는 산에서 지도에 '길'을 기록하며 자신을 보존하는 법을 아들에게 가르쳐준다. 또 피에트로가 회고하길 브루노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로를 잘 알았던 친구다. 브루노는 그라나로 처음 이사 와서 적응하지 못하는 피에트로와 함께 놀아줬고, 그에게 길을 안내해주는 인도자였다. 이후 어른이 되서 브루노가 힘겨워할 때 네팔에 있던 피에트로는 단숨에 이탈리아로 달려간다. 피에트로는 자신의 재산과 시간을 다 털어서 브루노를 구제해주고자 하며, 브루노를 구원해줄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을 직면하자 브루노의 실추가 자신의 일인 것처럼 절망한다. 이들은 친구가 없을 때 ‘어둠’ 속에 침잠해있다. 나를 알아주는 상대방이 없으면 자신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 친구는 어둠 속에서 ‘모닥불’을 틔워서 나의 속내를 밝히고 들어준다. 그들로 인해서 피에트로는 존재하는데, 시간의 흐름은 제 삶의 동의어와 같았던 소중한 두 사람을 앗아간다. 이에 현재를 이탈하여 소중한 과거를 소환하고 재현하는 본 작품은 잃어버린 것을 되돌리는 반더미르히의 섬세한 터치가 주를 이룬다.    


그 터치가 영화 속 1.33:1 화면비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통용되는 1.88:1, 2.39:1 화면비는 좌우가 넓다. 필러박스가 없거나 적어서 좌우로 확장하려는 프레임을 어두운 화면이 가로막지 않고, 이에 영화는 흡사 가로 너머로 뻗어갈 듯한 광대한 인상을 준다. 그런데 1.33:1의 화면비는 다르다. 필러박스, 곧 '검은 화면'이 양 옆을 가로막고 차단함에 영화는 좌우로 확장될 수 없다. 감상자가 필러박스를 쳐다봐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음에, 시선은 무언가가 보이는 중앙으로 되돌아간다. 1.33:1의 운동은 안쪽으로 응집하는 폐쇄성이며, 그 한 가운데에 두 공동 감독은 피에트로의 유년 시절을 섬세하게 클로즈업한다. 설령 롱숏으로 숲을 포착한다 한들, 대상의 광대함이나 무한함보다는 피에트로의 '시점 숏'만을 적확히 묘사함에, 완전무결해보이지만 그만큼 빽빽하고 갑갑한 느낌이다. 즉 피에트로의 소중한 기억이 저 너머로 도망가지 못하게, 오직 중앙에만 존재하게 만드는 ‘보존을 위한 섬세한 화면비’가 1.33:1이다. 좁다랗지만 외부의 공허로부터 이미지를 보존하는 1.33:1 화면비는 영화 속 브루노와 피에트로가 짓는 '집'과 같다. 지붕이 뚫리지 않는 이상 외부의 침입을 불허하는 오두막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중한 것들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어떤 소중한 것들은 현재에 없으므로, 기억에서조차 없다면 피에트로 삶의 의미와 소중함을 증명해주지 못할 것이기에, 그 이미지들은 결코 도망가선 안 된다. 이를 위해서 영화의 카메라는 대체로 고정된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피사체의 '변화무쌍한 운동'을 반영하거나, 정확한 촬영을 포기하고 '워킹'을 살리기보다는, 카메라의 존재감을 내려놓고 피사체에 몰입하여 ‘대상의 시지각’을 완전무결하게 포착하고 ‘고정’한다. 움직인다 한들 피사체의 이미지를 해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섬세하게 이동한다. 그래서 본 작품의 숏들은 회화나 사진을 연상케 할 정도로 구도가 정밀하고 흐트러지지 않는데, 이는 소중한 기억을 가장 아름답게 잘 보고 싶은 인류의 열망에 상응한다.

그런데 숏 하나하나는 정밀하지만, 편집에 있어선 '듬성듬성' 파편적이고 허술하다. 이는 반더미르히와의 협업 이후에도 변하지 않은 그뢰닝엔만의 특징으로, 본 작품에서 올곧게 이어지지 않는 편집은 '현재'로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 즉 한때 완전무결했던 순간에 '구멍'을 뚫어, '편린'이자 과거로 전락시키며 현재로 올라오는 시간의 힘을 편집으로 보여주는데, 그래서 이토록 강박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소중한 피사체를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편집이 드문드문한 본 작품은 연결보다는 숏 하나하나의 개별적이고도 고유한 순수 시지각이 대두된다. 이야기나 흐름에서 파생되는 즐거움보다는, 숏 하나하나의 감각적인 즐거움이 부각되는데, 그것이 현재로 거슬러 올라오기 보다는 기억의 파편에 쭉 잠겨있길 바라는 향수에 젖은 인류의 심리다.     


피에트로의 소중한 ‘서정성’이 극도로 강조되는 영화, 그 이유는 브루노와의 소중한 시간은 어떤 합리적·계산적 이득도 없지만 그저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왠지 모르게 좋았고,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순수하게 즐거웠기 때문이요, 또 조반니가 도시에서 산으로 터를 옮긴 이유도 이성이 아닌 '감각'을 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에트로가 소중하게 보존하고 싶은 것은 바로 '느낌'이다. 본래 피에트로의 가족은 '토리노'에 머물고 있었다. 영화 속 토리노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사방이 '벽'으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도시, 겨우 외부로 나와도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도로, 피에트로가 일하는 식당에서는 무한한 '노동'으로 인해서 '사적인 전화통화가 불가능'한 지역, 그렇게 나를 느낄 수 없는 ‘불감증 도시’다. 조반니가 운전하다가 멈춰서 사망한 것, 피에트로가 브루노의 실종 소식을 듣고 도로에 가만히 정차한 것도 마찬가지로, 빽빽하고 폐쇄적인 도시는 나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그 움직임이 보장되어야만 삶의 이유인 자유로 이어지기에, 조반니는 도시에 돌아가니 심장이 멈춘 것이랴. 

그는 도시에 있을 때는 '풀숏' 수준으로 저 멀리서 포착되고, 클로즈업된다 한들 손에 가리거나 프레임에 잘리는 등 불완전하다. 그러다가 산에 가게 되었을 때 비로소 완전한 얼굴, 곧 '영혼'이 표상된다. 흐름을 방해하고 통제하는 공간성이 부각되는 도시에선 내 몸에 가해지는 파장, 곧 '삶'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조반니는 토리노를 떠나서 그라나로, 바위산이나 빙하로 '트래킹'하며 움직인다. 고정되어 움직임이 거의 없던 카메라가 이미지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조심스레 발을 뗀다. 보폭이 매우 협소한 아찔한 바위산을 ‘수직적’으로 깊게 파고들어간다.(이는 회고의 속성이기도 할 것이다. 기억 너머로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의 기억 내부에 깊이 침잠하는) 또 드론을 이용하여 두둥실 대지에서 발을 떼어 세계를 광활하게 조명한다. 반더미르히는 시간이 앗아간 공간적 대상들의 물질을 세심하게 보존하고, 공간이 앗아간 시간의 흐름의 경우 카메라의 '운동'에 반영한다. 물론 운동을 포착한다 한들, 그 당시에 함께 있었던 조반니와 브루노는 비록 작아질지언정 결코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선 안 되고, 필히 보존한다.      


온갖 형태의 집과 건물로 가득한 도시는 시간의 흐름을 막고 많은 것들을 보존한다. 세월이 무언가를 앗아가지 못하게 저지하는 지역이 도시다. 한편 자연은 공간의 제약이 적은만큼 시간의 흐름이 가득하다. 그래서 자연은 언제나 짜릿하다. 시간의 흐름에 상응하는 '바람'이 호쾌하게 피부를 자극하고,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바위산이나 빙하의 '크랙'은 아주 아찔하다. 발을 잘못 헛디디면 죽는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피에트로는 고산병이 짙어져 도무지 버티지 못하겠다. 시간에 의해서 언젠가 다다를 죽음을 느끼면 느낄수록 살아있다는 것이, 이로써 삶의 값진 호흡이 더 잘 느껴진다. 즉 등산하며 삶을 만끽한다. 

하지만 시간은 앗아간다. 조반니의 말처럼 노동 뒤에는 행복이 따라오지만, 즐거움 뒤에는 다시 노동이 이어지기에, 시간은 나쁜 것 못지않게 좋은 것 또한 흘러가게 만든다. 그래서 이들은 등산하며 정복한 '코스'를 지도에 기록한다. 이로써 시간이 앗아가지 못할 '자신만의 공간' 또한 보존하는 법을 배운다. 브루노 또한 마찬가지다. 피에트로가 토리노에서 산골마을로 처음 이사 왔을 때, 아이는 개방적이고 광대한 초원에서 시간의 흐름을 만끽하는 경험이 낯설었다. 마을 주민들은 죄다 핸드 헬드와 달리 숏을 결합한 '생물'을 포착하는 양식으로 승화된 반면, 피에트로는 가만히 멈춰 있는 공간을 포착하는 양식에 담긴다. 공간적인 토리노에서의 생활사를 산골에서도 이어가려는 집착이랴. 그런 와중에 또래인 브루노는 피에트로가 시간의 흐름을 만끽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브루노에 의해서 피에트로를 포착하는 카메라가 '틸트'로, 곧 더 능동적인 카메라 워킹으로 변한다. 시간의 흐름을 만끽하게 해줌과 동시에, 조반니 사후 피에트로가 산골로 되돌아왔을 때, 화재로 불에 탄 오두막을 함께 재건한다. 시간의 흐름을 만끽하는 피에트로는 항상 '새로운 피에트로'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시간 속에서 가능한 무궁무진한 여러 삶을 만끽하고 싶다. '내가 가능한 시간'을 누림과 동시에, 나로 여겨지는 '자아'를 '나만의 공간'에 보존한다. 조반니와 브루노는 피에트로에게 이를 알려줬기 때문에, 그들이 없었다면 현재 피에트로의 삶은 불가능했을 것이기에 그들과 어떻게든 이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영화에선 '줄'이나 ‘선’이라는 상징이 반복된다. 산골 마을의 '전신주', 전등에 연결된 '전깃줄', 소년들이 울타리를 치는 ‘끈’, 피에트로가 조반니, 브루노와 함께 고산을 등반할 때, 이 세 사람을 연결하는 '밧줄' 등이 말이다. 특히 밧줄로 세 사람이 단단히 묶일 때, 끈은 서로를 조력한다. 고산병이 도진 피에트로는 산을 더 오를 수 없고, 나머지 두 사람은 소년을 가만 놔둘 수 없다. 조반니, 브루노가 피에트로에게 맞춰준다. 선은 서로를 이어내고 끌어내어 삶을 가능케 한다. 물론 예상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은 이 줄을 냉정하게 끊어버린다. 브루노의 아버지가 피에트로의 곁에서 소울메이트를 앗아간다. 사춘기의 피에트로는 제 인생에 관여하는 조반니와 충돌하고 연을 끊었다.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일절 재회하지 않았다. 그렇게 세 사람의 끈이 물리적으로 끊겼나 싶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피에트로는 그리운 산으로 되돌아간다. 끈은 잘린 것들을 다시 엮고 이어지게 만든다. 

앞서 언급했듯, 양 숏의 간격을 드문드문하고 파편적으로 만드는 편집이 조금도 기다려주거나 멈춰주지 않고 그저 앞으로 전진하며 모든 것을 짓밟고 자르는 시간의 힘에 가깝다. 그래서 영화에선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것을 재건하였을 때 '롱테이크'가 복구된다. 산골로 되돌아간 성년의 피에트로가 바위산을 오르고 브루노와 '메아리'로 소통할 때, 즉 과거를 다시 이어낼 때, 끈을 자르고 또 자르던 편집이 쭉 이어진 끈에 상응하는 롱테이크로 바뀐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현재에 과거를 이어낼 수밖에 없는가? 이는 현재가 과거의 결과이기 때문이랴. 피에트로는 사춘기부터 청년기까지 조반니를 부정했다. 그 조반니 31세에 아기 피에트로를 안았다, 그런데 조반니를 부정한 31세의 피에트로는 안정적인 집, 직업 아무 것도 없다. 피에트로가 방황하는 그 짧은 순간, 그뢰닝엔의 기존 작품 속 유년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처럼, 그저 방탕하고도 무의미하게 술 마시며 춤추고 나풀거리는 삶이 이어진다. 과거에 좋았던 사회적 의미들을 현재에도 계속 갈구한다. 그런데 그 사회적 의미를 부정하고 나니, 현재에 남는 것은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동물적 쾌락뿐이다. 그래서 피에트로는 조반니, 브루노를 다시 잇는다. 피에트로는 아버지의 학업 집착이나 친구 대용 역할이 싫었지만, 잃고 나니 유의미한 활동임을 깨닫고 그를 닮아간다. 히말라야에서 아버지의 ‘일기’를 찾으며 발자취를 따라간다. 그러면서 조반니의 삶과 피에트로의 삶이 '매치 컷'을 이룬다. ‘빼곡한 공간에서 제 시간을 갖거나’, ‘무한한 시간에서 제 공간을 보존하는’ 두 세계를 오가는 삶이 같아진다. 단순히 구성뿐만 아니라 지도에 정복한 길을 칠하고, 어느 세계에서는 자유를 만끽하고, 어떤 세계에서는 삶의 의미를 보존하는 '저술' 활동까지 유사하게 이어진다. 결국 우리는 의미를 무의미로 전락시키는 잔혹한 시간 속에서, 의미를 되찾기 위해 과거를 보존하고 되찾아온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아들은 의미 있어 보이는 아버지와 이어진다. 

이러한 부자간의 끊을 수 없는 선을 생각한다면 아버지는 삶의 좋은 것들을 아들에게 끊임없이 보여줘야 하는데, 브루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삶의 의미를 증명하지 못한다. 그는 피에트로의 어머니가 브루노를 교육하려 할 때 방해하고, 이로써 브루노가 산골 너머의 ‘다른 삶’을 생각조차 못하게 만들었다. 필요할 땐 브루노를 부르는 반면, 귀찮을 땐 내팽개치는 무책임한 자다. 브루노는 그런 아버지와의 끈을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다. 브루노는 피에트로가 심은 ‘나무’처럼, 태어난 곳을 옮기면 자랄 수 없다. 그는 ‘조상’ 때문에 산사람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아버지에 의한 브루노는 생활 반경을 조금만 넓혀도 경제 위기에 대처할 수 없고, 결국엔 아버지처럼 자식을 아내에게 다 떠맡긴다. 또 아버지가 브루노의 삶에 침범하여 항상 방해하였으므로, 브루노는 이에 대한 반발로 '오두막'에 틀어박혀 아버지가 앗아가지 못할 제 삶을 보존하는 '은둔자', 세상과 유리된 '외톨이'로 전락한다. 이 고립된 세계에서 브루노는 최후를 맞이한다. 

정리하자면 <여덟 개의 산>에선 과거에서 도망치는 브루노와 과거를 짊어지고 이어내는 피에트로가 대비를 이룬다. 과거로부터의 도망은 곧 과거의 결과인 현재를 외면하여 삶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반면, 과거를 직면하는 행위는 현재 또한 긍정하는 것으로, 후자의 피에트로에게 삶이 있나니. 그뢰닝엔은 코녜티의 원전을 빌려 과거의 공간과 현재의 시간을 긍정하는 피에트로를 예찬하고, '끈'이라는 상징으로 불가항력인 아버지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또 소중한 과거를 보존하고자 하는 우울증적 몸부림을 반더미르히의 섬세한 터치로 승화한다. 다만 알프스 산맥과 히말라야의 이미지에 기대기만 한다. 자연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촬영이나 편집이 미적이거나 특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4:3 화면비 외엔 말이다. 더욱이 겐트 시절 그뢰닝엔의 거칠고 파격적인 연출을 기대한다면, <뷰티풀 보이>부터 서서히 부드럽게 변화한 그의 스타일은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

감상일: 230922 광주극장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파블로 라라인, <공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