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심연
한 망아지가 태어난다. 자궁에서 땅으로 떨어지며 모체와 자신을 이어주는 탯줄이 끊어졌고, 이로써 탄생과 동시에 자유로울 것이 운명이었다. 하지만 인간에게 세례를 받고 발타자르라는 이름이 붙여진 망아지는 다시 탯줄에 묶여 인간에게 귀속된다. 자유의 운명을 거부당한 망아지의 눈에 세계는 비정하게 보인다. 인간 아이들도 어른들에 의해서 원치 않는 이별을 하고 있다. 그 어른들은 발타자르에게 고된 노동의 멍에까지 짊어지게 만드니, 과연 이 세상에 한 생명은 자유를 위해 태어나는가, 속박당하고 지배되기 위해 태어나는가? 그 딜레마를 보여주는 발타자르는 인간에 의해 끌려 다니긴 하지만, 그들을 의식하지 않는 표정과 몸짓으로 최후의 자유를 보존한다. 반면 발타자르의 눈에 굴종하고 아첨하는 인간들의 표정은 기이해 보인다.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노예의 모순적인 초상이기에. 최후에 발타자르는 초원으로 향해 자유를 찾는다. 하지만 살아서는 불가능하다. 종교적 상징으로 전락한 살아 있는 양 떼 및 목양견과 달리, 죽음으로써 묶여 있던 모든 끈을 풀어헤치며 문명과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된다. 이는 영화사에서 가장 꾸밈없는 연기를 선보인 것으로 평가받는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를 요약한 것이다. 악에 점철되어 가는 문명의 야만을, 가장 순수한 존재인 발타자르와 대비하며 보여준다. 또 발타자르의 순일한 표현과 피사체를 꾸밈없이 포착하되 그 이면을 꿰뚫는 연출은, 브레송이 주장하는 영화론인 '시네마토그라피'의 정점에 다다른다. 인위성에 의해 잃어버린 순수함과 궁극적 본질을 자연에 가까운 연출로 회복한다. 이렇게 <당나귀 발타자르>를 언급한 이유는 폴란드의 전설적인 노장,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가 <당나귀 EO>에서 <당나귀 발타자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기 때문이다.
1938년 우쯔 태생의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는 폴란드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안제이 바이다’를 만나 영화에 입문한 이후, 20세기 중반 폴란드 영화를 대표하는 ‘폴란드 학파’에 속하여 누벨바그의 영향을 적극 수용한 모더니스트다. 또 당시 독재를 일삼던 폴란드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벨기에, 영국에서 활동을 이어나간 영화감독이다. 그는 1960년대까지는 주로 폴란드에서 활동했고 간헐적으로 벨기에에서 작업했으나,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를 피해 1970년대부턴 영국에서 활동하였고, 비평 및 흥행 실패로 영국 생활을 청산한 이후 미국으로 터를 옮겨 전업 화가로 활동하다가, 2008년 자국으로 돌아와 <안나와의 나흘 밤>을 연출하며 영화감독으로 복귀했다. 이렇게 순탄치 않은 굴곡과 압박을 견뎌온 스콜리모프스키는 이에 굴하지 않는 우직한 철학, 예술론을 보여준다.
일단 그는 자신이 속한 국가의 ‘이념’에 따라 연출을 달리한다. 스콜리모프스키 스스로 '안제이'라는 배역을 맡아 직접 연기한 초기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부전승>에서는 사회주의를 가시화하는 ‘롱테이크와 롱숏’이 특징이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주인공 너머의 인물 군상을 롱숏으로 포착하며, 개인보다 공동체, 사회를 강조하던 이념을 가시화한다. 또 카메라 렌즈 너머로 시선을 교환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이로써 스크린에서 현실로 빠져나오려는 ‘소격효과’를 이용해, 예술은 사회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역설하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탐구한다. 반면 벨기에에서 누벨바그의 영향을 반영한 <출발>은 고다르의 <미치광이 삐에로>를 연상케 하는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전개, 클로즈업된 각자의 얼굴이 담긴 무수한 숏들을 자르고 이어내는 연출로 변화하여 ‘개인주의’를 반영한다. 또 무성영화와 유사한 양식을 선택하여 개인주의 진영에서 만연한 단절, 불통을 가시화한다. 이후 영국에서는 공포영화 문법을 결합한 연출을 선보였으며, 2010년대 작품인 <특급 살인>에서는 문명과 자연, 국민과 망명자의 처지를 대비하는 연출이 특징이었다. 미군은 하이앵글과 트래블링 숏에 담긴다면, 그들에게 쫓겨 망명자 신분이 된 무슬림들은 좁은 시야와 급박한 핸드 헬드만 허용된다. 또 최근 폴란드에서 촬영한 <11분>의 경우 60년대 폴란드 영화와 달리, 개인은 각자의 프레임에만 위치한다. 하나의 테이크로 도시 전체를 포착한다 한들, 시각은 이어져 있어도 청각은 드문드문 끊겨 불연속적이고 단절적이다. 이로써 개인주의로 변화한 폴란드의 오늘날을 반영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념에 의한 삶을 운송 수단, '탈것'으로 상징한다. <부전승>의 등장인물들은 기업, 단체, 매니저의 부름으로 ‘기차’나 ‘트럭’, ‘대중교통’을 타고 공동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정작 사회주의는 전체적일 뿐 결코 구성원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차에서 내려 ‘오토바이’를 탄 청년에게 향한다. 개인의 영광과 책임을 회복하고자 한다. 이후 벨기에에서의 <출발>에서는 ‘사적인 자가용’이 도드라진다. 하지만 궁핍한 청년은 훔치거나 사기 치거나 중고를 되파는 등 결코 차를 온전하게 가질 수 없다. 이는 1970년대 이후의 영국에서도 이어진다. <딥 엔드>에서 앙상한 ‘자전거’는 사회에 처음 진입하는 초년생의 발과 다리를 반영한다. 마이크는 자전거에 제 의지를 반영하고 싶어 하나, 연장자들이 자전거를 망가뜨리고 타율에 복속시킨다. <달빛 아래서>에서도 폴란드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이민자들의 탈것은 자전거로, 그들은 <출발>처럼 더 나은 차를 열망한다. <특급 살인>에서 마지막까지도 종교에서 자유롭지 못한 무슬림은 ‘백마’에 실려 어디론가 타율적으로 이동해야 하는 한편, 사람이 죽고 나자 백마는 자신의 순수한 색처럼 실로 자유로워진다. <11분>은 60년대 폴란드 시절과 달리 아주 다양한 탈것들이 등장하는데, 한편 각각의 쾌락과 욕망으로만 이동하는 탈것들이 부딪치고 폭발하며 파멸로 치닫는다. 특히나 사적인 욕망이 공적인 이동 수단인 버스, ‘구급차’를 등한시하며, 자신들만의 쾌락에 병들어 있고 서로에게 무심한 현대 사회를 꼬집는다.
그의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또다른 상징은 '거울'이다. <출발>과 <외침>에서 거대한 거울을 들고 가는 사람들, <딥 엔드>에서 뒤집힌 거울이 마이크를 비추듯, 스콜리모프스키는 객관적인 ‘거울’의 태도로 <달빛 아래서>나 <안나와의 나흘 밤>, <특급 살인> 등의 리얼리틱한 작품에서 냉정하게 현실을 반영한다. 한편 거울은 뒤집어서, 즉 왜곡해서 보여주기도 하고, 우리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들춰내기도 한다. 즉 허상이거나 현실 바깥일 수 있는데, 이러한 쓰임은 스콜리모프스키 특유의 혼란하고 초현실적인 전개가 도드라지는 공포 영화, <딥 엔드>나 <외침>에서 나타난다. <외침>에서 거울은 현재, 과거, 꿈, 타인의 의식을 오가며 반영한다. 앤서니는 음향 전문가로서 특수한 소리를 만들지만, 소리의 근원과 만들어진 소리의 쓰임이 불일치하다. 이러한 불일치처럼 앤소니는 배우자가 있음에도 외도하고, 이로써 부부의 표면과 이면은 불일치하는데, 그들의 집에 당도한 광인 크로슬리가 앤서니의 얼굴을 솔직하게, 비관습적으로 반영한다. 또 진실을 외치면 정신병원에 갇히거나 죽게 되는 부정직한 구조를 까발린다. 그리고 거울은 따라한다. 그래서 스콜리모프스키는 등장인물들이 ‘타자’들을 거울처럼 따라하게 만들어본다. 여기서 거울의 용도는 ‘역지사지’다. <딥 엔드>에서 여자 주인공 수는 당시 영국에서 유포하던 '임신한 남자' 포스터를 남성 마이크에게 입혀보는 등, 가부장제에서 강자인 남성이 약자 여성의 처지를 느껴보도록 한다. 그래서 스콜리모프스키의 작품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모방’이다. <달빛 아래서>는 ‘영국적인 관습’을 탐구한다. 겉으로는 신사적이고 법을 따지지만, 뒤에서는 자전거를 훔치고 쓰레기를 몰래 버리며, 마트에서 영수증 사기를 치는 위선을 '영국적인 삶'을 따라하는 폴란드 이민자들이 까발린다. 스콜리모프스키 특유의 엉망진창은 불법을 모방함으로써 수립된 사회의 보편적 질서다.
이를 모방하는 대상은 보편적인 질서에서 유리되어 있던 청년, 광인, 외국인 등이다. 그들이 보편에 입장하며 질서의 부조리가 드러난다. 스콜리모프스키의 작품에서 청년들은 항상 가난하고 무능력하며 유약하다. <부전승>이나 <딥 엔드>처럼 질서는 그들을 착취하거나, <안나와의 나흘 밤>처럼 청년은 질서가 부조리해도 맹목적으로 따라야 하기에, 그래서 <출발>처럼 청년은 불법을 택하기도 한다. <외침>과 <달빛 아래서>의 외국인들은 내국인, 자국인들에겐 일반적인 질서의 이질성을 폭로하는 존재요, <외침>과 <특급 살인>에서 광인은 비관습적인 솔직함으로 질서의 부조리를 폭로한다. <특급 살인>에서는 법보다 우선하는 인간의 생존 의지, 의식을 압도하는 무의식을 부각한다.
이들이 모방하는 것은 주로 ‘젠더’다. 남성들은 능력이 특출나거나 사회적으로 입지가 두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인 젠더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면서 여성을 지배 및 착취한다. <딥 엔드>에서처럼 남성 마이크는 상사인 여성 수에게 상해를 입힌다. <달빛 아래서> 속 입지가 불안정한 폴란드 이민자조차 영국 여성을 위협하고, <안나와의 나흘 밤>에서 ‘아웃사이더’ 남성은 여성을 스토킹 및 강간하기에 이른다. <외침>에서 남자들은 소리를 질러 지배하는 자라면, 여성은 무기력하게 듣고 따라야 하는 자다. 물론 자본주의가 가부장적인 젠더를 교란한다. <출발>과 <딥 엔드>에서 부르주아 남성에 준하는 부르주아 여성들이 등장하여 프롤레타리아 남성을 착취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는 “강한 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다스린다”라는 가부장제의 공식만 강화하고, 가부장제 내에서 경제력을 쥐기 어려운, 그저 수동적인 여성상을 답습하는 다수 여성의 지위를 더더욱 위협한다. <특급 살인>에서 여성은 남성의 생존을 위해 강제로 젖을 내어주거나, 위협적인 남성을 품어주는 수동적인 조력자로 그려진다. <11분>에서도 남성의 성범죄가 암시되고, 여성은 남성 고객을 만나러 호텔로 향한다.
이렇게 이념의 공식대로 인간이 규정되는 와중에 멧돼지, 사슴 등 이념과 무관한 자연물이 대비를 이룬다. 그 자연물이 <당나귀 EO>에선 운송 수단에 탑승한다. 효율성과 상품성, 곧 자본주의를 반영한 '트럭'에 올라타거나, 그 몸체에 공산품들이 올라가 산업 동물로 착취당하는 이오의 일대기가 펼쳐진다.
스콜리모프스키는 <당나귀 EO>에서 아주 다채로운 영화적 장치를 동원하여 이오의 수난을 가시화하는데, 가장 먼저 도입부터 도드라지는 '붉은 조명'이다. 서커스 무대에 오른 이오는 죽는 연기를 한다. 그래서 피와 살, 곧 삶에 상응하는 붉은 조명은 불안하게 깜빡거리고, 숏 또한 빠르게 잘린다. 더는 호흡과 육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한 빨강과 어둠을 오가는 조명, 그리고 편집에 반영된다. 다행히도 마그다의 인공호흡 덕분에 이오는 살아난다. 이에 조명이 완전하게 켜지고 컷이 확연히 줄어드는데, 이러한 연출을 '관중'이 만들어낸다. 이오와 순수한 우정을 쌓는 마그다는 동물에게 이익을 투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객은 다르다. 돈을 낸 만큼 기대하는 무언가를 보길 기대하는 ‘속물’들이 이오를 부활시킨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부활일까?
동물보호법 개정으로 서커스단에서 농장으로 옮겨진 이오는 어느 한 백마와 조우하는데, 농부들은 동력 발전을 위해 백마를 착취한다. 백마가 혹사당하는 공간에도 붉은 조명이 가득한데, 이따금 사각지대엔 어둠이 가득하기에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다. 백마가 보일시에는 동력을 위해서 빙글빙글 달리고 있다면, 보이지 않을 때 백마의 행동을 가늠할 수 없고, 이로써 인간이 무언가를 보고자 하는 욕망에 좌우되지 않는다. 또 풍력발전기가 건설되어 까마귀가 추락하는 숲, 인간이 자연물의 '유용성'만을 본 따서 만든 '로봇 강아지'를 비출 때도 괴괴한 붉은빛이 프레임을 빼곡하게 칠한다. 즉 붉은 조명 아래서의 창조와 부활은 자연물들에겐 좋지 않다. 인간의 욕망이 자연의 비정형성을 죽이고, 이후 인간의 도구로서 부활하는 것이니,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생사를 식별할 수 없는 것이 그들에게 자유다.
붉은 조명은 동물만 위협하지 않는다. 마그다가 이오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농장을 찾았다. 그 와중에 뒤따라온 남자친구가 그녀를 방해한다. 여기서 마그다도 붉은 조명과 어둠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마그다는 이오의 곁에 더 있고 싶다. 이때의 마그다는 어둠 속에 놓인다. 그러나 붉은 조명이 그녀를 비추어 남성의 시야에 노출되고, '가부장제' 내에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은 남성의 말을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기에, 결국 이오와 결별한다. 즉 붉은 조명은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 또한 권력자, 지배자들이 '보고 싶은 모습'으로 전락시키며 자유를 말소한다. 붉은 조명은 삶이나 생명이 아니라, 타인이 일방적으로 투사하는 ‘시뻘건 욕망’이다.
트럭 운전기사 마테오를 비출 때도 붉은 조명이 사용된다. 마테오는 휴게소에서 서성이는 빈곤한 여성과 섹스하기 위해서 음식을 내어주며 붉은 조명이 가득한 운전석으로 데려온다. 거기서 음식을 즐기는 와중, 누군가가 마테오를 살해한다. 즉 붉은 조명은 살덩이가 부딪히는 섹스의 쾌락, 불그죽죽한 살코기를 맛보는 미각, 이에 따라서 발생하는 도축과 살해 등에 상응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촉각이나 미각에서 발생하는 붉음의 양면성을 시각으로 옮긴 것이요, 현대사회에선 불그죽죽한 쾌락만을 부각한다면, 스콜리모프스키는 이에 따른 잔혹함과 착취, 희생을 파헤친다. 즉 현대인의 쾌락과 욕망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마찬가지로 당연하게 은폐되는 이에 따른 희생을 스콜리모프스키는 붉은 조명의 양면성으로 느끼게 한다.
타인에 의한 존재는 자아가 잘려나간다. 이에 붉은 조명과 함께 ‘컷’이 상징적으로 사용된다. 농장의 백마가 자유롭게 홀로 나뒹굴 땐 컷이 드문 생생한 '롱테이크'에 담겼다. 그 이전 서커스에서도, 공연을 끝낸 마그다가 그 누구의 시선에도 방해받지 않을 때 롱테이크로 보존되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때 롱테이크는 잘리고, 또 이오를 착취하는 바실와 마그다의 인도적인 입장이 충돌할 때 롱테이크는 여러 숏으로 나뉜다. 즉 있는 그대로의 이어짐이 롱테이크라면, 거대한 이데올로기와 타인에 의해서 자아가 중단될 때, 마찬가지로 내가 담긴 쇼트도 산산조각난다. 특히나 인간에 의한 가축 백마는 롱테이크 안에 항구적으로 머물 수 없다. 백마는 흙 위에서 나뒹구는 것을 선호하지만, 인간의 야욕을 위해서 백마를 씻긴다. 씻기는 과정에서 백마의 신체 각 기관은 파편적인 클로즈업으로 인간의 목적과 구미에 따라 분절되고 나뉜다.
그래서 영화에선 일방적으로 지배되는 이미지들이 부각된다. 스콜리모프스키가 선택한 좁다랗고 폐쇄적인 1.33:1 화면비에 부합하는 철창에 갇힌 이미지, 누군가가 지시하고 관리하는 이미지가 연이어진다. 바실에게 채찍질당하며 쓰레기를 나르는 이오, 그 옆에서 철제 폐기물들을 핸들러가 움켜쥐며 나르는 것이 현대인들에게 당연하다. 지배자가 기대하는 목적이나 용도를 사물, 그에 준하는 인간들이 잘 이행하는 것이 말이다. 이에 영화의 디렉팅에 눈여겨볼법하다. <당나귀 발타자르> 못지않은 이오의 순일한 연기에 비해서, 본 작품 속 전문 배우들의 연기는 기교가 확연하다. 이오는 순진한 자연물임을 지향하는 와중에, 피지배자인 배우들은 지배자들이 기대하는 연기자로서 목적이나 용도를 눈에 띄게 보여줘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배경음악 또한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서 적재적소에 사용된다. 그 지시는 우리의 머리 위, 곧 하늘에서 내려온다. 이에 하늘 또한 탁 트여있지 않다. 영화의 ‘하이 앵글’ 구도는 저 하늘로도 달아날 수 없는 감시망이나 폐쇄성에 상응하고, ‘드론 숏’이 날아다니더라도 우람하게 올라선 풍력 발전기에 의해서 추락하며, 아이들이 갖고 노는 ‘연’은 지상에 묶여서 날아다니지 못하니 말이다.
그래서 스콜리모프스키는 타인의 예측에서 벗어나는 주체의 '낯선 이미지'를 그려내며 참된 자유를 가시화한다. 보고 싶은 이미지들은 대체로 전형적이다. 가축이라는 하나의 목적, 규정된 젠더의 제한적인 역할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전형성은 아이 레벨 쇼트나 일반적인 렌즈에 반영된다. 이에 반해 스콜리모프스키는 로우 앵글과 어안렌즈, 드론 숏 등을 적극 동원하여 무차별적인 숏을 만들어낸다. 그 숏에 담긴 것은 이오의 순수한 반응이나, 예측할 수 없는 박쥐의 날갯짓 등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어떤 '의미'나 '목적'에 봉사하지 않는, 그것 자체로 순수하게 유희하고 지각되는 이미지요 운동이다. 해당 숏들은 주체성의 순수한 발현이요, 빚을 탕감해주는 만큼 어머니의 욕망에 봉사할 것을 요구하는 귀부인과 비토의 '쓸모 있는 움직임'과 정반대다.
특히나 여러 주체성 중에서도 자연 스스로의 변화무쌍함에 상응한다. 자연 미학과 환경 미학은 인공품들의 아름다움과 상반되는 자연의 고유한 미적 성질을 탐구한다. ‘제이 베어드 캘리콧’은 환경 미학의 특징으로 자연의 미적 속성이 아주 복잡한 상호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인간이 이해하기 전까지는 자연이 추해 보일지 몰라도, 복잡한 상호관계를 이해하면 아름답게 느껴진다. 반면 인간이 자연의 질서를 침범했을 때, 자연은 부조화스러운 추로 뒤바뀐다. 또 ‘알렌 칼슨’은 감상자의 눈에 아름답게 매개되고자 호소하는 인공품들과 달리, 자연은 인간 감상자를 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작품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어도 미감을 느낄 수 있는 인공품과 달리, 자연을 감상할 때는 미리 사전 지식을 예습하여 ‘왜, 어째서, 어떻게’ 아름다운지 능동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본 작품의 비정형적인 이미지들이 자연 미학 및 환경 미학의 특징에 부합한다. 영화의 비정형적인 이미지는 자연의 변화무쌍함과 예측할 수 없는 특징을 반영한다. 이오가 취할 수 있는 무한한 형상, 나귀가 뛰노는 변화무쌍하고 심원한 숲도 그렇고, 영화 후반부에 이오가 지나가는 수력발전소의 엄청난 물결과 파도, 회오리도 마찬가지다. 자연은 어디로든 향할 수 있는 것, 그 자연에 속하는 물은 고체든 액체든 기체든 어떤 형태로도 변신할 수 있다. 그래서 자연의 이미지는 전형적이지 않다.
자연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가시화하는 대표적인 장치는 '렌즈플레어'다. 이는 ‘빛’으로서 붉은 조명과 대조된다. 빨간 조명의 색채는 오직 하나다. 그러나 렌즈 플레어는 오만가지 색을 모두 품고 있다. 그 이유는 렌즈가 빛의 과다함을 온전히 품지 못해서 발생하는 현상이 렌즈 플레어이기 때문이다. 즉 충만하고 풍부한 빛을 렌즈가 축소하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새어나간 풍부한 ‘잉여’가 렌즈 플레어다. 본 작품에서 렌즈플레어의 쓰임도 이와 같다. 초반에는 백마를 씻길 때 렌즈플레어가 발생한다. 씻기 전까진 존재를 자르지 않는 롱테이크, 말들이 무목적하게 뛰어 노는 모습을 순수하게 붙잡는 슬로우 모션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백마를 인간의 소유물로 여겨 강제로 씻기기 시작한다. 그 마수를 순순히 따르지 않는 고집 센 백마의 반항이 렌즈플레어를 만들어낸다. 이후 마그다와 이오의 재회에서 렌즈플레어가 또 사용된다. 마그다는 당나귀 이오를 가축이나 돈벌이 수단으로 삼지 않음에 반자본주의적이고, 또 남성의 지시를 거부함에 반가부장적이다. 그 본성과 자유를 이념이 설명하지 못할 때, 이후 마그다를 좇아서 이오가 탈출할 때 달에 의해 렌즈플레어가 발생한다. 인간의 마수에서 달아날 때 통제와 순종 이상의 환상적이고도 신비로운 잉여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 렌즈플레어와 흡사한 것은 영화 후반, 이오와 숲을 포개놓는 ‘디졸브’다. 자연은 단일하지 않고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풍부한 중첩으로 가시화하는 디졸브 이후 이오는 귀부인의 집에서 달아난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한한 빛을 어떻게 통제하는가. 렌즈플레어가 발생하는 도로는 위험천만하다. 자연물과 문명, 본성과 법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오는 숲으로 빠진다. 그 숲엔 두꺼비, 올빼미, 늑대, 여우 등이 살고 있다. 그들의 움직임과 울음은 인간의 시선에서 예측불허하다. 흡사 무슨 색깔로 나타날지 감히 단언할 수 없는 렌즈 플레어처럼. 이윽고 그 숲에 인간이 빛을 '응집'시킨 녹색 레이저가 침략한다. 그 빛은 자연물들을 검열한다. 인간에 의해 교배된 당나귀는 사살되지 않지만, 무정형의 여우 혹은 늑대는 사살된다. 즉 인간의 전형성은 목적이나 통제에서 벗어난 자유나 본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렌즈플레어가 지배를 따르지 않는 이탈과 충돌, 이로 인한 가능성이라면, 인간에 의해 편협하게 정제된 레이저는 가능성을 축소하거나, 심지어 죽음까지도 선사한다.
그러나 자유롭기 위해서 태어난 모든 존재는 렌즈플레어를 터트려야 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여기에 ‘추상적인 청각’까지 동원한다. 비토는 라디오로 음악을 들으며 운전한다. 기계 장치는 음악을 자동 재생하고, 차도 지시를 불이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료가 떨어졌는지 차가 멈추고, 이윽고 음악도 꺼진다. 이후 비토는 기계가 아니라 자기 발로 움직이고, 또 라디오가 꺼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음악과 그것이 가리키는 신묘한 렌즈플레어를 따라가 이오를 만난다. 그 전에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지 않고, 시각과도 부응하지 않는 음향이 있었다. 바로 전원의 농장으로 옮겨진 이오가 마그다를 플래시백으로 회고할 때, 감상자가 보는 이미지에서 발생하지 않는, 저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음향이 삽입되었다. 또 이오가 마테오의 트럭에 실려 가는 도중 알프스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마테오가 운전석에서 듣는 헤비메탈이 아닌, 저 너머에서 심원한 클래식이 들려온다. 즉 기계나 시각과 일치하지 않는 음향은 보이는 것 너머를 가리킨다. 보이는 것이 인간에 의해 좌우된 일반적인 가축이요, 들리는 것이 폭력적인 욕망을 반영한 헤비메탈이라면, 예상치 못한 추상적인 음향을 따라갈 때 가축 이상의, 마그다와 능동적으로 교류하고 풍성한 영혼을 지닌 이오가 나타난다. 즉 우리는 당연한 것 너머로 나아가야지만 자유의 폭이 드넓어진다. 실제로 비토는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라디오처럼 천편일률적으로 자동 재생되는 인간 군상이었다. 귀부인의 언행이 비토의 삶을 결정하고, 그는 노예화되어 그녀를 따른다. 그러나 렌즈플레어와 보이는 것 너머의 음향을 따라가서 가축화를 거부하는 이오와 만나 제 상황의 부조리함을 체감한 듯하다.
렌즈플레어를 따라가는 이오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인간이 원하는 반응을 순순히 보여주지 않고 역으로 튕겨낼 때의 편집 또한 특유하다. 이오의 시선에서 현대문명이 보임과 동시에 계산과 이득에서 벗어난 순수시지각적인 풍경이 보인다. 즉 인류에게 유의미한 법안이랄지 이데올로기들이 나열된 전후로 어떠한 내용도 의미도 없는, 그저 감각적으로 즐겁고 유희할 뿐인 순수시지각 이미지가 배치된다. 이로써 스콜리모프스키는 편집과 서사에도 비정형성을 반영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일반성에 자연물의 순진무구함이 침투하여 어깃장을 내고, 그 자연물이 갖고 있는 순수한 자유를 환기하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여겨왔던 것들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조리한가?
동물보호법 개정 이후 이오는 마그다와 이별한다. 그러나 마그다와의 이별만큼은 이오가 원한 것이 아닐 뿐더러, 더욱이 동물보호법이 개정되었어도 여전히 당나귀는 인간중심적인 노동에 불려가 착취된다. 즉 법은 그것을 따라야 하는 존재들을 위하지 않고, 법을 만드는 존재의 이익을 대변한다. 그 사실은 이오가 축구장에 간 시퀀스에서 또다시 드러난다. 아나키스트들과 네오나치들이 축구 경기를 벌였다. 아나키스트들은 무질서가 최고라며 소방관이 묶어둔 당나귀를 해방시킨다. 경기는 아나키스트들이 승리했는데, 네오나치들은 이오 때문에 경기를 졌다며, 자신들의 무능함과 열등함을 이오에게 타자화한다. 이후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이오를 뒷풀이에 데려가고, 이를 습격한 네오나치들은 제 힘을 과시하기 위해 이오를 폭행한다. 즉 아나키스트가 무정부적인 도그마를 선전하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네오나치들이 힘과 지배력을 과시하기 위해 동물을 착취한다. 인간의 이데올로기와 법은 결코 동물을 위하지 않는다. 어떤 이념을 믿든 훌리건들은 제 쾌락과 욕망에 갇혀있다.
철학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서구 사회에서 이성과 계몽의 야만적 실체를 밝힌다. 인간은 '야만적'이고 공포스러운 자연을 계몽의 빛으로 몰아내어 인간 스스로 주인이 되길 원했다. 그러나 주인이 된 인간은 소수였다. 자연에 지배받던 인간은 이윽고 계몽의 계산가능성, 유용성의 척도, 통일성에 지배되었다. 인간의 자연 지배는 곧 인간의 인간 지배로 이어졌다. 자연의 지배를 피한 곳에서 인간은 지배받는다. 실상 자연의 잔혹함만을 모방한 계몽은 극단적인 합리성만을 불러와 인간을 지지기반이나 도구, 사물로 전락시켰으며, 감수성과 공감 등을 소외시켰다.
스콜리모프스키는 계몽의 민낯을 철창과 같은 폐쇄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 잔인하고 냉혹함과 동시에 자애롭고 이타적인 자연은 교류를 원한다. 축사의 말들은 입과 코를 비비며 우애를 나누고 싶다. 이오에게 마그다, 물고기, 여우 등도 그렇다. 그러나 인간은 말을 소유물이나 상품으로 여기기에, 흠이나 상처로 상품가치가 훼손되지 않게끔 동물을 고립시킨다. 수력발전소에 가득 찬 물 또한 마찬가지로, 물은 첨벙거리며 변형되고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지만, 그 퇴로를 인간의 쓰임을 위해 차단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여우들은 철창에 갇혀서 사망하고, 필요하지 않은 여우들은 사냥 당한다. 극단적인 합리성에 의한 희생은 자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부장제에서 남성은 여성을 착취한다. 마그다가 동행한 남자나 마테오의 사례에서 보듯, 여성은 그들 성욕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성별이 뒤집히더라도, 계급이나 자본에 의해서 관계는 동등하지 않다. 귀부인이 비토를 지배하듯 말이다. 농장에 놀러 온 아이들은 순진무구하다. 하지만 자신들의 유희를 위해서 마찬가지로 순진해야 할 당나귀 위에 올라탄다. 그 옆에선 오랜 세월을 버텨오며 하늘에 닿을 듯이 거대하게 자라난 나무를 인간이 벌목한다. 그리고 눈이 먼 하프 연주자가 착각에 빠진 이야기의 결말을 선생님은 말해주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자연을 지배해도 좋다는, 자연은 인간을 위해 펼쳐져있다는 착각에 빠진 채로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이오는 인간을 위해 배치되고 정돈된 '진열대'를 망가뜨리거나 '울타리'를 넘고, 귀족의 '대문' 밖으로 나아가며 순수한 자기 존재를 되찾는다. 또 현재 너머, 보이는 것 이상의 플래시백으로, 이오와 마그다가 진정 즐거웠던 순간을 되돌리고자 한다. 그러나 변신 이전의 시원적 시간은 이미 흘러갔기에, 더는 직면하거나 향할 수 없다. 그래서 철창을 뛰어넘고 또 뛰어넘어도,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살해하더라도, 결국에는 소들로 빼곡한 결말의 축사로 되돌아온다. 영화 속 빙글빙글 도는 트래블링 숏과 어디로 뛰어도 다시 돌아오는 원형의 무대가 이오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던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마그다는 가부장제 내의 남성에게로, 비토는 귀족에게로, 이로써 지배는 악순환된다.
이렇게 스콜리모프스키가 진단한 현대사회는 '미로'다. 길을 찾고자 빠져나와도 또 다시 구불거리는 난관에 갇혀서 지배당하고 헤매는, 시원적 플래시백과 야만의 심연 그 자체인 현재 사이에서 길을 잃다가 끝끝내 '도축'되는, 그런 현기증과 정신분열증을 '사이키델릭'한 연출로 선보인다. 편집 또한 미로의 성질을 반영한다. 이성과 합리성은 빈곤하여 동물 보호법의 결과가 동물 보호로 이어지지 않고, 사람들이 외치는 이념들은 껍데기는 있되 내용물은 부실하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법 위에는 충동적인 욕망과 살인이 들끓는다. 즉 편집은 미로처럼 예상치 못한 연결, 또 다른 문제를 이어내며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드문드문한 편집의 원인이 이오의 시선을 반영한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스콜리모프스키의 전작 <11분>처럼 이기심에 갇힌 현대인의 빈곤한 시야 때문에 객관과 주관 사이를 헤매고 또 헤매는 것이다, 그 이기심에 지배받는 동물들은 더더욱…
그러나 스콜리모프스키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계몽적 사고로 입각한 시선에선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여우의 숨결과 최후를 묵묵히 들여다보듯, 남성 소방관이 이오에게 과시하는 힘을 여성 소방관의 부드러움으로 극복하듯, 어떻게든 철창을 뛰어넘는 대안을 제시한다. 또한 <특급살인>처럼 대자연에서만 가능한 순수 시지각적 이미지를 창조해내며 빨강의 단순성과 잔혹함을 넘어선, 무궁무진하게 유동하는 무위의 연출을 회복한다. 이로써 인간의 영화가 아니라 자연과 절충한 영화를 선보이고, 거기서 자유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