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힘 겨루는 인간, 그리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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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도시, ‘테베’의 군주 라이오스는 아들이 자신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후, 제 아내와 재혼할 것이라는 살벌한 예언을 받는다. 그래서 라이오스는 아들 오이디푸스를 산속에 내버렸지만, 결국 성장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했다. 도망치고 부정하여도 결국 적중하고야 마는 라이오스-오이디푸스에게 떨어진 예언은 아들이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뛰어넘고자 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필연임을 가리킨다. 본 신화를 서두에 언급한 이유는 앙겔라 샤넬렉이 <뮤직>에서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기 때문이다.
1962년 알렌 태생의 앙겔라 샤넬렉은 독일의 영화감독이다. 베를린파에 속하는 그녀는 안토니오니와 브레송의 영향을 받은, 정서적인 순수 시지각 이미지를 직조하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그녀가 전달하고자 하는 ‘순수한 정서’는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필연적인 고립에서 비롯하는 ‘단절과 외로움’이다. 샤넬렉의 초기작 <내 누이의 행운>에서 하나의 테이크에 두 인물이 공존한다. 하나의 테이크 안에 머무는 두 인물은 물리적으론 가깝지만, 서로의 몸과 시선은 상대를 지나쳐 미끄러지듯 항상 엇갈린다. 아리안은 이별을 고하는 크리스티안에게 간청하고 호소하나, 그녀의 길고긴 발화 이후 돌아오는 것은 크리스티안의 차가운 침묵뿐이다. 샤넬렉은 클로즈업을 이용하여 프레임에 물질을 가득 채워내지만, 어떤 의미도 없는 적막과 공허의 이미지를 동시에 구축하며 정신적, 감정적 간극을 가시화한다. <나는 집에 있었지만…>에선 프레임에 주로 홀로 놓인다. 또 전시장에서 각기 다른 작품을 바라보거나, 필리프는 깨어있는 반면 폴로는 잠드는 등 시선이 엇갈린다. 서로의 시선을 외면하는 이유는, 나를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이 요구하는 객체와 스스로가 추구하는 주체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샤넬렉 영화의 중심인 변덕스럽게 성장하는 아이들은 대상을 고정하는 시선에서 빠져나간다.
그렇게 타인의 요구를 거부하고 외로움을 택하는 그들은 모순적이게도 다시 타인의 온기와 사랑을 바란다. <내 누이의 행운>의 대사에서 제시된 사랑은 '상대 입술의 벌림', 그 안으로의 ‘흡입’이다. 그래서 흠모하는 이들은 언제나 연인이 위치한 프레임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기회를 틈타 재빨리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이는 지배당함을 자처하는 행위다. 샤넬렉은 얼굴을 ‘하이앵글’에서 내려다보는 비일반적인 구도를 통해 그들이 지배당하거나 억눌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인간은 자유를 위해 고독을 자처함과 동시에, 사랑을 위해서 지배를 자처하는 모순을 계속 오간다.
<오후>에서는 개인이 아닌 가족으로서 객체가 강요된다. 영화 속 오후는 진부하리만큼 당연한 풍경을 드러낸다. 그래서 사무적이고 일반적인 식구들 외의,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진부하고 당연해 보이는 식구의 모습은 쉽게 수용할 수 있지만 이는 자신을 위하지 않는 행위요, 반면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행동이 실로 자유롭다. 후자가 <오후>의 ‘실존’이다. 실존이란 연극에서 미리 정해진 '배역'을 벗어나는 것, 영화 내 가장 실존적인 아그네스의 말처럼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움직임을 긍정하고 이에 즐거워하는 것이다. 한편 실존하는 존재들은 상대의 기대나 앎에서 당연하지 않아 단절되고, 실존을 바라며 항상 유랑하는 아그네스는 죽음으로 귀결된다. 즉 실존은 규정된 자신을 지워가며 자유롭지만 그만큼 죽음에 근접하는 불안정성이요, 고정된 배역을 유지하면 안정적으로 연속할 수 있기에 인류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래서 임신-출산이라는 위험천만한 실존을 경험한 아이린은 또 다른 실존을 경험하기보다는, 안정적인 배역으로서 어머니를 유지하고자 딸 콘스탄틴을 구속한다. 그러나 그 콘스탄틴은 아이린의 시선에서 멀어진다. 인간은 실존과 배역 그 사이의 어중간함에 놓여 교착에 빠진다. 근작 <나는 집에 있었지만…>에선 각기 다른 숏에 토끼와 사냥개가 위치한다. 이후 둘이 같은 숏에 놓이게 된 이유는 사냥개가 토끼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즉 배역으로 붙잡히는 것은 타인에 의한 소유다. 어머니 아스트리드의 연기가 매우 건조하여 그 어느 작품보다도 브레송이 연상되는 <나는 집에 있었지만…>의 포스터 속 메추리는 제우스의 겁탈에서 달아나는 아스테리아 여신의 상징으로, 남편의 사망에 의해서 강제로 홀어머니라는 배역이 입혀진 아스트리드의 은유다. 그러나 그녀와 아이들 모두 다 무감한 연기가 강제되는 배역을 탈피하여 감정을 회복하고, 상대가 원하는 모습에서 '반역'하여 자유로워진다.
다만 벗지 말아야 할 배역, 달아날 수 없는 타인이 있나니 바로 ‘혈연관계’다. <내 누이의 행운>에서 리차드는 자신의 피와 아내 니나의 피가 섞인 아들에 의해서, 니나의 공간인 부엌을 외면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파고든다. 제 삶을 놓아버린 리차드는 결국 아이를 저버리지만, 한편 여전히 살아있고 제 삶을 긍정하는 니나는 아이를 놓지 않는다. 이자벨과 아리안 자매는 함께 크리스티안을 좋아하고, 그는 이자벨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아리안이 임신한다. 크리스티안은 아리안의 뱃속에도 존재하는 셈으로, 이자벨을 포기하고 아리안에게 되돌아간다. <나는 집에 있었지만…>에서 내내 시선이 일치하지 않지만, 신생아를 껴안을 때 시선이 일치한다. 내 욕구와 다른 타자가 호소하는 시선은 외면한다. 그러나 내가 뒤섞인, 이로써 나와 다르면서도 같은 존재에게는 시선이 향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므로.
마지막으로 최근 샤넬렉은 <오후>에서는 체호프의 『갈매기』, <나는 집에 있었지만…>에서는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삼아 영상화하는데, 해당 작품에선 영화가 달아나지 못할 단단하고 구체적인 뼈대가 있는 셈이다. 이는 원전임과 동시에, 대다수 인류가 처할 수 있는 보편성, 곧 언제 닥쳐도 이상할 것이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샤넬렉은 원전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독창적인 영상화와 재해석으로, 그녀의 영화는 실존과 얽매임의 어느 사이에 위치하는데, 과연 그녀의 신작 <뮤직>은 오이디푸스 설화를 어떻게 변주할까?
그리스 신화에서 예언은 절대적이다. 인간은 물론이거니와, 반신이나 신조차 자신에게 떨어진 예언을 감히 거스를 수 없다. 대상이 예언에서 달아나고자 몸부림치고 발악해도, 올무나 덫처럼 되레 대상을 더 옭아맨다. 샤넬렉은 예언의 힘을 도입부의 '산'과 '안개'를 대비하며 보여준다. 아주 견고하고 무거우며 구체적인 것이 산이라면, 안개는 추상적이고 가벼우며 그저 나풀거리기만 하는 공허한 것이다. 바로 이 덧없는 것이 억겁의 세월을 축적해온 산을 손쉽게 뒤덮는다. 육중한 산을 규정하는 부질없는 안개가, 곧 인간에게 내려진 예언의 ‘모순적인 무게’와 같다. 일순간 사제의 입에서 새어나왔다가 사라지는 공허한 몇 마디 문장이 육중하고 웅대한 존재들의 일생을 손쉽게 좌우하였으니… 그렇게 안개가 산을 모조리 은닉한 이후엔 ‘천둥’까지 내려친다. 번개가 동반되는 천둥이라면 실질적인 위해와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번개 없는 천둥은 그저 소리만 클 뿐 아무것도 아닌, ‘허풍’과 같은 것이다. 그 아무것도 아닌 천둥이 영화에선 위협적이다. 그리스 신화 속 최고신인 제우스의 상징이 번개와 천둥인 것처럼, 천둥은 신의 음성이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나 잘 들리는 거부할 수 없는 신의 음성이, 드넓은 범위를 순식간에 뒤덮는 안개처럼 인간을 따라다닌다.
그리스 신화에서 부정적인 예언을 받은 존재들은 어떻게든 거기서 달아나고자 고군분투한다. 오이디푸스 전설 속 라이오스는 왕궁을 넘어서 산기슭에 오이디푸스를 버리면 해결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예언의 힘은 협소한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 보잘 것 없는 말 한마디가 순식간에 거대한 세계 전체를 뒤덮기에, 어디로 도망쳐도 어떻게든 따라온다. 샤넬렉은 세계 전체를 뒤덮는 말 한마디의 힘을 ‘하이 앵글 구도’에서 촬영된 '롱숏'과 '익스트림 롱숏'에 반영한다. 저 하늘 위에서 지상을 묵묵히 내려다볼 수 있는 누군가는 천상에 자리하며 예언을 내리시는 절대자, 곧 신들이다. 예언을 받은 인물들은 이 절대적인 시선과 손아귀에서 어떻게든 도망치고자 몸부림친다. 샤넬렉은 안개가 산을 뒤덮은 숏 직후에 어둑한 숲을 촬영한 롱숏을 이어내는데, 거기엔 오이디푸스에 해당하는 '이언'(알리오샤 슈나이더)이 버림당하는 정황이 담겨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원전의 라이오스에 해당하는 ‘루키안’(테오도르 브라카스)은 아기 이언을 버리고 ‘프레임 바깥’으로 달아나려고 하지만 결코 달아날 수 없다. 예언이 지배하는 롱숏과 익스트림 롱숏은 매우 ‘드넓어서’ 작고 나약한 인간이 아무리 도망쳐도 프레임 바깥으로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다.
설령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한들 샤넬렉은 ‘편집’으로 예언에서 달아난 존재를 다시 프레임 안에 가둬내며, 인간이 아무리 거부해도 끝끝내 이어지는 예언의 불가항력을 가시화한다. 그가 프레임 바깥으로 이탈한 직후 이어지는 숏엔 프레임 안으로 진입하는 이미지들이 담긴다. 아무리 달아나고 또 달아나도 절대자가 구축해놓은 예언의 세계 ‘정중앙’으로, 곧 예언의 핵심에 근접하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 끝끝내 루키안이 이안에게 살해당하는 숏은 영화에서 이어지고야 마니 말이다. 즉 롱숏과 편집은 예언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반영한다.
예언이 실현된 직후 이어지는 '클로즈업' 또한 신들의 힘을 증명한다. 절대자의 손아귀에서 끝끝내 탈출하지 못한 인물들은 체념하며 프레임 안에 다소곳하게 클로즈업된다. 예언을 따르지 않겠다는 의지가 프레임 바깥으로 도주하려는 '운동'에 반영된다면, 예언에 순응한 자는 ‘부동’하며 절대자가 자신에게 가할 결말을 고스란히 기다린다. 그렇게 예언의 결과만이 확실하게, 또 신들의 눈에 보기 좋게 확대된다. 그래서 <뮤직>의 카메라는 어떻게든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신들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예언이 적중하여 클로즈업 되는 피사체에는 '주검'도 포함한다. 전 인류가 공통되게 처한 예언은 '유한',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 예언에서 도망치지 못해 목숨을 거두는 타나토스의 손아귀에 붙잡힌 주검이 클로즈업되며, 운명을 연출에 반영하는 샤넬렉의 법칙을 강화한다.
샤넬렉은 연출뿐만 아니라, 카메라로 담아낸 ‘시공간의 성질’로도 예언의 가공할만한 힘을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된 시간은 '밤'이다. 어둠 속에선 그 무엇도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로써 예언의 성사여부를 감시하는 절대자의 ‘시야’도 약화될 것이요, 이에 루키안은 밤의 숲에서 예언에서 도주할 수 있길 희망한다. 그러나 편집은 예언을 극복한 결과가 아닌, '다음날 아침'을 이어낸다. 그 아침은 산과 바다를 밝힌다. 예언이 존재의 앞날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듯, 아침·낮은 존재가 '무엇'임을 확실하게 단언한다. 그 낮에 예언이 실패하기 위해선 필히 죽어야 할 아기 이언이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어 거둬진다. 낮은 예언을 구체화한다. 이후 이언은 ‘바위’가 많은 바닷가 인근 산골에서 길러진다. 비교적 탁 트여있지만 성질 자체는 단단하고 폐쇄적인 공간이, 이안이 루키안을 죽이게끔 유도한다. 이후 이언은 산골보다 더 폐쇄적인, '철창'이 사방을 에워싼 '교도소'에 수감된다. 거기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이성은 원전의 이오카스테에 해당하는 ‘이에로’(아가트 보니처)로서, 이언은 그녀와 눈에 맞아 교제를 시작한다. 롱숏을 사용할 수 없는 좁다란 공간에서 당연히 촬영은 클로즈업으로 좁혀지며, 예언에서 달아날 수 없는 얼굴을 프레임에 가둔다. 즉 예언에서 달아나려고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예언이 실현될 수밖에 없는 폐쇄적인 공간으로 옮겨지며, 더더욱 예언에 가까워진다.
예언에 반발한 사람들은 고의로 발걸음을 튼다. 이로써 자신은 예언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되레 예언에 가까워진다. 차라리 여러 가능성이 산재해있는 롱숏에 머물러 있었다면, 클로즈업에 비해서 예언은 빽빽하게 닥쳐오지 않았으리라. 만약 이언이 루키안의 키스를 그냥 받아들이고 발을 멈춰뒀다면 당장 부친을 살해할 일도, 모친 이에로와 만날 일도 없었다. 즉 무심결에 뗀 발걸음이 예언에 다가가고 있었다. 샤넬렉은 이를 촬영과 편집에 반영하는데, 바로 클로즈업된 '발'로 이어지는 연결이다. 일반적으로 인류는 ‘눈’으로 본 다음에 손을 건네거나 발을 뗀다. 무언가를 인지하여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판단한 이후 행동한다. 그런데 샤넬렉은 바라보고 판단하는 눈이 달린 '얼굴' 대신 전작 <꿈길>(2017)에서는 '손'을, 본 작품에서는 발을 클로즈업한 숏들을 이어내며, 판단에 따른 이동이 아닌 예언에 따른 자동적이고 관성적인 연결을 가시화한다. 이언은 눈이 멀어간다. 자신의 눈앞에 무엇이 펼쳐지고 있는지 모르니, 주체적으로 행동하기도 어렵다. 그런 와중에 반사적으로 발을 뗀다. 이언과 이에로의 만남은 눈보다 빨랐던 두 사람의 발이 관성적으로 맞닿으면서 결정되었다. 결말에서 이언의 눈은 완전히 멀었다. 그런데도 불현듯 발이 움직이며 교통사고를 당할 뻔한 피비를 구했다. 이에로가 자살하는 장면에서도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발이 포착된다. 이에로의 발은 원전에서 자살하는 이오카스테의 운명을 반사적으로 따라간다.
얼굴과 눈이 담긴 숏은 움직인 이후에야 연결되어 드러난다. 본 작품에서 눈은 발이 저지른 행동을 뒤늦게 확인하거나, 그 결과를 후속 조치하는 수동적인 기관이다. 이언과 이에르의 발이 일단 맞닿은 이후, 이에르가 이언의 발에 난 상처를 치료해주기 위해 약국에 간다. 피비가 교통사고를 당한 남자의 가방을 일단 주운 이후 죽은 이의 신원을 확인하고, 이언 또한 일단 뛰어들어서 피비를 교통사고에서 구한다. 즉 얼굴이 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을 따라 거기로 움직이게 되어있는 발이 얼굴을 역으로 규정한다.
이렇게 인간은 예언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또 하나의 자명한 사실은 이를 조금이나마 미룰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이언이 루키안의 키스를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예언에 따라서 끝끝내 그를 죽이게 됐을 것이다. 또 이언은 루키안과 엮여 있는 이에르와 어떻게든 만나게 되었을 것이지만, 일단 키스를 받아들였으면 루키안 살해와 이에르와의 만남 모두 다 미뤄졌을 것이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이언이 지금 당장 피비의 죽음을 막아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좀 뒤로 늦춘 것처럼 말이다. 즉 샤넬렉은 거스를 수 없는 예언의 힘을 부각하면서도, 그 예언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롭고자 빈틈을 찾는 인간의 의지 또한 부각하는데, 이를 ‘물’에서 찾는다. 영화에서는 바다에서 아기 이언을 돌보거나, 장성한 이언이 친구들과 수영하거나, 이에르와 함께 손을 씻거나, 수영하러 간 이에르를 찾으러 이언과 피비가 해변에 가는 등, ‘물과 접촉하는 행위’가 수차례 반복된다. 물과 상반되는 속성은 예언에서 달아나면 달아나려 할수록 점차 예언이 개인을 에워싸는,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빽빽한 마을이나 철제 트럭 등의 폐쇄적인 공간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인간은 어떻게든 물에 뛰어들어 예언을 씻어내고, 유동적이며 흐르는 속성을 빌려와 잠시나마 예언을 변형한다.
또 본 극의 제목처럼 '음악'에서 탈출구를 찾는다. 예언이 담긴 청각은 시각을 일방적으로 좌우한다. 그렇게 하기로 결정된 예언은 어떻게든 실현되어 시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시각은 예언이 지시한 것을 무조건 조각하고 그려서 보여준다. 이에로는 동료 간수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친다. 해당 사물은 무조건 특정한 기표로만 불러야 하고, 청각이 의미한데로 보여야 한다. 이에로가 아브라함과 통화할 때, "이에로 맞지?", "루키안을 죽인 게 이언 맞지?" 등의 청각에 따라 시각은 그런 모습으로 위치한다.
그런데 시각으로 승화할 수 없는 ‘오페라’가 눈이 먼 이언의 입에서 새어나오고, 고유한 청각적 형식미를 자유롭게 추구하는 ‘기악음악’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된다. 해당 음악이 침투하기 전에 이에로는 소피아에게 빨간 구두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이후 음악이 본격적으로 재생되자, 샤워실에 있는 이언이 자신이 신던 신발을 되레 벗고 내팽개치는 숏이 이어진다. 물론 이에로는 이언에게 신발을 가져오라한 게 아니었고, 이언이 벗은 신발은 구두도 빨간색도 아니지만, 이에로가 말한 것과 정 반대의 시각이 연결된 것임은 자명하다. 슈베르트의 <송어>를 듣고도 송어의 구체적인 형상이 연상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그만큼 추상적이고 자율적인 청각은 무수한 형태의 시각으로 발현될 수 있고, 여기서 하나의 시각을 강제하는 예언을 거스르는 힘을 찾을 수 있다.
예언의 허점과 틈새를 찾아내려는 인간의 의지를 물과 음악에서 발견한 샤넬렉은 이에 더해 각본, 곧 '문학'을 영상화하는 영화의 운명 또한 극복하여 매체의 자유를 되찾으려한다. 본 작품의 소재가 오이디푸스 전설이라는 것을 감상자가 인지한 이상,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게 된다. 즉 각본이라는 예언이 영화의 방향을 예정한다. 그러나 샤넬렉은 원전의 구체적인 설정을 모호하게 처리하거나 이리저리 비튼다.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부은 발목’은 갓 버려졌을 때 생긴 것인데, 본 작품에선 장성한 이언의 발에 상처가 난 것으로 다르게 처리한다. 자신의 패륜을 인지한 이후 두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와 달리, 본 작품에서 이언의 눈은 자연적으로 멀어간다. 또 원전에서 적대하던 이언과 루키안의 관계를 동성애로 변형하고,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가 부부 관계를 유지하던 원전과 달리, 본 작품에서 루키안과 이에로의 관계는 다소 모호하다.
샤넬렉의 재해석은 내용 비틀기에 그치지 않고 편집에도 반영된다. 원전의 서사를 재현하기 위한 탄탄한 개연성 대신, 전개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듬성듬성한 연결이 본 작품의 특징이다. 그럼으로써 숏 개개가 담고 있는 '비탄', '통곡', '해방감' 등 서사에 종속되지 않는 고유한 이미지를 부각한다. 이로써 샤넬렉은 이전과 이후에 종속되지 않는 각 '숏의 자유', 원전이나 각본에 지배되지 않는 순수 영화의 가능성까지 엿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을 거스를 순 없기에, 본 극의 결말도 오이디푸스 신화를 따른다. 원전처럼 이언은 아들들과 결별하고, 딸들과 함께 어디론가 떠난다. 하지만 예언을 따르는 그들은 물로 가득 찬 강 주변을 걸어가며 추상적인 노래를 부른다. 아들들과 헤어지지만 원전처럼 험악한 분위기에서 이별하진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물처럼 흘러가고 저 자신에게 충실한 노래를 부르며, 예언을 조금이나마 유예하고 자유를 찾는다.
특히나 오이디푸스의 시점에서 수갑과도 같던 예언을 탐구한 그리스 신화와 달리, 이언보다는 이에로의 관점에서 달아나고 또 달아나도 '전업주부'로 전락해야만 하는 여성의 부조리한 운명에 주목했다는 점도, 원전이라는 예언을 따르면서도 비트는 샤넬렉의 자유다. 다만 문학이라는 예언을 탈피하기 위해 음악을 빌려오는 와중에, 다시금 시각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으로 청각에 종속되거나, 또 노래 가사에 의존하는 한계가 아쉽게 느껴진다. 추상적인 음악이 예언에서 달아나고자 하는 인간과 시각의 고유한 몸부림에 상응하기에, 음악의 고유함에 필적하는 독립적인 시각으로 승화했다면 더 효과적이었을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