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폭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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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탈리아반도에서는 ‘유대인 아동 납치사건’이 잦았다. 일반 아동 납치와 확연하게 구별되는 유대인 아동 납치사건만의 특징으로는 일개 시민의 부도덕한 일탈이 아니라, 교황령의 '고위공직자'들이 주도했고, 교황이 지배하는 '교황령 주'에서 만연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유대인 가정에 상주하는 가톨릭교도 ‘하녀’들한테 은밀하게 세례를 내리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부모도 모르게 비밀스럽게 ‘개종’된 아이들을 교황령의 수도인 ‘로마’로 강제로 빼내었는데, 잘 이해되지 않는 납치 사건의 내막을 이해하기 위해선 역사적인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 19세기의 서문을 연 프랑스혁명이나 산업혁명 등의 사건, 이를 추동한 계몽주의 등의 이념은 구시대적 가치를 표상하는 교황령의 권력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에 교황령을 지지해주는 세력은 기껏해야 혈연으로 얽힌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에 그쳤다. 그래서 이념적으로도, 국제 관계로도 교황령은 서서히 고립되었고, 심지어 이탈리아반도 내에선 교황령 주를 제외하고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교황이 제 힘을 과시하고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 택한 수단이 바로 유대인 아동 납치이었다. 이 납치사건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역사학자, '데이비드 I. 커처'가 연구한 『모르타라 납치사건』으로 마르코 벨로키오는 이를 영상화한다.
1939년 보비오 태생의 마르코 벨로키오는 오늘날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노장 중 한명이다. 정치적이고 급진적인 역사적 소재를 과거에서 길어와 현재와 맞물리게 하는 아나크로니즘 작업으로 유명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동료였던 벨로키오는 친구처럼 역사, 사회, 정치적인 소재를 리드미컬하게 영화화한다. 그는 이탈리아의 영화감독답게, ‘미술’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예술사가 남긴 유산을 연출에 반영한다. 국내에 개봉된 벨로키오의 유일한 영화인 <배신자>는 마피아의 중추적인 전략가이자 정보통이었고, 이후 조직을 배신하여 ‘맥시 트라이얼 재판’(1986년 474명의 마피아 구성원에 대한 대규모 재판)의 핵심적 증인이 된 '토마소 부셰타'의 전기영화다. 벨로키오는 부셰타의 일대기를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유산인 아주 짙은 ‘키아로스쿠로’(강렬한 명암대비를 이용한 암흑양식)가 창출하는 극적인 하이라이트로 밝힌다. 이 같은 ‘암흑 양식’은 그의 2010년대 작품인 <잠자는 미녀>에서 어둠 속에 파묻힌 대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얼굴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사용한 바 있다.
벨로키오의 특징은 조명법에만 그치지 않는다. <배신자>에선 부셰타를 중심으로 맥시 트라이얼에 얽힌 무수한 사람들의 흥망성쇠, 삶과 죽음을 편집으로 유려하게 잇는다. 즉 벨로키오의 핵심적 연출 중 하나는 바로 ‘편집’이다. 그의 영화 규모는 언제나 장대하다. 소수의 인물이 아니라 다수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한 개인을 이루는 거대한 공동체, 구조를 편집으로서 가시화하고, 사실상 그의 영화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거대한 세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라는 주인공을 구성하기 위한 그의 편집은 흡사 ‘로버트 알트만’의 리드미컬한 ‘교차편집’과도 유사하며, 여러 인물들로 이어진 그물망 같은 세계를 편집으로 나누고 붙이고 이어낸다. 연결되어 있지만 그 안에선 첨예한 대립이 가득하고, 이에 따라 이어지면서도 ‘컷’이 남발되며 촉발되는 긴장감을 벨로키오는 날카롭게 포착한다. 편집이 자아내는 이어짐과 끊김, 개연과 모순의 총체가 바로 세계다.
또 벨로키오는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그의 분신과도 같은 형제가 자살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마르크스 캔 웨이트>에 반영한 바 있다. 형제를 분신처럼 여기는 그의 시선은 <나의 혈육>의 전반부에서 드러난다. 페데리코는 형제와 욕망에 차이가 없다. 형제는 같은 공간에 참석하고, 같은 사랑을 공유한다. 세상 그 누구보다 닮은 분신이다. 그런데 나의 형제는 닮았지만 결국엔 나와 다른 타자다. 그래서 벨로키오의 형제처럼 내가 살아있는 와중에 먼저 죽기도 하고, 살아있더라도 내 곁에 항상 머물지 않는다. 이에 벨로키오의 인물들은 소중한 형제를 ‘소환’하거나, ‘형제애’를 타인에게 투영한다. <잠자는 미녀>에서처럼 바라는 기억을 타인에게 투사한다. <달콤한 꿈>에서 어머니를 잃은 마시모는 그녀와 닮은 손길을 그리워하고 열망한다. 이러한 과거에의 집착으로 현재를 괄시한다. 그래서 벨로키오에게 인간이란 '기억에 갇힌 존재'다. <잠자는 미녀>에서 중요한 것은 혼수상태에 빠진 딸, 기억에서 결코 돌아올 수 없는 딸이지, 현재에 존재하는 아들이 아니다. 이미 소유된 아들은 철저히 등한시된다.
즉 벨로키오의 인간은 모두에게 동일한 객관적인 현재가 아니라, 각자가 '영광스럽게' 여기는 주관적인 기억으로 침잠한다. 이에 벨로키오의 인물들은 서로 간 연결되어 있다가도 ‘오해’가 발생하여 편집에서 긴장이 촉발한다. <잠자는 미녀>에서 어머니이자 아내의 죽음을 두고 아버지는 죽기 직전을 기억하고, 딸은 사망 이후를 회고한다. 이에 부녀는 첨예한 의견차를 보인다. 다른 가족의 모자도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딸을 잃기 전 어미로서 자신을 귀중하게 여긴다. 반면 아들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배우로서 어머니를 먼저 생각한다. 모자가 서로 재현하려는 기억이 다르다. <나의 혈육> 속 뱀파이어의 삶은 권태롭다.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한들, 과거에 누릴 수 있던 사랑, 존재, 이념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가 유세를 떨치던 중세라는 시대가 죽자 불멸의 뱀파이어도 기억을 그리워하다가 시름시름 죽어간다.
그래서 벨로키오의 영화는 ‘플래시백’이 적극 활용된다. <배신자>의 구성은 맥시 트라이얼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현재의 부세티가 과거를 회고하는 ‘플래시 포워드’ 구성이다. 본 작품은 비교적 플래시백이 정직한 편에 속하지만, 벨로키오가 선호하는 플래시백은 대체로 친절하지 않고 매우 거칠며, 작품의 거의 모든 시간이 회고에 할애될 정도로 현재를 부정한다. 이는 죽은 어머니를 현재까지도 그리워하며 상상과 꿈, 악몽에 시달리는 <달콤한 꿈>에서 더욱 거칠게 사용되고, <잠자는 미녀>에서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과 후, 대상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기 위해 플래시백에 더해 ‘아카이빙 푸티지’까지 동원된다. 중세로부터 현대로 올라오는 <나의 혈육>도 그렇다. 중세를 경험한적 없는 현대인들은 가까운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온 뱀파이어는 저 너머의 과거를 염원하며, 영화는 여러 시간을 유랑한다.
마지막으로 벨로키오의 영화에서는 ‘정치인’이 자주 등장하는데 <잠자는 미녀>와 <배신자> 모두 다 변절자로 나타난다. 정치인이 대중들에게 약속한 첫 번째 이념을 배반하거나, 지지자가 기억한 정치인의 모습은 현재에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벨로키오에게 인간이란 자신의 기억에는 갇혀있을지언정, 타인의 기억에는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다. 벨로키오의 유려한 편집 속에서 모였다가 줄곧 흐트러지는 이유는, 타인은 내게 기억을 투영하여 가둘 수 없고, 그러기도 전에 떠나가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머무르지 않는 방랑자들의 삶이 곧 현란하게 움직이는 벨로키오 편집의 원동력이며, 이러한 삶 속에서 소통하는 방법은 각자의 기억에 갇힌 서로가 유사한 기억을 공유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 그는 여러 기억 중에서도 교황령이 저물어가는 19세기의 기억 속으로 향한다.
벨로키오가 재현한 19세기 또한 그간의 작품들처럼 빛과 어둠이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다. 영화는 에두가르도(유년기 '에네아 사라', 청년기 '레오나르도 말테세')에게 몰래 세례를 준 하녀, ‘안나 모리시’(오로라 카마티)의 '시점 숏'에서 시작되는데, 맨 처음 안나는 어둠 속에 숨어 있다. 이후 빛이 풍부한 복도로 당당하게 걸어 나와서 연인과 입맞춤한다. 안나는 당대 교황령에서 신념을 훤히 드러내도 지탄받지 않는 '가톨릭교도'이며, 더욱이 교황령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군인과 교제중이다. 즉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양지’에 속하는 그녀의 모습은 봐도 좋은 것이라는 듯 적나라하게 밝혀져 있다. 이후 키스를 마친 안나가 은밀하게 어둠 속으로 향한다. 거기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에두가르도에게 유대교식 세례를 주는 장면을 목도한다. 그 장면은 슬쩍 열린 문틈 너머로 몰래 훔쳐보는 듯한 '관음적인 구도'이며, 겨우 드러난 전경조차도 어둠 속에 감춰진 '풀숏'이어서 형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해당 숏이 어둡고 흐린 이유는 가톨릭 문화가 양지인 이상, 자연스럽게 유대교 문화는 ‘음지’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피우스 9세(파올로 피에로본)가 에두가르도에게 “유대인은 그리스도를 살해한 죄인이기에 세례로써 회개해야 한다”라고 세뇌하듯, 가톨릭교도가 다수인 사회에서 철천지원수인 유대인은 죄인으로서 해를 입지 않고자 가톨릭교도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숨어든다.
벨로키오는 영화 내내 주류 문화이자 종교, 이념으로서 가톨릭을 환하게 비춘다. 성부인 태양, 성자의 빛, 성령의 열이 종합된 ‘촛불’이 가톨릭교도들을 훤히 밝힌다. 언제나 빛나는 그들은 타인을 밝히는 특권까지 지닌다. 영화가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르타라 가족의 집에 교황청 헌병대가 들이닥친다. 그들은 모르타라 식구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누가 유대인이고, 누가 세례를 받았는지 깐깐하게 색출한다. 이들은 개종자에게는 혜택을, 유대인에게는 차별을 공식화한다. 그나마 당대 유대인들은 영화에서 언급되는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한 나라의 재정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갖추기 시작했기 때문에, 부조리한 법을 '뇌물'로써 완화하기도 했고, 이에 모몰로(파우스토 루소 알레시)가 유대인 공동체와 토의를 할 때는 빛이 꽤 환하게 든다. 반대로 빚을 갚지 못해 유대인에게 압박을 받아 허덕이는 교회가 어둡게 처리된다. 하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유대교는 유럽 내에서 음지문화였다. 이에 영화에선 유대인 꼬마들이 꽁꽁 숨어서 색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놀이 '숨바꼭질'이나, 취침 기도를 어둠 속에서 하는 등 ‘그늘’로 당대 유대교의 입지를 드러낸다.
19세기 교황령에서 핍박받던 유대인들의 삶을 가시화하는 연출은 조명에서 그치지 않는다. 편집과 촬영에도 반영된다. 영화의 도입부는 '롱테이크'에 가깝다. 즉 하나의 시퀀스는 긴 테이크로 구성되어 '컷', 곧 잘림이 없거나 매우 드물다. 이로써 도입의 숏은 '항구적'이고 '안정적'이었다. 롱테이크가 유지될 때는 안나가 가톨릭교도로서의 일상을 영위할 때다. 이런 그녀가 유대인들의 세례를 은밀하게 목도한다. 그러자 유대교식 세례가 담긴 롱테이크는 다급하게 잘려나가고 다음날, 어딘가에 바삐 방문하는 안나가 담긴 숏이 대신 이어진다. 상점으로 향한 안나는 상인 레포리에게 "아픈 에두가르도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세례 하는 법' 등을 캐묻는다. 즉 이어지는 것은 가톨릭이요, 잘려나가는 것은 유대인이다. 유대교가 잘린 이후 대신 이어 붙여지는 것은 가톨릭교도들이 유대인을 개종하려는 합법적인 빛의 폭력이다.
모르타라 가족의 집에 헌병대가 들이닥친 숏도 롱테이크다. 더욱이 헌병대가 들이닥치기 바로 직전, 유대인 가정의 일상을 담고 있던 시퀀스는 컷이 아주 잦았기 때문에 더욱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해당 시퀀스에서 아이들은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는데, 숨었다가 발각될 때마다 컷이 발생한다. 즉 양지에서 안정적으로 밝혀져 있는 가톨릭교도와 달리, 유대인들은 박해받지 않고자 음지에 숨어있는데, 이조차도 색출하려는 교황청의 서슬 퍼런 눈초리가 숨은 상태를 잘라내며 유대인은 결코 롱테이크로써 연속될 수 없다. 물론 모몰로가 헌병대에게 순순히 에두가르도를 내어주지 않음에, 교황청이 지속하고자 하는 롱테이크가 급박하게 중단된다. 심지어 교황청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 컷은 점점 더 잦아진다. 영화 중반부에는 이탈리아 통일을 원하는 민중들에 의해서 교황령 주 중 하나인 ‘볼로냐’가 수복되는데, 이때 볼로냐를 점령하는 이탈리아 왕국군의 발걸음이 롱테이크에 담긴다. 반면 컷이 발생하는 숏에는 허물어지는 피우스 9세의 흉상과 수복 소식을 듣고 졸도하는 교황이 담긴다. 여기서 양지와 음지를 구분 짓는 기준인 '권력'이 드러난다. 밝히고 이어내는 양지 문화가 힘을 잃는다면, 그 세계는 더는 연속되지 못하고 어두운 음지로 숨어야 한다.
그 여파는 카메라 워킹도 변화시킨다. 초반부에 카메라 워킹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스테디캠 위에 올라탄 카메라는 온화하고도 매끄럽게 '달리 숏'과 '트래블링 숏'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매끄러운 운동을 자랑하는 숏들이 편집으로 잘려나가더니, 이후 이어 붙여지는 숏은 '핸드 헬드'로써 괴괴하게 흔들린다. 에두가르도를 떠나보낸 어머니, 마리아나(바바라 론치)가 마차 안에서 쓰러지고 미쳐가는 모습을 보여줄 때 말이다. 반면 곤돌라를 타고 강을 거쳐서 로마로 이동하는 에두가르도를 포착할 때는, 대지를 포착한 숏보다 카메라 워킹이 더 안정적이다. 지상이 강보다 더 탄탄하고 안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음지 문화라는 이유로 흔들리는 반면, 끊임없이 움직이는 액체의 유동성이 출렁거리는 핸드 헬드를 발생시킬 법도 한데, 양지 문화의 특권이 불안정성을 해소한다. 즉 양지 문화는 불완전한 것도 완전하게, 반면 음지 문화는 완전한 것도 불완전하게 뒤흔든다.
양지의 사람들이 안정적인 삶을 이어가는 이유는 거대한 힘을 과시하는 '세계'의 비호를 받기 때문이다. 영화 도입부는 볼로냐의 풍경을 익스트림 롱숏에 담아낸 이후,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르타라 일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이어낸다. 그 클로즈업은 보통 프레임에 한 명의 얼굴만을 크게 담아내며 개인임을 부각한다. 즉 모르타라 일가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개인들이었다. 그런데 헌병대의 급습 및 에두가르도 납치 이후 클로즈업된 개인의 얼굴은 비탄과 절규로 가득 차, 원하는 개인의 얼굴은 상실된다. 직후 얼굴 대신 교황령 주를 거대하게 포착한 ‘롱숏’, ‘익스트림 롱숏’이 이어진다. 즉 개인을 세계에 복속시키는 것인데, 바로 그 세계가 양지문화요, 개인임을 지향하는 이들은 음지에 숨어있었다. 세계는 개인을 복속시키는 대가로 힘을 보장한다.
모르타라 가족의 집뿐만 아니라 교황청의 아이들 또한 즐기는 숨바꼭질 규칙은, 숨은 아이들이 술래가 출발한 장소로 되돌아가서 모두를 해방시켜야 한다. 에두가르도는 모르타라 가정에서는 출발지로 되돌아가서 숨어있는 형제들을 해방시키는데 실패했다. 반면 교황의 권위 아래서는 출발지로 되돌아가 떳떳하게 야외를 활보한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 공동체 또한 모몰로에게 '유대인 언론', 곧 유대인 세계를 이루는 힘을 왜 초기부터 빌리지 않았냐며 질타한다. 이렇게 양지 문화는 개인에게 힘을 부여하지만, 이를 거저 내어줄 정도로 너그럽진 않다. 어린 에두가르도가 개종됨으로써 교황의 권위와 힘을 증명했기 때문에 가톨릭은 소년에게 '맛있는 음식'을 건네줬고, 장성한 에두가르도가 크나큰 굴욕을 참아가면서까지 교황에게 굴종하기 때문에 더 애틋하게 취급한다. 즉 세계는 자신에게 귀속되며 이득을 주는 ‘도구’에게만 부귀영화를 허용하는데, 그 과정에서 일종의 죽음이 동반된다.
영화 내내 기독교와 죽음은 한 쌍처럼 묶인다. 에두가르도가 곤돌라를 타고 로마로 가는 도중 목격하는 풍경은 '장례식'이다. 이를 '십자가'를 든 신부가 집행한다. 이후 도착한 로마 교리문답의 집엔 병약한 소년 시몬이 있다. 그는 결국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하는데, 신부는 차라리 이것이 잘 된 일이라고 표현한다. 심지어 성인이 된 에두가르도의 '안색' 또한 매우 좋지 않게 표현되는데, 그들은 신도들을 영광으로 인도하는 대가로 개인으로서 자아를 거둔다. 개인이 개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대리인으로서 행동하게끔 세뇌하고, 이에 따른 보상을 내어줄 뿐이다.
그래서 세계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이들은 ‘내가 떳떳했던’ 기억을 그리워한다. 자아가 박탈당하기 이전을 말이다. 벨로키오는 이를 '교차 편집'에 반영한다. 영화에서는 두 차례, 볼로냐와 로마를 오가는 교차 편집 시퀀스가 등장한다. 하나는 이제 막 교리문답의 집에 도착한 에두가르도가 아버지의 포옹을 그리워할 때, 마찬가지로 모르타라 가족의 집에서도 모몰로가 자녀들을 껴안아주는 와중에 에두가르도의 빈자리가 휑할 때, 편집이 두 세계를 교차한다. 에두가르도와 모몰로는 잃어버린 서로에 대한 기억을 그리워하며 상대의 세계를 이어내고자 하지만, 두 세계는 그저 교차하고 지나칠 뿐 결코 만날 수 없다.
이후 볼로냐가 교황령에서 독립하고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을 때, 두 번째 교차편집이 발생한다. 여기서의 교차편집은 맥락이 조금 다르다. 교황청이 부귀영화를 누리던 찬란했던 기억, 곧 역사에 대한 그리움을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일단 벨로키오는 교황이 힘을 잃어간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톨릭에 호의적이지 않은 만큼 유대 자본의 힘을 반영하는 몇몇 언론사는 피오스 9세를 비판하는 ‘삽화’를 신문에 적나라하게 싣는데, 가만히 멈춰 있던 그림이 교황의 눈에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즉 가톨릭을 비판하는 세력이 교황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이 달려 이리 저리 쏘다니며 몰락을 부추긴다. 또 부동하기에 ‘운동으로 가득한 현실’의 모든 진실을 반영할 수 없던 삽화는, 이제는 발이 생겨 운동함으로써 현실을 대체하기에 이른다. 이후 피우스 9세는 꿈을 꾼다. 유대인들이 제 남근을 '할례'하는 악몽을 말이다. 이렇게 피우스 9세는 유대 자본이 교황청이 잠식하는 사태를 두려워한다.
이에 교황의 힘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유대인 아동 납치를 변호하고, 심지어 볼로냐가 수복되자 에두가르도에게 '견진성사'를 내리는 등 가톨릭의 힘을 더 우악스럽게 과시한다. 여기서 볼로냐에서 진행되는 에두가르도 납치 재판과 로마의 견진성사가 교차 편집되어 하나의 시퀀스를 이루는데, 서로에 의해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으려는 강한 반발과 아집이 편집에 반영된다. 납치 재판이 교황령 숏을 자르고, 견진성사가 담긴 숏이 볼로냐를 촬영한 숏을 중단하며 자신들을 이어내는 등 말이다.
그 중 유대인의 회고는 실패로 귀결되고, 교황의 집착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다. 그 이유는 영토나 언어뿐만 아니라, 기억마저도 통합되지 못하는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에 있다. 가톨릭과 달리 유대인들은 좋았던 ‘공동의 기억’으로 똘똘 뭉치지 못한다. 당장 성인이 된 에두가르도는 자신을 구출하러 온 형 리카르도(사무엘레 테네기)와 반목한다. 리카르도는 가족으로서 좋았던 유대인의 기억을 재건하려 하는 반면, 에두가르도는 납치된 이후 교황 밑에서 지낸 기억을 찬란하게 여긴다. 즉 어떤 이는 유대인의 자긍심을 영광스럽게 평가하는 반면, 어떤 이는 보편적인 세계 속에 편입된 기억을 명예로 삼는다. 둘의 선호하는 기억이 상반된 이유는 유대인에겐 그 어느 기억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한 추억은 물질적으로 빈곤한 반면, 교황령에 복속된 과거는 정신에서 굴욕적이다. 가톨릭이 물질적 영광과 주체적인 자긍심 둘 다 높다랗게 쌓아 올렸던 것과 달리, 유대인은 어느 하나가 좋으려면 다른 한 쪽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에두가르도는 좋았던 것들 중 어느 하나를 온전하게 선택하지 못한 채로 미로를 헤맨다. 피우스 9세가 사망했을 때 교황을 '돼지'라 비난하는 무리에 잠시 동참하다가도, 마리안느가 사망하기 직전엔 그녀에게 세례를 시도하니 말이다.
즉 유대인들은 어느 것도 완벽하게 밝히거나 이어내지 못한다. 현재와 과거, 그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역사와 기억이 그들을 앞으로도 와해시킬지 모른다. 벨로키오는 유대인들의 비극과 가톨릭의 야만을 조명과 촬영, 편집을 절륜하게 이용하여 가시화한다. 하지만 대체론 『모르타라 납치사건』을 정직하게 옮겨내는데 그치기에 책 대신 영화를, 특히 '벨로키오의 작품'을 봐야만 하는 이유가 희미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