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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06. 2023

왕빙, <청춘(봄)>

중국 혹은 자본주의라는 타르타로스

왕빙(Wang Bing), <청춘(봄)>(Youth(Spring)) 

- 중국 혹은 자본주의라는 타르타로스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356

지아장커, 왕 샤오슈아이 등 최근 중국 6세대 영화감독들은 '중년'을 주인공으로 삼아 영화를 연출한다. 그 중년들은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까지 요동쳤던 중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새겨낸 존재로서, 이들에게선 공통적으로 '상실'을 발견할 수 있다. 소중한 것들, 한때 가졌던 것이 변화 속에서 속절없이 사라졌다. 가졌던 것을 잃어버린 처량한 중년들, 반면 중국의 청년 시네아스트인 웨이슈준이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를 연출했고, 현재는 고인이 된 후보 등은 '무언가를 가져본 적도 없는 청년'을 묘사한다. 중국의 청년들은 기성의 거대한 장벽을 맞닥뜨림에 좌절하거나, 그들의 거대한 영향력에서 달아나고자 반항하는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궤도에서 이탈한 그들이 바라는 목적지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즉 오늘날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세대 별로 차이가 있다. 기성은 가능했던 것을, 청년은 불가능을 스크린에 투사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노동과 착취 속에서 사라져가는 인민의 흔적이나 치매로 인해 상실되는 기억 등, '유실'을 다큐멘터리로써 보존하던 왕빙은 보존할 만한 것을 가진 적도 없었던 청년을 기록한다. 왕빙이 주목하는 것은 단지 존재만으로 보존되어야 할 '청춘'이다.      


1967년 시안시 태생의 왕빙은 중국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중국 내 인민의 삶을 건조하리만큼 순수하게 담아낸 다큐멘터리로 유명하며, 순일한 객관에 도달하기 위한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철서구>에선 종으로 횡단하는 기차가 포착된다. 노동자들은 그 기차에 탑승하여 일터로 간다. 그 과정을 포착하는 왕빙은 횡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기차에 올라타 종으로 운전하는 시선을 묵묵히, 도착할 때까지 일말의 컷도 허용하지 않는 순수한 롱테이크로 보존한다. 왕빙의 카메라는 그 대상이 되어본다. 하지만 이는 사물이기에 가능하다. 사물은 카메라가 앞에 있으나 없으나 똑같이 자신의 목적을 반복한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카메라가 앞에 있을 때, 앞에 없을 때 행동이 180도 달라진다. 카메라가 앞에 있을 때는 시선이 개개인의 행동을 뒤바꾼다. 그래서 <철서구>에선 카메라를 최대한 숨긴다. 시네마베리테가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 대상과의 소통을 개의치 않는다면, 다이렉트 시네마가 대상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을 때까지 적응할 시간을 준다면, 왕빙은 두 방법론 모두 다 동의하지 않는지 카메라를 숨겨버린다. 그럼으로써 조금도 이상화되지 않은, 카메라나 감독의 시선에서 잘 보이기를 의도하지 않는, 거칠고도 솔직한 노동자의 초상을 보존한다. 

한편 <미세스 팡>은 조금 다르다. 왕빙은 미세스 팡 앞에 카메라를 적나라하게 들이민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미세스 팡이 중증 치매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앞에 있더라도 자신 앞에 카메라가 있기는 한 건지, 그 카메라는 무슨 용도인지, 자신에게 가해지는 시선이 무엇인지 의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카메라가 없으나 있으나 미세스 팡은 객관성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하지만 여기서 회의가 든다. 그렇다면 카메라가 도달할 수 있는 객관이란 오직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사물' 내지는 무생물처럼 넋이 나가버린, 주체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대상만을 피사체로 삼아 '정물화'로 담아야 한다는 것일까?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들에 한해선 언제나 주관적인, 카메라와 영화감독에게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초상화'만을 담을 수밖에 없는 걸까? 더욱이 윤리적인 문제, 대상이 자신을 촬영하는지도 모르고, 또 피사체가 현재의 촬영을 허가하지도 않았으며, 대리인에 의해서 자신의 촬영 여부가 결정되는 수동성도 지적할 수 있다. 즉 객관에 도달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일·장단 또한 미학적으로 탐구하는 왕빙은 신작에서는 중국의 청년들에게 어떤 카메라를 내비칠까?      


<청춘(봄)>에서 왕빙은 자신의 대표작이자, 본 작품처럼 노동자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철서구>와 유사하게 노동자의 곁에 카메라를 두는데, 이 사실 외에 두 작품은 촬영법에 큰 차이가 있다. <철서구>에서 왕빙의 카메라는 숨겨져 있었다. 왜냐하면 피사체가 카메라를 의식하면 ‘순수한 행동’ 대신 ‘카메라한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왕빙이 도달하고자 하는 순수한 진실에 거짓이 얼룩지며 탁해진다. 사실의 오염을 방지하고자 왕빙은 카메라를 은밀하게 숨겨 놨었고, 노동자와 거리도 유지했다. 이에 노동자는 주로 은밀한 '롱숏' 안에 담겼다. 그러나 본 작품에서 왕빙의 카메라는 아주 적나라하다. 청년 노동자의 '측면'에서 친밀하게 말을 건네거나, 마주보며 '식사'하는 듯한 근거리를 유지한다. 이에 <철서구>와 달리 <청춘(봄)>에서 노동자들은 주로 '미디엄 숏'에 담긴다. 

또 노동자들이 이따금씩 의자에서 엉덩이를 일으켜 이동할 때, 촬영은 '팔로우 숏'과 그들의 발걸음을 반영하는 '핸드 헬드'로 급변한다. 이 또한 카메라를 무기력하게 사물함이나 기차 안에 고정시켜두던 <철서구>의 촬영법과 정반대다. 물론 이러한 연출은 그에게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을 안겨다 준 또 다른 대표작 <미세스 팡>에서도 시도한 바 있으나, 차이라 한다면 <미세스 팡>에서 치매를 앓는 팡 여사는 카메라가 눈앞에 있어도 의식하지 못하니, 피사체의 진실을 위해서 굳이 시선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반면 <청춘(봄)>에서 피사체는 카메라를 분명 의식한다. 대다수는 카메라 앞에서 흉하게 배를 까거나, 침이나 욕설을 내뱉으며 추한 진실을 굳이 아름답게 검열하지 않지만, 어떤 노동자들은 카메라를 의식하며 여성을 대하는 태도를 친절하게 교정하거나, 결혼에 관한 견해를 자체 검열하고, 또 카메라가 자신을 빙빙 따라다니니 '슈퍼스타' 내지는 '영화배우'라 자신을 일컫는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서 왕빙의 태도는 프레더릭 와이즈먼과 유사하다. 물론 그의 ‘결과물’ 자체는 항상 와이즈먼과 흡사했고, 이에 중국의 '다이렉트 시네마'라는 수식이 따라다니기에 적절했다. 그러나 ‘과정’은 와이즈먼과 철저하게 달랐다. 왕빙은 카메라를 극도로 숨기면서 객관적인 진실에 도달한 반면, 와이즈먼은 카메라를 노출할 수밖에 없는 필연을 인정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와이즈먼이 카메라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카메라를 숨기게 될 시, 피사체의 의사와 무관하게 촬영되는 '비윤리성'을 띨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위해서 피사체는 도구로서 착취된다. 왕빙 뿐만 아니라 장이머우 또한 <귀주 이야기>에서 피사체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길거리를 담아내며 리얼리즘 영화를 위해 현실을 착취한 바 있는데, 영화가 현실의 윤리나 도덕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현실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영화가 현실에 해를 끼친다면 그 위선적인 리얼리즘이 과연 무슨 소용일까? 또 카메라를 은닉하기 위한 공간의 제약도 많이 받는다. 왕빙도 마찬가지의 장애물에 부딪힌다. 사물함 등에 카메라를 숨길 수 있었던 <철서구>와 달리, 본 작품에서는 숨길 곳이 마땅치 않아 보인다. 그래서 왕빙은 카메라를 숨기지 않고 윤리를 따르기로 결정하며, 카메라를 숨겨서 도달하고자 하던 '순수한 진실'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카메라에 의한 진실'을 본 작품에선 담아낸다. 

우리는 분명 시선을 무시할 수 없다. 누군가가 언짢은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본다면, 심지어 그 시선이 나를 대신 재현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다면, 우리는 '좋은 평가'를 받고자 시선에 따라 자신을 검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노출된 카메라가 피사체를 쏘아보는 이상, ‘스크린에 걸릴 보기 좋은 모습’을 피사체는 염두에 둘 수밖에 없고, 이런 이유로 적나라한 카메라의 힘은 어마 무시할 것만 같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 카메라의 힘은 생각보다 미약하다. 카메라를 신경 쓰는 노동자는 극소수다. 그 이유는 노동자들이 카메라를 신경 쓸 겨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잘 보여야 할 대상은 카메라가 아니다. 노동자가 시선을 의식해야 할 대상은 임금을 지급하는 사장이자, 그들까지도 지배하는 '자본주의'다. 카메라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이윤을 자본주의가 내어준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카메라를 조금은 의식할지언정, 카메라 때문에 자본주의에 의한 행동을 전격 교정하진 않는다. 왕빙은 카메라가 노출되어 있어도 누군가는 신경 쓰지 않거나, 누군가는 덜 신경 쓰는 모습을 기록하며,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인간을 쏘아보는 시선의 힘을 드러낸다. 노동이 끝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허용한 사적 시간은 너무나 짧다. 그 시간을 왕빙의 영화를 위해서 희생하긴 싫다. 그래서 카메라가 있든 말든 사적 시간에 청년들은 분방하게 군다.  

   

왕빙은 방직공장의 청년 노동자들을 포착한다. 물론 청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장은 중년 남성이요, 노동자들 중에는 중년 여성들도 있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대상은 청년인데, 여가 시간을 제외하고 그들은 대체로 경직되어 있다. 우리는 '청년'이라는 단어를 듣고서, '자유'롭고 '감정'에 솔직하며 끓어오르는 혈기를 사방팔방 표출하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본 작품 속 청년들은 우리의 통념과 정 반대의 모습이다. 대체로 이들의 노동은 '재봉틀'로 좌우되는데, 기계가 자아내는 규칙적인 '소리'와 '운동'이 자유롭고 정력적이어야 마땅할 청춘의 팔과 손을 어색하게 옭아맨다. 특히 원단을 재봉틀에 넣고 꿰매는 청년의 모습이 문득 생경해진다. 아주 신속한 재봉틀의 움직임에 따라 청년들의 손놀림과 고개도 일반적인 인류의 속도보다 몇 배 빨라지는데, 흡사 그 순간만 빠르게 '배속'한 것처럼 '착시'가 발생한다. 하지만 왕빙은 프레임이나 배속을 조금도 조작하지 않았다. 기계에 의해서 낯설어지고 이상해지는 인간의 육체, 그것이 곧 자본주의가 인류에게 가하는 시선의 진실이다.

비록 청년들의 팔과 손은 기계를 따른다 하여도, 그들의 얼굴은 비교적 자유분방하다. 몇몇 청년들은 귀에다가 '이어폰'을 끼며, 비록 ‘눈’은 보기 싫고 지루한 것들을 응시해야 하지만, ‘귀’만은 원하는 것을 듣게 한다. 또 노동자의 행동을 규칙적으로 분절하는 기계의 '박자'를 해치는, 분방한 '대중음악'을 아주 크게 틀어놓는다. 그렇게 자신들이 바라는 플레이 리스트를 외부에서 빌려옴과 동시에, 청년들의 ‘입’은 항상 재잘재잘 기계 및 노동과 무관한 수다를 떤다. 청년들은 일을 하는 와중에 간식 내기를 하거나, 결혼 계획을 공유하는 등 노동과 무관한, 행복했던 과거나 실현하고픈 미래를 가리킨다. 청년들의 몸은 비록 공장과 기계에 묶여 있지만, 그들은 해방되어 자유로워질 날을 꿈꾼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공장에 묶일 수밖에 없는가? 왕빙은 이 질문에 '조명'으로 답한다. 영화 속 공장은 어디로 가든 항상 쨍하다. 항구적으로 켜져 있는 '백열등'이 노동자가 봐야할 것을 비추고, 그들의 근면 여부를 감시한다. 공장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일을 마치고 음식을 사먹으러 간 ‘노점상’도 쨍한 백열등이 밝히고 있다. 즉 ‘노동 현장’은 언제나 밝다. 이와 달리 노점상으로 향하는 길거리는 아주 깜깜하다. 노동자들이 일을 마치고 기숙사로 가는 통로인 ‘복도’ 또한 칠흑 같은데, 야근이나 초과근무가 일상화된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퇴근하면 항상 밤이기 때문이다. 그 어둠 속에서 안 그래도 미미한 불빛은 불완전하게 깜빡거리며 '휴식하는 노동자'를 공장의 노동자와 달리 안정적으로 비추지 않는다. 노동자가 여가를 즐기러 향한 PC방에서도 마찬가지로, 게임을 하러 온 노동자는 지친 노동의 여파로 곤히 잠들어 어둠 속에 파묻힌 반면,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직원에겐 조명이 밝게 켜져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구심이 든다. 어두운 일터가 있을 수도 있고, 밝은 휴게 공간 역시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왕빙은 자신이 <청춘(봄)>에서 설정한 '조명의 법칙'에 어긋나는 장면은 일절 생략하여 보여주지 않는다. 왕빙이 객관적이고도 순수하게 촬영할지언정, 그것을 자르고 이어 붙이는 편집에는 일련의 주관과 판단을 반영할 수 있다. 이렇게 왕빙이 편집으로 만들어낸 조명의 법칙은 근면한 노동자에겐 광명이 비추어 '존재할 수 있는' 반면, 일하지 않는 노동자는 어둠 속에 잠식되어 '존재할 수 없게' 되는 실태를 밝힌다.

여기서 추가로 의문이 샘솟는다. 왜 그들은 공장에서밖에 보일 수 없는가. 분명 노동자들은 업무의 질과 양 모두 다 참혹한 환경에 놓여 있다. 공장 역시 그들의 존재를 앗아가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영화 속 노동자들은 항상 가난에 허덕이기에 탈출할 수 없다. 동료 노동자에게 구걸하며 빚을 지기도 하고, 열악한 임금이 불만족스러우니 다른 동료가 임금을 조금 더 많이 받는다고 하면 바로 질투심이 폭발한다. 노동자들은 사장에게 적절한 임금이나 휴가를 보장해 달라며 항의하지만, 사장은 언제나 이를 묵살하기 일쑤다. 즉 노동의 양과 강도에 비례하지 않는 열악한 대우로 인해 이들은 공장에 묶인다. 왕빙이 포착한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노동자에게 적극 구애하거나, 아니면 여자 친구가 임신을 한 상태다. 반면 구애를 받는 여성 노동자들은 남자들의 조건이 영 못마땅하다. 남성은 빈곤한 부로 결혼할 수 없고, 여성 또한 참혹한 근무 환경을 '상향혼'으로 탈출하는 것이 목표이지만 그런 대상은 눈 씻고 둘러봐도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어느 한 여성은 낙태를 하기 위해서 휴가를 받아야 하는데, 공장이 요청을 받아주지 않으니, 항상 노동자들의 꿈은 유예되고 공장에서 기계처럼 반복 노동하는 모습만 이어질 뿐이다.     


어떻게든 존재하기 위해서 노동 현장에 내몰린 청년들은 사적인 욕망을 억누른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선 자본주의에 더해 부모 세대까지 청년에게 많은 부담을 가한다. 영화에서 '소황제'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것처럼 부모 세대는 자녀들에게 많은 기대를 투영한다. 물론 황제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프롤레타리아 계층일지언정,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너나 할 것 없이 ‘외동’으로서 부모의 많은 비용이 투입된 오늘날 중국의 청년들이다. 청년들은 부모의 욕망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거세한다. 더욱이 이들이 놓인 환경은 한 방을 여럿이서 함께 쓰는 ‘남녀 혼숙 기숙사’다. 동성이어도 충분히 불편할 텐데, 다름을 더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하는 이성들이 제 곁이 북적거린다. 이렇게 총 '삼중의 굴레'에 빠져 억눌린 청년들의 욕구는 거대하게 불어나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서며, 결국 활화산이 폭발하듯 분출된다. 영화 속 청년들이 보여주는 험악하고 무례한 행동은 참아낸 욕구에 비례한다. 욕설이나 침 뱉기, 흡연 등 조금 경박한 수준을 넘어서, '케이크'를 타인의 얼굴에 묻히거나 던지고,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거나, 남자들은 몸싸움을 벌이는 등 자신은 즐거운, 그러나 타인에겐 해를 입히는 행동이 연이어진다. 일탈은 공장 및 기숙사에서 끝나지 않고 중국의 길거리, 곧 사회의 흉흉한 치안과 불결한 환경으로 귀결된다. 즉 왕빙은 중국 청년들의 인내심이 임계치에 달하고 폭발하여 그것이 오늘날의 무질서를 불러왔다고 진단한다. 

혼란스러운 길거리는 영화 내내 한 치도 청결해지지 못하고 항상 더럽다. 왕빙은 그 이유를 편집으로 보여준다. 영화 속 청년 노동자들은 여러 문제와 맞닥뜨린다. 여성 노동자의 임신 중단, 남성 노동자의 결혼, 영화 말미에는 이직 문제 등이 대표적이다. 왕빙은 노동자들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군분투하는 ‘과정’ 일부분은 보여줄지언정, 그것의 ‘결과’는 일절 보여주지 못한다. 인물과 장소는 다를지언정, 똑같은 기계를 사용하고 동일한 업무를 반복하는 '본질은 다르지 않은 공장'을 또다시 잇거나, '원점'으로 되돌아가 노동을 재개하는 ‘도돌이표’와 같은 편집이 3시간 30분가량의 길고긴 러닝타임 속에서 무한하게 반복된다. 그 순환 속에서 노동자들은 잠시 극단적으로 일탈하지만, 결국엔 되돌아온다. 

결말에서 이직을 고민하던 노동자들이 공장을 벗어나 시골로 향한다. 짧은 일탈 동안 낙관적이었고 행복했던 유년기를 ‘회고’한다. 하지만 ‘휴가’이기에 즐거운 순간은 필연적으로 짧고, 언젠가 끝나야만 한다. 또다시 끔찍한 일상과 현재가 이어질 것이다. 왕빙은 노동자들이 ‘바라는 현재’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걸어가기만 하는 장면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길을 걷던 남성 노동자는 자두와 복숭아가 덜 익어서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아마도 그들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없고, 개선된 환경에 속할 수도 없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처한 문제를 거대한 구조가 영영 손 놓고 방치함에 악순환은 끝나지 않고, 사회도 질서를 되찾지 못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을 능욕했거나 패륜을 저지른,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 갇히는 곳은 지옥의 최하층 ‘타르타로스’다. 타르타로스가 악인에게 집행하는 형벌의 특징이라면, 단 한 번만 하더라도 아주 고통스러운 끔찍한 행위를 무한 반복시킨다는 점인데, 왕빙이 기록한 중국 공장의 풍경이 타르타로스와 별 다를 바 없다. 차이가 있다면 공장의 청년 노동자들은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는 점, 오히려 약속을 배반한 중국 내지는 자본주의의 책임을 대신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왕빙은 이 거대한 타르타로스를 얼굴은 다르지만 똑같은 노동과 상황에 처하는 노동자들을 무한하게 이어내며 대신 드러낸다. 초반부의 끔찍한 강렬함이 3시간 35분 동안 반복되다보니 동어반복처럼 지루해지고 무던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왕빙이 의도한 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가운 고통이 무뎌져서 노예를 자처하게 되는 자본주의의 ‘스톡홀름 증후군’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유를 말소하는 자본주의의 획일화를 반영하기 위해 말이다. 그 굴레는 공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억누르고 또 억누른 개인들의 욕구는 거대하게 불어나 공장 바깥, 곧 사회에 커다란 무질서의 행렬을 불러오나니, 이로써 왕빙은 오늘날 중국이 직면한 빈부격차 및 사회 혼란의 이유 또한 진단하고, 자본주의의 악순환을 끊지 못하면 이 또한 타르타로스처럼 무한 반복될 것임을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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