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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03. 2023

아더 하라리, <오노다: 정글에서 보낸 10,000일>

보는 눈, 해석하는 눈

아더 하라리(Arthur Harari), <오노다: 정글에서 보낸 10,000일>

(Onoda: 10000 Nights in the Jungle) - 보는 눈, 해석하는 눈     

“해석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어떤 것, 곧 앞서 가진 것, 이미 본 어떤 것, 곧 앞서 본 것에 근거한다. 해석은 우리가 이미 파악한 어떤 것, 곧 앞서 파악한 것에 근거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1922년 와카야마 카이난 시에서 ‘오노다 히로’라는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7살 때 중국에 있는 무역 회사에 취직했던 것이 그나마 특이한 약력이다. 이윽고 2차 대전이 발발하여 오노다는 1942년에 징병되었고, 이후 1944년에 필리핀 르방 섬으로 보내졌다. 오노다는 필리핀으로 보내질 당시 지휘관에게, “항복하지도 말고 자살하지도 말고 어떻게든 버텨라, 기다리다 보면 일본군이 끝끝내 지원을 갈 것이다”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노다는 그 말을 철저하게 따랐다. 당시 르방 섬의 일본군은 미군과 필리핀군의 합세로 벼랑 끝에 내몰렸기에, 중위였던 오노다는 부하들을 이끌고 산을 올랐다. 정글 속에서 오노다는 절대 항복하지 않았고, 지속해서 게릴라를 일삼았지만 일본은 8월 15일 결국 패전한다. 이윽고 10월이 되자 오노다가 머무는 산 인근까지 패전 전단지가 퍼졌고, 주민들이 산에서 내려오라고 회유했다. 하지만 오노다가 믿는 것은 기다리면 아군이 지원을 올 것이라는 믿음뿐이었기에, 주민들의 목소리는 적군의 함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오노다와 부하들에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병사들은 서서히 오노다의 군대에서 이탈한다. 그래서 1972년이 되자 ‘오노다 군대만의 전쟁’이 이젠 ‘오노다만의 전쟁’으로 전락했다. 그렇게 오노다 혼자만의 전쟁이 계속되던 1974년, 예티를 찾아 세계 일주를 하던 일본인 스즈키 노리오가 르방 섬에 방문한다. 그를 만난 오노다는 왜 자신이 아직 전쟁하고 있는지를 밝힌다. 이후 스즈키는 그의 지휘관을 찾아내 오노다와 만나게 하여, 1974년 3월 9일에야 오노다만의 전쟁은 비로소 패전한다. 하지만 오노다는 패전 이후에도 자신만의 세계, 그가 신봉하는 과거, 그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에게만 갇혀있었으며, 그렇게 자신만의 전쟁을 치르고 자신만의 표상에 빠져 살던 오노다는 2014년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사실을 믿음이, 외부 세계를 표상이 압도할 시, 어떤 충돌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오노다 히로의 사례, 이 기구한 삶을 프랑스의 영화감독 아더 하라리가 영화화한다.      


1981년 파리 태생의 아더 하라리는 프랑스의 배우이자 각본가이며 영화감독이다. 각본가로서 그는 연인이자 동료인 쥐스틴 트리에의 작품에 주로 참여하였으며 <시빌>, <추락의 해부> 등이 대표작이다. 감독으로서는 <다크 인클루젼>으로 장편 데뷔하였다. 그는 창작물에서 매번 객관적인 하나의 실재를 무한하게 분화시키는 ‘주관적인 시선’ 내지는 ‘각자의 무한한 표상’을 탐구한다. <다크 인클루젼>의 소재 다이아몬드에 빛을 투사하면 무궁무진한 스펙트럼이 발생하는데, 본 현상이 한 개인의 시선이자 인생과 같다. 처음에는 평범한 하나의 원석이었지만 연삭기에 의해서 갈려지고, 여러 관계에 의해 정제되어 하나가 여러 모습을 띠게 된다. 

그 여러 모습을 발생시키는 조건 중 하나는 ‘기억’이다. 하라리는 기억의 두 가지 속성을 탐구하는데, 하나는 ‘조작 가능성’이다. 분명 현상이나 사건 자체는 객관적이지만, 그것이 기억으로 남게 되면 점차 각자의 뇌리에서 왜곡·조작되며, 이를 해석하는 각각의 판단도 모두 제각각이다. 그래서 하나의 현상은 각자의 기억 속에서 무수하게 변화한다. 또 기억이 조작되며 과거에 따른 현재 또한 왜곡된다. 또 다른 기억의 특징은 ‘절도 가능성’이다. 우리는 타인의 몸은 훔칠 수 없다. 그러나 타인의 입에서 새어나온 기억만큼은 손쉽게 기억하여 갈취할 수 있고, 흡사 그 기억이 내 것인 것 마냥 행동할 수 있다. <다크 인클루전>과 각본가로 참여한 <시빌> 모두 다 주인공들은 흥미로운 타인의 삶을 훔치거나 제게 투사한다. 이로써 하나의 존재는 허구로도 살고 타인으로도 산다. 

하지만 <다크 인클루젼>에서 피어는 기억, 가족, 도시의 이야기에서 모두 해방된다. <시빌>에서는 객관적으로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는 영화감독 미카를 상정하여, 시빌이 자신의 삶을 냉철하게 마주하게끔 만든다. 이로써 기억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라, 객관적인 하나의 실재로 되돌아가게 한다. 즉 지금 여기에 하나의 육신으로 놓여있는 사람이 결코 하나가 아니고, 또 지금 여기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라리, 그는 이번에도 지금 여기에 놓여있지만 지금 여기에 살지 않는 오노다 히로를 영화화한다.      


하라리는 가장 먼저 인간이 기억에 집착하는 원인을 분석한다. 영화는 1974년에 스즈키가 르방 섬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하라리는 이를 하이앵글 구도의 롱숏에 담아낸다. 이로써 극도로 작아진 피사체들은 잘 안 보인다. 또 본 작품은 선명함과 동시에 인물 바깥의 배경이 흐리게 처리된, 아리송한 미장센이 특징이다. 심지어 아스라한 미장센은 복잡한 정글을 그려내고 있다. 그 속엔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저귀는 해석 불가능한 울음, 많은 것들을 은폐하는 어둠이 자욱하다. 즉 하라리는 연출로써 ‘불명료함’을 부각한다. 심지어 정글은 언뜻 확실해질 것 같으면 금세 현상을 변화시킨다. 겨우 확립한 정보를 부질없게 쓸어가는 폭우가 정글에서 잦다. 그런 와중 간간히 필리핀인을 만난다. 그들은 정글의 불확실성을 해소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인 오노다는 필리핀어를 해석할 수 없다. 

이렇게 영화 속 불명료한 것은 ‘대체로’ 불안이나 위협에 상응한다. 작품 속 정글에선 야생에서 자라나는 어떤 과일이 있다. 아주 맛있는 과육을 지녔지만, 그것의 하얀 속살에는 독이 있어 발라내고 먹어야 한다. 그 정보를 명료하게 인지하면 위협을 피할 수 있으나, 이를 몰랐던 미토 세 쌍둥이는 하얀 속살을 먹은 듯, 과일 나무 아래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필리핀에 고립되기 전에도 마찬가지다. 오노다는 르방 섬에 처음 가자마자 소령에게 교육받은 것을 행동에 쉽게 옮겼지만, 이후 실제로 마주한 전쟁은 너무나도 혼란스럽다. 전쟁의 불확실성은 인간을 혼란과 공포에 빠트린다. 그나마 군인에게 전쟁은 역할이 비교적 명료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직후에 군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서로의 다툼과 혼란은 극심해진다. 또 전쟁 중이라면 군인들이 필리핀인들을 학살한 것에 대해서 일말의 면피가 가능하리.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면 그들은 살해 혐의에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여하간 어느 한 쪽을 믿는다면 결과는 한 방향으로 좁혀지고, 이에 대책을 세울 수 있다. 하지만 전시인지 패전인지 알 길이 없는 상황에서 살인의 여파를 단정할 수 없다. 이렇듯 의심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인간은 두렵고 불안하다. 선명함이나 확신을 갈구한다. 다만 명료한 것은 언제나 사실은 아니다. 만족스러운 믿음이기도 하다.    

  

이런 와중 서서히 명료한 피사체가 드러난다. 스즈키가 군가를 틀었다. 익숙한 멜로디와 독해 가능한 가사를 들은 오노다가 조심스레 접근한다. 영화는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모호한 세상 속에서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확신이 안 서던 오노다는 그제야 확실한 클로즈업처럼 ‘안도감’을 느낀다. 군가는 오노다가 ‘누구’인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자명하게 알려주며 불안을 몰아낸다. 즉 오노다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오직 확실하고도 선명한 기억만을 믿는다. 하지만 그 기억이 현재를 오판하기에 이르렀다. 

영화 초반, 미군이 일본군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풍전등화의 상황 속에서 방치된 병든 군인들이 포착된다. 모호한 운명이 불안한 그들에게 오노다는 폭탄을 건넨다. 미군을 맞닥뜨리면 자살로써 대항하라는 것이다. 자살하라는 지시를 받은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미군을 맞닥뜨림으로써 살거나 죽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점쳐보기보단, 차라리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못 박아서 불안을 해소하고 싶은 심리가 더 컸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에서 하라리는 명료함의 '모순'을 지적한다. 분명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 인간은 명료함을 택하고 불명료함을 거부한다. 그러나 명료함은 삶과의, 불명료함은 죽음과의 절대적인 '동의어'는 아니다. 죽음이 자명하게 결정되어있을 수도 있고, 삶이 아스라하게 펼쳐져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불확실한 것을 싫어하는 인간 심리는 차라리 확정적인 죽음을 택하고, 삶을 멀리하며 극도로 아둔해진다.     


인간이 세상에 가득 들어찬 무지와 혼란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인간을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추락시키기 때문이다. 본래 오노다는 파일럿을 꿈꿨으나 전쟁이 이를 좌절시켰다. 절망한 그가 롱숏에 담긴다. 오노다의 자아가 보잘 것 없다고 능멸하는 세계는 아주 거대하고, 그 속에서 유린당하는 인간은 작고 볼품없다. 이런 그에게 요시미 소령이 다가온다. 요시미는 파일럿이 될 순 없을지언정, 군인으로서 오노다는 가능하지 않겠냐고 설득한다. 즉 세상이 오노다를 아무 의미 없게 만들 때, 군인이야 말로 오노다를 유의미하게 꾸며주는 업이었다. 이런 그가 또 다시 자신을 앗아가는 세상 속에 떨어졌나니, 그는 자신을 특별하게 유지하고자 군인임을, 그 군인의 당위성을 만들어주는 전쟁과 기억을 고집스레 집착한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해석이란 우리가 앞서 보고 가진 것, 이미 파악한 것에 따른 전제 있는 이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해석은 더하는 행위가 아니라, 아는 것을 확인하는 행위다. 이러한 해석의 기반이 되는 기억이 오노다의 '시각'을 규정한다. 소령은 오노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외부에서 거짓이라거나 배신이라고 운운하는 것이 진실이자 명예”라고, 이를 따른다면 사실이라고 전해지는 것은 거짓이자 허위다. 이후 1945년이 되었고 외부에선 패전 소식이 들리고 보인다. 객관적으로는 분명 전쟁이 끝난 풍경이다. 그러나 오노다는 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기억에 따라 보이는 것을 거꾸로 곡해한다.

전쟁이 끝나서 식량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그들은 필리핀 민간인의 하얀 소를 죽였다. 그 사실을 알아챈 필리핀 민병대가 그들을 향해 총을 쏜다. 순수하게 보이는 것은 총을 든 필리핀인들이다. 이를 두고 전쟁이 끝난 것이라 생각하는 시마다는 전쟁 없이도 민병대는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오노다는 전쟁 중이기에 그들이 총을 든 것이라 해석한다. 전시로 판단하는 오노다와 다른 병사들은 몸을 은폐하는 반면, 종전이라 확신하는 시마다는 몸을 일으킨다. 하지만 전쟁은 끝났어도 민병대는 그들을 적대적으로 여기기에 시마다는 죽임을 당한다. 머리에 총을 맞는 시마다, 그는 이후 시력을 잃는다. 더 이상 볼 수 없다. 시력을 잃기 전에 그는 항상 다시 보고 싶은 가족들이 담긴 ‘사진’을 응시했다. 즉 우리가 보는 것은 객관적인 외부가 아니라 나의 바람이요, 그것이 삶을 지탱한다. 그들만의 전쟁을 계속하는 군인들은 르방 섬의 지도를 다시 그린다. 일본인들의 경험에 맞춰 일본식으로 지명을 재정립하고, 또 남성들이 성적인 바람이 투영된 여성의 유방을 산에 빗댄다. 

오노다와 코즈카에게 종전 선언을 알리러 일본 시민들이 파견되었다. 거기에는 오노다의 가족도 껴있다. 하지만 너무나 멀리 있다. 망원경으로 확대해 봐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불명료하다. 또 최근 사진 속 아버지는 양복을 입고 있다. 그런데 오노다의 머릿속에 있는 아버지는 언제나 전통 의상을 즐겨 입었다. 더욱이 징병될 당시 아버지는 굴욕적인 상황에서 할복을 명령했는데, 지금의 아버지가 돌아오라고 간청하는 것도 모순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오노다는 기억에 비추어 현재를 거짓이라 단언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남긴 하이쿠를 해석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의도와 다르게 읽는다. 오노다는 전쟁이 지속되길 바라는 자신의 시선을 투영한다. 또 일본과 미국의 변화한 외교 관계, 종전 이후의 일본 문화, 달 착륙과 같은 시대의 변화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 즉 그는 외부의 사실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자신만 아는 기억과 믿음이다. 

오노다를 이렇게 만든 요시미 소령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노다와의 첫 만남에서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눈으로 요시미의 주장을 순수하게 흡수하는 군인들과 정 반대다. 선글라스를 쓴 그가 세상을 주관적으로 인지한다는 사실은 일상 속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오노다가 패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회피하거나, 현재를 전달하는 신문이 아니라 과거의 고전만을 취합해서 읽거나, 그마저도 자신에게 불리한 역사는 부정해서 흡수하니 말이다.      


이러한 오노다의 기억을 타인이 대신 만들어준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이로써 기억뿐만 아니라, 그 기억을 제공하는 타인한테도 그는 이중으로 의존한다. 소령에게 소집된 이후의 오노다는 아버지를 만난다. 그 당시 아버지는 클로즈업되는 반면, 오노다는 웨이스트 숏 수준에 그친다. 오노다에게 아버지는 가깝고, 그 자신은 멀다. 이윽고 아버지가 입을 떼기 시작하고, 대화의 끄트머리에 칼을 건네며 패전할 시 할복하라고 명령한다. 지시를 받들고 칼을 든 오노다는 가까워진다. 이렇듯 소령, 아버지에 의해서 오노다는 가까워진다. 더 정확히는 아버지와 소령, 그들에게 명령을 듣던 과거의 오노다와 가까워지고, 정작 1974년의 오노다 자신에게선 멀어진다. 즉 나를 보존하기 위한 기억이 되레 현재의 나를 소외시킨다. 영화의 구성이 1974년에서 1944년으로 향하여 거슬러 올라오는 플래시 포워드 와중에도 오노다의 플래시백이 침투되는 것처럼, 현재의 늙은 오노다가 해변에 놓인 젊은 오노다를 직면하며 시선이 과거에 갇혀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타인에게 의존하는 이유는 혼자서는 나약하고 외롭기 때문이다. 그 결핍에 소령과 전쟁이 파고들어 보완하는 척 위장한다. 소령은 오노다에게 의존의 대상이다. 그는 군인들에게 자신이 가르쳐준 노래의 가사를 바꿔 불러도 좋다고 말한다. 그들만의 삶을 투영하여 말이다. 하지만 소령의 근본적인 틀, 곡조는 바꿔선 안 된다. 또 그들만의 노래를 부르라는 것도 소령의 명령이다. 오노다는 소령의 지시를 거스르지 않는다. 그래서 소령이 찾아오지 않았으니 종전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졌다. 언뜻 보기에 오노다는 부하들을 이끄는 능동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부하들은 제 감정에 따라 군대를 이탈하여 일본으로 돌아갈 거라 말한다. 반면 오노다는 스즈키와 만난 그 순간까지 소령이 찾아와주길 간절히 기다린다. 더욱이 할복하라는 아버지와 달리, 살아서 기다리면 구해줄 것이라는 소령의 발화는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기에도 충분했다. 

이는 오노다만 겪는 현상은 아니다. 무리를 이탈한 아카츠를 오노다가 구해줌에, 아카츠는 다시 오노다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또 이녜스를 태풍에서 구해주자, 그녀는 코즈카가 만지기 전까지는 그들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일어로 어떤 말을 떠들든 말이다. 영화 중반부에 유일하게 오노다 곁에 남은 병사는 코즈카다. 오노다는 패전이라 말하는 라디오, 신문 등에 대해 매우 그럴듯한 해석을 도출하며 코즈카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코즈카가 흔들린다. 그들의 처소에 이녜스가 찾아오고, 이후 그녀가 사망하여 사라지기 때문이다. 볼 수 있던 것이 보이지 않자, 또 바라던 여성이 사라지자 코즈카는 오노다와 자신의 상황에 불만을 품는다. 즉 타인을 불신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나 자신과 현재, 현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즉 우리는 순수하게 봐야한다. 이를 증명하는 이는 이녜스와 스즈키다. ‘백치’ 여인 이녜스는 오노다와 코즈카에 대한 선제된 앎이 없다. 그래서 이들을 순수하게 인식한다. 태풍 때문에 그들이 거주하는 산까지 도망쳐왔다. 처음에는 그들이 위협적이었지만, 그녀를 거둬줌에 이윽고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꾼다. 하지만 이후 코즈카가 태도를 돌변해 그녀의 살갗을 어루만진다. 이녜스는 자신에게 객관적으로 수용된 것을 토대로 위협을 감지한다. 이후 코즈카를 살해하려던 그녀는 역으로 죽임 당한다. 그들이 그녀를 진정 사랑하거나 아끼지 않았다는 것은 참이다. 또 알 수 없는 외국어와 불가해한 자연 앞에서 명료한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보던 병사들과 달리, 여행을 즐기는 스즈키는 외부와 타자들에게 우호적이다. 

교조적인 시선을 변화하기 위해선 다르게, 유연하게 봐야 한다. 코즈카가 살해되기 직전에, 계곡에서 모순되는 두 개의 물줄기가 병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목도한다. 이처럼 과거를 기준으로 현재에 모순되는 오노다의 아버지, 전쟁 당시의 동아시아와 현재의 동아시아가 뇌리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이렇게 다르게 바라볼 때 타자의 진실도 드러난다. 스즈키가 오노다를 편견 없이 바라봐주던 당시, 흡사 그가 오노다를 비추듯 빛이 화사했다. 밤이라 할지라도 오노다는 서슴없이 자연스러운 진실을 드러낸다. 하지만 스즈키가 소령을 찾기 위해 섬을 떠나자, 섬에는 다시 어둠이 닥쳐온다. 즉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상대도 규정된다. 소령과 아버지처럼 시선으로 규정할 것인가, 스즈키처럼 시선으로 자애롭게 보듬을 것인가. 

끝끝내 오노다도 순진하게 현재와 자신을 인식하는 눈을 되찾는다. 술과 담배가 그의 몸에 침투하자 그가 어떤 상황인지 드러난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기약 없는 기다림이나 르방 섬에서의 삶이 아니라, 소령의 방문임이 절실해진다. 이후 그는 소령에 의해 전역을 명령받고, 무겁고 탄탄한 대지에서 발을 떼어 헬리콥터에 몸을 싣는다. 중력에 붙잡힌 무거운 대지는 기억과 타인에게 귀속된 수동적 존재와도 같고, 반면 이로부터 해방된 하늘이야 말로 현재의 자유라 하겠다. 천공을 비행하는 오노다는 비로소 자유롭다. 드디어 플래시 포워드도, 플래시백도 끝났다. 현재로 진입한다.      


이렇게 영화는 과거의 특정한 순간에 갇혀있는 오노다라는 인물을 연구한다. 그가 과거에 갇힌 이유는, 그의 결핍에 파고든 기억이 크나큰 만족감과 소속감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오묘한 디졸브가 적극 사용되어 낮과 밤의 산, 오노다의 미묘한 표정이 계속 겹쳐지는 것처럼, 우리가 처한 현재의 환경은 매 순간 변화하며, 이로써 결핍도 매번 제각각이다. 이렇게 세상은 줄곧 뒤바뀌는데,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방식은 바뀌기 이전 상태에 놓여있어 모순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어떤 기억으로 특정 순간의 결핍을 해결했다고 한들, 그 상태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나의 확신을 의심하고, 현재에 충실하고자 노력해야 할지다. 본다는 것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스즈키가 촬영한 사진처럼 객관적인 바라봄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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