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에 흔들리지 않는 순수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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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수세기 동안 무슬림의 양심의 선두에서 사회 정의, 평등, 관용과 자비 개념을 지켜 왔다. 무슬림이 언제나 이러한 이상에 맞춰 산 것은 아니었으며, 종종 정치적·사회적으로 제도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것을 달성하려는 투쟁은 수세기 동안 이슬람의 영성에서 나왔다.” -카렌 암스트롱-
‘이맘’은 무슬림 종교 지도자로서, 코란에 숨겨진 의미를 밝혀내는 사람이다. 그 작업은 단순 독해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신비 체험을 겪으며 비가시적인 내면세계로 들어가 절대자의 진정한 뜻을 헤아려야만 한다. 그런 이맘만이 신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존재로서, 신과 영접하고 싶어 하는 무슬림들을 인도할 수 있다. 신과 코란의 대리인으로서 이맘은 무슬림 공동체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갖는다. 그러나 이맘은 영원하지 않다. 그들 또한 유한한 육체를 타고난 인간이기에 죽음을 거스르지 못한다. 그래서 이맘들은 자신이 밝힌 코란의 신성한 의미를 전승할 수 있는 계승자를 지목한다. 이맘의 후계자 지명은 '나스'라는 단어로 불리는데, 이맘에 필적하진 않지만 이맘만큼 뛰어난 지성과 신념을 가진 무슬림이 나스를 받는다. <보이 프롬 헤븐>은 이맘의 나스를 상세하게 비추는 영화다. 과연 이맘은 적법한 나스를 집행하는가, 아니면 코란이 아닌 제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나스를 더럽히는가.
이를 연출하는 1972년 스톡홀름 태생의 타릭 살레는 스웨덴의 영화감독이다. 스웨덴인 어머니와 이집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양자의 영향을 고루 받은 영화를 연출한다. 이란 테헤란에서 태어나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알리 압바시’, 우르과이인 아버지와 코스타리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러시아, 코스타리카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스웨덴에서 활동 중인 ‘나탈리에 알바레즈 미에센’ 등과 함께 묶일 수 있는 스웨덴 감독이며, 이란에서 노르웨이로 이민 온 가정에서 자란 아미르라는 코미디언을 다룬 크리스토퍼 보르글리의 <드리브>와 같은 작업과도 연관할 수 있다. 즉 북유럽에서 백인의 시선이 아닌, 다른 민족의 시선으로 영화를 연출하는 물결에 일조하는 시네아스트다.
특정 매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작업을 행하는 살레의 영화는 매우 자유분방하다. 장편 데뷔작 <메트로피아>에서는 ‘컷 아웃 애니메이션’을 선보였다. 평평한 2차원 배경 위에, 3차원에서 본을 따온 배우들의 이목구비, 건물 등을 옮겨온다. 이로써 납작하던 2차원 애니메이션은 툭 튀어나온 이질감을 풍기는데, 그 형식이 영화의 전체주의와 연관하여 '개인성', '타자', '의심'에 상응한다. <메트로피아>에서 살레는 제 눈에 비친 유럽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묘사한다. 지하철 기술이 진보하여 유럽 전역을 어디로든 쉽게 다닐 수 있지만, 교통수단은 오직 지하철만 허용되어 그것 외의 가능성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기후 위기로 계절은 사라져 흐릿하고 음울한 잿빛 날씨가 이어지며, 빅브라더는 TV를 이용해 사람들을 감시하고 샴푸를 이용해 사람들의 머리에 칩을 심어 그들을 세뇌·조종한다. 이것이 살레가 느끼는, 타자와 이민자들의 개성이나 이질성을 말소하는 '하얀 원리'로 획일화된 유럽이다. 그러나 살레는 빅브라더를 파괴하여 진정 자유로운 시대로의 이행, 사계절의 회복을, 빅브라더와 국민 간의 수직적이고도 획일화된 연결이 아니라, 개개인간의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연대를 강조한다.
근작 <더 나일 힐튼 인시던트>에서는 부계에 관심을 갖는다. 살레는 이집트라는 국가를 이루는 종교, 사법 체계, 경제계 등이 가부장적이며 부패했다고 진단한다. 경찰은 뇌물을 받고, 대기업 CEO들은 범죄 행위에서 자유로우며, 정치인들의 권위는 개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사용된다. 그래서 범죄현장과 일반적인 일상은 별 차이가 없다. 오히려 만연한 부패를 방조하는 법에 의해서 일상이 범죄현장으로 전락하고, 정의를 바로잡을 진실은 내내 은닉되고 사망하며 불태워진다. 남성 우월적인 현실에서 그들의 악행을 몸으로 증명하는 여성들은 피해자, 절박한 목격자, 인질로 전락하나, 이를 폭로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살레는 경찰의 본령을 회복하려는 누리와 아랍의 봄을 유비한다. 설령 그 시도가 좌초되더라도 소수 권력자 남성에게 짓밟힌 만인의 삶과 진실의 물결을 다시 회복하길 기원한다. 이러한 살레가 다시 부계를 탐구하는 영화로 돌아온다. 과연 <보이 프롬 헤븐>에서의 종교는 <더 나일 힐튼 인시던트>의 구조와 어떤 유사성 혹은 차이점을 보여줄까. 유사하다면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는가?
영화는 몹시도 흔들린다. 카메라는 스테디캠에 안정적으로 매달려있지 아니하고, 불완전한 손에 붙들려서 ‘핸드 헬드’로 덜덜 떨고 있기 때문이다. 본 작품에선 코란의 '정신'에 따라 나스를 집행해야 하는 와중, 그 코란을 읽고 쥐는 손, 곧 '육체'와의 대립이 부각된다. 그래서 육체, 곧 물리적인 떨림이 느껴지는 핸드 헬드는 나스를 방해하는 무력을 반영한다. 육체는 관념으로 가득 찬 '이데아' 내지는 '천상'이 아니라 물질로, 이로써 물리로 이어지는 '지상'에 얽매여있다. 살레는 핸드 헬드를 이용하여 주인공 아담(타우픽 바롬)의 고향 만잘라 호수의 '물살'과 '파도', 나무를 흔들리게 만드는 '바람' 등을 포착한다. 손과 더불어 파도와 바람에 의해서 카메라가 흔들린다는 듯, 이후 카이로로 향했을 때 아담은 무수한 신학생들로 빼곡한 알-아자하라를 헤집고 들어간다. 서로 부딪치고 밀어내며 발생하는 흔들림 또한 핸드 헬드로 반영하여, 현장 바깥의 감상자가 정신을 방해하는 힘의 영향을 가늠해볼 수 있다.
물리력 내지는 물질성은 촬영뿐만 아니라 편집에도 반영된다. 영화 초반의 전개는 아주 빨라서 정신이 사나울 정도다. 아담이 알-아자하르에 합격하고, 이후 카이로에 입성했더니 대이맘이 곧바로 사망한다. 또 지조(메흐디 데흐비)가 죽고, 네그엠(마크람 코우리)이 거짓 자백으로 자진 체포되며, 아담이 이브라힘(페레스 파레스)의 끄나풀이 되는 사건들이, 주인공이나 감상자가 생각할 틈을 안 주고 쉴 새 없이 몰아친다. 육체를 좌우하는 여러 사건들이 방어 및 판단할 겨를도 안 주고 휘몰아치는 가운데서, 과연 정신은 신념과 사명을 올곧게 유지할 수 있을까?
즉 물질이 나스를 방해하는 첫 번째 장애물이다. 아담은 어부로서 일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코란을 독실하게 공부하여, 천상의 원리를 배우고 이를 지상에 적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육체가 없는 관념의 세계인 천상과 달리, 지상은 육체로써 참여하는 세계다. 천상의 권력자가 지성의 정점에 도달한 절대자라면, 지상의 권력자인 대통령의 힘은 사크란 장군(모하메드 바크리), 곧 '무력'이 보장한다. 그 밑에서 지상의 원리를 따르는 국가정보원의 이브라힘은 아담을 회유하여 정치권의 끄나풀로 삼는다. 이브라힘은 아담에게 그의 아버지의 병마를 치료해주겠다며 유혹한다. 유한한 물질로 가득 찬 지상에선 다들 죽음이 두렵다. 아담 또한 영화 후반, 존경하는 이맘 네그엠에게 죽음이 두렵다고, 어찌하면 신념을 위해 죽음이라는 공포를 이겨낼 수 있냐고 질문한다. 또 솔리만(셰르완 하지)은 이브라힘이 살해 협박을 하자 맞서기는커녕, 신념을 꺾고 바로 자퇴 후 사라진다.
부정적인 힘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물리력 때문에도 신념은 흔들린다. 지조는 살해당하기 이전, 아담에게 카이로의 '시장'과 '클럽'을 구경시켜 준다. 시장에서 구매할 수 있는 갖가지 달콤한 사물들, 내 몸을 즐겁게 해주는 클럽의 감각 때문에 지조는 이브라힘과 공모한 것이다. 이맘 두라니(람지 초우카이르)가 타락한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다. 두라니는 아담에게 '맛있는 햄버거'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고, 또 남근의 '쾌락'에 잠식되어 신앙을 저버렸다.
즉 물리로 가득 찬 지상은 정신의 여로를 방해한다. 살레가 하이 앵글 구도의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한 구불구불 미로 같은 카이로, 아담과 네그엠이 갇힌 폐쇄적인 교도소가 정신이 가야할 곳을 방해하는 물질적인 공간의 전형이다. 탁 트여서 정신이 원하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알-아자하르와 딴판이다. 그래서 위대하고 현명한 이맘 네그엠은 시각장애인이다. 시력을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눈을 '감거나' '선글라스'를 이용하여 시야를 더 어둡게 차단한다. 자신의 육체에 미치는 모든 물리적 파장을 차단해야지만 코란의 관념만을 순수하게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물리적 파장을 받아들이면 네그엠이 인정할 정도로 현명한 아담마저 휘둘리니 말이다.
그 거대한 힘을 구사하는 전체주의가 신념을 방해하는 두 번째 장벽이다. 만잘라에선 아버지를 위해, 카이로에선 대통령에게 전체가 희생해야 하나니, 살레는 이 또한 연출에 반영한다. 영화는 클로즈업과 롱숏을 교차한다. 클로즈업으로는 주로 아담 개인의 얼굴을 담고, 반면 롱숏에선 그 개인이 속한 '건물', 그 건물이 속한 거대한 '세계'가 주인공인 양 촬영된다. 롱숏에 담긴 아담은 막연하고도 당연하게 '어부'가 된다. 이브라힘이 아담의 고향이 만잘라인 것을 확인하고, 알-아자하르에 오기 전에는 어부였을 거라 지레짐작하는 것처럼, 개인은 세계라는 전체를 위해 충성한다. 아주 거대한 세계가 아니더라도 아담은 아버지가 구성하는 집 안에 놓인다.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아담은 몰래 '공부'하거나, 알-아자하르에서 보내온 '합격 편지'를 읽는다. 그러나 아버지에 의한 롱숏에선 ‘집단’으로 '체벌'을 받는다. 분명 흡연은 둘째가 저지른 잘못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막내와 첫째도 똑같이 혼낸다. 개인은 없다. 개인들은 서로를 위해서, 그 서로를 지배하는 권력자를 따라 전체로서 행동해야 한다. 즉 전체를 위해 작동하는 롱숏과 개인을 담아내는 클로즈업이 교차한다. 카이로에 간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카이로는 정치적 세계/종교적 세계가 나뉘고, 종교적 세계 내부에서도 순수한 이맘 네그엠/무슬림 원리주의자 두라니/정치권의 끄나풀 오미르의 분파가 각기 나뉜다. 이 중 네그엠의 강의는 클로즈업되는 반면, 오미르가 대이맘으로 선출된 당시 널따란 카이로가 익스트림 롱숏으로 웅장하게 포착된다. 그 카이로를 지배하는 대통령의 손아귀 아래서 종교적 세계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 롱숏 내에서 개인은 점차 희미해진다. 이브라힘은 상사 소브히(유네스 메다트)의 지조 살해에 분노하며, 이후 아담을 팽하려는 전략에 반항한다. 즉 국가정보원으로서 사유하지 아니하고, 개인의 인간성을 따른다. 아담을 몰래 빼돌린 이브라힘은 소브히에겐 그가 실종되었다고 보고하며, 아담 대신 '라에드'를 언급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탄로 나자, 그는 국가정보원에 불려간다. 이 과정에서 본래 이브라힘은 카메라 가까이 있었다. 미디엄숏 수준이었다. 그런데 국가정보요원에게 다가가니 카메라는 그에게서 멀어진다. 풀숏을 넘어서 롱숏 수준으로 희미해진다. 이후 국가정보원을 포착하는 롱숏의 일부에 이브라힘은 편입된다. 그 롱숏은 무수한 사람들을 아우른다.
그들을 아우르는 소수의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해 전체주의는 지탱된다. 아담의 아버지는 세 형제 모두 다 자기 말을 고분고분 따랐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담은 알-아자하르에 합격했을 때 불안에 떤다. 아버지가 바라는 일이 아니라, 어머니가 바라는 장래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알라의 뜻'이라며 아담을 축하하지만, 아내가 살아서 아담을 알-아자하르에 가도록 설득했다면 가장의 체면을 구겼다며 다른 반응을 보였을지 모른다. 가장, 권력자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전체를 마음대로 부리기 때문이다. 사크란 장군→소브히→이브라힘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지시는 막연히 수용해야만 한다. 그 지시는 항상 상부에 좋다. 사크란 장군 위에 있는 대통령의 이익을 위해서, 권력자들은 제게 좋은 것을 가져다달라고 전체한테 지시한다. 이브라힘은 아담에게 '정보'를, 두라니는 아담에게 '심부름'을 시키며 말이다. 이는 개인이 바라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목숨을 위협 당함에 강제로 해야만 한다. 권력자에게 더는 쓸모가 없거나, 전체에 속하는 것을 거부하면 개인들은 팽 당한다. 살해당하지 않고자 개인은 거짓을 자처한다. 두라니는 여성을 소유하여 쾌락을 누리고 사생아를 낳은 진실을 거짓말로 은폐하여 쾌락만을 좇는다. 즉 권력자의 쾌락을 위해서 롱숏에 참여한 전체가 희생된다.
살레는 그 희생을 강렬한 색채 대비로 보여준다. 지조가 살해될 때, 그는 신학생들이 입는 새하얀 의복을 입었었다. 당시 그는 첩보 행위에 회의감을 느껴 회개를 시도했다. 순백의 의상을 입은 그는 순수하고도 청빈한, 티끌 없는 관념의 세계의 회귀를 갈망했다. 그러나 그를 죽인 정보원의 살인청부업자들은 '검은' 옷을 입고 있다. 모든 원색이 뒤섞여 혼탁해진 ‘끝’의 색채로서 검정이 하양을 살해한다. 이후 검은 집단은 지조의 사인을 살해가 아니라 '사고'로 위장한다. 보이는 것을 안 보이게 만드는 검정은 진실을 은폐한다. 네그엠이 정보원의 양심을 자극하고자, 또 서로가 쾌락을 위해서 착취하는 악순환을 막기 위해 거짓 자백하며 출두하자, 아담이나 지조에게 누명을 씌워 또 다시 검정으로 진실을 혼탁하게 덮는다. 알-아자하르 내의 원리주의자 집단 또한 색채가 혼탁하다. 즉 소수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서 다수의 진실을 훼손하고 은닉함에 세상은 거무튀튀하고 흉흉하다. 그 검정색이 가리키는 오늘날 원리주의의 득세와 무슬림 세계의 타락은 물질적 탐욕과 전체주의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살레는 낙담하지 않는다. 라에드는 이브라힘과 솔리맘 사이의 알력 다툼 속에서 희생되어 자퇴하였고, 자퇴 이후엔 소브히의 계략에 휘말릴 위기에 처한다. 그는 손톱이 뽑히는 고문과 가족을 소환한 굴욕에 처한다. 그러나 라에드는 그 모든 물리적 영향에 굴복하지 않는다. 정보원이 원하는 거짓 자백이 아니라, 그 사실에 모른다는 자신의 진실을 유지한다. 이브라힘도 그렇다. 소브히가 그의 위치와 행동을 결정한다. 이젠 아담이나 네그엠의 목을 칼로 겨누라며 말이다. 그러나 이브라힘은 사크란 장군을 불러서 제 신념을 당당하게 말한다. 소브히에 의해서 롱숏에 참여하던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개인으로서 좁혀진다.
아담 역시 정신을 지향한다. 대이맘 선출 투표가 열릴 당시, 정치에 굴복당한 평의회장은 지상의 구도인 ‘아이 레벨 뷰’로 포착되었다. 그러나 이와 교차되는, 지상을 걸은 발을 ‘씻는’ 아담은 ‘하이 앵글 구도’로 포착되었다가, 이후 세속적인 오미르가 선출된 이후 아이 레벨 뷰로 내려온다. 천상의 구도로 포착되어, 천상에서 온 소년임이 형식으로 암시되는 아담은 천상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맘들이 강의를 하고, 다수의 무슬림들은 '청자'인 것이 강제되는 평의회장 롱숏에서 아담의 얼굴은 개인으로서 클로즈업된다. 클로즈업된 아담은 듣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되어 두라니의 부패를 폭로한다. 즉 살레는 전체주의에 균열을 내는 개인의 저력을 클로즈업으로 긍정한다.
결말에서 아담은 네그엠을 설득한다. 장군과 요원들은 이 둘을 감시 카메라로 쏘아본다. 카메라는 둘이 머무는 '공간'을 포착한다. 이후 네그엠 앞에서 아담이 진리를 깨우치며 그를 감동시킨다. 아담에게 감회된 네그엠의 얼굴이 롱숏에서 '클로즈업'으로 좁혀온다. 그들을 가두는 공간의 물질이 아니라, 신앙을 깨우친 이들의 관념을 본다. 이후 네그엠은 눈꺼풀을 연다. 물론 그의 하얀 눈동자는 여전히 무언가를 볼 수 없다. 하지만 볼 수 없더라도 네그엠은 지금껏 유혹으로 가득한 속세를 향해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진리가 현현했나니, 이제 눈을 떠서 봐도 좋다!
이후 네그엠은 아담이 더는 알-아자하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에 소년은 만잘라로 돌아온다. 거기서 다시 가족의 일부이자, 엄마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존재가 되어, 롱숏으로 포착되나 싶다. 그런데 귀환 이후의 롱숏은 느낌이 다르다. 그는 이제 어부이자 식구임과 동시에 깨우친 현인이다. 그의 스승 네그엠이 마르크스를 인용하듯, 자신 너머 상대의 사정을 향해 시야를 확장할 수 있다. 그래서 전체로서 롱숏이 아니라, 시야가 확장된 롱숏으로의 전환으로, 앞선 롱숏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롱숏에서 아담은 자유롭다. 물질적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관념을 추구하니 말이다.
그 깨우친 자의 이름은 '첫 번째 선지자'를 의미하는 아담이다. 지금껏 무수한 사람들이 거부하지 못했던 속세, 눈을 감아야만 거부할 수 있었던 속세, 그러나 아담은 눈을 뜨고도 속세의 유혹을 물리친 첫 번째 현인이 되었다. 또 코란에서 선지자들을 '연결'하는 인물인 이브라힘 또한 아담 살해를 어떻게든 막아 천국에서 온 소년을 지상과 이어내는 사명을 완수한다. 이렇게 거세게 흔들리는 핸드 헬드 속에서 정신적인 평정을, 롱숏 가운데서 제 신념을 클로즈업을 하며 본래의 '이름'을 회복할 때, 이맘은 코란을 따라 무슬림을 인도하고, 원리주의와 당파성으로 얼룩진 세계는 평화를 찾으리라. 모계와 연결된 백인 사회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던 살레, 하지만 전체주의는 모계에만 있지 않다. 부계인 아랍 세계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전체주의에 의한 롱숏의 전환을 양쪽 모두에서 간절히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