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빈 봉씨 “저도 사람입니다”
세종의 아들이었던 세자 향(훗날 문종)은 어지간히 덕이 없었던 모양인지 첫번째와 두번째 결혼은 모두 세자빈 폐위로 끝났다.세자 시절 문종의 세자빈 폐위 사건 이후 후궁 중에서 맞이한 새 부인도 훗날 단종이 되는 아들을 낳고 일찍 죽음을 맞이한 까닭에
문종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재위기간 왕비가 없었던 유일한 임금이다.
세자 향의 첫 아내 김씨는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세자의 마음을 돌리려고 각종 주술에 매달리다 시기질투를 이유로 폐위됐다.
아버지 세종은 세자의 두번째 아내 찾기에 외모까지 큰 비중을 두면서 아들의 마음에 들만한 며느릿감을 찾기에 열을 올렸다.
이렇게 간택된 두번째 아내 봉씨였으나 성격 차이로 금슬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봉씨는 자신의 처소를 찾지 않는 세자를 원망하다
이내 궁녀 소쌍과 동성애 관계를 시작했다. 이들의 관계는 내명부에 공공연히 알려졌고 다른 궁녀까지 가담했다.
두 궁녀가 세자빈 봉씨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소리를 듣고
세자는 이들의 동성애 관계를 알아차리고 아버지께 고했다.
시아버지 세종은 그간 봉씨가 궁궐에서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고 정숙한 생활을 위한 공부를 게을리한것, 상상임신을 했다고 거짓을 고한 것들은 넘어갔으나 동성애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봉씨는 왕과 왕비 앞에서 당당히 말했다고 전해진다.
본인도 사람이고 욕구와 욕망이 있다, 궁 안의 여자들은 승은을 입기만을 기다리며 살다가 지치는 존재이며
그 와중에 자신들끼리 사랑에 눈을 떴으니 본인들 탓만은 아니라는 요지다.
폐위된 봉씨가 사가로 돌아가자 아버지는 봉씨에게 “다음 생에는 남자로 태어나라”고 말한 뒤
직접 목을 졸라 딸을 죽이고 본인도 자결했다.
조선 초기 역사에서 세자빈이 내시와 간통한 사건이 있긴 했지만
동성애 사건이 수면위로 떠오른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다.
이는 성적지향이라기보다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 발현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봉씨는 현대 사회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요즘 사람이나 할법한 말을 왕 앞에서 당당히 쏟아냈다.
자신은 선택받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고
욕구와 욕망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폐위된 후에도 봉씨는 아버지에게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고했다고 한다.
역사서들은 봉씨를 방만하고 행실이 바르지 않으며 성욕이 과해 남편을 부담스럽게 한 존재라고 기술하고 있다.
열명이 넘는 처첩을 거느리고 수십명의 후사를 본 왕에게는 한번도 그런 평가를 내린적이 없으면서 말이다.
왕, 왕세자만이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도록 나머지 모든 여성들이 대기하고 있는 상태, 심지어 궁 안의 남자 시종들은 거세까지 해버린 상태가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