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뮤지션 챗 베이커를 연기한 에단 호크
푸르죽죽하다, 노르스름하다. 색채어에 관한 한 한국어의 다채로운 표현 못지 않게
영어에도 이런 표현들이 있다 접두사 'ish'를 붙여서 '무슨무슨 색깔스러운, 느낌의'라는 표현을 만들수도 있고 개별 단어들도 있다.
영어는 기분이 '파랗다', 어떤 감정이 '노랗다' 같은 표현이 있다.
블루가 아마 가장 유명한 예일 것이다.
그 사람은 블루 모드라는건 우울하다는 얘기다
회색조나 검정이 더 어두워보이지만
채도가 낮은 칙칙한 푸르스름한 색상이 우울함을 나타낸다는 말도 꽤 일리있어 보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영어권에서 질투를 나타내는 색은 노랑이다.
그냥 블루라고만 해도 기분이 처지는데
파란색이려고 태어났다/우울하려고 태어났다는 표현을 보면 가슴이 턱 막힌다
내가 최근에 본 영화 제목이자 동명의 재즈곡. 챗 베이커의 born to be blue이야기다.
백인으로 태어나서 재즈 트럼펫에 재능이 있었지만
흑인 뮤지션이 지배적인 음악계에서 늘 자격지심을 겪어왔던 사람.
평생을 마약 중독에 빠져
천사의 목소리를 한 악마라는 별명을 가진 뮤지션 챗 베이커의 삶을 영화는
액자식 구성으로 보여준다.
약에 빠져 몰락한 중년의 챗 베이커가 자신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촬영에 참여하고
그 과정에서 만난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는 허구의 내러티브로
이 인물의 인생역정을 보여주는 식이다.
나쁜남자에게 끌린 지적이고 독립적인 배우 지망생 제인은 허구의 인물이다.
챗 베이커의 두번째 부인을 비롯해 그를 사랑했던 여성들을 섞어서 감독이 재탄생시킨 캐릭터라고 한다.
이름에서부터 영어권의 '홍길동'급인 무명씨에 해당하는 여성 이름 제인을 사용했다.
일약 꽃미남 재즈 스타로 떠올랐지만
진짜배기 재즈 뮤지션이 아니라는 비난에 시달리다 못해 약으로 도망친 챗 베이커를
중년의 에단 호크가 연기했다. 영화 초반에 앞니가 하나 없는 에단 호크의 모습에 관객은 움찔할 것이다.
실제 챗 베이커는 12살 때 돌에 맞는 사고로 앞니를 하나 잃었다고 한다.
트럼펫 연주자에게 윗 앞니가 하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점이지만
그는 재능과 부단한 연습으로 오히려 정확도는 다소 떨어지더라도 매력있는 주법을 개발해냈다고 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흑인의 소울이 부족하다고 하면 자신이 가진 꽃미남 외모와 가녀린 음색으로 노래까지 부르면서
챗 베이커는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다소 답답함을 느낄만한 지점은
영화 속의 누구도 챗 베이커에게 약을 끊으라고 강력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매니저나 애인의 눈 앞에서 마약 중독자들이 챗에게 다가와 마약파티에 초대해도
그들은 그저 알아서 하라, 너를 믿는다고만 한다.
영화적 장치일수도 있고(어떻게든 못하게 결박해서 막았다면 영화가 진행이 안됐겠죠)
실제 삶에서 영원히 약을 끊지 못하고 객사한 그의 삶을 표현하기 위한것일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이 굉장히 미국적인 리액션이라고 봤다.
나는 나쁜거라고 말했다. 그건 너에게 좋지 않다. 하지만 자신을 스스로 망치고 싶다면 그건 너의 선택이지.
그 후에 내가 떠나더라도 그건 네가 자초한 일이다.
이런 태도를 그의 벗들은 견지한다.
영화 후반부에 그가 결국 약의 유혹에 졌는지 아닌지 보여주지 않은 채로
감독은 챗 베이커의 감동적인 공연을 선사한다.
그가 결국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영화를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마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였지만
허구의 스토리라고 생각하고 봐도 충분히 매력적인 스토리 라인과 연기였다.
얼마나 우울한 삶이기에
그러려고 태어난 것처럼 살았다는 것인지
마음이 헛헛해지고 싶은 겨울밤에 잘 어울리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