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분석가라는 경계 밖으로 나와보니

하나의 역할을 내려놓자,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졌다.

by 퇴사한노랭이

회사에서는 역할의 경계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회사는 데이터 분석가의 경계 안에서만 움직이길 바랐다.
그렇게 나는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많은 판단과 기록을 쌓아왔다.
하지만 퇴사 후, 그 모든 것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환경에 서게 됐다.


데이터 분석가로 일하던 시절, 회사 안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비교적 명확했다.


데이터 분석가로서 어떤 커리어를 쌓아야 할지,

어떻게 하면 더 뾰족한 분석가가 될 수 있을지.


고민의 범위는 늘 그 안에 있었고, 그래서 더욱 데이터 분석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들은 조심스럽게 선을 긋는 연습을 해야 했다.


이건 개발에서 해야 하는 일 아닌가?

기획에서 정리해서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건 우리 역할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아무리 관심이 있더라도, 다른 직무의 선을 넘는 일에는 거리를 두는 게 오히려 '일을 잘 아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생기는 불가피한 교집합, 회색 영역이 생기면 누가 맡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분을 먼저 찾았고, 그렇게 확보한 리소스는 다시 데이터 분석이라는 본업에 쏟아야 했다.


프로젝트가 커질수록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한 기록은 더 중요해졌고, 그게 습관이 되면서 스스로도 점점 방어적인 태도를 갖게 됐다. 프로젝트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함이라 믿었고, 그게 일을 잘하는 것이라 착각했다.


그렇게 데이터 분석가라는 정체성은 분명해졌지만, 그 과정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퇴사 후, 혼자서 내 서비스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


이제는 모든 게 다 내 일이 되었다.


서비스에 문제가 생겨 고객이 불편함을 겪는다면, 더 이상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안정적인, 그리고 매력적인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디자인도, 개발도, 마케팅도, CS 정책도 결국 AI의 도움을 받아 직접 이해하고 판단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 내가 가장 자신 있던 데이터 분석은 고객이 실제로 서비스를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일단 서비스를 만들고, 고객들이 쓰게 만들고, 그다음에야 의미 있는 분석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업무의 선은 사라졌고, 역할의 경계도 흐려졌다.


혼자 만드는 서비스이다 보니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눈치를 보지 않고 '이건 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한 명분을 찾지 않아도 되는 것. 과거에는 데이터 분석가에서 시작된 정해진 방향으로 경계선을 조금씩 넓혀나가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는 미지의 세계에서 나의 정체성이 새롭게 피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데이터 분석, 기획, 개발, 마케팅, CS, 그리고 뭔가 모를 또 다른 정체성. 아직은 모든 역할이 서툴지만, 적어도 내 서비스 안에서는 그 모든 일들이 회색 영역 없이 하나의 책임으로 연결되어 있다.


부담스럽지만 싫지 않은 이 변화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조금 더 걸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