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줄만 알았던 신분제, 그런데...
이제 전공을 살린 일을 한번 해볼 때가 되었다. 그중에도 외국어를 활용할 만한 일을 찾다 보니 특허법인에서 해외 상표를 국내에 출원하고 국내 상표는 해외에 출원하는 직무가 있었다. 왠지 법학, 영어, 일본어 모두를 써먹을 기회인 것 같아 거기에 지원했다. 겉보기엔 내 이력과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직장이었기 때문에 바로 취업이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드디어 올림푸스의 분위기를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과연 변리사, 변호사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방을 갖고 있었고 일개 직원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의자를 건드려 가며 오가곤 했다. 심지어 중간에 사람을 더 뽑아 자리가 모자라게 되자, 대표 변리사는 책상과 파티션을 한 줄 더 주문해서 전체 직원들로 하여금 서로 바짝 당겨 앉도록 했다. 나를 비롯한 직원들은 너무 비좁아진 자리에 굴욕감을 느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런 직원들의 심기를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눈치가 없는 건지 변리사는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까르르 웃었다. 전반적으로 그들(변리사, 변호사들)은 직원들을 사람이 아니라 편하게 이용 가능한 소나 말쯤으로 여겼다. 일이 생기면 퇴근시간과 관계없이 신나는 얼굴로 직원을 불러 일감을 건네주곤 했다. 나중에는 그들의 신난 얼굴이 광기처럼 느껴졌다. 직원들은 하나같이 우울하고 피곤한 얼굴인데 왜 혼자 저렇게 신나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하지? 적어도 건조하게 주면 덜 싫을 것 같은데.
알고 보니 이 회사만큼 사람이 수시로 그만두고 새로 들어오는 곳도 없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고용주들이 고용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없어진 줄만 알았던 신분제도를 현대사회에서 실감할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바로 로펌이었다. 변호사와 변리사들은 자신들이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고귀한 존재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회사에 유독 그러한 신념을 강하게 가진 살찐 변호사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직원들이 꽉 차있는 사무실에서 정수기 물을 뜨며 우렁차게 “어~~ 힘들다!! 아오! 끙! 차!”하는 돼지 같은 소리를 냈으며 제 방에 들어갈 때는 문을 쾅쾅 닫고 들어가곤 했다. 심지어 여자 아이돌 노래를 시종일관 큰소리로 틀고 있어 사무실 전체에 울리게 했다. 사무실에 앉아있는 스무 명의 직원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결코 할 수 없는 짓임은 분명했다. 그는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편집장님과 정 반대의 인간이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일에 특히 남들보다 분개하는 경향이 있는데, 시대극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주인마님이 하녀에게 함부로 대하는 장면은 보기가 힘들다. 드라마 ‘추노’도 볼 수 없어서 첫 화부터 포기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격을 온전히 무시하는 모습이 너무 불쾌했다. 차라리 화를 내고 괴롭히는 것이 나았다. 그건 인격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 변호사나 추노에 나오는 양반들처럼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격을 완전히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모습은 나에게 큰 거부감과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자연히 나는 그 회사를 탈출할 방도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 헤드헌터에게서 연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