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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링 Sep 10. 2024

[등산 에세이] 치악산 이야기

"누가 구렁이를 죽였나."

서사를 잃어가는 시대지만, 여전히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산은 언제나 거기에 우뚝이 서서 오래된 이야기를 전합니다. 먼 조상님으로부터 가까운 조상님에게로, 그리고 마침내 우리에게까지. 원형이 보존된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좋은 이야기일수록 시대를 건너 오래도록 남고, 우리에게 전하는 숨겨진 의미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1월 강원도 원주의 치악산으로 설산 등반을 다녀왔습니다. 곳곳에 세워진 팻말은 치악산에 내려오는 흥미로운 전설들을 전하고 있었고, 이야기 수집을 좋아하는 저는 눈에 불을 켜고 담아왔습니다. 오늘은 그 중 하나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도 어릴 적 한 번쯤 들어보았을 전래동화, ‘은혜 갚은 꿩’ 이야기입니다.


1.

치악산의 옛 이름은 적악산이었다고 합니다. 빨간 단풍이 아름다워 붙은 이름이라네요. 한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러 이 적악산을 지날 때였습니다. 어디선가 짐승 울음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아보니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나무를 타고 올라 입을 쩍 벌리고 둥지에 있는 새끼 꿩들을 잡아먹으려는 중이었습니다. 측은지심이 들어서였을까요? 깜짝 놀란 선비는 얼른 활을 꺼내 구렁이의 머리를 쏘아 꿩을 구해줍니다. 그날 밤 산속에서 집 한 채를 발견한 선비는 하룻밤 묵기를 청하게 되는데요. 소복을 입은 여인이 나와 선비를 맞아 식사를 차려주고, 이부자리도 내줍니다. 후한 대접에 감사함을 표하고, 밤이 깊어 선비는 잠에 듭니다. 그런데 불현듯 차디찬 무언가 자신을 옥죄는 느낌과 숨이 막히는 답답함에 눈을 뜬 선비는 깜짝 놀랍니다. 거대한 구렁이가 그의 몸을 칭칭 감은 채 선비의 눈을 노려보며 독기 서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네놈이 오늘 낮에 쏘아 죽인 구렁이는 내 남편이다. 네가 내 남편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잡아먹어 이 원한을 풀어야겠다.” 


선비는 구렁이가 꿩을 잡아먹으려 해서 구해준 것일 뿐이니 용서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선비가 과거시험을 진지하게 준비했다면 전혀 설득력 없는 발언이었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렁이가 말하길,


“그렇다면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절에 매달린 종이 세 번 울린다면 살려주마.”


라고 합니다. 구렁이는 짐승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어 설득되고 만 것일까요? 그럴 리가 없죠. 대화가 통하는 천재 구렁인걸요. 구렁이가 언급한 종은 창가에 달아놓는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 커다란 범종이었습니다. 고작 바람에 흔들리는 정도로 울릴 리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 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절이었습니다. 선비는 좋다 말았습니다. 이 정도면 성취될 수 없는 불능조건과 다름없군요. 구렁이는 희망에 겨웠다 도로 절망에 빠진 선비를 보며 통쾌함을 느꼈을 법합니다.


그렇게 꼼짝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던 선비에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뎅---


쥐 죽은 듯 고요한 산골짜기에 종 울리는 소리가 은은하게 퍼져나갑니다. 이어진 뎅- 뎅- 종소리는 정확히 세 번 울렸고, 산골짜기는 다시 적막 속에 빠져듭니다. 이 순간만큼은 선비가 아무리 유학자라고 할지라도 독실한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 겁니다. 구렁이는 혀를 쯧쯧 차며 사라져 버리고, 선비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날이 밝아 선비는 호기심에 종을 찾아 나섭니다. 이윽고 발견한 절터에서 종각을 찾아 오르자, 종 아래에는 머리가 깨져 피를 흩뿌리고 죽어있는 꿩이 있었습니다. 새끼들을 구해준 선비의 은혜를 갚기 위해 자기 머리를 범종에 부딪쳐 종소리를 울리다 결국 죽고 만 것이죠. 선비는 눈물을 흘리며 꿩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 수습해 주었고, 이후로 산의 이름을 한자 '꿩 치' 자를 붙여 적악산에서 치악산이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야기 속 범종은 상원사에서 복원하여 지금껏 남아있습니다.


2.

여러분은 이 이야기에서 어떤 감상을 하셨나요? 말 못하는 짐승조차 보은하는데(구렁이는 말하니깐 예외), 하물며 인간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조금 꼬아서 보자면, 요즘 인간들은 은혜는커녕 원수로라도 안 갚으면 다행이다? 어미 꿩이 저렇게 가버렸는데 남은 새끼 꿩들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목숨 바쳐가면서까지 은혜를 갚는 게 맞을까? 꿩이 선비를 구할 방법은 정녕 목숨을 바치는 방법뿐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 물게 만드는 점이 이야기의 묘미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전설 속에서도 냉혹한 등가교환의 원칙을 마주하는 것 같아 서늘합니다. 남편 구렁이의 죽음은 선비의 죽음으로 갚아지는 것이고, 이를 대신하여 꿩이 목숨을 바침으로써 비로소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선비를 잡은 구렁이는 굳이 번거롭게 조건을 걸 필요도 없거니와, 종이 세 번 울려도 순순히 약속을 지킬 이유도 없는데 남편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놓아줘 버리지 않습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목숨에는 목숨값으로. 어쩌면 구렁이는 선비를 만나기 전에 꿩을 찾아가서 꿩과 선비의 목숨 양자택일을 강요함으로써, 어떤 결과가 나오든 자신은 아쉬운 것 없는 상황을 유도했을지도 모릅니다. 누가 죽든 남편의 목숨값은 대체하길 마련이고, 달콤한 복수는 성공하기 때문이죠. 결국 구렁이의 큰 그림이었다는 찜찜한 결론이 내려진 것 같습니다.


꿩 이야기는 상원사 범종과도 연관되니 불교적 서사를 담을 여지도 있다고 봅니다(선비의 목숨을 살리는 조건이 '갑자기 소나기가 내릴 것', '해가 더 일찍 뜰 것'도 아니고, 굳이 '빈 절의 종이 울릴 것'이잖습니까. 이 이야기를 처음 만들어 전한 것은 스님아닐까요?!). 이 관점에서 앞서 언급한 생각을 조금 더 확장한다면, 불교의 '생명 존중 사상'까지도 이를 수 있겠습니다. 불교에서 모든 생명은 윤회한다고 봅니다. 이전 생에 무엇이었을지, 다음 생에 무엇으로 태어날지 모르기에 모든 생명은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하죠. 선비는 왜 구렁이를 죽였을까요? 사실 구렁이가 새끼 꿩을 잡아먹는 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닌 자연현상에 불과합니다.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손이 먼저 움직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기 손으로 생명을 해하는 데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 선비는 은연중에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징그러운 구렁이는 꿩에 비하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편향된 인간의 관점에서 생명의 경중을 경솔하게 판단하여 버린 것은 아닐까요? 비록 부처님 같은 대자대비를 펼치지는 못했지만, 아내 구렁이가 선비에게 말하고자 한 바는 결국, 


“네 목숨도 꿩의 목숨도 내 입장에서는 평등해.”


라는 일갈이 아니었을까요?


3.

저는 (다행히) 못 봤습니다만 치악산에는 실제로 뱀이 많다고 합니다. 덕분에 뱀과 관련한 이야기가 오늘까지 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밖에도 치악산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남아있습니다. 쥐 떼가 넘어갔다는 쥐너미재 이야기, 산신령의 지시로 비로봉 정상에 세 개의 미륵불탑을 쌓아 올린 1960년대 제과점 주인장의 이야기(이것도 오백 년 후에는 전설처럼 전해지겠죠?).. 다른 이야기는 기회 될 때 다뤄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선비였다면 꿩을 구했을까요? 아니면 그냥 지나쳤을까요?

구렁이가 선비를 살려준 이유에 관하여 다른 해석이 있으신가요?

공유할 만한 다른 산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계신가요?


이번 주말, 집 가까이 산이 있다면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채록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산이 숨겨둔 이야기를 맞이하면, 늘 지나치던 산도 달리 보일 수 있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선물은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때보다 각별하게 다가올 거예요.


*이 글은 필자가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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