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건넨 식혜 한 그릇"
1.
햇빛이 가장 따가운 시간에 형님과 나는 산 정상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음료수 세 통을 이미 소진한 우리에겐 까마득한 하산길만이 아득히도 남아 있었다. 북한산이야 자주 오른 산이니깐, 쉽게 생각하고선 마실 거리를 딱 평소만큼만 준비한 게 패인이었다. 운 나쁘게도 그날의 산은 시원한 산바람 한 줄기 허락하지 않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온몸 흥건히 땀에 저는 8월의 한여름이었다. 갈수록 발걸음은 무겁고 배낭은 부담스러웠다. 바싹 마른 목은 침 한 방울 허투루 넘기기를 아까워 했다. 수시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지도를 확인했다. GPS가 고장이라도 난 양, 산 언저리까지 거리는 원망스럽게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때 홀연히 나타난 암자를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이란!
2.
얼마를 주고서라도 물 한 모금 구할 의향이 우리에겐 충만했다. 허둥지둥 들어가 건넨 합장인사에 공손히 합장으로 맞절한 보살님은 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놋그릇에 식혜 한 잔을 권했다. 인심 좋게도 국자 한 가득, 그릇 표면을 찰랑이는 식혜 한 그릇. 부끄럽지만 보살님이 국자를 퍼올리는 순간부터 나는 도무지 참기 어려웠다. 빨리 그 그릇 내 손에 쥐어주오, 갈앙하는 말, 말, 말소리가 목을 타고 올라와 여기저기 거칠게 휘젓고 다녔다[1]. 불경스럽게도 터져나오려는 그 말을 사회적 자아가, 슈퍼에고가 간신히 억제했고, 나는 그저 입술을 씰룩일 뿐이었다.
이윽고 두 손으로 그릇을 받든 순간 벌써부터 한 입 머금은 듯한 냉기가 손끝에서 팔을 타고 어깨까지 짜릿하게 흘러올랐다. 떨리는 내 입술에 식혜가, 아니 성수가, 아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언가 닿고야 말았다. 물을 이루고 있는 원자와 입술을 이룬 원자 간의 충돌. 그리고 빅뱅.
걸쭉하지 않고 다소 밋밋한 당도를 유지하고 있는 담백한 식혜였다. 그래서 오히려 목넘김이 좋았다. 평소 즐기지 않는 음료였지만, 그 순간 식혜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생명수였다. 글을 쓰는 지금껏 잊을 수 없다. 지상으로 떨어진 천상의 옥로가 혀를 적시고, 입속을 휘돌아 목구멍을 건너 온몸으로 퍼져가며, 혈관을 타고 구석구석 파랗게 물들이는 것만 같이 생생한 그 느낌을. 아아, 이런 기분 다시 경험하기 오래도록 힘드리라.
3.
형님과 나는 서로를 바라봤다. 태초의 빛을 목도한 반짝이는 두 눈이 교차하고, 이내 지평선을 그릴만큼 찢어지는 함박미소가 얼굴 가득 떠올랐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형님의 얼굴이 곧 내 얼굴이리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큰 스님이 지나가는 등산객들 쉬고 가시라고 마련한 거랍니다."
기뻐하는 등산객 얼굴만 봐도 행복하다는 보살님을 보며 혹시 부처님이 아니실까 갸웃거렸다. 감사를 표할 방법이 더는 떠오르지 않아 나무아미타불만 조용히 읊조릴 밖에[2]. 나도 누군가의 부처님이 되는 순간이 올 수 있을까?
보살님 덕에 빈 병에 물 한 통 채워 넣고 내려왔지만, 딱히 마실 일은 없었다. 암자를 뒤로 한 하산길은 약사여래께서 손잡고 구름이라도 태워준 듯 가벼웠다.
각주
[1] 갈앙하다: 1) 매우 동경하고 사모하다. 2) 목마른 사람이 물을 생각하듯 깊이 불도(佛道)를 숭상하다. (네이버 표준국어대사전)
[2] "아미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 삼국시대 신라의 원효대사가 민중들에게 전파하기 쉬운 염불로 만들어서 퍼뜨린 것으로 알려졌다. / "(원효가)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舞)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일연,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